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스크랩] 하나님나라 이상호 : 목원대 은퇴교수

하나님아들 2012. 11. 21. 11:51

하나님나라  

 

황성규교수 정년은퇴 기념논문집, 『하나님나라』

이상호  : 목원대 은퇴교수



먼저 많은 업적을 남기시고 정년 은퇴를 맞이하시는 황성규 박사님의 정년 은퇴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또한 은퇴 기념 논문집이 출판된 것을 축하드립니다. 31인의 저명하신 신학자들이 집필하여 이루어 놓은 이 기념 논문집은 다른 어떤 은퇴 기념 논문집과는 구별이 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나라"라고 하는 큰 제목을 가진 하나의 저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영광을 위하지 않고 신학교의 교재나 일반 신도가 참고할 수 있는 한 권의 귀한 서적입니다. 더구나 이 책의 내용은 신약사상에서 가장 중심적이고 중요한 사상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의 가르치심의 핵심이 되는 사상입니다. 주제가 그와 같이 중요할 뿐만이 아니라 이 기념논문집의 편찬의도도 역시 훌륭합니다. 이 하나의 제목을 폭넓게 다방면으로 접근한 것으로써 내용을 풍부하게 한 것입니다. 성서학뿐만이 아니라 조직신학, 교회사, 교리사, 목회학 그리고 철학적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다각도로 연구한 논문들을 모은 것이므로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이토록 개인의 영광보다도 타인에 유익을 줄 수 있는 책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기념논문집을 펴냈다는 것은 황성규 박사의 인격과 교양과도 일치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많은 논문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한 짧고 간단하게 서평을 해볼까 합니다. 많은 논문을 지루하게 논평하며 축제의 분위기를 망치는 눈치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먼저 감창락 교수님의 "하나님나라, 그 기원과 해석의 역사"는 방대한 논문입니다. "붕어빵 사가세요- 이거 맛있어요.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 -뭐라구요? 무엇이 왔다구요?" 아니 이거 왼 유머입니까. 김창락 교수님 맞아요? 충실하고도 알찬 글의 시작입니다. 붕어빵이 무엇인지는 누구나 다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 - 뭐라구요?"는 과거 한 세기 신약학의 결과를 마무리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곧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일치하는 답이 나오지 않았음을 잘 지적한 표현입니다. 순서를 따라서 구약적 배경부터 시작하였는데 그가 말하는 구약은 묵시문학 이전의 것으로 묵시문학이나 신약에서 말하는 하나님나라의 표현들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역대기의 야훼의 나라라는 다윗의 나라를 가리켰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활동과 통치는 다른 명칭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시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왕 되심도 구약의 주류에 속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종말적 의미의 하나님나라를 예언자들의 예언이나 묵시문학에서 찾아보게 되었는데 예언자들의 예언에는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 역사에 왕으로서 직접 개입하시고 묵시문학에서는 인자와 같은 사역자를 통하여 하나님이 역사에 관여하시는 것으로 차이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나라라는 명칭은 흔히 사용되는 표현은 아니었음을 지적합니다. 외경, 위경은 물론이고 사해사본이나, 필로의 글 그리고 랍비문헌까지 살피면서 하나님나라 사상을 추적하였습니다. 어렴풋이 하나님은 배후에서 자기의 택한 백성을 포함한 만민의 역사를 지배하신다는 사상이 분명한 것이지만 구체성에 대해서는 사상이 다양함을 보여줍니다. '야훼의 나라'라는 말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탈굼에 이르기까지 그 변천과정은 다양합니다.

본격적으로 신약에 들어가서 동사를 사용하는 문장의 문법적 언어적인 분석을 세밀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나 영역이 아닌 그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짚어볼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법이나 언어적인 분석 연구는 한계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초월적인 존재이신 하나님의 역사개입문제는 신학적, 해석학적 물음에 속한다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초월자와 인간 사이의 긴장상태에서 나타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사건입니다. 묵시문학에서의 하나님은 종말에 무대의 배후에서 연출의 역할을 하십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하나님나라는 예수의 역할이 무대를 차지하며 비종말화되는 모습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제 연구의 중요한 부분을 해석사로 집중했습니다. 19세기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연구사를 명료하고 이해하기 쉽게 다루었습니다. 릿츌을 비롯한 19세기 자유주의는 마음속에 있는 지고지선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한 것입니다. 이에 반발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철저한 종말론으로 풀이한 바이쓰와 시바이처, 예수의 활동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왔다는 것을 선포하였다고 하는 도드(C.H. Dodd), 임박한 종말을 선포했지만 진정한 의미는 비신화화함을 통한 실존적해석을 하는 불트만, 불트만의 후예로서 묵시문학적 종말론 요소를 축소하는 케제만, 미래성와 현재성의 공존을 말하는 큄멜, 다양한 요소의 종합을 말하는 래드, 은유와 상징으로 규정한 페린에 이르기까지 한 세기에 걸친 중요하고도 빼놓을 수 없는 학문적 연구를 알기 쉽게 다루었습니다.

결과로 얻어낸 답은 다시 붕어빵의 비유로 돌아갑니다. 붕어빵은 누구나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붕어와는 상관이 없는 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것과 같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해석도 다양하고 구구합니다. 그리고 붕어빵의 경우와 달리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행위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표현에 있는 그대로 주인공이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나라를 오게 하시고 세우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다양한 해석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맺는 말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것들을 다시 정리하여 두 가지로 좁혔습니다. 종말론적 해석과 비종말론적 해석의 두 가지입니다. 역사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새 질서인 것이며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는 예수의 인격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성을 가진 것임을 밝혔습니다.

아무래도 분야의 순서대로 진행해야겠습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설교는 비유를 통하여서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김재성 박사의 "예수의 비유에 나타난 하나님나라"는 비유를 통해 본 것입니다. 모든 비유가 다 하나님나라와 결부된 것은 아닙니다. 비유들은 우선 일상 생활에 관한 것들이라는 특징을 지적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천상의 세계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일상생활의 삶 속에 열려 있는 세계에 속한 것입니다. 예수가 비유로 말씀하실 때에 듣고 있던 청중의 일상생활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 청중들은 대개가 농사를 짓거나 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꾸려 가는 사람들입니다. 곧 갈릴리의 작은 사람들의 생활에 관한 것입니다. 율리허를 거치는 해석사를 통과하며 비유는 알레고리가 아니며 실재적이고 단일한 요점을 가진 일상생활에 관계된 것이라는 점을 밝혔습니다. 특히 펑크의 견해에 무게를 두면서 비유를 듣는 청중의 삶의 속에서 하나님나라의 현실을 드러낸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의 나라는 피안이 아니라 현실에 관계된 것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돌아온 아들의 비유나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서도 나타나는 것과 같이 삶에 쪼들리고 어려움 속에 있는 작은 갈릴리 사람들이 마침내는 빛을 보게 되는 극적인 전복이 하나님나라 메시지의 핵심이라고 본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완성의 종말이 아니라 그들의 행복의 미미한 시작을 말한 것입니다. 매우 의식을 가진 관찰이며 신학적 의도를 반영한 것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김판임 박사의 "예수와 여성: 하나님나라 선포에 관련하여"라는 글은 소중한 통찰력을 보여줍니다. 단순히 여성신학을 위한 논문이 아니고 해석학의 새로운 장을 열어주는 논문이라고 봅니다. 흔히 예수의 하나님나라사상을 유대교사상의 연속으로 보곤 합니다. 그러나 김판임 박사는 예수만의 독특하고도 고유한 사상을 읽어내고 있습니다. 예수는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들과 다른 진리를 선포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만의 그 독특하고도 특이한 하나님나라의 뜻이 바로 생명력을 가진 것입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메시지는 주로 두 가지의 길로 표현됩니다. 하나는 비유를 통해서이며 또 하나는 병자를 치유하는 기적을 통해서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두 면에 있어서 예수의 독특성이 잘 나타납니다. 비유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율리허를 분기점으로 해석의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종전에는 비유들을 알레고리로 풀이하며 예수의 교훈의 진 모습을 훼손해 왔었습니다. 청중들을 향한 본래의 예수의 의도가 왜곡된 셈입니다. 본래의 청중은 농사꾼이나 여성이나 현재로서는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들로서 그 중에서도 예수는 비유를 말씀하실 때 여성들을 향하여서 또 여성들의 생활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재를 가지고 하나님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셨다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당시의 일반 유대인들답지 않게 여성을 청중 안에 받아들이시는 혁명적 태도를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기적의 경우도 그랬다는 것입니다. 귀신에 시달리던 한 이방여인을 치유할 뿐만 아니라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예수의 혁명적인 태도가 하나님나라 성취의 장면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하나님나라를 세계화하는데 있어서 예수의 독특성을 발견하게 되고 또한 세계화하는 일에 있어서 그 여성의 역할도 컸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여성을 남성과 동등하게 받아들이시는 예수의 사상도 또한 예수에게 특이한 것입니다. 이혼에 관한 예수의 답변에서 이점을 끌어냈습니다. 어느 신학자의 학설보다도 저자의 창의적인 통찰이라고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지으시고 자기의 뜻으로 다스리실 때 남자와 여자를 동등한 존재로 창조하신 것을 예수는 강조하셨습니다. 이점도 또한 당시의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아주 다른 예수의 특이한 모습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는 여성이 동등합니다. 예수께서 이혼을 허용하는 법규를 반대하실 때의 이유는 남자들의 완악함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완악함 속에서 시달리는 여성, 또한 그들뿐만이 아니라 어린이들, 그리고 완악한 세력에 시달리는 병자들, 회복시키는 예수의 현재적 활동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고 하나님의 뜻은 창조의 원리로 소급하여 올리는 곳으로 보았습니다. 매우 구체적이고 명확한 설명으로 이끌어나간 진지한 논문이라고 봅니다.

송순열 교수의 "눅-행전에 나타난 하나님나라" 연구는 매우 치밀한 문학적 편집사적 연구라고 보아 높이 평가합니다. 자료들이나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서 누가에게는 미래적 종말론의 요소가 한 발 뒤로 물러선 듯하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진 하나님나라 대신에 교회확장의 이야기로 대체되어 나간 것으로 봅니다. 콘첼만의 구속사적 누가신학의 구조를 따르거나 그와 대체로 동의하는 방향을 취하고 있습니다. 종말의 지연으로 인하여 미래에 대한 기대는 약화된 점을 가려냈습니다. 미래의 재림 같은 표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마가와 Q의 자료를 수정 없이 남겨진 것으로 판단합니다. 미래적 하나님나라가 약화되는 만큼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성취는 예수의 행적과 보다 더 밀접하게 결부되고 열두 제자와 가난한 자와 세리 죄인 소외된 자들이 이미 누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의 사역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체험되고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비유들을 검토해 얻은 결과입니다. 하나님나라의 하나님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이시고 사랑해주시고 용서해주시는 은총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도행전시대의 하나님나라는 선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복음의 내용을 가리킵니다. 복음의 내용에는 예수의 사건이 포함돼 있다는 것일 것입니다. 자료분석과 누가신학의 구조를 충분히 추적하는 좋은 연구입니다.

김명수 교수의 "유토피아와 하나님의 나라"는 사상적인 연구로 매우 큰 흥미를 갖게 합니다. 계몽주의 이후의 서구의 유토피아사상과 역사적 예수의 하나님나라 사상 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공통점이 있어 보인다는 점에서 비교를 시작한 것 같습니다. 기존세계에 대한 가치체계에 대한 도전이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연구의 실마리는 크로산이나 타이센과 같은 최근의 역사적 예수연구에서 이끌어냈습니다. 실지의 예수의 모습이 기존체제에 저항하는 모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교하고자 하는 유토피아는 주로 토마스 모아나 맑스, 불로흐 등의 사회주의 그리고 만하임 폴락 등으로 한정해보았습니다. 그렇게 해도 좋은 것은 연구에는 제한이 있어야 할 뿐더러 비교를 위해서는 선택적이라야 하고 또한 그들은 이상적 미래향의 대표적 유형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공통점을 맹목적으로 추구하고 밀어붙인 것이 아닙니다. 만하임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제외한 유토피아사상과 하나님나라 사이에 연속되지 않는 차이점도 연속성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연속성이란 기존의 사회질서와 가치체계를 비판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는 점이고 시대의 변천에 따라 끊임없이 변천 과정을 허용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서구의 새로운 유토피아사상은 예수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다른 점이 양자간에 더욱 심각합니다. 근본적인 차이란 곧 유토피아는 환상에 인간의 이성적 통찰을 추가하고 또 역사와 사회 안에서의 새로운 사회구조를 창출하는 반면에 하나님나라는 세계외적 특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구원사적 행위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유토피아는 인간의 창출인 반면 하나님의 나라의 주동자는 하나님 자신이며 유토피아는 가시적인 사회 형태를 추구하고 공동체인 사회의 가치가 개인보다 우선되지만 하나님나라에서는 개인이 공동체의 수단이 아니며 특정한 이상적인 공동체를 고집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유토피아가 이상적인 꿈이라면 하나님의 나라의 미래는 영적 체험이나 예수의 사역에서 현재화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비교를 통하여서 하나님나라의 본질의 특성을 밝히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제 구약분야로 옮기기로 합니다. 장일선 교수님의 "지혜문학과 하나님나라"에 관한 글입니다. 이 글을 쓰시는 장일선 교수님의 노고에 감사를 드립니다.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지혜문학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의 언급을 찾아보기 어려움의 고충을 안고 그래도 황성규 교수님을 축하하기 위한 성의였다고 봅니다. 지혜문학이 브라이트의 목록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던가? 지혜문학이 구약의 비주류에 속하는 것으로 정의한 폰 라드에 관한 관찰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비주류에는 하나님나라의 언급이 적다고 하는 말이 역으로 하나님나라가 구약의 주류에 속하는 사상임을 시사해주는 증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집념 어린 연구 끝에 지혜의 신격화됨을 찾아냈고 또 그 지혜가 창조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을 찾아냄으로써 창조신앙에 근거한 하나님의 나라사상과의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밝혀낸 좋은 연구를 보여주었습니다.

왕대일 교수의 "묵시문학의 하나님 나라"에서도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하나님나라라는 용어는 묵시문학에서도 쉽게 발견되지 않지만 해시모니안 시대의 민족적 암흑기를 거치면서 야훼의 통치개념은 상징적으로 표현돼 있음을 밝혀줍니다. 하나님 대신에 하늘이라는 명칭으로 야훼의 왕으로서의 통치는 인간세상과 역사의 무대 위에 직접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직접 출연하시기보다는 배후에서 역사를 지배하십니다. 인자와 같은 이를 통하여 역사를 심판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종말에만 출연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옛날부터 항상 역사를 이끌어오시는 주님이시며 그의 백성과 항상 함께 해오시는 분이십니다. 고난받는 의인의 역사 속에 이미 항상 임재해 계십니다. 종말에만 기대하던 하나님의 통치는 오늘 여기에도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왕교수님의 이 글은 신학의 은밀히 감추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배경연구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교리사시대로 이전해봅니다. "고대교회의 하나님나라 이해"의 논문에서 황정욱 교수님은 "2세기까지의 하나님나라 이해를 살펴보았습니다. 글레민스, 유스틴이나 이그나시우스, 텔튜리안, 또는 폴리쑼, 이레내우스와 같은 신앙인들을 통해서 나타난 것들입니다. 더러는 평신도이며 더러는 교회를 이끄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박해시대의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그들을 통해 반영된 하나님의 나라란 순교의 보상으로 누리는 보상으로 이해되었던 것입니다. 신실한 믿음과 선행에 대한 하늘의 보상으로 하나님나라가 이해되었다는 것입니다. 유스틴에게서 죽은 다음의 부활이나 천년왕국설을 말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레내우스는 최초에 구속사관을 이루어놓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 종말에 있을 사건으로 보았는가 하면 몬타니즘은 임박한 종말론을 주장함으로써 하나님나라 이해는 다양하였음을 잘 알 수 있게 하여줍니다.

정용석 교수의 "초대교부들의 하나님나라 이해" 연구는 5세기 이르기까지로 범위를 확장하였습니다. 로마제국으로부터의 박해시대를 지나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보호를 받게되는 콘스탄틴까지의 역사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민트나 오리겐은 하나님나라를 의와 평화와 기쁨 같은 영적인 누림으로 이해하였고 덕은 통해 체험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으며 오리겐에 이르러서 흠 없는 신앙 공동쳬를 하나님나라의 구현으로까지 보았음을 지적합니다. 콘스탄틴 황제의 호의를 받았던 유세비어스는, 교회는 더 말할 것 없고 콘스탄틴 황제의 로마제국마저도 하나님나라라고까지 보기도 하였으며 어거스틴은 지상의 나라와 하나님나라를 구별하는데 이르렀는데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나라개념은 다양하게 발전해나가는 모습을 이 논문은 명료하게 알 수 있게 하여줍니다.

신학과 목회학 분야에서 하나님나라와의 관련성을 찾아보는 것은 실질적이고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생태학적 신학은 우리에게 예언자적 메시지를 전합니다. 김균진 교수의 "생태계문제와 하나님의 나라"는 새로운 측면의 신학적 과제를 알게 하여줍니다. 해마다 생물멸종의 증가 추세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연을 경시한 결과에서 온 것입니다. 자연과 인간은 유기적으로 총체적인 관계에 있다는 진리를 일깨워줍니다. 예수의 메시지 속에는 자연에 관한 말씀이 오늘날과 같이 절박하게는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불트만의 예수 이해를 통하여볼 때 예수는 메시아적 왕국을 위해서 오신 것이고 메시아적 왕국은 자연을 포함한 하나의 생태학적 창조의 공동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과 인간은 하나로 통일되는 종말이 신약의 증언이라는 것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중심의 창조 원리를 볼 때 하나님은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지으셨고 인간에게 자연을 관리하고 통치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통치는 관리와 보호를 의미합니다. 인간중심설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인간만이 다른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게 된 사실을 지적합니다.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 중심의 세계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따라 모든 피조물들이 형제 관계에 있는 생명 공동체라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로 돌아와 보기로 합니다. 하태영 목사님은 "한국교회 시한부종말론"에 관한 글을 쓰셨습니다. '다미선교회'의 이장림, '에덴수도원'의 박인선, '여호와새일교단'의 이뢰자, '영생교회'의 우종진, '시온산'의 이규성과 나씨, '스릅바벨선교회'의 상황을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여 놓아서 좋은 참고가 됩니다. 또한 전문적 연구기구를 통한 신학적, 신앙적 진단을 첨가하였습니다. 그와 같은 시한부종말론이 난무하게 된 원인은 다양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실망이나 교회들의 자기확장을 위한 교회의 소행으로나, 또는 풍수지리설을 믿는 풍토 민족 우월주의 교주에 대한 집착들과 같이 실로 다양합니다. 이 연구는 하나님나라와의 관계를 다루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에 관한 아주 소중한 연구가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적어도 하나님나라는 시한부 종말론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없이 증언해주기 때문입니다.

"교회성장론과 하나님의 나라"라는 백상열 교수의 글도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포스딘이나, 와그너, 맥카부란, 로버트 슐러등과 같은 전문가들의 견해를 참작하며 진정한 의미의 교회 성장이 무엇인가를 추궁합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성장운동의 발자취를 더듬어보았습니다. 이 논문은 여러 가지의 잘못된 성장주의를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나라를 교회와 동일시한다거나 교회로 국한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교회와 하나님나라를 구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교회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버리는 일을 경계하는 중요한 내용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혁명을 위한 기독교교육 과제" 라는 윤응진 교수의 글은 하나님나라 이해에 대한 큰 반성을 갖게 합니다. 오랫동안 선교사들은 우리 한국인들에게 내세적인 천당으로서의 하나님나라를 가르쳐오며 현세를 무시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주일학교 어린이들에게도 내세적이고 타계적인 찬송을 배우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기독교교육사의 개관을 본보기로 소개하면서 한국의 타계적 신앙은 미국교육사의 19세기 개척기의 아마츄어 신학에 근거한 현상과도 같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코우의 민주주의교육, 스미스의 진보사상, 스마트나 밀러의 실존적 만남, 헌터의 참여주의, 럿셀의 하나님의 선교신학을 거쳐 그름에 이르는 교육사를 소개하고 그름에서 보게 되는 하나님나라의 역사 내적인 측면을 추천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하나님혁명을 우리 사회 우리역사의 경계 내로 끌어들이는 것을 제의합니다. 기독교 교육은 하나님 나라 혁명의 도구로서 사회적 현실의 변화를 목적해야 합니다. 이 세계 안에서의 하나님의 정의, 평등, 평화 사랑 기쁨이 충만한 하나님나라를 이루고 실천하는 교육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인식을 촉구하는 글이 된다고 봅니다.

이상의 여러 논문들이 합쳐져서 한 권의 책을 이루어 하나님나라사상을 배우고 이해하는데 중요하고도 폭넓은 지식의 보고를 이루는 훌륭한 서적이 된다는 확신을 갖게 되어 이 책의 출판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바입니다.

참고 : 『하나님 나라』 한국신학연구소
- 말씀과 교회에서 발췌 -

[출처] 하나님나라 |작성자 성산지기

출처 : 포커스
글쓴이 : 포커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