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
H. Ridderbos
이 주제는 문제의 성격상 이전에 토의되었던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와 밀접하게 연관된 주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관점에서 본 세상 속에서의 우리의 일상생활에 대하여 고찰해 보려는 의도의 글이므로, 우리를 어떤 실제적인 적용으로 이끌어 간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다양한 개념들이 오늘날 이 세상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하여 매우 다양한 의견으로 반응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한 가지 예로 하나님의 나라를 새로운 공동체적 사회적 질서로서 간주하면, 그리스도인은 사회 속에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일에 공헌하기 위하여 주저함이 없이 삶의 모든 흐름에 뛰어들 것이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의 나라가 순전히 미래의 일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인은 현재의 삶을 훨씬 덜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며, 현실의 삶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방해가 된다고 여길 것이다. 교회사를 포함하여 모든 역사는 이와 같이 세상을 회피하거나 세상 속의 매력적인 것과 유혹하는 것을 가능한 한 절제함으로써 경건을 추구하여 왔던 숱한 분파와 운동으로 가득차 있다. 경건의 개념도 또한 다른데, 그 개념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를 내적인 생활에서만 찾으려고 하고, 따라서 가능한 한 외부의 영향력으로부터 내부의 생활을 보호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를 가진 신자들은 세상으로 나갈 수도 없고 나아가려고도 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은 세상이 우리를 유혹함으로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될 것을 훔쳐간다고 함으로써 세상과 그 유혹에 대하여 경고한다. 개혁주의 형태의 경건, 특히 칼빈주의적 경건은 이와는 다른 노선을 취하여 왔다. 그것은 가능한 한 세상으로부터 뒷걸음질 하는데 그 힘을 쏟지 않고, 그 반대로 그리스도의 왕권을 바로 그 세상에서 인정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종종 그러한 노력은 이 현세를 그리스도께 복종시키려는 비젼을 가지고 수행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실례를 제네바에서의 칼빈주의자들의 신정정치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또한 후대에 그에 대한 향수로서 칼빈주의의 부흥을 기반으로하여 유럽 문화의 재기독교화를 이야기하고 있는 카이퍼의 사역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몇가지 예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사상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스타일과 형태에 대하여 얼마나 지배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가를 지적해 준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의 삶에 관하여 이야기되어질 모든 내용과,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에 관하여 이미 전개하였던 생각들 사이에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바라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러한 이중적인 관점에서 자연적으로 전면에 등장하는 주제는, 첫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둘째 그리스도인의 거룩에 관하여-삶의 전부를 하나님께 예배로 헌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선포와 가장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미 이 시대에 시작되었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의 힘이 이 세상으로 흘러 들어왔으므로,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그를 믿는 자들도 또한 새롭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자유의 상황 속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자유는 위험한 사상이다. 자유는 휴머니즘의 위대한 교훈이기도 하며 계몽주의와 현대 철학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그러한 사상들에서 자유는 인간의 자율에 대한 묘사로서, 즉 자기결정의 자유로서 기능한다.
그러나 신약성서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여기에서의 의미는 죄로부터의 자유이며, 죄의 책임과 세력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 모든 선물들과 가능한 수단들로써 만들어 주신 생명을 받는 자유이며, 인간의 교훈 아래로 스스로 다시 이끌려 들어가기를 허용하지 않는 자유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모든 악과 죄로 가득찬 지배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 주셨으므료 이 세상에서 자유로운 양심을 가지고 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바울은 자유에 관하여 말하기를,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골로새서 2장 20-22절)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또한 신자의 삶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의 왕국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된다. 신자들은 어두움의 세력으로부터 건짐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골로새서 1장 13절). 그리고 이 이유 때문에 그들은 더 이상 "세상의 초등학문", 즉 미신들과 두려워하는 마음과 스스로 금욕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들을 배척하는 사람들의 자의적인 숭배에 굴복하지 않는다. 바울은 이러한 일들에 지혜나 경건의 외관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지만, 이 모든 일들을 자의적인 숭배라고 부른다.(골로새서 2장 23절)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죽었다. 즉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이 모든 공포와 제한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이 선하며 어떤 것도 배격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께서 그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의해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지도록 창조하셨던 결혼과 음식 즐기는 것을 금하는 사람들에 반대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거룩하게 되기 때문이다.(디모데 전서 4장 4-5절) 그리고 그가 "깨끗한 자에게는 오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디도서 1장 15절)고 말할 때에도 바로 똑같은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은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라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않는 것, 그리스도와 교제에 있지 않은 것, 그리고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은 죄이기 때문이다.(로마서 14장 14절, 23절), 그리하여 바울은 세상에 관하여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관점으로 세상에서의 삶에 대하여 접근할 것이다. 그것은 또한 다른 관점, 즉 왕국의 관점으로 접근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악마들의 세력으로부터 떼어 내신다. 그의 모든 기적은 이것에 대한 표적이다. 그가 가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악한 세력들이 물러나고, 삶은 다시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돌려진다. 신약성서에서 질병은 사악한 영들에 기인한 것으로 되어 있고, 악마는 이 세상 왕국들의 지배자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 마력을 깨뜨리시고 그의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신다. 그는 제자들에게 참으로 이 세상이 마귀의 것이 아니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가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땅"은 그리스도와 그의 왕국의 도래를 통하여 다시금 신자들에게 열려졌다. 모든 족속들이 주님의 주님의 구속에 다시금 포함되었을 뿐만 아니라, 삶의 전부가 그 모든 차원에서 그 구속에 포함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교회에 대한 세상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놀랄만큼 대담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라"(고린도전서 3장 21-23절)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모든 고려들이 그 "출발점"을 찾아야만 하는 곳이 바로 여기라고 나는 확신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을 신자에게 "닫아"버리지 않고 반대로 "열어"준다. 그것은 놀랄만한 주제이다. (그리고 또한 다른 방향을 지시하는 진술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근본적인 출발점으로서 그것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현실적인 실재로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와 관계한다. 동시에 현재의 세계와 그리스도의 왕국은 일치하지 않으며, 이 현재의 삶의 어떤 영역도 하나님의 나라와 결코 동일시될 수 없다는 사실을 덧붙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았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의 씨앗으로, 영적인 통치로 임해 왔으며, 그러므로 세상에서의 삶을 받아들이는 것은 또한 단지 신앙의 문제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경적인 개념과 "사회 복음"간의 차이이다. 사회복음은 하나님의 나라를 사회적 공동체적 관계의 향상과 동일시한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에 퍼지는 누룩과 세상의 빛과 소금을 이야기하면서 그것들을 세상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이러한 형태로 이 세상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바꾸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으로 우리는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을 고찰하여야 한다. 교회는 이 세상에 "속한"것은 아니지만, 틀림없이 이 세상 "안에"있다. 그리고 교회는,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국이 배척될 수도 있고 신앙도 위협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때가 찬 경륜 속에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셨다.(에베소서 1장 10절)
그러므로 "교회의 소명"은 단순히 선교를 수행하고 영혼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이끌어 오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소명은 어떤 의미에 있어서 창조한 만물에 있다. 그것은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며 사고 파는,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자유롭게 참여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자유 안에는 그리스도인의 "사명"도 있다는 사실을 또한 의미한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왕국과 사회생활과 정치, 그리고 과학적 활동 사이의 연결이 있다. 그 기반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있다. 이러한 영역들은 신자들에게 금지된 영역이 아니다. 이교도에게는 자연의 영역이 신들과 정령들에 의하여 점령된 영토이다. 그러므로 이교도는 그의 미신에 의하여 여러 가지 면에서, 예를 들어 농경의 발전에 있어서 방해를 받는다. 그리고 힌두교와 불교를 믿는 사람들에게서는 다른 금기들이 존재하는데, 그들의 먹고 마시고 일하고 사는 자유가 그 금기에 의하여 자유가 여러가지 면에서 제한되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자연의 세계를 인간에게 회복시켜 주며, 인간을 더 이상 자연의 세력들에 복종하지 않게 하고 그 대신에 그것들을 지배하게 해 준다는 의미에서도 악마들을 쫓아 내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와 동일한 자유가 다른 사람에 대한 한 사람의 권리들을 회복시켜 준다. 그 자유는 우선 노예를 그의 주인에 대하여 자유롭게 하며, 여성들에게 명예로운 지위를 회복해주고 시민들에게 국가 속에서의 권리들을 부여한다.
서방세계에서 이 자유는 종종 그리스도 밖에서 확립되어 왔다. 그것은 타락하여서 세속화하는 강력한 세력이 되었고, 그럼으로써 인간을 지배하는 새로운 세력들을 불러 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 사회생활이나 정치 생활에서도 - 선포하는 것이 하나의 혁명, 그 취지를 거의 과장할 수 없는 혁명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이 원칙은 온 덩어리에 퍼지는 누룩의 힘과, 비록 눈에는 하찮은 것으로 보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그 가지 그늘 아래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 있는 나무로 자라나는 겨자씨의 힘을 계속하여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향력의 범위가 영혼의 생활에 한정되어야 한다거나, 참된 경건이 교회의 벽 안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이 말은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 과학자가 자연의 비밀들을 풀거나 여러 민족들의 역사를 추적하거나 경제학의 문제들을 풀 수 있는 특별한 지식을 갖추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우선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 즉 그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해방된 사람으로서 과학의 세계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었다는 것과 따라서 그의 연구와 조사에 있어서도 인간의 교훈과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땅이 그 모든 충만함과 더불어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거기에서도 알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나는 여기에서 실제로 폭을 매우 넓게 잡았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로 성경 자체의 폭보다는 넓지 않는데, 성경은 반복하여서 만유의 머리로서 그리스도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또한 바로 그가 만유의 주님이시므로 그의 교회로 하여금 공유하도록 하신 충만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나의 이 점과 관련하여 신자가 이 세상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방법은 신앙의 법칙이며, 그 신앙은 항상 커다란 반대에 부딪힐 것이라는 사실을 잠시라도 잊어버리기를 원치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의 자유에서 발견된 우리의 출발점을 파괴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5장 1절). 이 많은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에 관한 우리의 생각을 지도하고 있다.
거 룩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근본적인 주제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자유의 불가분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또한 바로 그 중심적인 것으로서 거룩에 대한 관점, 즉 삶을 그리스도의 주권에 복종시키는 것, 모든 생활을 하나님께 바쳐드리는 것에 대한 관점이 있다. 하늘과 땅의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집중점을 발견한다.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함께 존재한다. 왜냐하면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리스도에게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머리이신 그리스도 아래에서 하나님과 소원하게된 - 이로 인하여 생명이 부서지고 허물어 진다. - 생명을 다시 모아서 하나님과 화해시키려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의 성화를 의미한다. 바울은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였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예배니라"(로마서 12장 1절).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삶을 위한 계율들이 뒤따른다.(로마서 12, 13, 14장) 여기서 희생과 예배 - 성화 - 는 성전 바깥으로 나오게 된다. 새로운 예배는 그 자신의 삶에 있어서 일요일이나 교회에 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예배는 교회 구성원들의 나날의 자연스런 생활 속에 있다. 그것은 결혼 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 속에도 있으며, 정부에 대한 관계 속에도 있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웃과의 교류 속에도 있다. 왜냐하면 신자들은 그들이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몸은 모든 국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지상적인 존재 양식이다.
여기에서 다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일의 포괄적인 중요성에 부딪히게 되는데, 그러나 이제는 예배와 거룩이라는 관점 아래에서 그것을 대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강림은 새로운 넓이를 만들었고 또한 새로운 기록도 만들었다. 삶의 성화는 더 이상 거룩한 장소들이나 거룩한 절기에 제한받지 않는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그 나라의 영향권 밖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세속적인 영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중립적인 영역도 전혀 없다. "자유는 바로 그 거룩에 있다."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게 됨으로 어떤 것도 배격될 수 없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유와 거룩은 서로 상충하지 않고 함께 간다. 두 사상은 호혜적으로 서로를 정의해준다. 자유 덕분에, 그리스도 덕분에 예배와 거룩은 세상의 삶의 폭만큼 넓어졌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강한 자의 집을 부수고 들어오셨기 때문이다. 이것을 다른 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자유는 거룩에 의지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죽었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는 사실에 있는데, 그 말은 우리가 세상이 지배와 그 세력들로부터 구출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 두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협소함과 제한, 억제와는 반대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좁지 않고 넓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또한 방종과 자율 혹은 중립(만약 이것이 존재한다면)에 대해서도 또한 반대한다. 하나님의 나라와의 관련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부단히 자유와 거룩을 요구하고 있으며, 그 원칙에 있어서 이 두 자질들에 의하여 특징지워진다.
이제 세상에서 삶을 "거룩하게 한다"는 생각의 내용과 그 중요성을 더 깊이 정의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당연히 제기한다. 그것은 성경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써 가장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압축된 형태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린도전서 10장 31절),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 가운데서 우리는 "주님의 것"이라고 말해 진다. 그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 가운데서 우리가 항상 신앙적인 형태를 지키겠다거나 혹은 신앙적인 언어로 이야기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요점은 예배가 성전 바깥으로 이끌어져 나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공적인 생활을 설교단이나 교회의 좌석으로 만드는데 있는 것도 아니고, 교회의 분위기를 생활의 모든 분야에 도입하는데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가장 내적인 범위(교회)를 보다 넓은 영역(세상)과 동일시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나라의 보다 넓은 영역에 들어가자마자,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있어서 삶의 전부를 거룩하게 한다는 이 말의 본질에 관한 어렵고도 매혹적인 모든 종류의 질문들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개인적인 삶뿐만 아니라 공적인 생활의 영역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스도께서 만물의 통일점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인가? 신앙과 과학, 기독교와 정치학, 교회와 사회질서간의 관계는 무엇인가? 우리는 "기독교적"과학과 "기독교적" 정치학에 대하여 여기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가? 만약 이야기할 수 있다면, 이것은 어디에 근거해 있는 것인가? 우리가 배워왔듯이 성경에 있어서나 역사에 있어서나 모두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서 특정한 사회나 정치질서와 동일시되지 않는다. 비록 그 나라는 모든 것을 포괄하며 모든 것에 미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는 씨와 누룩의 세력처럼 하나의 감추어진 세력이다. 삶의 다양한 분야에서 그 누룩은 무엇이며, 그 씨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 외에도 또다른 질문들이 여기에서 제기된다. "이"세상이 계속되는 한 세상을 기독교화하려는 실제적인 도전에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안티테제와 그리스도에 대한 적의가, 이 세상의 질서가 공격받을 때 그 진정하고 화해할 수 없는 성격으로 드러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런 까닭에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선포하는 것은 너무 나이브하고 너무 주제넘은 짓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데 실제로 자유가 있는지에 대하여, 그리고 거룩이 이 세상으로부터 스스로 물러나는데 있지 않다는 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혹은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면 거룩은 생활의 훨씬 더 좁은 영역, 즉 교회의 영역과 그리스도인의 교제의 영역, 가족의 영역으로 한정되지 않을 수 있을까 등등에 대하여 미심쩍게 여기는 까닭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의심할 여지없이 이런 상황은 반복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어떤 비판적인 유보조건을 갖다 붙인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자유와 거룩 간의 이러한 관계에 대하여 깊게 서술하면서 몇가지 아주 명료한 진술을 하고 있다. 그는 자유에 관한 주제넘은 개념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그러한 주제넘은 어떤 사람이 스스로 정확한 인식과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도 생겨난다.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도 그노시스라고 불렸던 자신들의 지식을 스스로 자랑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우상들보다 낫다고 인식하였으며, 그들 자신들은 원하는 곳으로 가든지 어디에 남아 있던지 자유롭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원하는 곳으로 가든지 어디에 남아 있던지 자유롭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근거에 대하여 확신하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 그러므로 세상의 삶에 대하여 모든 종류의 걱정과 망설임을 나타내 보였던 "약한 자들"에 대하여 어느 정도 경멸감을 가지고 멸시하였던 것이다. 바울 역시 이 논쟁에 있어서는 원칙적으로 지식과 자유라는 입장에 서 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 무엇을 덧붙인다. "모든 것이 나에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고린도 전서 6장 12절), 그리고 동일한 관계를 따라 더 나아가서 바울은 경고하기를, 모든 우상을 다 던져 버렸던 사람도 한편으로는 우상의 신전에 앉음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테이블에 참가함으로써 새로이 악마들의 세력에 자신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막간을 이용하여 이러한 말씀들의 빛 아래에서 현재 우리 자신의 위치를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칼빈주의적 유산 덕택으로 우리는 이 자유와 지식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경건주의의 소심함을 치워 버렸다. 그리고 우리는 영감을 받은 선배들의 지도하에 정치에서 학계에서 그리고 사회생활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유 안에 서려는 도전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사명을 받아들이려는 도전을 시작하였다. 교회와 함께 시작하였지만 우리는 또한 그 왕국의 보다 넓은 영역을 발견하였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보다 주저하면서 행동하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그리고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며 만지지도 말라는 새로운 법을 가진 경건주의에 이끌리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어느 정도 연민을 가지고 경멸하는 일이 우리들에게도 일어났다! 그리고 누가 과연 주제넘음의 위협과 한계를 모르는 자유의 위협을 항상 피해왔다고 자신있게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참으로, 우리의 개혁된 삶이 비판의 지점, 즉 자유가 거룩에 의하여 더 이상 제한되지 않거나 혹은 불충분하게 한정됨으로 말미암아 주제넘음과 방종으로 변해버리는 지점에 지나치게 근접하여 있지는 않는지 혹은 벌써 그 비판점을 지나쳐 버리지는 않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그렇지만 한 질병은 결코 다른 질병으로 치료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만약 우리가 우리의 "지식"과 "자유"를 가지고서 어떤 경고를 받을만한 자리에 왔다면, 그러한 경고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자유를 위협하거나 부정하는 어떤 새로운 멍에를 지게하는 것이 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것이 가하나 그리스도인의 삶과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서 모든 것이 다 유익하지 않다는 사실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러한 경고는 이제 더 이상 우리가 스스로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를 빼앗아 가버리는 세력, 우리를 우상들의 지배 아래로 다시 데려가는 세력 아래에로 이끌려 들어가기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 가운데 있어야 한다.
여기에서 명백하게 우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한계와 거룩의 중요성을 보게 된다. 경계는 자유가 새로운 속박에 의해 위협받는 지점에 놓여 있다. 왜냐하면 그런 위협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함에 의하여서도 아직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 강연에서 나는 명백한 파라독스에 관하여 말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권세들을 정복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사악함에 대한 투쟁을 수행하는데 참여하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기도에서 "당신의 나라가 임하옵시며,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계속하여야 한다. 이 상황은 파라독스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자유, 세상에서의 우리의 자유는 보장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더 이상 악마들의 힘 아래에서 살도록 강요받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이 자유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토대를 잃어버리고 세속화된 자유로 바뀌게 되면, 우리는 인간적인 유혹보다도 그 자유에 더 희생당하기 쉽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바울이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인에서 정복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정사와 권세들로 여전히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며,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에 별이나 사막 혹은 지구 주의에 살고 있는 있는 악한 정령들이 거주하고 있다는 이교도의 미신에 또 다시 쉽게 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대기를 횡단하거나 달이나 별로 여행을 가는 것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며 그 정령들에게 도전하게 되는 것이라는 말은 믿지 않는다. 그러한 "세속화" 과학의 진보를 통한 자연과 우주에 대한 비신화화는, 비록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경험하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의 열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비신화화가 이제는 더 이상 정사와 권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며, 또한 과학이 그것들로부터 스스로 자유롭게 된 것도 아니다. 바로 그 과학이 인간 이성의 자율을 설교할 때, 그러한 권세들은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다. 과학이 더 이상 그 한계들을 인정하지 않을 때, 어떠한 방식으로든 인간의 인식과 인간의 존재, 그 자유를 만물의 척도로 삼는 원칙에 의하여 과학이 지탱되거나 이끌려 갈 때, 그리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그 주권을 빼앗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통일하시는 중심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부인하게 될 때, 정사와 권세들은 명백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그 이유 때문에 바로 이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커다란 위협이 있을 뿐만 아니라 거대한 소망과 도전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소명이란, 그리스도인은 이 위험스러운 과학과 전혀 관계해서는 안된다는 식의 것일 수는 없다. 반대로 그리스도인은 여기에서도 역시 삶을 거룩하게 하는 것에 목적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 말은 그리스도인 과학자의 과학 활동이 세상과는 별도로 그 자신의 생활을 영위하여야 한다거나 혹은 모든 연구에서 새롭게 시작하여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 대신에 그리스도인의 과학 활동은 악마들에 대한 전투이며 상대적인 것의 절대화에 반대하는 투쟁이며 인간을 신격화하는 것에 대항하는 전쟁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지배하는 통일의 중심을 피조된 세계의 한 부분에서 찾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서 찾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만물이 그 안에서, 그를 향하여 창조되었으며, 또한 그를 통하여 모든 것이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교회의 성숙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충만한 지식과 도래와 그리스도의 충만한 분량을 표준으로 삼는 것 등에 대한 바울의 언급은 특별히 적절한 것이다. 나는 사도가 여기서,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학식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신자들이 세상에서 널리 퍼트려야 하는 소금과 누룩과 빛이 개인적인 관계들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고 진정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충만은 만물을 포괄하고 있으므로, 그것은 또한 학식의 극히 중요하고 커다란 문제들과도 관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권세들의 폭정이 여기에서는 매우 근본적인 경향을 나타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목표로 여기에서 매우 거대하다. 그리고 속박이 그렇게 단단하기 때문에 삶의 거룩도 여기에서 상당히 필요하다.
한 강연의 짧은 범위 안에서 인간 생활의 전 영역을 개관하고 그 곳에서 그리스도의 왕국과의 관계들을 추적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들의 실제는 사회 생활이나 정치, 경제의 영역(돈, 번영)에서, 정립적으로 혹은 대립적으로, 어느 정도 우리에게 명백해질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 성장과 인간 경험의 빛 아래에서 - 이 영역들을 지배하며, 수많은 방법으로 인간성을 얽매고 있는 노예화시키는 폭군적인 영향력을 발견한다. 그러므로 다음의 말이 여기에서 핵심이다. : "모든 것이 나에게 가하지만, 나는 어떤 세력 아래에도 이끌려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제일되는 이 교훈은, 인간과 사회에 대한 보다 커다란 결정들이 내려지는 삶의 영역들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거룩을 실행하려고 노력할 때에,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치품의 사용이나 음주, 흡연의 문제에 관계할 뿐만 아니라 훨씬 더 깊고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슬픈 이야기지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와 세상에서의 삶 사이의 "이러한" 관련에 대하여 너무나 이해가 적다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들은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는 말을 너무나 자주 충만한 삶을 외면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 대하여 죽는다"는 말의 의미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권세들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며, 온 덩어리를 부풀리며 작은 씨앗에서부터 사람들이 그늘을 찾는 나무로 자라는 그리스도의 자유케하는 능력을 기반으로 하여 이러한 권세들에 대항하는 신앙고백이며 실천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이다. 이 씨앗이 뿌려져야 하는 들판은 영혼과 교회뿐만 아니라 세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공동 활동
마지막으로 또 다른 한가지 요점에 대하여 논의하고 싶다. 여기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관한 나의 견해를 밝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이 과업을 성취하여야 하는 방법의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이것은 개혁주의 공동체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아 온 "그리스도인의 조직"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이 문제는 서로 다른 개혁주의 교회들의 총회에서 반복적으로 논의되었다. 그리고 그랜드 래피즈가 개혁주의 기독교 총회는 이 문제에 관한 광범위한 권고를 하였다.
내가 이 모든 것들을 다시금 논의할 필요는 없다. 그 대신에 나는 이 문제를 우리의 주제, 즉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와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에서 우리의 삶과의 관계라는 관점 가운데서 살펴보려고 한다. 이러한 시각 하에서 나는 다음의 요청들을 지적하고자 한다.
1. 세상에서 우리의 삶에 관한 개념들은 하나님 나라의 내적 영역인 교회 내에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보다 더 넓은 영역인 세상에서 취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신자들의 삶은 실로 교회를 통하여 교회 안에서 양육되고 자극을 받지만, 이 삶 자체는 교회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 아니라 "세속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 반대로 교회를 세상으로 생각하여서도 안된다. 그러므로 교회도 또한 직책을 맡은 사람이나 그 집회를 통하여 모든 종류의 세상적인 관심사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직책을 맡은 사람들은 그들의 사명과 특별한 봉사를 교회 안에서 맡은 것이지 세상 가운데서 맡은 것이 아니다. 그들이 하여야 할 일은 세상 속에서 교회를 장성하게 하고, 교회로 하여금 길이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볼 수 있게 하고, 또한 서로 봉사하도록 가르쳐 주고, 세상에서 그 받은 바 소명을 성취하도록 갖추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교회로부터 자극을 받고, 각성하며, 세상에서의 그들의 과업과 관련하여 교훈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을 자기의 우위권 아래 두려고 하거나(중세시대처럼) 세상에서의 모든 종류의 기독교인의 행동에 대하여 금지 조치를 내리려는 시도를 하지 말아야 한다. 보다 넓은 영역과 관계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이지 교회가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계들을 고려하는 것은 여러가지 다양한 관점에서 보아도 상당히 중요하다.
2.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책임이 공동의 은사이며 공동의 책임이라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것은 또한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적용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그것이 아무리 자주 개인주의적인 원칙에 따라 이용되어 왔을지라도 결코 개인주의적 원칙이 아니다. 그 반대로 그리스도의 사역과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나온 모든 것은 우선적으로 공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자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이다. 그 말은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그리스도의 "몸"과 함께,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에게 주어졌고, 따라서 공동체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나의 의견으로는 바로 여기가 신자들이 세상으로 들어가는데 있어서의 요점이다. 그것은 연합, 즉 함께 나아가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연합의 방법과 조직은 부차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한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러한 조직과 방법이 없이 지낸다는 것은 쉽지 않다. 적절한 조직적 연합이 없이는 여러가지 점에서 우리의 공동책임을 감당할 수 없다. 문제의 성격상 이것은 또한 우리가 그 안에서 일하고 몸을 던져야 할 활동의 영역에 의존하고 있다. 학식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정치의 영역에서, 사회관계들에서 우리는 어렵게 우리의 공동적인 기독교인이 책임을 맡을 수 있으며, 서로간에 조직적으로 연합하지 않고서도 그것을 발전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그러한 그리스도인의 조직 속에서 기능하는 원칙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반정립"원칙 만인 것이 아니며, 혹은 심지어 그 원칙이 최우선적인 것도 아니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의 정립 원칙, 즉 그리스도의 몸에 결합한다는 원칙이 우선된다. 그러한 응집은 우리가 가장 내적인 영역(교회)을 뛰어 넘을 때에도 역시 존재한다. 내 생각에는 그것이 흔히 논란이 되는, 제도로서의 교회와 유기체로서의 교회 사이의 카이퍼의 구분 속에 있는 진리인 것 같다. 비록 우리가 세상에서 교회를 중시함에 있어서 성직주의를 전심으로 거부하지만, 이것이 교회 구성원의 성숙은 공동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변개하지는 않는다.
3. 반대로, 이 세상에서 공동으로 들어가는 것과 그리스도인의 조직이, 우리가 세상 속에 하나의 작은 세상을 만들거나 국가 내에 국가를 건설하거나 혹은 비그리스도인 세상에 그리스도인의 고립된 장소를 건설하려고 의도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 시대의 하나님 나라의 성격과 충돌할 것이기 때문이다. : 씨앗이 뿌리워져야 할 들판은 세상이며, 하나님의 나라는 전 덩어리를 부풀리는 누룩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의 단체의 행동을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의 활동이 세상에 대하여 근본적으로 열려있다는 것이며, 최소한 열려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사실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활동은 그 자체로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그 행동이 삶 전체를 드리는 예배에 소용되게 한다는 점이다. 세력을 끌어 모으는 일에서 항상 자기절대화의 위협과 결실을 맺지 못하게 될 위협 그리고 외인들(그 밖에 있는 사람들)을 섬기는 데 부적합하게 될 위협이 상존하고 있다. 여기에 세상에서의 삶에 대한 종교개혁의 개념과 낡은 아나뱁티스트적 개념 간의 경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분리주의적 경향들은 스스로 종교개혁의 관점에 서 있고자 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또한 관찰될 수 있다. 예들 들어 한 사람이 자신이 가정된 기독교적 관점에 의하여 사실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실제들로부터 그 자신을 분리시키며, 자기의 기독교적 보루 혹은 조직의 기반 위에서 세상을 공격하기 위하여 이러한 보루나 조직에 자신을 가두어 버릴 때가 바로 그 경우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성격과 충돌한다. 그것은 또한 이 세상에서 정치적 혹은 사회적 관계나 학식의 권위에 대하여 정당하게 항의할 수 있는 적의 종말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기독교적 정치질서 혹은 사회질서를 옹호한다는 것은 결코 정치적 실제로부터 "움츠러드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정확히 말해서 그 실제 "속으로"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사회적 혹은 학문적 활동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조직을 고려함에 있어서는, 그 조직이 기독교적인가라는 질문뿐만 아니라 그것이 또한 정치적이며 사회적이며 학문적인가라는 물음이 제기되어야만 한다. "기독교적"이라는 형용사는 그 뒤에 나오는 명사의 실질적인 내용을 삼켜버릴 수 없다. 만약 그리스도인의 조직이 활동하여야 할 실제적인 영역의 바깥에 위치하여 있다면, 그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 그 조직은 헛되이 존재하는 것이며 결실을 맺지 못할 운명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조직을 위하여는 기독교적 전제들이, 명확한 과업에 대한 부르심을 받았다는 선지적인 의식 가운데서 최우선적으로 나타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치적 사회적 혹은 학문적 전제들도 또한 나타나 있어야 한다. 이 마지막 전제들이 부재한 상황, 그리고 잠정적으로 자신의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그리스도인의 조직과는 별도로, 조직이 없이 이루어야 하는 길 이외에 어떠한 다른 방도로 그리스도인에게 열려 있지 않은 상황도 또한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도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먹거나 마시거나, 의로운 자리에 서 있거나 혹은 매우 복잡한 현대 생활의 문제들에 직면하여 있거나 간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이며, 모든 지체들 가운데 한 지체이기 때문이다.(로마서 12장 5절)
결 론
그 통일의 유대 속에서 나는 내 강연을 결론짓고자 한다. 여러분들 가운데 함께 있게 된 것은 나의 특권이다. 우리는 같은 인종(그리스도인)의 구성원들이다. 여러분은 이 새롭고 안락한 땅에서 우리가 우리의 조국에서 가지고 있는, 그리고 이 세상에서 어디에 있든지 간에 그리스도에 의하여 그의 왕국으로 부름받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과 동일한 자유와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이 세상에서 여러분의 과업은 크고 어렵다. 그러나 여러분이 언뜻 보기에는 미약하게 보이는, 그 들판에 뿌려진 씨앗의 힘을 고려할 때에 그 일은 또한 숭고하고 약속에 가득찬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큰 믿음과, 자신의 뜻을 분별할 수 있는 커다란 지혜를 주시고,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그의 왕국 안에서 여러분들이 맡은 사명을 진정 결실있는 방법으로 성취시켜 주시길 원한다.
출전 : H. Ridderbos, "The kingdom of God and Our Life in the World", International Reformed Bulletin, 28, 1967, 2-13 김진홍 역
[출처]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작성자 성산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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