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과 신약의 관계
김웅기
기독교회는 인간의 창조와 타락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기록한 구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부활과 재림, 그리고 이에 대한 사도들의 증언인 신약성경을 하나의 성경으로 가지고 있다. 그 성경은 교회의 신앙과 삶의 유일한 표준이다. 그런데 그 성경에 관하여 교회가 지금까지 직면해왔고 오늘도 여전히 그 대답을 요구하고 있는 가장 커다란 질문들 중에 하나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관계를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이다. 다르게 말하면 구약성경이 신약성경에 갖는 적절한 관계는 무엇인가? 또 구약성경과 신약성경과의 상호연관성은 무엇인가? 하는 것 등이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묻는 것은 성경을 접근하는데 있어 근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엔 구․신약간의 통일성과 다양성,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 문제의 중요성은 앤더슨(B. W. Anderson)이 적절히 표현한 바 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관계를 다룬 논문보다 더 긴급한 문제를 다룬 것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모든 기독교인-그가 전문적인 신학도이건 목회자이건 아니면 평신도이건 간에-이 직면한 문제이다. 이 문제는 기독교 신앙의 의미에 고착된 문제라고 말해도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다〈D. L. Baker(오광만역), 구속사적 성경해석학, 17쪽〉. 또 하젤(Gerhard F. Hasel)도 「구약신학 : 현대 논쟁의 기본이슈들」들에서 이 문제를 주요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리고 에벨링(G. Ebeling)의 말을 인용하면서, 성경학자는 두 성경사이의 상호연관성을 공부해야 하며, “다양한 성경 증언의 내적 통일성을 묻는 모든 신학적 문제를 넘어서 성경을 전체로 보고 이해한 자기 해석을 제시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게하르드 하젤(김정우역), 구약신학:현대 논쟁의 기본 이슈들, 207쪽〉.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연구하기에 앞서 가장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바로 이 ‘구약과 신약과의 관계’(상호연관성의 문제)이다. 특별히 성경을 깊이 있고 일관성 있게 연구하며 올바로 이해하고 삶에 바르게 적용하기 위하여 이 작업은 반드시 우선되어야 할 과제라고 본다.
하지만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하여 적절히 답하기가 쉽지 않다. 오늘 대부분의 교회는 구약이, 특히 예언서가 이스라엘의 메시야 도래를 가리켰으며, 예수는 진정 모든 유대인들이 대망한 메시야였다고 생각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는 것 같다. 예수는 ‘하나님이 구약에서 약속하신 그리스도’로 본다. 어떤 점에서 구약성경은 그 약속을 포함하고 있고 신약성경은 그 성취를 설명하고 있다. 모든 설교는 예수가 메시야 예언의 성취라는 선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런데 왜 구약과 신약의 관계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야 하는가?
그래서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단 하나의 해결책으로 적절하게 설명하기엔 극히 복잡하다. 구약과 신약 사이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동시에 보여지며, 다양성 속에 통일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접근 방식도 다양하다. 극단적으로는 구약이나 신약 중 어느 하나만을 권위 있는 성경으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무시하는 견해에서부터 두 성경을 모두 동등한 신적 권위가 담겨 있는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견해에 이르기까지, 구약과 신약간의 관계는 복잡하고 미묘하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한 여러 견해
우리는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하여 표명한 최근 몇몇 대표적인 학자들의 입장을 살펴보면서 이에 적절한 답변을 구할 필요가 있다.
어떤 학자들은 구약성경을 비기독교적인 종교서적으로 간주함으로써 두 성경사이에 있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불트만(Rudolf Bultmann)은 구, 신약의 관계를 실존주의의 논리로 접근하면서, 두 성경사이의 관계를 이스라엘 역사의 사실적 흐름 속에서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구약을 약속의 차원에서만 보았고, 심지어 그는 구약역사를 실패의 역사, 특별히 계약과 신정정치의 실패 역사라고 하였으며, 구약성경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 정당성을 얻는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에겐 더 이상 계시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따라서 구약은 신약의 전제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불트만은 구약을 무시했고 두 성경사이의 연속성을 발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구약이나 신약을 충분하게 기술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외에 바움가르텔(F. Baumgaertel)과 그의 제자였던 헤세(F. Hesse)같은 학자는 두 성경의 불연속성을 강조하면서 불트만과 같은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구약은 비기독교적인 책이며, 적어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신약이 본질적인 성경이다.
이와는 다르게 구약을 신학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다룬 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피셔(W. Vischer)와 판 룰러 (A. A. van Ruler)같은 학자이다.
피셔는 신약으로 구약을 주석하면서, 심지어 ‘오직 구약만이 성경’이라고 말했고, 구약을 우선 시하였다. 그는 성경을 그리스도중심으로 봄으로써 기독론적으로 해결하였다. 이와 유사하게 판 룰러는 “구약은 참 성경이요, 신약은 단지 그것에 대한 설명적 어휘사전일 뿐이다. 성경 전권의 중심관심은 화해나 구속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구약은 특별히 중요하다. 곧 구약은 하나님 나라를 정당화시키고, 그 기초를 세우며, 해석해주고, 예증하며, 역사화 시키고, 또한 종말화시킨다”고 말한다. 이리하여 판 룰러는 두 성경의 관계를 “하나님 나라”라는 하나의 영적 공통분모로 축소시키면서, 신정론과 종말론 사이에 있는 구별을 무시하고 신약을 일방적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학계는 다시 모형론(또는 유형론)으로 돌아가 두 성경의 관계를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아이히로트(Walther Eichrodt)와 폰 라드(Gerhard von Rad)가 그 입장에 대한 강한 지지자로 부각되고 있다.
아이히로트는 구약성경의 중심을 하나님과 이스라엘간에 체결된 ‘계약’으로 봄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계약”개념이 신, 구약성경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파악하도록 도왔고, 또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가를 알게 해 주었다. 그는 선지자들의 예언이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결론지으면서 신, 구약성경의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는 “구약성경은 역사책”이라는 기본 입장을 지니고 있는 폰 라드의 입장과는 차이가 있다. 폰 라드는 모형론 개념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살폈으며, 구약성경의 문헌층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점들”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면서 폰라드는 신, 구약의 진정한 연결고리는 언어 및 개념상의 연결점이라는 통찰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는 구약에 있는 신학의 다양성을 보았다.
그런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아이히로트와 폰 라드는 결론짓기를 신, 구약성경이란,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원행동(구원사:Heilsgeschichte)을 통해 역사 속에 등장한 고백들을 기록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각 성경에서 신앙은 한 인격-여호와 또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카이저가 말한 대로, 하나님의 약속은 신. 구약을 망라하는 하나의 전 포괄적인 하나님의 계획으로서 여기에는 국가적, 물적, 영적인 모든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견해는 너무 성역사와 세속역사로 구분했다는 비평을 받는다. 그리고 구약을 당연히 모형론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위험스럽다고 본다.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다루는 또 하나의 좋은 방법은 베스터만(C. Westermann), 침멀리(W. Zimmerli), 폰 라드와 여러 학자들이 발전시킨 ‘약속과 성취’(또는 예언과 성취)의 틀이다. 이 외에 머피(R. E. Murphy)와 로울리(H. H. Rowley), 그리고 스마트(J. D. Smart)등도 이러한 범주로 해석한다. 특히 로울리는 “예언과 성취”를 중심 사상으로 삼고 설명한다. 이 방법론에 따르면, 구약성경은 “신약에서 열매를 거둔 약속의 역사”를 담고 있다. 그렇다고 이 말은 오직 구약은 ‘약속한 것’을, 그리고 신약은 ‘이루어진 것’을 묘사한다는 것이 아니다. 구약과 신약은 자체 내에 이미 약속과 성취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침멀리는 약속이 여호와의 인도하심과 말씀으로 역사 안에서 성취된 성격을 띠자마자 다시 새로운 약속이 되는 성격을 띠게 된다고 보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성취는 미래를 바라보며 열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약속과 성취 사이에 있는 이러한 갈등은 구약이 지닌 역동적 성격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이 종말론적 성격은 두 성경에 다 나타난다. 베스터만은 “약속과 성취는 구약과 신약에 기록된 사건의 온전성을 구성해준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구약과 신약간의 다양한 관계를 보면서, 이 하나의 관점을 가지고는 “구약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연결시켜 요약하는 작업은 불가능함”을 인정한다. 따라서 이러한 틀을 가지고 상호관련성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두 성경사이에 있는 관계를 다 정리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틀로 보는 안목은 유익하지만 역시 이것으로 구. 신약간의 복합적 관계를 다 묘사할 수는 없음이 분명하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최근 들어서 구, 신약간의 복잡한 관계, 곧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긴장, 다양성과 통일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제언들이 나타나고 있다. 차일즈(B.S.Childs)는 정경을 출발점(정경적 맥락)으로 삼아 사람과 작품의 역동적 통일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가장 심각한 신학적 이슈는 교회가 그 동안 주장한 것처럼 정경적 맥락이라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구. 신약의 관계를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관계로 인식했다. 프리젠(Th.C.Vriezen)과 다드(C.H.Dodd)도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긴장이 동시에 견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아이히로트와 폰 라드에 이어 볼프(H. W. Wolff)와 크라우스(H.-J. Kraus)같은 또 다른 학자들에 의해 복합적 방법을 취하려는 경향이 제기되고 있다. 이것은 모형론과 약속과 성취의 틀과 구원사 방법론을 조심스럽게 사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 신약간에 있는 다양한 연관성에 대해 여지를 주며, 원래의 역사적 증거와 문자적인 뜻을 왜곡하지 않고, 구약이 증거 하는 더 넓은 선포적 의도와 맥락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둘 사이에 있는 유사성과 차이점, 옛 것과 새 것,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구. 신약간에 있는 복합적인 상호관계를 생각할 때 복합적인 방법을 도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하나의 범주나 개념이나 체계를 가지고는 다양한 상호 관계를 파헤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구약과 신약간의 관계에 대해 다양한 소리들이 있다. 불트만 처럼‘신약이 본질적인 성경이고 구약은 신약의 비기독교적인 전제다’라고 말하는가 하면, 판 룰러처럼 ‘구약이 본질적인 성경이고 신약은 구약을 해석하는 부록이다’라고 말한 학자도 있다. 한쪽 극단에서는 두 성경의 다양성을 강조한 나머지 구약과 신약 사이에 전적인 분리와 불연속성을 주장하고, 또 다른 극단에서는 통일성을 강조한 나머지 다양성에 대해서는 어떤 여지도 주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구약과 신약은 상호관련이 있고, 하나의 구속사를 형성하며, 다양성과 통일성 ,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인정하려는 복합적 방법에까지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과 신약사이에 있는 이와 같은 복합적 상호관계들을 올바로 인식할 때 다양한 성경의 증거들에 대해 획일성을 강요하지 않고도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개혁신학과 성경적 해결의 모색
그렇다면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한 개혁신학의 입장은 무엇인가? 그리고 예수님과 다른 신약의 기자들의 구약에 대한 입장은 무엇인가를 살펴봄이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살피는 데 큰 도움을 받을 것으로 본다.
개혁신학의 입장에서 볼 때 구약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주제는 언약 사상이다. 또한 구약을 신약과 함께 묶어 놓는 것은 “언약”이라는 주제이다. 그리고 구약의 모든 계시는 궁극적으로 모든 언약의 성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 안에서 성취된다고 보고 있다. 특별히 히브리서 8장과 9장은 예레미야 31:31이하의 말씀을 인용 해석하면서 옛 언약이 그리스도안에서 성취됨으로써 새 언약이 온전케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신약은 그리스도 없이는 구약이 불완전하다고 선언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구약을 그 목표인 그리스도에 비추어서 이해해야 된다고 본다. 그러나 구약의 전체를 기독론적으로 보라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보아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구약도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역사로서, 교회는 이스라엘의 삶의 정황을 통해 개인적 신앙의 양상들(성화, 믿음, 거듭남)에 관한 폭넓은 지식을 생생히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계시의 발전과정상 분명히 예비적인 성격을 지닌다.
또 개혁신학은 특히 구약성경의 예언이 당대에 성취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성취되었다고 보는 이중적인 성취를 주장하는 독특한 입장을 지닌다. 그리고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덜 나타났던 것이고 신약은 계시가 보다 더 확연하게 드러났다는 점에서 계시의 점진성관계로 성경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신. 구약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과정과 인간을 향한 하나님 자신의 자기 계시 과정을 전개시켜 놓은 것으로 본다.
그러면 이제 예수님의 구약에 대한 태도와 해석, 그리고 신약기자들의 입장을 간단히 살펴본 다음에 결론을 맺고자 한다. 예수께서는 모세 율법과 선지서,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구약성경이 자신에 대하여 증거 하였음을 선언하시면서, 자신에게서 성취되고 있음을 말씀하신다(눅 24:25-27, 44-47, 요 5:39, 46 등). 특히 누가복음 24:27에 보면, 예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심”으로써 구약을 해석하여 명확하게 들려주신다. 여기서 특별히 “설명하셨다”는 표현은 예수께서 단순히 구약을 언급하시는 차원이 아닌, 계속되어온 구약 역사의 그 진정한 본질을 밝히셨다는 데 그 강조점이 있다. 다시 말해 성경은 하나의 일관된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이 성경이 곧 자신에 관한 ‘그리스도 증언의 책’이라고 하셨다(특히 요5:39에,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 이 사실은 성경의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 집중되고 있음을 뒷받침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예수님은 구약이 지닌 권위를 인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구약의 초점이 예수께 있고 예수님안에서 온전히 성취되었고, 완성될 것을 내다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이상의 선포 내용이 바로 제자, 사도들의 선포 근거였다. 곧 예수의 부활을 경험한 사도가 언약백성에게 설교하는 것에서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잘 알 수 있다고 기대한다. 그리고 이 사실은 사도행전에 잘 드러난다. 복음전파의 초창기에 구약신학의 가능성을 분명히 나타낸다. 여기서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행 2:17-21, 25-28, 34, 35; 3:18, 24에서 욜2:28-32, 시16, 110편 구절들 인용 ), 스데반의 설교(행 7장에서 구약역사개관), 빌립의 해석(행8:34에서 사53:7이하 해석), 그리고 바울의 설교(행 13:15-41에서 바울은 다윗의 후손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위해 출애굽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을 추적, 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통치자들을 회고함)의 내용 전부가 구약과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이 설교의 대상은 공통적으로 유대인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구약 언약백성들에게 설교했다는 것이다. 이상의 설교들의 공통점은 “그리스도”를 반복하고 있는 것으로써, 구약 없이는 복음의 메시지 자체가 제대로 이해 될 수 없음을 밝히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구약은 계속해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성경이었다. 그들은 구약 세계 안에서 살았고 영적인 힘을 구약의 말씀으로부터 이끌어 왔다(딤후3:15-17). 더욱이 구약은 예수와 초대교회가 그들의 경험을 표현한 모형을 제공해 주었다. 바울과 초대 기독교 교인들은 계속적으로 구약 개념과 주제를 그들의 새로운 신앙의 내용을 표현하는데 빌려왔다. 또 신약은 구약세계에서 영양을 공급받아 왔다. 신약은 구약을 떠나서 이해될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 따라서 구약의 권위는 예수님과 바울 등 초대 교회에 의해 입증되었고, 또 신약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약에 대해서 권위 있는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와 같은 사실 속에서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잘 파악할 수 있다.
우리는 위와 같은 여러 견해들과 신약의 예수님의 태도와 그리고 초대교회의 정황들을 정리해 보면서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신약성경의 대체적인 강조점은 ‘구약과 신약과의 관계는 약속과 성취의 관계’라는 것이다(눅 4:21, 롬1:2 등).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약속과 성취, 또는 예언과 완성의 틀로 보는 것은 유일한 방식은 아닐지라도 이와 같은 구도로 접근하는 것은 매우 좋은 방법으로 본다. 개혁교회는 이러한 틀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약성경기자들이 보존했던 구약성경과의 연결성을 상실할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약속과 성취의 관계로 설명하는 것이 성경을 왜곡해서도 안되며, 또 초기 기독교가 지녔던 풍부한 복합성을 잘못되게 설명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러나 구약성경을 단지 약속으로만 묘사하는 것은 구약성경속에 있는 성취를 설명하지 못한다. 또 신약성경을 단지 성취로만 그리는 것도 신약의 기자들이 때때로 아직 성취되지 않은 사건들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구약에도 성취가 있고, 신약에도 예언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약은 단순한 배경적 자료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고 점진적으로 이뤄지는 어떤 목표, 종국,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완성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약속과 성취의 관계라는 구도로 설명하는 것은, 연속성을 파악하는데는 큰 도움을 주지만 구약과 신약속에 들어 있는 복합성과 다양성을 정당하게 해명해 주지 못하는 약점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적 전망과 역사적 시각에서 볼 때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구약이 지닌 예비적 성격 때문에 “예비와 완성”이란 입장에서 보는 것도 좋게 여겨진다. 구약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는 신약에 있는 그것에 대한 예비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옛 세대는 새로운 세대를 위한 준비로 보는 것과 같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무엇보다도 조심해야 할 것은, 신약을 구약성경을 밀어 넣어 걸러낸 체로 보거나 혹은 구약의 최종적인 성취로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계속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계획과 계시에 있어서(계시의 발전과정상)구약 뒤에 오는 단계로 생각해야 한다. 반대로 구약성경을 신약의 체로 걸러 내서 보는 것도 옳지 않다. 구약성경이 지니고 있는 본래적인 의미를 우리 주관대로 왜곡시킬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약성경을 무조건 기독론적으로 읽으려는 오류를 범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참으로 구약과 신약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려고 한다면 구약성경자체를 있는 그대로의 온전한 모습으로 보아야 할뿐만 아니라 구약과 신약, 두 성경중 어느 하나를 다른 것보다 더 중요시하지 않는데 있다. 그래서 구약과 신약이 각각 제자리를 찾도록 전 성경을 균형있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구약과 신약성경은 분리되어 있는 두 개의 성경이 아니라 하나의 성경으로 보아야 한다. 이른바 이러한 단일성은 그리스도를 지향하며 그리스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구약과 신약의 관계는 그것을 구원역사의 관계로 이해할 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신약은 구약에 대한 절정의 역사로 보고, 구원역사의 진행과정은 예수의 인격과 사역에 그 목표와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과 신약이 신학적으로 연속성과 불연속성속에 다양한 중심주제를 가지고 있더라도 신. 구약 모두가 하나님의 구속 경륜을 이루는 하나의 통일된 책인 것을 믿는다. 따라서 기독교회는 구약과 신약이 하나님의 분명한 구원의 계획과 하나의 일관된 목적을 가지고 활동하신 하나님의 역사임을 전제한 가운데 이 말씀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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