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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실천신학의 학문적 발달사

하나님아들 2012. 10. 17. 16:50

실천신학의 학문적 발달사

 

 표종선

 

 

   "실천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이러한 개념이 설정되기까지는 오랜 역사적 과정이 있으며, 그 과정에 대한 이해를 가질 때 거기서 비로소 대답이 발견될 수 있기 때문에 간단히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성격자체가 실천적이며, 그러면서도 신학적이어야 하는 양면을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천적인 면은 경험적 차원의 목회 실제(Praxis)와의 관계에서 보아야 하며, 신학적인 면은 신학 이론(Theorie)의 관계에서 생각해야 하는 어려움을 가진다. 이러한 양 차원의 관계에서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학문적 이론을 슐라이막허는 일찍이 실제의 이론(Theorie der Praxis)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실천신학은 여전히 목회 신학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는 목회실제의 이론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실천신학'이란 말과 '목회신학'이란 말 사이에서 실천신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기 이해가 분명하지 못한 것을 경험한다. 오히려 한국 교회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목회신학이란 말에 더 익숙하며, 실천신학을 목회신학과 동일시하는 경향을 가지기도 한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목회신학'은 목회의 기술론으로써 목회자가 그리스도인 개개인의 영혼을 돌보는 사역을 대변하는 이름으로 더 많이 이해되고 있으며, 현재 미국신학에서 발전시킨 목회상담에 해당하는 과목으로 보는 것이 더 현대의 신학적인 이해라고 하겠다. 그리고 한국 신학교들에서 이해되는 '실천신학'은 역시 목회자의 편에서 보는 교회부흥론, 또는 교회성장론의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 때문에 한국 교회와 신학계의 실천신학에 대한 이해는 '목회자를 위한 교회 성장이념의 기술론 추구'로 이해되는 것이 그 전부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인식 때문에 교회 성장에 큰 실적을 들어낸 목회자의 목회경험이 곧 실천신학의 이론으로 오해되고 있기도 하다.
   실천신학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아직도 한국 교회와 신학이 '실천신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하여 분명한 자기 입장을 갖지 못한 상태로 해석되며, 실천신학의 학문성이 한국 교회에 와서 아직 자기 입지를 분명하게 하지 못한 결과로 보여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과에서는 실천신학의 올바른 이해를 얻기 위하여 역사적인 맥락을 따라 그 발전사적인 입장을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현재 독일 신학자들이 밝히고 있는 실천신학의 성격과 정의, 그리고 그 학문적 과제가 무엇인지를 집중적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를 전제하면서 한국 교회의 실천신학의 자기 이해와 방향이 무엇이어야 할 것인지를 밝혀 보려는 것이다.

 

1. 실천신학의 역사적 배경

 

   '실천신학'이란 개념은 교회의 목회적 책임을 짊어진 목회자에게 요구되는 것으로, 그가 알아야 하는 '지식적인 것'과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적 실천'의 양면에서 출발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실천신학이란 말이 생겨나기 이전의 신학의 실천적이 이론을 목회자의 목회 기술을 전제하여 목회의 가르침 또는 현대의 목회신학이란 개념적 차원에서 실천신학적인 이해를 포함하고 있었다고 하겠다.
   실천신학에 대한 학문적인 이론 제시와 그것을 신학 교육의 학문적 영역으로 이끌어 준 최초의 학자는 슐라이어막허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중세 교회로 거슬러 올라가면 인문주의를 지향한 신학에서 신학자의 교육에 기울였던 그 당시 관심에서 이러한 실천신학의 이해가 출발된 것을 볼 수 있다. 즉 인문주의 교육 이론이 벌써 중세기에 고대의 교육 전통에서 사용된 주제들을 적용하였던 것이다. 그것들은 신학을 위한 의미를 새롭게 들어내기 위하여 인문 교육의 범주에서 사용 보존했던 것들인데 이것을 영어에서 '리버랄 아트'로 명명하는데, 교과과정에는 문법, 수사학, 변증학, 수학, 음악, 지리학, 천문학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의미의 전제에서 실천신학의 가장 고전적인 것으로는 에라스무스의 설교학과 수사학을 말할 수 있다. 또한 멜랑히톤의 수사학과 인간학 등도 전주로 간주될 수 있다.
   ① 휘페리우스(Andreas Hyperius 1511-1564)  그의 책 「올바른 형태의 신학 연구서」에서 주목할 만한 4권으로 나뉜 책을 볼 수 있다. 앞의 세권은 신학 교육의 전제들이라 할 수 있는 주해적이며, 교리적인 것들이며, 또한 윤리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한권의 책에서는 교회정치, 행정의 과제, 특히 교회 법적이며, 교육적인, 그리고 예전적인 물음들에 대한 주제들이 다루어지고 있다.
   그는 신학 공부 전체를 인문학적인 교육사상에서 찾고, 거기에다 실천신학적인 것을 종속시켰던 것으로서 당시에는 대접을 받지 못했으나 후에 개혁주의 정통 교회에서 받아들여져 분명한 그의 입장들이 발전적으로 다루어졌다고 하겠다.
   이미 중세에서는 실천신학이 철학과 구별하여 질문되었으며, 이러한 물음은 후에 신학의 실천성이란 개념을 형성하면서 실천신학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으로 본다.
   이것은 '지식(앎)의 사색적인 것'과, '실천적인 것'사이의 관계에 대한 물음으로서, '사색적인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적인 앎의 개념과 일치하는 것이며, '실천적인 것'은 실천철학의 예로서 그 목표를 결정하고, 목표 실현에 상응하는 방법을 묻는 것에서 출발된 것으로 이해한다. 중세기의 신학은 이러한 물음에 열띤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이해를 전제하면서 실천신학의 역사는 후에 슐라이어막허에 의하여 신학의 다른 과목들과의 관계에서 독립된 학문 영역으로서 새롭게 제기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천신학의 학문적인 성립의 역사는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 시대에 교의학을 형성시켰던 실천 현장(Praxis)의 개념에 대한 관심과 함께 새로이 시작된 것이라 하겠다.
   16세기 말엽부터 신학계는 스코투스의 신학적인 학문의 실천적인 성격은 다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그리고 신학의 실천적인 성격은 다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그리고 신학의 학문적인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다시 질문되었던 것이다. 신학은 앎(지식)을 중재하고, 동시에 이러한 지식에 상응하는 삶의 실천적인 모습을 이루어야 함을 그 목적과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당위성이 분명하게 대두되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학이 관계를 가지는 종교적인 것과 함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신학의 실천적인 성격은 다시금 신학과 종교의 통일성에서 그 모습을 찾으려 했던 것이다.
   다시금 정통주의에서 경건주의로 넘어가는 역사적 과도기에 이론과 실제의 관련에 대한 의미들은 학문의 새로운 의미와 경험적인 것들에서, 그리고 새로운 근본 개념들을 통하여 형성된 정신적이며 문화 역사적인 상황 안에서 추구되었던 것이다. 경건주의는 스스로 그 시대의 보편적인 자의식을 형성하게 하였는데, 그것은 주관성을 주제로 삼고 개별적인 인간의 삶의 과정 뿐 아니라, 공적인 관계에서도 강한 경건의 영향을 주도록 하였던 것이다. 후에 정통주의 사상의 지배하에서 종교적인 실제는 불신을 받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교회의 교리가 종교적인 신앙의 실제에서 형성되는 개념들에 일치점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이론과 실제의 관계가 문제화되었던 것이라고 하겠다.
   다른 한편 계몽주의는 이론과 실제 사이의 문제를 간단히 해결하였는데, 신학과 종교, 그리고 신학적인 이론과 종교적인 실제로부터 분리를 기획하였던 것이다. 신학과 종교이 구별을 위한 신학적인 이론은 셈러(I. S. Semler 1725-1791)에 의하여 시도되었다. 그리고 알러스(B. Ahlers)는 셈러의 이론을 진단하고, 진술하면서 신학과 종교는 먼저 그 차이가 분명하게 이해되도록 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 후에 신학은 참된 것의 내적인 자유로운 진단으로, 그리고 개인의 자유로운 행위로 이해되었다. 결과적으로 계몽주의적 영향하에 발전된 신학은 종교와의 관련을 통하여 기독교 주제가 되었고, 더욱이 종교는 신학에서 언제나 전제되며, 신학의 의미를 밝히는 도구가 되었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중세기에서부터 19세기 이전까지 독일의 실천신학의 학문적인 태동의 전 역사를 서술해 보았다. 이론과 실제의 관계에서 실제의 자기 이론을 위하여 요구되는 방법론적인 물음이 오래전 대두되었고, 역시 목회자의 목회 방법론적인 차원에서 목회신학 과제로 출발된 것을 볼 수 있었다.

 

2. 학문적인 위치에로 부각된 실천신학

 

   19세기는 서구의 신학이 학문적으로 새롭게 전환된 시기였는데 그 대표적인 학자가 슐라이어막허이다. 그는 신학의 학문적인 성격을 새롭게 규명해 주었을 뿐 아니라 실천신학의 학문적인 성격과 과제를 제시해 주었다는 면에서 실천신학의 대부로 평가된다. 신학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태동시킨 교부이기도 하나, 베르린 대학에서 실천신학의 과목을 개설하여 강의함으로서 신학의 전공학문 분야에 실천신학의 위치를 확실하게 해 준 대부임에 틀림없다.

  1) 슐라이어막허의 신학개요
   그의 신학의 학문적 영역을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철학신학(나무에 비유하면 뿌리의 역할)
   둘째, 역사신학(나무에 비유하면 둥치와 줄기의 역할)
   셋째, 실천신학(나무에 비유하면 열매와 그리고 그 나무 전체를 실천신학이라고 하였다)
   그는 대체로 신학의 개요에 대한 이러한 입장을 갖게 된 것은 모든 학문적인 연구는 어디까지나 실천적인 것을 목표한다는 전제에서이며, 실제로 그는 실천신학을 신학의 목표로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당시 신학의 학문적인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위대한 신학사상가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의 신학의 학문적인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위대한 신학사상가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의 신학의 학문적인 관심은 실천신학에 있었으며, 실천신학의 학문됨을 대변하였고, 또한 학문 이론의 영역으로 이끌어 준 최초의 실천신학자로 평가되는 것이다.

  2) 슐라이어막허의 신학에 대한 입장
   그는 신학을 '실증과학 또는 실증학문'으로 이해한다. 실증이란 말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자체 밖에 놓여 있는 하나의 목적에 봉사하려는 '학문'또는 '과학'이라는 뜻이다.
   또한 여기 실증의 개념은 과제의 방식을 규정하고 있다. 그것은 문화와 역사와 인간성을 통하여 이미 전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에 있어서도 역시 그 과제의 대상은 이미 같은 의미로 적용된다고 본다. 물론 신학의 목적은 종교의 실재 안에 스스로 놓여 있지 않다. 그러나 그 목적은 종교가 역사적 과정에서 발전하고, 관념들을 형성하며, 역사적인 의미와 독립성을 얻게 됨을 통하여 교회의 모습을 형성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발전의 과정에서 교회의 지도층에 관여되고 있는 것들의 앎으로서 대변되는 신학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의 지도는 신학적인 지식을 가진 행위이며, 교회지도와 신학은 자체의 목표가 언제나 기독교의 본질과 그 실제를 더 순수히 묘사하는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문적인 지식과 기술 규정으로 형성된 신학은 슐라이어막허에 따르면 바로 앞서 설명한 세부분의 실천적인 신학은 학문 분야로 구성된다고 하겠다.

  3) 슐라이어막허의 실천신학
   그는 실천신학을 실천적인 과제의 해결을 위하여 일하며, 다만 이러한 목적에서 생겨나는 기술론 또는 기술의 가르침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실천신학은 다른 기술 분야의 전공과목들과 함께 하나의 서열로 등장한다. 즉 국가론, 기술론, 해석학, 그리고 변증학 등이다.
   그에 의하면 실천신학의 과제는 그들의 실천적인 면에 따라 그리고 어떠하든지간에 개인과 특별한 실적에 대한 생각안에서 교회의 지도부를 통하여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행위는 실천신학을 통하여 유도되고, 분명한 의식으로 정돈되어지며, 목표에로 이끌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실천신학의 과제를 두 가지 관점에서 구분하는데,
   첫째는 '교회봉사'의 과제이다.
   둘째는 '교회통치'로써 전체 교회를 다스리는 교회의 과제를 말한다. 즉 교회의 봉사는 교화시키는 행위(경배와 설교)와 지도하는 행위(영혼의 돌 봄, 신앙의 가르침, 지 교회 생활의 조직)안에 이루어진다. 교회의 통치는 권위의 과제들(특히 법의 부여의 과제)과 학문을 지도하는 교사와 신학적인 글을 쓰는 자들에게서 행하여지는 '자유로운 정신의 힘'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그에게서 이해되는 실천신학이란 "교회를 유지하고 온전하게 하는 방법론"으로 정의된다. 즉 그의 입장은 실천신학의 학문적 범위가 교회론을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목회 실제를 전제하고 있으며, 그 교회가 계속 지탱되고 나아가서 온전한 교회로의 발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교회유지와 온전한 교회의 모습을 이루기 위한 기술론으로 이해된다.


  4) 니취(Nitzsch)와 여러 실천 신학자들의 이해
   ① 니취(C. I. Nitzsch 1787-1868) - 그는 슐라이어막허의 제자로서 1847년에 '실천신학'이란 책을 출판하였다. 그는 스승의 방법을 계속 발전시키기를 원했지만 몇 가지를 수정하려고 하였다.  니취는 독립적인 체계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스승의 실천신학이 여전히 교리적인, 교회론에만 의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천신학이란 '교회 생활의 일반적인 이론'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여기 교회 생활의 일반적인 이론이라는 니취의 입장은 다시금 교회의 교리적인 이해를 전제하지 아니하고 설명되어지지 못하는 문제를 지니게 된다. 그래서 니취의 입장이 얼마나 성공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쉽게 말하지 못한다.
   ② 몰(C. B. Moll) - '실천신학의 체계'
   ③ 에렌포이히터(F. Ehrenfeuchter) - 실천신학
   ④ 체추비츠(G. v. Zezschwitz) - '실천신학의 체계'
   ⑤ 하르낙(Th. Hamack) / 에어랑겐 - '실천신학' 새로운 루터주의 신학을 반영한 대표적인 것이다.
   ⑥ 오드스테르체(T. J. van Oclsterzee) - '실천신학' 독일의 개혁 교회 신학 사상에 뿌리를 둔 실천신학.
   19세기에 실천신학은 슐라이어막허에 의하여 학문적인 단계로 이끌어졌으며, 전통적으로 신학의 실천적인 과제는 교회 내의 목사의 직무 수행에 관련하여 요구되는 목회기술론으로 이해하던 단계에서 교회 전체를 중심으로하여 이루어지는 모든 사역을 다루는 학문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 그 특징이라 하겠다.

 

3. 실천신학의 학문적인 성숙(20세기의 실천신학)

 

   20세기에 와서 실천신학은 신학의 학문적인 위치에 자신의 입장을 더 분명하게 하는 발전적인 계기를 이루게 되었다고 하겠다. 19세기 말경에 벌써 서구 신학의 학문적인 연구에는 역사적인 관점이 학문연구에 기준이 되었다. 동시에 실천신학 안에서도 역사주의에 대한 발전이 적용되었는데, 그것은 아케리스의 '실천신학 교과서'에서 그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고 하겠다.
   여기서 실천신학은 원리적이며, 역사적인 작업을 통하여 실천신학의 학문의 당연성과 신학적인 학문적 가르침에 확실하게 편성되었다. 그리고 실천신학의 학문적인 과제는 더 이상 신학적이며, 교회적인 가르침의 개념의 확대에 한정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미래적인 목사의 실천적인 훈련에 역점을 두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목사의 직업 실제에 요구되는 전문교육 계획은 이러한 대상들이 목사직에 있어서 실천의 경험적인 바탕을 형성하는 학문의 통합에로 이끌게 되었다. 이로서 실천신학은 확대되었고, 더욱이 신학 자체에서 제시해 줄 수 없는 것들, 즉 그것들은 바로 교회과제의 경험적인 인식에서만 주어질 수 있는 전망 하에서 더욱 발전 확대되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실천신학은 목사직의 수행을 위한 '앎의 사건으로만'이해하는 경향에 빠지게 된다. 바르트는 신학의 전공과목 과제들이 신학의 근본적인 지향점에서 나아 와야하며, 결코 신학 밖에서 설정된 목적에서 결정되지 않아야 한다는 하나의 새로운 이해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바르트는 실제 실천신학에 대한 어떤 가르침의 책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신학적인 입장에서 강조되는 실천신학의 주된 관점은 바로 설교와 설교의 가르침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천신학의 이해는 역시 실천신학인 과제에서 실천신학의 이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이라는 근본 개념에서 이해된 실천신학이었다고 하겠다.

 

4. 실천신학의 현대적인 이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50년대부터 시작된 실천신학의 학문적인 성격과 의의를 밝히는 연구들은 이전의 19-20세기 초엽 것보다도 더 큰 의미를 나타나게 되었고, 신학의 학문적인 연구에서뿐만 아니라 교회의 목회 실제에서 더 큰 관심을 보이며 실천신학의 기대는 점점 더 확대되어 갔다.
   다음으로 나타난 것은 역시 핸들러의 '실천신학 개론'이다. 그는 교회의 경험적인 실재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보렌은 실천신학을 '하나님의 파송에 대한 교회의 관여의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실천신학의 현재적인 독일 신학의 상태는 어떠한가? 우리는 크게 네 가지 관점에서 신학적인 합리화에 대한 물음과 대답으로 발전하는 점이다.
   첫째, '실천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의 정의와 그리고 실천적이며, 신학적인 양면을 가진 실천신학 과제들의 신학적인 합리화에 대한 물음과 대답으로 발전하는 점이다.
   둘째, 튀빙겐대학의 예터의 입장에서 우리는 실천신학의 새로운 자기 해명의 소리를 발견한다. 그는 실천신학에 대한 물음에서 '교회 봉사를 위한 신학'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교회의 봉사란 동시에 실천신학의 전제요, 대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신학의 총체적인 과제가 근본적으로 교회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이해에 직결되어 있다.
   셋째, 마인쯔대학의 오토에게서 이해되는 실천신학의 새로운 시각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실천신학의 정의에서 '교회에 사회 속에 종교적으로 중재된 비판이론이라는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보게 하는 인식을 강력히 반영해 주고 있다 하겠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신학의 이해는 기능적인 이론으로 잘 알려져 있다.
   넷째, 1971년에 나타난 실천신학의 새로운 이해와 제안은 정치적이며, 더욱이 '신맑스주의적 이론'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것은 페쉬계의 '비판적인 행동과학적으로서의 실천신학'이란 글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실천신학은 목회 현장과 함께 이미 그 자체의 기본적인 학문 영역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삶의 현장인 사회와의 관계에서 새롭게 규명되고 확대되어야 할 과제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현대 실천신학의 정의와 학문적인 과제는 '교회의 행동과학'이라는 개념적 차원에서 공동적인 일치점을 만들고 있으며, 그 과제는 역시 교회를 중심하여 이루어지는 교회의 경험적 실제, 또는 신앙의 경험적 실제를 성직자적 입장에서만이 아니라 평신도적인 입장의 양면적 관계에서 검증하고 비판하며, 체계화하는 이론으로서 그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고 하겠다.

 

5. 실천신학의 범위와 대상, 그리고 그 방법론

 

   실천신학의 학문적인 범위는 어떠한가?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전통적으로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위하여 행하는 모든 것이며, 그것에 대한 규정을 세우는 일이 곧 실천신학의 학문적인 범위라고 이해하였다. 기본적으로 실천신학의 학문적인 범위는 교회의 행위와 기독교적인 삶의 양 범주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전제한다고 하겠다.
   그것은 먼저 교회의 목회적 현장의 사역에서 요구되는 것으로 예배학, 설교학, 신앙교육학, 목회학, 봉사학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현대적으로 요구되는 상담학, 교회법과 행정, 선교/전도(선교학) 등이 거론될 수 있다.
   실제로 실천신학의 과제는 이론과 실제의 상관관계에서 이론 신학의 영역이 직접 다루지 못하는 분야인 인문사회학적인 영역의 정보를 신학과의 관계에서 대화하는 역할에 있다고 하겠다. 이것은 역시 교회를 중심하여 전개되는 모든 종교적인 경험, 즉 신학과 신앙의 실제적인 영역인 인간과 사회의 관계를 다루는 실제의 이론 형성을 위한 작업이 그 학문 영역이요, 연구의 대상이라고 하겠다.

 

6. 실천신학의 전망

 

   실천신학의 학문적인 전망은 보렌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실천신학은 교회 내적인 것만을 취급하는 학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영역인 사회도 포함하여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지적되고 있다.
   실천신학이란 개념은 단순히 전통적으로 이해하여 온 목회의 기술론이 아니라 목사와 평신도간의 신앙의 실제를 포괄하는 학문 이론으로써 신앙의 실제의 이론이며, 신앙해석의 전 포괄적인 의미를 규명하는 학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실천신학의 학문적인 과제는 참으로 중요하다고 하겠다.
   실천신학은 그 학문적인 방법론이 이미 경험 비판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면 실천신학의 학문적인 과제는 교회의 신앙의 실제와 관련하여 비판 이론으로서 그리고 신학의 비판으로써의 기능을 그 전망으로 삼는다고 하겠다.

 

7. 신학의 통일성

 

   먼저 슐라이어막허의 신학 이해에서 신학의 전체성은 세 가지 범주로 구분된 것을 보았다(철학적, 역사적, 실천적인 신학의 범주). 그는 여기서 분명히 실천신학이야말로 모든 신학의 목표이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해 주었다.
   우리는 신학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여전히 신학의 통일성은 실천신학에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전체의 목표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리스도의 복음의 실천적인 사역을 향한 목표를 잃지 않아야 한다. 또 한편 20세기 변증신학의 시대에 와서 신학의 통일성은 '하나님의 말씀의 전파'라는 주제에서 그 연결점을 찾고 있다.

결론

   실천신학이 신학의 다른 전공분야와 함께 분명한 학문적인 과제와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관점이며, 그것은 교회를 중심한 그리스도의 사역의 실현에 필요한 기술에서 시작하여, 그 구체적인 방법론이 문화적 환경과 인간과 사회와의 관계에서 분석되고 재해석되어야 할 자기 이론을 가진 것이라는 점이다.
   실천신학의 학문이 살아날 때, 한국 교회의 모습은 거기서 새로워지고 더욱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다듬어 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교회는 더욱 하나님의 말씀 위에 든든히 선 교회가 될 것이며, 시대적인 복음의 실천적인 사명 수행이 더욱 가시적으로 실현될 수 있을 것을 필자는 확신하기 때문이다.

출처 : 행복†충전소
글쓴이 : DMpastor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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