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죽음 / 안토니 A. 후크마
우리는 지금 육체의 죽음에 관한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특별히 죄와 구속에 관련되어 있는 육체의 죽음 문제이다. 우리가 직면하게 된 중대한 문제는 죄와 죽음과의 관계성이다. 죽음이 죄의 결과로서 세상에 들어 왔는가? 혹은 죄가 없었는데도 죽음이 존재해 왔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중요한 구별을 지어야 한다. 우리가 죄와 죽음 사이에 연관된 문제를 거론하게 될 때 우리는 동식물 세계의 죽음이 아니라 사람의 생애와 관련된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게 된다. 인간이 죄에 빠지기 전에도 동물과 식물 세계에는 죽음이 필연적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수 천 년 전에 사라져버린 많은 종류의 식물과 동물들의 화석들을 갖고 있다. 인간이 지구상에 나타나기 훨씬 이전에 이런 종(種)들의 대부분이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더욱이 죽음이란 것은 오늘날 우리가 그것들을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많은 식물들과 동물들의 존재양식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다른 동물들을 잡아 먹고 살아가는 육식동물들도 있고 동물들이나 공충들에 의해 죽게 되는 식물들과 나무들도 있다. 살아 있는 식물들의 세포들 중 많은 부분이 죽은 세포들이며 이 죽은 세포들은 매우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만일 우리들이 오늘날의 자연은 모든 점에서 인간의 타락 이전의 모습과는 다르다고 주장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아마 십중 팔구 타락 이전에도 식물과 동물의 세계에 죽음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쿠일만(L. W. Kuilman) 교수는 『기독교 백과사전』의 제2판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하나의 생물학적 현상으로서의 죽음이 인간 타락 이전에도 있었는지의 여부는 고대 동식물학에 의해 제공된 증거의 토대 위에서 살펴볼 때 긍정적으로 답변되어진다. 이런 영역에 관한 조사연구를 통해(고대 동식물의 화석자료들) 우리는 생물학적 죽음이 인간이 창조되기 이미 오래 전에 일어났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런 종류의 생물학적 죽음은 최초의 인간 한 쌍의 죄로 인해 그 형벌로서 세상에 들어온 죽음과 동일시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죽음 문제로 다시 되돌아왔다. 그렇다면 인간의 죽음은 죄의 결과인가? 인간은 그가 죄에 떨어지지 않았더라도 죽음을 맛보게 되었을까?
일반적으로 로마 천주교나 신교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죽음이 죄의 결과의 하나라고 가르쳐 왔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기독교의 스승들은 다르게 가르쳤다. AD 5세기경 로마에서 가르쳤던 영국인 수도승인 펠라기우스(Pelagius)는 아담의 죄가 세상에 죽음을 가져왔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펠라기안 운동의 지도자가 된 펠라기우스의 제자인 셀레티우스(Celetius)는 아담은 유한적으로 창조되었고 그가 죄를 짓든 안 짓든간에 죽음을 맛보게 되었다고 가르쳤다. 종교개혁 시대의 소시니안주의자들(Socinians)은 셀레티우스와 비슷한 견해를 주장했다.
최근에 칼 바르트(Karl Barth)도 사람의 삶에 있어서 죽음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사실상 바르트는 인간의 죽음이 인간의 죄와 죄책과 관련되어지며 따라서 죽음은 인간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의 표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죽음과 죄의 관련성에 관한 바르트의 최종적 단언은 아니다. 그는 죽음의 심판이란 측면과 자연적 죽음의 측면을 구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죽음이란 인간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의해 결정되어지고 작정되어진 것이며 이런 식으로 죽음이란 옳고 선한 것이다. 또한 시간 속에 있는 인간의 존재는 유한하며 따라서 인간 자신은 필연적으로 죽을 유한한 존재이다...그러므로 본질상 죽음이란 부자연스런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원래적으로 가도록 예정된 삶의 과정을 향해 달리고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처럼 인간의 삶은 기울고 시들어가며 따라서 앞을 향한 제한선을 갖고 있는 것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인간의 죽음은 인간이 죄에 떨어진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한 면인 것이다. 하나님은 태초로부터 땅 위에 인간의 생명은 끝을 갖도록 계획하셨다. 사실상 바르트는 인간이 죄인이기에 인간의 죽음은 지금 인간 위에 내려지는 하나님의 심판의 한 표징임을 인정하고 있다. 바르트의 사상에 있어서 인간은 무(無)존재로부터 나아와 제한된 해수를 땅 위에서 지내다가 다시 무존재 속으로 되돌아 가도록 하나님에 의해 예정된 존재이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은 많은 논란들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만일 인간이 그의 타락과 상관없이 죽어야만 한다면 왜 성경은 철저하게 죄와 죽음을 함께 연결시키고 있는가? 만일 죽음이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일부분이며 인간의 자연적 귀절이라면 왜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죽으셔야만 했는가? 더욱이 하나님의 처음부터 계획했던 바와 같이 죽음이 인간의 종국이라면, 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셨을까? 그리고 성경은 왜 신자와 불신자가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가? 셀레티우스, 칼바르트 그리고 그 밖에 여러 사람들의 견해와는 달리 우리는 인간 역사에 있어서 죽음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인간의 타락의 결과 중의 하나라고 주장해야 한다. 이제 성경적 증거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창세기 2:16~17을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성경 중에서 죽음에 관해 최초로 언급하고 있는 이 구절은 분명히 죄와 죽음과의 관계를 가르쳐주고 있다. 죽음은 금단의 열매를 먹는 데 대한 정벌로서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다. 사실상 본문에 사용될 히브리어 표현은(동사의 절대 부정형이 같은 동사의 미래형에 연결되어 나오는 형식) "너는 틀림없이 죽게 될 것이다"라는 뜻이다.
"네가 그것을 먹는 그날에"라는 문구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이 말은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먹는 바로 그날에 죽게 될 것이라는 뜻인가? 몇몇 학자들은 하나님의 일반은총 때문에 사형선고의 즉각적인 집행이 연기되었다고 말하면서 "그날에"는 아담이 금단의 열매를 따 먹은 바로 그날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해석은 물론 가능하다. 그러나 또 다른 해석이 더욱 그럴듯해 보인다. 예를 들어 게할더스 보스는 " 네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이란 표현은 단순히 "내가 그것을 먹는 만큼 확실히"라는 뜻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관용구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있다.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열왕기상 2:37을 인용하고 있다. 이 구절은 솔로몬이 시므이에게 말하고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네가 나아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정녕히 죽임을 당하리라." 이러한 관용구의 또 다른 예가 출애굽기 10:28인데 이 구절은 바로가 모세에게 말하고 있는 내용이이다. "내 얼굴을 결코 다시 보지 말라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위에서 인용한 두 구절에서, "그날에" 라는 표현은 단순히 "정녕히, 확실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와 동일한 의미로 창세게 2:17의 표현을 이해한다면, "네가 이 과일을 먹는 바로 그날에 네가 죽으리라"는 뜻을 나타낸다기 보다는 오히려 "네가 이 과일을 먹는 만큼이나 확실히 너는 죽으리라"는 의미로 이해되어지는 편이 낫다는 결론이 된다. 이러한 해석의 토대 위에서 살펴보면 아담과 이브가 금단의 열매를 먹던 바로 그날에 육체의 죽음을 맛보지 않았다고 해서 별 문제가 야기되지는 않는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네가 정녕 죽으리라"는 표현은 어떠한가? 죽음에 대한 의미로 사용된 단어들은 매우 다양한 것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죽음이란 단어가 여기서는 어떤 의미로 쓰여졌는가? 히브리어 동사 muth의 일차적이고도 분명한 의미는 육체의 죽음이다. 인간의 죄의 결과인 저주와 연관되어 이 형벌이 언급되어 있을 경우, 이 죽음은 육체의 죽음을 뜻한다(창 3:19을 보라). 그러므로 창세기 2:17이 무엇을 의미하든간에 이 구절이 가르치고 있는 분명한 내용은 인간의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 육체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관해 우리가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아담이 죄를 지었든 안 지었든간에 그가 육체적인 죽음을 맛보게 되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의 나머지 부분들에 비추어 보아 창세기 2:17에서 위협되었던 죽음은 단순한 육체의 죽음 그 이상을 의미하고 있다고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그의 존재에 있어서 육체적인 면뿐 아니라 영적인 면도 갖고 있는 전인(全人)이다. 성경에 의하면 삶의 가장 깊은 의미는 하나님과의 교제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죽음의 가장 깊은 의미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창세기 2:17에서 위협적으로 선언된 죽음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영적 죽음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즉 하나님과 인간과의 교제의 분열을 의미한다. 아담의 죄 때문에 모든 인간은 지금 본질적으로 영적 죽음의 상태에 놓여 있다(참조. 엡 2:1-2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이와 같은 사상을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다. "사람은 죄를 짓게 될 때 새로운 상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상태는 죽음에 의해 지배되며 동시에 죽음에 의해 상징화 된다. 그것은 마치 영적 죽음과 육체적 죽음이 서로 별도의 분리될 것으로 생각되지 않고 전자가 후자를 포함하는 듯이 보인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죄를 범한 후에 그는 영적인 의미에서 즉시 죽었다. 그러므로 소위 우리가 말하는 영원한 죽음, 즉 하나님의 사랑스런 임재로부터 영원히 분리된 상태에 속하게 된 것이다. 동시에 인간은 육체의 죽음이 이제 피할 수 없는 상태 속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위에서 잠깐 언급된 창세기 3:19를 살펴보자.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들을 단순히 비록 죄가 이 땅에 들어오지 않았더라도 일어났을 법한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근거가 없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죄에 대해―첫째는 뱀에 대해(14-15절) 그리고 여자에 대해(16절), 끝으로 남자에 대해(17-19절)―하나님이 정하신 형벌을 기술하고 있는 구절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람의 육체가 어떤 운명을 갖게 될 것인가에 관한 예언이 나온다. 즉 육체는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음이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는데 자연적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죄로 인해 인간에게 임한 저주의 한 형태로서의 모습이다.
창세기 3:22-23의 말씀도 이 문제에 관해 도움을 주고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여기서도 우리는 죽음이 인간의 죄의 결과로서 묘사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금단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에 인간은 에덴 동산에 남게 되도록 허용되지 않았으며 또한 영원히 살지도 못하게 되었다. 비록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일과 영원히 살게 되는 일 사이의 관계가 분명히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인간은 그가 하나님께 대하여 죄를 지었기 때문에 마땅히 죽게 되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동시에 에덴 동산으로부터의 추방은 일종의 축복이었다. 왜냐하면 구속받지 못한 타락한 본성을 지니고 영원히 산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치유될 수 없는 저주의 연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죄와 죽음과의 필연적 관계성은 구약에서뿐만 아니라 신약에서도 가르쳐지고 있다. 로마서 5:12은 이 점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어떤 이들은 바울이 이곳에서 죽음과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생명을 대비시키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단지 영적인 죽음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울은 이 구절이 속해 있는 넓은 문맥(5:12-21) 속에서 묘사하고 있는 죽음이 영적 죽음을 포함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으로부터 육체의 죽음을 제외할 수는 없는 것이다. 확실히 육체의 죽음은 그 앞 절인 10절("우리가 그의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케 되었노라")과 그 후속절인 14절("사망이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왕노릇 하리니")에서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라는 말 속에는 분명히 육체의 죽음도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이 구절은 창세기 2:17의 메아리라고 할 수 있다.
로마서 8:10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했다. 11절("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이 분명히 입증하듯 10절의 몸은 육체적 몸을 의미한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바는 너희의 육체적 몸은 죽었다, 즉 육체는 육체 안에 죽음의 씨앗을 지니고 있고 결국 죽게 될 것이다. 바울은 덧붙여 강조하기를 '죄 때문에"라고 말하고 있다. 육체의 죽음은 죄의 결과라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 구절만 더 인용해 보기로 하자. 고린도전서 15:21은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여기서 육체의 부활을 논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그는 그리스도와 아담을 대조시키고 있다. "한 사람으로 인해 사망이 왔나니"라는 구절이 가리키고 있는 인물은 분명히 아담이다. 육체의 죽음이 육체의 부활과 대조되고 있으므로 육체적인 아담에 대조되어 육체를 지닌 주님이 나와 있다.
죽음과 죄와의 관계를 보았으므로 이제는 구속의 빛 아래에서 죽음을 살펴보기로 하자.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정복하고 파괴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것을 아래와 같이 나타내고 있다.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2:14-15). 죽음이 세상에 들어오게 된 것은 사단의 유혹을 통해서였기 때문에 마귀가 사망의 권세를 갖고 있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본성을 담당하사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죽음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죽음을 파괴하시게 된 것이다. 비록 이 구절이 많은 말을 동원하여 이 사실을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신약은 분명히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대해 커다란 승리를 얻으셨던 것은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을 통해서였다고 가르치고 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그리스도는 결코 다시 죽지 아니할 것이요 사망이 더 이상 그를 주장하지 못하리라"(롬 6:9).
그러므로 죽음을 정복하셨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보여진다.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을 죄로부터 속량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죄로 인한 결과들로부터도 구해내셨다. 그런데 죽음은 죄로 인한 결과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 디모데후서 1:10에서처럼 그리스도는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실 것이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에는 사망이 더 이상 있지 아니할 것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역의 적절한 결말인 것이다(계 21:4).
그러나 한 가지 질문이 야기될 수 있다. 왜 신자는 아직도 죽어야만 하는가? 왜 신자들은 이 세상에서의 삶의 끝에 죽음과 같은 고통의 과정을 겪지 않고도 직접적으로 하늘에 갈 수 없단 말인가? 사실상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늘에 직접 들어갈 자들이란 그리스도의 재림 당시에 살아 있는 신자들일 것이다. 그들은 죽지 않고 "순식간에 홀연히"(고전 15:52)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되어질 것이다. 왜 이러한 일이 모든 신자들에게 일어날 수 없는가?
사실상 이런 질문은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 제42번에 나온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면 우리가 또 죽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이에 대한 답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의 죽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보상이 아니라 다만 죄에 대하여 죽고 영생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죄에 대한 보상이 아닌 것이다. 죽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지 우리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중보자이시며 우리의 제2 아담이시기 때문에, 그는 우리가 담당해야 할 죄에 대한 형벌의 한 부분인 죽음을 겪으셔야 했다. 죽음은 그리스도에게는 저주의 일부분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축복의 원천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무슨 의미를 갖는가? 교리문답집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죄에 대해 죽음"(문답적으로는 "죄들의 소멸")이라고 한다. 현세의 삶에 있어서 죄는 우리가 져야 할 가장 무거운 짐이다. 우리가 나이를 먹을수록 죄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데 부족한 존재라는 것을 더욱 비판하게 된다. 로마서 8:23의 말씀인 "이(피조물)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를 읽어보면 우리는 이 죽음의 짐의 무게를 어느 정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죽음은 죄 짓는 날을 끝내게 한다. 지금 하늘에 있는 자들이 나누고 있는 교제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가 묘사하고 있는 내용을 주목해 보라.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하늘에 기록한 장자들의 총회와...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과..."(히 12:22-23). 사실상 바울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사랑하사 교회를 위해 자기 자신을 주셨으며 "그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교회를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셨다"(엡 5:26-27)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죽음은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말은 동일한 교리문답 제58항의 답변에서처럼 어떤 의미에서 신자는 이미 지금 여기서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는 의미로 말해진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죽음의 문을 통과한 후에만이 영생의 풍요 속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서 1:21에서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말할 수 있었고 고린도후서 5:8에서도 "우리가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기를 원하노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상의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최후의 적"(고전 15:26)인 죽음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우리의 친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대적자가 우리를 위해 하늘의 복락에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는 하인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광스런 새로운 시작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된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1-23).
안토니 A. 후크마의 『개혁주의 종말론』에서 발췌(115-12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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