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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울 신학의 특색

하나님아들 2012. 10. 17. 15:31

바울 신학의 특색

A. 체험 중심 신학

바울은 처음부터 신학자로 출발함이 아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남 에서부터 시작했다. 그의 모든 사상은 여기에서부터 발전한다. 바울이 말하는 체험이란 인간자신의 자의적인 힘에 의한 체험이 아니라, 바울의 체험은 그와 정반대로 예수가 나타나서 바울을 책망하고 넘어뜨리고 회개케 하는 불가항력인 강권적 외적의 힘에 의한 체험이기 때문에 그 요소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체험은 인간중심인 인본주의이며 바울의 체험은 하나님이신 예수님 중심의 신본주의이다. 이렇게 본질상 다른 체험을 하였기 때문에 언제나 거기에 나타난 예수를 말하며 자기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이 체험 중에서 완전히 죽는 체험을 했기 때문에 자기를 말할 때에도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1:21; 갈2:20; 롬14:7-8.) 라고 하면서 그리스도는 살고 자기는 죽는 것을 항상 체험하면서, 다메섹의 체험을 생활의 필수조건으로 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의 체험은 사람들이 흔히 명상하는 가운데 무슨 비전을 봤다는 그런 것이 아니고 전 인생이 뒤집어지는 정확하게 말해서 죽었다가 살아나는 체험이다. 그러므로 그의 체험은 다른 종류와 비교할 바 아니다. 전 인생이 개조되었다는 이런 체험은 부활하신 예수가 거기에 나타나서 이런 사건이, 발생하였음으로 체험의 주동자는 그리스도이며 바울은 피동적으로 이런 엄청난 일을 당했을 뿐이다.

바울의 이 엄청난 사건 기록이 사도행전에 있는데

그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때는 정오였고(행 22:6, 26:13)

해보다 더 밝은 빛이 그를 비추었고 (행 9:3, 22:6, 26:13)

소리가 있었는데(행9:4, 22:7,26:14)

히브리 방언으로(행26:14))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핍박 하느냐" 하기에(행9:422:426:14))

사울이 "주여 뉘시니까" 라고 했다. (행9:522:8, 26:15)

여기에 이 사건을 살펴보면 이사건의 전체를 예수가 지배하고 있고, 바울은 다만 "주여 뉘시니까"라고 한마디 했을 뿐이다. 여기서 바울의 체험의 성질은 하나님측이 주동이 된 예수 중심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 또한 그가 체험한 내용은 빛을 본 것이며 예수의 음성을 들은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이 체험이 물리적, 감각적, 객관적인 것이냐? 혹은 신비적, 초감각적, 주관적인 것이냐? 또는 "환상이냐? 실제냐? 하는 문제인 동시에 "예수가 환상으로 나타났느냐? 실제적 부활의 몸으로 나타났느냐?"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 문제를 결정하기 전에 바울은 다른 서신에 쓴 내용을 보면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내가 자유자가 아니냐. 내가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고전15:89:1.)는 모두 감각적으로 실제로 본 것으로 원전(原典)에서는 말하고 있다.

하지만 감각적으로 본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바울의 고린도전서 15장의 부활론에 무형적 부활체를 말하고, 유형적 예수를 보았을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체험한 부활은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니…….육에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15:40-41.)는 유형적 부활체를 말하고 있어 자기가 본 예수는 유형적, 외부적으로 볼 수 있다고 쓰고 있어 의심할 여지가 없다. 물론 바울이 이끌려 삼층 천에까지 갔다고( 고후12:1.)하는 체험은 그것과는 사정이 다르다. 원전(原典)( 원전 : 희랍어 원문 성경.)주석가는 바울의 체험을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으로 구분하여 다메섹 체험은 외적인 체험으로 돌리고 있다.( 도양술저, [사도바울의 신학], 기독교문서선교회, p.33.)

B. 그리스도 중심 신학

바울의 체험중심 신학은 자연히 그리스도 중심 신학과 맥을 같이 한다. 그의 체험의 내용이 예수의 빛을 보고, 또 그를 직접 만나고, 그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체험을 생각할 때마다 그리스도와 떨어질 수 없었다. 실로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내던지고,( 빌3:8.) 그리스도만 알기로 작정하고, 일편단심 그를 위하여 염려하고, 그리스도만 자랑하면서, 살든지 죽든지 그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 위하여 힘을 다하고, 사나 죽으나 예수의 것으로 그 생애를 일관했다.( 고전2:21:71:31; 빌1:20; 롬14:8.)

예수를 위하여 옥에 갇히기도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했을 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사십의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고, 여행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여러 번 자지도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면서 예수를 전했다.( 고후11:23-27.)

이와 같이 바울은 예수를 떠나지 않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면서도,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8:38-391-2,14:7-8.) 고 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확신하고 있다.

바울의 이와 같은 예수 집착의 이유?

① 다메섹의 체험이 너무도 강권적이며, 거기에 나타난 예수가 바울에게 돌이킬 수 없는 확신을 주었으며,

② 바울 자신이 예수를 이단시 할 때, 진실한 기독교인 "스데반"집사를 죽이고, 또한 예수를 핍박했던 일을 생각할 때에 무지했던 자신을 자책하므로, 바울이 예수에게 집착한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자기 몸에 매질을 하면서까지 오직 예수에게만 복종코자 하였다.( 고전9:116; 빌1:20-21.) 그리고 바울은 회심 전에 이미 예수의 교훈이나 그가 한 일들을 듣고 알고 있었다고 본다. 이와 같은 사실은 그의 서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예수님이 만찬을 잡수신 일이나, 부활에 대한 일이나, 기타 예수님의 교훈이 많이 쓰여 있다 볼 수 있다.( 고전13:23-2615:12-21,7:17,9:14; 행20:35; 갈3:1-2.)

그러나 그가 예수를 알았다고 할지라도 회심 전에는 "육체대로"만 알았고 회심 후에는 "신령하게"만을 알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후5:15-16; 갈2:19-20.)

결국 바울은 회심 전에 기독교도를 열심으로 핍박한 점에서 볼 때에, 그는 예수에 대한 말을 많이 듣고 있었으나, 예수가 목수의 아들에 불과했고, 메시야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열심으로 박해했을 것이다. 바로 이점이 보통 사람들이 넘어지게 되는 하나님의 숨겨진 비밀이다. 즉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에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치 않았던 모양으로 오셨기 때문에,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단지 세례 요한이 예고하기는 했지만,( 마3:11-12; 요1:32-34.) 그를 믿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심지어는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고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한 세례 요한 자신도, 믿어지지 않아 제자들을 시켜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 오니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고 확인케 하였다.( 마11:2-5.)

바울은 회심 후에야 이 비밀을 알았기 때문에 자기가 핍박하던 예수가 목수의 아들이 아니요, 하나님의 아들이요, 오실 메시야로 안후에는 그분만 붙들고, 살든지 죽든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요,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심으로 산다고 하면서 평생을 일관하였다. 그는 실로 그리스도만 중심하는 그리스도의 봉사자요, 그리스도와 합한 자였던 것이다.( 빌1:20-21; 딤후1:11-12; 갈2:20.)

C. 중생 중심 신학

바울 신학의 또 하나의 특색은 그의 체험에서 오는 중생을 역설하는 데에 있다. 육체적으로만 예수를 알았던 사울이 영광의 빛 가운데 나타난 예수를 보고는, 눈이 어둡게 되었고 그러나 그의 심령의 눈이 뜨면서 새사람이 되었다. 그 후 바울은 3년간 아라비아 사막에 가서 사는 동안 주님의 계시를 받아 율법주의자 사울은 완전히 죽고,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에는 새사람 사도 바울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체험에 비추어 중생치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을 알지도 못할 뿐더러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며, 오히려 미련하게 여겨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고로, 진노를 받을 자식이니, 이러한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심령을 새롭게 하는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였다.( 고전2:14; 롬8:7; 엡2:3; 갈5:24; 고후5:17; 엡4:22-24.)

중생한 새사람은 의와 진리로 지으심 받아서 그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 있고, 위의 것을 찾고, 땅의 것을 생각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이전 것이 지나가고 새 것이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인간은 반드시 자기가 다메섹에서 넘어짐같이 넘어져야 하고, 큰 회개와 중생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중생전의 사울은 예수가 한낱 목수의 아들로 보았으나, 중생 후의 바울은 그 목수의 아들이었던 예수 안에 능력이 있고, 복과 부요함이 충만함을 보고 세상의 구주로 섬기게 되었다.( 고후12:9; 롬15:29; 엡3:8; 엡4:13; 갈3:16.) 그러므로 중생은 바울과 예수를 관계지어준 큰 계기가 된 것이다.( 갈2:20; 고후5:17; 딛3:5.)

바울은 이 중생에 대하여 자신이 쓴 서신중에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갈1:13-16; 고전15:3-10; 빌3:5-11; 딤전1:12-16.) 초대교회도 바울의 중생문제를 중대시했기 때문에, 사도행전의 기자인 누가도 여러 번 이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행9:1-1822:3-15,26:4-18.) 그래서 그가 중생을 말할 때에 그 것 없이는 예수가 없고 하나님이 없을 만큼 크게 취급한 것을 알 수 있다.

D. 선교중심 신학

바울은 자기가 받은 체험과 복음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선교 문제가 나온다. 그리고 그 선교의 내용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다.( 고전2:1-5; 롬1:16; 고전15:9-10; 엡3:7-9; 딤1:3.)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함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말함이라 하고, 자기는 나타내지 않았다.( 롬1:16; 고전1:182:1-2; 고후4:5.)

선교는 그가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났을 때에 예수에게 직접 받은 사명이요, 오히려 이 사명 때문에 예수가 다메섹에서 바울을 붙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후일에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있으리니"( 고전9:16.)라고 하였고, 그의 3회에 걸친 전도여행은, 당시의 세계판도로서는 최대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며 새 교회를 세웠고, 남이 세운 터 위에는 일하지 아니했다.( 롬15:20.)

그의 전도 대상은 유대인과 이방인 이였으며, 앉은뱅이를 고쳤고, 무녀에게도 옥졸에게도 아테네의 철학자들에게도 상선의 선객들에게도 로마의 옥중에서도 전도했다.( 행13:42-4614:816:1629-32,17:18,27:22-25,28:23,30-31.) 그는 전형적 전도자로서, 그 사명을 위해 담대하였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선한 뜻으로 생명조차 아끼지 아니하면서 전도에만 열정을 다 바쳤다.( 빌1:20; 딤후4:2; 빌1:15; 살전2:8; 골1:28-29.)

그리하여 그의 선교중심 신학은 자연히 교회중심 신학과 연결된다. 선교하면서 교회를 세웠고, 교회를 위하여 서신을 썼다. 바울은 그가 세운 교회들을 흠이나 티가 없는 영화로운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보고( 엡5:26.) 사랑하였다. 그래서 교회에 문제가 있을 때에는 찾아가기도 하고 편지를 썼다. 그의 3차에 걸친 전도여행은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이었고, 그가 쓴 서신들은 자기가 전한 예수의 몸인 교회를 돌보는 일이었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전이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하면서( 고후6:16; 딤전3:15.) 교리를 지키고, 권징을 하면서,( 딤후2:15; 고전5:13; 빌4:9; 딤4:2.) 덕을 세우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라고 한다.( 엡4:29; 롬12:5; 고전12:12; 엡4:15-164:1-3.) 이러한 바울의 교회관은 그가 진실로 일생토록 선교를 위하여 몸 바친 모범적 전도자임을 알게 한다.

출처 : 묵언수필.
글쓴이 : 漸修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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