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려야 할 세가지 눈물
히5:7-10절 /
제3공화국 초기 수많은 젊은 남녀가 광부와 간호사로 독일에 송출되었습니다.
정부는 이들의 임금을 담보로 차관을 들여올 수 있었으며 이들이 보여준 근면성은 독일 국민들로부터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독일 정부가 박대통령을 국빈자격으로 초청했지만 당시에 타고 갈 특별기 조차 없어 독일 정부가 제공하는 비행기를 이용했으며 독일로 날아간 박대통령은 광산촌을 방문했습니다.
조국의 대통령이 왔다는 반가운 소식에 일하던 광부들이 탄가루를 쓴 채 환영장으로 모여들어 조국의 대통령의 연설을 듣게 되었습니다. 박대통령은 "조국이 못살고 가난하여"라며 슬픔에 목이 메여 더 이상 연설을 못했고 광산촌 을 뒤로하고 돌아오는 차안에서 박대통령은 계속하여 눈물을 쏟았고 옆에 있던 70세의 뤼브케 독일 대통령은 손수건을 꺼내 박대통령의 눈물을 닦아주며 "울지 마세요, 잘 사는 나라를 만드시오"라며 위로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노라면 수많은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기쁨과 슬픔의 눈물. 외로움의 눈물. 억울함의 눈물. 안타까워서 흘리는 눈물이 있으며. 동정의 눈물과 답답함으로 애간장이 녹아 내리는 회한의 눈물도 있으며. 아마도 눈물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오버리우즈 라고 하는 사람은 눈물은 강철을 녹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눈물의 주성분은 알칼리성분에 지나지 않지만 무쇠 같은 마음을 움직이고 죽음을 부를 수 있는 중한 질병도 눈물로 인해서 치유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또한 하나님 앞에 중한 죄를 지었을 지라도 애통의 참회의 눈물로 인하여 용서함을 받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눈물 속에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종류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연락하던 인도의 한 청년이 눈병으로 심히 고통을 당하다가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청년의 눈을 진찰한 의사는 긴장된 표정으로 눈에 살인적인 병 독이 들어가 감염되었으므로 두 눈을 뽑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하므로 내일 즉시 두 눈을 뽑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절망 속에 처한 청년에게 크리스챤 친구가 찾아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매달려 보라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며 권면합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싶은 심정으로 친구를 따라 교회에 나가 기도하는데 청년의 강팍했던 마음이 녹아 회개를 시작하니 기도의 문이 열려 모든 것을 철저히 참회하며 통곡하고 울고 또 울고 얼마나 많은 참회의 눈물을 흘렸는지 눈이 퉁퉁 부을 정도로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음날 청년은 가벼운 마음으로 수술대에 올랐는데 다시 진찰을 하던 의사는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토록 심하게 번졌던 독균이 깨끗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청년의 뜨거운 회개의 눈물을 통해서 영과 육의 질병을 깨끗하게 치료하셨습니다. 이렇듯 눈물은 인류역사 속에서 불완전한 인간의 각종 감정을 표현하는 가장 진실한 것으로 표현이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 육신하신 완전하신 예수님도 눈물을 가지고 있었을까? 과연 예수님께서도 눈물을 흘리셨을까? 흘리셨다면 몇 번이나 흘리셨을까요? 그 해답은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일생을 사시는 동안에 세번 우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요11:35절에 사랑했던 나사로의 죽음을 보고 우신 것입니다.
이것은 연민의 정에서 나오는 동정의 눈물입니다.
두 번째는 눅19:14절에 죄의 값으로 멸망당해야 할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습니다.
이것은 자기민족을 향한 동족애의 눈물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오늘 본문의 히5:7절에 겟세마네 동산의 고난 앞에서의 눈물이었습니다.
이 눈물은 인류 구원을 위한 사명감의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된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삶 속에는 어떤 눈물을 흘려야 할까요?
1. 참회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시6:6절에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띠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눈물로 참회하는 다윗의 참회를 볼 수가 있습니다. 이 눈물은 다윗이 한순간의 실수로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난 뒤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하나님께 통회하며 자복하는 참회의 눈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시편에 찬송시를 지어서 밤마다 회계의 눈물로 흐느끼는 다윗은 참회로 인하여 지쳤으며 그 눈물로 인하여 요를 적시니 얼마나 많은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참회의 눈물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다윗을 용서하시고 그의 왕위를 더욱 견고하게 하셨고 가문은 빛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사도 역시 주님을 부인한 자신의 연약함에 대하여 참회의 눈물이 있었기에 죽음을 불사한 복음의 전도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순간 순간 짓는 죄에 대해 참회하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길을 가다가 또는 한 밤중의 침상에서 때로는 기도하는 골방에서, 때로는 자신이 서있는 장소에서 이 참회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민14:1절이하 가나안을 점령하고자 정탐군의 보고를 듣는 자리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은 왜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와 죽게 하는가,,왜 우리를 미워하시는가!"라고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완전하게 신뢰하지 못한 이스라엘백성들은 불확실한 장래 앞에 하나님을 저주하고 원망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모세를 믿고 여기까지 따라온 사람들이라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직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따라왔기에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비관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은 시련만 닥쳐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교회를 원망하고 목사를 저주하고 세상으로 가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은 견디기 힘든 일이 우리의 앞길을 막을 지라도 참고 인내하는 성도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감사의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성도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십니다.
영국의 시인인 무어의 작품 낙원에 보면 어떤 선녀가 낙원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 땅위에서 가장 용감하고 유명했던 한 애국전사의 마지막 피 한 방울을 가지고 갑니다. 그러나 낙원의 입구에서 그것으로는 안 된다고 거절당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기구한 운명으로 생애를 마치는 한 여인의 마지막 한 숨을 가지고 갑니다. 그러나 역시 거절당하고 맙니다. 선녀는 마지막으로 한 노인의 회개와 참회의 눈물을 가지고 갈 때에 비로소 낙원의 문은 열렸습니다. 조국을 위한 피 흘림이나 이웃의 동정이나 희생으로 열 수 없었던 낙원의 문이 참회의 눈물로 인해 열렸던 것입니다.
신학자인 유명한 스펄전 목사님은 마른눈으로 천국에 갈 수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롬3:10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하며 인간은 죄인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3:13절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혀는 속임을 베풀고,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며, 발은 피흘리는데 빠르고,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매주 참회의 고백의 시간을 갖는 것은 우리의 삶에는 무엇하나 죄에 연관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일 수밖에 없으며 이 죄의 자리에서 벗어나려면 참회의 고백과 눈물이 있어야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죄에 대하여 참 회계의 눈물을 흘려 보지도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면 그것 자체가 기적입니다. 참회의 기쁨을 모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참 사랑을 알 수가 없으며 천국의 기쁨을 맛볼 수가 없을 것입니다.
2. 감사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은 에굽의 430년 간의 종살이에서 구원하시고 젓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광야 길을 향할 때에 작은 어려움이 닥치자 그들은 감사를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그들의 지도자 모세를 원망하므로 하나님을 원망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풀었던 은혜를 거두어 버리므로 그들은 광야에서 심판을 받아 죽고 맙니다. 성도에게 감사가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주신 은혜를 거두어 버리시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수가 있습니다.
시103편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니,,라고 성도가 길이 기억하여야 할 은혜가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의 한계 앞에서 자신의 자존심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처절하리만큼 절규하는 애통의 눈물을 흘려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 눈물을 흘려야만 합니다.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고 남보다 선하고 의롭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절대로 다윗의 회계와 같은 애통과 참회의 눈물을 흘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기회와 복이 없음을 알아야합니다.
눅7:36절 이하에 시몬 이라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대합니다.
그때 같은 마을에 사는 한 여인이 주님 앞에 나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머리칼로 예수님의 발을 씻기고 비싼 향유가 든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께 부어 드릴 때에 주변의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그 여인을 책망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마음을 아시고 칭찬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을 구원해주신 예수님의 사랑과 진실한 감사가 있었기에 헌신할 수가 있었으며 귀한 물질을 아낌없이 주님께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불신자나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자는 감사의 눈물을 흘릴 수가 없습니다.
감사의 조건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자신의 모습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요, 사탄의 자식으로 멸망과 저주를 받아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임을 알았을 때 감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그리스도를 만나 후에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죄인의 신분에서 의인의 신분으로, 멸망과 지옥의 심판에서 영생과 천국백성으로, 변화가 됐으며 주님의 혼인잔치에 초대받는 신부가 되었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알았을 때에 감사가 있습니다. 또한 감사는 모든 축복과 은혜의 근본입니다.
감사라는 말은 헬라어로 `유카라스테오`라는 말로서 이 말 뜻은 축복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참 축복은 감사에서 나오는 것이며 또한 기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감사하는 신앙은 참 기쁨을 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은혜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으니 감사는 은혜가 임할 때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에는 복과 기쁨과 은혜의 복합체로 신앙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의 은혜가 없으면 충성도 헌신과 봉사도 할 수가 없습니다.
3. 동정의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요11장에 나사로의 죽음과 소생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에 주님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주님이 흘리시는 눈물은 참으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눈물이요 사랑하는 가족의 슬픔을 함께 나누는 동정의 눈물이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도 이웃의 슬픔에 함께 슬퍼할 줄 아는데 하물며 한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이 동정의 눈물은 필수의 눈물입니다. 이웃과 형제의 고통을 함께 하며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합니다.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눈물은 자기를 부활의 주님으로 믿지 아니하는 것을 애통해 하셨습니다.
헤디슨 테일러는 영혼을 사랑할 수록 눈물이 많아지고 눈물이 강물대어 흐를 때 하나님의 응답은 속히 실현된다고 눈물의 위력을 이야기합니다. 시126편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고 말씀합니다. 형제와 이웃의 영혼을 위해 복음을 전하며 흘리는 눈물은 반드시 하나님께서 응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딤후3장에 말세에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이웃에 부정하며 감사도 없고 교만하여 원한을 품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한마디로 이웃에 대한 정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이 시대는 사랑의 눈물. 동정의 눈물이 메마른 시대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이 저주와 멸망에 있어도 눈물을 흘릴 줄 모르며 이웃과 형제가 고통을 당해도 자비의 눈물조차 말라버렸다는 말입니다.
용혜원 시인은 우리를 눈물나게 하는 일들 여덟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주인 아주머니가 갑자기 방세를 올려달라고 말할 때에 눈물이 나며
2)지갑에 아무것도 없이 주민등록증만 있을 때 눈물이 나고
3)쌀도 없고 라면도 없어 냉수 한 그릇 마시고 잠자리에 들 때,
4)전세 돈 없어 월세방 구하러 다닐 때
5)도둑이 들어와도 빈손으로 보내야 할 때,
6)사랑하는 사람과 약속해 놓고 돈 없어 못 나갈 때,
7)예수님을 그토록 사랑한다고 고백했는데 전도 한 명 못한 것을 깨달았을 때,
8)내 마음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눈물이 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는 이 시대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눈물은 있어도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고자 하는 거룩한 눈물이 사라진지 오래되었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지만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는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눈물은 가장 진실한 언어로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강하게 표현합니다.
성 어그스틴의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가 있으면 그 자녀는 망하지 않는다,, 말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어지간한 일에는 사랑과 감정이 메말라 버려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아일랜드의 속담에 "흐르는 눈물은 괴로우나 그 보다 더 괴로운 것은 흐르지 않는 눈물이다" 는 속담이 있습니다
다윗은 밤마다 침상을 뛰우며 내 요를 적셨다고 찬송으로 고백할 정도로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레미야는 나라를 잃은 아픔 속에서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돌아오지 않는 모습을 보고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기도하며 지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눅19:41절에 예수님은 왜 그토록 화려하고 아름다운 도성 예루살렘을 보고 우셨습니까?
예루살렘 성전은 참으로 아름다운 성으로 특별히 아침 동틀 무렵 감람산에서 바라보면 마치 황금성인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눈부시게 아름답고 이 화려함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의 예루살렘 때문이 아니라 내일의 멸망당할 예루살렘 때문에 우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외면하므로 멸망당할 이스라엘을 보시고 주님은 애통의 눈물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나와 여러분의 가까운 이웃이 죽어가는데 눈물이 없다면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심은 부활의 주님을 믿지않는 것을 슬퍼하셨습니다. 이제 이웃을 생각하며 눈물의 중보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마음과 같은 애통과 참회의 눈물 감사의 눈물을 흘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 멘! -ⓗ- 에벤에셀 홈에서-
예수가좋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