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영성
언제부터인가 ‘영성’이란 화제가 세인들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이것은 신약성서를 연구하는 가운데 이를 ‘영성’이란 관점에서 연구하는 작업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이 되는 것이다.
‘영성’이라는 말은 본래 기독교 안에서 카톨릭의 전용어였다. 그러던 것이 자연스럽게 기독교의 용어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영성’은 이제 기독교에서뿐만 아니라 종교의 영역을 넘어서서 인문과학과 자연과학 분야에까지도 중요한 화두로 대두되고 있다. 이것은 그동안 인류를 지배해 온 이성에 근거한 합리주의 사고가 가져온 인본주의를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보이지 않는 영성에 대한 관심이 촉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다.
이제 요즘을 사는 현대인들은 삶의 의미와 동력을 제공할 새로운 ‘영성’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기존 교단들은 전통이나 교리, 조직 가운데서 현대인들이 느끼는 영성에 대한 갈증을 시원스럽게 풀어주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영성’에 대한 이해 부족과 더불어 신학적인 제반 작업들이 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에 와서 영성은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찬들에게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모토가 되기도 하며, 또한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불신자들과는 차별되는 모습을 요구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영성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영성이 어떠한 것이며, 우리 크리스찬들에게 왜 필요한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영성을 개발해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하여 고찰해 보고자 한다.
더불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영성에 대하여 어떻게 가르치셨는지, 그리고 예수님의 영성은 어떠하셨는지 함께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1) 영성이란 무엇인가?
최근에 들어 영성에 대한 관심이 신학계의 중요한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대략 1980년대 이후부터 영성에 대한 관심이 여러 방면에서 서서히 무르익고 있다.
이러한 관심의 전환은 실천 목회의 현장에서도 일어나고 있고, 학문의 현장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그 이전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까지 가장 뜨거운 이슈로 등장한 것이 ‘해방’과 ‘민주’였다면, 최근에는 ‘통일’이나 ‘영성’ 같은 것들이 교인들과 신학도 들에게 관심을 끌고 있다. 여기에 발맞추어 영성신학에 대한 학문적인 저술 또한 점차로 늘어가고 있으며, 교회 현장에서도 기존의 부흥회를 거부하고 ‘영성수련’에 차츰 눈을 돌리고 있다.
1) 영성이란?
우선 ‘영성’이라는 단어는 몇 마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매우 까다로운 개념이다. 영성에 대하여 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아직도 학자들이 대체적으로 동의할 만한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예컨대, 이워트 쿠진스(Ewert H. Cousins)는 『기독교 영성이란 무엇인가?』라는 논문을 썼으면서도 시원한 해답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우선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과 ‘영성생활’(spiritual life)이라는 말을 구분해서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 ‘영성’이란 말은, 한 사람이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의 성격을 가리킨다면, ‘영성생활’이란 말은 그러한 성격의 관계를 이루어가기 위하여 행하는 일련의 신앙적인 노력들을 가리킨다.
이미 오래 전에 프랑스의 영성 신학자 루이 부이에(Louis Bouyer)는 영성의 개념을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 영성을 교리와 윤리에 대조시켜 설명한 바 있다. 즉 교리는 믿음의 대상을 연구하고 서술하는 것인 반면, 영성은 이러한 믿음의 대상들이 인간의 의식 속에서 빚어내는 관계를 연구하는 것이다. 반면, 윤리는 인간의 생활 전반에 관심을 두지만, 영성은 인간의 생활 중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해당하는 행동들에만 관심을 둔다.
그러므로 개념적인 이해를 위해서 이러한 구분을 하는 것이 어느 정도 허용될 수는 있지만, 결국 영성을 교리나 윤리와 관계하여 이해하고 실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종교 간의 대화에 있어서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이 영성에 대한 논의일 것이다. 모든 종교가 인간으로 하여금 현재의 인간 실존을 넘어서서 좀 더 나은 존재로 변화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종교들은 나름대로의 방법들을 사용하고 있고, 이러한 방법들은 얼마든지 서로 교류할 수 있는 대상들이다. 이처럼 기독교 영성도 인간으로 하여금 현재의 상황을 벗어나서 초월적인 존재와 관계를 맺게 하고, 그 관계 속에서 성장하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종교와 전혀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 목표에 있어서 기독교 영성이 다른 종교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할지라도, 기독교 영성은 다른 종교와 명백히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차이점 때문에 ‘기독교 영성’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영성과 영성생활의 가능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 안에서 시작되었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사람으로 선언된다. 이것을 가리켜 신학적인 용어로 ‘의인’이라고 한다. 아직도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을 믿음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의 영성생활은 시작되는 것이다.
다른 종교의 경우, 대개는 기독교와 반대이다. 즉 영성에 대한 노력이 먼저 있고, 그 노력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렀을 때, 구원을 이야기 한다. 바로 이 점이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차이점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구원과 그 은총을 통한 새 창조만을 강조한 결과 그 이후의 자구적, 영적 노력에 대하여 무관심해 왔다. 그래서 구원 이후에 한다는 노력이라고 해야 고작 현재적인 축복을 얻는 것에 국한되어 왔었다. 이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선언에 만족하고,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충만한 자리에까지 이르는 노력을 게을리 해왔다. 그 결과, 구원을 받았다는 확신에 차 있기는 하지만, 영성적인 차원에서는 오히려 다른 종교들만도 못한 점들을 보여 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적 영성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이 심각하게 요청되는 시점에 서 있는 것이다.
2) 성경과 영성
① 영성의 원천
우리는 영성에 대한 원천을 성경이나 전통 및 예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성경이 모든 영성의 규범과 표준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계시하며, 어떻게 그 분을 믿으며, 섬겨야 하는지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바티칸 제2차 공의회는 성경을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통을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도들에게 위탁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달하는 것으로 진술하였다. 예전은 신앙인들이 그리스도의 신비와 참된 모습을 그들의 삶 속에 표현하고, 타인들에게 입증할 수 있는 도구이다.
그리고 영성은 하나의 신학으로서 교의신학과 도덕신학의 원리들과 결론들을 제시해주고 있으며, 많은 성인들이나 저술가들에 의해 다루어지고 있고, 심리하고가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도 그 원천들을 볼 수 있다.
② 구약성경에 나타난 영성
시편 기자들의 신앙심은 하나님의 임재 개념에 달려 있다. 아마도 왕궁의 언어에서 유래된 은유인 ‘야웨 앞에서’ 찬송은 불려졌고, 기도가 드려졌다. 희생, 제의 예배, 그리고 합창이 왕명 시행의 태도로 하나님의 존전에서 거행된다.
이런 신앙의 한 가지 결과로 하나님의 임재는 세상의 어떤 좋은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히 본질적이라는 사상이 시편 기자의 고백 속에 나타난다. 즉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은 부요함보다 낫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어떠한 물질적인 부요도 값어치가 없다.
시편 기자들에 있어서 이것은 자신의 소명을 하늘에 두는 것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임재의식은 전적으로 이 세상 차원에서 작용한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것은 분명히 어떤 류의 지상 복락보다 낫다는 사상은 영적인 방향으로 향하고 있으며, 기독교를 비롯한 유대 신비주의를 위해서도 생산적인 주제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축복이 아니라 피하려고 했던 하나의 위협으로써 경험되는 몇 구절의 말씀이 있다(시 51:9). 시편 139편은 하나님이 전재하셔서 도저히 그 분을 피할 수 없다는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숨으심은 하나의 징벌로 경험되고 있다. 즉 의인은 하나님의 목전에서 살 수 있으나, 죄인들은 하나님의 임재의 충만한 능력을 견뎌낼 수 없으며, 그 분의 임재가 물러가는 것을 겪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과 사귀는 것은 하나의 큰 특권인 동시에 부담스런 점이다.
또한 율법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가 유대교를 위하여 율법에 화육이 되었다고 말할 정도로 거의 경외의 대상이 된다. 율법은 하나의 생각과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에 대한 하나의 규범적 표현이며, 예배자는 그 율법의 모든 상세한 규정들을 준수함으로 하나님을 안다. 더구나 율법을 지킬 뿐만 아니라, 율법을 묵상하는 것, 다른 말로 하면, 그 율법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목전에서 암송하고, 모든 단어마다 심지어는 모든 글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피면서 연구하는 것도 영적으로 유익하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그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에 의해 하나님과의 교제, 즉 영성이 시작된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영성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그에 대한 제의적 영성과 예언자적 영성의 조화 또는 통전으로 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책임적인 존재로 참여하는 영성을 지니게 된다.
③ 신약성경에 나타난 영성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고 섬기려 한다면, 우리는 단순히 외적이거나 형식저인 십계명 준수에 만족할 수 없다. 그래서 마태는 마음의 근본적인 악의 입장에서 각 금지 조항을 이해함으로써, 즉 살인과 간음 행위뿐만이 아니라, 성냄과 미움과 탐욕을 피함으로써 서기관과 바래새인의 의를 초월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마태복음 19장 21절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라는 완전의 권면을 덧붙인다. 이 말은 보다 높은 차원의 삶, 수도사적 처빈의 삶에로의 초청이다. 그러나 그 부자는 재물에 대한 집착이 너무나도 강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초청과 권면에 응할 수 없었다. 이 도전의 말씀은 최초의 제자들을 부르신 사건과 첫 번째 수난예고에 뒤이어 나오는 교훈을 생각나게 한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 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한편 우리는 성령 안에서 늘 깨어있는 생활을 하므로 예수님의 뜻에 부응한 삶을 살 수 있다.
또한 바울은 그의 회심과 사도직을 두개의 다른 상황과 언어로 언급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죄에 관해서는 죽은 자로 여겨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로 여겨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의 새로 설립된 교회에 보낸 목회 교훈에서 부활 사건부터 다루고 있다.
바울 서신 가운데 기독교 신학과 기독교 영성의 뿌리를 담고 있는 고린도전서를 고찰해 본다면, 고린도에 보낸 바울의 메시지는 배타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만 집중되고 있다. 이 메시지는 세상의 지혜들과는 대립된다. 즉 헬라인들에게는 어리석거나 무의미하고, 전쟁의 하나님에 대해서 교육받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거나 뒤죽박죽인 셈이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몸 된 여러 구성원에게 나누어 주시며 조화 있게 하는 다양한 영적 은사들이 있다. 그러나 은사들에는 계층이 있고 그리스도인들은 보다 높은 은사를 사모하고 개발할 것을 권면 받고 있다. 정결에 대한 특별한 권면을 받고 있는 모든 개개의 그리스도인도 똑같이 성령의 전이다. 몸 자체는 악이 아니며 하나님께서는 그 몸 안에서 영광 받으실 수 있다.
반면 우리의 인간 본성인 육체는 약하고 이중적이고 반역적이다. 때문에 옛 아담과 새 아담간의 싸움이 각 개인의 육체와 영 사이에서 벌어진다.
바울은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개념에 낯설지 않으며, 하나님의 통치가 예수님 자신이 암시한바와 같이 예수님의 부활 속에서 능력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은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일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이루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약에 나타난 영성은 예수그리스도 중심의 영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그리스도의 영성은 종말론적인 하나님나라의 영성이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하셨으며
이 땅 위에 재림하실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믿고 그 분이 지신 십자가를 믿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분을 따라 그들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며, 매일의 삶 속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며 종말론적인 재림 신앙을 가지고 담대하게 하나님나라의 건설과 확장에 책임적인 자세로 참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3) 성령과 영성
대체적으로 구약성경의 영은 특별한 사람들에게 주로 역사하셨다면, 신약성경의 성령은 예수님의 일생의 사역과 깊은 연관을 맺으면서 직접적으로 신앙 공동체인 교회에 역사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토마스 교수에 따르면, 성령은 예수님의 수태, 세례, 공생애와 그의 치유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과 현존의 표명이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성령은 교회 공동체에 주어지며, 그 공동체의 선교 사명을 주도하시며, 그 선교에 힘을 부여하신다.
바울에 있어서 성령은 부활하신 예수가 교회와 그 구성원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방식이다.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기도를 돕고, 성령의 열매, 특히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하려고 성령을 통하여 개개 그리스도인과 그 공동체 속에 거하신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에게 영을 불어넣어 주셨다. 그래서 살아있는 인격체로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영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제 타락한 인간이 다시금 하나님과 사귈 수 있는 영성을 지니려면 성령의 은혜와 역사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해야 한다. 그래야 기독교 영성이 형성되어 영성의 삶이 가능해 진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빛의 삶, 부활의 삶, 그리고 세상 공동체 속에서 윤리적인 삶을 살게 된다. 우선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예수님의 대속적인 사랑과 계시, 그리고 성령의 감동 감화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받아들이게 되며,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며, 이웃과 세상 공동체에 관심을 갖게 되어 사랑을 베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를 모두 실천하며 이 세상에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지칭되는 하나님의 날, 즉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2) 영성이 왜 필요한가?
영성에 대한 관심은 짧은 시간 안에 교계와 학계에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그 원인을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고도의 문명 생활의 결과로 인하여 사람들이 내면적 공허감을 더욱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는 점이다. 오래 전 사람들은 고도의 문명생활, 즉 테크노피아(Technopia)가 인간의 내면적인 문제까지 해결해 주고, 참된 행복을 가져다 줄 것처럼 기대해 왔고, 또 그것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테크노피아는 더 이상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현대인이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다.
문명이 발달하고, 인간의 삶이 편해지면 편해질수록, 역설적으로, 인간의 내면은 더욱 공허해지게 된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자연히 없어질 줄 알았던 종교에 대한 기대는 오히려 더욱 강해지고 있다.
둘째로, 복잡다단해진 현대의 사회생활 속에서 인간의 내면이 지나치게 분열되었다는 점이다. 지금의 우리의 삶은 50년 혹은 100년 전의 삶에 비해 얼마나 복잡해지고, 그 결과로서 우리의 내면은 얼마나 많은 것으로 인하여 가랄져 있는가? 그리하여 정신분열증 같은 정신질환들이 급증하고 있다.
이것을 치유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종교로 눈을 돌리고 있다. 내면적인 안정과 평화를 얻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종교뿐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욕구를 가진 현대인들은 메말라 빠진 말만을 가지고 있는 기존의 교회를 외면하고, 내면적인 치유를 받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신비 종교로 몰리고 있다. 현대인들의 주제는 더 이상 ‘진리’나 ‘정의’ 또는 ‘윤리’가 아니다. 그들의 관심은 ‘내면적인 샬롬’(inner wholeness)의 상태를 이루는 데 있다.
셋째로, 한국 교회 전체의 현상에 대한 반성 때문에 영성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도 했다. 한국 교회 특히 개신교회는 그 동안 ‘물질 축복’, ‘영육 구원’이라는 가치 아래에서 약 30여 년간 급성장을 이루어왔고, 그 관심은 주로 물질적인 것에만 국한되어 왔다.
교회성장도 물질로 계산되었고, 개인의 축복이나 신앙의 척도도 역시 물질로 계산되었다. 하지만 이제 어느 정도 잘 살고 보니,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까지 그 광야의 외침에 대하여 교회가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점점 더 많은 교회들이 그 비판의 소리가 옳았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교회가 그 동안 물질 축복에 정신을 잃어 왔다는 깨달음이 점차 확산되고, 그것에 대한 대안은 곧 ‘영성’, 즉 내적 성장이라는 발견을 하게 된 것이다.
넷째로, 그 동안 신학자들은 서구적인 학문적 방법론과 관심에만 묶여왔다. 그래서 논리적인 체계를 세우고 이론적인 논의를 중시하였다. 그것을 신학이라고 가르쳐왔다. 그러나 이 학문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즉, 인간의 내면에 관계가 없는 단순한 논리의 장난은 아무런 가치가 없으며, 그것으로는 진정한 의미에서 아무도 변화시킬 수 없음을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진정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학문적 방법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기울였고, 그러한 물음이 결국 영성에 대한 관심으로 귀결되었다.
마지막으로, 동서양의 만남 또한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제까지 학문은 학문대로 흐르고, 삶은 삶대로 따로 놀게 되었다. 즉, 학문의 체계는 높지만 삶의 깊이는 그 만큼 깊지 못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 신학도 이러한 영향을 받아 초기에 있었던 그 깊고도 풍요로운 영성적 전통을 잃어버리고, 단순히 논리 체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신학과 교회가 멀어지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신학은 점점 더 가치중립적인 학문 체계로만 발전하였고, 교회의 신앙에는 아무런 도움을 제공해 주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결국, 신학에 대한 교회의 불신을 낳게 되었다.
이런 서구 신학이 동양의 학문과 만나 학문의 체계만이 아닌 삶의 질을 강조하는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
(3) 예수님의 영성
이제까지 앞에서 언급한 관점을 중심으로 영성의 토대라 할 수 있는 예수그리스도의 영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예수님 영성의 근거
예수의 영성을 근본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결정지어주고 있는 근거는 그 자신이 종말론적인 비전 안에서 조명했던 새 창조의 현실이다.
새 창조는 이스라엘의 예언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예수 시대에 이르기까지 종말론적인 메시아의 대망 속에서 늘 기대되어 왔던 사건이다. 창세기는 인간의 죄로 인한 원 창조의 파괴를 말하고 있다. 원 창조 때에 있었던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의 완벽한 조화와 교제가 인간의 죄로 인하여 상실되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현재 겪고 있는 이 참담한 실존 상황은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원 창조의 파괴에 그 원인이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결정적인 구원 사건이 일어날 그 날인 ‘야웨의 날’을 대망했던 예언자들은 종말론적 유형론(eschatololgical typology)에 따라서 새 창조의 출현을 기대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의 날이 이르면 타락된 원 창조가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역 속에서 종말에 준비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미 시작되고 있다고 믿었다. 세례를 받을 때 일어났던 성령의 강림과 하늘의 열림이 그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 새 창조는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있어서 영성 추구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런 까닭에 예수의 영성을 ‘새 창조의 영성’(New creation spirituality)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새 창조의 영성은 원 창조 시대에 주어진 순결성을 회복하고, 그 순결성 안에서 내적 생각과 의지가 하나님의 본 뜻에 완벽하게 조율된 상태이다.
이런 관점에서 바울이 예수를 ‘새로운 아담’으로 그리고 있는 것은 매우 정확한 인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새 창조와 관련하여 우리는 성령의 역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께서 자신의 사역 속에서 새로운 창조의 현실이 실현되고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자신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성령의 역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강조하신 것은 내적인 면에서의 새 창조였다. 성령의 능력은 병든 사람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적 존재를 새롭게 만드는 일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음으로써 인간의 상태를 회복하는 하나의 모델로써 사셨던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회복하는 것이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당신의 형상을 주셨다. 그리고 인간이 이렇게 창조됨으로써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었고, 하나님을 닮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타락은 이 형상을 깨뜨려 버렸다. 인간의 죄로 인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잃어 버렸고, 하나님을 닮아 사는 것도 불가능해졌다.
이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은 깨어져버린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이다.
2) 예수님의 영성 내용
이러한 종말론적인 새 창조에 참여하게 되면, 가장 우선적으로 하나님과의 열린 관계와 친밀한 교제가 가능해진다. 예수의 영성에 있어서 가장 돋보이는 측면이 바로 이 부분이다. 예수께서는 새로운 창조와 맥락 안에서 하나님과의 하나 됨(union with God)을 완전한 상태로 보여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역동적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믿었다. 예수님은 성령과의 관계가 곧 하나님과의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성령의 충만함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살아간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당신 안에 성령의 충만한 것을 알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 됨을 확신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영성이 예수의 모든 가르침과 행동의 근거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과의 이러한 하나 됨은 예수로 하여금 하나님을 닮아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었다. \\\'하나님 닮음‘은 성령을 통한 하나님과의 하나 됨의 결과이다. 이 하나 됨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성품을 닮게 하고, 하나님처럼 살 수 있게 해 준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됨으로써 하나님을 닮아 사는 것을 영성의 최고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의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는 초월적이고, 권위적이었다. 그는 공의의 하나님이요, 심판의 하나님이셨다. 그들이 믿던 하나님은 부정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던 분이셨다. 하지만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은 훨씬 더 내재적이었고, 자애로우신 분이었다. 특히 예수의 비유들에 등장하시는 하나님은 훨씬 더 모성적인 면을 보여준다.
이러한 하나님을 가르쳤던 예수였으므로, 그 분은 자신이 가르친 하나님의 방식대로 살았다. 이것이 그의 가르침과 행동이 그토록 파격적으로 비쳐진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과 계속하여 교제를 나누면서, 그분과 하나 됨을 이루어 나아갔고, 그 결과 그 분과 같은 행동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과 완전한 하나 됨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예수는 예수요,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3) 예수님의 영성의 외적 표현
종말론적인 새 창조의 비전 위에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의 신비적 합일을 이루었던 예수의 영성이 외적 행동으로는 ‘자기 비움’(self-emptying)과 사랑으로 표현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기 비움은 내적인 정화의 형태로 표현되기도 하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는 삶을 통해서 표현되기도 한다.
영성에의 추구란, 결국 더욱 풍요로운 생명을 일구어 가는 일이므로, 그 생명의 참된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깨달음은 탐욕을 내어 놓고 하나님께로 돌아 설 수 있게 해준다. 따라서 탐욕과 관계된 자기 비움은 새로운 창조의 실현이나 하나님과의 하나 됨의 한 결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는 ‘부’로부터 마음을 끊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이 청빈의 길을 걸어 가셨다. 이것이 또 다른 면에서의 자기 비움이었다.
또한 예수께서는 물질적인 비움뿐만 아니라 내적 비움, 즉 ‘영적 가난’에 대하여도 가르치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가장 귀한 사람은 의로 가득 찬 부자가 아닌, ‘심령이 가난한 자’인 것이다.
이 자기 비움은 마침내 섬김의 길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복음서 전승 속에 깊이 배어 있는 예수의 말씀과 행동으로 비추어 볼 때, 예수의 섬김 사상은 ‘대속의 말씀’(ransom saying)에 절정화 되어 있다.
그 분은 자신의 존재가 주는 모든 권한과 특권을 내어놓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려고 내려섰다. 그리고 그 섬김과 종의 길의 마지막에는 십자가가 놓여 있었다. 그 분의 죽음은 자기 비움의 영성이 결국 이끌어다 준 종착점이었다.
예수의 하나님 닮음은 구체적으로 그의 사랑의 행위를 통해서 드러났다. 그 분은 인간의 잘못을 따지는 분이 아니라, 너그럽게 용서하시면서 스스로 성장하기를 바라시는 분이었다. 예수께서 체험하신 하나님은 자식을 위해서 가장 좋은 것을 주기를 원했고, 집 나간 자식이 되돌아오기까지 넉넉하게 기다리는 분이셨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체험하였고, 그 성품을 닮아 행동하셨다.
사랑의 발로로서 예수께서 삶을 통해보여 주셨던 너그러움은 그 분이 죄인들과 나누었던 식탁교제(Table-fellowship)에서 특별히 드러난다. 이 식탁교제는 당시의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의 식탁교제와 비교해 볼 때, 그 진면목이 드러난다. 즉 예수님의 식탁교제는 모든 사람들ㅇ게 개방되어 있었다. 이것은 곧 예수께서 믿는 하나님의 너그러움을 반영한 것이었다.
사랑의 발로로서 표현된 너그러움은 예수로 하여금 당시의 모든 금기를 깨뜨리고, 모든 사람들을 똑같은 인간으로서 존중하게 만들어 주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하나님나라 사역이 결국 이방인들까지 포용할 것이라는 비전을 가지고 계셨다.
4) 예수님의 영성과 윤리의 관계
영성은 윤리의 뿌리이고, 윤리는 영성의 열매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영성은 우리에게 좋은 모델을 제공해 준다.
예수에게 있어 영성은 윤리와 분리되지 않는다. 의심할 것 없이, 예수께서는 내면적인 차원에서의 영성을 우선으로 생각한다. 다시 말해, 내면적이고 개인적인 영성에의 추구가 더 우선되는 일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에게 있어 영성의 초기 작업은 윤리적 행동을 가로막는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윤리적 행동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각종 탐욕을 제거해야 한다. 윤리로 열매 맺혀지지 않는 영성은 잘못된 영성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에게 있어 영성이란, 윤리까지 포함한 포괄적인 개념이며, 반대로 그 분에게 있어 윤리란 영성을 전제로 한 각서이기 때문이다.
(4) 영성 개발 어떻게 할 것인가?
1) 영성 개발의 필요성
우선 예수의 삶의 방식이 우리에게 영성 개발을 하도록 요구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죄인들과 세리 및 창녀들과 먹고 마신 것을 예로 들어, 예수가 매우 자유분방하게 사셨던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는 규칙적으로 기도생활을 하셨으며 현저하게 교행 주의적 양식에 입각하여 사셨다.
그리고 예수의 말씀이나 명령이기에 우리는 영성 개발을 해야만 한다. 그 분은 제자들과 같이 동행하면서 그들에게 계속하여 영성을 개발할 것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의 승천이후 오순절에 이르기까지 제자들에게 엄청난 영적 진보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전에는 단 한 시간도 예수와 함께 깨어서 기도할 수 없었던 그들이 열흘 동안 계속해서 기도하는 모임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들의 경우, 분명히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을 때” 비로소 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영성 개발은 신약 성경이 강력하게 명령하고 있는 바이다. 또한 영성 개발은 개신교의 오류를 보완한다. 믿음을 지니기 전의 불신자들에게는 영성 개발이 별 의미가 없지만, 예수를 영접한 초신자나 미성숙한 신자들에게는 영성 개발이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개신교는 ‘오직 은총’과 ‘오직 믿음’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야 할 구원과 영성 개발을 오히려 소홀히 하게 되었다.
루터교와 칼빈주의 신학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결코 맘대로 할 수 없다. 금세기에 이르러 이런 입장의 논리가 서위 신종교개혁 신학자들에 의해 지속되고 있다. 즉 그들에 의하면, 기독교 신앙은 종교와 전적으로 대립된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것을 겸손히 받아들인다. 이와 반대로, 종교는 하나님께 다다르려는 교만스런 시도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 교회의 영적 성숙과 한국 문화의 변혁을 위해 한국 그리스도인의 영성 개발은 시급하다 하겠다. 영성을 개발한 그리스도인들은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 제 역할과 사명을 어느 때, 어느 장소에서든지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2) 영성 개발의 목적
첫째로, 틀에 박혀 있는 생활로부터의 해방과 새로운 시도를 하기 위해 영성 개발이 필요한 것이다.
둘째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완전하고, 올바른 신앙생활에로 더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셋째로,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영성 개발이 필요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온전한 종이 되어 천국 사역에 동찬하기 위해 여성 개발이 필요한 것이다.
3) 영성 개발 방법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의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영성을 훈련하고 개발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심각히 고려해야 한다.
이에 대하여 리차드(Richard Foster)교수는 12가지 영성 개발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첫째로, 내면훈련에는 묵상훈련, 기도훈련, 금식훈련 및 공부훈련이 있다.
둘째로, 외면훈련에는 단순훈련, 고독훈련, 순종훈련 및 섬김 훈련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한국 교회 실정에 맞는 훈련들이 몇 가지 있는데, 이제부터 이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① 경건훈련
한국 기독교인들의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가 아직도 경건에 대하여 어색해 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건훈련은 침묵훈련이나 고독훈련과도 깊은 관련이 잇다. 경건훈련의 목적은 하나님의 음성과 형제, 자매들의 아픔과 탄식 소리를 듣기 위함이다. 이 경건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
경건을 쌓으므로 우리는 말을 조심하게 되고, 생각을 정리함으로 내적 여유 또한 제공받게 된다. 더구나 우리는 이 경건을 통해 하나님을 체험하게 된다.
경건의 시간을 극대화하기 위해 되도록 조용하고 한적한 곳을 택하고, 경건의 시간을 미리 정하여 마음을 차분하게 하고, 경건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뜻을 발견하여 많은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② 기도훈련
기도훈련은 영성 개발의 근본이요 핵심이다. 왜냐하면, 경건훈련이나 고독훈련, 묵상훈련, 금식훈련 등이 모두 일종의 기도훈련이며, 기도야말로 영성생활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21세기를 사는 요즘 기독교인들의 삶은 기도 중심의 삶이 아니라, 물질과 돈 위주의 삶이요, 육체 중심의 삶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분명히 기독교인들의 차고 넘치는 풍성한 영적 삶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제 우리가 기도훈련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그 방법들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 기도가 삶에 가장 중요한 부분임을 명심해야 한다.
ⓑ 하루의 첫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는 시간으로 삼아야 한다.
ⓒ 단순생활이 바탕이 된 단순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 더 나아가 깊은 기도를 하기 위하여 관상기도(Contemplative prayer)와
일치의 기도가 필요하다.
ⓔ 기도훈련을 위하여 금식기도와 ‘기도훈련 학교’ 등에 참여하는 것도 좋은
생각이라 할 수 있다.
ⓕ 하루 중 첫 시간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특별한 만남과 교제를 위하여
하루에 몇 번이라도 규칙적인 기도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
ⓖ 마지막으로, 예배시간 1시간 전에 교회에 나와 기도로 준비하는 것이
좋다.
③ 절제훈련
절제는 기독교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요,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다. 다른 덕목과 성령의 열매가 있다고 하더라도, 절제가 없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고, 다른 이들에게 유익이 안 된다.
절제는 생활 전반에 걸쳐 실행되어야 한다. 말의 절제에서부터 식음의 절제, 휴식과 수면의 절제, 일과 노동의 절제, 성과 쾌락의 절제, 씀씀이와 여행의 절제, 종교생활과 문화생활의 절제, 권력과 욕망의 절제 등이 있어야 한다.
여기에 보다 본질적인 차원의 절제훈련을 언급하고자 한다.
ⓐ 말씀 묵상훈련으로 우리의 영성이 생의 바른 목표와 목적을 설정하게
되고, 따라서 절제가 가능하게 된다고 믿는다.
ⓑ 가능한 한 사람, 회의와 모임, 대중매체 등을 피하고, 대신에 독거와
고독과 침묵과 단순생활에 힘써야 한다.
ⓒ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그리스도의 완덕에 이르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그리스도인을 갈망하며, 사랑하며, 노력해야 한다.
ⓓ 절제훈련의 차원에서 조금 덜 먹기, 덜 자기, 덜 다니기, 덜 쓰기를
습관화해야 한다.
ⓔ 영적 독서, 즉 성경과 영성인 들과 수도사들과 위대한 신앙인들의 저작들
을 읽음으로써 심령과 정신과 마음과 생활을 기록해야 한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이 절제훈련과 절제생활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 땅의 복음화의 장래가 결정된다. 절제 없는 기독교인과 교회는 한 사회의 암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절제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아지고, 교회가 절제생활을 앞장서면 우리 사회는 새로워지고 아름다운 문화가 형성될 것이다.
결 론 : 영성의 삶
영성은 곧 새로운 삶의 시작이요, 원천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영성적 삶을 살아야 하는가?
우선 영성적인 삶의 가장 중요한 표현은 사랑의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영성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요, 영성생활의 출발이 바로 하나님과의 사귐이라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와 사랑을 기억하는 것이 이런 무제한적인 사랑과 용서를 실천할 수 있는 원천인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과의 영성관계가 긱ㅍ어지면서 나타나야할 영성적 삶의 또 다른 표현이 섬김이다. 섬김이란 다른 사람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 삶의 방식이다. 영성적인 삶의 방식이란 내가 우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익을 앞세우는 데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영성적인 삶의 표현으로써 특히 부각되고 있는 또 하나의 요소가 있다면, 곧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모든 면에서 예수처럼 사는 것을 말한다. 나의 욕심과 의지를 접어두고, 예수께서 요청하는 대로 사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예수를 따르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다. 자기의 꿈과 야망을 내려놓고, 예수의 꿈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언급하고 싶은 것은, 예수 앞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아무리 이익이 되고 유익한 것이라 할지라도 내가 주 앞에서 기뻐할 수 없고, 즐거움을 가질 수 없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성적인 추구를 하면서, 혹은 영성적인 삶을 살면서 우리 마음 가운데 기쁨을 누려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우리가 기뻐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더불어 영성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중시하고, 예수의 가르침대로 그를 닮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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