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영성
*출 처| 신대현 목사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으며, 그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셔서 사람으로 생령이 되게 하셨다. 사람이 '영적인 존재다'란 사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사람의 '영성'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세상을 다스릴 명령을 내리시면서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사람됨의 의미를 부여하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를 지닌 자이며, 또 단순히 창조된 자가 아니라 목적을 지닌 존재로 창조된 자였다. 곧 하나님과 사람과 온 세상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사람의 靈性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그 분의 명령을 따르며, 세상을 향하여 그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가운데에서도 나타나야 하는 것이었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의 질서를 따라서 그 안에 다양성을 채우고, 유지하고, 이어갈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 이후로 이 조화는 깨진다.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깨지고, 사람과 세상의 관계가 깨지며, 그 결과 하나님과 세상의 관계도 깨진다. 여기에 덧붙여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마저 파괴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 결과 사람은 두 모습으로 갈린다.
한 쪽은 본능을 쫓으며, 한 쪽은 하나님께로 나아가고자 한다. 가인은 본능을 좇았고, 아벨은 믿음을 좇았다. 본능을 좇는 자는 죄를 자랑하며(창 4:23, 24), 다른 한 쪽은 여호와의 이름 부르길 갈망한다(창 5:25, 26). 한 쪽은 아예 육신이 되어 버리며, 다른 한 쪽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고픈 마음을 표현한다.
여기서 사람의 범죄 이후로 나타나는 사람들의 영성이 공동체의 모습을 가진다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는 사람의 영적인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에게 육적인 본능이 있듯이 영적인 본능, 곧 하나님이 부여하신 영성의 근본에는 교회라는 본능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성은 개인적이지 않다. 끊임없이 관계를 요구하며, 그 안에서 표현되고 깊어진다.
그러나 창조 때에 부여하신 사람의 영성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사람과 세상과의 관계를 포함하기 때문에 사람의 범죄 이후로 사람과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영성의 자취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세상이라 함은 자연의 세계만이 아니라 인간 공동체의 기본질서를 포함하여 모든 창조 세계의 질서라고 할 수 있다.
사람과 질서의 파괴가 보이는 첫 사건은 아벨의 죽음이다. 관계의 파괴이다. 라멕이 살인을 저지르고 그것을 찬양하는 것은 질서 파괴의 발전된 모습이다(창4:23).
그런데 근본적으로 세상 질서의 형태 자체가 무너져 내린 경우를 창세기 6장 2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창 6:2).
이 구절은 단순한 사실의 설명이 아니라 하나님이 홍수로 사람을 지면에 쓸어버리시게 되는 근본 이유가 된다.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 년이 되리라'는 선언은 그 선언 이후로 120년 후에 홍수가 임할 것을 선포한 말이다.
왜 그래야 했는가? 이는 사람과 세상 사이의 영성이 그 이유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세상의 통치자로 보는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그들이 사람의 딸들을 자기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취한 것은 세상의 질서 자체가 무너져서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을 말한다. 통치의 질서가 무너지고 인간의 욕정이 통치의 기본 질서가 된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영성을 펼쳐갈 가능성조차 없는 세상이 된 것이다.
홍수 심판은 새로운 영성을 사람에게 안겨 주었다.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세상, 사람과 사람,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 새로운 질서가 세워졌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는 희생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길이 열렸고(8:21), 사람과 세상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생명의 질서가 세워졌으며(9:3), 하나님과 세상과의 관계는 홍수가 없을 것이 약속되었다(9:10).
크게 보면 희생 제사와 생명의 질서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이 세워졌다. 그러나 곧 세상은 영성을 상실해 간다.
바벨탑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도전일 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한 책임을 져버린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새로운 영성의 회복을 시작하신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는 하나님의 지시하시는 명령과 그것을 따르는 인간의 순종으로 나타나며, 인간은 하나님의 축복을 서로 나누며, 인간은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영성이다.
이 영성의 큰 그림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한 삶으로 인해서 상실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더 완전한 모습으로 회복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아담이 상실한 사람의 본분을 우리에게 다시 온전한 모습으로 가질 수 있도록 해 주신 분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1:28-29에 나온 사람의 본분에 대한 언급은 마태복음 28:18-20에서 새롭게 표현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새로운 피조물 된 우리의 본분 곧 우리의 영성을 정의하고 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 편만하고 세상을 채워서 세상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하는 것이 새로운 피조물이 가진 새로운 영성이다.
* * *
이 영성을 지닌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모습인가?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헌신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1절에서 7장 27절까지 말씀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설명해 주셨다. 우리의 선조나 문화에서 전통적으로 지혜의 근원으로 여겨져 왔던 것들에 대한 재고를 해야 한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 5:21, 22).
하늘의 가치는 그것을 좇는 자의 헌신을 요구한다.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 19:16, 17, 21).
여기에 나오는 근본 문제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에 대한 이해의 차이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대해 평가하시는 말씀 안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의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이는 아브라함이 내 말을 순종하고 내 명령과 내 계명과 내 율례와 내 법도를 지켰음이니라'(창 26:5).
아브라함은 율법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던 시대에 살았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목소리에만 순종한 것이 아니라 명령과 계명과 율례와 법도를 지켰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하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가치들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보인 헌신을 가리킨 말이다. 사람의 것을 버리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준비된 것이 주어진다.
하나님의 가치를 알지 못했다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향해 칼을 쥔 손을 들어 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은 사람을 통해서 이뤄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의 수단으로 되어지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으로 이뤄진다.
아브라함의 헌신에 따르는 영적인 발견은 「여호와 이레」였다. 마태복음이 보여주는 청년의 근심은 실제의 아브라함과 반대되는 '이삭을 드리길 포기한 아브라함'의 모습과 비교할 수 있다. 만약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이끌어 가시는 인생이라면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이 「여호와 이레」로 채워지고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우리를 시험하길 중단하지 않으실 것이다.
또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은 곧 그분의 제자가 되는 것이다.
누가복음 14장 25절에서 예수님은 허다한 무리가 좇는 것을 보시면서 그들에게 제자가 될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면서 제자의 모습은 어떤 지를 가르쳐 주셨다.
제자는 사랑의 우선순위를 아는 자이다.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미워하다'는 표현은 '덜 사랑한다'는 헬라어 표현이다. 예수님은 '미움'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우선순위'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제자는 하나님의 관심사에 삶을 드리는 자이다.
자기 십자가는 자기 관심사로 살지 않는 삶을 말한다. 하나님의 가치를 가진 삶이다.
제자는 인생에 대한 자기 계산과 전략을 내어드리는 자이다.
건축자(28-30절)와 어느 임금(31, 32절)의 비유의 중점은 '일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헤아려 보아야 한다' 사실에 있다. 인생은 망대를 세우듯이 계산으로 그 마지막 모양을 생각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제자가 되려는 자는 이 사실을 알고 자기 계산으로 제자의 삶을 출발하지 말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헌신으로 제자의 길을 들어서야 한다. 또 인생은 전략을 짠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우리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구원을 머리를 짜내고 수단을 동원해서 거절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 오로지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만이 유일한 방책이다. 다른 길로 들어서는 것은 멸망을 자초하는 것이다.
지혜 없는 자는 제자의 삶을 시작했어도 자기의 계산을 따라 시작했기 때문에 중간에 포기하는 일이 생기어 사람들의 조롱을 산다. 또 지혜 없는 자는 하나님을 대하는 일을 전략에 두기 때문에 상황에 좌우되는 인생을 살다가 패배한다. 이 두 비유의 결론에 주목하라: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인생에 대한 자기 계산과 전략을 내어드리며 하나님의 주권에 자신의 삶을 전적으로 맡기는 것, 그것이 제자의 본분이다.
제자의 가르침의 결론은 소금에 대한 비유이다: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땅에도, 거름에도 쓸데없어 내어버리느니라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눅 14:34, 35).
랍비들은 소금을 지혜의 상징으로 여겼다. 소금이 맛을 잃는 것은 곧 지혜를 잃는 것과 같다.
지혜는 무엇인가?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의 생각'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지식으로 얻을 수 없다. 오직 성령으로만 하나님의 생각을 알게 된다(고전 2:11). 지혜를 잃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잃는 것과 같다. 그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생각으로 이끌리는 삶을 살지 않는 모습이다. 그런 자는 제자가 아니다. 세상 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자일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지혜를 잃어 어리석은 자로 보이지 않으려면 위에서 말한 제자의 모습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제자의 모습을 지켜 가는 것은 자기의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하게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은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의 성취를 향해 모든 인생을 이끌어 가신다. 그 약속에는 그것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있기 때문에 반드시 이뤄지는 약속이다. 하나님은 성취하려고 하지 않으신 것은 아예 의지하지도 않으신다.
또 그 약속에는 그것을 어떻게 이루실지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다. 그래서 약속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삶 속에서의 하나님의 지혜의 표현이다. 이렇듯 지혜는 어떤 머리 속의 지식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고 있는 현재의 모습 안에서 발견된다.
제자의 삶을 살려면 사랑의 우선순위와 하나님의 관심사를 가지며, 인생에 대한 자기 계산과 전략을 버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며, 우리의 현재 삶이 그 약속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지혜의 표현인 것을 알고 겸손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겸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에게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모습은 겸손이다: '지존무상하며 영원히 거하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자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거하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거하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성케 하려 함이라'(사 57:15).
참 겸손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자기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어떤 의미인가?
빌립보서 2장 13절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종종 이 말씀은 자기의 마음속에 느끼고 싶은 만족함을 미래로 투영할 때에 사용된다. 그 이면에는 현실의 불만족이 혹은 미래와 비교하여 현재를 못하게 평가하는 마음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바울은 어떤 정황에서 이 말을 했는가?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2:11, 12).
'모든 것'은 곧 모든 상황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자신의 모든 현재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미래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현실에 대한 자족함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는 곧 현실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것이 선행된 것을 의미한다.
* * *
시편 114편에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모습이 나온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야곱의 집이 방언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구별된 정체성을 가진다.
또 그들은 성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토가 된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과 가지는 관계만이 아니라 사람이 세상과 가지는 관계가 회복된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인들의 궁극적인 영성은 사람의 참 본분을 회복하면서 하나님이 표현하고자 하시는 모든 모습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행하여 다니시려는 모든 기반이 되는 것이다.
이 땅에서부터 그것을 실천한다고 할 때 우리의 교회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전 영역이 하나님이 세우시려는 그의 나라가 되어야 함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대 전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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