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의 휴식(시23:1-6)
성경본문 :시편23:1-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31:3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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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기승을 부리던 더위도 조금 수그러드는 듯 하며 휴가철도 막바지에 접어들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여름 휴가를 이미 갔다 오신 분도 마음에 그렇게 흡족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휴가는 언제나 가기 전이 후보다 더 좋은 것 같습니다. 한편, 휴가를 다녀오지 못한 사람들은 마치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사람처럼 공연히 허전하고 아쉬운 생각이 들 것이며 또 가족들에게 미안한 생각도 들 것입니다.
휴가라는 제도(?)가 언제 생겼는지 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바캉스란 말은 생소한 단어였습니다. 아마 7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야 비로소 유행되기 시작한 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지고 경제적 여유가 생긴 후에 나온 말이지, 먹고살기도 급한 때 무슨 휴가를 입에 올렸겠습니까? 그러나 휴가라는 것이 단순히 경제적 여유에만 관련된 것은 아닙니다.
옛날에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부자라 해도 여름에 반드시 바캉스를 다녀와야 한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집에서 모시 적삼이나 입고 부채질이나 하고 있든지 아니면 선풍기로 더위를 식히고, 정 못 참겠으면 찬물로 목마를 하든지 근처의 개울이나 강가에서 멱을 감는 일이 고작이었습니다. 바캉스란 말은 들어보기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들어보았다 해도 먼 나라 얘기였습니다.
바캉스가 일반화된 데에는 높아진 생활수준 못지 않게 변화된 사회, 특히 도시화와 산업화가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농촌 사람들이 휴가 간다는 얘기를 들어보았습니까? 농부들이 휴가를 안 가는 것은 반드시 돈이 없거나 바빠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농부들은 늘 자연과 접하고 살고 있으며, 비록 가난하다 해도 마음의 여유가 있고 삶이 무엇에 쫓기지 않고 생활에 어딘가 여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농부들은 도시인들에 비해 목표를 달성해야겠다는 강박관념이나 치열한 경쟁의식이 적고 따라서 스트레스도 그만큼 적게 받습니다.
반면에, 푹푹 찌는 폭염 속에서 도시의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열기에 질식할 것 같은 도시인들은 늘 탈출의 유혹을 받고 삽니다. 산업현장의 노동자들은 아무리 쾌적한 분위기 속에서 일한다 해도 자연과는 거리가 먼 인위적 세계 속에서 살아야 하며, 매일 똑같은 행위를 반복해야 하는 전문직 종사자들도 일의 무료함 때문에 계속해서 탈출의 유혹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쁜 도시 생활을 탈피하려고 기껏 바캉스를 계획해서 떠나지만, 우리 한국인들의 바캉스는 여유로움과 휴식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휴가도 마치 번갯불에 콩 구어 먹듯이 합니다. 스피드 시대의 바캉스도 스피디하게 보냅니다. 그래서 쉬기는커녕 피로가 더 누적되어 돌아옵니다. 바캉스에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는커녕 스트레스를 더 받고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휴가에서 쌓인 피로를 회복하기 위한 진짜 휴가가 따로 필요합니다.
얼마 전 홍콩에서 발간되는 신문 Far Eastern Economic Review가 아시아 여러 나라를 상대로 여론조사를 한 바에 의하면, 한국인들이 자기들의 삶의 질에 대하여 스스로 가장 낮게 생각하고 있으며 자기 삶에 대하여 가장 불만스럽게 생각한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특히 한국인들은 스트레스를 가장 많이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미친 듯이 일하여 이젠 절대 가난도 면하고 일인당 국민소득 일만불 시대를 맞게 되었지만, 한국인들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고 많은 회의를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질적 삶은 확실히 더 풍부해진 것 같은데 그야말로 삶의 질이 억망이고 삶의 환경이 옛날만 못하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마도 바캉스를 갈구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노동의 비인간화일 것입니다.
일 자체가 무료하고 무의미하게 된 탓입니다.
이것은 산업사회의 일반적인 특징입니다.
불루칼라, 화이트칼라 가릴 것 없이 노동은 될 수 있으면 적게 하고 피하는 것이 상책이 되었습니다. 일년 내내 휴가를 기다리며 삽니다. 휴가를 위해 돈을 저축하고, 휴가를 가서는 몽땅 써버리고 또 다른 휴가를 기다리며 일을 합니다.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구라파나 미국 사람들은 휴가가 삶의 목표처럼 되어버렸습니다. 휴가를 가기 위해 돈을 벌고, 휴가야말로 진짜 삶이고 일은 마지못해 하는 수단으로 전락되다시피 한 것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휴가란 우리가 더 능률적으로 일을 하고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합니다. 휴가는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입니다. 나는 즐겼다고 주관적으로 착각할는지 모르나, 한치의 실수나 여유로움을 허락하지 않는 무한경쟁의 체제 속에서 휴가란 더 많은 노동과 더 큰 착취를 위한 고도전략에 지나지 않으며, 노동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러한 체제에 길들여지고 이용당하는 것입니다.
나는 일시적으로 휴가를 즐겼을는지 모르나, 사회와 체제는 휴가를 철저히 수단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습니다.
이런 노동과 휴가의 이원화된 삶이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우리는 심각하게 물어 보아야 합니다. 이것보다는 오히려 가난했을망정 옛날 사람들처럼 계절마다 잔치와 축제를 벌리면서 일하는 것이 노는 것이요 노는 것이 일하는 것처럼 살던 때가 더 인간다운 삶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요즈음 유학생들은 좀 달라졌겠지만 저는 옛날 유학을 가서 시간제 아르바이트를 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당시 우리 사회보다 훨씬 더 산업화되고 조직화된 사회에서 한 시간 일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유학 가서 고생해본 사람은 모두 실감했을 것입니다. 잠시도 쉴 틈 없이 부려먹는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간이 돈이다, 시간당 얼마를 받는다는 개념조차 없이 모든 것을 대충 대충하면서 살던 우리들로서는 너무 비인간적으로 느껴졌던 것입니다. 적당히 봐 가면서 일하고 봐 주면서 보수를 주던 인정 많은 사회에 살던 사람의 사고가 전혀 통하지 않는 사회였던 것입니다.
노동과 휴식이 이원화되지 않은 삶, 일을 놀이로서 하고 놀이 가운데서 무엇을 이루는 삶이야말로 아름다운 삶일 것입니다. 휴식이 일을 더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 삶 자체가 휴식인 삶, 언제나 쉬면서 사는 삶, 놀이로서 하는 노동, 유희로서 즐기는 삶, 이런 것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야말로 꿈이며 유토피아일 것입니다. 사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약속했던 이상적 사회도 바로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강요된 노동으로부터 오는 인간 소외가 없는 세계, 모두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쓰면서 자기 실현을 하는 세계가 공산사회인 것입니다. 아무도 이 아름다운 비전 자체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입니다.
공산주의 이상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 공상적 성격, 비현실성이 아니라 그 이상을 너무나 먼 미래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언제 이루어질지 모를 미래를 담보로 하여 현재의 희생을 강요하면서 삶을 통제하고 인간을 도구로 전락시켰다는 데에 있습니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전적인 희생을 강요한 것입니다. 여기에 속아넘어간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그 후유증을 심하게 앓고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약속은 종교의 이름으로 하든 어떤 이념의 이름으로 하든 항시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현재와 무관한 미래, 이미 현재에서 맛볼 수 없는 미래의 장밋빛 약속은 허구이며 또 다른 착취를 위한 이데올로기가 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미래도 중요하지만 현재가 더 중요합니다. 지금 나의 삶을 몽땅 양도할만한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없으며, 지금 나의 행복을 희생할만한 그 어떤 제도나 사상도 없는 법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지금 여기서 현재의 삶 가운데서 휴식을 누리며 노동 속에서 쉼을 얻는 비법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유토피아적 미래를 지금 여기서 즐기는 신앙의 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읽은 우리 귀에 너무도 익은 시편 23편의 말씀 속에서 이 믿음으로 사는 삶의 비법을 여러 형제 자매들과 함께 음미해 보고자 합니다.
시편 23편은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여호와께서 나의 삶에 아무런 부족함이 없는 목자가 되신다는 고백이고,
둘째 부분은 이 고백의 이유를 시인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삶의 경험을 돌아보면서 토로하고 있으며,
마지막 결론으로서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미래에도 변함없이, 그리고 영원토록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표현하면서 시를 끝내고 있습니다.
시인은 첫째 여호와께서 자기 삶의 부족함 없는 완전한 목자가 되신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누구가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만이 나의 삶을 인도하실 목자이시며, 나의 인생을 내신 그 분만이 내가 어디로 가야 인생의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가 있는지를 아신다는 고백입니다. 라는 개념에는 물론 우리의 인생이 양떼와 같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목자와 양의 개념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목자와 양으로 비유하는 것은 하나님은 항시 인생의 동반자이시며 인도자가 되신다는 성서적 신관과 인간관을 나타냅니다. 성서적 신관에 의하면, 하나님은 가만히 계셔서 명상과 관조의 대상이 되시는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항시 인간과 함께 바삐 움직이시는 존재, 인생에 개입하시고 활동하시는 존재입니다. 양들이 위기에 처할 때 자기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지켜 주시는 분이라는 관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서적 인간관도 특이합니다.
인간은 이성적이고 자율적인 성숙한 존재가 아닙니다. 인생은 철이 없고, 실수를 반복하며, 무지하고, 어리석고, 방황하는 것이라는 뜻이 하나님이 목자라는 말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또 인생이란 항시 무언가를 찾아 이리 저리 헤매는 존재, 떠돌며 방황하는 존재, 그리고 항시 무엇을 갈망하고 배고파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의 철학적이고 이성주의적인 인간관이나 우리 동양의 묵상적이고 관조적인 인간 이해와는 달리 히브리 사람들은 인간을 항시 부족한 존재, 끊임없이 무엇을 찾아 헤매는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인생에게 가장 귀한 것은 어디로 가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를 잘 아는 목자와 같은 존재이며, 시편 2
23편의 시인은 여호와 하나님을 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시인은 이 점을 다음에 이어지는 고백에서 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여호와께서 어떻게 자기 삶에 부족함이 없는 목자가 되어 주셨는지, 어떻게 자기 인생을 인도해 주셨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먼저,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주신다고 고백합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불모지와 같이 삭막한 땅을 생각하시면 시인이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라는 비유를 사용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수 있습니다. 푸른 풀은 생명의 꼴이며 물 역시 생명의 물입니다. 결국 둘 다 생명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먹어서는 안 될 것들을 먹는 우리, 찾아서는 안 될 것을 찾다가 육체와 영혼이 지치고 병들고 피폐해버리는 우리의 삶과는 달리 야훼께서는 우리를 참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는 나에게 부족함이 없는 목자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피곤하고 지치고 시들은 나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영혼이란 말은 육체와 대비되는 뜻에서 말하는 영혼이 아닙니다. 육체와 영혼의 이원론은 히브리인들에게는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영혼이란 생명력, 활기(vitality)를 뜻하며, 우리의 존재 자체를 뜻한다 해도 무방합니다. 즉 여호와는 나의 존재, 나의 생명을 회복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라는 상징어는 생명이 있는 곳을 말합니다. 그러면 어디가 우리의 생명이 있는 푸른 초장이며 쉴만한 물가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어디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곧 (righteous path)입니다. 여호와는 나를 의로운 길로 인도하셔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의로운 길이란 우선 옳은 길, 정의로운 길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생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공의로운 길로 가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생각하는 의로움, 인간의 의에 따른 의로운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우심, 그의 의로우신 길로 인도합니다. 그러기에 거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성서에서 단순히 우리가 생각하는 의나 정의의 개념을 넘어서는 풍부한 뜻을 지닙니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의는 언제나 고아와 과부, 약한 자, 압박 받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 그의 자비, 그의 의로운 심판, 따라서 그의 사랑과 구원을 함축하는 말입니다.
신약성서에서는 이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예수의 말씀에서도 의란 하나님의 나라와 그 구원이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구원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의 의로우신 이름에 합당하게, 그의 자비로우신 이름 때문에, 나를 자비와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말입니다. 결국 생명이 있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 우리의 생명력을 소생시키는 곳은 곧 하나님의 의의 길, 하나님의 자비와 정의,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 없이 우리 인생에 생명을 주는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야훼께서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할 물가로, 생명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좋은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다 확실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산과 들을 헤집고 다니는 참 목자이신 예수를 통해서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봅니다. 피곤하고 지친 자들에게 와서 쉬라고 하신 그 분, 자비와 은총의 하나님의 얼굴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면서 인생의 멍에를 쉽게 하신 그 분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인생의 선한 목자이심을 알게 된 것입니다.
마셔도 마셔도 목이 타는 물이 아니라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영생의 물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인생의 쉴만한 물가가 어디에 있는지를 확실히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위기가 닥쳐올 때 양떼를 버리고 도망가는 나쁜 목자가 아니라 자기 생명까지 바치신 선한 목자 예수를 통해서 우리는 시편 기자의 말씀의 의미를 한층 더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시인의 고백은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길, 그의 구원의 길을 더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내가 비록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캄캄한 어둠, 칠흑 같은 어둠에서 헤맬지라도,
“해 받음이나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나니, 당신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며, 당신께서 당신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위로하시기 때문“이라고 시인은 말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야 하고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가야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유혹과 시련을 견뎌야 하고, 실망과 좌절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나 하고 의심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주님이 나를 버린 것이 아니고 내 곁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는 것은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제일 괴로운 것은 아마도 홀로 있어야 하는 일일 것입니다. 더군다나 병들고 고통 속에 있을 때, 무섭고 두려울 때, 그리고 죽음의 순간을 맞을 때에도 누구와 함께 있으면 견딜 수 있습니다. 말을 할 수 있고, 고통을 호소할 수 있고 상처를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상대, 그리고 함께 아파하는 사람이 같이 있어 주면 아무리 어려운 시련이라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혼자 있다는 것은 곧 버림받았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됨의 축복 가운데 하나는 역경의 순간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린 저주받은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 순간이라는 놀라운 경험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자신이 십자가에서 그러한 경험을 하셨고, 십자가의 고통을 아시는 주님은 우리의 고통 속에서 함께 아파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시련과 위기의 순간마다 하나님은 자기를 믿는 자에게 위기를 극복할 지혜를 주시고 시련을 감당할만한 힘과 용기를 주신다는 것이 시편 기자뿐 아니라 모든 믿는 이들의 공통적 증언입니다.
빛이 어둠 속에서 더 빛나듯이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은 인생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더 힘을 발휘하면서 우리와 함께 하면서 우리를 두려움에서 해방시킵니다.
세상이 나를 버리는 것 같고, 친구와 친족마저도 나의 곁을 떠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만은 언제나 나의 곁에 계시어 나의 힘과 용기가 되어 주신다고 시인은 고백합니다.
어두움 속을 헤매고 인생의 긴 터널을 지날 때도
빛 되신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나아가기에 넘어지거나 쓰러지지 않으며,
죽음의 순간을 맞아도 하나님 안에서 죽으며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기에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현존, 함께 하심을 시인은 더 구체적인 은유로써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위로해 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목자들이 지니고 있는 막대기와 지팡이는 여러 용도로 사용됩니다.
양떼가 길이 아닌 곳으로 갈 때 몰이하기 위해서 사용하는가 하면, 위험한 맹수를 만난다든지 하면 양떼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사용합니다.
지팡이와 막대기는 곧 나를 의로운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손길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어둠의 순간, 위기의 순간, 헤매고 있을 때, 슬픔과 절망에 빠질 때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활동을 지팡이와 막대기라는 은유로써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치 광야에서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높이 처든 모세의 지팡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삶에서 각자에게 알맞은 형태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를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시며 위로해 주십니다.
다만 우리가 어리석어서 항상 우리 곁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인도하고 있는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를 깨닫지도 못하고 순종하지도 않고 우리 멋대로 가려고 하는 것이 문제일 뿐입니다.
다음으로 시인은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기에서 구해주실 뿐 아니라, 나를 귀한 손님처럼 온갖 좋은 것으로 대접해 주시는 주인과도 같은 존재라는 것을 말합니다: “나의 원수들 앞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을, 나의 잔을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분.“
여기서 원수들은 대적하는 모든 것을 뜻합니다.
반드시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나의 삶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모든 존재, 나의 삶을 유혹하고 장애가 되는 모든 세력들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것들에 의해 항시 위협받아 허물어지기 쉬운 취약한 나의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어 나를 지극히 귀한 손님같이 극진히 대접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대접해 주되 분에 넘치도록 대접해 준다는 것입니다. 기름으로 머리에 부어주시고 잔이 철철 넘치도록 술을 부어주시는 하나님, 그야말로 풍성한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시인의 삶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우리가 잘 알 수 없듯이, 그에게 베푼 하나님의 잔칫상과 기름과 넘치는 잔이 과연 그의 삶의 어떤 경험이었는지도 우리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은혜의 활동은 각자의 삶에 다르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이 말하는 것은, 그의 삶을 에워싼 그 어떤 역경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풍성한 은혜의 상을 엎어버릴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목자로 따르는 자의 삶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실패, 궁극적인 실패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인생의 부분적인 실패는 있을지언정 인생 자체가 실패로 끝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은총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인간이 만들어 놓은 온갖 역경과 장애를 극복하고 승리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은총의 승리를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27편의 기자도 이것을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주님이 나의 빛, 나의 구원이신데,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이 내 생명의 피난처이신데,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의 대적자들, 나의 원수들, 저 악한 자들이 나를 잡아먹으려고 다가왔다가, 비틀거리며 넘어졌구나. 군대가 나를 치려고 에워싸도, 나는 무섭지 않네, 원수들이 나를 친다 해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려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와 같은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핍박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시인은 이제 결론에 이릅니다.
지금까지 자기의 삶을 의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해 주셨고
지금도 인도해 주시고 있는 야훼 하나님의 은총을 노래한 시인은
이제 이 신실하시고 부족함이 없으신 목자께서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그의 삶을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의 고백으로 시를 끝맺고 있습니다.
“진실로,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의 집에 영원토록 거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의 삶을 인도해 주신 선하신 하나님, 인자하신 하나님, 은총의 하나님이 내가 사는 날까지 나를 따를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이 조용한 확신으로 그는 불안과 염려, 두려움과 공포를 잠재우고 그의 미래를 전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 우리 인생에 그것만 있으면 다른 그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이 확신, 이 신뢰만 있으면 우리는 초조해하지도 않을 것이며 할딱거리지도 않을 것이며 어떤 일이 닥쳐도 당황해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삶이 휴식이 될 것이며 놀이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의 희망과 믿음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나는 주의 집에 영원토록 거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하늘에 거하시는 하나님,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삶을 누릴 것을 확신하면서 이 고백의 시를 마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 집‘ 이라는 말은 지상의 성전을 가리킨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하늘의 영원한 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거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 세상에서 지금껏 나를 인도해주신 은총의 하나님께서 장래에도 나의 사는 날까지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함께 하실 것이며, 죽음 넘어서도 영원토록 나에게 생명을 베푸실 것이라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으로 그의 시를 마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인의 기도와 신앙고백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이 그대로 다 담겨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매일 아침 이 기도로 우리의 삶을 시작하고 매일 이 기도로 우리의 삶을 마감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기도, 이 고백으로 우리가 삶을 살면, 매일 매일의 삶 가운데서 우리는 안식할 수 있으며, 노동과 휴가가 유리되지 않은 삶을 살 것입니다. 삶의 현장이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변할 것입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면서 그의 의로우신 길로 나를 인도해 주신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까지 나를 따르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의 전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토록 거하리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출처 : 길희성 목사(새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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