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의 영성 훈련, 그 디딤돌 마련을 위하여 *출 처| 달라스 월라스 박사 그리스도인의 영성 훈련 영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산업화 시대를 지나 지식 정보화 시대로 넘어오면서 내면 세계에 대한 목마름은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고조되고 있다. 주변의 변화 속도가 급격해질수록 밖으로 눈을 돌려 실용적 기술과 지식을 습득하기에 바빠진다. 그 사이 정리되지 않은 채 헝클어지고 있는 내면은 불안을 호소한다. 사실 불안과 두려움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 모두에게 당연한 귀결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만이 그 근원을 치유받고 고통중에도 평안을 지켜갈 수 있는 것이다. 영성에 목마른 시대, 개혁을 예고한다 「기독교 영성」을 저술한 류기종 교수는 그의 책에서 20세기 후반을 ‘제4의 영성 운동의 태동기’라고 본다. 이미 역사에 세 번의 커다란 영성 운동이 있었다는 전제에 따른 것이다. 첫 번째는 4세기 초 사막 교부들의 영성 운동이다. 로마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교회와 교인수가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교회의 세속화와 교권 정치, 그리고 오랜 교리 논쟁 등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이집트, 시리아, 팔레스틴 등지의 사막이나 산간 계곡 등지에서 기도하고 수도하며,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체험을 추구했던 운동을 말한다. 두 번째는 12세기 이후에 일어난 수도원 운동이다. 중세 교회의 교권 정치, 형식주의, 세속화와 타락 등에 대항하여 일어난 프란시스파와 도미니크파의 수도원 운동과 청빈 운동을 말한다. 세 번째는 16세기 이후의 종교개혁 운동이다. 루터와 칼빈, 웨슬리로 이어지는 종교개혁 운동과 그 결과로 일어난 성화 운동과 청교도 운동, 경건주의 운동 등이다. 그리고 이제 다시 영성 운동이 일어날 시대적 표징이 무르익고 있다는 것이다. 극도의 산업화, 기술 문명, 물질주의의 여파로 현대인들은 심각한 인간 소외, 고독감, 영적 빈곤을 경험하고 있기에 인간의 내면성에 대한 추구와 함께 영성에 대한 강한 요구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류 교수의 전제대로라면 지금은 제4의 개혁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이다. 교인의 양적인 팽창이 가져온 교회의 광범한 세속화는 교회로부터 생명력을 앗아가고 있다. “교회에 다녀도 변화되지 않는다”는 무서운 현실이 우리 앞에 있다.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진정한 교회가 무엇인지 채 맛보기도 전에 회의와 염증을 토로하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다. 영성의 일반적인 의미는 이처럼 답답한 신앙 현실에서 ‘영성 운동’은 또 하나의 탈출구인 양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운동이든지 짧은 시간에 대중화되면 그 사이에 본질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영성은 워낙 다양한 영역에서 사용하기 때문에 그 개념이 혼동되기 쉽다. 그래도 장신대 오성춘 교수는「예수님의 이야기로 가득한 교회」라는 책에서 영성을 매우 쉽게 설명하고 있다. 요약하면 이렇다. 영성은 어떠한 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든지, 또는 누구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예를 들면 스토아 철학자들은 소크라테스의 영성을 추구했다. 이들은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자기의 정신으로 내면화시켜서, 소크라테스의 정신대로 살려고 하였다. 그의 인간됨과 삶을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했으므로 그의 정신을 본받아 사는 것을 최고의 덕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처럼 영성이란 용어는 자기가 보기에 가장 이상적인 정신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여 그 정신을 실천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거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최고의 가치와 이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사람마다 추구하는 영성은 다를 수 있다. 그러니까 불교를 최고의 이상으로 따르는 사람은 불교 영성을 소유하게 되고, 기독교를 최고의 이상으로 따르는 사람은 기독교 영성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 내에서도 복음주의 노선을 최고의 이상으로 따르는 사람은 복음주의 영성을 소유하게 되고 자유주의 노선을 따르는 사람은 자유주의 영성을 소유하게 된다. 그렇다면 기독교 영성과 일반 영성의 내용적인 차이점은 무엇인가? 오 교수는 같은 책에서 그 유사성과 독특성을 이렇게 구분한다. 먼저 유사성을 살펴보자. 첫째, 스토아 영성이 역사상에 실제로 생존했던 한 인격,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본받는 것이라면, 기독교 영성은 역사적 예수의 삶과 인격과 정신을 본받아 살며 그의 성품을 그리스도인 속에 형성하려고 한다. 둘째, 스토아 영성이 소크라테스의 삶의 스타일을 자기 삶의 스타일로 삼아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실천하려고 하듯이 기독교 영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작은 예수가 되어 살고자 힘쓴다. 셋째, 일반 영성이 일정한 법칙에 따라 끊임없이 엄격한 자기 훈련을 쌓으며 자기가 최고의 이상이라고 판단하여 받아들인 정신을 구현하려고 하듯이 기독교 영성도 훈련을 강조한다.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 살기 위하여 청빈, 고독, 침묵, 봉사, 순종, 고백, 기도, 금식, 말씀 훈련 등 여러 가지 훈련 방법을 개발하고 이 훈련을 생활화하기 위해 힘쓴다. 기독교 영성은 무엇이 다른가 이처럼 일반 영성은 역사적 인격의 정신과 사상과 삶을 본받으려는 인본적이고 수평적인 영성이다. 그러나 기독교 영성은 이러한 요소와 아울러 이를 뛰어넘는 독특성을 갖고 있다. 인본적이면서도 동시에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하나님 중심의 수직적 영성이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영성은 역사적 예수의 정신과 삶을 계승하려는 인본적인 요소를 가질 뿐 아니라,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찾아오셔서 직접적으로 교제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를 추구하는 하나님 중심의 영성인 것이다. 일반 영성은 엄격한 자기 훈련과 수양을 통하여 자신의 성품을 바꾸려는 인간적인 노력을 강조하는 데 반하여, 기독교 영성은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임재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그분께서 우리 안에 의의 열매, 빛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주신다는 점에 초점을 맞춘다. 즉 기독교의 영성은 구원받은 성도가 살아 역사하시며 함께 하시는 예수의 영과 교제를 나누며, 그분의 인도와 도움을 받아 온전한 인간의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의 정신과 삶을 따라가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철저한 자기 부정과 자기 포기, 겸손과 무소유의 실천, 절대적 신뢰와 순종, 깊고 철저한 사랑의 실천, 새벽 묵상과 처절한 산기도 등 영성 훈련의 모범을 보이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은 기독교 영성의 뿌리이며 생명을 걸고 따라야 할 모범이다. 세속 영성의 굴레에서 영적 분투의 삶으로 그러나 예수님의 모범적인 삶을 따라가는 일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구원의 문에 들어서서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르려고 하면서부터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육신의 생각이 내면의 장애물로 부각되기 시작한다. 여기에 적극적인 순종을 위한 노력 곧 훈련이 요구된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라”(롬 8:13). 여기서 ‘죽이라’는 동사는 노력 또는 행위를 요구한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성령의 요구에 따라 적극적으로 살아야 하며, 영의 일들에 사로잡혀 살아야 하며, 영으로써 죄악된 소욕들을 죽여야 한다. ‘성령의 요구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의 생각을 집중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날선 검처럼 예리한 말씀으로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며 이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분투하는 것을 말한다. 성령님은 히브리서를 통해 우리의 분투를 격려하신다. “너희가 죄와 싸우되 피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히 12:4). 이처럼 죄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신자들의 의무이다. 사탄은 우리를 밀 까부르듯이 체로 쳐서 우리의 결심을 약화시키고 성령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우리의 생각을 무너뜨리려 한다. 이때 아무런 투쟁도 해 보지 않은 채 굴복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무엇이 죄악인가를 규명하여 그것을 쳐죽여야 한다. 우리는 때때로 죄악에 굴복하기 쉬운 약점 때문에 절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스스로 죄악된 본성의 욕구를 죽이려고 노력할 때만이 그리스도의 사역이 얼마나 감사한 것이며, 우리가 얼마나 크게 성령님께 의존하고 있는가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현실은 어떠한가? 너무 쉽게 믿으려고 한다.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하신 십자가의 모범을 생략한 채 영광과 평안만을 얻으려고 한다. 온몸에 십자가의 흔적을 남길지라도 진리를 심장에 각인하고 지키려는 예수 영성의 삶을 살기보다는 예수님에게서 유익한 점만 가져다 자신을 치장하려는 자기 중심적 세속 영성의 굴레를 떨치지 못하고 있다. 개혁 신앙 전통이 영성 훈련을 소홀히 해온 이유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해 여러 신학자들이 개신교에 속한 교회들 곧 성도들의 신앙 생활에서 영성 훈련이 상실되어 있음을 지적해 왔다. 도널드 블러쉬 교수는 「경건의 위기」라는 책에서 “현대 개신교의 특징이 될 만한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것은 영적 훈련의 부재라고 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본 회퍼의 글을 인용하여 “대부분의 개신교 신자들은 영적 훈련, 금욕 생활, 명상과 묵상 같은 훈련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어서 “우리는 영적 훈련을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훈련 생활이 자신을 의롭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영적 훈련을 통해 우리가 얻은 의롭다함에서 일보 전진할 수 있다. 믿음의 공로와 사랑의 순종이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길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은혜가 우리의 삶 속에 유효하게 역사하는 것은 오직 그런 행함을 통해서이다”라며 영성 훈련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장신대 유해룡 교수는 「하나님 체험과 영성 수련」이라는 책에서 “오늘날 개혁 교회 안에서 영성 수련이 소홀히 되고 있는 이유는 개혁 교회의 신학에 대한 편협한 이해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신칭의와 수련이라는 말이 교리적인 모순을 안고 있는 것처럼 이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거부터 있어 왔던 영성 수련의 전통들이 하나의 ‘공적을 쌓는 사상’으로 치부되어 개혁 교회 신앙 생활의 중심에서 멀어졌다는 것이다. 류기종 교수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한국 교회는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고귀한 칭의의 신앙을 값싼 은혜로 오해하도록 강조하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과 겸허의 삶, 거룩하고 의로운 삶, 즉 기독자의 완전과 참 제자의 길을 강조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할 수 없는 나약한 신앙인을 양산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하워드 라이스 교수는 「개혁주의 영성」에서 개혁주의 전통의 뿌리인 칼빈 해석의 매우 다른 두 가지 태도를 설명한다. 칼빈에 대한 첫 번째 해석은, 칼빈이 확고한 원칙들을 고수하는 인물로서 중세 스콜라 철학의 전통에 서 있다고 보는 해석이다. 이 경우 칼빈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질서와 합리성을 모든 것 위에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칼빈주의자들이 지지하는 이 해석에 의하면 “개혁주의 전통이란, 종교적 경험에 대해 별 관심이나 관용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도 마치 인간과의 사이에 건널 수 없을 만큼 큰 강이 놓여 있는 것처럼 저 강 건너의 지극히 엄위로우신 분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칼빈에 대한 두 번째 해석은 최근에 와서야 묘사된 것으로 삶의 역설을 찬양하며 믿음의 중심에서 이루어지는 신비를 환영한다. 교리의 정확성보다 믿음의 삶과 질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이러한 형태의 칼빈주의는 덜 경직된 자세 때문에 대륙의 경건주의자들,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들, 미국 대각성 운동의 설교자들, 19세기의 자유주의자들, 은사주의자들, 복음주의자들 등 광범위한 형태의 견해들을 포함해 왔다. 라이스 교수의 지적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칼빈주의 전통을 따르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은 어떤 형태의 신비주의나 ‘종교적 경험’이라는 언어에 대해서도 불쾌해 하시는 분”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 배경도 하나님과의 교제와 경험을 통해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영성 훈련으로 일보 전진하는데 대해서는 매우 경직된 태도를 나타낼 수 있다. 결국 우리가 서 있는 신앙 전통은 성경이 말하는 ‘전인적 예수 닮음의 변화’라는 차원에서 볼 때, 은혜로 값없이 받은 구원에 대한 ‘값싼 태도’로 그 이후 마땅히 감사의 산 제사를 드리며 예수 영성의 길을 따라가는 일은 소홀히 해왔음을 알 수 있다. 사랑하시는 이의 영으로 이루어 가는 영성 훈련 좀처럼 하나님께 친밀하게 다가가기 어렵게 만드는 신앙 전통 말고도 장애물은 또 있다. ‘피상성’이라는 시대 정신이다. 리차드 포스터 교수는 「영적 훈련과 성장」에서 “피상성은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 즉시 만족을 누리고자 하는 사상은 근본적인 영적 문제이다. 오늘날 절실히 요청되는 사람은 지능이 높거나 혹은 재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깊이가 있는 사람이다”라고 갈파하고 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은 진정한 변화를 위한 각고의 노력보다는 얕은 지적 만족과 인스턴트 훈련 프로그램으로 무언가 시도하고 있다는 심리적 명분을 세우는 데 그치고 있다. 엄밀한 의미의 공동체 해체로 인하여 우리는 서로에 대해 지극히 일부만 알거나 보고 지내면서 대부분 말로 서로를 확인하거나 인정하는 삶을 살고 있다. 삶의 깊숙한 면을 들여다 볼 수 없으니 예배당에서 잠깐 본 부분적인 행동이 인격 전체인 것처럼 오해하기도 쉽고, 조금 지능적인 자기 포장만 해도 ‘신실하다’거나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하여 일부러 거짓말을 한다기보다는 스스로 정직을 표명하지 않은 채 ‘포장된 신앙 얼굴’을 교묘히 즐기며(?) 방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주여, 우리의 죄악됨을 용서하소서!). 이러한 신앙 현실을 회개하면서 이 시대의 신자들이 피상성이라는 ‘정직하지 않은 만족 상태’를 뚫고 들어가서 영혼의 밑바닥에서부터 정직하게 그분을 대면하고 나아가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한다. 그러면서 다시 한번 짚어보고자 하는 것이 영성 훈련이다. 영성 훈련은 흔히 자신의 공적으로 치부되는 것과 율법주의에 빠지기 쉽다는 단점 때문에 늘 제2선으로 물러 앉곤 했다. 그러나 참된 영성 훈련을 회복하지 않고는 세속화의 노예가 되어가는 한국 교회가 과감히 그 방향을 돌이켜 영광된 영적 출애굽을 이룰 수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영성 훈련이란 무엇인가? 달라스 윌라드 교수는 “영성 훈련이란 우리의 영이 항상 구체적 자아를 지배하도록 하기 위해서 새 사람된 우리가 의식적으로 취하는,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활동이다. 영성 훈련은 하나님 나라의 방식의 도움을 받아 우리의 육체 안에 심겨진 죄의 습관들을 제거하는 일을 돕는다”고 정의한다. 즉 영성 훈련이란 우리의 인격과 전존재를 신적 질서에 효과적으로 연합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정신과 몸을 연마하는 활동이라는 것이다.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영성 훈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고 친밀하게 교제하는 것이다. 이 핵심적인 교제를 위해 묵상, 기도, 금식, 성경 공부, 독거, 순종, 예배, 나눔과 봉사 등이 훈련으로 뒤따른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내적 교제가 우선되지 않는다면, 참된 영성 훈련은 이러한 종교적 행위의 실행과는 거리가 멀다. 말과 행위는 드리나 정작 우리 자신을 드리지 않았던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경험해왔다. 자신을 먼저 열어서 드리지 않으면 진정한 사귐과 교제는 시작되지 않는다. 우리는 가슴 없는, 머리만의 율법적 신앙이 주는 폐해를 너무나 많이 보았다. 긍휼한 마음도, 안아 일으켜 세워주려는 따뜻함도 상실한 채, 율법의 완벽한 칼날로 내리쳐 정죄의 제사를 주님께(?) 드려온 아픈 기억들이 가슴을 두드린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는 영성 훈련 역시 율법화될 것을 두려워한다. 외적인 의로 전환될 것도 두려워한다(오, 주여 도와주소서!). 만일 그렇게 되면 이 훈련은 자신뿐 아니라 지체들에게도 숨막히는 부담감이 된다. 율법화나 외적 의로의 유혹을 씻어내려면 우선 영성 훈련이 ‘내 자신의 내면을 향한 훈련’이라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조종하려는 부담감을 내려 놓아야 한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을 바로잡아 놓겠다는 생각도 내려 놓아야 한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올바르다는 자만은 곧 외적 의의 칼자루를 잡는 일이다. 우리 속에 들어와 있는 죄의 경향은 옳은 일을 하는 순간에도 이미 그 동기가 변질되고 있을지도 모르는 연약한 것이다. 내면 훈련은 인내 훈련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 말씀과 성령으로 씻어 내리고 골라내고 다듬어 가야 할, 안으로의 훈련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하고 온전한 산 제사를 드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영원이라는 시간을 놓고 순종의 내적 훈련을 이루어간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여전히 내적인 문제에서 의지의 사용 문제가 남는다. 우리 자신의 의지력은 믿을 만한가? 리차드 포스터 교수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의지의 힘만으로 죄를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이 우리가 의지를 숭배하는 순간이다. 의지력은 깊이 뿌리 박힌 죄의 습관을 결코 해결해주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누가 내면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 리차드 포스터 교수는 “오직 하나님만이 내면의 일을 하실 수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 나라의 의에 이를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다. 오직 은혜로만 얻을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인간의 의지의 힘과 결심을 통하여 내적 변화를 얻을 수 있다는 데 대하여 절망할 때, 내적 의는 은혜로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라는 인식의 문 앞에 서게 된다”고 말한다. 이 은혜의 교리 앞에서 우리는 다시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이에 대한 리차드 포스터 교수의 답을 정리하면 이렇다. 농부는 자신의 힘으로 곡식을 자라게 할 수 없다. 농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것이다. 자라게 하시는 분은 태양, 비, 땅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이다. 우리는 성령을 위하여 죄의 경향이 남아 있는 몸과 마음의 밭을 갈고 거룩한 씨앗을 심는다. 말씀의 씨앗, 기도의 씨앗, 주님과 교제의 씨앗을 심는 것이다. 영성 훈련은 성령을 위하여 씨를 뿌리는 일과 같다는 것이다. 즉 영성 훈련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지만, 영성 훈련의 통로를 통해 하나님은 은혜를 주신다는 것이다. ‘훈련으로 은혜 받는 길’이라고 표현된 이 설명은 다시 이렇게 쉬운 비유로 정리된다. 양쪽에 가파른 절벽이 있는 좁은 길 하나가 있다. 오른쪽 절벽은 인간의 노력으로 의에 이르려 하다가 이르지 못하고 떨어지는 도덕적 파탄의 절벽이다. 왼쪽 절벽은 인간이 노력하지 않다가 떨어져버리는 도덕적 파탄의 절벽이다. 그래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그 길로 똑바로 가야 한다. 이 길이 영성 훈련의 길이다. 이 길에는 심한 어려움이 있지만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도 있다. 우리가 그 길로 걸어갈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재창조된다. 그 길이 변화를 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길이 우리를 변화가 발생할 수 있는 곳에 데려다 놓을 뿐이다. 오소서! 우리의 영을 깨우시는 성령님, 생명의 교제를 나누시며 우리의 영에 활기를 불어넣으시는 성령님, 정신뿐 아니라 몸까지도 하나님의 뜻에 일치된 순종으로 충만하여지기를 바라시는 성령님, 이제 우리 모두 환영하며 두 손 들고 나아가나이다. 생명의 영으로 오시어 나의 영에 활기를 불어넣으시는 성령이여. 나의 영을 깨워 말씀을 다시 보게 하시고, 기도의 줄을 다시 붙잡게 하소서. 새벽기도도, 금요철야도, 성경공부도, 제자훈련도, 금식기도도 다시 보게 하소서. 다시 그 안에서 살아 걸어오시는 주님을 만나게 하소서. 오 주여, 생명의 주님이시여! 유종성/ 「소금과빛」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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