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기도문 !!

새벽기도와 통성기도

하나님아들 2022. 7. 15. 00:06

새벽기도와 통성기도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가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그곳에 이르러 그들에게 이르시되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여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누가 22: 39-42)

 

예수님도 “습관을 따라” 기도하셨다. 누구나 자신에게 맞는 ‘기도 습관’이 있다. 어떤 사람은 소리 내서 기도할 때 은혜를 받고, 또 어떤 사람은 조용히 묵상하면서 은혜를 받는다. 기도하는 방식에 따라 은혜를 더 받고 덜 받고 한다. 나름대로 기도 습관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기도 습관이 개인적인 것도 있지만 집단적인 것도 있다. 누가복음 본문에서 ‘습관’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토스’(ethos)는 “기질”, “기풍”, “정신”, “성질” 등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비슷한 의미를 지닌 ‘파토스’(pathos)와 대비되는 단어다. 다만 파토스가 ‘개인적’ 개념이라면 에토스는 ‘집단적’ 개념이라는 점이 다르다. 개인의 성격과 기질을 말할 때는 ‘파토스’란 단어를 쓰지만 가정이나 사회, 민족의 집단적 특성을 말할 때는 ‘에토스’란 단어를 쓴다. ‘그리스 정신’, ‘조폭 기질’, ‘감리교 성질’ 같은 경우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습관을 따라” 기도하셨다면 이것은 당신 개인의 어떤 독특한 기도 방식을 만들어 하셨다는 것이라기보다는 당신이 속해 있는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의 기도 습관과 방식을 따라 하셨다는 것으로 풀어야 한다. 개인적 기도가 아니라 집단적 기도를 하셨다는 말이다.

개인의 ‘파토스’가 천차만별이듯 민족의 ‘에토스’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민족마다 기도하는 습관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같은 하나님께 기도를 하더라도 그 방식에서 미국 사람과 브라질 사람이 다르고, 아시아인과 유럽인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그런 식으로 우리 민족도 기도하는 법이 달랐다. 초기 부흥운동 기간 중에 은혜를 받은 교인들은 우리 민족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기도 습관을 따라’ 하나님께 기도하는 법을 만들어냈다.

 

새벽기도

오늘까지 한국 교회 안에 대표적인 ‘토착’ 신앙양태로 자리 잡고 있는 새벽기도가 정확하게 언제, 누구에 의해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 흔히 장로교의 길선주 목사를 새벽기도의 창시자로 언급하고 있지만, 그가 새벽기도회를 시작했다는 1906년 이전에 이미 새벽기도를 하는 교인들에 대한 선교사들의 기록이 나온다. 즉 1904년 9월 서울 이화학당에서 개학 기념 사경회가 열렸을 때 원산부흥운동의 주역인 하디 선교사가 인도했는데 은혜 받은 학생들이 “이른 아침에”(in the early morning) 기도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는 선교사 기록이 있다. 1905년 초, 개성지방 부인사경회에 참석했던 캐롤(A. Carroll) 선교사의 새벽기도 목격담은 흥미롭다. 그 때 선교사들이 별도 숙소에 들지 않고 큰 방에 휘장을 치고 윗목에는 한국인들이 아랫목에는 선교사들이 잠을 잤는데 한국인들이 ‘한 밤 중’에 일어나 기도를 한 것이다.

“아침 여섯 시가 되자 마치 아침을 알리는 시계처럼 건너편에 있던 교인들이 일어나 찬송을 부르며 기도를 하는 바람에 나도 일어나야 했다. 그런데 그 다음 날에는 새로 몇 사람이 오더니 새벽 4시에 사람을 깨워 무려 한 시간 반 동안이나 그런 식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그렇게 일찍부터 일어나 헌신하지 않아도 될 것으로 여겨 어두울 때는 자고 이야기할 것이 있으면 낮에 하라고 권면하였다.”

한국 교인들의 새벽기도를 선교사들이 만류하는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미국에서 건너온 선교사에겐 밤중에 일어나 기도하는 모습이 생소하게, 심지어 비정상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농경사회에서 새벽은 밤이 아니라 하루를 여는 ‘거룩한’ 시간이었다. 동트기 직전, ‘닭의 시간’으로 알려진 인시(寅時, 오전 4-5시)가 사람으로서는 가장 견디기 힘든 시간이지만(군대에 가서 보초 서 본 사람은 안다) 종교적으로는 신령한 기운이 충만한 시간이다. 그래서 동양의 전통 종교에서 기도는 이 때 한다. 불교의 새벽 예불이 그러하고, 도교에서 북극성을 향해 기도하는 시간도 이 때고 민간에서 부인들이 다른 식구들보다 먼저 일어나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하는 시간도 이 때다.

이처럼 한국인들에게 ‘새벽’은 기도 시간이었다. 하루를 신령(神靈)과 함께 시작한다는 거룩한 습관이 있었다. 그런 기도 습관에 몸에 밴 한국인들이었기에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인 후에도 아침 일찍 일어나 옥황상제나 천지 신령이 아닌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다. 이런 기도는 선교사들에게 배운 것이 아닌, 오히려 선교사들은 만류했던, 우리 조상들의 “습관에 따라” 자연스럽게 시작한 기도였다.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 교회 특유의 새벽기도 전통이 이렇게 해서 수립되었다. 이후 한국 교인들은 새벽기도를 통해 서양인들이 느낄 수 없는 깊은 은혜를 체험하였다.

 

통성기도

새벽기도가 고요한 시간의 ‘정적’(靜的) 기도라면 통성기도는 ‘동적’(動的) 기도다. 요즘도 부흥회나 집회 때마다 “주여!” 하고 시작하는 통성기도는 한국 교회의 특징적 기도라 하겠다. 이런 통성기도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 때다. 이 기도 역시 선교사들에게 처음엔 충격이었지만 이내 감동으로 바뀌었다. 존스(G.H. Jones) 선교사의 보고다.

"어느 주일 아침 집회를 인도하던 선교사가 회중에게 합심기도를 하자고 하였다. 그 순간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직접 역사하셔서 1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소리를 내서 기도하기 시작하였는데 점점 그 소리가 높아져 예배당 안을 가득 채웠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전혀 혼돈 없이 마치 대규모 연주자들이 악보를 보고 연주하듯 그들의 기도 소리가 서로 하나가 되었다는 점이다. 5백 명 혹은 천 명에 이르는 군중들이 모두 하나님을 향해 얼굴을 들고 한 목소리로 소리를 내서 기도하는 장면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전율을 느끼게 한다.”

선교사의 ‘합심기도’(united prayer) 요청에 한국인들은 ‘통성기도’(audible prayer)로 응답했다. 1천 명이 한꺼번에 소리를 내어 기도하였음에도 혼돈이나 무질서가 아닌, 거대한 관현악단의 연주처럼 완벽한 조화, 응집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개개인의 서로 다른 기도가 관현악단의 서로 다른 악기처럼 조화를 이룬 것이다. 그래서 선교사는 좋은 연주를 들을 때처럼 통성기도를 들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전율’(thrilling beyond description)을 느꼈던 것이다.

각자 소리를 내어 서로 다른 기도를 하면서도 모여서 하나가 되는 기도 - 이것이 통성기도의 매력이요 힘이다. 통성(通聲)기도는 말 그대로 통(通)하는 기도다. 하나님과 통하고 이웃과 통하는 기도다. 소리를 낸다는 것은 들어도 좋다는 뜻이다. 비밀이 없다. 그래서 하나가 된다. 그런데 캐나다 선교사 스코트는 한국교회의 통성기도는 당시(1907년) 시대 상황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일제의 침략과 국권 상실,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파탄이라는 극한적 상황에서 한국인들의 집단적 ‘탄원’ 형태의 기도가 나왔다는 이야기다. 일리가 있다. 통성기도는 고통과 상실, 아픔과 슬픔을 지닌 자들에게 적합한 기도다. 부자나 지배자들은 잘 못한다. 한(恨)이 많을수록 통성기도를 잘 한다. 그래서 통성기도를 통(痛)성기도라 한다. 한 많은 우리 민족에게 썩 잘 어울리는 기도다. 한국 교인들은 통성기도를 하며 한도 풀고 은혜도 받았다.

 

한국 토착교회의 기도 전통

새벽기도와 통성기도는 초기 부흥운동 기간 중에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 한국 교회의 ‘토착’ 신앙 양태들이다. 복음이 전해지기 전부터 우리 조상들이 기도하던 ‘습관을 따라’ 만들어진 우리 민족 특유의 기도 전통이다. 하나는 정적으로, 다른 하나는 동적으로, 우리 민족의 정서(ethos)를 그대로 담고 있는, 한국 토착교회의 집단기도 전통(ethos)으로 자리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기도는 전통에서 전통으로, 습관에서 습관으로 이어진다. 이스라엘의 기도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기도 습관을 따라 제자들이 감람산을 떠나지 않고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하였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제자들이)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행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