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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마겟돈 전쟁의 실체

하나님아들 2012. 9. 22. 00:29


아마겟돈 전쟁:

 

 

이 전쟁은 계 16:14에서 언급되었듯이,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에 나타날 전쟁이다.

이 전쟁의 구약적 배경은 배교한 언약 백성을 벌하는 “야웨의 날” 사고와 열방을 예루살렘으로 모아 저들을 심판하는 “열방 심판의 날” (욜 3장, 겔 38-39장, 슥 12, 14장) 사고가 합쳐진 것이다. 구약에서 이 두 사고는 사실 분명하게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서로 연관되어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배교한 언약 백성과 교회를 대적한 열방을 함께 모아 심판하는 날이다.

 

 

구약에서 열방이 모여 예루살렘을 침공하나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저들을 멸하시고 이스라엘 자기 백성을 건지시는 전쟁의 가장 좋은 모본이 히스기야 왕 때 예루살렘을 침공했던 앗시리아의 산헤립 대왕의 군대의 괴멸과 퇴각 사건이다 (주전 701년; 사 36-39장, 왕하 18:13-19장). 어쩌면 시 46, 48편과 같은 시온의 노래는 이때의 사건을 배경으로 작사된 것일 것이다. 이 산헤립 침공과 패퇴 사건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의 분기점을 이룰 정도로 신학사상에 큰 영향을 남겼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전에도 미디안 족속의 침공과 패퇴 (삿 7장; 사 9:4), 블레셋의 공격과 패퇴 (삼상 7:7이하) 사건들 혹은 그 이전에 이집트 바로 군대의 홍해 수장 사건도 (출 14-15장) 원수의 공격과 하나님의 개입에 의한 초자연적인 패배의 사고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혔을 것이다. 욜 3장의 여호사밧 골짜기에서의 열방의 심판이나 겔 38-39장 곡과 마곡의 전쟁, 슥 14장의 열방의 예루살렘 침공과 패배 등은 모두 동일한 종말적 대 전쟁을 예고하는데, 우리는 여기 아마겟돈 전쟁이 바로 구약의 그런 종말 대전쟁의 배경이라 본다.

 

 

그런데 이 아마겟돈 전쟁은 통속 신학에 의하면, 3차 세계 대전이라 하기도 하고, 소련이 붕괴되기 전에는 소련과 중공군이 연합해서 2억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중동 이스라엘을 침공해 들어오리라는 식의 시나리오를 가정하기도 하였다. 원자탄이나 수소탄 혹은 항공모함이나 스텔스 전투기 등 최첨단 무기들이 동원되고 참혹한 살상이 일어나리라고 묘사하거나 그 아마겟돈 전쟁은 적그리스도가 7년 대환난 기간에 일으키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7년 대 환란이란 사고는 비 성경적이다. 단 7:24-27에 근거하지만, 주님의 초림으로 다 완성된 말씀으로 해석함이 적절하기 때문이다. 또한 최첨단 무기들의 집합에 의한 대량 살상의 전쟁이란 사고는 환상 문학인 계시록의 묘사에 부적절한 해석이다. 지상의 무기들이 연관되는 전쟁이랄 것도 없이 공중에서 백마 타고 나타나신 주님이 그 입의 검으로 (계 19:21) 원수들을 단 번에 쳐서 멸하는 영적이고 초자연적인 전쟁이다.

 

 

그리고 저 중동의 이스라엘의 므깃도를 (아마겟돈) 전쟁터로 하리라는 문자적 이해도 그릇되었다. 오늘날과 같이 첨단 무기들이 발전한 시대에 2억의 군대가 그런 좁은 곳으로 집결하는 것도 비현실적일 뿐 아니라, 오늘날 전쟁은 컴퓨터의 버튼을 누르는 디지털 전쟁으로 군대의 수도 크게 축소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지 아니한가?

 

 

중요한 것은 어떤 문자적인 3차 대전을 여기 아마겟돈 전쟁 묘사와 연관시킬 것이 아니라, 계시록이 상징성을 생명으로 하는 묵시문헌이란 점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 장르를 무시하고 문자적인 해석을 가하는 것은 해석의 기본 원리를 무시한 처사이다. 문자적인 지상 천년 왕국이란 것도 그런 상징적 해석 원리에 배치된다.

 

심콕스는 (W. H. Simcox) 계 19:21의 말씀을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으매)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승리는 순전히 영적인 수단을 통해 얻어지는 것으로 분명하게 언급되었다. 따라서 멸망할 세상 군대들이 실제 군사적 동맹군이라 이해할 수가 없다. 오히려, 세상 세력의 동맹은 적그리스도의 지도하에 주로 지적, 영적 동맹일 가능성이 크다.

 

 

연세 중앙교회 윤석전 목사는 또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으매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되더라고 말씀하는 계 16:12을 근거로 유브라데 강물이 지금 말라가고 있어 3차 대전 곧 아마겟돈 전쟁이 눈앞에 닥쳐왔다고 설교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2012년 4월 이후 어느 순간에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무기 제조소를 폭격함으로 아마겟돈 전쟁이 발발한다고도 설교했다.

 

 

 

아마겟돈 전쟁을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에서 촉발되리라는 설정 자체도 비 성경적이다. 계시록에서나 구약에서 종말 전쟁을 예고할 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회와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교회를 대적하는 세상 나라 사이의 전쟁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아닌 다른 신을 섬기는 이란하고 벌이는 전쟁이 어떻게 아마겟돈 전쟁이 될 것인가? 미국과 이라크 사이의 전쟁이나, 이스라엘과 이란의 전쟁이나 (만약 벌어진다면 말이다) 다 세속 국가들 사이의 전쟁일 뿐이지 교회와 세상 나라 사이의 전쟁은 못된다. 오늘날 교회는 한 국가 단위로 존재하지 않고, 세계 여러 국가들에 흩어져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특정 국가가 다른 국가와 벌이는 전쟁을 아마겟돈 전쟁이라고 말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아마겟돈 전쟁이 세상 나라들의 교회에 대한 공격이라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영적인 성격의 것임이 분명하다.

 

 

앞에 지적한 그런 식으로 환상 문학에 제시된 영적 그림을 현실 세계와 연결시켜 해석하는 일은 설교자의 성경 해석에 대한 무지를 드러낼 뿐 아니라, 설교자의 말이 빗나간 후에는 사람들에게 성경 예언이 그릇되었다 혹은 기독교는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는 잘못된 오해를 야기시킬 것이다.

 

 

1980년대 조용기 목사는 그의 한창 전성기 시절에 설교나 책들을 통해서, 마 24:32이하 말씀 곧

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3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는 말씀을 이스라엘의 독립선포한 1948년을 무화가 나무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낸 해로 보고,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는 말씀에서 한 세대를 50년으로 쳐서 1998년을 종말의 해라고 증거했었지 않았던가? 그의 그릇된 종말론 해석으로 말미암아 기독교나 교회가 얼마나 욕을 먹었고 또한 먹고 있는가?

 

무화과 열매

 

무화과 나무가 이스라엘의 국화라고 (國花) 하면서, 무화과 나무를 이스라엘과 연관시키고, 그것의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이 무성하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한 해인 1948년이라고 이해하고, 한 세대를 50년으로 계산하여 1998년이 인류 종말의 해라고 설교하는 그런 배짱이 무슨 배짱인가?

한 세대를 50년으로 했다가 틀리고 보니, 오늘날에는 한 세대가 70년이라고 하거나, 80년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면 인류의 종말은 2018년이나 2028년이 될 것이다. 지금이 2012년이니 인류의 파멸은 불과 6년이나 16년 남은 셈이다. 이런 식으로 계산했다가, 또 틀리면 100년으로 늘이게 될지 모른다. 마 24장에서 "이 세대가 다 가기 전에 다 이루리라"는 말씀은 주님 당 세대에 이루어진다는 말씀인데, 마 24장이 예고한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파멸과 연관된다. 물론 마 24장은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파멸과 재림 때의 무서운 환란을 병행시켜 제시하고 있다. 구약 선지자들이 멀리 바라볼 때, 시간적으로 동떨어진 두 사건도 마치 동시적으로 일어나는 양 예언한 소위 예언적 원근축소법을 (prophetic foreshortening) 사용했듯이. 

또한 무화과 나무가 이스라엘의 국화(國花)라는 것은 어디서 나온 생각일까? 성경시대에 국화 개념이 있었을 리 만무하고, 무화과를 이스라엘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자체가 근거가 없다. 더구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이스라엘"을 예언의 기준으로 삼는 자체도 마 24장 해석에 적절하지 않다.

참고로 오늘날 한국의 국화가 무궁화라면, 오늘날 이스라엘의 국화는 시클라멘이다 (cyclamen).

 

  

시클라멘 (Cyclamen)

 

여기 마 24:32이하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은 무화과 나무의 비유라 불리거니와, 무화과 나무 비유의 요지는 무화과 나무의 가지나 잎사귀의 변화를 통해서 여름이 온 것을 짐작하여 알듯이, 주님이 지적하신 그 징조들이 나타나면, 그것들을 보는 사람들은 아, 종말이 가까왔구나! 하고 알게 되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무화과 나무를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한 방편으로 사용하신 것은 아니다.

 

 

7년 대환난이니 문자적 천년간의 천년 지상 왕국이니 하는 사고는 세대주의 종말론에서 크게 강조되는데 세대주의적 종말론은 사실 교회사 전체를 통해 볼 때, 비교적 근년에 발생한 (창시자 John Nelson Darby 1800 – 1882) 사생아적 사상에 불과하다. 즉 전통적인 정통 신학사상과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무천년설적 입장을 견지해 왔고, 그것이 어거스틴, 루터, 칼빈, 로마 카톨릭 교회나 루터교, 장로교 등의 정통신학의 주류적 종말론이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에 세대주의 종말론이 널리 퍼진 이유는 그런 사상을 가진 초대 한국 선교사들 밑에서 배운 한국의 대표적 교단인 장로교의 길선주, 박형룡, 박윤선 같은 이의 조직신학이나 주석 등을 통해 세대주의 사고가 널리 유포되었기 때문이다.

출처 : 주님과 얼굴 맞댄 만남
글쓴이 : 중일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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