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EVENTS THAT SHAPED WORLD HISTORY 3.
세계사를 형성한 100大 사건 3.
<번역 : 에스프리>
<출처 : 번역원고>
★ 21. 로마 제국의 멸망 ( 476 AD )
411 성 오거스틴, [신국론] 씀.
433 아틸라, 훈족의 지도자가 되다.
439 북위, 화북을 통일
455 인도의 스칸다굽타는 훈족의 침략을 물리치고 황제가 됨.
460 마야 도시문명이 남 멕시코에서 번창함.
486 클로비스 왕은 고올에서 로마를 물리치고 메로빙거祖를 성립.
527 유스타니아누스 황제 등극.
기원후 14세기 말엽에 이르자, 로마인들은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그들의 제국을 경영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의 제국은 영국에서 흑해까지, 그리고 지중해 해안의 모든 지역에 걸쳐있었다. 제국의 변경에서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하거나 전갈을 보내는데 걸리는 시간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로마에서 공포된 칙령이나 법령이 제국의 외곽지역에 도달하는데 몇 달이 걸리기도 했다. 그 이전에도 지방에 대한 통제와 지역간 교류가 미약하기는 했지만, 이것들이 이때에 이르러 점차로 와해되기 시작했다. 북유럽에서 온 동고트족, 서고트족, 반달족, 프랑크족같은 종족들이 수년에 걸쳐 제국의 국경을 약탈했다. 심지어 이탈리아까지 야만인들의 침공에 시달렸다.
4세기초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는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수도를 고도인 비잔티움으로 옮겼으며, 이 도시의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개명되엇다. AD 337년 콘스탄티누스가 죽었을때, 그의 아들들은 제국을 분할하였고, 제국을 두고 자주 다투었다. 분쟁의 최종적인 결과는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한 동로마제국과 로마를 중심으로한 서로마제국으로의 분할이었다.
서로마제국이 그 자신의 중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붕괴되기 시작함에 따라, 북부의 유럽인들은 점차로 제국의 조각난 파편들을 정복하기 시작해서, 이탈리아의 많은 부분들을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이르렀다. 서고트족의 왕이었던 알라릭은 AD 410년에 로마를 침략해서 수중에 넣었다. 그리고 훈족의 아틸라는 AD 433년에 로마의 북쪽지방을 공격했다. AD 475년 로마의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선출되었을 때, 그는 한飁는 철옹성이었던 로마의 잔영(殘影)만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476년에 게르만족의 왕 오도아케르에 의해서 포로가 되었을 때에, 결국 505년전에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에 의해서 선포되었던 제국에서 태양이 마침내 지게된 것이었다.
★ 22. 모하메드와 이슬람의 여명
531 카스루 1세가 페르시아의 왕이됨. 사산조 페르시아는 절정기에 달함.
537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성당이 완성됨.
538 불교가 한국을 거쳐 일본에 전파.
570 모하메드, 메카에서 출생.
589 수(隋)나라 성립
594 유럽대륙에서 541년에 일어난 페스트가 끝남. 유럽인구는 절반으로 감소.
600 멕시코 보남파크에 마야의 중심지가 세워짐.
600 와리市가 페루 중심부에 세워짐.
618 당조(唐祖)가 관료제를 중국에 세움.
637 아랍 군대가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을 격파함.
오늘날, 이슬람은 세계인구의 17%인 800만명이 믿고 있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널리 퍼진 종교적인 신앙이다. 이슬람도 유대교나 크리스트교처럼 일신교이다. 이슬람의 추종자들은 그들이 알라라고 부르는 유일신을 믿는다. 이슬람교도들은 ぢ알라이외에 신은 없다. 모하메드는 신의 선지자일뿐이다.っ라고 말한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모하메드는 570년경에, 지금의 사우디 아라비아에 있는 메카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이 어릴적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모하메드는 다른 가족들에 의해 부양되었다. 그가 여전히 아이였을 때, 그는 상인이었던 그의 아저씨를 따라서 중동을 여행했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하였으며, 그들의 사상이나 관습에 친숙해졌다. 그는 유대-크리스트교의 유일신 사상에 끌리고 있었다. AD 610년, 메카 근교에서 명상을 하고 있을 때, 아라비아 반도의 다신교를 믿는 이들에게 일신교를 설교하라는 신의 가르침에 관한 일련의 계시를 받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이슬람의 성전(聖典)인 코란도 쓰기 시작했다.
그가 그의 믿음을 따르는 제자들을 얻자, 메카의 정부는 그를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은 모하메드와 그의 추종자들을 도시의 한 구석에 몰아넣고, 만약 모하메드가 그의 설교를 철회하지않고, 그의 추종자들이 모하메드와 유일신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굶겨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그동안에 이웃하고 있는 메디아에서는 두 개의 대립적인 도당들이 모하메드와 그의 믿음에 흥미를 느끼고, 그를 그곳으로 오도록 초청했다. 그래서 모하메드는 AD 622년 7월 16일에 메카로부터 탈출한다. 모하메드가 탈출한 이 날짜를 で헤지라と 라고 하는데, 헤지라는 이슬람교의 출발점이다.
메디나의 지배자로부터 환영을 받은 후, 모하메드는 이슬람 신앙을 적대 부족들 에게 확산시키는데 사용할 군사를 양성했다. 그는 AD 630년에 되돌아와서, 메카를 정복하였다. 그가 죽음을 맞았던 해인 632년경에는 그의 군대가 아라비아 반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개종시켜 놓았다. 그가 죽은 지 10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 이슬람교는 군사적인 힘에 의해 페르시아, 이집트, 그리고 온 중동을 가로지르면서 확산되었다. 8세기 중엽에는 이슬람에 의해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통치되는 영역이, 스페인에서 북아프리카를 거쳐 중동을 지나 중앙아시아 깊숙히까지 펼쳐져 있었다.
★ 23. 샤를마뉴가 서로마황제로 대관받다. AD 800
646 일본의 타이카 개혁.
650 멕시코 중앙의 테이티와칸족이 몰락함.
661 회교의 순니파와 시아파의 분열이 시작.
668 신라의 삼국통일
700 앵글로 색슨의 서사시인 베오울프가 씌여짐.
700 아프리카의 가나 제국이 흥기함.
711 무어인들이 스페인에 침입함.
751 메로빙거祖 끝남. 피핀은 카롤링거祖 성립.
789 바이킹, 영국에 대한 공격 시작.
790 페즈市, 모로코에 세워짐.
800 서아프리카에 카넴보르누 제국이 성립.
800 말래카 해협에서 스리비자야 제국이 강성해짐.
843 카롤링거祖 베르덩조약으로 분할됨
AD 476년 로마제국이 붕괴한후 몇세기동안, 로마제국의 잔재들이, 지금은 전설상의 이름으로만 남아있는 독립된 군주들이 다스리는 세력의 중심지들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테오도릭 대왕(Theodoric the Great: 454-526 AD)은 이탈리아의 동고트왕국을 지배했으며, 클로비스(Clovis)는 오늘날의 프랑스인 프랑크지역 전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스티니아누스 대제(Justinian the Great)는 동로마제국을 비잔티움에서 다스리고 있었으며, 아더왕(King Arthur)은 영국의 캐멀롯에서 군림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통일성을 잃고, 빈번히 충돌하는 왕국들로 이루어진 누더기가 되면서, 유럽은 문화적으로 퇴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래서 암흑시대라고 흔히 묘사되는 중세가 시작되었다.
이슬람교도인 무어족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던 스페인을 제외하고는, 유럽은 정치적으로는 분열이 되어 있었으나, 종교적으로는 크리스트교라는 공통의 유대를 통해서 통일되어 있었다. 로마에 있는 크리스트교 교황의 본부가 유럽의 정신적 중심으로 남아있었고 한편, 북부 유럽에서는 프랑크족이 강한 군사력과 세속적인 세력으로서 출현하였다. 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26세의 샤를마뉴(Charlemagne : 영어로는 Charles the Great)가 그들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나타났다. 그는 742년부터 814년까지 살았는데, 오늘날 유럽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들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그의 가장 강력한 맞수는 이탈리아의 왕인 데시데리우스(Desiderius)였는데, 그는, 교황 아드리안 1세가 샤를마뉴 선왕이 남긴 어린 아들을 프랑크 왕국의 일부를 다스리는 왕으로 삼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데시데리우스를 물리친 후에, 샤를마뉴는 대부분의 북부 이탈리아지역을 프랑크왕국으로 병합했다. 그때 샤를마뉴는 교황을 만나기 위해 로마로 갔는데, 그들사이의 광범위한 전략들이 양립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샤를마뉴의 목표는 옛 로마제국규모의 제국에서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었고, 교황 아드리안 1세는 지배적이고, 통합된 정치권력이, 교회와 결합되어 있기를 바랬다. 또 그는 이슬람이 무어의 군사력에 의해 확장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유럽이 크리스트교 왕국을 수호하고, 확장시키기를 원하고 있었다.
교황의 정신적인, 정치적인 축복에 힘입어, 샤를마뉴는 덴마크, 독일, 그리고 중부 유럽을, 이미 프랑스와 대부분의 이탈리아를 포함하고 있던 제국에 편입시켰다. 그는 또한 무어족으로부터 스페인을 재탈환했다. 그가 로마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던 AD 800년의 크리스마스에, 뜻밖에도 샤를마뉴는 아드리안의 계승자인 교황 레오 3세(Pope Leo III: 751-816 AD)에 의해 그 자신이 로마황제로 대관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325년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서로마제국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비록 AD 812년에 가서야 동로마제국의 황제에 의해서 인정되기는 하지만, 통합되어 있고, 근본적으로 평화적인 상황이었던 팍스 로마나를 유럽인들이 다시 경험할 수 있게 하면서, 샤를마뉴는 재빨리 제국의 대부분 신민들에게 존경을 얻게된다. 이로 인하여, 샤를마뉴의 지배는 암흑시대의 어둠속에서 한줄기 빛이 있었던 순간이라고 불리워지게 된다.
★ 24. 신성로마제국을 재건한 오토 1세 962
862 러시아의 노보고로드가 루스 바이킹족에 의해 세워짐
867 콘스탄트노플 대주교인 포티우스는 로마 교회의 분열을 주도함.
906 당나라 끝남. 내전이 시작됨.
911 바이킹의 우두머리인 롤로는 프랑스 노르망디를 불하받아 정착.
918 고려 개국.
939 안남人은 베트남을 중국에서 분리시킴.
950 고전기 마야 문명이 소멸함.
960 송나라 건국.
샤를마뉴 제국은, 샤를마뉴 자신이 의도했던 계승자인 루이 경건왕(Louis the Pious : 778-840 AD)에게로 이어졌다. 그러나 루이 경건왕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들 사이의 내전은 제국을 붕괴시켜서 조각나게 만들었다. 이러한 공백은 카톨릭 교회에 의해서 채워졌는데, 교회의 정신적인 권위뿐만아니라, 정치적인 권력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럽은 암흑시대(Dark Ages)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샤를마뉴의 빛나는 통치 이전의 분열로 되돌아간 것이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모두 서로 적대시하는 파벌들에 의해서 혼란에 빠져 있었으나, 독일에서는 새로운 지도자가 출현했다. で새잡이왕 하인리히と라고 알려져 있는 하인리히 1세( 876?-936 AD)는, 막강한 힘의 원천인 오토 1세( 912-973)라는 그의 아들이자 계승자를 남기면서, 독일의 제후령들을 합병시켰던 강력한 지도자였다.
오토 1세는 샤를마뉴의 광대한 제국에 포함되었던 땅들을 재통일하려했다. 샤를마뉴가 그러했듯이, 오토 1세의 권위는, 다시 한번 이탈리아의 질서를 회복할 강한 북부 유럽을 바라는 교황의 욕망에서 생겨났다. 교황 요한 12세(Pope John XII)는 이탈리아의 왕인 베렝가와 전쟁중이었으며, 그래서 만약 오토 1세가 베렝가를 물리치고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다면, 오토 1세에게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직함과 왕권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사업이 성취되자, 오토 1세는 AD 962년 2월, 제위에 등극하였다.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생각은 샤를마뉴와 함께 생겨났고, 지금은 오토 1세에 의해서 부활된 것이다. 샤를마뉴의 제국은 그가 죽은후에 불과 27년동안 존속했을 뿐이다.
신성 로마 제국은 오토 1세의 죽음 후에도 8세기 이상 살아남았다. 신성로마제국은 기본적으로 오늘날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이에 인접한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은 15세기까지 힘과 권력을 계속해서 휘둘렀으며, 1806년까지 그 이름이 존속했다.
의도했던데로, 신성로마제국은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로 묶으면서, 유럽의 중심을 정신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결합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몇 세기동안, 새롭게 출현했던 강대세력은 신성로마제국의 바깥 쪽에 있었다.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등이 바로 그런 세력이다.
그러나 독립된 왕국들에 남아있던 자치권은 신성로마제국내 명실상부한 권력 중심이 출현하는 것을 방해했다.
★ 25. 헤이스팅스 전투 1066
979 송은 중국대륙을 통일함.
987 가롤링거祖 끝탐. 프랑스의 카페왕조 성립.
988 키에프의 블리지미르 1세는 동방정교를 도입.
1000 잔지바르족이 아프리카에 정착함.
1014 하인리히 2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함.
1018 비잔틴 제국은 불가리아를 병합.
1035 아라곤왕국과 카스틸랴 왕국 성립.
1050 에드워드 참회왕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세움.
1054 동방정교와 로마 카톨릭사이의 대분열 생김.
1073 교황 그레고리 7세는국왕 서임권을 없앰.
영국이 19세기에는 힘의 절정기를 맞아 당시까지 알려져있던 세계의 대부분을 거느린 대제국을 통제했다. 그러나 로마제국 시대에만 하더라도, 영국은 단지 거칠은 변방일 뿐이었다. 영국의 겔트족들은 끈질기게도 그들의 독립을 유지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영국이라고 알려진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5세기까지 로마제국에 의해서, 그리고 그 후에는 앵글로 색슨족에 의해서 정복되었다. 5세기에는 바이킹족들도 역시 영국에 전초기지를 만들었다. 9세기까지, 앵글로색슨족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영국이 덴마크의 지배하에 있던 26년간을 제외하고는 828년부터 1066년까지 그들은 지배를 계속했다.
1066년에 헤롤드2세는 그의 처남인 에드워드 참회왕을 계승했다. 에드워드는 헤롤드에게 공개적으로 왕좌의 이양을 약속했으나, 이것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에드워드의 의붓형제인 노르망디의 윌리암은 헤롤드가 그 자신을 영국의 왕으로서 지지하기로 했다는 증거를 보여줌으로써, 자신 역시 왕위를 가져야 한다고 내세우기 시작했다.
윌리암은 노르망디와 프랑스의 군사들을 모으기 시작했으며, 프랑스 북부에 있는 노르망디로부터 영국해협을 건너서, 영국을 침공했다. 헤롤드는 1066년 10월 14일 헤이스팅스에서 윌리암을 맞닥뜨렸다. 헤롤드의 보병부대들은 말을 타고 중무장을 한 노르망디의 군사들을 대적하기에는 너무도 빈약했다. 윌리암의 기병들은 색슨족의 보병들을 마구 유린했으며, 그 날이 저물어갈때는, 헤롤드와 많은 그의 부하들이 죽었으며, 헤롤드의 군대는 완전히 와해되어 있었다.
윌리엄은 크리스마스 무렵에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하였고, 정복자 윌리엄이라고 후세에 알려지게 되었다. 훗날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그의 중요한 승리를 되풀이하려 했지만, 윌리암은 무력에의해 영국을 성공적으로 침범한 역사상의 마지막 인물이 되었다.
노르만의 침범은, 영국에 유럽대륙의 예술과 문학의 영향력을 미쳤다. 비록 영국이 영어를 사용하는 상태로 남아있기는 하였지만, 유럽이 제공하였던 최상의 것들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영국문명의 기초적인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이러한 영국문명은 이어서 북아메리카의 문명을 정의하고 창조하는데 기여하였다.
★ 26. 십자군 원정 (1096-1270)
1086 토지사용, 보유 대장인 둠즈데이북이 영국에서 만들어짐.
1094 앗시시 교단이 생김
1100 나이지리아의 카노는 하우사 도시국가 중 강성해짐.
1117 중국에서 최초로 나침반을 항해에 사용.
1130 스테인드 글래스가 최초로 교회장식에 쓰임.
1150 볼로냐 대학에 최초로 의학부가 생김.
1154 앙주의 앙리가 영국의 헨리 2세로 즉위. 플란타지네트 왕조 시작.
1170 고려의 무신정권 성립.
1180 크메르 제국은 캄보디아에서 절정기를 맞음.
1206 몽고의 테무친은 스스로를 징기스칸(세계의 지배자)라 칭함.
1210 프란체스코 교단 생김.
1227 징기스칸 사망. 제국은 4분할됨.
1260 쿠빌라이 칸, 몽고의 황제로 스스로를 선포함.
1271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폴로는 중국에 이르는 여행을 시작.
AD 475년 서로마제국 멸망후에, 동로마 제국은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 있는 크리스트교도들이 성지로 가는 길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AD 610년에 예루살렘은 페르시아인에 의해 점령당하는데, AD 630년까지 그들은 그곳을 지배하게 된다. 동시에 모하메드는 무력의 힘에 의해 이슬람에 확산되고 있던 그 자신의 철학을 설교하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AD 638년 예루살렘을 장악했다. 8세기초까지 그들은 스페인에서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는 지중해 연안을 정복했다. 그들은 성지를 방문하고자 하는 순례자들에게 계속해서 관대했으며, 심지어는 샤를마뉴 대제와 칼리프인 하룬 알 라쉬드가 동맹을 맺기도 했다.
1017년에 동로마제국의 황제인 로마누스 디오게네스는 투르크에게 잃어버린 영토에 대한 전쟁을 선언했다. 이것은 동로마 제국의 붕괴와 총체적인 혼란을 초래했다. 이때, 투르크는 효과적으로 유럽인들의 성지순례를 차단하고 있었다. 1095년 클레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반2세는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같은 크리스트교 지역의 기사들에게 성지를 수복할 수 있을 군대를 일으키라고 요구했다. 1096년의 첫번째 시도는 빈약하게 조직되었고 따라서 참담한 실패인 듯했다. 그러나 용감한 십자군들은 1097년에 돌아왔고, 2년후에는 예루살렘을 재수복했다. 예루살렘 왕국이 1099년에 선언되었고, 1차 십자군 원정은 성공으로 간주되었다.
예루살렘 왕국은 45년동안 지속되었으나, 1144년 투르크에 의해 침략당했다. 제 2차 십자군은 1145년에 실패하였고, 3차 십자군도 1189년에 같은 전철을 밟았다. 1200년에서 1204년 사이의 제 4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수중에 넣지는 못하였으나, 프랑스의 기사들은 동방 정교회 아래에 놓여져있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1262년까지 살아남게 되는 로마 크리스트교 왕국을 건설하였다. 계속 이어진 1212년과 1270년 사이의 4번에 걸친 십자군 원정은 어느 것도 첫 십자군 원정이 이루었던 것 만큼 성공하지 못했고, 대부분 완전한 실패였다. 아마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1212년의 소년 십자군이었다. 성지에 갔던 50,000명의 소년중에 단지 201명만이 살아서 귀향할 수 있었다.
유럽에 있어서 십자군의 역사적인 중요성은 일련의 군사적 패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동방과의 접촉을 가져다 주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들이 예루살렘을 투르크의 지배하에서 영원히 자유롭게 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십자군은,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은 물론이고, 유럽인들에게 더 확대된 시각을 가져다 주는 데 성공했다. 사실상 많은 이들이 십자군은 궁극적으로 르네상스를 앞당겼던 촉매역할을 했다고 믿고 있다.
★ 27. 마그나 카르타, 대헌장 (AD 1215)
1215 몽고는 진을 격파하고 북경을 점령.
1222 파두아 대학이 이탈리아에 세워짐.
1234 고려에서 불경인쇄 시작.
1242 로저 베이컨은 화약 제조식을 기술함.
1248 크리스트교도들이 스페인을 거의 탈환.
1257 소르본느 신학부가 파리대학에 설치.
1261 미카엘 8세는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고 비잔틴제국을 다시 세움.
1273 루돌프 1세가 독일의 왕이되면서 합스부르크왕조를 성립.
1279 쿠빌라이 칸은 원나라를 세움.
역사상에는 선한 군주들과 악한 군주들이 있었다. 친절하고 자비심 많은 군주들도 있었고, 사악하고 원한이 많았던 군주들도 있었다. 그러나 13세기까지는 대부분 절대군주들이 존재했다. 심지어 함무라비나 아소카같은 계몽군주의 경우에 있어서도 왕은 왕이고, 그의 칙령은 그 지역의 법이었다. 기본적으로 교회가 발한 칙령을 제외한 유럽의 법은 왕의 자유 재량으로 제정되어서, 대대로 계승되었다. 왕은 그가 원하는만큼 세금을 징수할 수 있었고, 그를 비난하는 사람은 누구나 감옥으로 보낼 수 있었다.
특히, 그의 아버지인 사자심왕 리차드를 1199년에 계승한 잉글랜드의 존왕이 잔혹한 지배자였다. 존은 탐욕스럽고, 믿을 수 없었으며, 무능력했다. 그는 프랑스에 대한 영국의 지배를 유지하는 일에는 실패했지만, 가차없이 세금을 부과시켰던 영국의 귀족들을 비롯한, 교황 이노센트 II세로부터 영국의 모든 국민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야기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존의 지배를 반대하는 계층은 실로 다양했다. 결국 귀족과 영주들은 그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것은 세금부과에 의해 유지되던 정부에 대해서, 귀족이나 지주들의 보다 확장된 지배권에 대한 요구를 존왕이 동의하기를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자신들의 세력과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귀족이나 지주들은 마침내 그들의 요구에 대한 왕의 관심을 환기시킬 수 있었다.
마지못해, 존왕은 1215년 6월 15일 러니메드라고 불리는 윈저궁에서 그들을 만났고, 그들은 마그나 카르타를 승인해 줄 것을 요구했는데, 이 헌장은 권리에 대한 63개의 권리에 대한 개요로 구성되어 있었고, 왕의ꁁ 과도한 속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ぢ나는 나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이러한 자유를 결코 부여할 수 없다.っ며 존왕은 조소했다. 그러나 왕은 귀족들의 압력속에서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사인할 수 밖에 없었다.
헌장은 여전히 영국의 법률체제의 주춧돌로 여겨지고 있으며, 사실 북아메리카를 포함한 세계의 많은 곳에서도 법체계의 근간을 이룬다. 대헌장은 배심원에 의한 심리권을 포함해서, 형벌은 범죄에 상응하는 수준으로 내리고, 세금은 공평성과 비례성에 맞추어 부과되도록 하는 등의 다양한 개인권리의 보호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고, 오래 지속된 마그나 카르타의 의의는, 왕이 더 이상 법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민들처럼 그 땅의 법이나 관습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을 확실히 한 점이다.
★ 28. 징기스칸과 그의 제국(AD 1227)
1248 독일의 쾰른 대성당 걸설.
1249 알퐁소 3세는 포루투갈에서 무어인을 몰아냄.
1252 스톡홀름이 스웨덴에 세워짐.
1260 파리는 직조공업의 중심지가 됨.
1264 시몽 드 몽포르는 헨리 3세를 물리침.
1266 앙주의 샤를르 1세는 나폴리와 시실리의 왕이 됨.
1274 몽고는 일본을 정벌함.
1284 제노아의 함대는 피사를 물리치고 지중해의 맹주가 됨.
13세기에, 중국인들은 단지 유럽인들의 존재에 대해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양측 모두 어느 한사람에 의해서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었는데, 징기스칸과 그의 유목민 무리들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부터 온 것처럼 보였으며, 온 지구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까지의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중국이나 유럽문명에 관해 그다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던 몽고의 전쟁군주 징기스칸은, 아마 세계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군대의 지도자로 군림했는데, 그는 유르트에서 자고, 빠르고 억센 몽고의 종마를 타고 다녔다. 12세기 후반에 그는 몽고족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몽고제국의 잠재적인 역량에는 한계가 없어 보였다.
몽고인들은 중앙아시아의 넓은 광야에 사는 유목민들이었다. 오랜 기간동안, 그들은 서로 싸우거나 중국제국의 변방 마을을 노략질하는 것으로 스텝지방내에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 본거지의 주변부 너머에 사는 사람들만이 그들에 대해서 들어보았을 뿐이다.
기원전 200년경에 건설된 중국의 만리장성은 대체로 몽고인들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유럽인들도 몽고인들이 거주하는 춥고 높은 사막지대로부터 수천마일 떨어져서 존재하고 있었다. 결국에 가서는 이러한 성벽도 공간적인 거리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징기스칸은 첫 목표를 타르타르족으로 잡았다. 그들을 물리친 후에 그는 중국이 있는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당시 중국에는 금나라가 멸망 직전이었으며, 따라서 약탈적인 몽고인들에게는 중국은 손쉬운 대상이었다. 징기스칸은 1214년 북경을 점령했고, 1219년에는 대부분의 중국을 손에 넣었다. 그러자 그는 그의 정복에 관해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서쪽의 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중무장된 기병의 거대한 물결로 알이름을 떨친 ぢ몽고족っ들은 러시아를 거쳐서, 페르시아 제국을 먹어치운 후 폴란드와 헝가리를 삼켜버리면서 모든 유럽을 위협했다. 이후 8년의 기간동안, 징기스칸은 세계가 이전에는 미처 보지못했던 거대한 제국을 만들어나갔다. 단지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를 포함한 대영제국만이 징기스칸의 제국보다 조금 컸을 뿐이다. 알렉산더 대왕이나 카이사르, 혹은 페르시아의 황제들와는 달리, 징기스칸의 정복에 대한 생각은, 점령해서 이민족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유린하고, 약탈하고, 그리고 그의 앞길을 놓여있는 것은 무엇이나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가 완전히 인간 생명을 경시했다는 사실은, 온 유라시아 대륙을 통해서 그의 존재를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 유목민 부족의 승리는 징기스칸의 통솔력과 그의 몽고통일에 전적으로 의지한 것이었다. 오가디칸이 징기스칸의 사후에 그를 계승하고 정복을 계속했지만, 몽고의 위압적인 힘은 궁극적으로 활력을 잃고, 유목민들은 중앙아시아로 돌아가게 된다.
결국, 몽고제국이 역사속에서 가져왔던 가장 중요한 영향은, 서로 지구의 반대쪽에 살던 사람들-유럽인과 중국인-에게 상대방에 대한 자각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다. 십자군 원정은 중동과 유럽 사이의 고대의 대화를 다시 열어주었다. 그러나 몽고와의 접촉후에야 유럽인들은 극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 29. 중국으로부터 돌아온 마르코폴로
1290 에드워드 1세는 영국에서 유태인을 추방.
1290 오스만 1세는 오스만 투르크 왕조를 성립.
1291 스위스 연맹(스위스)가 성립.
1293 마야파히트 왕국이 자바에 성립.
1294 이탈리아의 플로렌스 대성당이 세워짐.
1300 최초의 기계식 시계가 유럽에 등장
1312 만사 무사는 서아프리카의 말리 왕국의 왕으로 즉위.
1325 아랍 지리학자 이븐 밧투타는 탐사를 시작.
1331 모스크바의 크레믈린이 최초로 언급됨.
1337 영국과 프랑스간에 100년전쟁 시작.
13세기까지 아시아에 대한 유럽인들의 인상은 몽고인들에게 겪었던 끔직한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따라서 몽고권 밖에 있는 다양한 중국문화에 관한 지식은 거의 가지고 있지 못했다. 문화들간에 상호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에 대해서 충분히 알지를 못했다. 그들의 문자, 언어, 문화적 전통은 독립적으로 발전되었으며, 완전히 별개의 것이었다.
당시에는 중국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으며, 1269년 니콜로 폴로와 그의 형제 마페오 폴로가 중국까지 다녀와서 그곳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였던 베니스는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교역도시 중의 하나였는데, 이 도시 출신의 두 형제는 무역사업을 위해 흑해까지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투르키스탄-후에 舊소련의 중앙아시아 공화국이 된다.-에서 온 몇 명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주선으로 이 이탈리아에서 온 두형제는 중국의 몽고황제인 쿠빌라이칸의 궁정에서 온 사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중국인들은 폴로형제가 중국을 방문해서, 유럽인들을 결코 본 적이 없는 그들의 황제를 만나도록 초청했다. 폴로형제들의 이야기에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던 쿠빌라이칸은, 유럽의 기독교와 예술, 문학을 중국에 소개해 줄 선교사의 파견해주기를 그들 형제를 통해 교황에게 요청했다.
1269년 형제가 이탈리아로 돌아왔을 때, 그들의 친구들은 그 엄청난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었다. 1271년 그들은 중국으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하고, 이번에는 아직 10대인 니콜라스의 아들, 마르코를 동행하기로 했다. 쿠빌라이칸은 이 아이를 좋아하였고, 그를 대사로 임명하여, 티벳이나 버마 뿐만 아니라 중국내에서의 많은 임무에 그를 파견했다. 마르코폴로는 이제까지의 아시아를 본 어떤 유럽인보다도, 아니 아시아를 보려고 꿈꿔왔던 그 누구보다도 많이 아시아 지역을 둘러 보았다.
마르코는 그의 아버지와 삼촌을 따라서 20년동안 중국에 머물렀다. 그는 아시아의 언어와 관습을 배웠으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폴로가 1295년 베니스에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또 다시 그들의 이야기를 믿지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중국에서 배운 것들을 보여주자, 그의 동료 베니스인들은 결국 그 사실을 확신했고, 폴로 일행을 환영하고 칭송했다.
그들이 중국으로부터 가져온 많은 경이로운 물건들은 유럽인들이 그 전에는 결코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중국으로부터 스파게티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마르코 폴로의 저서인 で마르코 폴로의 여행と은 아마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있는 기행문일 것이다.
대륙을 통한 여행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유럽과 극동의 교역은 아주 느리게 발전했다. 그러나 이용가능한 교역 루트를 자세히 소개한 책을 마르코 폴로가 펴내자, 그 길이 열리게 되었다. 사실 2세기 후의 크리스토퍼 콜롬부스의 항해는 중국으로 가는 보다 쉬운 길을 발견하고자하는 욕망에 의해서 자극받은 것이었다.
★ 30. 흑사병(AD 1348-1350)
1345 아즈텍 인들은 테노치티트란(멕시코 시티)를 세움.
1346 영국은 끄레씨에서 프랑스군 격파.
1368 중국의 명나라 성립.
1370 바스띠유 성의 건설이 시작됨.
1378 대분열 시작. 로마와 아비뇬에서 두 교황이 등장.
1380 러시아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몽고인을 격파.
1381 영국에서 농민 반란이 시작.
1386 영국의 초서는 켄터베리이야기의 집필 시작.
1392 조선왕조 시작.
1394 타이는 캄보디아를 침공.
1415 죤 후스는 이단심판을 받고 화형당함.
20세기의 항생물질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이전의 몇 세기동안에는, 항상 질병들이 만연했었고, 전염병들은 끊이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40세를 넘지 않았고, 유아사망비율은 오늘날보다 훨씬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세기 중반에 유럽을 강타했던 흑사병은, 인간의 역사에서 결코 필적할 만한 것이 없는 재앙이었다.
흑사병 이전에 발생했던 전염병들은 대개 맹렬하기는 했지만 단기간으로 끝나버리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전염병들이 상대적으로 좁은 지역에 제한되어서 기승을 부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흑사병 창궐의 결과는 참혹했으며, 시칠리와 스웨덴까지 그리고 영국에서 스페임에 이르기까지의 온 유럽에 걸쳐 퍼져있었다.
이 병은 피부밑에 생기는 검은빛의 피물집에 의해서 감염이 확인되었는데, 흑사병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 물집들은 대개 고열과 강한 통증, 그리고 임파선이 붓는 현상을 동반하는데, 결국은 죽음을 초래한다. 치료될 수 없었던 폐렴이나 매독도 자주 출현하였다. 질병들의 원인이 알려져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신의 재앙이라고 믿어졌다. 그러나 임상적으로 흑사병은 선페스트였는데, 이것은 갈색 쥐들에 의해서 옮겨지는 벼룩이 물었을 때 혈관속으로 주입되는 바실라스 페스티스 Bacillas Pestis라는 세균때문에 발병하는 것이다.
도시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어떤 이들은 자살을 하기도 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질병의 확산을 멈추게 하려는 시도로서 그들이 가진 것을 모두 태워버리기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밀물처럼 밀려오던 흑사병의 물결을 막아보려는 종교적인 노력이 실패하면서, 교회에 대한 불만이 팽배하였고, 그래서 で흑마술と같은 反종교적 행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흑사병에 의한 사망자는 2천 5백만에서 3천 5백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 전체 인구의 1/3정도가 1348-1350년 사이에 죽었다. 어떤 작은 도시들은 그들 주민의 90%를 잃기도 했다. 독일의 함부르크는 그들 시민의 2/3을 잃었으며, 영국은 인구의 반 이상을 잃었다. 전 가족이 몰살당하기도 했으며, 그렇지않은 가족들조차도 살아남은 아이들이 다른 가정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뿔뿔이 헤어지게 되었다.
유럽의 경제는 극적인 변화를 하고 있었다. 심각한 노동력의 부족은 높은 임금과 제품생 산에의 높은 비용,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물가상승을 초래했다. 많은 회사들이 파산했고, 토지 소유자들은, 그들의 가게를 돌보거나, 땅을 경작할 사람이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곧잘 그들의 재산을 상실했다. 노동집약적인 봉건체제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흑사병은 유럽 역사의 진로를 변화시킨 대변동이었다. 그것은 유럽의 경제뿐만아니라 종교적인 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교회가 질병앞에서 무능력하다는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흑사병은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앞당기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비록 흑사병이 1350년 이후에는 덜 가혹했지만, 이후에도 여러해 계속 되었다. 흑사병을 통한 희생자가 많았기 때문에, 유럽의 인구가 1347년의 수준에 도달하는 데에는 200년의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세계사를 형성한 100大 사건 3.
<번역 : 에스프리>
<출처 : 번역원고>
★ 21. 로마 제국의 멸망 ( 476 AD )
411 성 오거스틴, [신국론] 씀.
433 아틸라, 훈족의 지도자가 되다.
439 북위, 화북을 통일
455 인도의 스칸다굽타는 훈족의 침략을 물리치고 황제가 됨.
460 마야 도시문명이 남 멕시코에서 번창함.
486 클로비스 왕은 고올에서 로마를 물리치고 메로빙거祖를 성립.
527 유스타니아누스 황제 등극.
기원후 14세기 말엽에 이르자, 로마인들은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그들의 제국을 경영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들의 제국은 영국에서 흑해까지, 그리고 지중해 해안의 모든 지역에 걸쳐있었다. 제국의 변경에서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하거나 전갈을 보내는데 걸리는 시간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로마에서 공포된 칙령이나 법령이 제국의 외곽지역에 도달하는데 몇 달이 걸리기도 했다. 그 이전에도 지방에 대한 통제와 지역간 교류가 미약하기는 했지만, 이것들이 이때에 이르러 점차로 와해되기 시작했다. 북유럽에서 온 동고트족, 서고트족, 반달족, 프랑크족같은 종족들이 수년에 걸쳐 제국의 국경을 약탈했다. 심지어 이탈리아까지 야만인들의 침공에 시달렸다.
4세기초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는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수도를 고도인 비잔티움으로 옮겼으며, 이 도시의 이름은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개명되엇다. AD 337년 콘스탄티누스가 죽었을때, 그의 아들들은 제국을 분할하였고, 제국을 두고 자주 다투었다. 분쟁의 최종적인 결과는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한 동로마제국과 로마를 중심으로한 서로마제국으로의 분할이었다.
서로마제국이 그 자신의 중량을 감당하지 못하고 붕괴되기 시작함에 따라, 북부의 유럽인들은 점차로 제국의 조각난 파편들을 정복하기 시작해서, 이탈리아의 많은 부분들을 통제할 수 있을 때까지 이르렀다. 서고트족의 왕이었던 알라릭은 AD 410년에 로마를 침략해서 수중에 넣었다. 그리고 훈족의 아틸라는 AD 433년에 로마의 북쪽지방을 공격했다. AD 475년 로마의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선출되었을 때, 그는 한飁는 철옹성이었던 로마의 잔영(殘影)만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476년에 게르만족의 왕 오도아케르에 의해서 포로가 되었을 때에, 결국 505년전에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에 의해서 선포되었던 제국에서 태양이 마침내 지게된 것이었다.
★ 22. 모하메드와 이슬람의 여명
531 카스루 1세가 페르시아의 왕이됨. 사산조 페르시아는 절정기에 달함.
537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 성당이 완성됨.
538 불교가 한국을 거쳐 일본에 전파.
570 모하메드, 메카에서 출생.
589 수(隋)나라 성립
594 유럽대륙에서 541년에 일어난 페스트가 끝남. 유럽인구는 절반으로 감소.
600 멕시코 보남파크에 마야의 중심지가 세워짐.
600 와리市가 페루 중심부에 세워짐.
618 당조(唐祖)가 관료제를 중국에 세움.
637 아랍 군대가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을 격파함.
오늘날, 이슬람은 세계인구의 17%인 800만명이 믿고 있는, 세계에서 두번째로 널리 퍼진 종교적인 신앙이다. 이슬람도 유대교나 크리스트교처럼 일신교이다. 이슬람의 추종자들은 그들이 알라라고 부르는 유일신을 믿는다. 이슬람교도들은 ぢ알라이외에 신은 없다. 모하메드는 신의 선지자일뿐이다.っ라고 말한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모하메드는 570년경에, 지금의 사우디 아라비아에 있는 메카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이 어릴적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모하메드는 다른 가족들에 의해 부양되었다. 그가 여전히 아이였을 때, 그는 상인이었던 그의 아저씨를 따라서 중동을 여행했다. 그는 다양한 사람들과 접촉하였으며, 그들의 사상이나 관습에 친숙해졌다. 그는 유대-크리스트교의 유일신 사상에 끌리고 있었다. AD 610년, 메카 근교에서 명상을 하고 있을 때, 아라비아 반도의 다신교를 믿는 이들에게 일신교를 설교하라는 신의 가르침에 관한 일련의 계시를 받기 시작했다. 그는 또한 이슬람의 성전(聖典)인 코란도 쓰기 시작했다.
그가 그의 믿음을 따르는 제자들을 얻자, 메카의 정부는 그를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은 모하메드와 그의 추종자들을 도시의 한 구석에 몰아넣고, 만약 모하메드가 그의 설교를 철회하지않고, 그의 추종자들이 모하메드와 유일신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굶겨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그동안에 이웃하고 있는 메디아에서는 두 개의 대립적인 도당들이 모하메드와 그의 믿음에 흥미를 느끼고, 그를 그곳으로 오도록 초청했다. 그래서 모하메드는 AD 622년 7월 16일에 메카로부터 탈출한다. 모하메드가 탈출한 이 날짜를 で헤지라と 라고 하는데, 헤지라는 이슬람교의 출발점이다.
메디나의 지배자로부터 환영을 받은 후, 모하메드는 이슬람 신앙을 적대 부족들 에게 확산시키는데 사용할 군사를 양성했다. 그는 AD 630년에 되돌아와서, 메카를 정복하였다. 그가 죽음을 맞았던 해인 632년경에는 그의 군대가 아라비아 반도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개종시켜 놓았다. 그가 죽은 지 10년이 채 지나지도 않아, 이슬람교는 군사적인 힘에 의해 페르시아, 이집트, 그리고 온 중동을 가로지르면서 확산되었다. 8세기 중엽에는 이슬람에 의해서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통치되는 영역이, 스페인에서 북아프리카를 거쳐 중동을 지나 중앙아시아 깊숙히까지 펼쳐져 있었다.
★ 23. 샤를마뉴가 서로마황제로 대관받다. AD 800
646 일본의 타이카 개혁.
650 멕시코 중앙의 테이티와칸족이 몰락함.
661 회교의 순니파와 시아파의 분열이 시작.
668 신라의 삼국통일
700 앵글로 색슨의 서사시인 베오울프가 씌여짐.
700 아프리카의 가나 제국이 흥기함.
711 무어인들이 스페인에 침입함.
751 메로빙거祖 끝남. 피핀은 카롤링거祖 성립.
789 바이킹, 영국에 대한 공격 시작.
790 페즈市, 모로코에 세워짐.
800 서아프리카에 카넴보르누 제국이 성립.
800 말래카 해협에서 스리비자야 제국이 강성해짐.
843 카롤링거祖 베르덩조약으로 분할됨
AD 476년 로마제국이 붕괴한후 몇세기동안, 로마제국의 잔재들이, 지금은 전설상의 이름으로만 남아있는 독립된 군주들이 다스리는 세력의 중심지들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테오도릭 대왕(Theodoric the Great: 454-526 AD)은 이탈리아의 동고트왕국을 지배했으며, 클로비스(Clovis)는 오늘날의 프랑스인 프랑크지역 전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유스티니아누스 대제(Justinian the Great)는 동로마제국을 비잔티움에서 다스리고 있었으며, 아더왕(King Arthur)은 영국의 캐멀롯에서 군림하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제국이 통일성을 잃고, 빈번히 충돌하는 왕국들로 이루어진 누더기가 되면서, 유럽은 문화적으로 퇴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래서 암흑시대라고 흔히 묘사되는 중세가 시작되었다.
이슬람교도인 무어족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던 스페인을 제외하고는, 유럽은 정치적으로는 분열이 되어 있었으나, 종교적으로는 크리스트교라는 공통의 유대를 통해서 통일되어 있었다. 로마에 있는 크리스트교 교황의 본부가 유럽의 정신적 중심으로 남아있었고 한편, 북부 유럽에서는 프랑크족이 강한 군사력과 세속적인 세력으로서 출현하였다. 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26세의 샤를마뉴(Charlemagne : 영어로는 Charles the Great)가 그들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나타났다. 그는 742년부터 814년까지 살았는데, 오늘날 유럽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들중의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그의 가장 강력한 맞수는 이탈리아의 왕인 데시데리우스(Desiderius)였는데, 그는, 교황 아드리안 1세가 샤를마뉴 선왕이 남긴 어린 아들을 프랑크 왕국의 일부를 다스리는 왕으로 삼아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데시데리우스를 물리친 후에, 샤를마뉴는 대부분의 북부 이탈리아지역을 프랑크왕국으로 병합했다. 그때 샤를마뉴는 교황을 만나기 위해 로마로 갔는데, 그들사이의 광범위한 전략들이 양립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샤를마뉴의 목표는 옛 로마제국규모의 제국에서 우두머리가 되는 것이었고, 교황 아드리안 1세는 지배적이고, 통합된 정치권력이, 교회와 결합되어 있기를 바랬다. 또 그는 이슬람이 무어의 군사력에 의해 확장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유럽이 크리스트교 왕국을 수호하고, 확장시키기를 원하고 있었다.
교황의 정신적인, 정치적인 축복에 힘입어, 샤를마뉴는 덴마크, 독일, 그리고 중부 유럽을, 이미 프랑스와 대부분의 이탈리아를 포함하고 있던 제국에 편입시켰다. 그는 또한 무어족으로부터 스페인을 재탈환했다. 그가 로마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던 AD 800년의 크리스마스에, 뜻밖에도 샤를마뉴는 아드리안의 계승자인 교황 레오 3세(Pope Leo III: 751-816 AD)에 의해 그 자신이 로마황제로 대관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325년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서로마제국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비록 AD 812년에 가서야 동로마제국의 황제에 의해서 인정되기는 하지만, 통합되어 있고, 근본적으로 평화적인 상황이었던 팍스 로마나를 유럽인들이 다시 경험할 수 있게 하면서, 샤를마뉴는 재빨리 제국의 대부분 신민들에게 존경을 얻게된다. 이로 인하여, 샤를마뉴의 지배는 암흑시대의 어둠속에서 한줄기 빛이 있었던 순간이라고 불리워지게 된다.
★ 24. 신성로마제국을 재건한 오토 1세 962
862 러시아의 노보고로드가 루스 바이킹족에 의해 세워짐
867 콘스탄트노플 대주교인 포티우스는 로마 교회의 분열을 주도함.
906 당나라 끝남. 내전이 시작됨.
911 바이킹의 우두머리인 롤로는 프랑스 노르망디를 불하받아 정착.
918 고려 개국.
939 안남人은 베트남을 중국에서 분리시킴.
950 고전기 마야 문명이 소멸함.
960 송나라 건국.
샤를마뉴 제국은, 샤를마뉴 자신이 의도했던 계승자인 루이 경건왕(Louis the Pious : 778-840 AD)에게로 이어졌다. 그러나 루이 경건왕이 죽은 후에, 그의 아들들 사이의 내전은 제국을 붕괴시켜서 조각나게 만들었다. 이러한 공백은 카톨릭 교회에 의해서 채워졌는데, 교회의 정신적인 권위뿐만아니라, 정치적인 권력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럽은 암흑시대(Dark Ages)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샤를마뉴의 빛나는 통치 이전의 분열로 되돌아간 것이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모두 서로 적대시하는 파벌들에 의해서 혼란에 빠져 있었으나, 독일에서는 새로운 지도자가 출현했다. で새잡이왕 하인리히と라고 알려져 있는 하인리히 1세( 876?-936 AD)는, 막강한 힘의 원천인 오토 1세( 912-973)라는 그의 아들이자 계승자를 남기면서, 독일의 제후령들을 합병시켰던 강력한 지도자였다.
오토 1세는 샤를마뉴의 광대한 제국에 포함되었던 땅들을 재통일하려했다. 샤를마뉴가 그러했듯이, 오토 1세의 권위는, 다시 한번 이탈리아의 질서를 회복할 강한 북부 유럽을 바라는 교황의 욕망에서 생겨났다. 교황 요한 12세(Pope John XII)는 이탈리아의 왕인 베렝가와 전쟁중이었으며, 그래서 만약 오토 1세가 베렝가를 물리치고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다면, 오토 1세에게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직함과 왕권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이 사업이 성취되자, 오토 1세는 AD 962년 2월, 제위에 등극하였다.
신성로마제국이라는 생각은 샤를마뉴와 함께 생겨났고, 지금은 오토 1세에 의해서 부활된 것이다. 샤를마뉴의 제국은 그가 죽은후에 불과 27년동안 존속했을 뿐이다.
신성 로마 제국은 오토 1세의 죽음 후에도 8세기 이상 살아남았다. 신성로마제국은 기본적으로 오늘날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이에 인접한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은 15세기까지 힘과 권력을 계속해서 휘둘렀으며, 1806년까지 그 이름이 존속했다.
의도했던데로, 신성로마제국은 다양한 사람들을 하나로 묶으면서, 유럽의 중심을 정신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결합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몇 세기동안, 새롭게 출현했던 강대세력은 신성로마제국의 바깥 쪽에 있었다.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등이 바로 그런 세력이다.
그러나 독립된 왕국들에 남아있던 자치권은 신성로마제국내 명실상부한 권력 중심이 출현하는 것을 방해했다.
★ 25. 헤이스팅스 전투 1066
979 송은 중국대륙을 통일함.
987 가롤링거祖 끝탐. 프랑스의 카페왕조 성립.
988 키에프의 블리지미르 1세는 동방정교를 도입.
1000 잔지바르족이 아프리카에 정착함.
1014 하인리히 2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즉위함.
1018 비잔틴 제국은 불가리아를 병합.
1035 아라곤왕국과 카스틸랴 왕국 성립.
1050 에드워드 참회왕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세움.
1054 동방정교와 로마 카톨릭사이의 대분열 생김.
1073 교황 그레고리 7세는국왕 서임권을 없앰.
영국이 19세기에는 힘의 절정기를 맞아 당시까지 알려져있던 세계의 대부분을 거느린 대제국을 통제했다. 그러나 로마제국 시대에만 하더라도, 영국은 단지 거칠은 변방일 뿐이었다. 영국의 겔트족들은 끈질기게도 그들의 독립을 유지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영국이라고 알려진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5세기까지 로마제국에 의해서, 그리고 그 후에는 앵글로 색슨족에 의해서 정복되었다. 5세기에는 바이킹족들도 역시 영국에 전초기지를 만들었다. 9세기까지, 앵글로색슨족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영국이 덴마크의 지배하에 있던 26년간을 제외하고는 828년부터 1066년까지 그들은 지배를 계속했다.
1066년에 헤롤드2세는 그의 처남인 에드워드 참회왕을 계승했다. 에드워드는 헤롤드에게 공개적으로 왕좌의 이양을 약속했으나, 이것은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에드워드의 의붓형제인 노르망디의 윌리암은 헤롤드가 그 자신을 영국의 왕으로서 지지하기로 했다는 증거를 보여줌으로써, 자신 역시 왕위를 가져야 한다고 내세우기 시작했다.
윌리암은 노르망디와 프랑스의 군사들을 모으기 시작했으며, 프랑스 북부에 있는 노르망디로부터 영국해협을 건너서, 영국을 침공했다. 헤롤드는 1066년 10월 14일 헤이스팅스에서 윌리암을 맞닥뜨렸다. 헤롤드의 보병부대들은 말을 타고 중무장을 한 노르망디의 군사들을 대적하기에는 너무도 빈약했다. 윌리암의 기병들은 색슨족의 보병들을 마구 유린했으며, 그 날이 저물어갈때는, 헤롤드와 많은 그의 부하들이 죽었으며, 헤롤드의 군대는 완전히 와해되어 있었다.
윌리엄은 크리스마스 무렵에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하였고, 정복자 윌리엄이라고 후세에 알려지게 되었다. 훗날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그의 중요한 승리를 되풀이하려 했지만, 윌리암은 무력에의해 영국을 성공적으로 침범한 역사상의 마지막 인물이 되었다.
노르만의 침범은, 영국에 유럽대륙의 예술과 문학의 영향력을 미쳤다. 비록 영국이 영어를 사용하는 상태로 남아있기는 하였지만, 유럽이 제공하였던 최상의 것들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영국문명의 기초적인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이러한 영국문명은 이어서 북아메리카의 문명을 정의하고 창조하는데 기여하였다.
★ 26. 십자군 원정 (1096-1270)
1086 토지사용, 보유 대장인 둠즈데이북이 영국에서 만들어짐.
1094 앗시시 교단이 생김
1100 나이지리아의 카노는 하우사 도시국가 중 강성해짐.
1117 중국에서 최초로 나침반을 항해에 사용.
1130 스테인드 글래스가 최초로 교회장식에 쓰임.
1150 볼로냐 대학에 최초로 의학부가 생김.
1154 앙주의 앙리가 영국의 헨리 2세로 즉위. 플란타지네트 왕조 시작.
1170 고려의 무신정권 성립.
1180 크메르 제국은 캄보디아에서 절정기를 맞음.
1206 몽고의 테무친은 스스로를 징기스칸(세계의 지배자)라 칭함.
1210 프란체스코 교단 생김.
1227 징기스칸 사망. 제국은 4분할됨.
1260 쿠빌라이 칸, 몽고의 황제로 스스로를 선포함.
1271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폴로는 중국에 이르는 여행을 시작.
AD 475년 서로마제국 멸망후에, 동로마 제국은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에 있는 크리스트교도들이 성지로 가는 길을 여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AD 610년에 예루살렘은 페르시아인에 의해 점령당하는데, AD 630년까지 그들은 그곳을 지배하게 된다. 동시에 모하메드는 무력의 힘에 의해 이슬람에 확산되고 있던 그 자신의 철학을 설교하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AD 638년 예루살렘을 장악했다. 8세기초까지 그들은 스페인에서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는 지중해 연안을 정복했다. 그들은 성지를 방문하고자 하는 순례자들에게 계속해서 관대했으며, 심지어는 샤를마뉴 대제와 칼리프인 하룬 알 라쉬드가 동맹을 맺기도 했다.
1017년에 동로마제국의 황제인 로마누스 디오게네스는 투르크에게 잃어버린 영토에 대한 전쟁을 선언했다. 이것은 동로마 제국의 붕괴와 총체적인 혼란을 초래했다. 이때, 투르크는 효과적으로 유럽인들의 성지순례를 차단하고 있었다. 1095년 클레몽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반2세는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같은 크리스트교 지역의 기사들에게 성지를 수복할 수 있을 군대를 일으키라고 요구했다. 1096년의 첫번째 시도는 빈약하게 조직되었고 따라서 참담한 실패인 듯했다. 그러나 용감한 십자군들은 1097년에 돌아왔고, 2년후에는 예루살렘을 재수복했다. 예루살렘 왕국이 1099년에 선언되었고, 1차 십자군 원정은 성공으로 간주되었다.
예루살렘 왕국은 45년동안 지속되었으나, 1144년 투르크에 의해 침략당했다. 제 2차 십자군은 1145년에 실패하였고, 3차 십자군도 1189년에 같은 전철을 밟았다. 1200년에서 1204년 사이의 제 4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수중에 넣지는 못하였으나, 프랑스의 기사들은 동방 정교회 아래에 놓여져있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1262년까지 살아남게 되는 로마 크리스트교 왕국을 건설하였다. 계속 이어진 1212년과 1270년 사이의 4번에 걸친 십자군 원정은 어느 것도 첫 십자군 원정이 이루었던 것 만큼 성공하지 못했고, 대부분 완전한 실패였다. 아마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1212년의 소년 십자군이었다. 성지에 갔던 50,000명의 소년중에 단지 201명만이 살아서 귀향할 수 있었다.
유럽에 있어서 십자군의 역사적인 중요성은 일련의 군사적 패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동방과의 접촉을 가져다 주었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들이 예루살렘을 투르크의 지배하에서 영원히 자유롭게 하지는 못했을지라도 십자군은,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은 물론이고, 유럽인들에게 더 확대된 시각을 가져다 주는 데 성공했다. 사실상 많은 이들이 십자군은 궁극적으로 르네상스를 앞당겼던 촉매역할을 했다고 믿고 있다.
★ 27. 마그나 카르타, 대헌장 (AD 1215)
1215 몽고는 진을 격파하고 북경을 점령.
1222 파두아 대학이 이탈리아에 세워짐.
1234 고려에서 불경인쇄 시작.
1242 로저 베이컨은 화약 제조식을 기술함.
1248 크리스트교도들이 스페인을 거의 탈환.
1257 소르본느 신학부가 파리대학에 설치.
1261 미카엘 8세는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하고 비잔틴제국을 다시 세움.
1273 루돌프 1세가 독일의 왕이되면서 합스부르크왕조를 성립.
1279 쿠빌라이 칸은 원나라를 세움.
역사상에는 선한 군주들과 악한 군주들이 있었다. 친절하고 자비심 많은 군주들도 있었고, 사악하고 원한이 많았던 군주들도 있었다. 그러나 13세기까지는 대부분 절대군주들이 존재했다. 심지어 함무라비나 아소카같은 계몽군주의 경우에 있어서도 왕은 왕이고, 그의 칙령은 그 지역의 법이었다. 기본적으로 교회가 발한 칙령을 제외한 유럽의 법은 왕의 자유 재량으로 제정되어서, 대대로 계승되었다. 왕은 그가 원하는만큼 세금을 징수할 수 있었고, 그를 비난하는 사람은 누구나 감옥으로 보낼 수 있었다.
특히, 그의 아버지인 사자심왕 리차드를 1199년에 계승한 잉글랜드의 존왕이 잔혹한 지배자였다. 존은 탐욕스럽고, 믿을 수 없었으며, 무능력했다. 그는 프랑스에 대한 영국의 지배를 유지하는 일에는 실패했지만, 가차없이 세금을 부과시켰던 영국의 귀족들을 비롯한, 교황 이노센트 II세로부터 영국의 모든 국민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의 분노를 야기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존의 지배를 반대하는 계층은 실로 다양했다. 결국 귀족과 영주들은 그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것은 세금부과에 의해 유지되던 정부에 대해서, 귀족이나 지주들의 보다 확장된 지배권에 대한 요구를 존왕이 동의하기를 주장하는 내용이었다. 자신들의 세력과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귀족이나 지주들은 마침내 그들의 요구에 대한 왕의 관심을 환기시킬 수 있었다.
마지못해, 존왕은 1215년 6월 15일 러니메드라고 불리는 윈저궁에서 그들을 만났고, 그들은 마그나 카르타를 승인해 줄 것을 요구했는데, 이 헌장은 권리에 대한 63개의 권리에 대한 개요로 구성되어 있었고, 왕의ꁁ 과도한 속박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ぢ나는 나 자신을 노예로 만드는 이러한 자유를 결코 부여할 수 없다.っ며 존왕은 조소했다. 그러나 왕은 귀족들의 압력속에서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사인할 수 밖에 없었다.
헌장은 여전히 영국의 법률체제의 주춧돌로 여겨지고 있으며, 사실 북아메리카를 포함한 세계의 많은 곳에서도 법체계의 근간을 이룬다. 대헌장은 배심원에 의한 심리권을 포함해서, 형벌은 범죄에 상응하는 수준으로 내리고, 세금은 공평성과 비례성에 맞추어 부과되도록 하는 등의 다양한 개인권리의 보호를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하고, 오래 지속된 마그나 카르타의 의의는, 왕이 더 이상 법위에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시민들처럼 그 땅의 법이나 관습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을 확실히 한 점이다.
★ 28. 징기스칸과 그의 제국(AD 1227)
1248 독일의 쾰른 대성당 걸설.
1249 알퐁소 3세는 포루투갈에서 무어인을 몰아냄.
1252 스톡홀름이 스웨덴에 세워짐.
1260 파리는 직조공업의 중심지가 됨.
1264 시몽 드 몽포르는 헨리 3세를 물리침.
1266 앙주의 샤를르 1세는 나폴리와 시실리의 왕이 됨.
1274 몽고는 일본을 정벌함.
1284 제노아의 함대는 피사를 물리치고 지중해의 맹주가 됨.
13세기에, 중국인들은 단지 유럽인들의 존재에 대해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양측 모두 어느 한사람에 의해서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었는데, 징기스칸과 그의 유목민 무리들은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부터 온 것처럼 보였으며, 온 지구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까지의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중국이나 유럽문명에 관해 그다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던 몽고의 전쟁군주 징기스칸은, 아마 세계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군대의 지도자로 군림했는데, 그는 유르트에서 자고, 빠르고 억센 몽고의 종마를 타고 다녔다. 12세기 후반에 그는 몽고족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몽고제국의 잠재적인 역량에는 한계가 없어 보였다.
몽고인들은 중앙아시아의 넓은 광야에 사는 유목민들이었다. 오랜 기간동안, 그들은 서로 싸우거나 중국제국의 변방 마을을 노략질하는 것으로 스텝지방내에서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 본거지의 주변부 너머에 사는 사람들만이 그들에 대해서 들어보았을 뿐이다.
기원전 200년경에 건설된 중국의 만리장성은 대체로 몽고인들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대부분의 유럽인들도 몽고인들이 거주하는 춥고 높은 사막지대로부터 수천마일 떨어져서 존재하고 있었다. 결국에 가서는 이러한 성벽도 공간적인 거리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징기스칸은 첫 목표를 타르타르족으로 잡았다. 그들을 물리친 후에 그는 중국이 있는 남쪽으로 기수를 돌렸다. 당시 중국에는 금나라가 멸망 직전이었으며, 따라서 약탈적인 몽고인들에게는 중국은 손쉬운 대상이었다. 징기스칸은 1214년 북경을 점령했고, 1219년에는 대부분의 중국을 손에 넣었다. 그러자 그는 그의 정복에 관해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사는, 서쪽의 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중무장된 기병의 거대한 물결로 알이름을 떨친 ぢ몽고족っ들은 러시아를 거쳐서, 페르시아 제국을 먹어치운 후 폴란드와 헝가리를 삼켜버리면서 모든 유럽을 위협했다. 이후 8년의 기간동안, 징기스칸은 세계가 이전에는 미처 보지못했던 거대한 제국을 만들어나갔다. 단지 캐나다와 오스트레일리아를 포함한 대영제국만이 징기스칸의 제국보다 조금 컸을 뿐이다. 알렉산더 대왕이나 카이사르, 혹은 페르시아의 황제들와는 달리, 징기스칸의 정복에 대한 생각은, 점령해서 이민족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유린하고, 약탈하고, 그리고 그의 앞길을 놓여있는 것은 무엇이나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가 완전히 인간 생명을 경시했다는 사실은, 온 유라시아 대륙을 통해서 그의 존재를 공포의 대상으로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이 유목민 부족의 승리는 징기스칸의 통솔력과 그의 몽고통일에 전적으로 의지한 것이었다. 오가디칸이 징기스칸의 사후에 그를 계승하고 정복을 계속했지만, 몽고의 위압적인 힘은 궁극적으로 활력을 잃고, 유목민들은 중앙아시아로 돌아가게 된다.
결국, 몽고제국이 역사속에서 가져왔던 가장 중요한 영향은, 서로 지구의 반대쪽에 살던 사람들-유럽인과 중국인-에게 상대방에 대한 자각을 가져다 주었다는 것이다. 십자군 원정은 중동과 유럽 사이의 고대의 대화를 다시 열어주었다. 그러나 몽고와의 접촉후에야 유럽인들은 극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 29. 중국으로부터 돌아온 마르코폴로
1290 에드워드 1세는 영국에서 유태인을 추방.
1290 오스만 1세는 오스만 투르크 왕조를 성립.
1291 스위스 연맹(스위스)가 성립.
1293 마야파히트 왕국이 자바에 성립.
1294 이탈리아의 플로렌스 대성당이 세워짐.
1300 최초의 기계식 시계가 유럽에 등장
1312 만사 무사는 서아프리카의 말리 왕국의 왕으로 즉위.
1325 아랍 지리학자 이븐 밧투타는 탐사를 시작.
1331 모스크바의 크레믈린이 최초로 언급됨.
1337 영국과 프랑스간에 100년전쟁 시작.
13세기까지 아시아에 대한 유럽인들의 인상은 몽고인들에게 겪었던 끔직한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었으며, 따라서 몽고권 밖에 있는 다양한 중국문화에 관한 지식은 거의 가지고 있지 못했다. 문화들간에 상호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서로에 대해서 충분히 알지를 못했다. 그들의 문자, 언어, 문화적 전통은 독립적으로 발전되었으며, 완전히 별개의 것이었다.
당시에는 중국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으며, 1269년 니콜로 폴로와 그의 형제 마페오 폴로가 중국까지 다녀와서 그곳에 관한 이야기를 전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당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였던 베니스는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교역도시 중의 하나였는데, 이 도시 출신의 두 형제는 무역사업을 위해 흑해까지 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투르키스탄-후에 舊소련의 중앙아시아 공화국이 된다.-에서 온 몇 명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주선으로 이 이탈리아에서 온 두형제는 중국의 몽고황제인 쿠빌라이칸의 궁정에서 온 사절들을 만날 수 있었다. 중국인들은 폴로형제가 중국을 방문해서, 유럽인들을 결코 본 적이 없는 그들의 황제를 만나도록 초청했다. 폴로형제들의 이야기에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던 쿠빌라이칸은, 유럽의 기독교와 예술, 문학을 중국에 소개해 줄 선교사의 파견해주기를 그들 형제를 통해 교황에게 요청했다.
1269년 형제가 이탈리아로 돌아왔을 때, 그들의 친구들은 그 엄청난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었다. 1271년 그들은 중국으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하고, 이번에는 아직 10대인 니콜라스의 아들, 마르코를 동행하기로 했다. 쿠빌라이칸은 이 아이를 좋아하였고, 그를 대사로 임명하여, 티벳이나 버마 뿐만 아니라 중국내에서의 많은 임무에 그를 파견했다. 마르코폴로는 이제까지의 아시아를 본 어떤 유럽인보다도, 아니 아시아를 보려고 꿈꿔왔던 그 누구보다도 많이 아시아 지역을 둘러 보았다.
마르코는 그의 아버지와 삼촌을 따라서 20년동안 중국에 머물렀다. 그는 아시아의 언어와 관습을 배웠으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폴로가 1295년 베니스에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또 다시 그들의 이야기를 믿지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중국에서 배운 것들을 보여주자, 그의 동료 베니스인들은 결국 그 사실을 확신했고, 폴로 일행을 환영하고 칭송했다.
그들이 중국으로부터 가져온 많은 경이로운 물건들은 유럽인들이 그 전에는 결코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중국으로부터 스파게티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마르코 폴로의 저서인 で마르코 폴로의 여행と은 아마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있는 기행문일 것이다.
대륙을 통한 여행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유럽과 극동의 교역은 아주 느리게 발전했다. 그러나 이용가능한 교역 루트를 자세히 소개한 책을 마르코 폴로가 펴내자, 그 길이 열리게 되었다. 사실 2세기 후의 크리스토퍼 콜롬부스의 항해는 중국으로 가는 보다 쉬운 길을 발견하고자하는 욕망에 의해서 자극받은 것이었다.
★ 30. 흑사병(AD 1348-1350)
1345 아즈텍 인들은 테노치티트란(멕시코 시티)를 세움.
1346 영국은 끄레씨에서 프랑스군 격파.
1368 중국의 명나라 성립.
1370 바스띠유 성의 건설이 시작됨.
1378 대분열 시작. 로마와 아비뇬에서 두 교황이 등장.
1380 러시아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몽고인을 격파.
1381 영국에서 농민 반란이 시작.
1386 영국의 초서는 켄터베리이야기의 집필 시작.
1392 조선왕조 시작.
1394 타이는 캄보디아를 침공.
1415 죤 후스는 이단심판을 받고 화형당함.
20세기의 항생물질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이전의 몇 세기동안에는, 항상 질병들이 만연했었고, 전염병들은 끊이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40세를 넘지 않았고, 유아사망비율은 오늘날보다 훨씬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세기 중반에 유럽을 강타했던 흑사병은, 인간의 역사에서 결코 필적할 만한 것이 없는 재앙이었다.
흑사병 이전에 발생했던 전염병들은 대개 맹렬하기는 했지만 단기간으로 끝나버리는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전염병들이 상대적으로 좁은 지역에 제한되어서 기승을 부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흑사병 창궐의 결과는 참혹했으며, 시칠리와 스웨덴까지 그리고 영국에서 스페임에 이르기까지의 온 유럽에 걸쳐 퍼져있었다.
이 병은 피부밑에 생기는 검은빛의 피물집에 의해서 감염이 확인되었는데, 흑사병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 물집들은 대개 고열과 강한 통증, 그리고 임파선이 붓는 현상을 동반하는데, 결국은 죽음을 초래한다. 치료될 수 없었던 폐렴이나 매독도 자주 출현하였다. 질병들의 원인이 알려져있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은 신의 재앙이라고 믿어졌다. 그러나 임상적으로 흑사병은 선페스트였는데, 이것은 갈색 쥐들에 의해서 옮겨지는 벼룩이 물었을 때 혈관속으로 주입되는 바실라스 페스티스 Bacillas Pestis라는 세균때문에 발병하는 것이다.
도시 사람들은 공포에 떨었다. 어떤 이들은 자살을 하기도 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질병의 확산을 멈추게 하려는 시도로서 그들이 가진 것을 모두 태워버리기도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밀물처럼 밀려오던 흑사병의 물결을 막아보려는 종교적인 노력이 실패하면서, 교회에 대한 불만이 팽배하였고, 그래서 で흑마술と같은 反종교적 행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흑사병에 의한 사망자는 2천 5백만에서 3천 5백만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 전체 인구의 1/3정도가 1348-1350년 사이에 죽었다. 어떤 작은 도시들은 그들 주민의 90%를 잃기도 했다. 독일의 함부르크는 그들 시민의 2/3을 잃었으며, 영국은 인구의 반 이상을 잃었다. 전 가족이 몰살당하기도 했으며, 그렇지않은 가족들조차도 살아남은 아이들이 다른 가정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뿔뿔이 헤어지게 되었다.
유럽의 경제는 극적인 변화를 하고 있었다. 심각한 노동력의 부족은 높은 임금과 제품생 산에의 높은 비용,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물가상승을 초래했다. 많은 회사들이 파산했고, 토지 소유자들은, 그들의 가게를 돌보거나, 땅을 경작할 사람이 없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곧잘 그들의 재산을 상실했다. 노동집약적인 봉건체제는 붕괴되기 시작했다.
흑사병은 유럽 역사의 진로를 변화시킨 대변동이었다. 그것은 유럽의 경제뿐만아니라 종교적인 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교회가 질병앞에서 무능력하다는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흑사병은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앞당기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비록 흑사병이 1350년 이후에는 덜 가혹했지만, 이후에도 여러해 계속 되었다. 흑사병을 통한 희생자가 많았기 때문에, 유럽의 인구가 1347년의 수준에 도달하는 데에는 200년의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출처 : Joyful의 뜰
글쓴이 : Joyfu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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