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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의 영성운동의 새로운 방향

하나님아들 2022. 1. 12. 15:44

한국 개신교의 영성운동의 새로운 방향
*출 처|  김경재(한신대, 조직신학)
            
[1] 문제제기

필자에게 주어진 과제는 "한국 개신교내의 영성 운동을 진단하고 대안적 제안을 제시해 보라"는 것이다. 이 문제는 오늘 한국 개신교회를 새롭게 복음적 생명력을 지닌 교회로 갱신시키고, 21세기를 준비하며, 닥아오는 새로운 제3 천년년기 기독교 영성운동의 방향을 모색하는 일과 직결된다. 필자는 엄밀한 논문형식보다는 자유로운 맘으로 평소 생각을 피력해 보려고 한다.
나는 한국 개신교 교회의 영성운동에 많은 문제가 있다고 보는 사람이다. 먼저 문제점을 총체적으로 적시하고 그 한가지씩을 좀더 구체적으로 검토하려고 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한국 개신교내 영성운동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은 네가지로 한정시키려 한다.
첫째, 한국 개신교의 영성운동의 방향과 성격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영선신학의 오리엔테이션이 "영지주의적 영성"으로부터 "성육신적 영성"으로 전환하여야 한다.
둘째, 한국 개신교단내의 성령운동에 있어서 부성적 원리가 압도적으로 강조되는 "불 상징의 성령운동"은 모성적 원리가 강조되는 "물 상징의 성령운동"으로 보완되어 통전성을 회복해야 한다.
셋째, 오늘의 한국 개신교 부흥을 가능하게 하여던 원초적 능력이 성경에 뿌리박은 "말씀의 영성"이었음을 확인하되, 문자주의적 '성서주의' 경직성에서 해방되어 해석학적 영감론에 기초한 '역동적 성서신앙'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오늘의 한국 개신교의 독단적, 배타주의적 종파주의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선교신학의 관점에서 한국과 아시아 문화속에서 역사해오신 성령의 활동과 종교문화적 영성전통을 열린맘으로 대화하는 '열린영성'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넷째, 다원사회 속에서 인간영성의 다양성에 열린맘으로 접근하되, 기독교신앙의 자기정체성인 "십자가와 하나님나라 영성"의 스티그마는 정의로움, 긍휼히 여기는 마음, 하나님 앞에서의 겸비(미가서 6:8)로서 확인되는 영성이라야 한다.

[2] '영지주의적 영성'으로부터 '성육신적 영성'에로 근본방향 전환

필자가 여기에서 '영지주의적 영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영성신학을 지닌 한국교회의 영성운동을 포괄적으로 표현하는 신학적 상징어 이다. '영지주의적 영성'은 영지주의의 본질이 그렀듯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 '창조세게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면서 , 구원이란 '창조세계 현실로 부터의 구원'이라는 시각을 갖는 잘못된 영성을 말한다. 기독교 창조신앙에 의하면 '창조세게 현실'이 비록 죄에 의해 타락해 있고 변질되어 있다고 해도, 창조세계 현실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악이거나 사탄의 소유물이거나 거기에서 탈출해야 할 죄악의 도성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교회의 영성운동은, 퓨리탄적인 경건운동이 제공했던 창조적 에너지만이 아니라 매우 부정적인 시대제한적 신앙유산을 물려받았고, 보수신앙의 전통 속에서 영지주의적 영성이 암묵적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다시말해서 죤 번연의 천로역정이 상징하는 탈세계적, 몰역사적, 반물질적, 비공동체적 영성신학 체질이 그런 영지주의적 영성의 체질들이다. 온갖 종류의 임박한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몰역사적 비공동체적 영성신학은 말 할 것도 없고, 전통교회의 설교 멧시지가 지향하는 기본방향은 "구원이란 덧없고 죄많은 이세상을 떠나서, 영적 구원을 얻어 하늘나라에서 영생복락 누리는 것"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영지주의적 영성 신학'안에서는 역사현실 속에 정의, 평등, 자유,생명을 구현해 내려는 크리스쳔의 책임적 윤리의식이 나올수 없다.또한 이 세상 현실을 복음의 생명력과 예언자적 신앙으로 변혁해 내려는 실천적 생활신앙이 나올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 복음신앙의 중심에 십자가와 부활이 있고, 그 십자가와 부활신앙의 시작에는 성육신 신앙이 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고", 말씀이 육신을 이뤄 우리가운데 거하시고, 이 세상을 속량구원하기 위해 보혈의 피를 흘렸다. "성육신적 영성"이란 복음을 이해하되 하나님의 아가페적 사랑이 절대 지극하셔서, 영원이 시간 속으로, 거룩이 속(俗) 안으로, 하나님의 신성이 인성을 입고 창조세계현실 속으로 들어와서 옛 세계를 창조적으로 변화시켜 가신다는 믿음을 말한다. 교회의 존재이유와, 선교의 최종 목표는 사람을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데려가려는데 있지 않고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켜, 궁극적으로 '새하늘과 새 땅'에 참여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개신교교회의 일반적 영성신학은 대부분 자연과 초자연의 이중구조, 이세상과 저 세상의 이원론, 구원사와 세속사의 이원론,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 성과 속의 이원론으로 철저히 분리시키는 이원론적 영성이므로 '성육신적 영성'을 구현하고 있지 못하다. 그 결과 교인들은 이중적 가치체계를 가지고 이중적 생활을 하면서 생명론적 신앙을 경험하지 못한다. 이러한 '영지주의적 영성'은 성육신적 영성으로 근본방향 전환을 해야 한다.

[3] 부성적 성령운동과 모성적 성령운동의 통전성 필요

이 문제에 대하여 필자는 기독교사상(1998년 5월호)에서 나의 의견을 피력하였으므로 그 요지를 요약하여 잠시 언급하려고 한다.
기독교 전통에 의하면 성령의 체험은 다양하고, 성령체험에 관련된 신앙적, 신학적 은유들도 다양하다. 성령은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강한 불로서, 영혼의 내면을 비추는 진리의 빛으로서, 생명을 움트게하는 단비로서, 갈증을 해소시키고 생기를 돋게하는 솟아나는 샘물로서, 위로하고 치유하고 양육하는 어머니로서,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자유와 쇄신의 바람으로서 은유되었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성령체험은 성경이 증언하고, 역대 교회성도가 체험한 그 다양한 영체험의 은유들을 균형과 통전성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우려할만큼 편향적이고, 단편적이고 극단적이어서 위험 수위에 다다르고 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살아계신 하나님 체험을 함에 있어서, 하나님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원천이시기 때문에 교회전통은 아버지라는 은유를 사용했고, 계시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불가분리성과 일치적 동질성을 상징하기 위해서 아들이라는 상징을 사용했고, 하나님체험 속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치유, 양육, 사랑, 긍휼, 다함없는 무궁성을 표현하기 위해서 어머니라는 은유를 사용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부-성자-성령 이라는 상징조형 과정 자체가, 당시 기독교 세계를 지배하는 가부장적 문화의 패러다임에 의해, 그 모든 신학적 진술행위에 있어서 해석학적으로 영향받았다는 것은, 인간존재자체가 문화적 존재요 동시에 해석학적 존재이기 때문에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증언하는 모든 하나님 체험과 영 체험의 현상학적 서술과 은유적 표현들은 종교적 상징언어임을 다시한번 더 깊이 이해해야만 한다.동시에 경전이 증언하는 다양한 성령체험의 은유들을 그 조화, 균형,그 통전성에서 이해하는 신학적 통찰이 요청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의 성령운동과 영체험에 관한 현상학적 서술은 매우 강렬한 남성적 이미지인 "불"의 이미지로서만 단색화 되어 있다. 그 결과 성령체험이 유연성과 다양성을 결여한체 부성적 권위주의, 타율적 반지성주의, 과잉적 심리반응으로서의 격정주의, 심지어 광신적 열광주의에로 성령운동이 치닫는 탈선적 현상까지 나타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개인과 가정과 신앙공동체를 새롭게 거듭나게 하고, 성화시키며, 치유능력과 생육능력을 지닌 창조적 역동성으로 성령의 현존이 작동하지 않고, 특수체질을 가진 이상한 종교집단의 특수체험으로 인식되면서, 한국교회는 초대교회의 영적 지도력과 도덕적 신뢰감을 상실해 가고 있다. 부흥회와 특별집회는 의례 열광적 도가니 속으로 사람들을 빠져들게 하여, 입신 방언 예언 기사이적등을 실증적으로 체험해야하는 곳으로 일반 한국 사람들에게 비춰지고 있다. 수 많은 열광적 부흥집회가 열리고, 놀라운 종교적 체험을 하는데 한국 개신교는 점점 사회적으로 도덕적, 영적 신뢰도를 잃어가고 문화변혁의 창조적 에너지로서 더 이상 기대감을 얻지못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임재체험, 곧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임재 체험과 성령체험은 불가분리적인데, 여하튼 성경의 사람들이 영적 현존체험을 할 때에 겪는 원초적 체험이 불체험이다. 왜 성령의 임재를 경험할 때 불체험으로 경험되는 것일까? 왜 거룩체험을 하는 인간존재는 그 영적 가슴의 중심에서 뜨거운 불을 경험하는 것일까? 그 이유 설명은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불은 첫째, 태워버리는 힘으로서 부정(不淨)하거나 불의(不義)한 것을 심판하고 태워버리는 하나님의 거룩체험이기 때문이다. 둘째, 불은 태양처럼 모든 생명 에너지의 원천이고 빛의 근원이며, 매우 강렬한 역동적 힘의 상징이다.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거룩한 불"은 피조물을 향하신 무제약적 "긍휼과 사랑의 역설적 표현"이다. 사랑하는 자의 가슴은 불처럼 탄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특히 셈종족의 종교문화 배경에서 불체험은 하나님의 영체험의 제 1차적 상징성이 되었다. 그리고 그 영체험의 "불의 상징성"은 신적 거룩성 속에 내포된 부성(父性)의 상징이 되었다.그러한 불이 지닌 상징성의 변용형태가 빛의 상징이다. 하나님은 거룩한 빛, 영광의 빛 가운데 계신다.
그러나 성경안에는 하나님의 임재체험, 하나님의 영체험을 물로서 상징하는 또 하나의 다른 대극적 상징이 있다. 물이 지닌 상징성은 불에 못지않게 하나님의 영체험을 바르게 묘사할 수있는 은유가 된다.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렘17:13) 이시며, 영의 사람 그리스도의 말씀은 사람 속에서 항상 솟아나는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요4:14)로서 묘사된다.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오는 거룩한 성령은 "생명수의 강"(계22:1) 으로서 은유되며 생명나무를 기르고 열매를 밎으며, 그 나무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 쓰인다. 사람은 누구나 "물과 성령으로 거듬나야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요3:5) 이라고 에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물은 세례의 물이면서도 사람이 어머니의 모태에서 탄생할 적에 그 안에서 태어나는 포태의 양수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의 시인은 주께서 찾아오셔서 "땅에 물을 데시고, 밭을 단비로 적신다"(시65:10,미6:7)고 노래했다.
성령의 임재 체험과 성령의 신적 속성을, 물, 솟아나는 샘, 흐르는 강, 내리는 이슬과 단비등으로 은유하는 것은 왜 그러한가? 두 말할 것도 없이 물이 지니고 있는 정화능력, 생명을 움트게하고 육성시키는 생육능력, 신선하게 다함없이 솟아나는 자발성과 그 무궁성, 유연성과 역동성, 평화성과 자기겸허성등을 모두 내포한 상징능력 때문이다. 물이 지닌 이러한 상징성은 부성적 이미지라기 보다는 모성적 이미지 이다. 왜냐하면 모성이 지닌 여러가지 기능적 속성들 곧 생명을 새롭게 잉태하고, 생산하며, 육성하고, 치유하며, 긍휼히 여기고, 자기희생하는 창조적 능력으로서의 사랑의 속성을 물이 가장 잘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물은 성령체험의 모성적 성격을 상징하는 기본 상징이다.
성경이 증언하고, 역대 신앙전통이 증거하는 성령임재체험에 관한 이 두가지 임재 패러다임이
그렇게 분명할진데, 한국교회의 단일극성적 불체험으로서의 성령체험 일변도는 여러가지 신학적으로 문제성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우선 그렇게 되는 여러가지 종교심리학적, 종교사회학적, 문화인류학적 분석이 있어야 왜 한국 교회가 유독히 "불체험으로서 성령강림"을 강조하게 되는가 밝혀질 것이다. 우선 한민족의 민족적 영성의 원형적 특질이 밝음, 빛, 태양, 불을 흠앙하는 민족인 것이다. 이러한 "불과 밝음을 추구하는 한민족"의 집단적 민족심성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한국인의 종교적 영체험은 "불 지향성"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밝음과 불을 지향하는 한민족의 원초적 집단무의식적 영성은 예술, 건축, 종교의례, 장례예법등등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한민족은 사색적인 민족성을 지녔다기 보다는, 감성적인 예술적 재능을 지닌 민족이기 때문에 즉흥적이고 감정적이며, 불지향적이다. 마지막으로, 지난 근대200년간 한민족 사회의 근대화, 공업화, 산업화등 급격한 사회변동은 사람들의 심성을 조급하게 만들었고, 자극적이게 만들었고, 매우 격정적이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을 총체적으로 한국교회의 성령체험을 불체험 일변도로서 고착시키게 되었고, 불체험으로 편중화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한국개신교의 영성운동은 불상징으로 표현된 느 부성적 원리만을 강조하지 말고 물상징으로 표현되는 모성적 원리를 함께 강조하여 통존시켜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4] 역동적 성서신앙과 열린신앙에로 패러다임 전환

오늘 한국 교회를 일으킨 그 창조적 힘도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성경사랑에서 솟구쳐 나왔고, 오늘 한국 그리스도인들과 한국교회의 성숙을 가로막고 있는 것도 잘못된 성서주의에서 나온다.
한마디로 말해서 '성서영감설'의 해석학적 이해문제 이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씌여진 놀라운 구원계시적 능력의 책인것을 진정한 그리스도신자라면 부인할 사람없다. 그러나 과연 그 '영감성'을 문자주의적으로, 배타주의적으로, 계시독점적으로 이해 할 것이냐, 아니면 영적으로, 변증법적으로, 개방적 계시론으로 이해 할 것이냐에 따라서 한국교회의 영성훈련방식과 그 태도가 갈라지게 된다.
과연 성경은 위대한 하나님이 주신 인류구원의 계시적 경전이다. 수천년동안 불교, 유교,도교등 인류고등종교문화가 한국에 들어왔었고, 그 종교의 경전이 있었지만 언제나 양반, 귀족, 지식인, 상류계층에 독점되고 제한되어서 민중들은 언제나 영적으로 배고팠고 목말랐다. 그러다가 성경의 한글번역과 함께 개신교 복음전파가 일어나자, 우리국민은 수천년 영적 갈증을 풀수 있어서 깜깜했던 영의 눈이 환하게 열리게 되었다. 한국교회 신앙조상들의 성경사랑과 성경공부를 통해서 얻은 그 영적 에너지의 풍요로움과 창조적 능력은 한국사회를 변혁시키는 에너지 원동력이 되었고, 한국 교회의 강단, 영성훈련, 부흥사경회, 구역집회는 모두 성경을 중심으로 이뤄지게 되었다.
그러나 점점 우리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성서해석에 있어서 문자주의적 영감론은 점차로 한국 개신교를 독단주의, 배타주의, 계시독점주의, 진리독점주의 집단으로 변질시켜갔고, 하나님 교회의 우주성과 보편성과 유연성을 상실시켜왔다. 뜨거운 신앙, 확고한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곧바로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문자적으로 절대 고집하는 것이라는 훈련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불필요한 충돌과 마찰이 끊임없이 발생하게 되고, 한국사회는 한국 개신교를 매우 배타적인 종파집단으로 규정하는 풍조가 형성되게 되었다. 종교와 자연과학과의 불필요한 충돌, 기독교와 전통종교와의 긴장갈등, 같은 기독교 안에서 성서해석상 차이로 말미암은 형제에 대한 무서운 단죄,등등 그 폐단과 손실이 너무도 많다. 그결과, 오늘 한국 개신교는 성서가 증언하는 온 우주를 창조하신 유일무이하신 영원자 하나님을 성경이라는 경전안에 유폐시키고 제한 시키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 아무리 성경이 계시의 경전이요 위대한 책이라 할지라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증언하고 가리키는 책이지 하나님을 제약하고 갇우어 놓는 그런 능력의 책은 아니다. 이 간단한 진리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한국 개신교는 성경을 우상시하는 종교로 전락하며, 그것은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에 위배된다.
우리가 신학적으로 볼 때, '성경의 영감성과 그 해석의 문제'는 곧바로 기독교신학의 본질적 핵심문제이며, 이 짧은 글 안에서 그 바른 이해를 논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지금 한국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일부 개신교 교회들이 복음주의라는 이름을 독점하고 그 진리성의 표적인양 목청을 높혀 열 올리는 배타적 '문자주의 성경해석론'은 대중을 잠시 끌어모을런지 모르나 결코 한국사회를 오늘과 내일 창조적으로 변화시킬 복음적 생명운동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반짝이는 광물이라고 해서 모두 금이 아니듯이, 뜨겁다고 해서 다 좋은 것도 아니며, 열심있고 대중을 감동시킨다고 해서 반드시 참 복음적인 것이 아니다. 2,000년 교회사 속에서 보면 십자군 전쟁이나, 장미전쟁에서 처럼 잘못된 오도된 뜨거운 종교심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한가 보여준다. 특히 한국의 타종교, 그 중에서도 불교와의 관계에서 문자주의적 성경해석에 기초한 개신교 교회가 보여주는 배타적 태도는 위험수위에 도달했다. 한국 사회의 열려진 여론은 그러한 독단적 개신교를 점점 외면하고 결과적으로 복음전도의 문을 좁게만들고 마침네 닫게 할 것이다. 한국 사회 속에서 기독교를 내 신앙 기초토대로 받아드릴 바에냐 카톨릭교회를 나가겠고 개신교 교회에는 관심없다는 풍조가 한국 일반사회에 확산되고 있음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5] 십자가의 영성과 하나님 나라 운동

영성과 영성 운동은 눈에 보이는 객관적 판단기준을 가지고 쉽사리 그 진위를 말 할 수없는 신비한 차원이다. 그러므로 교회사 안에는 다양한 영성운동이 있어 왔고, 시대와 문화와 역사적 정황에 따라서 강조적과 패러다임이 다른 다양한 영성운동이 있어온 것이다. 초대교회 오순절 영성, 사막교부들의 영성, 중세 수도원의 영성, 종교개혁의 말씀의 영성, 경건주의 운동의 영성, 해방시학과 민중신학이 영성이 다 그런 예들이다. 그러나 아무리 겉 모습이 다르고, 그 영성신학의 강조점에 차이가 있을지라도 복음적 영성운동, 그리스도교 영성신학의 본질적 특성은 항상 간직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십자가의 영성" 과 "주기도문의 영성"이라는 말로 압축하려고 한다.
"십자가의 영성"은 자기 비움을 통한 낮아짐의 영성, 자기희생을 통한 대속의 영성, 자기부정을 통한 새 창조의 영성, 고난과 죽음을 통과한 생명과 부활의 영성이다. 한국 개신교의 영성운동이나 이론이, 각 교단의 특징과 다양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안에서 명실공히 진정한 십자가의영성이 살아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두 이교적이고 비 신앙적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과 글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하였으니, "십자가의 영성"이 이론과 상징과 설교와 책과 성명문으로서가 아니라 삶을 통해 성육화 되고 있느냐가 관건이라는 말이다.
주기도문을 통해 드러난 예수님의 영성은, 맨 최초 예수 제자공동체가 추구해가갔던 영성운동의 성격이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주는 지침이 된다. 주기도문 영성의 중심에 '하나님 나라'의 생명현실이 숨쉬고 있다. 그 하나님 나라가 적어도 이스라엘 신앙의 법통을 성실하게 이어가는 것이라면, 그 절대구성요소로서 정의로움에 대한 목마름, 가난하고 약한자에 대한 긍휼과 사랑, 그리고 마지막 신비이신 하나님 앞에서 겸허한 자세를 가진 그 분과의 동행(미가6:8) 을 사람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고백하고 실천하는 영성이라야 한다.
오늘 일천만 신도 교세를 자부하고 자랑하는 한국 개신교 영성 안에, 위에서 말한 세가지 곧, 정의로움, 긍휼히 여기는 마음, 하나님과 겸허한 동행이 살아 있는가? 두려울 뿐이다. 귀있는자는 오늘날 성령이 교회에게 말하는 소리를, 저 앗시시의 성자 프라시스가 그 때 그 장소에서 들었던 것 처럼 미세하게 들을 것이다. "프란시스야, 내 집이 허물어져가고 있구나, 내 집을 바르게 세우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