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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종말론 : 제 2 장 : 종말(終末)과 재림(再臨) - 요한계시록과 종말

하나님아들 2023. 4. 13. 22:57

성경종말론 : 제 2 장 : 종말(終末)과 재림(再臨) - 요한계시록과 종말

 

 

3)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 구속사(Heilsgeschichte)의 중심

 

구속사(救贖史)란 인간의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든 행위에 대한 역사를 의미한다. 구속사적인 접근은 성경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 역사라는 일관된 흐름이 있음을 강조하며, 인간의 역사가 단순히 연대기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흐름에 의하여 이해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구속사적 시각에서 볼 때, 창조에서부터 종말에 이르게 되는 인간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 속에 포함된다. 넓은 의미에서 구속사적인 접근은 초기 교회의 이레네우스와 같은 신학자에게도 발견되며, 그 기원은 물론 성경 속에 있다. 구속사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벵겔로 알려지고 있다.

 

19세기 구속사 학파에 속한 신학자들은 벡, 호프만, 아우벨렌, 켈러가 있다. 그 가운데 구속사적 접근 방법을 가장 체계화한 신학자는 오스카 쿨만(O. Cullmann)이다. 성경 속에 나타나는 구속사를 설명하기 위하여 쿨만은 먼저 고대 그리스적인 시간 개념과 성서적인 시간 개념을 구분한다. 고대 그리스적인 시간 개념에 따르면 시간은 영원토록 순환하는 것이다. 모든 일들은 반복되는 순환 속에서 발생하기에, 오늘 일어나는 일들은 미래에 다시 반복된다. 이러한 순환론적 시간 이해 가운데 역사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러한 시간 이해는 곧바로 이원론적인 구원 이해를 낳는다. 시간이 무한정 순환하는 것이라면 구원이란 이러한 반복적 순환의 틀에서 자유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있어서 구원이란 시간 속에서 ... 하나님의 행동을 통해 일어난다는 생각은 전혀 용납될 수도 ... 없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구원이란 단지 시간의 순환 과정에 속박된 존재로부터 ... 저 너머의 세계, 곧 피안의 세계 속으로 탈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반하여 성경의 시간 이해는 직선적이다. 구속사적 시각은 역사를 직선적으로 이해한다. 역사에는 시작이 있고, 과정이 있으며, 종말이 있다. 역사는 무한히 반복되고 영원히 순환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서 마지막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성경의 기자들에 따르면 시간과 역사란 하나님의 목적을 지향하는 일종의 선적 운동(linear movement)이다. 시간이란 계속적인 반복이나 순환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을 지향하는 하나의 분명한 과정이다. 역사는 하나님이 설정한 목표를 향하여 움직이며, 미래란 과거에 선포된 약속의 성취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볼 때, 역사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마당이며 무대가 된다. 세계 역사의 모든 사건들 속에는 구원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 이 구원의 역사는 세상 역사의 틀 안에서 전개되는 동시에, 세계의 모든 역사를 포괄하는 틀이 된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적 틀 안에서만 그 의미가 획득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과정은 만물의 창조로부터 시작되어 인간의 창조, 이스라엘의 선택과 남은 자의 구원을 거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구원의 흐름 속에서 폭은 점점 좁아지지만 구원의 흐름은 단절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인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역사적 계시와 구원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구원 행위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중심이 된다. 성경은 구원의 역사적 과정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결정적인 사건으로 선포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결정적으로 계시하였고 결정적 구원의 사건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거쳐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다시 확대되기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은 사도들의 선포를 거쳐서 교회의 형성으로 이어지며, 마지막에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표상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도달하게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끝날 또는 마지막은 곧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그 시점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사적인 접근은 역사의 중심점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안에서 발견하며, 이 중심점으로부터 모든 역사적 사건들을 해석한다. 구속사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세계 역사 해석의 중심점으로 보는 역사관이다. 쿨만에 따르면, "구속사(救贖史)란 구속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역이 구약성서에서부터 예수의 재림 때까지 연결되는 하나의 시간적 선의 중간점을 형성한다는 역사관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진행하는 구속 역사의 진정한 중심이며 축이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중심점이며, 이 중심점으로부터 볼 때 역사의 온전한 시각이 얻어진다. 이는 틸리히가 역사 이해는 단지 시간의 물리적 전개에 의하여 결정될 수 없으며, 역사의 중심으로부터 고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연상시킨다.

 

역사는 물리적 시작과 시간, 공간 안에서의 발전의 마무리에서 이해될 수 없다. 역사의 의미의 시각에서 역사는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작이나 마지막에서가 아니라 역사가 그 뜻을 계시하는 그 점에서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결정적이다. 만약 우리가 이 점을 '역사의 중심점'이라고 부른다면, 또 다시 말할 수 있는 것은 시작과 마지막이 중심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중심이 역사 과정의 뜻에서 그 시작과 마지막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역사의 중심은 역사의 의의를 부여해 주는 원칙이 보이는 자리이다. 역사는 그 중심이 구성되는 그 사실에 의하여 구성된다. ... 그러한 중심에 의해서 시작과 종말이 결정된다.

 

정리하자면, 구속사적인 시각은 인간의 역사를 하나님의 나라를 지향하는 선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며, 하나님의 구속사는 창조로부터 그리스도의 사건을 거쳐서 미래의 종말론적 완성이라는 흐름을 거친다는 것이다. 또한 구원사적 흐름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역사의 중심점이 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부터 인간 역사의 모든 사건들이 해석된다는 것이다.

 

 

4) 구속사적인 종말 이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 속에서 전개된다. 우리는 고대 그리스적인 시간 이해와 비교하는 가운데 구속사적인 역사 이해를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전개되고 있으며, 이 구원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안에서 그 중심점을 가지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역사는 하나님의 목적이 실현되는 무대라는 것과 역사의 통일된 흐름은 피조물의 구원을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임을 고찰하였다.

 

피조물의 모든 역사는 마지막 목표를 향하여 움직이고 있으며, 우주적 역사의 목표는 창조된 우주를 하나님의 지배와 통제 아래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로 표상되는 역사의 목표는 피조물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은 구원의 드라마를 통하여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며 이 세계를 변혁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시킨다. 인간은 하나님의 나라로 초대를 받고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희망하는 동시에 실현하면서 살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구속사적인 시각에서 볼 때 하나님의 나라를 대망하는 기독교의 종말론은 적어도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종말에 대한 구속사적인 접근은 역사의 결정적 사건이 이미 역사 가운데 일어났으며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가운데 임재 했음을 강조한다.

 

둘째, 종말에 대한 구속사적인 접근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기다림을 강조한다. 이는 종말론적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한 것은 사실이지만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표상되는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궁극적으로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셋째, 종말에 대한 구속사적인 접근은 역사의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현재 가운데 앞당겨 다가와 있음을 주장한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역사 마지막에만 머무는 실체가 아니라 이미 현재 가운데 그 빛을 비추는 역동적인 실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구속사적 시각에 전개되는 기독교 종말관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성령의 강림 속에서 이루어진 과거의 역사적 사건, 둘째 미래에 있을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이라는 하나님 나라의 성취, 그리고 셋째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선취(先取)로서의 종말론적인 삶에의 참여이다. 구속사적 시각에서 전개되는 이 세 가지 요소는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며, 구속사의 완성과 하나님 나라의 성취라는 하나의 초점 아래 서로 연결된 것이다. 종말에 대한 구속사적인 접근은 구속사의 완성, 곧 하나님 나라의 성취라는 하나님의 초점 아래서 세 가지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내용을 두 가지 개념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와 둘째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변증법적인 긴장 속에서 살펴질 수 있으며, 셋째의 강조점은 하나님의 나라의 현재적 선취라는 개념으로 고찰될 수 있다. 이 단원에서는 "이미"와 "아직"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을 살펴보고, 다음 단원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선취에 대해서 고찰하자.

 

우리는 위에서 첫째 요소와 둘째 요소를 함께 강조함으로써 얼핏 보기에 모순적인 주장을 펼치고 있다. 한편으로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예수 안에서 도래했다고 말하며, 다른 한 편으로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 성취는 아직 미래에 과제로 남겨져 있다고 말한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닌가? 만일 모순이 아니라면 이 두 가지를 연결하는 논리는 무엇인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중심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의 마지막 시대가 이미 도래하였다. 위대한 종말론적 사건이 이미 역사 가운데 일어났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역의 초기에 이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였고, 따라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옛 시대는 가고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가르침은 신약성경의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특히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도래하게 된 새 시대의 전파자였다. 바울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절정에 도달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의 나라의 새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하는 역사적 전환점이다.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체는 이 위대한 역사적, 구속적 계시의 신비와 중심점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계시되었기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옛 세계는 끝나고 새 세계가 시작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이후를 살고있는 우리는 이미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역사의 방향에 대해서 미궁에 빠져 있지 않다. 이는 역사의 종말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속에서 앞당겨 일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성경은 역사의 최종적 완성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강조한다. 역사 안에서 시작된 결정적 사건은 약속의 성격을 띠고 있기에 그 약속이 성취될 최후 순간을 요청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대망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역설적 주장을 어떻게 결합시킬 수 있는가?

 

오스카 쿨만은 이러한 역설적 긴장을 결전의 날(D-day)과 승리의 날(V-day)을 구분함으로써 설명한다. 쿨만에 따르면, 그리스도인들은 결전의 날(D-day)과 승리의 날(V-day)사이에 살고 있다. 전쟁에 있어서 비교적 초기에 결정적인 싸움이 일어났으나 싸움은 계속될 수 있다. 그 싸움의 결정적 효과가 모든 사람에 의해서 인식되지 않는다고 해도 그것은 이미 승리를 의미한다. 그러나 전쟁은 불확실하지만 '승리의 날'까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신약성서가 시간의 새 구분을 인정한 결과로 의식하고 있었던 상태였다. 계시는, 십자가 위에서 일어난 사건이 곧 뒤따르던 부활과 함께 이미 끝난 결정적 싸움이었다는 그 선포의 사실 안에 확실히 있다.

 

그리스도의 오심 속에서 원수는 결정적으로 패망하였다. 세계대전에 비유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같은 사건으로서 전쟁에 있어서 결정적 승리의 사건이다. 상륙작전은 성공했지만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종전의 날이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미 전쟁은 한쪽으로 분명히 기울었다. 하지만 아직 최후 승리의 날은 도래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결정된 승리를 희망하면서, 마지막을 향하여 진군하는 병사와 같다는 것이다. 전쟁의 승패는 "이미" 결전의 날을 통하여 확정되었다. 하지만 "아직" 승리의 날은 오직 않았다.

 

쿨만에 따르면 바로 이러한 "이미"와 "아직"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에 기독교 신앙에 나타나는 새로운 종말론적 통찰이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일방적으로 미래만 바라보는 종말론도 아니며 이제 종말은 과거의 사건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종말론도 아니라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종말론적 미래란 그리스도와 성령 속에서 이미 존재했던 것을 ... 전개하며 완성시킴을 의미한다. 구속사적 시각의 종말론은 시작된 종말론과 아직 완성되지 아니한 종말론 사이의 건강한 균형을 유지하면서, 현재와 미래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미 성취된 역사의 운명과 아직 완성되지 아니한 역사의 종국 사이의 건강한 긴장이 기독교 종말론의 특징이다.

 

 

5)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선취(anticipation!)

 

종말은 역사 속에서 현실을 개방화한다. 구속사적인 종말 이해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속에서 승리를 쟁취하였다. 비록 아직 마지막 승리의 날이 오지 않았을지라도 그리스도인은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승리에 동참할 수 있다. 새 시대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능력 안에서 동터 올랐고 교회는 그 시대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뢰비트(Löwith)는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에 담겨 있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선취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모든 것이 '이미'와 '아직' 사이에 일어나는 역사적 성취의 심오한 모호성 가운데 있고, 이로 인하여 신자는 현재와 미래의 급진적 긴장 속에서 살고 있다. 그는 믿음을 가지고 소망한다. ... 이 때문에 그는 기다리는 것과 추구하려고 하는 것을 이미 향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적인 동시에 현재적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앙인은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선취(先取)를 발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향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하나님 나라의 선포, 성령의 강림은 종말의 시작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현재 가운데 임재해 있고, 그리스도인은 그 나라에 참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새 시대 속에 살고 있으므로 성경은 교회를 종말론적 공동체로 간주한다. 신약성경의 교회는 종말론적 사건을 선포하는 종말론적 공동체이다.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선취를 논함에 있어서 우리는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선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성령의 능력 속에서 체험된다. 둘째,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선취는 현재의 세계를 미래를 향하여 개방시킨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선취를 가져오는 데 있어서 예수 사건과 아울러 성령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 속에서 성취되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연합하는 사람 또는 현실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나님의 미래적 나라가 이미 현재 가운데 영향을 미친다고 할 때 그 가능성은 사람이나 피조물 안에 있지 않으며, 성령의 능력 가운데 있다. 미래의 영광은 이미 그리스도인을 비추고 있는 바, 이것을 인식하게 만들고 향유하게 만드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장차 올 시대의 축복을 미리 맛보고 있다. 이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선물이며 새 시대의 계시자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 존재를 새로운 존재 양식으로 인도하며, 동시에 우리의 역사를 종말의 새 역사로 인도하신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이미 미래의 열매를 맛보고 있다. 하지만 이 열매는 첫 열매에 불과하다. 우리는 미래 완성의 열매를 맛보면서 최종적 완성의 날을 갈망한다. 첫 열매란 장차 올 대추수의 첫 시작을 암시한다. 성령의 임재는 장차 올 최종적 완성의 맛보기(foretaste)를 의미한다. 이제 우리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으며 그 나라의 능력에 참여할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세상 질서 속에 침투해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최후 승리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으며 고난 받을 수 있다. 신앙인들은 이미 예수와 성령 안에서 역사 마지막에 일어날 사건들의 놀라운 감격들을 누리고 전파할 수 있다.

 

둘째,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선취는 현재의 세계를 미래를 향하여 개방하며, 오늘의 삶을 역사화 시킨다.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 가운데 이미 그 빛을 드리운다는 것은 현재의 역사가 미래를 향해 움직여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실상 기독교 신앙의 종말론은 이 땅과 무관한 하늘의 추상적인 영원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성서의 종말 이해는 현재의 역사를 과거의 결정적인 사건에 근거하면서 미래로 인도하는 종말론이다. 구속사적 시각에서의 종말 이해는 하나님의 나라 속에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이 땅의 미래를 인식한다. 종말에 대한 건강한 기대는 그리스도인들을 이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희망하는 가운데 그 나라의 실현을 위하여 책임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몰트만은 종말론적 희망 속에 담긴 역사의 추진력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신앙이 희망으로 전개될 때 신앙은 조용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게 되고, 참게 되는 것이 아니라 참지 못하게 된다. ... 그리스도를 희망하는 자는 주어진 세계와 타협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이 세계로 인하여 고난을 받기 시작하며 이 세계와 모순되기 시작한다. 하나님과의 평화는 이 세계와의 불평화를 뜻한다. 하나님 나라의 선취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키며, 그 기대와 희망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향한 삶의 촉진제가 된다. 하나님 나라의 선취를 맛보는 것은 땅에 매여서 사는 사람들을 자유케 하여 하늘의 삶을 구하게 하며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게 한다. 종말에 임할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사람은 지금 여기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데 부지런하다. "종말론적 동기, 주님의 재림이 아주 가까이 온 것으로 의식하는 것 등은 현재의 삶에 부정적 의미를 주는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중요성을 부여한다.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기대는 이생에 대한 책임을 상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진시킨다."

 

 

6)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종말에 대한 구속사적 접근의 대략적 모습을 개괄해 보았다. 종말에 대한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 우리는 전적으로 새로운 주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시작 또는 과정에 대한 논의와 마찬가지로 종말에 대한 논의도 역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라는 틀에서 다루어질 때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난다는 것을 우리는 강조하였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 종말론의 주제는 기독교 창조론, 구원론 및 섭리론의 주제와 상응하는 것이다.

 

우리가 창조, 구원, 종말 등과 같은 주제들을 다룰 때 우리는 전혀 다른 주제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주제들은 동일한 하나님의 사역을 여러 측면에서 살피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있게 만드시는 하나님이 피조물과 맺으시는 관계가 시작의 측면에서 살펴질 때 그것은 창조론이 된다. 피조물을 역사 속에서 돌보시는 하나님의사역이 역사 과정의 측면에서 살펴질 때 그것은 섭리론이 된다. 이 세계 가운데 선한 일을 시작하셨을 뿐 아니라 마지막 날에 완성하실 하나님의 사역을 마지막(종말)의 시각에서 살필 때 그것은 종말론이 된다.

 

종말에 대한 가르침은 창조, 섭리 및 구원에 관한 가르침과 일치하며, 믿음에 대한 가르침은 희망에 대한 가르침과 일치한다. 종말에 대한 구속사적인 접근은 곧 구원 사건에 대한 종말론적 접근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 속에서 이미 계시된 진리를 "신앙으로" 굳게 붙드며,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 가운데 종말적으로 실현될 영광을 "희망으로" 바라보며 나아간다. 칼뱅은 이미 기독교 강요에서 신앙과 희망 사이의 이러한 건강한 긴장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희망은 신앙이 이미 하나님의 참된 약속이라고 믿은 것들을 기대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나님이 참된 분임을 믿고, 희망은 이 진리가 계시될 그 때를 기다린다. 신앙은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심을 믿고, 희망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아버지 되심을 보여주실 것을 고대한다. 신앙은 영원한 생명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임을 믿고, 희망은 언젠가 그 사실이 계시될 것을 기대한다. 신앙은 희망의 기초가 되며, 희망은 신앙을 양육하며 지탱한다.

 

그리스도의 삶과 소명(召命)의 핵심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건강한 긴장 속에 있다. 기독교 신앙은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신앙과 앞으로 도래할 하나님 나라의 최종적 완성에 대한 희망으로 이루어진다. 역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안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대망하는 가운데 미래의 완성을 지향하는 점진적 진행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 "지금"의 시기는 하나님의 나라가 결정적으로 계시된 종말의 시기인 동시에 미래를 향하여 계속 전진하는 시기이다.

 

 

3. 요한계시록과 종말

 

요한계시록은 요한사도가 밧모 섬에서 성령의 감동함을 입은 후 그가 본 환상을 당시의 언어로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1] 계시록의 저자

 

* 계 1: 1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계시록은 서두에서 저자를 먼저 밝히고 있다. 물론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에는 틀림이 없다. 유독 계시록에서만 저자를 밝히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자신을 밝힘으로 ‘예수 그리스도 계시록’이라고 불러야 한다. 왜냐하면 요한사도는 계시받은 사실을 글로 기록하여 전달하는 기록자일 뿐이다.

 

 

2] 기록 목적

 

* 딤후 3: 15-17 - 15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계 1: 1에는 세 가지의 목적이 있다.

 

(1)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불신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의 책이다.

 

(2) 반드시 속히 될 예언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예언된 것은 반드시 역사적으로 성취되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지 아니하면 어떤 예언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신뢰할 수 없다.

 

* 벧전 1: 20 -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 마 24: 42, 44, 48-51 -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48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49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50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51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3) 예수 그리스도의 종들에게 주신 말씀이다.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고 알곡을 맺는 역할에 있어서는 모두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직책에 있어서는 목자와 양으로 구별된다. 따라서 계시록은 목자에게 주어 양을 양육하도록 하시는 질서를 내포하고 있다.

 

* 암 3: 7 -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 계 10: 7 -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3] 전달 계통

 

(1)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다.

 

(2)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에게 주셨다.

 

(3) 천사는 요한 사도에게 전달하였다.

 

요한은 보고 들은 모든 예언과 환상을 완전하게 기록하였다.

 

(4) 주의 종들에서 막혀버렸다.

 

주의 종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하여야 하지만 함구하므로 성도들에게서 재림 신앙을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말세의 주의 종들은 계시록을 통하여 성도들을 깨워야 할 사명이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 마 24: 45 -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4] 전 성경에 전개된 종말론

 

혹자는 종말론을 오해하여 계시록만으로 제한하는 오류가 있다. 올바른 종말론은 창세기로부터 전 성경에 이르는 구원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구약에 예언되었던 종말이 신약에 이르러 두 단계로 성취되었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미 성취된(already fulfilled)’ 종말과 ‘아직 완성되지 아니한(not yet completed)’ 종말 사이의 긴장 관계 안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은혜 시대를 사는 교회와 성도들은 이와 같은 긴장 관계 가운데서 종말론의 관계를 이해하여야 한다.

 

* 사 46: 10 - 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여호와 하나님은 처음부터 종말을 계획하시고 이것을 당신의 종들을 통하여 알리며 보이시고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시겠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종말론을 전개함에 있어서 멜데니우스의 주장(본질적인 면에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면에서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일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자비를)을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5] 표징

 

모세의 인도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광야 생활을 거쳐 가나안 땅에 정착할 수 있었다. 이것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 천국에 이르는 나그네의 삶을 보여주는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출애굽 하기 전 유월절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장자의 죽음을 피한 사건이나 홍해 바다를 건넌 사건은 하나님의 능력의 표징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두 가지 내용으로 표징에 대하여 가르치셨다.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하늘로 온 표적을 보이기를 청할 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마 16: 1-4 - 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시니라.

 

주님은 하루의 날씨 변화는 관찰할 줄 알면서 조상들로부터 예언되었던 메시아로 오신 자신을 알지 못했던 그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고 규정하셨다.

 

(2) 감란 산 위에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셨을 때이다.

 

* 마 24: 3 - 예수께서 감람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이르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가 되면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란이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대환란(마 24: 21)’임을 말씀하셨다.

 

* 마 24: 4-29 -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5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 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8 이 모든 것은 재난의 시작이니라. 9 그 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 때문에 모든 민족에게 미움을 받으리라. 10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실족하게 되어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11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1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14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15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이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17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18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19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20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28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6] 재림에 대한 소망

 

신약에는 25절에 한 번씩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주의 종들은 성도들이 재림에 대한 소망을 갖도록 하는 것이 최선의 과제임을 알아야 한다.

 

(1) 구약은 오실 예수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다.

 

하나님은 여인의 후손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것을 예언하셨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때에 나타날 상황도 알려주셨다.

 

* 창 3: 15 -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 시 40: 7 -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 사 35: 5-6 -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 사 61: 1 -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예수님은 안식일 날 회당에서 이사야선지자의 예언을 읽으신 후에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밝혔다.

 

* 눅 4: 16-21 -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 신약은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구약이 오실 메시아에 대한 약속이라면 신약은 그 약속에 대한 성취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다.

 

* 막 1: 15 -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3) 요한계시록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신약에 나타난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약속을 살펴보자.

 

* 요 14: 2-3 -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 행 1: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 히 9: 28 -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 히 10: 37 -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 계 1: 7 -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구약이 메시아가 오실 약속이라면 신약은 오신 메시야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는 것이요, 계시록은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을 완성하신다는 약속이다.

 

따라서 창세기가 성경의 시작이라면 계시록은 완성이요 결론이다.

 

* 계 22: 7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 계 22: 12 -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 계 22: 20 -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어떤 이들은 ‘속히 오리라’는 약속을 두고 이천년이 지난 현재에도 이루어지지 아니함을 두고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벧후 3: 4)’라고 조롱하며 성경의 말씀들을 약화시키는 무리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망언은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벧후 3: 8)’ 이 한 가지를 잊어버린 결과이다.

 

 

7] 계시록에 대한 핍박

 

요한계시록은 인류의 장래를 예언한 영원한 복음임에도 교회사 가운데 가장 많은 천대와 핍박을 받아왔다.

 

계시록을 잘못 해석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올바른 해석을 통하여 종말론적인 신앙을 소유하도록 가르치는 것을 핍박하는 것은 사탄의 영, 미혹의 영, 거짓 영의 역사로 인한 것이다.

 

왜냐하면 계시록은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이를 모독하는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모독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1) 핍박하는 자들

 

 말틴 루터(M Luther)

 

종교 개혁가였던 루터도 주관적인 관점에 의하여 야고보서, 유다서, 베드로후서, 히브리서와 요한계시록을 신약성경의 맨 끝에 두었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도교가 교시되지도 않았고, 인정되지도 않았다. 또한 성령의 영감도 느껴지지 않고 있다.’고 하였다.

 

 쯔빙글리(Zwingli)

 

‘계시록은 성서적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흥미도 없고 … 요한의 사상, 또는 말을 전달하고 있지도 않다.

 

나는 하고자하면 그 증언을 물리칠 수도 있다.’라고 하였다.

 

 제롬(Jerom)

 

'계시록에는 거기 있는 말의 수효만큼이나 수수께끼가 들어 있다.‘라고 하였다.

 

 유세비우스(Eusebius)

 

계시록을 기록한 사람이 사도 요한이 아니라 어떤 거룩한 영감 받은 사람이 쓴 것이라고 주장하는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Alexandria, 231-265)의 이론을 받아드려 외증을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본서를 복음적이 아니라고 비판하였다.

 

 라오디게아 종교회의(The Council of Laodugea)

 

AD 363년 라오디게아에서 개최한 종교회의에서 회칙 59조에 의거하여 32명의 회원이 참여하여 교회에서는 정경으로 인정된 신, 구약의 성경만 읽어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아울러 60조에서는 신약의 범위를 요한계시록을 제외한 26권만을 정경으로 인정하였다.

 

 각종 이단

 

이단들은 요한계시록을 자기의 임의대로 해석하여 적용하므로 바른 종말론을 정립하는데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계시록을 해석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요인이 되어 계시록이 핍박받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비근한 예로 계 7: 2의 ‘해 돋는 데로부터’라는 말씀을 해 돋는 데는 동쪽이므로 한국이라는 등식을 성립시켜 재림예수가 한국에서 나오게 될 것이라는 이단론을 퍼트렸다.

 

 자유주의 신학자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복음서의 영감설을 부정하기 위하여 인간의 이성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이적과 기사를 부정하고 역사적인 사실만 인정하였다.

 

따라서 계시록에 나오는 상징과 상징의 표현들을 근거로 계시록이 영감으로 기록되었음을 부정하였다.

 

(2) 요한계시록을 거부하는 이유

 

 사탄의 방해 때문이다.

 

계시록은 이 세상의 마지막을 예언한 책이므로 성도들에게는 기쁨의 약속이므로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기회가 된다.

 

그러나 사탄의 입장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아니하였으므로 본서를 거부하도록 미혹하고 있다.

 

* 계 12: 12 -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

 

 칼뱅이 주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기의 칼뱅은 그의 위대한 신학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요한계시록을 주석하지 않았다. 혹자는 칼뱅이 주석하지 아니한 계시록을 주석하면 문제가 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칼뱅 당시에는 재림의 표징들이 열리지 아니하였다고 본다. 왜냐하면 시대의 표징들은 주의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사야의 예언 때문이다.

 

* 사 29: 11-12 - 11 그러므로 모든 계시가 너희에게는 봉한 책의 말처럼 되었으니 그것을 글 아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그것이 봉해졌으니 나는 못 읽겠노라 할 것이요 12 또 그 책을 글 모르는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글을 모른다 할 것이니라.

 

본문에 나타난 글을 아는 자나 모르는 자가 예언서를 읽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글을 아는 자의 변명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본분을 회피함이요, 글 모르는 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알아야 할 의무를 망각한 변명에 불과하다.

 

다니엘서가 마지막 때까지 봉함할 책이라면, 계시록은 인봉하지 말아야 할 책임을 명심해야 한다.

 

* 단 12: 4 -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

 

* 계 22: 10 -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이 세상이 좋기 때문이다.

 

이 시대는 과학과 문명의 눈부신 발달로 인하여 세상이 살기 편하고 행복하므로 물질의 풍요로움을 축복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물질의 축복이 커질수록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의 자세는 작아진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질문이 성취된다.

 

* 눅 18: 8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상징의 표현들이 어렵기 때문이다.

 

계시록은 요한사도가 본 것을 당시의 문자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많은 상징적 표현이 나온다. 따라서 계시록을 올바로 해석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감동을 받지 아니하고 사람의 지식이나 지혜로 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다. 그러나 때가 차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열어주셔서 재림 예수에 대한 소망 가운데서 올바른 종말론적 삶을 살도록 깨우쳐 주실 것이다.

 

* 암 3: 7 -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 계 10: 7 -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이단들이 먼저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이단은 계시록의 내용을 올바로 해석하지 못하고 자기를 교주화하는 도구로 사용하여 사회적인 물의를 야기 하였다.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시록은 때가 찬 하나님의 경륜에 의하여 열려지는 책이다. 그러므로 현재는 드러나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개인적인 판단이나 편견에 의한 해석은 금기되어야 한다. 억지로 해석하려고 하지 말고 기도로 성령의 조명에 의지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열어주시기를 간구하며 기다려야 한다.

 

 

4. 요한계시록의 해석 방법.

 

 

1] 중복적인 해석[Recapitulation].

 

계시록을 7단계로 구분한다.

 

단계별로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내용이 중복적인 병행관계로 구성된 것으로 본다.

 

(1) 주장하는 원리.

 

핸드릭슨, 후크마[A. A. Hoekema],벌콥[L. Berkhof],모리스[S. L. Morris]등이 주장한다.

 

핸드릭슨[W. Hendriksen] : 계시록을 일곱 단원으로 나눈다. 단원의 범위가 일정하지 않지만 많은 학자들이 지지하고 있다. 이 분류는 극히 자연스럽다.

 

후크마[A. A. Hoekema] : 내게 만족할 만한 해석법은 핸드릭슨의 점진적 병행법[progressive parallelism]이다. 계시록을 7단계로 나누어 각 단원들이 병행을 이루면서 초림부터 재림까지, 교회와 세상에 대하여 진술하고 있다.

 

렌스키[R. C. Lenski] : 계시록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일곱 구분 설은 매혹적이다. 그 방법을 통하여 큰 변동이 7회나 나타나기 때문이다. 일곱 장소로써 계시록은 세상의 끝에 이른다.

 

(2) 7단계의 구분.

 

① 일곱 금촛대 사이로 다니시는 그리스도 : 1-3 장.

 

⒜ 1:5 - 초림 예수에 대한 비유.

⒝ 1:7 - 심판주의 재림 사건에 대한 비유.

 

② 일곱인으로 봉한 책 : 4-7 장.

 

⒜ 5: 5,6. - 초림 예수에 대한 비유.

⒝ 6: 16,17. - 불신자들의 재림관.

⒞ 7: 16,17. - 성도들의 축복.

 

③ 심판의 일곱 나팔 : 8-11 장.

 

⒜ 10-11 장 – 교회 시대사건의 비유.

⒝ 11:15,18. - 종말 시대의 대 심판.

 

④ 여인과 아이가 용과 추종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음 : 12-14 장.

 

⒜ 12:5,6. - 초림 사건 : 여인이 낳은 아이.

⒝ 14:14,16. - 재림 사건 : 최후의 심판.

 

⑤ 진노의 일곱 대접 : 15-16 장. 16:20. - 최후의 대 심판.

 

⑥ 큰 음녀와 짐승들의 멸망 : 17-19 장.19:11 이하 - 재림의 모습.

 

⑦ 용에 대한 심판과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의 출현 : 20-22 장.

 

⒜ 20:1-3. - 초림의 사건.

⒝ 20:4-6. -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교회시대.

⒞ 20:10. - 재림으로 말미암은 심판.

⒟ 20:11. 이하 - 새 예루살렘의 예비.

 

(3) 해석의 문제점.

 

① 일곱 금촛대 사이로 다니시는 그리스도 : 1-3 장.

 

⒜ 이미 부활 이후 영광을 얻으신 예수님께서 자기 교회를 위로하시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 1장이 초림과 재림에 대한 내용이라면, 2-3장은 무엇 때문에 기록되었다는 말인가?

 

② 일곱인으로 봉한 책 : 4-7 장.

 

⒜ 여섯째 인과 일곱째 인 사이에 인침 받은 십사만 사천의 무리와 보좌 앞의 무리를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전 세대를 포함하는 것으로 본다. - 4장이 어린 양이 심판 주로 인을 떼는 장면으로 시작하므로 모순이다.

⒝ 5장의 어디에도 초림이나 재림에 대한 암시가 없다.

⒞ 엡 1: 4의 말씀과 배치된다.

 

③ 심판의 일곱 나팔 : 8-11 장.

 

10,11장 교회시대 사건의 비유 : 초림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없다.

 

④ 여인과 아이가 용과 추종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음 : 12-14 장.

 

⒜ 12:5,6. - 초림 사건 : 여인이 낳은 아이 : 초림으로 볼 수 없다. 재림 직전의 대환난 때에 하나님의 교회들이 배출하는 두 증인 같은 참 된 종으로 보아야 한다.

⒝ 14:14,16. - 재림 사건 : 최후의 심판 : 20장 사단의 감금을 전 기간으로 볼 수 없다.

 

⑤ 진노의 일곱 대접 : 15-16 장.

 

16:20. 최후의 대 심판 : 일곱 대접의 마지막은 재림으로 대 재앙의 모습을 담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초림이나 교회 전체에 대한 기간에 대한 암시를 찾을 수 없다.

 

⑥ 큰 음녀와 짐승들의 멸망 : 17-19 장.

 

19:11이하 재림의 모습은 틀림이 없다. 초림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⑦ 용에 대한 심판과 새 하늘, 새 땅, 새 예루살렘의 출현 : 20-22 장.

 

⒜ 20:1-3. 초림의 사건 : 근거가 없다.

⒝ 20:4-6.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교회시대 : 재림으로부터 출발 한다.

⒞ 20:10. 재림으로 말미암은 심판.

⒟ 20:11 이하. 새 예루살렘의 예비.

 

 

2] 과거적인 해석[The Preterist Method].

 

계시록을 요한당시의 초대교회와 로마제국의 투쟁을 기록한 역사적 문건으로 본다. 따라서 기록연대를 A. D. 68년으로 본다. 그리고 당대의 사람 외에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1) 주장하는 원리.

 

계 17: 11은 네로의 회생으로 상징되는 도미시안황제를 가리킨다. 이때는 A. D. 97년으로 예루살렘의 멸망 후 27년이 경과한 시점이다.

 

계시록의 예언은 로마의 국운으로 성취 되었다. 마지막 심판은 A. D. 476년서로마의 멸망으로 성취되었다. 유일한 미래사적 예언은 21, 22장뿐이다.

 

(2) 3단계 구분.

 

① 유대교와 기독교의 갈등 : 1-12 장.

 

⒜ 우상숭배 : 당시의 황제 예배를 말한다. : 2-3 장.

⒝ 교회와 유대교 사이의 투쟁 : 4-12 장.

⒞ 6장 5, 6절을 당시 그 지방에서 포도 값이 폭등한 사실로 본다.

 

② 이교와 기독교의 갈등 : 13-19 장.

 

네로및 도미시안황제 지배하의 박해.

 

③ 미래사적인 예언 : 20-22 장.

 

⒜ 콘스탄틴으로 더불어 시작된 교회의 승리를 묘사한다.

⒝ 스튜아트[Sutart] : 미래에 성취될 예언으로 본다.

⒞ 그로티우스[Grotiuse] : 벌써 이루어진 일로 해석한다.

 

(3) 해석의 문제점.

 

① 성경적 가치를 무너뜨린다.

② 여섯째 인부터거부된다.

③ 계시록의 기록 연대로부터거부된다.

④ 계시록의 영감성을무너뜨린다.

 

 

3] 교회사적인 해석[The Church Historical or continuous Historical Method]

 

교회 역사에 나타난 사건이다. 즉 1세기 후반부터 세계 종국까지 전 교회의 역사와 진행과정을 순서적으로 배열한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결론을 맺게 된다.

 

플로리다의 요아킴[Joachim of Floris], 루터[Luther],위클리프[Wycliffe],벵겔[J. A. Bengel],알포드[Henry Alford],뉴턴[Isaac Newton],휘스톤[W. Whistom],엘리옷[Elliott],비트링가[Vitringa] 등이 지지한다.

 

(1) 주장하는 원리.

 

① 장차 있을 이교 로마제국의 일시적인 번영과 그 후 기독교의 힘 앞에서 쇠퇴, 멸망 : 첫째 인부터 여섯째 인까지.

 

② 배교 후 동, 서로마의 분열과 동, 서로마의 멸망 : 첫째 나팔부터 여섯째 나팔까지.

 

③ 종교 개혁의 역사 : 여섯째 나팔의 중간.

 

④ 교황 제도와 교황 제국의 발생, 특성과 활동 : 고트족[Gothe]의 서 유럽 정복에서부터 시작된다.

 

⑤ 교황 제도와 교황 제국의 예비적인 심판과 진노의 대접으로 인한 최후의 멸망 : 심판하려 오시는 그리스도의 강림, 이로 인한 결과.

 

⑥ 하늘에서 내려오는 예루살렘과 새 땅에서의 그리스도, 성도들의 통치를 통한 영광스러운 완성.

 

(2) 내용 구분.

 

① 첫째 인 : 로마제국의 일시적 번영.

 

② 둘째 인- 넷째 인 : 로마 제국의 쇠퇴.

 

③ 다섯째 인 : 디오클레시안황제 통치하의 그리스도인들의 순교.

 

④ 여섯째 인 : 콘스탄틴 황제하의 로마제국의 멸망에 대한 언급.

 

⑤ 첫째 나팔 : 아러릭 인도 아래 고트족이 로마 약탈.

 

⑥ 둘째 나팔 : 북아프리카를 정복한 겐세릭의 침공.

 

⑦ 셋째 나팔 : 전 유럽을 황폐케 한 아틸라 훈족의 침략.

 

⑧ 넷째 나팔 : 오도아케르에 의한 서로마 멸망.

 

⑨ 다섯째 나팔 : 투르크족에 의한 침략. 황충은 6-8세기의 모슬렘의 말을 상징.

 

⑩ 여섯째 나팔 : 유브라데 강가의 네 천사 : 터키의 세력, 강성과 확장. 펴놓은 작은 책 : 종교개혁을 상징.

 

11 장 : 이단이라는 명분으로 성도 박해.

12 장 : 교황시대 동안의 타락과 퇴보. 1일 1년설.

13 장 : 교황제도의 여러 가지 양상.

 

⑪ 일곱 대접의 재앙 : 프랑스 대 혁명과 그 결과.

 

17 장 : 로마 제국.

18 장 : 교황 제도.

 

⑫ 계시록의 1일은 1년을 상징한다.

 

(3) 해석의 문제점.

 

① 역사 속에 거대한공백기를남겨둔다.

 

②역사 속에성취된 예언으로부터 거부된다.

 

③ 서로마에집중된 예언에대하여설명하지못한다.

 

④상징의 올바른 해석을 벗어나고 있다.

 

⑤하루를 일 년으로 보는데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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