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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2)

하나님아들 2012. 10. 31. 23:58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2)

 

특별계시로 알려 주시기를 원하는 것들

 

 일반계시 혹은 자연 계시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그 영원하신 품성과 능력을 나타내시지만 거기서 사람이 간취해야 할 것을 충분히 간취하지는 못합니다. 죄의 암매로 사람의 정신이 흐려져서 보긴 하지만 깨닫지 못하고 듣긴 하지만 알지 못하는 것이 많은 까닭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의 몸으로 땅에 내려와 구원을 행하신다는 신비한 내용이나 하나님께서 특별히 보이려 하시는 여러 가지 내용은 사람이 일반 계시를 통해 그냥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특별한 계시로써 가르쳐 주시고 설명해 주셔야 알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쓰셔서 설명하는 것과 사람의 정신으로 하여금 그것을 깨닫고 이해할 수 있게 빛으로 비춰 주시는 일, 즉 성신의 사역으로 그것을 우리 마음에 심어 주사 깨닫게 하시는 일이 언제나 병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은 신인데 인격신이라는 것과 생명의 근원이요 생명 자체이시라는 것을 압니다. 또 하나의 큰 사상으로 사람이 하나님과 거룩한 관계를 맺고 하나님의 인도와 주장 아래 살 때에 가장 중요한 사상은 하나님은 주이시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바로 깨닫지 못하면 다른 것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른 모든 사실들은 하나님이 주이시라는 사실아래 종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 그 중에 특별히 이성을 가진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주가 되신다는 사실 앞에서 모두가 종입니다. 종이라 함은 모두가 그분의 지배아래 있는 자요 주의 명령대로 준행해야 할 자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주라든지 절대 대권으로 행하시는 분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나의 행복과 복리와 번영을 위해 내 곁에 계셔 주시는 행복론적인 신앙입니다. 그런식의 눈을 가지고 성경을 읽을 때 많은 문제가 생깁니다.

 

철학상 행복론

 

 행복이라는 말은 흔히 쓰이면서도 철학상 중요한 명제로 다루어진 용어입니다. 옛날 헬라 사람들은 몸과 마음이 다 같이 건전하고 필요한 것들을 모두 갖추어서 미와 지혜가 충족하고 정신이 발랄할 것 같으면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 신체와 정신의 행복, 그 중에서 특별히 마음의 건전성을 훌륭한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행복의 의미를 에피큐로스라는 사람들은 조금 더 확대하고 각도를 달리 해석하여 쾌락에 집중해서 생각한 철학적 사조가 나타났습니다.

 

 이런 헬라적 사상체계 가운데 있던 행복론이 그 후 중세 기독교에 들어와서는 '이 세상에서 항상 자비와 인내와 또 여러 가지의 덕을 행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가장 복락스럽고 아름다운 영원한 저 세상에 도달하는 것이다'하는 카톨릭적 교회 사상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것도 일종의 행복론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 믿고 천당에 간다'는 식의 관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복론에서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는 선이란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선이란 가장 큰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선이다 하는 것입니다. 벤담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이상으로 하여 행복은 쾌락의 양으로 결정된다는 공리주의를 내 놓았고 밀은 벤담의 공리주의에 쾌락의 양 뿐만 아니라 질도 고려해야 한다고 하며 공리의 원칙을 수정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선을 평가할 때도 그 기준은 결국 행복을 가져다 주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왜 인내하고 선을 행하느냐? 궁극적으로 행복을 얻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인내하고 선을 행해서 불행해질 것 같으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그것입니다.성경을 행복론적으로 이해하는 잘못이런 행복론이 기독교 사상 가운데도 있는가 할 때 그것은 성경 가운데도 많이 있습니다. 참고 인내한 자에게 영생복락이 있다는 사상이 없는게 아니지만 이 자체만으로는 행복론이 됩니다.

 

 시편 1편을 예로 "복있는 사람은 악한 자의 이론대로 행치 않으며 죄인에 길에 들어서지 않는 것이다"(1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행복론에 전적으로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최종적으로 신은 이러한 행복을 창조해 주시는 분으로서, 결국 신이 가지는 가장 큰 의의라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도덕적으로 높은 위치에 올라가도록 하여 행복을 얻게 하는 일이다'하고 생각하는 일이 많습니다.하지만 이러한 사상 가운데 성장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행복을 나에게 주시기 위해서 길을 열어 놓으시고 그 행복을 받도록 기다리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은 행복의 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까닭에 내가 불행하고 괴로울 때는 그 불행과 괴롬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마귀한테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동등한 입장에서 하나님은 행복과 평안과 기쁨과 즐거움만 주시고 마귀는 불안과 고통과 초조와 번민을 준다는 이원론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주이시지 행복의 신은 아님

 

 성경이 하나님에 대해서 크게 가르친 사실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성경을 자세히 공부해 볼 때 인간의모든 불행을 없애려고 애쓰시고 악한 신을 물리쳐 행복만을 주려고 한다는 것을 절대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주이다. 모든 것은 나의 명령과 내 의사 안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모든 것이 나를 위해 있을 뿐이지 너희의 행복과 불행을 우선적으로 거론할 게 아니다' 라고 명백히 가르치십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은 다 침묵을 지켜도 명백히 최후까지 품고 있어야 할 사상은 하나님은 주이시지 행복의 신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은 주 곧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하고 또 그분의 뜻을 체득하여 순종하고 준행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바 사람과 하나님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사상입니다. 행복이나 불행은 아무리 객관적으로 얘기를 할지라도 사람에 따라서 달라지는 주관적인 것입니다. 신앙을 행복론적으로 생각할 때 내가 없다면 행복이고 불행이고 없게 되고 하나님 또한 나의 존재라는 문제를 전제로 그 필요성과 존재를 생각하게 됩니다.

 

기독교의 이원론은 행복론에서 옴

 

 하나님은 주이시니까 대립하는 어떠한 신도 어떠한 피조물도 없습니다. 사탄이 감히 하나님 앞에 대립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천사와 마찬가지로 사탄 또한 종으로서 자기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욥의 시험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이유없이 경외하지는 않는다고 하여 사탄 자신이 그걸 증명해 보겠다고 합니다. 그 때 사탄은 하나님 보좌 앞에서 종의 하나요 부리는 신의 하나로 일을 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원론의 기본적인 근거가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면 기독교 가운데 표면에 부동하는 피상적인 행복론만 취해 가지고 나와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행복론적인 이론이 귀에 솔깃하니까 그것을 간단히 해 가지고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하는 말로 선전하는 것입니다. 현세에 있어서 인고하고 자선을 행하고 고요히 정결히 살아가면 내세에는 그만큼 영원한 복락 가운데서 더 큰 행복을 누린다 하는 중세 수도원적인 행복론 사상이 내내 흘러내려온 것입니다.

 

절대적인 주종의 관계

 

 하나님은 주가 되신 까닭에 이성의 피조물인 사람들은 그의 종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그 뜻을 나타내시사 알게 하시는 분은 주 되시는 하나님이고 그 뜻을 받아서 행해야 할 자는 종 된 사람입니다. 주종의 관계는 주 되시는 분이 당신의 의사를 표시하는 것이고 종 된 자는 그 의사를 받들어서 준행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의지의 관계인 것입니다. 즉 자기를 주 되시는 분의 의지에다 종속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해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대상이라고 비약할 일이 아닙니다. 물론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자녀이긴 하지만 그건 법적인 위치를 나타낼 때 쓰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실질상 주종의 관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곧을 것을 굽혀 놓으셨다 해도 우리가 '하나님, 무엇 때문에 그것을 굽혀 놓았습니까?'라고 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 있어서 이 관계는 완전하고도 엄격한 주종 관계입니다. 절대적인 주종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순종의 관계

 

 하나님만이 뜻하시고 의지를 친히 나타내시며 최후에 이렇게 해야 할 것이다 하고 결정하시는 분이십니다. 목표를 세워 주시는 분일 뿐만 아니라 이것은 이렇게 하라고 다 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종 된 사람은 오직 순종해야 하는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치고 그 뜻대로 행하여야 합니다. 명령을 내리시면 그것을 받아야 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자기 의지를 적극적으로 발동해서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바 한도를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사람이 하나님과 맺는 가장 정당한 관계라는 것은 명령하시는 분 앞에서 명령에 순종하는 관계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사랑을 베푸시는 분에게 사랑을 보답하는 것이 첫째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할 것은 명령하시는 분의 의사에 모든 것을 맡기고 전적으로 드려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용사들을 예로 거기에 그 사람들이 강렬한 종교적인 방도를 취하고 산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런 것을 쓰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도덕적으로 얼마나 훌륭했는가에 대해서도 쓰지 않았습니다. 시종일관 하나님의 뜻만을 순종한다고 목숨까지 걸고 나갔던 사람들이었음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하나님의 의사가 분명히 전달된 이상 기어코 그것을 하려고 하고 고통을 당해 가면서라도 이루어 간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훌륭한 종교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서 있어야 할 정당한 위치

 

 온전히 주의 뜻만을 받들어서 그대로 준행하고 나갈 때 종 된 자의 종교적인 심정은 어떠해야 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종 된 사람의 처지에서 보면 그렇게 섬기되 기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주의 명령을 절대시하고 받아 섬겨 나갈 때 그의 마음은 자연히 가장 두려운 심정이 됩니다. 이런 심정을 경외(敬畏)라는 말을 씁니다. 즉, 공경하고 두려워한다는 말입니다. 경건한 사람은 결국 주를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주를 두려워 하는 것에 지식이나 지혜의 근본이 있습니다. 사람이 서 있어야 할 정당한 위치에 있어야 명철을 얻어서 알아듣기 시작하고 이해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솔로몬도 사람이 지혜를 얻는 방식에는 조건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조건은 지혜를 얻어야 할 정당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1:7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자를 안다고 할 때도 요컨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하나님의 위치를 정당하게 이해할 때 비로소 거룩하신 분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당한 위치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당한 말은 다른 어떤 말보다도 거룩하시다는 말입니다. 한자로 거룩하다는 말이 성(聖)이라 해서 무엇이든지 보통과 구별되는 위치에 있을 때 쓰이긴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쓰는 말로는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그런고로 거룩하시다 할 때는 '하나님의 위치인 절대의 대권을 가지시고 항상 명령하시는 분이시며, 나는 그의 명령 일하에 언제든지 움직여야 할 중이다'라는 근거를 떠나서 다른 생각을 강조하면 정당한 기독교 신관이 아닙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오도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만 강조하게 됩니다. 틀이 말이 성경에 없는 것도 아니요 틀렸다는 것이 아니지만 이 말을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내용으로 강조하고자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대권자시며 그래서 당신 자신의 목적과 그 원인 때문에 모든 것을 움직이신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Soli Deo Gloria)'

 

'지혜에 대하여'

 

  '네가 무엇인가를 바로 보려면 먼저 하나님을 올바로 깨달아야 한다. 그러고서야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이 지혜이다' 솔로몬이 잠언을 말할 때 지혜의 근본은 주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이 말하는 지혜란 때때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아주 차원 높은 소피아, 제2위가 되시는 분 즉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한 말이기도 합니다. (잠8:23-30) 그렇지만 많은 경우 윤리 생활상, 정서 생활상, 혹은 인간 대 인간의 사회 생활상 지혜를 말하였는데 즉 어떤 것이 가장 유효한 생활 방식이냐 하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세상의 많은 현자들도 지혜와 여러 가지 근원을 이야기했지만 여기서 가르치는 지혜는 항상 목표가 뚜렷한 지혜입니다. 바로 사람이 참으로 슬기 있고 목표가 있어서 여호와의 가장 정당한 관계를 바로 인식하고 따라서 거기에 대한 바른 생활 감정을 늘 포회하고 있는 데 지혜의 근원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출처 : 보길예송교회
글쓴이 : 김완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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