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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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아들 2012. 11. 21. 11:49

하나님의 나라

 

 

G.E.Ladd 의  A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revised edition, edited by D.A.Hagner를 번역하면서, 정리한 내용입니다.


현대의 학자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하나님 나라가 예수의 중심적인 메시지였다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공관복음서는 각각 다음과 같이 하나님 나라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마가복음의 경우 예수의 사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로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마가복음 1:14~15)

마태복음은 예수의 사역을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마태복음 4:23)

누가복음은 처음에 예수를 소개하는 장면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대신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고, 그 예언에 대한 예수의 단호한 선언을 제시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누가복음 4:21)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해석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해석은 세부적인 내용까지 따지면 무한할 정도로 다양합니다. 어거스틴에서 종교개혁자들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장 우세한 견해는 그 나라가 어떤 경우에든 교회와 일치된다는 것입니다.(교회가 하나님 나라라는 의견) 그러나 이런 견해는 이제 카톨릭 학자들조차 좀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지, 하나님 나라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자유주의의 대표적인 해석은 하르낙의 ‘What is Christianity’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예수가 가르친 순수하게 예언적인 종교로 이해했습니다. 이 종교는 하나님의 아버지되심, 인류의 형제됨, 개인 영혼의 무한한 가치, 사랑의 윤리로 이루어집니다. 예수의 가르침에 분명하게 들어가 있는 묵시적인 요소에 대해서는 이러한 가르침을 담는 그릇 역할을 위해서 당시의 상황에 맞추어 선택된 껍데기 불과한 것으로 치부했습니다. 이렇게 묵시적이 요소를 배제하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 비종말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대세가 되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일차적으로 개인의 종교적인 경험으로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들의 의견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는 개인의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입니다.

1892년, Johannes Weiss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설교”라는 책을 출판했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관점에 대해서, ‘미래’와 ‘종말’에 대한 면을 가지기 때문에, 유대 묵시론의 하나님 나라 관점과 같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는 사탄에 대한 하나님 나라의 승리는 이미 하늘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지상에 하나님 나라가 온다고 선포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행위가 될 것이며, 하나님 나라가 올 때, 예수는 천상의 인자가 될 것입니다.

Albert Schweitzer는 이런 생각을 수용해서, 예수의 생애 전체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이해의 관점에서 해석하였습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운 미래에 올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이러한 해석을 Consistent Eschatology라고 불렀습니다.)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도, 계속 진행될 역사 속에서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위한 것이 아니라, 종말이 오기 전의 짧은 기간만을 위해 고안된 것일 뿐입니다.(중간기 윤리) 그러나 이런 기대에 어긋나게도 하나님 나라는 오지 않았고, 예수는 절망과 망상 속에 죽었습니다. Schweitzer와 같은 사람은 예수를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로써 볼 때,  1세기의 미혹된 묵시론자로 보았습니다.

Weiss와 Schweizer 이후 대부분의 학자들이 묵시적인 요소가 예수의 가르침에서 껍데기가 아닌 핵심이라는 것을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오직 묵시적인 것으로만 보는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Rudolf Bultmann 은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를 예수의 메시지에 대한 올바른 역사적 해석이라고 받아들였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실존적인 관점(하나님의 근접성과 요구)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영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해석은 C.H.Dodd실현된 종말론(Realized Eschatology)입니다. Dodd는 종말론적 언어를 껍데기라고 여기지 않고, 인간의 마음이 바로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실재를 나타내는 일련의 상징으로 이해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묵시적인 언어로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시공간을 초월한 차원이며, 예수의 사역 속에서 역사 안으로 침투해 들어왔습니다. 예수 안에서 전적인 타자(wholly other)가 역사로 들어온 것입니다. 이 Dodd의 사고에서 초월적인 “전적 타자”는 성경적이기보다는 플라톤적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선지자들이 소망했던 모든 것이 역사 속에 실현되었습니다. Dodd가 “실현된” 종말론이라고 불렀던 이유가 이것입니다. Dodd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인 면(미래에 완성될 것이라는)을 최소화시켰다고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그의 최근의 저서에서 그는 하나님 나라가 아직 역사를 넘어서 완성을 기다리고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이 예수의 가르침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가 ‘하나님 나라의 현존’이라는 그의 관점을 따르고 있습니다.

학자들이 하나의 일치된 견해에 접근했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실재적인 의미에서 현재이기도 하고 미래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W.G.Kummel 은 하나님 나라의 일차적인 의미가 ‘종말’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종말’은 유대의 묵시문학에서 ‘새로운 시대’와 동의어였습니다. 예수는 새로운 시대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렇지만 Kummel은 그 나라가 오직 예수의 인격 안에(제자들 안에서는 아니고) 현존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미래에 나타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가 이미 예수의 사역의 활동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Kummel 의 관점에서 어떻게 미래의 종말과 예수의 현재 활동이 공존 할 수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른 학자들은 이 문제를 하나님 나라가 미래이면서도 그 힘을 이미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왔다는 의미로 설명하려 합니다. 마치 해가 돋기 전에 새벽이 오듯이 말입니다. 또는 하나님 나라의 표지가 현재에 있기는 하지만 그 자체는 아니라는 식으로 설명하려고도 합니다.

이런 논의에서 Jeremias의 위치는 독특합니다. 그는 Dodd가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인 침입을 강조하여 신약 해석의 역사에 전환점을 열었다고 칭찬하면서도, 종말론적 면을 퇴색시켰다고 비판했습니다. Dodd의 ‘실현된 종말론’을 대신하여, Jeremias는 '실현되어 가는 종말론'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예수의 모든 사역을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어가는 사건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는 세례 요한에 대해 성령이 그에게 임했고, 그로부터 구원의 시간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세례 요한도 성취의 시대 속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메시지와 귀신 축출의 기적과 함께 하나님 나라는 역사 속으로 침입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 자신의 부활과 재림을 아우르는 하나님 나라의 즉각적인 완성을 기대했습니다. Jeremias는 예수의 부활과 재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하나님의 승리가 실현되는 단일한 사건으로 보았다는 Dodd의 생각을 따랐습니다. 예수의 부활 현현에서 제자들은 예수의 재림을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초대 교회가 재림과 부활을 분리한 것은 부활절이 지나고 나서였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Jeremias의 관점과 그가 비판하는 Dodd의 관점에서 실재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미국과 영국의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보다 새로운 관점이 나타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섭리주의자(Dispensationalist)들은 모든 구약의 예언이 문자적으로 성취되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하나님 나라와 천국을 구별했습니다. 천국은 지상에 대한 하늘(하나님)의 지배인데, 일차적으로 구약의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지상의 신정 국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마태복음만이 우리에게 이 나라에 대한 유대적 관점을 보여줍니다. 예수가 천국이 가까왔다고 선포할 때, 천국은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지상의 신정 국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나라를 거절했고, 예수는 이스라엘을 위한 나라를 세우는 대신, 새로운 메시지를 전했고, 그를 믿는 보는 사람에게 안식과 섬김을 베풀고, 모든 인종을 아우르는 새로운 믿음의 가족을 만들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의 천국의 비밀은 크리스챤 신앙고백자들의 영역입니다. 이것은 예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지상에 대한 하나님의 지배가 가지는 형태를 설명합니다. 누룩은 언제나 악을 나타냅니다. 천국(고백 교회) 안에 진실한 교리는 잘못된 교리에 의해 더럽혀질 것입니다. 그리고, 산상 설교는 천국의 법입니다. 구약의 신정 국가가 가졌던 법이 모세 율법이라면, 산상설교는 그리스도가 지상 왕국을 지배하는 규범이 되도록 해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거절한 천국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실현될 것인데, 그 때 이스라엘 나라는 회개하게 되고, 구약의 다윗 왕국이 회복되리라는 약속이 문자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신학의 기본적인 교의는 두 그룹의 하나님의 백성(이스라엘과 교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둘은 두 신적 프로그램 아래에서 두 가지 운명을 가집니다.

1963~64년에 하나님 나라를 구속 역사의 전개라는 관점에서 이해하려는 공통점을 가진 세 가지 책들이  출판되었습니다. 이들의 관점은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왕적인 통치라는 것입니다. 이 통치는 두 가지 중요한 순간을 포함합니다. 하나는 역사적인 예수의 사역 속에서 구약의 약속들이 성취되는 순간으로 올 시대의 시작을 알립니다. 또 하나는 그 시대의 마지막에 있을 완성의 시점입니다.

유대교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의미

“하나님 나라”라는 단어가 구약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에 대한 개념은 예언서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구약에는 ‘하나님의 왕되심’에 대해서 이중적인 강조가 있습니다. 그는 종종 ‘이스라엘의 왕’으로도, ‘모든 세상의 왕’으로도 이야기됩니다. 하나님은 ‘지금’ 왕이시지만, ‘미래에’ 그가 왕이 되어 그의 백성들을 지배하는 날에 대해서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왕이시지만 또한 왕이 되셔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그는 그의 왕되심을 인류와 나라들 가운데 나타내셔야 합니다.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형성에 대해서는 예언자들마다 다르게 표현합니다. 구약과 유대교 안에서 두 종류의 두드러진 소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정 히브리적인 예언의 소망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역사 속에 출현하여 지상에서 다윗의 후손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후 이런 소망이 사라지면서, 유대인들은 역사 속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를 대신해서 그들은 역사를 넘어서 완전히 초월적인 나라를 가지고 오는, 천상적인 인자의 인격 속에 있는 하나님의 묵시적인 침입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다니엘 7장)

학자들은 구약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묘사를 보면 상당한 다양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 나라는 언제나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 완전히 실현될 때에 역사 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합니다. 땅이 악의 저주로부터 구속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는 언제나 지상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소망은 언제나 윤리적인 면을 가집니다. 그것은 단순한 사색의 산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지금 여기에서 역사 안에서 직면했을지도 모르는 일들이, 미래의 빛을 현재에 비추게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의 융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곧(가까운 미래에) 이스라엘을 구원하거나 심판하시기 위해 일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종말론적 소망을 성취하시기 위해 정해지지 않은 미래에도 또한 행동하실 것입니다. 예언자들은 이 까가운 미래와 먼 미래를 날카롭게 구분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모두 그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묵시론적 유대교는 다양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나라의 지상적이고 역사적인 측면을 강조했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좀더 초월적인 측면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종말론적인 성격을 언제나 동일하게 강조됩니다. 그런데 유대의 묵시문학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행동하신다는 믿음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묵시주의는 비관적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의 나라를 세우시는 하나님의 마지막 결정적 행동에 관련해서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역사 속에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와 관련해서입니다. 현재 역사에 대해서, 역사가 악한 권세에 넘겨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유대의 문시론자들은 역사에 대해 절망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올 시대에 그의 나라를 세우려고 행동하시기 전까지는, 이 세대에서 고통과 핍박 만을 견딜 수밖에 없습니다.

쿰란 공동체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묵시론자들과 비슷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종말론적 완성의 날에, 그들은 천사가 내려와 빛의 아들인 자신들과 어둠의 아들인 그들의 적과의 싸움에 함께 할 것이며, 쿰란 공동체에게 다른 모든 사람들(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에 대한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랍비 문학도 유사한 종말론을 발전시켰는데, 그들은 ‘천상의 나라’라는 용어를 좀 더 사용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그의 지배가 행해지는 것)를 말합니다. 인류 역사의 과정에서 하나님은 그의 율법을 통해 그의 주권을 시행하셨습니다. 따라서 율법에 순종하는 이들은 자신을 하나님의 지배에 내어 놓은 것입니다. 유대교로 개종하여 율법을 받아들인 이방인들도 그들을 하나님의 지배에 맡긴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에 대한 순종은 하나님 나라 혹은 하나님의 지배를 경험하는 것과 동등한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지구 상에 하나님 나라는 이스라엘에게 국한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그 나라는 사람에게 다가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율법 속에 구체화되었으며 그것에 복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모든 세계에 대한 그의 지배권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고대의 기도문에는 이런 소망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애 동안에, 당신의 날들에, 모든 이스라엘 집의 생애에, 그의 지배를 세우시기를, 속히, 가까이 왔을 때에” 라고 표현됩니다. 모세의 격언에는 “그리고 그의 나라가 모든 그의 피조물에게 나타나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의 지배는 율법에 복종하는 이들에게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의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의지에 저항하는 모든 것들을 굴복시킬 것입니다. 현재 하나님의 통치를 경험하는 것은 사람들의 자유로운 결정(율법에 순종/불복종)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마지막에는 악한 사람을 심판하고 의로운 이스라엘만을 모아 구속된 축복의 질서로 인도하기 위해 ‘천상의 한 사람이 그의 왕적인 보좌로부터 일어날 것이다.’

유대교 안의 또 다른 움직임은 하나님 나라를 설립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열심당이 그들입니다. 1세기 초기에 열심당에 의해 촉발된 로마에 대한 폭동이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신약에도 유다와 데오두스 아래에서의 폭동에 대해(사도행전 5:36,37), 이름모를 이집트인 아래에서의 또 다른 봉기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행전 21:38) 요세푸스는 신약에 언급되지 않은 다른 폭동들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혁명들에 이름을 붙이지는 않았는데, 132년 Bar Kokhba에 의한 마지막 폭동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가 Akiba라는 사람에 의해 메시아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열심당은 유대의 급진주의자들로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가져오기를 조용히 기다리기 보다는, 무력을 사용해 그 나라의 도래를 앞당기려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로마에 대한 반란이 정치적이나 민족주의적인 목표로 시작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앞당기기 위해 종교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로마에 대한 반란들이 메시야적이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논의한 모든 유대주의의 관점에서,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하나님께서 가져오시는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아마도 인간을 통해서 이루실) 그것은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만의 지배를 받는, 이스라엘의 악한 대적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불러 모으는 대적에 대한 승리를 가리켰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의미

학자들은 basileia의 기본적인 의미에 대해 일치를 보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basileia가 "eschaton" (마지막 종말론적인 질서)이라는 관점을 지지합니다. 만약 esachaton에 대해 basileia의 관점에서 이해하려 하면, 어떻게 eschaton 이 현재이면서 미래가 될 수 있는지 설명하기가 어려워집니다. basileia는 배타적으로 미래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히브리 단어는 추상적이고 역동적인, 지배 혹은 다스림 등의 개념을 가집니다.

  저희가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주의 능을 일러서 (시편 145:11)  
  주는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 (시편 145:13)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부터 만유를 통치하시도다 (시편 104:19)

유대교에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지배, 군림을 말합니다. 이 역시 복음을 이해하기 위한 최선의 출발점이 됩니다. RSV는 몇 번에 걸쳐 basileia에 영어 단어인 “kingship", "kingly power"라는 뜻을 부여했습니다. ”reign", "rule" 이라는 의미는 다른 본문들에서 명백히 나옵니다. 주기도문에서 우리가 기도하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즉 그의 지배가 완벽하게 실현된다는 뜻입니다.(마태 6:10) 예수가 그의 제자들에게 규정한 “kingdom”은 왕적인 지배입니다.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미래이면서 현재일 수 있는지'라는 주요한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예수의 메시지를 해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왕국이 일차적으로 eschaton(구원의 종말론적인 시기)이라면, 미래의 영역이 현재도 된다는 것을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 그리고 랍비 유대교에서, 하나님 나라(그의 지배)가 하나의 의미 만을 가진 게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은 지금도 왕이시지만, 왕이 되셔야만 합니다. 이것이 복음서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천국 the Kingdom of Heaven(s)

‘천국’이라는 용어는 마태복음에서만 나타나며, 32번 사용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의 나머지에서, 그리고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 나라’라는 용어가 사용됩니다. 천국은 셈 언어에서 숙어입니다. 여기에서 하늘은 신적인 이름을 대신해 부르는 말입니다.(누가 15:18) 복음서 전승을 보면,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천국’이란 단어는 유대-기독교 환경에서 고유한 의미를 가진 단어였을 것입니다. 이 단어는 예수가 실제로 사용했다기 보다는, 마태 공동체에 전해내려온 복음 전승을 가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예수는 두 가지 숙어(천국, 하나님 나라)를 모두 사용했을 것입니다. 이방인 청중들을 위해 쓰여진 복음서에서는 이방인이 알아들을 수 없기에 셈어 숙어(천국과 같은)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천국’이란 말은 예수의 생애 이전에는 유대 문학에서 좀처럼 쓰이지 않았습니다. Jeremias 는 이 사실을 강조하기를, 예수의 가르침에서 basileia(왕국)에 대한 많은 새로운 구절들이 나타났는데, 이들은 예수 당시의 세상의 문학에서는 병행구를 찾기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한 관심이 기울여지지 못했습니다.

종말론적인 왕국

우리는 앞 장에서 예수님이 가진 사고의 기본적인 구조가 두 시대에 관한 종말론적 이원론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종말론적 이원론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마태 6:10) 혹은 '그 나라가 나타나는 것'(누가 19:11)으로 이 세대에 끝을 가져오고 올 시대가 시작됩니다. basileia하나님의 왕적인 통치가 실현되는 것이기도 하고, basileia의 도래와 함께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종말론적’ 왕국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영생을 얻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올 시대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일례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다니엘 12:2에 나와 있는 종말론적 생명을 염두에 두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힘들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의 제자들이 집과 가족을 떠나 예수님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내세’의 ‘영생’을 받았다고 확실히 말씀하셨습니다.(마가 10:17~31)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올 시대, 영생은 서로 연관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귀신과 그의 천사들의 마지막, 완전한 파괴’(마태 25:41), ‘악과 혼합되지 않은 구속된 사회의 형성’(마태 13:36~43), ‘메시야 축제에서 하나님과의 완전해진 교제’(누가 13:28~39)를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내세와 동의어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 유대교의 가르침과 가장 차이있는 점은 하나님 나라 개념을 보편화시켰다는 것입니다. 구약과 유대교에서는 그 나라는 언제나 이스라엘을 위한 것입니다. 구약에서 이방인들은 주로 이스라엘의 의해 정복되어야 대상으로 생각되었습니다.(아모스 9:12, 이사야 45:14~16, 60:12,13). 종종 이방인의 변화된 모습을 묘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언제나 이스라엘의 것입니다. 후기 유대교는 더욱 특수화되어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진다는 의미는 이스라엘이 정치적, 국가적인 대적들을 지배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너희 이스라엘이여, 기뻐하라, 독수리의 목과 날개에 오르라
  높은 곳에서 살피며 겐나의 적들을 보라, 그들을 보고 기뻐하라 (Ass. Mos. 10:8~10)

세례 요한은 유대교의 특수주의를 거부하였고, 유대인 신자들도 회개하여 오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고 선포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인격과 메시지를 받아들어야만 종말론적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아가 예수님은 이스라엘(자연적으로는 그 나라의 자손들)이 그 나라로부터 거절되어, 그들의 자리가 다른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마태 8:12) 진정한 ‘그 나라의 자손’은 예수님께 응답하고 그의 말을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마태 13:38) 사람은 종말론적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부모에게 완전히 의존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태도를 가지고 지금 선포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마태 10:15)

현재 세워진 왕국(왕국의 현재성)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기대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새롭게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전부터 존재해왔습니다. 이 기대는 선지자들에게도 나타나는데, 유대교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발전되었습니다. C.H.Dodd는 복음의 특징적이고 두드러진 면들이 하나님 나라가 ‘지금’ 왔다는 것을 말하는데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옳은 지적입니다. 복음에 대한 현재적인 언급은 유대교의 가르침이나 그 시대의 기도문 중에서는 유사한 것들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요소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사역에 대해 구약의 약속이 역사 속에 성취되는 것으로 보았지만, 마지막으로서의 종말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구약의 약속의 성취라는 측면은 다음 두 개의 성경 본문에서 명백하게 나타납니다.

나사렛 회당에서 예수님은 이사야 61:1~2의 메시야적 예언을 읽었습니다. 이 예언은 기름부음받은 자가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엄숙하게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누가 4:21)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에게 그가 진정 오실 자(the Coming One)인지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이사야 35:5~6에 있는 메시야 예언을 인용하여 대답하면서, 세례 요한에게 그 예언이 실제로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1:2~6) 이렇게 공관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사역은 계속해서 구약의 약속의 성취로 이해되었습니다.

‘현재의 실재’로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하는 것은 이런 배경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하는데, 하나님 나라가 현재 함께 한다는 가장 강력한 진술은 마태복음 12:28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이 귀신 축출입니다. 예수님이 몇 마디 명령으로 귀신들린 사람들을 그 즉시 사탄의 구속에서 구원하셨을 때,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마가 1:21~28) 예수님이 사탄의 힘을 힘입었다고 고소당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권세로 귀신을 쫓아낸다고 대답했는데,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그들 위에 임했다는 증거였습니다.

마태복음 12:28의 그리스어 단어인 ephthasen, "has come"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 수많은 논쟁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 단어를 ‘실제적인 현재’가 아니라 ‘지시된 근접한 미래’라고 해석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용법들은 그 동사가 단지 근접한 미래가 아니라 실제적인 현재를 의미한다는 것을 명백하게 밝혀줍니다.

현재의 것은 종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가 현재 임했다는 것은 종말의 의미를 가질 수 없을까요? 하지만, 하나님의 왕적 권세는 사탄의 지배를 공격해 사람들을 악의 권세에서 해방시켰습니다.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마태복음 12:29)

이 말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사탄의 왕국을 침입했고, 그 강한 자를 결박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두 구절에서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 신학이 구체화되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왕적 권세를 드러내고 사탄의 악을 파괴할 이 시대의 마지막(미래의 종말)을 기다리는 대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그의 왕적인 권세를 가지고 사탄의 권세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이미 행동하셨다고 선언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하나님 나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 사탄을 무너뜨리는 이 세대의 마지막에
  2) 사탄을 결박하는
예수님의 사역 안에

사탄의 마지막 파멸 이전에 사람들은 그의 힘으로부터 구원받을 지도 모릅니다. “결박”(binding)은 은유적인 표현이지만, 실제적인 의미에서 사탄에 대한 승리를 가리키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권세는 억제된 것입니다. 때때로 그 말의 은유적인 성격이 무시되곤 하는데, 그 말은 분명 사탄이 완전히 힘을 잃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사탄은 계속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사탄은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아 갑니다.(마태 13:19) 사탄은 베드로를 통해 말할 수 있었고,(마가 8:33) 가룟 유다에게 들어갔으며(누가 22:3) 베드로를 소유하려고 했습니다.(누가 22:31)

Cullman은 사탄의 결박에 대해서, 사탄이 결박당하기 했지만 긴 밧줄로 결박되어다는 흥미로운 표현으로 설명했습니다. 사탄은 힘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권세가 깨어진 것입니다. Cullman은 또 군사적인 용어로 이것을 설명하려 했습니다. 마지막 승리를 얻기 전에, 전체 전쟁에서 볼 때 가장 결정적인 전쟁을 이미 이겼고, 전투의 흐름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사탄과의 가장 결정적인 싸움에서 승리했고, 이제 남은 잔당들을 소탕하는 일만 남았다는 의미입니다.) 가르침, 행위, 죽음, 부활에 걸친 예수님의 전체적인 사역은 사탄의 권세에 대한 최초의 승리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승리와 마지막 결과를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이 악한 영을 몰아내는 모든 사건들은 사탄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그의 힘을 빼앗기는 시대에 대한 기대를 보여준다.
   그의 부하들에 대한 승리는 종말의 승리를 미리 맛보는 것이다.”

학자들은 언제 사탄의 결박이 일어났는지 논쟁해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이긴 특정한 사건을 언급합니다. 하지만 가장 간단한 설명은 귀신축출 그 자체가 귀신과 그의 나라 사이의 전투에서의 승리로 간주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귀신이 쫓겨날 때마다 그것은 사탄이 패배하고 그의 소유를 빼앗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각 귀신축출 사건에서 예수님은 사탄의 패배를 보았습니다.

사탄에 대한 동일한 승리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도록 갈릴리 지역으로 제자들을 보낼 때 그들에게 준 권세 안에서도 나타납니다.(누가 10:9) 그 전파자들이 돌아왔을 때, 그들은 기뻐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항복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사단이 하늘에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누가 10:18) 예수님이 사탄이 하늘에서 버려지는 환상을 보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문맥에서 예수님은 70인의 성공적인 전도 속에서 사탄의 패배의 증거를 본 것입니다. 여기에서 또 다시 우리는 은유적인 언어 사용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은유는 또 다른 말들을 사용하여 예수님의 사역에서 사탄에 대한 결적정인 승리를 얻었음을 확실히 보여줍니다.
사탄은 결박되었고, 그는 그의 권세의 자리에서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파멸은 이 세대의 마지막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여기에 신약 신학의 설명할 수 없는 신비가 있습니다. 이것은 공관복음 뿐 아니라 신약의 다른 곳에서도 발견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대적은 구약에서처럼 적대적인 이방 국가가 아니라, 영적인 악의 권세로 생각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승리는 영적인 세계에서의 승리로,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입니다. 바울은 이 같은 사실을 고린도전서 15:25에서 확실하게 말합니다.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노릇 하시리니

흥미로운 문제가 있습니다. 왜 신약은 이 승리를 완전히 영적인 세계에서의 전투로 묘사하지는 않을까요? 왜 악에 대한 승리는 역사의 장에서만 얻어질까요? 어떤 설명도 없지만, 대답은 인류의 운명이 이 투쟁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 안에 있습니다.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 어떤 방법으로, 예수님은 악의 힘과 싸우셨고, 그것을 이기셨고, 이 시대의 마지막에 이 권세들은 마지막으로 영원히 파괴될 것입니다.

이것은 유대교와는 다른 기독교 복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시대의 묵시론은 이 세대를 악의 권세 아래 있으며,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 뒤로 퇴장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Dream Visions of Enoch 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포로로 끌려간 후 그의 이스라엘에 대한 지배를 거둬들이셨다고 묘사합니다. 그는 자기 백성이 야생 짐승에게 찢기고 삼켜지도록 내어줬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으신다. 그는 그들이 먹히고 삼켜지고 강탈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즐거워하셨고, 모든 짐승의 손에 그들이 삼켜지도록 내버려 두셨다.”(En 89:58) 심판의 날에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을 괴롭힌 자들은 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의 고통에서 멀리 떨어져 계신채 움직이지 않으십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메시지는 그 자신의 인격과 사역 속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으로 침입해 들어오셨고, 악에 대해 승리하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 마지막 구원은 이 시대의 마지막에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현존은 누가복음 17:20에서 주장됩니다. 바리새인들이 종말의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하는지 물었고, 예수님은 다소 수수께끼처럼 들리도록, 하나님 나라가 이미 그들 중에 왔지만, 그들이 기대하지 못한 방식으로 왔다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바리새인들이 기대하던 표적과 외적인 표지를 동반하지 않았고, 그들은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entos hymon’ 은 ‘너희 안에’ 혹은 ‘너희 가운데’라는 의미입니다. 마가 10:15은 하나님 나라가 사람의 마음에 받아들여진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고 말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의 인격 안에서 ‘너희 가운데’ 있다고 보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의 전체적인 문맥을 볼 때 가장 적절합니다.

새로운 종말론적 구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구원 역사의 시간 선(time line)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습니다.

구약과 유대교는 미래의 단 하루(하나님께서 지상에 그의 통치권을 수립할 주의 날)를 기다렸습니다. 그것은 직선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Cullmann 은 그리스도가 시간선에 새로운 중심을 가져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시간선은 유대교와 같은 기본적인 구조를 유지합니다. 하지만 중심이 이동됩니다. Cullmann은 종말을 희생하여 역사의 중심점을 너무 강조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는데, 이것은 정당한 비판입니다.

    


오래 전에 Geerhardus Vos 는 비슷하지만 더 나은 시간선을 제시했습니다.


    

이 도식은 올 시대를 이 시대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움직여가는 것으로 설명하고, 부활과 재림 사이의 시간이 두 시대의 중첩 기간이라고 묘사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교회는 ‘시대의 사이’를 살아갑니다. 옛 시대는 계속되지만 새 시대의 권세가 옛 시대 안으로 침입해 들어옵니다.

신약의 시간선을 더 잘 표현한 더 변형된 도식을 제안해 보겠습니다.


    


신약에는 이중의 이중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이루어집니다. 그의 나라는 지상에 나타납니다.(하늘과 땅의 이중성) 올 시대에 하늘은 땅으로 내려오고, 역사적인 존재를 구속된 생명의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 올립니다.(계시록 21:2~3) 이것은 상세히 설명되지 않았지만 공관복음에 나타나 있습니다.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받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잡가는 일이 없으며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누가복음 20:35~36)

여기에는 진정 상상할 수 없는 존재의 차원이 있습니다. 이처럼 성과 가족에 대한 물리적, 사회적인 관계없이 실존을 묘사하는 다른 예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악을 정복하고 그의 백성에게 올 시대의 영생의 축복받은 불멸성으로 이끄는 것 말입니다.

이 도표는 하나님 나라가 구약에서도 활동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출애굽, 바벨론 유수와 같은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구원하고 심판하는 그의 왕적 권세로 활동하셨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에서 역사 속으로 임했습니다

[출처] 하나님의 나라|작성자 성산지기

출처 : 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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