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계획!경륜!섭리!의도!진리!

"종말론" 제1번 "종말이란 무엇인가"-정지련 교수

하나님아들 2020. 4. 18. 10:44

 "종말론" 제1번 "종말이란 무엇인가"-정지련 교수-감리교 인천성서신학원 교수

 

1. 종말론이란 무엇인가?

 

정지련-감리교 인천성서신학원 교수

 

 

1. 서론

 

종말론이란(Eschatology) 세상의 마지막 때 일어날 일들에 관한 교리체계를 지칭한다. 이 개념은 본래 그리스도교의 교리체계를 설명하기 위한 신학 용어였지만 현대 종교학자들은 다른 종교에 나타나는 유사한 주제들을 종말론이란 용어로 설명하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엘리아데(M. Eliade) 고대 종교의 제의에서 세상의 마지막 때 창조의 원초적인 시간이 재생된다는 영원회귀의 신화를 발견하고 이것을 신화적 종말론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은 신화적인 사건이 아니라 실제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사건과 그 사건에 내포되어 있는 약속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종교학자들이 말하는 신화적 종말론과 구분된다.

 

그리스도교 종말론은 유대교 신앙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유대교에 처음부터 종말 사상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저명한 신학자 힐(Craig. HILL)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 주전 6세기를 전후한 바벨론 포로기의 예언자들은 계속되는 시련과 좌절 속에서 하나님의 현재적 다스림이라는 이스라엘의 신앙을 미래적 희망으로 바꾸어 놓는다. 즉 하나님께서 머지않아 이스라엘을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우기 위해 역사를 새롭게 전환시키리라는 희망을 선포한다.

이와 같이 역사의 전환을 말하는 예언자들의 사상을 그리스도교 신학은 역사적 종말론 또는 정치적 종말론이라 부른다.

그러나 주전 2-3세기의 절망적인 상황은-가까운 미래에 현존하는 세상은 사라지고 새로운 기원이 시작되리라는-묵시사상을 등장시켰다.

그리고 이러한 묵시적 종말론의 맥락에 서 메시아니즘의 형태를 띤 묵시적 종말론, 즉 묵시적 종말론과 역사적 종말론은 중재하는 천년왕국 사상이 등장하기도 했다.이러한 묵시사상을 그리스도교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묵시사상의 빛에서 예수를 바라보기도 했지만,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는 신앙의 빛에서 묵시사상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묵시사상은 그리스도교 내에서 변천의 과정을 겪는다.

 

본 소고는 먼저 유대교의 묵시사상을 조명해 본 후 이러한 묵시사상이 그리스도교 내에서 어떠한 변천과정을 겪었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천과정 속에서 형성된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을 예수의 재림에 초점을 맞추어 논구해 보려 한다.

 

2. 묵시사상

 

묵시사상이란 주전 2세기에서 주후 2세기 사이에 기록된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성서에 나타난 종말론 사상을 일컫는다.

묵시란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점에서 묵시도 일종의 계시라고 말할 수 있다.그러나 환상이나 꿈을 통해 전달된 계시를 암호와 상징으로 표현하는 계시라는 점에서, 그리고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미래뿐 아니라 어둡고 암울한 세상의 실상과 미래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계시를 넘어선다.

몰트만을 인용하자면, “하나님의 미래 행동에 대한 표징들이 지금까지의 역사와 완전한 불연속성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의 심판의 위기가 세계사적이며 우주적 범위들을 취할 때 묵시사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면 묵시사상의 근원은 무엇일까?

유대교의 철학자 부버와 구약성서학자 폰 라트는 묵시사상과 유대 예언자 사상의 불연속성을 주장한다.

묵시사상의 출처는 예언자 사상이 아니라 주전 6세기경 이란의 국교가 된 조로아스터교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 성서학자들에 의해 반박되기도 한다.

묵시사상의 뿌리가 이방 종교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예언자 사상,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바벨론 포로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적인 이스라엘 신앙에 있다는 것이다.

 

저명한 신학자 핸슨은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비전과 땅의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창조적 긴장을 이스라엘의 신앙 원리로 제시하면서 단지 이러한 긴장이 극대화되었을 때 나타난 사상이 묵시사상이라고 설명한다.

묵시사상은 예언자 사상의 한 지류라는 것이다.

또한 묵시사상이 이란 종교의 이원론적 표상들을 받아들인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전통적인 유일신 신앙의 한계를 벗어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 땅의 현실이 하나님의 비전에 의해 부정되고, 따라서 비전과 현실 사이의 긴장을 해소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묵시사상들도 존재한다. 그러나 묵시사상 내에는 -의로운 자들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완성시킬 것이라는-천년왕국 사상이 존재한다. 이러한 사실은 묵시사상이 이 땅을 완전히 포기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천년왕국설의 존재는 오히려 옛 창조의 파멸을 말하는 사상과 옛 창조의 변혁을 말하는 사상이 묵시사상 내에 공존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사실 묵시사상과 예언자 신앙은-비록 강조점은 다르지만-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신뢰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묵시사상은 -이 세상이 악의 지배를 받는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정의가 승리할 것이라는-예언자 신앙을 계승한다.

다만 현존하는 세상이 다가오는 하나님의 정의를 감당하지 못할 것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만 예언자 신앙과 구분된다. 따라서 묵시사상은 종말에 이르는 역사적 과정을 제시하는 시간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를 신실하게 고대하면서 곧 사라질 이 세상의 모든 불의에 편승하지 말고 오히려 저항할 것을 촉구하는 신학적 메시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대교의 묵시사상의 계승자는 유대교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였다.

주후 2세기경 유대교는 묵시사상과 완전히 결별한 반면, 초기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인 예수를 묵시사상의 빛에서 해석하면서 묵시사상의 대망을 어이갔다.

 

그러나 하나님의 새 창조를 말하면서도 현세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묵시사상은 신약성서에서 수정의 과정을 거친다.

첫째, 신약성서는 하나님의 새 창조가 예수 안에서 이미 실현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아직 구원받지 못한 세상의 현실 앞에서 현재를-종말을 향해 나아가는-옛 세상과-이미 예수 안에서 시작된-새 세상이 겹쳐지는 상황으로 제시한다.

둘째, 신약성서는 하나님의 새 창조와 옛 창조의 불연속성뿐 아니라 연속성도 주장한다. 창조의 하나님과 새 창조의 하나님이 서로 다른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약성서 종말론에 내재되어 있는 갈등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새 창조가 옛 창조를 지양하면서 옛 창조를 소멸시키지는 않는다는 역설 말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창조의 정체성은 보존되지만 질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는 것이다.

 

3. 그리스도교 종말론

 

1) 예수의 재림

 

그리스도교의 종말론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묵시적 소망은 예수의 재림에 집중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2:20)” 그러나 성서에서 예수의 재림은 다분히 신화적인 표상 속에서 묘사되고 있다.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께서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시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전제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요소인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상충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오실 분과 현존하시는 분은 논리적으로 모순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재림이란 단어는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시간적으로 얼마간의 부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은 정당하다.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분은 우리를 떠나신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재림이란 개념의 긍정적인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재림이란 개념은 오실 분이 이미 오셨던 분과 동일한 분이심을, 심판자로 오실 그리스도가 역사 속에 계셨던 갈릴리 예수와 동일하신 분이심을 밝혀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지적했듯이, 재림 표상은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실 분이-오셨던 분과 동일한 인격이지만-오셨던 분과는 달리 인간적인 형태를 넘어 우주적인 형태를 지니신 분이라는 사실을 적절하게 드러내지 못한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물음이 제기 된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재림으로 번역했던 파루시아란 본래 무엇을 뜻하는 개념이었을까?

브룬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약성서에서 종종 그리스도의 도래나 완성을 뜻하는 파루시아란 말은 문자적으로는 현재를 뜻한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지금 이미 감추어진 채 현존하는 분의 드러나는 현재, 우리가 이미 종의 형태 속에서 보았던 분이 영광 속에서 드러남을 뜻한다. 영광중에 오신다는 것은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완성 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온전히 드러나는 것을 지칭한다는 것이다.”

 

파루시아란 감추어진 채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가 자신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사건으로 제시하는 브룬너의 정의에 이의를 제기할 신학자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역이 우주를 포괄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파루시아를 그리스도에 의해 우주가 새롭게 창조되는 동시에 이러한 사건을 통해 그리스도의 우주적 정체성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사건으로 정의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은 파루시아 신앙이 특정한 묵시나 환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파루시아 신앙의 토대는 오히려 역사 속에 나타났던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있다는 것이다.

알트하우스는 이러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리스도론은 종말론을 선포될 때 완성될 수 있다. 그러나 구원을 고대하는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그리스도론에 근거되어 있다.”

재림 신낭의 근거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에 있다는 것이다. 사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새 창조가 시작되었음을 확신했던 부활 신앙이 없었다면 재림에 대한 전망은 존재할 수 조차 없었을 것이다.

 

부활은 분명 재림 신앙의 근거다.

이러한 사실은 재림이 부활의 틀 안에서 규정되어야 함을 뜻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판넨베르크는 부활을 종말의 선취로 제시하며,

라너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서 종말론은 제시된 현재에 근거해진정한 미래로 나아가는 진술이다. 현재로부터 미래로 나아가는 진술은 종말론이다. 반면 미래로부터 현재를 말하는 것은 묵시사상이다. 묵시사상적 진술은 환상이거나 영지주의다

 

그러나 여기서 물음이 제시된다.

다시 사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만으로 파루시아 신앙이 생성될 수 있었을까? 달리 표현하자면, 현존하시며 자신을 드러내신 분이 기다림과 소망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오히려 살아계신 분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파루시아 신앙이 등장하지 않았는가? 사실 파루시아 신앙은-파루시아란 개념 자체가 암시하듯이-그리스도의 가시적 부재 상황을 전제한다. 물론 그리스도의 부재 상황 그 자체가 파루시아 신앙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부재는 살아계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오직 보이지는 않지만 현존하시는 분, 현존하시지만 보이지 않는 분만이 파루시아에 대한 소망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부활하신 분의 나타나심이 중단된 후 그리스도의 가시적 부재 상황을 그리스도의 승천, 즉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차원 속에서 새로운 존재 형태로 현존하시기 때문에 생겨난 상황으로 설명하는-초기 교회의 승천 신학이 파루시아 신앙의 직접적인 콘텍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무엇이 그리스도의 가시적 부재 상태를 승천으로 해석하도록 만들었는가? 부활하신 분의 부재를 은폐시킬 목적으로 승천이란 개념을 고안해 낸 것일까?

자유주의 신학 진영에서는 그렇게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성서는 분명 승천 신학의 근거를 성령이 가져다준 새로운 인식에서 찾는다. 성령의 조명 속에서 새로운 형태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이 승천 신학의 근거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활뿐 아니라 승천이, -예수를 살아계신 주로 고백하는-부활절 신앙뿐 아니라-새로운 형태로 존재하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하도록 만들었던-성령의 조명이 파루시아 신앙의 실질적인 토대라고 말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성령의 현존이 간과될 때 파루시아의 신앙의 실제적인 차운이 시야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그리스도교 종말론의 내용

 

신약성서에서 재림은 심판과 짝을 이룬다.

재림의 목적은 심판이며, 심판의 기준은 예수다.

재림과 심판의 이러한 연관성은 하나님의 현실이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임했을 때 가장 먼저 나타는 현실이 심판임을 지시해준다.

전통적으로 심판은 행한 대로 갚아주는 보복으로 이해되어 왔다. 그러나 현대신학은 이러한 심판 이해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진다.

최후의 심판이란 의인과 죄인을 영원히 분리하기 위한 최후의 선고인가, 아니면 만유구원의 시작인가?”

 

그러나 전통적인 교의학은 이 주제를 취급하기에 앞서 개인적인 종말론의 문제를 다룬다. “최후의 심판 이전에 죽은 자들은 어디에 머무르며 무슨 일을 당하는가?”

이 물음이 중요한 것은 이 물음이 목회 현장에서 제기되는 실제적인 물음이기도 하지만, 신학적으로도-개인의 죽음과 최후의 심판 사이에 존재하는-중간 시간이란 중요한 주제를 전면에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현대신학 또한-고대 교회 이후 교리에서 배제되었던-천년왕국설을 다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현대신학은 성서 종말론이 구원의 차안성(佌按性)을 간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1) 연옥의 문제

 

신약성서는 죽음 이후의 삶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전통은 죽음 이후의 삶에 관해 다양한 이론들을 제시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들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연옥설이다. 사실 연옥설 만큼이나 커다란 주목을 받으며 논쟁을 불러일으킨 이론도 없을 것이다.

 

연옥설에 의하면 인간의 영혼은 죽음 이후에도 멸망하지 않고 심판을 거쳐 연옥에서 정화의 과정을 거치며 몸이 부활할 때 비로소 육신과 합쳐져 최후의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여기서 본 소고는 개신교의 관점에서 카톨릭의 연옥설에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개인적인 종말론의 문제를 구체화시켜 보겠다.

첫째, 연옥설에 전제되고 있는 영혼불멸설은 과연 성서적인가?

둘째, 죽음 이후의 시간을 지상적 시간의 연장으로 표상하는 연옥 개념은 신학적으로 적절한가?

 

1)성서적 신앙은 플라톤의 영혼불멸설과는 달리 영혼이 몸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몸과 함께 구원받음을 강조한다. 대다수의 카톨릭 신학자들도 영혼불멸설의 한계를 인정한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은 몸의 죽음마져도 인간의 책임성을 폐기할 수 없다는 영혼불멸설의 메시지는 보존되어야 한다는 주장에서 견해의 일치를 보인다.

 

2) 연옥은 무엇보다도 정화의 장소이다. 죽음에 의해서도 면제되지 않는 인간의 책임성과 당신의 피조물에게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감안한다면 연옥은 죽음 이후에도 구원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의 시간과 장소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나 중세 연옥설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중간 시간, 즉 죽음 이후의 시간을 지상적 시간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한다는 점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인 차이를 감안한다면 죽음 이전과 죽음 이후의 시간에도 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터는 이러한 맥락에서 죽은 자가 최후의 심판 때까지 잠을 잔다는 이론을 주장했다.

하나님의 시간은 모든 시간에 동시적인 영원한 현재의 시간임을 상기시키며 개인적인 죽음 이후의 시간은 지금 여기서 흘러가는 시간이 아님을 강조한다.

현대 신학자 브룬너도 루터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죽는 날과 부활의 날 사이에는 수세기의 시간적 간격이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시간적 간격은 오직 여기에만 있는 것이지, 천년이 하루와 같은 하나님의 현재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카톨릭의 라너와 개신교의 몰트만은 중간 시간의 신학적 필연성을 역설한다.

하나님의 현재 안에서도 지상의 시간은 아니지만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현재 안에서도 시간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하나님의 영원성과 지상적 시간 사이의 질적 차이를 감안하면, 루터처럼 중간시간을 부인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에 전제되어 있는 영원 이해,즉 하나님의 영원성을 모든 시간에 동시적인 영원한 현재로 이해하는 것이 과연 성서적인가라는 물음이 제기된다.

 

이러한 물음은 결국 하나님의 영원성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영원이란 과연 무엇인가?

물론 성서에도 지상적인 시간의 무제한적 연장을 영원으로 부르는 구절들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원성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지적했듯이 엄밀한 의미의 하나님의 영원성과는 구별된다. 영원을 단순히 시간의 무제한적 연장이 아니라 전체적 동시성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와 루터는 일치한다.

하나님의 영원성 안에서는 시간 자체가 폐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가 하나님의 불변성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영원은 본성상 불변성의 결과다. 시간이 운동의 결과이듯이 하나님의 영원성은 불변성에 기인한다.”

 

물론 아리스토델레스의 철학에 기초한 이러한 이해를 단순히 비성서적인 이해로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의 불변성과 전체적 동시성은 분명 성서적 근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서는 하나님의 불변성 뿐 만 아니라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 즉 헌신적인 사랑을 강조한다.

고대 교회의 삼위일체 논쟁도 결국은 하나님의 불변성과 하나님의 사랑을 통합하려 했던 시도가 아닌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원을 시간이 폐기된 무시간적 상태가 아니라 성취된 시간으로 이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대 개신교신학의 거장들인 틸리히와 몰트만도 이러한 견해를 대변한다.

영원이란 시간의 무제한적 연장이나 무시간적 영원성이 아니라 시간을 성취시키는 신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영원성 안에서도 시간이-물론 지상적인 시간과는 질적으로 다른 시간이지만-존재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중간 시간과 연옥 또한 존재 근거와 이유를 갖게 된다.

 

(2) 최후의 심판

 

그리스도교의 전통은 재림의 모적을 심판으로 규정한다.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후의 심판이란 개념 속에 내포된-행한대로 갚아준다는-보복과 영벌의 이미지 때문에 이 개념은 많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고대와 중세에는 지옥에 관한 교리가 생겨났으며, 이 교리들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일부가 되었다.

심지어 543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만유회복을 주장했던 오리게네스를 사후 정죄하고 파문했다. 영원한 정죄를 완화시키는 것은 이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이러한 견해에 이의를 제기하고 심판을 정화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신학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현대신학에서도 감지된다.

카톨릭 신학자 라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종말론의 유일한 주제는...은혜의 승리다....카톨릭 교리는 이중예정론을 이단으로 정죄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결국은 만유구원이 마지막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카톨릭의 영성신학자 그륀도 심판을 다음과 같이 형식적으로 묘사한다.

심판의 목적은 죄인의 구원이다. 하지만 이 구원은 뉘우침이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심판은 자신의 악행에 직면하여 깊은 통회를 느끼고 이웃과 하나님과 화해하고 사랑하게 하는 가능성을 선사하는 은총이다. 악인들은 심판에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은총을 받아들여 믿어야 한다.”

개신교에서는 몰트만이 심판을 정의가 실현되는 만유화해의 과정으로 이해한다. 간략하게 말하자면,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헌신적인 사랑이 인간의 책임성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마지막 사건은 만유구원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유구원론에 이의를 제기하는 신학자들도 엄연히 존재한다.

예를 들자면, 브룬너는 영원한 정죄의 가능성을 암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심판은 인간 안에 숨겨진 것이 드러나는 사건일 뿐 아니라 위기, 분리를 의미한다.”

카톨릭 신학자 녹케도 심판을찌겨기의 제거, 정화, 구원으로 이해하면서도 영원한 단죄의 가능성을 내지친다.

영원한 실패는 인격적인 거부로 말미암아 가능하다

하나님의 자비에 근거한 만유구원의 대전제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정죄 가능성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실 복음서(7:13-14, 16:23)는 분명 영원한 분리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마가복음(9:48)은 꺼지지 않는 지옥 불을 말하기도 한다.

사실 만유구원을 암시하는 성서 구절들(1:29, 2:6 이하, 고전15:28)에 기초해 반 입장을 표명하는 성서 구절들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이미 정해진 교의학적 전제에 구절들을 짜 맞춘다는 인상을 피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만유구원의 문제는-정의를 자비에 포함시키며 가해자에 대해 보복적 징벌을 정의에 포함시키면서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는-예언자 전통을 적극적으로 반영하지 못할 뿐 아니라-계시되었으면서도 동시에 숨어계신-하나님의 신비를 포함 할 수 없는 데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신비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어둠을 형상화한 지옥 표상들을 과거의 유물로만 간주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요약하자면, 논리적인 일관성을 위해 어느 한 편에 침묵을 강요하는 것은 신앙의 신비를 해소시킬 위험이 있다. 오히려 브룬너가 말했듯이 이러한 긴장 한가운데서 침묵을 지키며 하나님의 음성을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부르심의 말씀이지 교리가 아니다. 우리는 세계 심판을 말하는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리고 만유 구원을 말하는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오직 이러한 이중성 속에서만 본래 하나인 하나님의 본질을 파악하게 된다.

 

(3) 천년왕국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최후의 심판 이전에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의인들과 함께 다스릴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물론 천년왕국은 문자적으로는 요한계시록에만 나타난다. 그러나 천년왕국을 이 땅 위에 실현될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로 이해한다면 다니엘(7:18, 27)과 에스겔(37:22, 24, 28)뿐 아니라 신정적인 평화의 나라를 선포하는 이사야도 천년왕국 사상의 번주에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이다.

 

천년왕국은 본래 유대인들이 사상이었다. 그러나 천년왕국 사상을 계승한 사람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유대인들은 독립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묵시사상과 천년왕국 사상을 내려놓았다. 반면, 초기 교회는 천년왕국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니엘의 꿈의 전승에 담겨 있는 예언들을 간직하고 정교하게 다듬은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오랫동안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가 곧 권세와 위엄을 가지고 재림하리라고 확신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재림할 때 그것은 곧 지상에 메시야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묵시록의 예언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몬타누스의 열광적인 종말 운동의 여파로 고대 교회는 천년왕국설을 외면하거나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오리게네스는 천년왕국을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해석했으며,

아우그스티누스는 알레고리적 해석을 통해 천년왕국을 교회와 일치시켰다.

그리고 에베소 공의회(451) 천년왕국설을 정죄하면서부터 천년왕국 사상은 그리스도교의 교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천년왕국 사상이 그리스도인의 마음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중세의 수도사 요아킴, 16세기의 뭔처와 재세례파, 그리고 19세기에는 종교사회주의자들이 천년왕국 사상을 주장하였다.

 

천년왕국 사상은 특정한 교파나 정치적 세력을 신격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리고 반사회적인 열광주의 운동이나 사이비 종말론의 근거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따라서 전통적인 교회가 천년왕국설을 외면한 것도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대의 주요 신학자들(P. Althaus, E. Kasemann, H. Ott, J. Moltmann)은 이러한 부정적인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천년왕국설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특히 묵시사상의 피안적인 종말론과 예언자 사상의 역사적 종말론을 중재하려는 기능을 높이 평가한다. 달리 말하자면, 묵시사상에 의지해 역사로부터 도피하려는 시도들을 수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천년왕국 사상은 몬타누스 운동으로부터 남미의 해방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지만 이 땅의 주님은 오직 예수라는 주장에서는 일치한다.

요약하자면, 천년왕국설은 본래-이 당 위에서도 실현 될-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희망과-자기 절대성을 주장하는 모든 세력에 대한-저항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희망과 동시에 사회적 물의도 일으켰던 전례에 비추어 볼 때 천년왕국 사상에 대한 올바른 해석이 요청된다.

무엇보다도 천년왕국 사상이 묵시사상에 속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이 말은 첫째, 천년왕국 사상의 모든 표현과 이미지들이 상징과 암호로 이해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문자적 해석에 근거해 재림과 천년왕국의 시간적 전후 관계를 논하는 전천년주의나, 후천년주의냐의 논쟁은 무익할 뿐이다.

둘째, 천년왕국은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는 실제가 아니라 종말론적 실제다. 따라서 이 땅 위의 그 어떤 교파나 정치적 세력을 천년왕국과 일치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거부되어야 한다.

 

4. 마라나타 신앙

 

성서는 재림 신앙에 있어서 시한부 종말론을 견제한다.

그 때는 누구도 모른다는 것이다.

사실 성서의 종말론은 종말에 이르는 시간표를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재림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자세를 신앙의 본질로 제시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2:20)

 

재림의 지연이 재림에 대한 기대를 약화시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재림에 대한 기대를 저버린다면 본질에서의 이탈이라는 또 다른 위기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재림에 대한 신실한 기다림이야말로 신앙의 본질에 속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학은 재림의 지연에도 불구하고 재림을 신실하게 기다렸던 초기 교회의 신앙을 되돌아보면서 물음을 제기해야 한다.

무엇이 초기 교회로 하여금 새 창조의 도래를 신실하게 기다리도록 만들었던 것일까?

여러 가지요인들이 있었겠지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성령의 현존에 대한 체험이었을 것이다.

 

요한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증언한다.

바울도 하나님의 도래를 확신하도록 만들었던 것이 성령의 현존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복음서 또한 성령의 현존 안에 거하는 자만이 예수를 메시야로 고백할 수 있다고 증언한다.

성서 전통의 빛에서 성령은 무엇보다도 종말의 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실 재림 신앙은 부활신앙에서 비롯되었지만, 이 신앙을 유지해 준 것은 성령의 현존에 대한 체험이었다.

성령의 현존만이 하나님의 도래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교회사를 살펴보더라도 성령의 현존에 대한 믿음이 사라질 때 교회의 세속화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성령의 현존과 조명이야말로-언제나 세속화의 유혹 앞에 서 있는-현대 교회가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신앙의 차원임을 시사해준다.

 

성령의 현존에 대한 체험은 몰론 만유가 하나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는 것을 소망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러한 소망은 이 땅에 대한 책임을 면제시켜 주지는 않는다.

물론 하늘에 대한 소망과 이 땅에 대한 책임은 논리적으로는 서로 대립되는 개년들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러나 천년왕국 사상이 암시하듯이 성서적인 관점에서는 달리말하자면 성령에 의해 새로운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양자가 통일을 이룬다. 이러한 의미에서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할지라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루터의 고백은 진정한 종말론적 자세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참고도서

 

벨커, 미하엘 외/신준호 옮김. “종말론에 대한 과학과 신학의 대화 서울:대한기독교서회, 2002

 

, 맬컴 엮음/이윤경 옮김. “종말론 서울:문학과 지성사, 2011

 

드 사르뎅, 떼이야르/이문희 옮김. “신의영역 왜관:분도출판사, 2010.

 

엘리아데, 미르치아/심재중 옮김, “영원회귀의 신화”, 서울:이학사, 2003.

 

 

'하나님계획!경륜!섭리!의도!진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종말은 언제부터 언제까지인가​  (0) 2021.09.04
개혁주의 종말론 요약  (0) 2020.05.30
하나님의 계획(1)  (0) 2020.04.04
昇貴의 身分   (0) 2019.01.23
[스크랩] 성경 연대기  (0) 2018.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