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EVENTS THAT SHAPED WORLD HISTORY 2.
세계사를 형성한 100大 사건 2.
<번역 : 에스프리>
<출처 : 번역원고>
★ 11.그리스의 황금기 450-332 BC
450BC. 라 텐느 시기가 중부 유럽에서 시작.
447BC.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의 건축이 시작.
445BC. 로마에서 귀족과 평민간의 결혼금지가 없어짐.
425BC. 소포클레스의 희곡 [외디푸스왕]이 완성됨.
411BC. 아테네 역사가인 투키디데스가 [역사]를 완성함.
404BC. 이집트는 페르시아로부터 독립.
404BC. 스파르타는 아테네를 점령하고 그리스의 맹주가 됨.
우리가 머릿말에 언급했듯이, 역사의 이정표는 도미노와도 같다. 뒤에 생긴 사건은 앞에 생긴 사건의 영향을 받는다. 살라미스와 플라타이아 전투는 그것들이 그리스 문명을 소멸의 위기에서 구해내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것은 다시말하면 그리스 문화의 커다란 번영을 가능케했고, 이는 근대 서구 문명의 근간을 형성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미친 철학자들을 배출해냈다.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많은 문화권 내에서 수많은 위대한 사상가, 작가, 이론가가 있었지만, 이 기간 아테네에서 이러한 위대한 지성들이 유례없이 집중되어 나타나서,서양의 역사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이처럼 좁은 공간에서 짧은 시간동안 나타난 이러한 현상은, 르네상스에 이르러서야 다시 찾아볼수 있을 것이다.
이들 중에서 다른 사람들 위에 우뚝 솟은 세 명의 이름이 있었다. 소크라테스(469-399BC)가 그 첫번째인데, 그는 플라톤(427-347BC)의 스승이었다. 플라톤은 다시 아리스토텔레스(384-322BC)를 가르쳤다. 이러한 창조적인 연속성으로 인해 서구 철학사상의 탄생에 깊이와 충만함이 더해졌다.
소크라테스에게는 그의 재치있는 말솜씨 때문에 제자들이 많이 따랐는데, 그는 또한 많은 사람이 서구 철학의 아버지로 생각하는 뛰어난 철학가이기도 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 목적을 위해 산다고 믿었고, 옳고 그른 것이 주변환경과 다른사람과의 관계를 결정하는 데 있어서 중대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상적인 정부의 목적이 사회의 공공선을 목적으로 통치할 현인을 양성하는 것이라는 이론을 정립시켰다.
플라톤은 이러한 생각을 받아들여서 그의 책 で공화국と에서 이러한 생각들을 상세히 보여주고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ぢ윤리, 덕, 이성이 균형을 이루는 완벽한 국가っ를 상정하고 있다. 그는 도그마를 받아들이는 것 보다도 지혜를 추구하는 것을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뿐만 아니라 의학까지도 공부했으며, 우리 주변 세계의 여러 측면과 인간간의 관계에 대한 연구에서 체계적인 방법을 차용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랙산더 대왕의 스승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마침내 가서는 13세기에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에 의해 크리스트교 신학과 조화를이루게 된다.
★ 12. 의학에 대한 과학적 접근 400BC
403BC. 중국에서 전국시대 시작.
400BC. 영국에서 메이든 캐슬에 있는 힐포트를 건설함.
399BC. 소크라테스가 처형당함.
386BC. 테베와 아테네 연합군은 스파르타와의 전쟁을 재개
341BC. 페르시아는 이집트를 재정복.
339BC. 마케도니아의 필립2세는 아테네와 테베의 연합군을 격파.
근대 서구 철학이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놓여진 기반 위에 세워진 것과 마찬가지로, 근대 의학 역시 그 기원을 그리스 문명의 황금시대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히포크라테스(460-377BC)는 병을 치료하는데 있어서 의사는 ぢ일반적인 인간의 본질과 개개인과 각각의 질병의 성질의 본질을 고려해야 한다っ는 개념을 최초로 고안해 냈다. 다시 말하자면, 의사는 단지 한정된 증상에만 촛점을 맞추기보다는 전체 인체 메커니즘 안에서의 상호관계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히포크라테스는 당시의 선구자였다. 그는 명백하게 시대를 앞서나갔다. 세상의 의료행위 대부분이 무당과 요술장이에 의해서 다루어지던 시대에 살았던 그는, BC 4세기에 활동하던 의사의 것이라기 보다는 20세기의 그것에 보다 가까워 보이는 생각들을 전개시켜나가면서, 의학과 의학윤리에 관한 수많은 책들을 저술했다.
히포크라테스는 부러진 부분은 정상적으로 고치기 위해서 곧게 똑바로 맞춰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부러진 부분의 끝을 잡아당겼다가 부분들이 서로 맞게 되면 천천히 풀어주도록 했다. 항상 그는 의사가 부분적인 골절을 넘어서서 환자의 전체적인 반응까지 볼 것을 역설했다.
ぢ운동은 신체를 단련하고 움직이지 않는것은 몸을 쓸모없게 만들기っ 때문에 초기 단기에서 그는 운동을 권유했다. 오늘날 이 처방법은 아직도 의사들이 ぢ사용하지 않아서 생기는 기능퇴화っ(atrophy of disuse)를 피하는 방법으로 따르고 있다. 과학적으로 봐서, 히포크라테스의 업적은 어느정도 한계가 있다. 예를 들어서 혈액 순환에 대한 그의 생각은 명백하게 틀린 것이었다. 그러나, 후대를 위해 대부분의 과학적인 발견들을 남긴 한편, 그는 이론적 기초와 방법, 과정을 공식화시켰는데, 이를 통해 앞으로의 수세기동안 의학의 진보가 이루어질 것이었다. 실재로 히포크라테스는 문자 그대로 근대적인 의료 행위의 틀을 세웠다. 그가 쓴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여전히 근대 의료윤리의 초석이라고 할 수 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는 의사와 환자간의 신뢰, 환자에 대한 의사의 책임, 사회적 신분에 상관없이 누구나 치료해야 할 의사의 의무와 같은 기본적인 신조가 들어있다.
★ 13.알렉산더 대왕의 제국 323BC
338BC. 로마는 라틴 동맹도시들을 격파함.
336BC. 필립2세는 암살되고 알렉산더 대왕이 즉위함.
333BC. 알렉산더는 시리아, 페키니아, 이집트를 정복함.
333BC.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왕 다리우스3세를 격파함.
332BC. 알렉산더는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를 세움.
BC 5세기에 페르시아인들이 이루려다가 실패한 것을 BC 4세기에 그리스의 한 장군이 이루는데 성공했다. 이는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있고 그리스에서 인도까지 뻗쳐 있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일이었는데, 그는 알렉산더 대왕(356-323BC)이었다.
알렉산더의 아버지 마케도니아의 필립은 BC 336년 암살당하기 직전까지 모든 그리스를 그의 통치 아래 두었다. 어린 알렉산더는 아테네에서 , 아버지뿐 아니라, 스승이었던 위대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는 20세에 그의 아버지의 뒤를 이었는데, 이미 위대해 지도록 운명지어 져 있는 인물이었다. 알렉산더가 단지 13년 동안만을 통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치세에 그는 이전까지 존재했던 어떤 나라보다 더 큰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그가 BC 333년에 이수수 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558-486BC)를 격퇴시킨 후 페르시아 제국은 붕괴되었다. 그가 33살이 될 때 까지, 알렉산더는 그가 필립으로부터 상속받았을 당시 제국의 땅의 50배나 넓은 영토와 20배나 많은 사람을 다스렸다. 이 영토는 그리스, 이집트, 이전 페르시아 제국의 전부와 우리가 오늘날 중동이라고 생각하는 지역 모두를 포함하고 있었다.그는 북쪽으로는 다뉴브, 동쪽으로는 인도의 갠지즈 강까지 진군했고, 심지어 나일 강의 발원지를 찾기 위해 원정대를 보내기까지 했다. 323년 그가 죽으면서, 그는 세상에 존재했던 가장 위대한 장군이자 제국건설가로 평가받았다. 심지어 거의 24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는 이러한 그의 업적에 필적할 만한 사람은 대여섯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알렉산더 제국에서 진정으로 중요하게 받아들여야 할 점은, 최초로 다른 문화권 사이의 자유로운 사상 교환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대부분의 지도자와는 달리, 알렉산더는 정복민의 사상에 대해 수용적인 태도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 정치 구조로부터 배운 생각들을 그의 제국에 도입했다. 한편, 그리스의 미술은 인도의 미술에 영향을 주었다. 33살의 이른 나이로 병들어 죽기 전에, 알렉산더는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란 도시도 세웠는데, 여기에 있는 거대한 도서관은 천년동안 존재했으며, 알랙산드리아는 세계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해갔다.
★ 14. 아소카의 계몽군주 270BC
321BC. 찬드라굽타가 마우리아 왕조를 세움.
300BC.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가 활동함.
300BC. 선사 에스키모족인 오크빅족의 문화가 알라스카에서 발달
300BC. 사마리아인이 유럽쪽 러시아에서 스키타이인들 이후에 나타남.
290BC. 사비느인이 로마 시민으로 편입함.
280BC. 세계 7대 불가사의중 하나인 페러스 등대가 알렉산드리아에 건설.
273BC. 로마와 동맹군은 에트루리아의 카에레市를 정복.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 사람들이 집단이나 무리를 형성하고 있을 때, 한 인물이 지도자로 나타났다. 그는 우리가 리더쉽이라고 일컫는, 지력과 힘의 조화가 두드러졌기에 사람들을 이끌 수 있었다. 유랑의 무리가 돌아다니는 것을 멈추고 도시를 건설함에 따라, 지도자는 보다 전능한 존재가 되어가면서, 피치자들로부터 분리되어갔다. 대부분의 통치자들은 신성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예를 들어 이집트에서는 파라오가 심지어 신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했다. 왕의 권위는 막대한 것이었고 왕은 포고를 통한 전형적인 방식으로 통치하였다. 왕이 말한 것은 그 나라의 법이 되었다. 어떤 통치자들은 자애로왔으며, 어떤 통치자들은 횡포한 잔인함을 보였으나 대부분의 왕들은 철권통치를 하였다.
인도에서는 아소카(?-232BC)라는 이름의 왕이 살았는데, 그는 BC 273년 부터 232년 까지 마가다라는 왕국을 다스렸다. 그의 제국은 마침내, 현재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쉬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인도지역의 대부분을(남쪽 끝은 제외하고) 포함하게 되었다. BC 261년에 그의 군대는 200,000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낸, 유난히 끔찍했던 전쟁에서 말링가스를 쳐부쉈다. 공포와 고통을 경험한 아소카 왕은 소름이 끼쳐서, 이러한 댓가를 치루고서는 어떠한 군사적 승리도 의미가 없다는 것을 豁닫고, 불교로 개종해서 국가정책으로서의 군사정복을 포기했다. 그는 동물과 인간의 희생제물을 금지하고, 그의 군대를 오직 방어 상태로만 유지했다.
그러나 공격적인 대외정책의 폭력성에 대한 단순한 조치를 넘어서서, 아소카는 국내 정책을 다시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공공 사업 계획과 그가 다스리는 백성의 복지에 기여할 제도를 만드는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소카는 양심적인, 아마도 세상에서 최초로 등장한 참된 ぢ계몽っ군주였다.
★ 15.ぢ최초의 황제っ가 이룬 중국 통일 221 BC
264BC. 로마에서 검투사 결투가 행해지기 시작.
250BC. 아소카왕은 불교를 국교로 선포.
240BC.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 둘레를 계산해냈다.
239BC. 헬리혜성의 출현이 최초로 기록되었다.
221BC. 필립 5세가 마케도니아의 왕이 되었다.
215BC. 만리장성의 건설이 시작됨.
로마제국의 힘이 최고조에 달하기 전후의 유럽의 상황처럼, 중국은 서로 경쟁적인 관계에 놓인 군주들에 의해 다스려지는, 정치적으로 다양한 봉건적 도시 국가들의 집합체였다. 이러한 나라들은 주나라에 나타나 널리 퍼진 공공 문화에 의해 서로 공통된 양상을 보일 뿐이었는데, 이 주나라는 BC 770년 이후 양쯔강 유역에 존재했던 것으로, 지속적인 문화적 영향을-정치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후 중국에 미쳤다.
아마도 이 시기-그리고 그 이후에도- 중국 문화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영향은 라틴어식 이름으로 Confucius라고 잘 알려진 철학자 공자(551-479BC)의 글들이었을 것이다. 그의 철학은 아직도 5,200,000 명의 사람들에게 종교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그의 철학은 개인은 물론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조화로운 사회 질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가 죽은 후, 중국은 전국(戰國)시대(약 403-221BC)로 정치적으로 분열된다. 이 시기는 진(秦)나라(221-210BC)가 들어서면서 끝나게 되는데, 진나라의 통치기에-ぢ최초의 황제っ로 알려진- 강력한 시황제(259-210BC)가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중앙집권화된 정부 형태를 도입했고, 호구조사를 실시했으며, 화폐와 문자, 법률, 도량형을 통일했다. 그는 또한 만리장성을 쌓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19세기 중반 이전까지 인간 손에 의해 만들어진 가장 큰 건축 사업이었다. 한편으로 시황제는 유교를 근절시키려고 애쓴 권위주의적인 독재자로 불리는데, 여기에 대한 반대에 부딛쳐서 그는 부분적으로만 성공을 거두었을 뿐이었다.
시황제의 통치 이후 한나라가 등장하였는데, 한나라는 시황제의 중앙집권제로 인해 많은 이득을 보았지만 시황제가 금지시켰던 유교를 점진적으로 다시받아들였다. 한나라는 중국 특유의 관료(만다린)에 의한 사회적, 정치적 체제를 확립했는데, 이것은 1949년 공산당이 권력을 잡기전까지, 심지어 만주왕조인 청나라(1644-1922)에서도 중국 사회의 기반인 채로 이어져 내려왔다. 한나라 자체는 400년이 넘게 220AD까지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예술과 과학-문학과 그림에서부터 천문학과 수학에 이르기까지-이 폭넓게 번성하였다.
★ 16. 초강대국으로서의 로마의 흥기 202BC
241BC. 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남.
238BC. 로마는 카르타고로부터 사르디니아와 코르시카를 포획함.
219BC. 한니발은 스페인의 사룬툼에 있던 로마인을 공격
218BC.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를 침공함.
218BC. 로마는 스페인에 전쟁선포. 2차 포에니 전쟁 발발
212BC.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로마군에 의해 살해당함.
210BC. 진시황 사망. 실물크기의 군인 모형과 함께 매장.
206BC. 로마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스페인에서 카르타고에 승리.
202BC. 진(秦)나라 다음으로 한나라가 유방에 의해 건국.
201BC. 마리니사는 북아프리카에 누미디아 왕조를 세움.
200BC. 고올人들은 파리에 정착지를 세움.
200BC. 페루의 나즈카 문명이 번창하기 시작.
로마는 BC 753 년에 세워졌다. 그로부터 500년에 걸쳐 로마인들은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만 지배적인 정치세력이었으나, 그 이후에 이르러서 이탈리아 반도 넘어서까지 그들의 영향력을 주장하게 되었다. 로마의 세력권이 이탈리아 밖으로 퍼져나감에 따라 로마는 이전에 접하지 못한 보다 심각한 경쟁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리스가 동쪽으로 문명의 요람과 페르시아 제국 너머로 눈을 돌린 반면, 로마는 서쪽으로 눈을 돌렸는데 거기에는 서부 지중해의 강력한 나라, BC 814년 페니키아인에 의해서 세워진 카르타고가 있었다. 로마는 그 세력권을 넓혀감에 따라 카르타고와 충돌하게 되었으며, 이 세력투쟁의 승리자가 서유럽과 궁극적으로는 전 지중해 지역의 지배권을 장악하게 될 것이었다. 이러한 경쟁은 포에니 전쟁(Punic Wars)의 과정을 통해 결판났는데, 영어로 "퓨닉 punic"이란 말은 카르타고인을 의미하는 라틴어 푸니쿠스 Punicus로부터 나온 것으로 이 말 자체도 페니키아인을 나타내는 그리스 말인 포에닉스 Phoenix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제1차 포에니 전쟁(264-241 BC)은 대부분 바다에서 벌어졌으며,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제 2차 포에니 전쟁(219-201BC)은 전사에 있어서 가장 놀라운 군사 작전중 하나를 포함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246-142BC)은 219년 현재의 스페인 지역에서 로마의 동맹군을 격파하고, 로마로 쳐들어가기 시작했다. 한편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237-183 BC)는 한니발의 의표를 찔러서, 한니발이 로마 문턱에 다다랐을때 스페인을 재탈환하고 카르타고 본토를 정복하러 떠났다. 한니발은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카르타고로 되돌아왔으나, BC 202년 10월 19일 카마 평원에서 스키피오에게 패했다.
제 3차 포에니 전쟁(149-146 BC)은 용두사미의 꼴로 끝나버렸는데, 이 기간에 카르타고는 로마에 의해 정복되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바로 BC 202년 자마의 전투에서 거둔 로마의 승리로부터, 이후 6세기동안 절대적 통치를 계속하게 될 로마제국의 패권이 시작되었다.
★ 17.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로마통치
185BC. 마우리아 왕조는 브리하드나타의 암살로 멸망함.
184BC. 카토는 로마의 감찰관이 됨.
168BC. 로마는 페루세수스왕을 격파하고 마케도니아 왕조를 멸망시킴.
146BC. 3차 포에니 전쟁 발발
146BC. 로마는 그리스의 아가야 동맹을 격파함.
140BC. 한 무제가 즉위
127BC. 프톨레미는 천문학 책인 알마게스트를 서술
111BC. 한나라는 안남국을 세움.
89BC. 로마의 시민권은 전 이탈리아로 확대.
80BC. 술라는 에트루리아를 공격. 에트루리아는 멸망
73BC. 스파르타쿠스의 노예반란 발생.
이야기, 시, 그리고 세익스피어의 연극무대에서 불멸의 존재가 되어버린 율리우스 카이사르(102-44BC)는, 비록 그가 살아있을 당시 로마가 아직 공화정이었고, 황제의 관직이 그가 죽은 후에까지도 만들어지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형적인 로마 황제로 일컬어진다.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쳐부수면서, 로마는 자신이 가능한 한 많은 세상을 정복하고 통치할 ぢ명백한 운명っ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게 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이 명백한 운명을 깨달았던 로마의 지도자였다.
귀족가문의 아들인 카이사르는 로마군에 입대하여, 용맹을 나타내는 가장 높은 메달인 떡갈나뭇잎관(시민의 영관)을 받으며 두드러진 활약을 보였다. 로마에 돌아와서는 정계에 뛰어들어 34살에 국가 재무관이 되었으며, 9년 후에는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많은 중요한 개혁을 도입했으며, 많은 인기를 얻었으나, 그의 눈은 항상 절대 통치자의 단독 지배라는 이상에 명확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카이사르는 그가 제국을 넓히기 위해 성공적인 군사 원정을 이끎으로써 그의 인기를 높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군대를 지휘해서 BC 55년에는 골지방(지금의 프랑스)을 정복하는데성공했다. 이후 2년동안의 과정에서 그는 브리튼 섬을 침략해서 예속시켰고, 게르만족과 싸우기 위해 라인강을 건넜다. 그는 강력한 영웅이 되어서 로마로 돌아왔으나, 예루살램을 복속시키고 수석집정관의 자리에 있었던 폼페이우스(106-48 BC) 와의 정치적 마찰을 빚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집정관직을 요구했으나, 그것이 그에 의해서 거부되었다. 로마에서는 법에 의해서 장군들은 그들의 군대를 로마시내 안으로 데리고 들어 올 수 없었고, 루비콘 강 북쪽에 군대가 머물도록 되어 있었는데, BC 50년, 카이사르는 법을 무시하고, 쿠테타를 일으키기 위해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들어왔다. 그는 폼페이우스를 쫓아내고, 공화정을 없애버렸으며, 그와함께 그 자신이 그가 항상 계획해 온 것 처럼 절대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BC 44년 3월 15일 불만을 품은 동료들에 의해 암살당할 때 까지 계속 로마를 통치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의 -사실상, 유럽의-역사의 진로를 바꾸었다. 로마 그 자체내에서는 그는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사실상의 황제직을 만들었으며, 이 황제직은 그의 조카 옥타비아누스(63BC-14AD)가 그의 숙부의 죽음으로부터 14년 후 권력을 잡았을 때 공식적으로 만들어졌다. 카이사르가 정복을 시작했을때, 로마는 지중해의 강대국이었으나, 그가 죽을 무렵에서는 유럽 최초의 초강대국-세계 최초의 초강대국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이 되어있었다.
★ 18.로마제국의 탄생 BC30
37BC. 고구려 건국.
30BC. 이집트는 로마에 편입. 프롤레마이오스 왕조의 종말.
28BC. 안드라祖 북인도 통일.
27BC. 옥타비아누스는 최초의 로마황제로 즉위.
19BC. 로마는 고올지방의 님므에 퐁뒤 가르를 세움.
19BC. 로마는 이베리아 반도의 정벌을 끝마침.
18BC. 백제왕국 세워짐.
BC 44년 암살당하기 전에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사실상 제국이었던 당시 로마의 국경을 확장시켰고, 로마 최초의 절대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で로마 제국と은 카이사르의 조카 옥타비아누스(63BC-14AD)가 BC 27년 권력을 잡을 때 까지 공식적으로 선포되지 못했다.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삼촌의 지지자와 경쟁자 양측 모두로부터 반대에 부딪치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마르쿠스 레피두스(?-13BC)와 카이사르가 신뢰하던 부관이었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83-30BC)와 함께 삼두정치에 참여하여 통치한다는 데 동의했다. 이 삼두정은 이후, 공화국의 부활을 바랬던, 카이사르의 암살 공모자 중 두사람인 가이우스 카시우스(?-42BC)와 마르쿠스 야니우스 브루투스(85-42BC)에 의해 야기된 내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들을 물리친 후에 삼두정은 그들의 통치권을 지역에 따라 나누었는데, 옥타비아누스는 유럽, 레피두스는 아프리카를,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집트에서는 그 지역의 군주가 로마의 통치권 아래 복속되어 있었는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69-30 BC)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한 국제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권좌를 세웠다. 그는 그의 세 아들을 그의 후계자로서 지명했으며, 종종 그의 아내에게 사치스런 선물을 했다. 이러한 소문이 옥타비아누스에게까지 도달하자, 옥타비아누스는 격앙되어 전쟁을 선포했다. 양측은 BC 31년 악티움 전투에서 만났고 이곳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군대는 패배했다. 그들은 그들 군대의 패잔병들과 함께 이집트로 도망갔으나, 옥타비아누스가 바로 가까이서 추적하고있었다. 그들의 목표 달성에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는 BC 30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살을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 자신을 로마 황제라고 칭하고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택했다.
악티움은 로마와 세계사에 있어서 전환점이다. 만약 옥타비아누스가 졌더라면 세계 세력의 중심은 로마에서 알렉산드리아로 옮겨갔을 것이며, 제국의 성격도 극적으로 바뀌었을 것이며, 이것은 옥타비아누스 치하에서 이룩된 잘 훈련되고 중앙집권화된 군주정보다는, 알렉산더 대왕이 그의 제국으로 머릿속에 그렸던 것과 같은 세계의 다양한 이념이 혼합된 세계주의적 제국이 되었을 것이다. 라틴어와 로마자는 전 유럽에 있어서 기본적인 언어와 글자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크리스트교도 실제로 그러했던 것 처럼 성공적으로 널리 확산되지 못했었을 것이다.
로마는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되기 이전에 제국이 되었으나 로마를 로마 제국이라고 공포한것은 바로 그였고,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가 ぢ그당시의 전세계っ를 지배하고 있을 때의 시기를 통치하고 있던 것도 바로 그였다. 그렇게 로마의 황금기가 시작되었다. 한명의 강력한 지도자 아래 통일됨으로써 제국은 문화적으로 상업적으로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다. 예술과 문학은 로마의 도시에서 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고, 로마시와 제국 전체를 통틀어서 도로, 다리, 수로, 원형경기장, 아파트 그리고 공공건물을 건설하기 위해 거대한 건축 계획이 착수되었다.
★ 19. 예수 크리스트의 생애. (4BC-29AD)
6BC.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탄생
9 왕망이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신(新)을 세움.
14 아우구스투스 죽음. 티베리우스가 왕위를 상속함.
25 後漢이 세워짐.
45 쿠산왕조 성립
79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 폼페이시 묻힘.
184 황건적의 난
201 일본의 여제 징고가 섭정으로서 일본을 통치함.
220 후한 멸망. 삼국시대 시작
326 사산조 페르시아 성립
당시 로마의 팔래스타인 땅이었던 베들레햄에서 BC 4년에 태어난 예수 크리스트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전파된 종교를 창시했다. 오늘날 16억의 크리스트교도가 세상에 있으며, 이는 세계 인구의 3분의 1에 약간 못미치는 수이다. 예수가 태어났을 당시의 유태인의 전통은 단지 한명의 신이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고대 종교들에 비해 독특했다. 나아가 유태인들은 야훼라고 알려진 그들의 신이, 모세가 그들을 BC 1250년경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해방시켰던 것 처럼 로마의 통치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메시아, 또는 구원자를 보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크리스트교도들은 예수가 메시아였을뿐만 아니라, 그들이 신의 은총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영원한 낙원 혹은 천국으로 갈 수 있도록, 지상의 인간들을 위해서 죽기위해 보내진 신의 아들이라는 것도 믿는다.크리스트교의 추종자들에게 예수 크리스트의 탄생은 셰계사에 있어서 일대 획기적인 사건인 것이다.
크리스트교도들은 BC 4세기 이전 시대의 유태교의 경전들을 받아들였고, 이것들은 크리스트교 성경의 구약이 되었다. 두 종교는 유태인들이 예수 크리스트가 메시아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바로 이 점에서 갈라선다. 크리스트교의 신약에는 그의 제자-주로 마테오, 마르코, 루카, 요한등-들의 기록에 따라, 크리스트 자신의 가르침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는 로마 팔레스타인 지방의 나사렛 출신의 마리아와 그의 남편인 젊은 목수 요셉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교회 신자들은 예수가 문자 그대로 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요셉이 단지 예수의 양아버지였다고 믿는다. 예수는 그가 29살 되던 해에 가르침을 시작하였고, 예수를 신의 아들, 메시아와 동일시하던 예언자인 그의 사촌 요한(세례자 요한 5BC- 30AD)에 의해 그 지역의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예수의 가장 잘 알려진 메시지인 산상설교는 평화, 정직, 소박, 인내, 온화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도덕률에 대한 크리스트교 신앙의 본질을 요약하고 있다.
그가 팔레스타인에서 설교하던 3,4년동안 예수는 많은 기적을 보이고, 많은 추종자를 모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카리스마적인 젊은 설교자를 그들 권위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던 사람들중 특히 관계(官界)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를 적대시 하게 되었다. AD 29년 혹은 30년경, 예수는 예루살램에서 체포되어 로마 총독 폰티우스 필라토에게 사형을 선고받았다. 예수는 골고다라고 불리는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밖혀 죽었다.
크리스트교 신앙에 따르면, 그의 몸-영혼과 일체된-은 3일 후 죽음으로 부터 부활했고, 예수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이후 40일에 걸쳐 종종 나타났다. 그 후 이들 추종자들은 그의 가르침을 로마 제국과, 그 바깥 세계의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 20.콘스탄티누스의 크리스트교 공인 AD 325년
313 고구려, 한사군을 몰아냄
316 5호 16국 시대가 시작
320 인도에 굽타왕조 성립
330 로마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천도. 비잔틴 제국의 시작.
350 훈족이 페르시아와 인도에 침공
372 불교가 고구려에 전파됨.
407 최초의 몽고제국이 아바르족에 의해 세워짐.
452 베니스가 훈족에 쫓겨온 사람들에 의해 세워짐.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뒤 3 세기 후, 로마제국은 이전의 어떠한 사회도 누려보지 못한 번영을 누렸다. 때때로 일어나는 국경지방의 분쟁만 빼고는, 로마제국은 안정되어 있었으며, 그 군대의 힘도 막강했다. 즉,팍스 로마나(Pax Romana)가 세상을 지배했다.
크리스트교가 성장하고 확장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 질서와 상대적인 평화의 분위기를 배경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전의 종교들은 문화의 형태로 세대를 지나면서 계승되어 왔었는데, 이와는 달리 크리스트교는 활발하게 다른 종교들을 변화시키려고 했다. 그것은 중동지방에 뿌리를 두고서, 그리스와 이집트로 퍼져나갔다. 크리스트교 선교사들, 특히 크리스트교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예수의 제자 베드로(?-67AD)와 현재는 성 바오로로 알려진 타르수스의 사울이 새로운 신앙의 가르침을 제국의 모든 지역, 심지어 로마 본토에까지 전파했다.
처음에는, 크리스트교는 로마인들에 의해 관대하게 받아들여졌으나, 이것이 점차 보다 널리 퍼져나가고, 로마제국의 통합에 위협으로 받아들여짐에 따라서, 황제들은 크리스트교도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로마의 콜롯세움에서 로마 관중들의 즐거움을 위해 사자들에게 던져진 크리스트교인들의 비참한 장면들은 눈에 익은 광경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크리스트교 교회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이 크리스트교는 처음에는 지하운동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했고, 4세기가 시작할 무렵에 가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280-337AD)자신이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였다. 크리스트교는 콘스탄티누스가 AD 306년에 황제가 되기 전까지는 박해의 대상이었으나, 그의 통치 아래에서, 그것이 수용되고 장려되기 까지 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심지어 동,서방 교회간의 교리에 관한 주요한 내부 논쟁을 중재하기까지 했다. 그는 AD 325년 에 니케아에서 대규모 공의회를 주최하여 두 교회를 대표하는 주교를 초대했는데, 이 공의회에서는 그들의 이견이 해소되었다. 이 모임에서 작성된, 양 교회가 모두 동의한 니케아 강령에는 기본적인 크리스트교의 신앙들이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는 콘스탄티누스는 크리스트교가 외부의 탄압이나 내부의 분쟁으로 몰락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해서, 크리스트교를 사실상 온 제국을 통해 국교로서 만들어버렸다. 콘스탄티누스는 크리스트교를 보존햇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로마의 공식적인 종교로까지 만듦으로써, 이것이 유럽에서 지배적인 종교로 발전 할 수 있는 모든 기본적인 중요한 조치를 다 취했다. 그가 만약 이러한 일들을 하지 않았더라면, 유럽의 문화사는 아주 달라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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