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주일(성령강림절 후 첫째 주일,연중24주일) 창1:1-2:4
설교본문 창1:1-2:4 천지를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대
병행본문 고후13:11~13절 마28:16-20
제목: 삼위일체주일에 대한 무관심
주제: 천지를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대
요지: 우리는 삼위일체에 관심이 없다. 모른다. 이해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삼위일체 신앙으로 살아간다.
◆ 설교자는 청중의 수준을 너무 과소평가하여, 삼위일체에 관한 내용을 쉽게만 하려고 하는데서 오류를 범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절대 쉽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청중은 설교자보다 평균적-학벌, 생활수준, 사회적 지위, 지적수준 등등-으로 수준이 높다는 것을 바로 인식하여야 한다.
1. 설교착상으로서 본문읽기
삼위일체 하나님은 이 세계를 사랑으로 창조하셨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이 수면위로 다니시면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음을 보시고 ‘빛이 있으라’라는 말씀으로 제일 먼저 빛이 생기게 하셨기 때문이다. 빛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가운데에서 이 세계에 생명의 태동의 전조가 되는 빛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을 담아 빛을 먼저 창조하신 것이다. 그 빛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다. 하나님은 빛을 만드신 첫째 날 부터 인간을 만드신 여섯 째날 까지 6일 동안 하나님의 계획하신대로 이 세계에 거하는 모든 피조물들을 만드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면 날이 새롭게 된다. 시작이 아침부터가 아니고 저녁이 새날이 시작임을 알 수 있다. 저녁을 잘 보내야 아침을 산뜻하게 시작할 수 있는 원리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지으신 피조물들을 바라보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감탄사를 표현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으로 창조하실 때 마다 “그대로 되니라”라고 창세기 저자는 기록하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대로 되어가는 세계였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세계였다. 그중에서도 여섯째 날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참으로 기뻐하셨다. 여섯째 날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지으신 목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도 특별히 인간과 친구처럼 교제하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6일 동안 이 세계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하나님이 안식하신 날을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2. 문학적·역사적으로 읽기
창세기에는 다양한 내용들이 통합되어 있고 그 내용들은 하나의 문학적 단위를 이룬다. 창세기 문학적 구조는 매우 짜임새 있고 신중하게 구성되었다. 오랜 역사를 거쳐 내려온 다양한 자료와 전승들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구전된 전승들은 역사적 상황에 따라 해석, 재해석, 확대, 축소되기도 하고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이야기로 발전하기도 한다. 창세기는 신앙공동체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보전되어 온 책이다. 창세기를 형성했던 공동체는 이를 통하여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가르침을 표현하고 오는 세대들에게 전달하는 이야기 형식으로 나타난다.
바르트는 창세기의 창조이야기를 독일어로 자게(sage)로 칭했다. 바르트가 창조이야기를 ‘자게’로 표현하는 의도는 철저하게 역사성을 담지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이야기인 자게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바르트는 자게와 신화를 철저히 구별했는데 그 구별의 핵심은 자게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야기인데 반해 신화는 역사성이 없는 가공의 이야기라는데 있다. 성경의 창조사화(자게)는 하나의 역사로서의 창조에 대한 순수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성서의 창조 이야기가 철저하게 역사성을 담지하고 있기에 창조이야기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따라서 그것은 창조역사(게쉬흐테)이다.
창세기는 물을 배경으로 하는 혼돈의 세계가 배경이고 이는 모두 바벨론이라는 지리적 역사적 정황과 에누나 엘리쉬라는 바벨론의 창조신화와 관련을 맺고 있다. 창세기 1장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배경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다. 그러나 이 배경에 대한 이해가 창세기 1장의 창조사화(역사)의 본질을 왜곡하는 단계로 나가면 안 된다. 창세기 1장은 바벨론이라는 지리적 역사적 정황과 바벨론의 창조신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철저히 그 창조신화와 대결하면서 진짜 창세기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첫째 날 창조하신 빛의 창조 역시 이 문제와 관련해서 매우 중요하다. 성서의 창조사화(역사)는 해와 달과 별을 창조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빛을 먼저 창조하셨다고 선언하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는 역사이다. 하나님의 천지창조는 하나님과의 직접적 관계가 그 중심에 있는 역사이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에는 어떤 다른 도구의 개입이 없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이 창조는 철저히 하나님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고 그런 까닭에 철저히 역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보도하는 창세기의 이야기를 신화의 범주에 넣으면 안 되고 사화의 범주에서 읽어야 한다. 사화는 일어난 역사적 사건을 시적으로 표현하는 이야기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천지창조를 보도하는 저자는 이 창조의 역사를 예지하고 이를 시적으로 표현했다. 천지창조를 보도하는 창조사회는 특별한 문학적 양태를 지니고 있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일어난 사건을 후대의 저자가 하나님의 특별한 감동으로 이를 예지하고 시적으로 표현한 이야기이다.
3. 신학적·명상적 읽기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시작되기 전에 원시 우주는 혼돈과 깊음이라고 하는 무질서 세력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우주는 아름다운 질서로 창조하셨다. 6일 동안의 창조를 통하여 무질서와 혼돈세력에 대한 질서 부여 작업을 온전히 성취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안식일은 혼돈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경축하며 인간은 하나님의 승리 잔치에 초청을 받는다. 안식일은 미리 맛보는 종말론적 구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한’ 창조 질서가 악과 혼돈의 세력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선한’질서로 이끄시며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는 혼돈 세력에 대한 명령행위이며 역사 속에 활동하는 불의, 억압, 어둠에 대한 의로움, 평화, 사랑, 빛의 승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설교본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권능의 말씀이 전체를 지배한다. 즉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권능의 말씀으로 혼돈의 세계를 없애고 권능의 말씀으로 하늘에 궁창을 만드시고 물을 통제하셨다.
바르트는 남자와 여자와의 사랑의 관계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해했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의 관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의 유비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의 관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바르트는 창세기 1장 26~28절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해설에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의 깊은 의미를 강조했다. 하나님은 홀로 계신 하나님이 아니고 사랑 가운데 서로 교제하고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사랑의 교제가 하나님의 삶을 규정하는 개념이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이시고 사랑받는 자이시고 영원한 사랑이시다 바로 이 삼위일체성 속에 모든 나와 너의 관계의 원형과 샘이 존재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은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사랑의 유비이고 더 나아가서 성부와 성자 사이의 사랑의 유비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과 인간의 계약은 창조의 내적 근거이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신 이유가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의 사랑의 사귐을 원하셔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과 대화하시고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고 인간의 진정한 파트너가 되시기를 원하신다. 이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되셨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놀라운 사랑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그 사랑이 마침내 승리해서 인간들이 이 하나님의 사랑에 말할 수 없는 찬양과 사랑과 감사를 돌리는 날을 기다리고 계신다.
4. 위기/심판적·회개적으로 읽기
올해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종교 개혁(1517년)을 일으킨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로마 교황 레오 10세가 성 베드로 성당의 수리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면죄부를 팔자 독일의 신학 교수였던 루터가 이에 반박하면서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95개조로 구성된 반박문을 붙였다. 이 반박문은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었다. 오직 성서에 근거한 믿음만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을 기억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바른 신앙을 지키고 살아내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오순절 성령강림주일 이후 첫 번째 주일이 삼위일체주일임에도 불구하고 목회현장에서는 이것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고 다소 무관심한 실정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고 고백하면서도 실제적인 삶에서는 거의 일신론자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성서에 증언하는 하나님은 한 분 하나님이시지만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으로 함께 존재하고 함께 활동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 갈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이다.
일하는 것과 안식하는 것은 창조질서이다. 일정 기간 열심히 일하고 일정기간 편히 안식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한 삶의 방식이다. 따라서 인간은 노동과 안식이 조화로운 삶을 이루어야 한다. 인간이 노동을 쉬지 않고 계속할 때 문제가 생긴다. 인간이 지혜롭게 다스려야할 피조물들이 고통을 당한다.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자연을 이용하고 자원을 소비한다. 그러나 이 세상의 자원과 자연은 한정되어 있어서 인간이 끊임없이 노동할 때 자원은 고갈되고 자연은 회복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 황폐해지고 만다. 인간이 노동에만 시간을 사용할 때 가족과 의 관계나 이웃과의 관계가 소홀해져 멀어지며 결국에는 사회가 삭막해지고 인간관계가 파괴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환경이 파괴되며 사회가 삭막해지는 것은 인간과 자연이 안식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안식의 시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의 모습을 회복하는 시간이다. 따라서 안식은 일하다가 남은 시간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일을 중지하고 찾아야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6일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 안식을 누리기 위하여 교회로 나아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는 축복이며 회개함으로 다시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거룩한 만남이 있는 참된 안식을 누리는 행복한 삶의 지혜가 되는 것이다.
5. 설교본문과 병행본문의 케리그마 연결
고린도후서 13장 11~13절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생활의 권면을 하고 있다. 즉, 공동체 성도들에게 서로 온전하게 되며 마음을 같이 하여 평안하게 지내라고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화평의 하나님이시다. 다툼이 있을 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만 주실 수 있는 것이 사랑과 화평이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축도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라고 선포한다. 이 본문은 삼위일체 하나님 아버지, 아들, 성령의 관계성으로 선포하는 축도문이다. 이 축도문의 강조점은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던 은혜, 사랑, 교제이다. 즉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은혜와 사랑과 교제의 중요성을 강조한 기도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진다. 이 은혜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서는 은혜와 사랑을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성령께서는 교제를 만드시도록 도우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 내재적으로 교제하시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경륜적으로 기도하는 성도들과 그리고 모든 만물과 교제하시기를 기대하신다. 사랑으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교회의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고 평안하게 교제하기 원하신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하신 그 모습을 삼위일체 하나님은 지속적으로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되기를 원하시고 계신다.
마태복음 28장 16~20절은 삼위일체론적인 세례문이 나온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한 삼위일체론적 언급이 나타난다. 세례문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라고 선포한다.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체험함으로써 하나님을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으로 믿고 고백하고 예배하는 삼중적인 구조다. 한 분 하나님의 일치성을 보존하면서도 동시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서의 구별성을 인정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실 때에 홀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영과 더불어 함께 창조하셨다. 창조과정에서 하나님과 말씀과 영이 함께 하셨고,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우리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다.
◆ 참고자료
2017 예배와 강단, 김종렬엮음, 기독교문사·목회교육연구원, 2016.
Barbara Brown Taylor, David L. Bartlett, 「Feasting on the Word -Preaching the Revised Common Lectionary」 (Westminster John Knox Press,1980), 이대성·김영철·홍상태·고현영 공동번역정리.
6. 설교구성
2017.6.11.삼위일체주일(성령강림절 후 첫째 주일,연중24주일)
설교본문 창1:1-2:4 천지를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대
병행본문 고후13:11~13절 마28:16-20
제목: 삼위일체주일에 대한 무관심
주제: 천지를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기대
요지: 우리는 삼위일체에 관심이 없다. 모른다. 이해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삼위일체 신앙으로 살아간다.
◆ 설교자는 청중의 수준을 너무 과소평가하여, 삼위일체에 관한 내용을 쉽게만 하려고 하는데서 오류를 범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절대 쉽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청중은 설교자보다 평균적-학벌, 생활수준, 사회적 지위, 지적수준 등등-으로 수준이 높다는 것을 바로 인식하여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천지창조
오늘 삼위일체주일에 주어진 본문은 ‘천지창조’이다.
천지창조를 개괄하는 1-3절을 살펴보자.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화자의 진술이다.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의 영이 창조 이전에 존재하였다는 해설이다.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천지를 ‘말씀’으로 창조하였는데, 요1:1-3절에 의하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컨대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할 때,
홀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말씀과 하나님의 영과 함께 창조하셨다.
창조 과정에서, 하나님과 말씀과 영이 함께 하셨고,
특별히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신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고 있다.
이런 삼위일체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분께 예배드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은혜다.
☞ 창조 세계 속에 (피조물 안에) 삼위일체의 본성이 들어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피조물 안에서 삼위일체적인 요소를 발견하고 찾으면서 영성을 키워야 한다.
천지창조의 동기 - 질서와 사랑
삼위일체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동기는 무엇인가?
질서이다!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혼돈, 공허 흑암은 무질서를 상징한다.
→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는, 무질서를 질서있게 하셨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물질만능주의 풍조가 인간의 사고에 깊이 들어오면서 인간이 소유하는 물질이나 돈이 인간의 생명보다 더 중요시되는 경우가 있고 사회를 부정하고 부패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인간의 쾌락이나 향락 그리고 이익을 위해서 자연이 파괴되고 훼손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창조질서의 위반이고 인간의 책임과 의무를 저버리는 행위이다.
창조질서의 위반은 곧 세상을 혼돈과 혼란에 빠지게 하고 인간의 삶을 위협한다.
이러한 창조질서를 위반하고 혼돈과 혼란에 빠지는 죄악에서 벗어나야 한다.
창조의 마지막 날 ‘안식’하신 것도 ‘질서’를 의미한다.
2:2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 일곱째 날 안식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일하는 것과 안식하는 것은 창조질서다.
일정기간 열심히 일하고, 편히 안식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한 삶의 방식이다.
따라서 인간은 노동과 안식이 조화를 이룬 삶을 살아야 한다.
인간이 노동을 쉬지 않고 계속할 때 문제가 생긴다.
인간이 지혜롭게 다스려야 할 피조물이 고통을 당한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연을 이용하고 자원을 소비한다.
그러나 이세상의 자원과 자연은 한정되어 있어서, 인간이 끊임없이 노동할 때 자원은 고갈되고 자연은 회복할 시간적 여유가 없어 황폐해지고 만다.
인간이 노동에만 시간을 사용할 때, 가족과의 관계나 이웃과의 관계가 소홀해지고 멀어진다.
결국에는 사회가 삭막해지고 인간관계가 파괴된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고통을 호소하고 환경이 파괴되고, 사회가 삭막해지는 것은,
인간과 자연이 안식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안식의 시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써 인간의 모습을 회복하는 시간이다.
☞ 따라서 안식은 일하다가 남은 시간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일을 중지하고 찾아야 하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6일 동안 열심히 일하고,
일곱째 날에 안식을 누리기 위해 교회로 나아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는 축복이다.
안식은 “조화로운 삶을” 위한 “하나님의 방식”이다.
억지로 일부러 안식하자.
억지로 주일성수를 해보자!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거룩한 만남이 있는 참된 안식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청합니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은 천지창조에 질서와 함께 사랑을 표현하신다.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심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빛은 생명과도 같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과 같은 죽음의 무질서에, 생명의 전조가 되는 빛을 창조하심은,
하나님의 마음 즉 사랑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빛을 보시고 좋아하셨다(4).
→ 빛을 첫째 날에 창조하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천지창조의 목적
천지창조의 최종목적은 무엇인가?
인간을 창조하기 위함이다(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식물, 동물, 그리고 여섯째 날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간창조는 인간과의 교제를 위해서이다.
삼위 하나님은 인간과의 사랑의 사귐을 원해 세상을 창조하셨다.
삼위 하나님은 인간과 대화하시고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고 인간의 진정한 파트너가 되기를 원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기도하는 성도들과 교제하시를 기대하신다.
병행본문 마28:20b에서도 ‘인간과 관계하고 교제하기를’ 원하시는 성자 하나님을 발견한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부활하신 성자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 있기를” 원하신다(임마누엘 성자).
다만 우리가, 우리를 창조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서는 ‘그분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그분의 명령을 따를 때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병행본문 마28:16-20절에서, 부활하신 성자 하나님은.
갈릴리 후미진 곳의 이름도 없는 산에 서서 열 한명의 제자들(한 주 전에는 12명)과 교제하신다.
그들 중 몇 명은 부활하신 성자 하나님에 대한 의심을 품고 확신도 없는 사람들이다(마28:17).
성자 하나님은 그들에게 깊은 믿음을 보여 준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 “민족들”(nations)이라는 말은 근대적 의미의 민족, 국가가 아니고 “외국인” “우리와는 전혀다른 종족”같은 것이며 간단하게 말하면 “이방인들”(Gentiles)이다.
성자 하나님이, 소수의 정체성이 불확실한 제자들을 이방세계에 파송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에게는 파송을 감당할만한 능력이 없다.
바로 그런 까닭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제자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어떻게 제자들이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예수에게 주어졌던 것과 동일한 능력(마28:18, exousia)을 통하여서만 그리 할 수 있다.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능력이다.
제자들이 치유하고 선포하고 가르치는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예수와 갖는 관계, 그리고 예수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갖는 관계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세상으로 나가라고 하신다.
가서 암을 치유하고, 환경을 정화시키며, 믿지 않은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다.
그러면 함께 하시겠다고 한다.
하지만 명령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그럴 능력이 없다.
그런까닭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능력에 완전히 맡기게 한다.
비로소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교회의 사역은 “모든 권세”(all authority)가 교회나 교회가 가진 것에 있지 않고,
아들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지원,
성령 안에서 항상 교회에 함께 하려는 아들의 의지에 달려있다는 인식 없이는 그 열매를 거둘 수 없는 것이다.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
내재적(존재론적) 삼위일체
삼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을 남자와 여자를 구분해서 창조하셨다.
왜 성을 구별하는가?
→ 삼위일체 하나님 간의 관계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심에서 유비할 수 있다.
남녀간의 사랑관계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사랑관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관계의 유비다.
남자와 여자의 사랑관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닮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은 홀로계신 하나님이 아니고,
사랑 가운데 서로교제하고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의 사랑의 교제가 하나님의 삶을 규정하는 개념이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이시고 사랑받는 자이시고 영원한 사랑이시다.
바로 삼위일체성 속에서 모든 나와 너의 관계의 원형과 샘이 존재한다.
경륜적(관계적) 삼위일체
병행본문 마28:16-20에서,
삼위일체 하나님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한다.
세례 형식은 마3:13-17의 예수 자신의 세례로 돌아가는 데,
거기에서 성령은 그에게 내려오고, 하늘에서 음성이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선언한다.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주일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데,
즉 예수가 제자들에게 명령하여, 새로운 제자들의 세례에서,
예수 자신이 경험했던 세례현장의 이야기들을 재연하도록 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삶 속에 새롭게 제자가 된 그들을 이끌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아들로 그들의 임마누엘이 되고,
아버지는 그 자신과 같이 그들을 사랑하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그들을 인도하여 주실 것이다.
삼위일체 주일에 대한 무관심과 필요성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이지만, 육신이 연약하여 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관심이 없을 것이다.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이지만, 임신을 할 수 없는 젊은 부부도 관심이 없을 것이다.
속썩이는 십대 자녀를 둔 가정, 이혼을 앞 둔 부부, 직장을 잃은 사람, 그들 역시 삼위일체에 관심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이시라는 것이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는 것만이 중요하다.
그래서일까?
삼위일체주일에는 크리스마스나 부활절처럼 대대적인 행사가 없다.
삼위일체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무모한 토론이 될 수 있다.
역사를 살펴보면, 삼위일체는 쉬운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혼란스럽고,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해야할지를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에게 삼위일체주일이 필요할까?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구원을 잃을 위험에 처하지만, 삼위일체를 이해하려는 사람은 지성을 잃을 위험에 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거스틴은 삼위일체가 주는 신앙의 유익 때문에 삼위일체를 아주 간단한 그림으로 줄였다.
그는 나무의 예를 사용했다.
뿌리는 나무다. 몸통은 나무다. 가지는 나무다.
하나의 나무, 하나의 본질, 그러나 세 가지 다른 존재.
그럴 듯 하지만 정확한 삼위일체 표현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보다 쉬운 설명은 없어 보이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
다른 방식으로 삼위일체를 생각해보자.
삼위일체가 없다면 어떨까?
병행본문 마28:19절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아버지의 이름으로만 세례를 준다면 어떨까?
어색하게 들리는 것 외에도, 그리스도의 일과 인격, 그리고 계속되는 성령의 활동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만 세례를 준다면 어떨까?
“나는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풉니다. 아멘.”
그러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을 놓치게 될 것이다.
또한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인 성령도 놓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성령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세례를 준다”고만 말하면 어떻게 될까?
거기에 무엇이 빠져 있을까?
누락된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위대하심과 창조성,
우리는 죄를 극복하기 위해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부분을 놓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는 성경의 팩트를 따르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만 얘기하지 않는다.
성경은 예수님만 얘기하지 않는다.
성경은 성령님만 얘기하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모두를 말하고 있다.
팩트가 이렇다.
그래서 삼위일체를 말할 수 밖에 없다!
성경이 말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신 아버지와 창조주로 우리 위에 계신 하나님.
성육신하신 말씀과 아들로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
우리 안에(in)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among) 계시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간에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과 단절되지 않았고,
인간의 몸을 입으신 하나님의 구속 사역으로부터 단절되지 않았으며,
우리 안에, 우리 가운데, 때로는 우리 밖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현존으로부터 단절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나님 체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이쯤해서 1절을 다시 한번 보자.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제 우리는 1절 말씀을 이렇게 고백할 수 있지 않을까!
→ 태초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셨으니, 삼위일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아멘!
'은혜 설교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달란트의 비유 (0) | 2022.10.09 |
---|---|
'버가모 요한계시록 2:12-17 (0) | 2022.06.14 |
하나님께 소망을 두자 (0) | 2021.12.06 |
풍성한 열매맺는 한해가 되자-요한15:1-8 (0) | 2021.11.05 |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사상! (0) | 2021.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