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내용!! 강해!!

[스크랩] 성경의 구성 - 구약과 신약의 관계

하나님아들 2012. 7. 25. 17:59
 

성경은 크게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두 부분으로 나뉘어 지며 구약舊約은 옛 계약Vetus Testamentum, 신약新約은 새 계약Novum Testamentum을 뜻한다. 계약testamentum(히브리어 berit)은 구속력 있는 약속 행위를 말하며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 오가는 특수하고 긴밀한 관계를 드러내는데, 성경에 이런 특수한 어휘가 사용된 까닭은 성경 전체에 흐르는 크나큰 주제(구속력 있는 계약의 결과로서의 구원)를 존중하기 위함이고 또한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고 그 백성을 돌보시며 보호해 주신다는 성서 메시지에 부합되기 때문이다. 구약은 근동지역 전체를 망라하는 무수한 사건들을 통해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으로 하느님께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중심으로 하는 반면, 신약은 그리스도의 행적(복음서)과 사도들의 구두 및 문서 설교(사도행전 서간 묵시록)에 그 내용이 국한되어 있다.


구약과 신약이라는 성경을 구성하는 이 두 부분은 서로를 비추어 주는 역할을 하고 하나에 비추어 보지 않고서는 다른 하나를 깊이 이해하는 일이 불가능하다. 다만 이러한 상호보완 속에서도 구약의 본문과 신약의 본문에서 하느님께 관하여 말하는 방식이 사뭇 다름 또한 감지할 수 있는데, 이러한 차이는 계시의 연속성 차원에서 고찰할 수 있는 것으로 그 언어가 시간이 갈수록 다듬어지고 정화되어 마지막 그리스도의 설교에서는 절정에 이르고 그 의미가 완전해진다. 몇 가지 예를 들어 차이 등을 살펴보면, 먼저 구약에서는 전쟁 용어(예컨데 하느님은 싸움에 능하시다 또는 하느님은 사람의 손에 전투를 익혀주신다. 출애 15장; 시편 18장 참조)가 많이 사용되는데 이는 고대 근동세계에서 신성神性을 형용하는 어법으로 성경에서도 하느님의 전능全能을 표현하였으나, 신약에서는 이러한 하느님의 개념을 초극하여 더 이상 전쟁의 상징과 영상을 사용하지 않는다. 또한 구약에서는 목자牧者(예컨대 시편 23장)와 땅의 어휘가 하느님께서 양떼인 당신 백성을 광야에서 인도 영도하여 일정한 목적지(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로 데려가는 것에서처럼 설명이 되는데, 신약에서는 이러한 역할이 하느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에게 맡겨지며(요한 13장 14장 참조) 광야생활은 현세의 나그네 생활로(베드로전서) 약속된 땅은 하늘나라(새 예루살렘)로 의미가 확장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구약의 아가서 호세아 시편 이사야 등 특정 성서에서 사용되는 혼약婚約의 어휘는 하느님과 그 백성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 혹은 약혼자와 약혼녀처럼 묘사한 것으로(신약에서도 이와 유사한 구절로 마르 2, 19가 있는데 다만 구약과 달리 혼인잔치가 종말론적 구원이 아닌 현재적 차원에서 언급되는 것이 다름, 이사 61,10; 62,5 참고. 이밖에 마태 25장 열처녀 비유 등 참조) 이러한 배경에서 인간의 죄는 약속의 신의信義를 깨뜨리는 행위인 간음 매음 불충 배반 등을 지칭함에 비해, 신약에서 간음은 십계명의 본래의 의미(출애 20,14)로 사용되고(산상설교; 로마 7,3 등 참고. 계약을 깨뜨린 우상숭배 등은 간음과 별도로 언급됨, 1고린 6,9; 묵시 21,8 등) 다만 묵시록 2,22에서 유일하게 구약 용례에 따라 계약을 깨뜨리는 간음행위로 묘사된다(더 있는지 모름^^). 마지막으로 구약에서는 신약과 달리 '다투다 내지 소송하다'는 의미의 법정法廷 어휘(히브리어 rib)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나타내는데 쓰인다. 예컨대 욥기에서 욥이 하느님께 소송을 걸어 자기가 받는 벌이 부당함을 시비하며 자기가 무죄하다고 변호한다거나 이밖에 이사야 예레미야 등 예언서에서도 이 어휘를 구사하여 구원과 멸망의 신탁을 선포하고 이스라엘에게 계약에 충실하도록 일깨우고자 노력한다.


그러면 신약은 구약을 어떻게 해독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선 성경의 각 권마다 조금씩 관점이 다르나 공통적인 것은 그리스도 내지 그분의 부활이 구약 전체를 해독解讀하는 열쇠가 된다는 점이다. 특히 마태오 루가복음사가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복음서)를 전개하면서 단일한 구성에 맞추어 구약의 가장 뜻 깊은 주제들을 더듬어 그것들이 예수님에게서 실현되었다고 기술하는데, 복음서 등이 구약을 해독하는 관점을 몇 가지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이하는 기본적으로 성령님의 영감을 전제하여 복음사가 입장에서 서술한다).


먼저 마태오 복음사가는 복음서를 소위 '성취의 예언' 혹은 예언의 성취이라는 원리에 입각하여 구성한다. 이는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2,15; 2,23; 13,35)라는 문장으로 대표되는 것으로, 예컨데 예수께서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신 사건 1,18-23이 이사야 7,14 및 8,8.10과 결부되어 이 성취의 도식이 사용된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으니, 보라, 처녀Virgin(원래 히브리어 마소라 사본의 almah는 미혼의 젊은 여자와 기혼의 젊은 여자 둘 다 의미하는데 복음서는 70인역과 같이 전자인 처녀로 보았음)가 몸 가져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르리라." 또한 예수님의 베들레헴 탄생 2,6은 미가 5,1-3절에 대한 성취인용문이다. "그러나 너 유다의 땅 베들레헴아, 너는 결코 유다의 요지 가운데 가장 작은 고장이 아니다. 너에게서 영도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양치듯 돌보리라." 그리고 이집트에서의 구출에 대한 2,15절은 호세 11,1의 성취인용문이고, 무죄한 아기들의 학살 2,17절과 예레 31,15도 결부된다.


루가 복음사가는 구약의 '출애굽'이라는 주제에 비추어 복음을 제시한다. 그는 예수님의 생애와 업적을 하나의 기나긴 여행exodus, 즉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여행으로 설정한다. 그래서 이집트 탈출이라는 이스라엘의 구원이 (제1의) 빠스카에서 절정에 이르렀듯이(→빠스카의 의미는 아래 각주 참고) 전 인류의 구원도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제2의) 빠스카에서 이루어진다. 그는 예루살렘이 구약 유다교Judaism의 성지로서 단지 지리상의 장소에 그치지 않고 인간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가장 위대한 개입과 구원이 이루어지는 장소임에 착안하여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야 하고 거기서 죽으셔야 했는데, 이것은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운명이 그분에게 닥치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인간을 위해 생각하신 구원계획, 즉 성서의 출애굽과 예루살렘이 예표豫表하던 구원계획이 그분에게서 또한 그곳에서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cf. 루가복음에서 '~해야 한다'는 동사는 이런 점에서 그 의미가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9,22; 13,33; 17,25 등 참조)


* 빠스카Pascha는 과월절 내지 유월절逾越祭라고 한다. 과월절은 유태인들의 3절기節氣중 봄의 철기春節인 과월절에 지내는 축제, 혹은 제사를 말한다. 과월절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Pesah는 '통과하다'(보고도 그냥 지나치다)라는 동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처음에는 가축의 맏새끼를 잡아서 바치던 유목민족의 축제였는데, 여기에 가나안 농경민족의 축제 풍습인 누룩 넣지 않은 빵을 먹는 관습이 결합하였다는 것이 출애급 이전의 과월제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이다. 여기에 다시 출애급의 과정을 거치면서 의미가 부과된다. 즉 하느님께서 이집트민족의 모든 장자長子들을 멸하실 때 이스라엘 민족의 집을 통과했다는 역사적 의의가 첨가되면서 이집트에서 해방된 출애급을 기념하는 중요한 축제로 되었다. 니산nisan(정월)의 10일에 그 해 태어난 흠 없는 양을 고르고 14일에는 그것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引枋에 바른다. 고기는 수족手足과 내장까지 모두 구워서 누룩 없는 빵, 쓴 나물과 함께 먹는다. 그리고 식탁에 앉은 사람은 모두 허리띠를 두르고, 신을 신은 채, 지팡이를 가지고 급히 음식을 먹는다. 아침이 될 때까지 집안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다. 식사 도중 지명된 아들이 의식상 질문을 한다. “왜 오늘 밤은 다른 밤과 구별되는가”라는 물음에 이집트에서 해방되던 이야기와 현재의 로마지배 하에서 해방되어야 함을 기도형식으로 대답한다. 즉 과월절은 하느님의 구속사업에 대한 거룩한 축하행사다. 또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해방을 염원하는 행사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과월절을 지키고, 이날에 성찬식을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마르 14,10-16). 이와 함께 과월절 양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나타내는 전조前兆로 되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하여 성취되고, 성체제정聖體制定의 만찬과 과월절은 결합(요한 19,36)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진실한 과월절의 고양羔羊이 되었다(1고린 5,7).


요한 복음사가는 구약의 (예수님을 향한) 가장 의미심장하고 중요한 상징과 실재가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음을 가리켜 보이기 위하여 참된, 살아있는, 착한 등의 어휘를 사용한다. "나는 착한 목자(10,14) 참된 빛(1,9) 참된 양식과 음료(6장) 생수(4장)이다." 여기에서 참된alethinos이라는 단어는 심원한 신학적 의미와 가치를 내포內包하고 있다. 이 어휘는 '진실한' '유일무이한' 이란 뜻을 내포한 신적인 것을 가리키며, 구약이 신성을 지닌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과 그리스도에게서 결정적인 뜻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요한 6장(모세와의 비교라든지 만나와 성찬의 빵의 비교), 3장(광야에서 뱀을 높이 매단 사건과 십자가 사건), 1장(하느님께서 모세에게 계시를 내리셨지만 예수님에게서 결정적인 계시가 이루어짐)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설교가 나오는 1-4장은 저자(성 루가)로 하여금 구약의 몇몇 본문을 예수님과 그분의 부활에 비추어 해석함으로써 구약 본문을 새로이 조명하는 계기가 된다. 상기 1-4장은 예전부터 메시아Messias 텍스트라고 불리는 구절들인데 그리스도인들이 나자렛 예수께 이 구절들을 적용하기 시작한 다음부터 오히려 랍비들은 이 본문을 메시아사상(→아래 각주)에 입각하여 해석하던 전통을 중단해 버렸다. 예컨대 주님의 얼이 내린다는 요엘의 예언 3,1-5절을 저자는 사도행전 2,17-23절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교 오순절에 있었던 성령의 강림에 비추어서 해석하였고, 또 시편 16,8-11절을 사도행전 2,25-28절에 인용하고 그 내용을 예수님의 부활에 입각하여 해석한다. "당신은 나의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자를 썩지 않게 하시리다" 라고 하는 인물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라는 설명이다. 또한 "너희 하느님께서는 나와 같은 예언자를 동족 가운데서 일으켜 세워주실 것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신명기 18,15절은 사도행전 3,22-23절에 인용되는데 이 구절이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한 말씀으로 인용된다.


* 메시아사상Messianism이란 일반적으로 악과 불행에 찬 오늘날의 세계를 멸망시키고 정의와 행복을 약속하는 새로운 질서를 가져올 구세주가 나타날 것으로 믿는 종교적 신앙을 가리킨다. 이것이 뒤에 와서 종말론과 결부되어 정의·평화·우애 등이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가 지상에서 이루어질 것으로 믿는 사상으로 발전되었다. 메시아사상은 하스모네 왕가 시대까지 유태교 기록에서 동면상태에 있다가 기원전 4년 헤로데의 죽음 이후 로마통치시대의 격동기에 만발하였다.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를 통해 나타난 가정假定은 야훼께서 자기 백성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시고, 거기서 아브라함 모세 여호수아와 같이 하느님의 택함을 받은 대변자를 통하여 자신의 뜻을 알리신다는 것이었다. 블레셋 사람의 위협이 이스라엘의 안전을 압도할 듯 하게 되자, 사무엘은 군사적인 지도자의 필요성 때문에 처음에는 사울에게(1사무 9,16, 10,1, 15,1-17), 그 다음에는 다윗에게(1사무 16,3.12-13) 기름을 부어 왕으로 삼았다. 이리하여 메시아사상은 배태되었다. 야훼가 자신이 사랑하는 다윗에게 그의 후손이 영원히 왕위에 앉게 될 것이라고 약속(2사무 7,8-29)한 것은 마치 메시아사상의 파종이나 다름없었다. 예언자들은 그 공약에서 새로운 의미, 즉 완전한 왕, 완전한 사회, 열강간의 완전한 평화, 그리고 전 피조물 사이의 조화를 꿈꾸었다. 그러나 그런 꿈은 바빌론 포로와 유다의 회복에 따른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현실에 의해 여지없이 깨졌다. 기름부음 받은 왕과 종말End of days사상도 오랫동안 휴지休止상태를 거쳐 바리사이인의 죽은 자의 부활신앙 및 내세신앙 등 요소와 하느님이 자기의 기름부음 받은 자인 다윗에게 그의 왕위를 확립시켜 주겠다고 약속한 신앙과 융합되어 그리스도교는 메시아사상의 새 돌파구를 발견하였다. 바리사이인들에게는 부활신앙이 자칭 메시아들의 주장을 막는 방어요 무기였다. 즉 메시아의 주장과 참칭은 그의 죽음과 더불어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인들은 그것을 자기들의 가장 뚜렷한 증거로 보았다. 메시아사상 또는 메시아주의는 외부에서 그리스도교 안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라 구약 초기(창세 3,15)에서부터 시작되어 선민選民 사이에서 발전하였으며 마침내 그리스도교 안에 성취되었다. 따라서 메시아사상은 특수 집단만이 아니라 심지어 인류의 차원을 넘은 데까지 그 범위를 넓힐 수 있으며 그 결과 전 우주를 포함할 수도 있다. 인간의 마음이 투사할 수 있는 이상들과 가치들에 적합한 미래를 그려볼 수 있는 능력, 즉 소망을 지닐 수 있는 능력과 현재를 부인하지만 그 부정으로 말미암아 궤멸되지 않을 능력 등의 성향을 지니고 있는 메시아설은 그리스도교의 근본적인 교리에 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신구약의 차이점과 예언의 성취 등 보완적 차원에서 신약에서 구약을 바라보는 관점을 살펴보았는데, 이를 계시의 연속성 차원에서 보면 불완전한 구약에서 완전한 신약에 이르는 계시의 발전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도 신약에 비추어 볼 때 계시가 예수의 인품과 말씀에서 충만함에 이르기까지 발전해가는 성격을 부각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구약성서들이 불완전하고(율법의 불완전성에 대해선 루가 5,30; 6,7; 요한 8장 간음 여인; 히브 7,19 등을 참조하라) 일시적인 것을 담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데, "구약의 계획은 무엇보다도 인류의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와 메시아 왕국의 내림을 준비하고 미리 알리며 여러 가지 모상으로 표시하기 위한 것이 주요한 목적이었다. 구약성경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된 구원의 시대 이전에 살던 인류 상황에 맞추어서 하느님과 인간에 관한 지식과, 인간에게 공의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의 태도를 모든 이에게 알리는 것이다. 이 책이 비록 불완전한 일시적 것을 내포하고 있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진실한 교육방법을 드러내고 있다(계시 15항)"는 언급이 그것이다.


계시의 이와 같은 발전적 성격은 성서의 해독 및 이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먼저 교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구약의 어느 본문도 신앙의 어떤 관점에서든 완성된 교리를 담고 있지 않으며 구약의 정확한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모든 본문을 그리스도를 출발점으로 삼아 그리스도의 빛을 그 본문에 투사해서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그렇다고 해서 구약의 본문이 어떤 적극적 요소를 전혀 갖추지 못하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예컨대 후세의 상선벌악에 관한 설명처럼. 이에 대해선 신학전망 16호 93-6에 잘 나와있다고 함). 구약 텍스트의 진리라는 것은 모든 관점에서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고 하느님께서 그 저자들에게 부여하신 광명에 비례하는 진리로서, 당시 성서 저자들이 처한 상황이나 공동체가 놓여 있던 상황에 준하고 하느님의 교육방법 테두리 내에서 성서 저자가 수행하여야 했던 과업에 준하는 진리이다. 이런 사정은 윤리적 관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완전함(마태 5,48) 내지 거룩함(성화, 이사 1,4; 로마 6,19 등)을 가르치는 율법은 그리스도에게서 비로소 그 완전한 의미가 계시되며 그 율법과 더불어 성령님이 선물로 내려져 인간은 계명을 준수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완성된 율법이 내리기 전에는 성경에 불완전한 것들이 자주 나타나며 이는 인간의 "완고한 마음"(마태 19,8. 기타 독선과 교만, 집회 15,8; 마태 13,10-17) 등이 원인이 되었기 때문으로 "율법과 예언자를 완성하러 오신"(마태 5,17-19)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바로잡아 주셔야 했다(마르 7,1-23 등 참고). 결국 구약 본문에 실린 내용은 윤리를 포함하여 신약이 제시하는 기준의 도움을 받아야만 올바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며(→아래 각주),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성서 본문들의 진리는 성경 전체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구체적 종교사에서 인간이 행하는 초월론적 하느님 체험의 잘못된 이해와 그 올바른 해석을 구별하기 위한 기준이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비로소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그러한 영적 분별이 가능해 진다(칼 라너, 그리스도교 신앙 입문, 분도출판사, 1994.12, P.213). 특히 율법에 대해 이를 문자 그대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믿고 율법(토라, torah, 지혜 내지 가르침)과 신앙생활의 일치를 최고의 경지로 여기는 바리사이로 대표되는 유다교Judaism 율법주의에 대해 그리스도께선 율법의 말(字句)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사랑 생명 자유)에 살 것을 말씀하시고 율법주의를 배제하셨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요한 7,19-23; 마태 7,12; 22,40; 마르 7장; 12,28-34; 25,40; 로마 13,8-10. 갈라 5,14; 5,18; 2,21; 3,13; 1요한 4,20. 기타 마태 11,13; 5,21-48; 12,1-14; 15,1-20; 16,11-12; 19,1-9; 23,16-22; 루가 16,16; 로마 7,4-6; 10,4; 3,28; 갈라 2,16; 골로 2,14; 에페 2,15; 히브 7,18-19 등 참조)


여기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구약과 신약 사이에 어떤 단절을 만들어서는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가는 구약을 읽을 줄 모르게 된다. 우리는 구약에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이신 분에게 인도를 받아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분의 부활을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호보완성과 연속성, 유기적 관련성에 대해선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신약이 구약에 예시되어 있고 구약이 신약에서 드러난다 Novum Testamentum in Vetere latet et Vetus in Novo patet" 라고 한 것이나, 공의회 계시헌장이 "구약은 하느님께 대한 생생한 감정을 드러내고 하느님께 관한 숭고한 교훈과 인간생활에 관한 유익한 지혜와 기도의 탁월한 보고寶庫를 간직하고 있으며 우리 구원의 현의玄義를 간직하고 있으므로 그리스도 신자들은 이것을 경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서 신구약 성경에 영감을 주시며 그 저자가 되신 하느님은 신약이 구약 가운데 숨어 있고 구약은 신약 가운데서 드러나도록 현명하게 계획하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당신 피로 새로운 계약을 맺으셨으나 복음을 설교하는 가운데 구약성서 전체가 온전히 인용되어 신약에서 그 완전한 의의를 얻고 드러내며(마태 5,17; 루가 24,27; 로마 16,25-26; 2고린 3,14-16 참조) 동시에 신약을 또한 빛내고 설명하기 때문이다"라는 언급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밖에 반反셈족 운동의 여파에 휩쓸리던 독일인들을 향하여 구약성경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태도와 입장을 천명한 문서로서 비오 12세의 '독일교회 상황에 관한 회칙 Mit brennender Sorge'(1937,3.14)의 한 구절(3항)도 음미해 볼만하다. "구약의 성서들은 모두 하느님의 말씀이요 계시의 유기적인 일부이다. 계시의 점진적 발전에 부합하게 구약성서로서는 시대가 기울었고 구약이 준비하던 구원의 대낮이 왔다. 그 성서의 어떤 부분에는 인간적 불완전함, 그 약점과 심지어 죄스러움까지도 언급되고 있는데 이것은 역사의 책으로서나 입법의 책으로서 달리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거기 담긴 높고 숭고한 무수한 사실들 외에도 구약성서에는 피상적이고 물질적인 경향을 보이는 주장들이 계시와 하느님 약속을 보관하던 옛 계약의 백성에게서 여러 가지 행적으로 발견된다. 그렇지만 선입견이나 탐욕으로 멀어버린 눈이 아니라면 성서 역사가 들려주는 인간적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구원의 여정, 마지막에 가서는 그 나약함과 죄를 이기는 그 빛이 더욱 찬란하게 빛남을 보게 될 것이다. 바로 때로는 암울한 이 배경에서 영원한 구원의 교육학이 그 시야를 넓혀가는 것이며 그 시야는 인간들을 지도하고 권유하고 흔들고 일깨우며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맹목과 완고함만이 구약에 감추어진 구원의 가르침과 보물 앞에서 눈을 감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로부터 또 학교로부터 구약의 지혜로운 가르침을 추방하려는 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모독하고 전능하신 분의 구원 계획을 모독하며 옹졸하고 편협한 인간적 사고방식으로 신적인 계획을 판단하는 것이다." 또한 성서학자 S. Garofalo는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구약성서는 고고한考古學이 아니고 하느님의 늘 살아 있는 말씀이요 늘상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지침이다. 성서 전체가 그리스도를 숨결처럼 뿜어내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향하여 박동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의 신비요 그리스도의 신비이다. 구약을 교회의 팔에 지워진 무거운 짐처럼 간주하는 사람은 질책을 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이 말은 성 예로니모의 다음 명구가 진리임을 증언하는 것이다. "구약성서에 대한 무지는 곧 그리스도에 대한 무지이다 Ignorantia Scripturarum ignorantia Christi est."  마지막으로 교황청의 교회일치운동 촉진국이 '가톨릭 교회의 설교와 교리교육에서의 히브리인 및 히브리교'라는 제목으로 펴낸 종교적 관계에 관한 문서(1985.6.25)를 상기함도 도움이 된다. "히브리인과 히브리교는 교리교육과 설교에서 지엽적이고 우발적인 위치를 차지해서는 안 되며 그들의 현종이 불가결하고 그들의 현존이 교리교육과 설교 속에 유기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I,n.2)


그리스도교는 히브리교Judaism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나 유대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특유하면서도 용이하지 않은 것은 구약과 신약의 두 경륜 사이의 관계를 표명하는 여러 가지 어휘들, 즉 약속과 성취, 연속성과 새로움, 유일성과 보편성, 단일성과 표본성 등을 한데 결합시켜 구사해야 한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이 문제를 다룰 때 약속과 성취는 상호간에 서로를 밝혀주고, 새로움은 역사적 상황 등의 전개에 따른 전에 있던 것의 변신에 있으며, 구약 백성의 유일무이함은 배타적인 무엇이 아니고 하느님의 태초의 계획에 따라 개방적이요 보편적으로 확장된 것이고, 히브리 백성의 단일함은 그들이 구세사救世史에 있어 하나의 표본이 된다는 점에 비추어 보아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이상에서 언급한 구약과 신약의 유기적 보완성 및 연속성의 관점에서, 신약이 구약에 예시되어 있고 구약이 신약에서 드러나기에Novum Testamentum in Vetere latet et Vetus in Novo patet 이 두 부분은 서로를 비추어 주는 역할을 하고 하나에 비추어 보지 않고서는 다른 하나를 깊이 이해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이며, 성경 본문들의 진리는 성경 전체에서 유래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 : 구약성서 ABC(P.지로니, 바오로딸), 그리스도교 신앙 입문(칼 라너, 분도출판사), 가톨릭대사전(한국교회사연구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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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phjyohan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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