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이해에 대한 예화 모음

하나님아들 2020. 2. 18. 11:49

이해에 대한 예화 모음

 

 ▣ 나폴레옹의 이해와 용납

나폴레옹은 온유한 면을 지녔던 군인이었습니다. 그의 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불란서의 유명한 장군으로, 구라파를 점령하고는 곳곳에 보초병을 세웠습니다. 하루는 나폴레옹이 한밤중에 보초막을 살펴보려고 나갔습니다. 한 보초막에 갔더니 사병이 너무나 지치고 피곤해서 총을 보초막 옆에 세워 놓은 채 쭈그리고 앉아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나폴레옹은 그 사병을 깨워 징계하지 않았습니다. 나폴레옹이 손수 그 사병이 놓아 둔 총을 들고 보초를 섰습니다. 한참 후에 깨어난 보초병은 자기 대신 보초를 서고 있는 사람이 나폴레옹 장군임을 알고 용서를 구하게 될 때에 나폴레옹은 "그래, 얼마나 피곤한가? 잠깐 쉬지. 내가 대신 보초를 서 줄께."라고 위로했다는 것입니다. 이때 그 사병은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일생 동안 나폴레옹을 위해서 충성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두 용납합시다. 그리고 이해합시다. 성령과 함께 하시는 온유한 자로

진실한 이해와 용서를 삶 속에서 나타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  상대를 이해하라


 갓 결혼한 어느 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내가 툭하면 눈물을 흘린다고 못마땅해 합니다. 꼭 장모님을 닮았다는 것이지요. 사실 이 어린 아내는 엄마가 아빠한테 항상 눌려 살면서 기를 펴지 못하던 모습을 보면서 자기는 이다음 결혼하게 되면 절대로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막상 결혼하고 나니까 그렇게 되지 않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결국은 자기 엄마처럼 남편 앞에서 마치 순교자와 같은 모습으로 한 마디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죽어 살고 있었습니다. 한편 남편은 가정에서 전제군주처럼 행동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랐기 때문에 결혼한 후에도 아내 앞에서 소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소리 지르고 욕하면서 가정을 지옥으로 만들어놓곤 했었지요. 그런데 토마스 해리스 박사란 분은 <둘 다 옳다>라는 제목의 책에서 사람들은 네 가지 기준에 따라 행동한다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는 “나는 옳고 당신은 틀렸다”,

두 번째 “당신은 옳고 나는 틀렸다”,

세 번째 “당신도 나도 모두 틀렸다”,

그리고 네 번째는 “당신도 옳고 나도 옳다”라는 생각입니다.

이 중에서 우리는 “당신도 옳고 나도 옳다”라는 전제 아래 행동할 때만 서로가 존중하고 기쁨을 나누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의 부부는 “나는 옳고 당신은 틀렸다”는 자기 위주의 생각 속에서 살아온 전형적인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갈등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남편은 아내가 매사에 나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너무 싫었을 것이고, 아내는 그저 ‘죽었습니다.’라는 식으로 가만히 있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이 부부는 서로가 자기 위주의 생각에서 벗어나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용납하는 태도로 그 사고하는 방법이 바뀌어야 합니다. 이처럼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야말로 하나님의 관점으로 상대를 바라보는 태도이며 이 같은 태도를 갖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과거부터 형성되어 온 잘못된 삶의 태도를 고침 받게 될 것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변화의 열매를 따기 위한 진정한 변화의 시작입니다.


▣  이해의 차이


미국 어느 연구기관에서 이혼부부를 대상으로 성격 비교 연구를 했습니다.

다양한 성격들이 나왔는데 그중에서도 공통점을 찾아 네 종류로 분류했습니다.

첫째는 과거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과거 집착형

둘째는 상대의 허물을 용서하지 못하는 혐오성 성격

셋째는 자신을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는 과대 망상형

넷째는 지난 날의 어떤 실패를 두려워하는 피해 망상형입니다.

이 연구 결과는 우리사회와 가족이 어떻게 형성되어야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과거를 용서하지 못하고, 허물을 용서하지 못하고, 자기과시에 젖어 있거나 실패를 두려워한다면 사랑으로 충만한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기 힘들게 됩니다.

서로 한 발 물러서서 용서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용기를 가지고 미래를 설계 한다면 미움도 원망도 아침 이슬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류중현 | 사랑의 편지 발행인


▣  이해의 계단


 이해의 계단에는 사랑의 열매가 열리고 오해의 잡초에는 증오의 가시가 돋는다.

이해의 내면적 안목에 의존해서 대상을 바라볼 때 숙성되고 오해는 외형적인 안목에 의존해서 대상을 바라볼 때 발아된다.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을 외형적 안목에 의존해서 바라보는 성향이 짙을수록 오해의 소지도 많아진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지나치게 외형적 안목을 중시하게 되면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의 내면적 가치를 소홀하게 된다. 진정한 사랑은 마음속에 있는 것이지 마음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결함도 내면적 안목에 의존해서 바라보면 아름답게 해석될 수 있는 법이다.

걸레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외형적 안목에 의존해서 바라보면 비천하기 그지없지만 내면적 안목에 의존해서 바라보면 숭고하기 그지없다. 걸레는 다른 사물에 묻어있는 더러움을 닦아내기 위하여 자신의 살을 헐어내야 한다.

이해란 그대 자신이 걸레가 되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외수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중에서


이해와 오해 속에 세월은 흐릅니다. 많은 이해는 풍요롭고 따뜻한 삶을 누리게 할 것입니다. 오해 속에 힘겹게 사시겠습니까? 이해 속에 행복한 나눔의 인생이고 싶습니까?

/사랑밭 새벽편지


▣  이해


세상은 이렇게 넓고 어둠은 이렇게 깊고 그 한없는 재미와 슬픔을 나는 요즘 들어서야 비로소 내 이 손으로 이 눈으로 만지고 보게 된 것이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다.

오랜시간 강바닥을 헤매는 고통보다는 손에 쥔 한 줌 사금에 마음을 빼앗긴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요시모토 바나나의《키친-달빛 그림자》중에서 -


* 위로를 받기 보다는 이해를 바라는 마음이 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공감도 이해도 얻지 못합니다. 나의 진심을 믿어주는 사람들이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염원할 뿐입니다. 그러면 저는 더욱 더 가벼워지고 점점 더 투명해질 것 같습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  마주서야 보인다


  가슴에 꽃을 달아주기 위해서는 서로 마주서야 한다. 가장 친밀한 거리에서 서로의 눈길을 보내고 그가 기뻐하는지 입가를 엿보아야 한다. 그건 첫 포옹만큼이나 설레고 가슴 떨리는 일이다.

- 신경숙의 《자거라, 네 슬픔아》 중에서- 


* 등을 돌리면 보이지 않습니다. 등을 돌린다는 것은 몸만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마음도 돌아서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주서야 보입니다. 서로 마주서야 따뜻한 눈길도, 떨리는 입술도 보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이 보입니다. 마주서야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주서야 사랑의 꽃을 함께 달 수 있습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  이해한다는 말을 이해하는 가


 얼마 전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토론을 시키다가 적잖이 놀란 적이 있다. 한 학생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을 했는데, 나는 한동안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학생과 내가 서로 이해하지 못한 이유는 ‘이해하다’라는 말을 다른 의미로 썼기 때문이다. 즉 나는 학생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한 것을, 그 구절이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지 납득되지 않는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는데, 그 학생이 말하고자 한 것은 ‘내가 동의할 수 없다’였다. 하긴 일상 대화에서 ‘이해되지 않는다’라는 말을 이런 의미로 쓰기는 한다. “걔 정말 마음에 안 들어. 이해할 수가 없네” 같은 말을 했을 때, 그 ‘이해’란 말은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동의하느냐 혹은 용인하느냐 여부의 문제다. 인식과 용인의 의미를 종종 뒤섞어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말 사용법에는 우리의 태도와 사고방식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즉 우리는 자신이 용인, 동의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해, 납득을 하지 못한다는(혹은 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사실에 관한 문제와 자신의 호불호의 문제가 뒤범벅되고, 호불호와 옳고 그름의 문제가 뒤범벅된다.

 미숙한 어린아이들이라면 이런 사고는 정상적이다. 아이가 가구 모서리에 부딪혀 울음을 터뜨리면, 어른은 가구 모서리를 “때찌 때찌” 하고 야단치며 아이를 달랜다. 미운 것을 나쁜 것으로 간주하여 징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뒤범벅이 스무 살이나 되는 대학생들에게, 그것도 논리적 말하기를 해야 하는 토론수업에서 나타난다면 심각한 현상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자신의 욕망을 고스란히 드러낼 줄만 알았지, 그것을 객관화하여 이해하는 능력을 키우지 못한 애어른들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이런 현상은 ‘요즘 젊은이’만이 아니다. 어른들의 비논리적 뒤범벅 역시 만만치 않다. 내가 어릴 적에 가장 이해도 용인도 되지 않았던 말이 야단맞을 때에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라고 충고하는 어른들의 말이었다. 이제는 그 상황이 납득(나의 표현대로 하자면 ‘이해’)은 되지만, 역시 용인되지는 않는다. 문제가 벌어졌을 때에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래야만 반성하고 징벌을 받아들일 것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대개 이 과정을 생략했다. 중요한 것은 나쁜 짓을 했는가가 아니라, 그것으로 어른이 노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의 해결은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어른의 노함을 풀어드리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런 말을 하는 어른들은, 정작 가장 큰 잘못은 사리에 맞지 않는 행동이 아니라 어른을 노하게 한 그 자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시비를 가리고자 하면 무례한 말대꾸이며 ‘말 많은 공산당’ 짓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사회의 갈등이 조정되지 않는 것은 이러한 논리적 능력 부족에서 기인하는 바가 커 보인다. 뉴스에 안기부, 추경예산, 경총, 피에스아이(PSI) 등등 온갖 약어들이 판을 치는 사회에서, 아이들이 쓰는 ‘열공’, ‘즐감’ 같은 약어의 사용을 나쁜 짓으로 치부하는(사실은 어른들에게 낯설기 때문에 싫고, 그래서 용납할 수 없는 나쁜 언어라고 간주해 버리는) 현상은, 우리 사회에 얼마나 비논리적인 사고가 횡행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어른 세대는 덜 무모하여 큰일 치는 일이 적을 뿐 따지고 보자면 자신이 ‘싫어하는’ 가수에게 독극물이 든 음료수를 먹인 젊은이와 얼마나 다르겠는가.

- 이영미 / 대중예술평론가


 ▣  이해는 아름다움의 시작입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건 이해가 안되는 존재”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해를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이해한다는 것은 서로 간의 관계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해한다는 말은 작은 말인 것 같지만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크게 다가올 때도 많습니다.

 사랑해도 하나되기가 어렵지만 이해하면 누구나 쉽게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라는 단어는 폭이 넓고 깊어 나이가 들어야만 자주 사용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이해되지 않는 사람 때문에 너무나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습니다. 생각의 폭을 넓히고 다양성을 인정하면 더 많은 사람과 사물과 사연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는 아름다움의 시작입니다.

 사랑하는 이여! 우리들 모두는 어딘가 쉬일 곳이 있어야만 합니다. 내 영혼이 쉴 자리는 아름다운 작은 숲 그대에 대한 나의 이해가 사는 그 곳입니다.

/정용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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