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화

하나님에 대한 예화 모음

하나님아들 2020. 2. 18. 11:38

하나님에 대한 예화 모음
하나님의 부르심
스펄젼 목사가 한 번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크리스챤의 임무에 대해 설교를 하고 나자, 그의 설교에 몹시 감동한 듯한 어떤 남자가 그에게 와서는 그것을 어떻게 하면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교회 내의 전도 클럽에 자신이 과연 들어갈 수 있는지를 염려했다. 그러자 스펄젼은 '당신의 직업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증기 기관차 기술자입니다'라고 그가 대답하자 또다시 그는 '그럼 당신 기관차의 화부는 개종했습니까?'라고 물었다. '아닐 겝니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지요?'라고 하자 목사는 '오! 형제여, 그것이 바로 당신이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나면 이제 선교나 전도 또는 목회 등 어떤 특별한 일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일차적으로 우리들에게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 고전 7:24 ) 라고 말한다.
우리가 하고 있는것이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는 일이 아니라면 우리가 거한 곳에서 주님께 하듯 우리의 충성을 다할때 그것을 통해 주님을 영광을 받으실것이며 또한 그가 원하시면 다른 일에도 들어 쓰실것이다. 불행한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하고 있는 일에도 충성하지 못하면서 다른 어떤 큰 일들을 바라본다는것이다.
 

하나님, 유일한 신뢰의 대상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분의 자녀가 얼마나 믿을 만한가에 따라 좌우되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에게 도무지 신뢰할 만한 구석이 없을지라도 주님은 한결같이 신실하십니다. 설혹 우리가 용기를 잃어버린다 해도 주님은 여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연약한 인간을 들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다 포기한 순간까지도 여전히 그들을 놓치지 않으십니다.
제자들이 기도를 멈췄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았지만, 예수님은 아버지를 간절히 찾았습니다. 제자들이 연약할 때 예수님은 강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을 때 예수님은 믿음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우리의 연약함을 초월합니다. 사실 인간의 연약함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인지를 잘 드러냅니다. 하나님은 항상 신실하십니다. 그분의 자녀들이 도무지 미덥지 못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 약속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시 24:3-4)
미국의 유수한 호텔 중 하나인 홀리데이 인(Holiday inn)의 클라이머 전 회장은 수백개의 호텔을 운영하면서 호텔 내에 한 번도 카지노를 두지 않았다.
그런데 회사의 간부들은 사세 확장을 위해 뉴 저지주의 호텔에 카지노를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클라이머 회장은 단호히 거절했다.
그러나 그 중역들은 끊임없이 카지노 설치를 건의했다. 클라이머 회장은 이 문제를 놓고 가족들과 상의한 후 회장직을 포기했다.
은퇴식 때 그는 직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제가 운영하는 호텔에 카지노를 두지 않기로 하나님과 약속을 했습니다. 사람들과의 약속도 중요한데 하나님과의 약속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제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길은 회장직에서 물러나는 것뿐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는 지금 마음이 무척 평안합니다." 직원들은 끝까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킨 한 진실할 크리스천을 향해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심이 간다면..
하나님의 사랑에 의심이 가고 하나님의 은혜에 회의가 드는 이들에게 한가지 간단한 처방이 있다.
성경을 펴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이 어떤 부류인지 보면 된다.
감히 하나님과 씨름으로 맞선 뒤 평생 싸움의 상처를 안고 산 야곱.
그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자손'의 시조가 되었다.
성경에는 간부요 살인범이 구약의 가장 위대한 왕이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부상한 기사도 있다.
예수님을 모른다고 저주하고 맹세한 제자가 교회 지도자가 되었는가 하면 그리스도인들을 죽이던 도당에서 선교사로 뽑힌 사람도 있다.
"국제사면위원회"에서 오는 우편물을 보면 온갖 구타와 고문과 전기 충격을 받은 사람들의 사진이 실려있다.
그 사진을 보노라면 "도대체 어떤 인간들이 같은 인간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그러나 똑같은 일을 했던 사람을 사도행전을 읽다 만났다.
그는 이제 은혜의 사도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교사가 된 사람이다.
하나님이 그런 사람도 사랑하실 수 있다면 어쩌면, 정말 어쩌면, 나 같은 자들도 사랑하실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의 군대
성 구 이에 내가 그 명대로 대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 일어나서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겔 37:10)
한국 기독교군선교연합회 부설 비전2020실천운동본부장인 이필섭 장로(국군 중앙교회)가 동양인으로는 처음으로 국제기독군인연합(AMCF) 회장으로 선출됐다. 이필섭 장로는 합참의장을 끝으로 지난 93년 군문을 나선 퇴역 대장 30여 년간의 군생확을 마감한 이 장로는 청춘을 바친 군에 대한 애정으로 군복음화에 몸을 던지기로 결심했다. 96년 2월부터 이 운동에 뛰어든 이장로는 98년 비전 2020본부장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선교사업을 벌이고 있다. 비전 2020은 해마다 20만 명씩 쏟아지는 군대 내 세례자를 잘 이끌어 20년 후 이들 가족이 모두 그리스도의 향기를 뿜어내도록 하자는 군복음화 사업이다. 이를 위해 현재 이장로는 군 세례자와 일반 교회와의 자매결연을 추진하고 있다. 한 해 20만 명에 이르는 군 세례자를 출신지, 출신학교별로 분류한 뒤 개인별 인적 사항을 전국 2020개 교회와 한국대학생선교회 등에 보내 전역 후에도 예수님의 품에 안기도록 하자는 사업이다. 지난해 말부터 추진한 이 사업에 여의도순복음, 충신, 충현, 한강, 강남중앙침례교회 등이 적극 나서고 있다. 실제로 이들 교회는 위문편지 보내기, 정기적인 면회 및 휴가음식 차려 주기 등을 통해 예수님을 처음 영접한 청년들을 사로잡고 있다.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하나님이 그 거룩한 보좌에 앉으셨도다”
(시편 47:8)
동 서의 냉전시대 동안 그랜드 래피즈 신문 일면에 놀라운 머릿기사가 떠올랐습니다. 「컴퓨터 실수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계속되는 그 기사 속에도 똑같은 경고의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지난 7개월 동안에 두번 이나 국가의 미사일 경보센터의 컴퓨터가 소련 미사일이 미국을 공격하는 것으로 잘못 판단 하여 미국의 전략사령부 요원들을 비상 대기시켰다.” 핵전쟁은 생각만해도 끔찍한 일인데 그것이 컴퓨터의 오류로 발생될 수 있다고 생각해 볼 때 더욱 더 섬뜩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좌에 좌정해 계 시면서 만물을 주장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 이미 알고 계시며,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마음 속에 갖고 계신 하나님의 크고 선하신 계획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이 땅에서 더 이상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열국을 통치하시고 세상만사를 주관하심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나 님의 통치하에 있습니다. 재난의 가능성에 관한 신문 표제 때문에 우리가 공포에 떨어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실수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다스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선택 죠지 워싱턴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자기 고토에 두시리니 나그네 된 자가 야곱 족속에게 가입되어 그들과 연합할 것이며"(사 14:1)
"예루살렘을 택하여 내 이름을 거기 두고 또 다윗을 택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노라 하신지라"(대하 6:6)
미국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너무나 몸이 약하여 곧 죽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17세 때 그리고 22세 때 등 모두 세 번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뻔하였습니다. 19세 때 천연두에, 20세 때 늑막염에 걸렸습니다. 35세 때에는 급성 이질에 걸려 죽을 고비를 또 넘겨야 했습니다. 43세 때에 치아가 거의 못 쓰게 되어 고통을 당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주시고 항상 같이 하여 주시기에 사명이 있다고 늘 자기가 자기를 믿어 주었습니다. 그는 43세인 1775년에는 미국 혁명군의 총 사령관이 되어 독립군을 지휘하여 승리함으로써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습니다. 12년후 그는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죠지 워싱톤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주셨다는 확신의 믿음은 그 사람을 머릿돌로 만들어 놓고 맙니다. 역사상 큰 일을 하였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이 자기를 특별하게 선택하여 주셨음을 알고 그렇게 받아 드리고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살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자기를 몰랐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를 이방 선교사로 택하셨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놀라운 사역자로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갈1:15-17).
"하나님 어디 그들만 택하셨겠습니까? 저도 택하여 불러 주셨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외모를 보고하시는 것이 아니다.
나는 하나님의 택하심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하나님은 꿈꾸는 자를 돕는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이요, 꿈이 있다는 것은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상을 갖는다는 것이요, 비전을 지닌다는 것이요, 목표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꿈이 있을 때 활력소가 생기고 의욕이 솟구쳐 오릅니다. 사람이 꿈을 잃으면 활기가 없습니다. 꿈이 있어야 높은 이상을 세우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분투 노력하면서 사는 보람과 의미를 발견합니다.
꿈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은 꿈을 꾸게 하십니다. 꿈을 키워주시고 실현하게 하십니다. 상상력을 북돋워 주시고 미래를 향해 나가도록 이끄십니다.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요엘 2장28절)라고 하셨습니다. 꿈꾸는 사람에게 희망찬 미래가 있습니다. 성령은 인생의 영양소입니다. 꿈이 꿈을 가진 사람을 위대하게 만들어줍니다. 비전을 품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사람을 만들어가는 것은 비전입니다. 꿈이 있는 자는 꿈을 말합니다.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앞으로 될 일을 말한다는 뜻입니다.요셉은 꿈을 꾸고 자기가 꾼 꿈을 이야기합니다.“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요셉은 꿈을 말했다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게 됩니다. 꾸중을 들어도 꿈을 꾸고 꿈을 말합니다. 꿈이 있습니까? 꿈을 말하십시오. 헨리 포드가 자동차를 만들겠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고 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마이카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꿈은 모두 이뤄졌습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자기의 꿈을 입으로 말합니다. 내가 꿈꾸는 것을 자기 입으로 말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입술의 열매를 지어주시기 때문입니다.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욜 2:28)
‘청춘’의 시구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사람은 신념을 가지면 젊고,의혹을 가지면 늙는다. 사람은 자신을 가지면 젊고,공포를 가지면 늙는다. 사람은 희망이 있으면 젊고,실망이 있으면 늙는다. 대지로부터, 조물주로부터,사람으로부터 아름다움과 희열,용기와 위엄, 그리고 위력, 이러한 영감을 받는 한 사람의 젊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한마디를 기억하십시오.
‘늙은 40보다 젊은 70이 낫다’.
꿈꾸는 자가 꿈을 이룹니다.
꿈이 꿈을 이루는 능력입니다. 꿈꾸는 사람은 꿈을 이루기 위해 대가를 지불합니다. 꿈이란 하루하루 살면서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미래란 앞으로 일어날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순간순간이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시간만 흘러가면 꿈이 저절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꿈을 이루려는 노력이 꿈을 이룹니다. 꿈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꿈이 곧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보지 못하는 자는 보는 것을 꿈꾸게 하고 보게 하셨습니다. 듣지 못하는 자도 꿈꾸게 하고 듣게 하셨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배불리 먹기를 꿈꾸게 하고 그 꿈을 이뤄주셨습니다.
성령님도 꿈을 꾸게 하십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꿈을 말합니다. 꿈이 있는 사람은 그 꿈을 이룹니다. 하나님이 이뤄주십니다. 하나님은 꿈꾸는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가정
사람이 어디에 살던지 어떻게 살던지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가정이 될 때 그 가정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가정을 통해서 나타내신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사사시대의 말기에 한 나라를 통치하던 엘리 제사장의 가정은 모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에브라임 산곡에 한적하게 살아가는 한나의 가정을 기억하는 이는 하나님 밖에 아무도 없었다.
한나의 가정에 하나님이 복을 주심으로 그 가정에 사무엘이 태어났던 것이다. 왕정 초기에 전국을 통치하던 사울의 가정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베들레헴 목자의 가정 이새의 가정은 하나님만 기억하셨기에 다윗을 불러 이스라엘 목자가 되게 한 것이다. 고넬료의가정은 온 가정이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어른으로부터 아이들까지 하나님을 믿는 가정이었다.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있는 이탈리아 군대의 백부장이였고 이방인 중에서도 로마인이였다. 외국에서 주재하고 있었던 고넬료는 지위가 백부장에 불과하여 권력으로는 큰 출세를 못했지만 일찍 믿음을 받아서 경건한 신앙으로 한 가정을 믿음으로 키우고 있었다. 신앙인들이 믿음을 가졌을 때 가장 먼저 자신의 가정에 영적 감화를 줄 수 있어야 한다. 한 가정이 영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성경에 욥에게 악처가 있었고 롯에게 세상을 사랑하는 처가 있었고 아합왕에게 이방 여인이 있었다. 또 선지자 사무엘에게 악한 아들이 있었다. 한 가정의 가장이 믿음으로 그 가정을 지켜 나갈 수 있다면 그 가정은 참으로 행복한 가정일 것이다. 고넬료의 가정은 그 가정에 종들까지도 고넬료의 신앙에 감화를 받은 듯한 느낌을 준다. 고넬료가 구제를 많이 한 것이 하나님이 고넬료의 가정을 기억하신 이유 중에 하나이다. 당시는 유대나라가 식민 국가로 있어서 로마인들에게 늘 착취를 당했다.
로마인은 치부를 위해서 가난한 유대인들을 학대했다. 이러한 형편에서 군인이요 로마인인 고넬료가 백성에게 많이 구제하였다는 것은 매우 귀한 일이다. 그는 군인이기 전에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였고 로마인이기 전에 가나한 자의 이웃이었다. 사람의 신분이 무엇이든지 약한 자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면 강도 만난 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제사장 레위인처럼 참 이웃이 아니다. 성도의 가정은 구제에 힘을 써야 한다. 성경은 교회의 일꾼의 자격을 논할 때도 약한 이웃을 대접하는 것을 말씀하셨다. 마19장에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으리니 했고
마 25장에서는 너희 중에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라고 했다. 야고보 사도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에서 돌아 보는 것이라고 했다.
베들레헴 보리밭에서 이삭을 줍는 가엾은 과부에게 물을 주고 떡을 주었던 보아스의 가정을 하나님이 기억하사 아브라함에게 허락한 큰 복을 주셨다. 참으로 남편을 잃은 과부와 같은 유대인들을 구제했던 고넬료의 가정을 하나님이 기억하고 계셨다.
 
예배 중에 찾아오시는 하나님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쫓는 옛사람을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 : 22-24)
멀린 캐더로스 목사가 예수님을 믿기 전의 이야기이다. 그가 어느 날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이끌려 반강제적으로 예배에 참석했을 때,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불쌍하게만 보였다. 불쌍한 사람들, 바깥 세상의 재미있는 생활을 모르는 사람들이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창고에서 밤을 허비하려고는 하지않을텐데!
찬송이 시작됐고 나는 찬송가를 부르는 시늉이라도 내어야만 했다. 그런데 갑자기 나는 바로 내 귀에 바짝 대고서 말하는 무거운 소리를 들었다. "뭐냐?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냐? 나는 뒤를 돌아보고서 아무도 없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 목소리가 또 다시 들렸다. "너는 오늘밤 나를 믿기로 결심해야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때는 이미 늦을 것이다." 나는 머리를 흔들면서 자동적으로 말했다. "뭐라고?" "반드시 늦고 말 것이다!" 이게 무슨 소릴까? 내가 헛소리를 들은 것인가? 그러나 그 음성은 확실히 들렸다. 하나님이다 하나님! 하나님의 음성이다. 하나님은 바로 나를 알고 계시구나! 나는 섬광처럼 깨달았다. 왜 이전에는 그것을 알지 못했을까?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내가지금까지 갈구 했던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서 찾을 수 있으며 하나님은 바로 내 모든 문제의 해결자이시다.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예, 하나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시다. 예배 시간을 찾으셔서 사람을 변화시키고 거듭나게 하신다. 하나님을 모르고 조롱하던 생활에서 하나님의 전적인 인도하심에 복종하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것이다. 새롭게 변화된 곳에서 이 사람은 신앙생활이 가져다 주는 놀라운 진리의 길을 가게 된 것이다.
버린 캐더로스, <감옥 생활에서 찬송생활로>, 보이스사.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유명한 설교가인 템플 목사가 한번은 케임브리지 대학 채플에 설교자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이 좋은 기회에 내일이 촉망되는 젊은이들에게 무슨 인상 깊은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 것인가를 여러 가지로 생각하다가 기도를 배워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릴 수 있다면 저들의 장래는 얼마나 복될 것인가라는 데 생각이 미쳐 그는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학 채플에서는 이런 제목의 설교는 별로 인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템플은 이 대학생들의 영혼을 사랑해서 그들에게 정말 필요한 기도의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서 말씀을 열심히 증거하였습니다. 채플이 끝나자 한 학생이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께서는 이 과학시대에 아직까지도 기도의 응답이라는 미신 같은 소리를 믿고 계십니까? 우연의 일치를 가지고 그리스도인은 기도의 응답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이야기를 듣고 난 템플은 말했습니다. "기도가 우연의 일치라고요? 우연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학생,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내가 기도를 그치면 그 우연도 그쳐버리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손
본문: 요한복음 10장 28-29절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은 그 존재를 믿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금도 내 말소리를 여러분이 듣고 있지만, 말소리를 볼 수가 있습니까? 그렇지만 분명히 말소리가 존재하니까 여러분 귀에 들리는 것입니다. 여기 TV를 연결해 놓으면 화면이 나오고 소리가 들리겠지요? 그러나 TV의 전파를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습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손”이란 말이 참 많이 나오는데 왜 볼 수도 없는 하나님의 손을 많이 말씀하셨을까요?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는데, 하나님은 인간이 눈으로 보는 것처럼 보시는 분이시고, 인간의 귀로 들으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말을 들으시는 분이며, 우리의 발로 행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행하시는 분이고, 우리가 입으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똑같이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지으셨기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은 유사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손은 행동을 의미하고, 무엇을 만들어 내는 일을 합니다. 시인이 시를 쓸 때에도 손에 펜을 잡고, 농부가 땅을 팔 때에도 손에 농기구를 먼저 잡고, 군인이 전쟁을 할 때에도 먼저 손으로 총을 잡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행동하시는 모든 행위를 하나님의 손으로 행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표현할 때 우리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이는 손이 없다할지라도 인간의 손으로 하는 그 이상의 행동을 나타내실 수 있고 인간의 역사 속에 투사하시기 때문에 성경에 “하나님의 손”이란 말이 자주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눈, 영혼의 눈으로 시시각각 하나님의 손을 보고 그 손길을 체험하고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1.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아야 합니다.
이사야 48장 12-13절에 “야곱아 나의 부른 이스라엘아 나를 들으라 나는 그니 나는 처음이요 또 마지막이라 과연 내 손이 이 땅의 기초를 정하였고 내 오른손이 하늘에 폈나니 내가 부르면 일제히 서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 손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어느 예수 믿는 대학 교수가 제자에게 전도를 하면, 그 제자는 꼬치꼬치 따지면서 천지만물이 우연히 거저 생겼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어느 날 그 교수가 자기 집 지하실에 해와 달과 별들의 형상을 만들고 지구가 공전하고 자전하는 모형을 만들어 놓고 그 불신 학생을 불러다가 그 우주의 모형을 만들어 놓은 것을 보여 주며, “야! 참 이상하지. 내가 하룻밤 자고 나서 내려와 봤더니 이런 소우주가 생겨났어. 참 신기하지?” 그랬더니, 그 학생이 “교수님, 저를 놀리십니까? 이게 어떻게 그냥 저절로 생겨납니까? 교수님이 다 만들어놓고 괜히 저를 놀리시려고 그러는 것 아닙니까?”라고 하더랍니다. 그 때 교수님이 “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느냐? 그렇다면 이 작은 우주의 모형도 저절로 생겨났다는 것을 믿지 않으면서 이 보다 더 위대하고 더 섬세한 해와 달과 별들 우주 만물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하느냐?”고 했더니, 항복하고 말더랍니다. 이사야 45장 12절에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친수로 하늘을 펴고 그 만상을 명하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난 신자는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2.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손
하나님은 창조하실 뿐 아니라 그것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창조하신 다음에 떠나 계신 분이 아니라,가까이서 해와 달과 별들 그리고 생물이나 무생물을 붙드시고 보존하시는 분입니다. 예를 들면 시계가 태엽을 감아 주거나 배터리를 갈아주니까 돌아가지, 가만 놔두면 멈추어 버리고 맙니다. 이와 같이 지구가 회전하는 것이나 천체의 운행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운행하시고 보존하시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각 사람의 생명을 주관하시고 심장의 박동을 붙들어 주시니까 살고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손길을 떼시면 호흡이 멈추고, 생명이 죽고 마는 것입니다.
시편 104편 28-29절에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했으며, 시편 145편 15-16절에 “중생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시며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주 만물과 인간과 천사들까지 보존하시는 분이시며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출애굽기 31장 18절에 보면 돌판에 하나님이 친히 쓰신 증거판들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끊임없이 일하시며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볼 수 있기 바랍니다.
3.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손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면 자식이 잘못할 때 회초리를 들어 때리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의 자녀들이 잘못할 때 물질로나, 질병으로나, 전쟁을 통해 때리시고 징계하시는 분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난 9.11 미국의 테러 사건 때, 처음에는 왜 이런 불행이 왔나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이 악마같은 빈 라덴을 통해서 미국을 징계하시고 때리신 하나님의 손길이었다는 것을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건 이후 최강의 군사력만 믿고 또 물질 만능만 믿던 미국사람들이 눈물 흘리며 교회로 교회로 모여들어 겸손히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며, 중고등 학생들의 총기난사로 수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보며 각 학교에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옛날처럼 학교마다 채플에서 예배를 드려야하며 성경을 가르쳐야 한다고 외치는 소리가 높아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미국을 사랑하셔서 그 손으로 빈 라덴이라는 몽둥이로 후려치신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거듭난 기독교인들은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꼭 보아야 합니다. 우리 60억이 넘는 모든 사람의 머리터럭 하나까지 셀 수 있는 하나님이시므로 적은 것 하나라도 우연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4.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
하나님의 손은 징계하고 채찍질하는 때만 쓰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자녀들을 보호하시는데도 사용하십니다. 시편 10편 12-14절에 보면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를 잊지 마옵소서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치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잔해와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의 글을 읽어보면, 북한에서 목회 하시다가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몹시 낙심이 되어서 손 하나 까딱하기가 싫어서 “이제는 목사 사표를 내고 목회를 그만둬야겠다”하고 엎드려 있는데 비몽사몽간에 자기가 험악한 길을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보이더랍니다. 너무너무 피곤하여 오른쪽으로 쓰러지려고 하는데 갑자기 큰손이 나타나서 일으켜 세우더랍니다. 또 험악한 길을 걷고 있는데, 이번에는 왼쪽으로 쓰러지려고 하니까 다시 큰손이 나타나더니 일으켜 주더랍니다. 또 죽을힘을 다해 걸어가다가 이번에는 앞으로 쓰러지려고 하니까 두 손이 나타나더니 일으켜 주더랍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험악한 길을 걸어가다가 눈을 번쩍 떠서 보니까 잠잔 것도 아니고 생시도 아닌데 역력한 환상을 보았는데 그 때에 “내 힘으로 목회 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는구나”라고 깨달으시고 그 험악한 목회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몇 년 전 돌아가셨습니다. 한 목사님만 능력의 손으로 붙드실까요?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를 능력의 손으로 그때그때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핏덩이같은 어린 아기가 엄마의 손이 아니면 살수가 없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돌보시고, 보호하시는 손길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이사야 49장 15절에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1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며 아우성쳤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이 사정을 아뢸 때 하나님께서는 “염려하지 마라 내가 너희 코에서 냄새가 나도록 고기를 먹여주겠다”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한 달 동안 싫증이 나도록 먹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때 모세도 믿어지지가 않아서 “장정만 60만이 넘는데 하늘에 창을 내신들 가능하겠으며 소 떼와 양떼를 몰아 오신들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고 반문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고 말씀하신 후 “내 말이 네게 응하는 것을 보게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오는데 어마어마한 메추라기 떼를 몰고 와서는 이스라엘 진중에 떨어져 내려앉았습니다. 메추라기들은 몇 일씩 날아가다가 힘들면 내려앉아 몇 일씩 잡아가도 모를 정도로 잠을 잔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 진중에 겹겹이 내려앉아서 실컷 고기를 먹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으로 능치 못하심이 없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에스라 7장에 보면 학사 에스라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데 정월 초하루에 바벨론에서 출발하여 5월 초하루에 도착했는데 7장 9절에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어 5월 초하루에 예루살렘에 이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을 능력의 손으로 보호하시는 것을 믿고 기도하며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0장 27-29절에 보면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영접하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능력의 손으로 붙잡고 계시므로 악한 마귀가 절대로 빼앗아 갈 수가 없고 해칠 수가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손, 하나님의 손은 마귀보다 강하고 세상의 그 무엇보다 힘이 있으므로 그에게 의지하면 염려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심령도 여러분의 생활도 가정도 다 우리 아버지의 손에 맡기십시오.험악한 인생길에 연약한 자신을 믿지 말고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그 능력의 손에 의탁하시기 바랍니다.
5. 못 박힌 손을 보십시오.
우리가 꼭 보아야 할 하나님의 손은 십자가에서 못 박힌 손입니다. 이 못 박힌 예수님의 손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다 소망이 없고 우리는 모두 죄의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의 심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의심 많은 도마는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도마에게 나타나 못 박힌 손과 발을 보여주신 다음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한복음 20장 27-29절)”라고 고백했습니다. 부활하신 후 8일이 지난 다음 제자들이 집안에 있었는데, 도마도 거기 있었습니다. 그 때 문이 닫혔는데도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이르시기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 때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는 복 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지주의자(Gnosticism)들은 하나님의 영이 예수라는 사람 속에 들어왔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빠져 나와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는데 이것은 이단 사상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주신 것은 일시적인 것도 아니고 연극도 아닙니다. 영원히 변함이 없는 사상 최대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는 지금도 못 자국이 있고 장차 재림하실 때에도 못 박힌 손이며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못 박힌 손입니다. 그 사랑의 흔적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 못 박힌 손은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창조의 손 그것을 보존하시는 손을 보아야 하고, 징계하시는 손, 보호하시는 손을 매일매일 느껴야 하고, 못 박히신 주님의 손을 믿음과 감격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생명을 선택하는 하나님의 메시지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신30:20)
성경 속에 기록된 모든 위대한 사람들은 모두 낙천적 사고가들이다. 그리고 현실주의자들이었다. 그들도 낙망, 절망, 실패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 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위대한 것은 고민 속에서도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에게 도움을 청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도 크나큰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절망이 사라지게 되었다(애3:1-66참조).그는 주위에 있는 소극적인 세력보다도 하나님의 가능하심을 보게 된 것이다.
마음에 고민이 있는가? 갈등을 겪으며 궁지에 몰렸는가? 그럴 때마다 소극적인 생각들을 버리라. 그리고 '생명'을 선택하라.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라.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이것이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렘29:11).'
 
참된 하나님의 교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을 한 후 방황하다가 창녀인 소냐를 찾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기가 살인자임을 고백합니다. 그때 소냐는 자기 방에 걸려있는 십자가를 가리키면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의 기도를 하라고 권합니다. 십자가는 성스러운 교회당의 꼭대기에나 아니면 믿는 사람의 목걸이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소냐같은 창녀에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십자가는 너무 성스러운 것이므로 창녀나 살인자에게는 필요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무한하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그것을 목걸이로 걸고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자들의 것이 아니라,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자기 가슴을 치며 죄를 슬퍼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2000여 년 전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던 것처럼, 참된 하나님의 교회는 가난하고 죄인이라고 따돌림을 받는 사람들이 기쁨으로 말씀을 듣고 구원을 얻으려고 나올 때 그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교회입니다

하나님 경외한 장로가정
평양 산정현 교회에 유계준 장로님이 계셨다.
그는 믿기 전 23세 때 평양 깡패로 있으면서 마패선교사를 때리려고 들러쌌는데 그 순간에 하나님의 은혜에 사로잡혀 큰 감화를 받고 깡패그룹을 해산시키고 25세에 윤덕준 양과 결혼을 하여 6남2녀를 두었는데 그는 첫째 득남기념으로 미림지교회를 건축하였고 45세 때에는 산정현 교회에 장로가 되었으며,주 기철 목사님이 옥중에 계실 때 쌀 1가마를 주어 가족을 돌보아 주었다.
그는 6.25 전날밤 괴뢰군에게 잡혀가서 대동강 언덕에서 순교당하 기까지한 `믿음`있고 `충성`하고 `헌신`하는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을 일관하였다. 유장로는 천상에서 받을 복도 크지만 지상에서도 많은 축복을 받았다.그의 자녀들을 보면,
1) 장남 유 기원 : 의사(미국에서 의학박사)
2) 유 기형 : 부산대학 의과교수 (전)
3) 유 기선 : 의학 박사, 법률가
4) 유 시천 : 전 서울법대 학장(법학 박사)
5) 유 기진 : 미국 시카고에서 외과의사
6) 유 기묵 : 미국 이리노이주에서 의사
7) 장녀 유 기옥 : 용산에서 누가병원 경영
8) 차녀 유기숙 :약학사,전 숭실대학교 총장을 지낸바 있으며 역시
전 국무총리로 지낸 바 있는 이 한빈 박사의 부인
이다.
유 장로 후손이 106명인데 모두 출세하여 쟁쟁한 인물들이다.
 
하나님께서 그림자를 주신 이유
어느 날 우리 반 학생들을 데리고 운동장에 나가서 그림자에 대해 수업을 하던 중이었다. 학생들과 함께 여러 가지 그림자 모양을 만들던 중에 갑자기 나에게 이런 의문이 생겼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그림자를 주셨을까?” 그림자에 대한 수업을 다 마치고 학생들을 보낸 뒤에도 그 질문은 계속 내 마음을 맴돌고 있었다. 잠시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이런 대답을 주셨다. “그림자는 바로 너희들의 죄다. 내가 그림자를 너희 몸에 붙여둔 이유는 그 그림자를 보면서 너희들이 죄인임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그 시커먼 그림자, 그것은 바로 나의 검디 검은 죄였던 것이다. 영원한 빛 되신 그리스도 앞에 설 때 우리가 죄인임을 깨달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세상이 어두우면 어두울수록 사람들이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도 날이 흐리고 어두우면 우리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해가 가장 높이 떴을 때 그림자가 가장 짧은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가장 높이 영광 받으실 때 우리 죄에 대한 부담감도 가장 적어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높이 영광 받으시게 하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를 위한 일이다. 그림자 같은 죄를 없애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빛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나의 그림자를 보면서 내가 죄인임을 깨닫는다.

하나님은 화낼 모든 권한을 갖고 계신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분노를 깨닫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분노와 인간의 분노를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두가지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분노에 쌓인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기 중심적이고 화를 내며 난폭한 행동을 일삼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남에게 무시당하고 소홀히 여김을 받거나 그리고 속임수에 빠질 때 화를 낸다. 이것이 인간의 분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불순종이 언제나 그들을 파멸로 이끌기 때문에 분노를 발하신다. 어떤 아버지가 자기 아이가 자해하는 것을 그저 방관하고 있겠는가? 하나님은 정의에 입각하여 분노하신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우리의 죄악은 그의 거룩하심을 모욕하는 요소이다.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합 1:13). 하나님은 자기 자녀들을 파멸로 이끄는 죄악에 대하여 분노하신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한, 그는 자신의 피조물이 멸망에 이르고 자신의 거룩함이 인간의 발 아래 짓밟히는 것을 무관심하게 바라보고만 계실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자녀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것을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분노하실 수 있는가?” 하고 묻기보다는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보잘것없는 우리를 불쌍히 여길 수 있었을까?” 하고 질문해야 한다.
 
하나님의 선물
1875년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한 위대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된 아이가 태아났습니다. 글자보다 악보를 먼저 배웠다는 이 아이.
열살 때 빈 음악원에서 금메달을 받고 열두 살 때 로마 대상을 수상한 이 아이가 바로 그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크라이슬러입니다.
크라이슬러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후 사람들이 그의 재능을 부러워하고 칭찬할 때마다 이렇게 겸손하게 말했습니다. "지금의 제가 된 것을 제 능력보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저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름답게 노래하는 새들이 그 대가를 요구하는 것을 보셨나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음악을 제 명예를 위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금메달
미국에서 서부를 향한 개척 정신이 한창 활발하던 시대의 이야기다.
어떤 채굴자가 오랫동안 금광의 맥을 찾아 헤매었다. 그러던 중 그는 완전히 지치고 낙담하고 말았다. 그래서 어느날, 그는 몇십년동안 쥐고 일했던 장대를 내팽개쳐 버렸다.
그후 몇년이 안되어서, 거대한 금광맥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런데 금광이 발견된 곳이 그가 장대를 버린 곳에서부터 열한 발자국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그가 만일 그때 포기하지 않고 조금만 더 계속해서 나아갔더라면 큰 부자가 되었을 것이다.
우리도 바로 그 채굴자처럼 신앙 생활에서 금을 찾고 있다가 헛되이 내 팽개치는 수가 있다. 예수의 제자가 되어 그를 따르는 일은 간혹 신기루와도 같이 허망하게 느껴지기도 하며 신앙 생활 중간의 어려움, 영적인 우울증,질병 따위의 신체적 곤란 등이 때때로 우리를 지치고 낙담시키는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되고 지속적인 신앙의 길이 마냥 감미로운 것만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저 칙칙하고 씁쓸하기만 한 것은 또한 아니다. 우리는 다만 온전히 구원받고 선을 이룰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붙들어주시는 주님의 사역에 대해 충실하게 반응해 나가야 할 따름이다.
순종과 실행이 없는 고백은 섣부른 허튼 소리에 그칠 뿐이며, 정직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키우는 자라면 마땅히 인내와 더불어 지속적인 헌신의 삶을 일구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영구적인 좌절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보증하신 하늘나라의 금광맥을 간구해야 한다. 주님이 손수 달아주실 그 금메달을 소망하면서...
 

미즈노의 하나님
일본에 미즈노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미즈노씨는 세상에서 참 혹한 불구자인 것입니다. 전신이 해삼처럼 퍼져서 수족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며,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며 물론 글도 쓸 수 없습니다. 그가 의사를 발표할 수 있는 유일의 길은 눈을 반짝이는 것뿐입니다. 그가 작품으로 발표한 시는 그의 형수의 헌신적인 협조에서 이뤄 진 것입니다.
그가 시를 쓸 때에는 그의 형수가 일본어 50자표를 걸어 두고 막대기로 한 자씩 짚어 내려가다가 미즈노씨가 원하는 글자가 짚히면 그의 눈이 유난히 반짝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형수는 그 글 자를 백지에 써두고, 또 짚어 내려가다가 다음 글자를 쓰는 식으로 미즈노 씨의 마음에 있는 시가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 한 수를 쓰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두 사람의 인내가 필요한 것이며, 그 시가 바로 일본 문단의 걸작이 되고 베스트셀러가 되며, NHK가 특집으로 보도한 것입니다. 미즈노씨의 시집에‘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라는 것이 있습니다. 도대체 미즈노 같은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가 족하다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고 또 원망해도 부족할 터인데 말입니다.
파스칼은“사람은 같은 사건에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같은 조건에 살면서도 어떤 사람은 그 조건에서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어떤 사람은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고 세상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미즈노 씨가 체 험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우리들이 세상의 어떤 환경 속에서 든 오직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며 사는 삶
본문: 전도서 12:1-12
<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
지난 4월, 폐암 수술하신 아버님을 마지막으로 뵈러 온 가족이 LA에 갔습니다. 암 중에서도 폐암이 가장 힘들고, 수술 후에도 6개월밖에 살지 못한다고 들었기에 착잡한 심정으로 아버님을 뵈러 갔는데 80이 넘으신 아버님이 힘들어 하셨습니다. 특히 큰 병에 걸리고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자신감도 많이 없어지신 듯했습니다. 가족회의를 통해서 아버님이 힘드신 것 같으니까 아버님을 위로해 드리기 위해서 7남매가 한 달에 한번씩 돌아가면서 아버님을 찾아 뵙자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제가 없을 때 다른 형제들이 그런 얘기를 한 것을 듣고 좋은 얘기라고 여겼지만 저는 가슴이 덜컹 했습니다. LA에 한번 가려면 거의 백만 원 가까운 비용이 듭니다. 다른 형제들이야 전혀 문제될 것 없지만 목회자에게 그 비용은 정말 만만찮습니다. 전화만 하면 됐지 무슨 대단한 효자라고 그런 일에 비용을 들일 필요가 있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낭비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로 부모님 뵐 날이 얼마 없다면 그 일은 결코 낭비만은 아닐 것입니다. 부모님은 우리의 뿌리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자녀에게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그래서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이 땅에서 해야 할 어떤 일보다도 중요한 일입니다. 십계명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첫 번째 계명에서 네 번째 계명까지는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계명이 나오고, 다섯 번째 계명에서 열 번째 계명까지는 사람 앞에서 지켜야 할 계명이 나옵니다.
그 사람 앞에서 지켜야 할 첫 번째 계명이 바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입니다. 그 다음에 여섯 번째 계명인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나옵니다. 이 순서에는 심각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금방 느끼지 않습니까?
아마 하나님은 부모님 공경하지 않는 것을 살인하는 것보다 더 나쁘게 보실 것입니다. 우리는 부모님께 최대한 잘 해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잘 해 드릴 기회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되돌아보면 온통 받은 것뿐입니다. 이번에 가서도 부모님께 해 드린 것은 하나도 없이 그냥 받기만 하고 돌아왔습니다.
여러분! 이제부터는 부모님께 받을 생각은 하지 말고 드릴 생각만 하십시오. 부모님이 자녀에게 무엇인가를 줄 때에는 본능적으로 주지만 자녀는 그렇지 않기에 의지적으로 드릴 각오를 하지 않으면 부모님께 드릴 기회를 어느새 뺏기게 됩니다.
부모님께 받기만을 바라지 않고, 드리려고 하는 데에만 신경을 바짝 써도 어느새 보면 부모님께 드린 것보다 받은 것이 훨씬 많은 인생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야 합니다.
이번에는 감사하게도 교단 총회가 LA에서 열렸기에 아버님을 찾아뵐 수 있었습니다. 금년 4월에 6개월밖에 못 사신다는 그 6개월이 지나 이번에 아버님을 찾아뵈었는데 하나님이 도우심으로 인해서 폐 하나를 가지고도 지금 얼마나 정정하신 지 모릅니다. 요새는 시속 110킬로로 운전하며 다니시고, 내년에는 다시 학교도 가시겠다고 합니다. 활력이 넘치셨고 지금 상태로 보면 6개월은커녕 100살까지도 사실 것 같아 보입니다. 사람에게 건강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건강을 가지고 힘써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이미 늦은 인생은 없습니다. 모세는 80세부터 멋있게 하나님의 쓰임을 받았습니다. 지금부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면 어느 누구나 멋진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런 꿈을 꾸어야 합니다. 남은 생애로 거룩한 작품을 남겨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서 이미 늦은 인생도 없지만, 젊다고 시간을 흘려보낼 인생도 없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빨리 가는지 모릅니다. 우리도 항상 건강하게 사는 것만은 아닙니다. 제가 작년에 눈이 침침하고 성경이 잘 보이지 않아 큰 글자 성경으로 바꿨습니다.
그래도 글자를 볼 때마다 무엇인가 초점이 안 맞는 것 같아서
그저 잠을 많이 자지 않고 컴퓨터 앞에 있는 시간이 많아서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우연히 아버님 안경을 한번 껴보고 참 잘 보이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저도 노안에 접어든 것입니다. 비로소 저도 나이가 드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우리의 건강이란 것이 그렇습니다. 언제 건강이 나빠질지 모릅니다. 본문 1절 말씀대로 언제 곤고한 날, 아무 낙이 없다고 말할 날이 올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건강할 때 힘써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시간, 우리의 만남, 우리의 헌신, 우리의 우정, 우리의 사랑이 다 중요합니다. 우리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서로를 소중히 여기며 사명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 평소에 느끼지 못한 사랑의 발견으로 인한 경이 >
이번에 10여일 간 한국을 떠나 있으면서 가족과 교인들이 참 보고 싶었습니다. 3분 전도사님과 2분의 안수집사님, 기관장들, 지역장들과 구역장들, 지금은 교회 일에 많이 참여하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지만 앞으로 잘 헌신할 분들, 그리고 최근에 새롭게 등록한 성도들, 인터넷 식구들이 다 그립게 느껴졌습니다. 이곳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는 같은 시간에는 저도 똑같이 이곳을 생각하면서 사회 보시는 김건환 집사님과 성가대원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을 마음속에 그렸고, 또한 예배 광고 시간에 재미있게 체육대회 광고를 하실 남주희 집사님을 생각하면서 미국에서 혼자 정신 나간 사람처럼 좋아서 웃었습니다. 하나님도 웃으셨을 것입니다. 평소에 잘 느끼지 못한 사랑을 발견한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목회자에게 교회를 잠깐 떠나 있는 안식년이 중요한 것도 새삼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대개 그 자리를 떠나보아야 그 자리가 주는 은혜와 감동을 새롭게 깨닫습니다. 교회를 한 주간 빠졌는데도 그리움이 컸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귀국하고 싶었습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허겁지겁 김치찌개, 고추장, 라면을 먹고 나니 살 것 같았습니다. 한국을 떠나니 김치도 그리운데, 교회가 얼마나 그리운지는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성도님들이 한 주간 주일예배를 빠지면 이런 그리움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한 주간 주일예배를 빠지면 이런 그리움이 있습니까?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서로를 잠깐 못 만나 그리워할 때 그 그리움 안에는 참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그러한 그리움으로 어떤 분들은 매주 2시간이 넘는 거리를 초월해 교회를 다닙니다. 이 근처에 제가 지금 알고 있는 분들 중에서도 그런 분들이 몇 분이나 있습니다.
거리가 멀면 대개 신앙생활에 손해가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육체는 피곤해집니다. 그러나 그 먼 거리까지 초월할 수 있다면 그 신앙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가 됩니다. 그때에는 육체는 피곤을 느끼지만 마음은 하늘 높이 올라가는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 기쁨이 있기에 어떤 분은 몇 년을 그렇게 하다가 결국 교회 근처로 이사옵니다. 그런 신앙은 "다 똑같은 교회지!"하며 금방 교회를 바꾸는 신앙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나에게 오만 정을 준 교회에 대한 그리움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다니는 교회가 떠나 있으면 그리워지는 교회가 되길 바랍니다.
한 주일을 빠지면 교회가 궁금하고, 성도가 보고싶은 마음이 있는 교회가 아니라면 '내가 다니는 교회'가 그저 '내가 다니는 교회'이지 아직까지는 '내 교회'가 아닙니다. 아직 '내 교회'가 없다면 빨리 내가 땀과 눈물을 흘릴 '내 교회'를 찾아야 합니다. 지나고 나면 큰 영상을 남기는 그런 그리움이 넘치는 교회가 있는 것이 행복입니다. 많은 군중 틈에서 교제하고 즐기는 교회가 아닌 내 땀과 눈물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 시간이 지나면 그리워지는 교회 >
이번에 돌아오는 길에 샌프란시스코에 하루 들렸다가 왔습니다. 오직 한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 유명하다는 금문교를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아는 분들이 몇 분 있었지만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습니다. 잠깐 들리는 것이고, 아름다운 금문교만은 혼자 음미하며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아름답기에 죽어도 그곳에서 죽고 싶다고 그곳까지 가서 자살할까?"
공항에서 4시에 차를 렌트하고 5시쯤에 금문교를 통과했습니다. 통과하자마자 조망지점(vista point)로 가서 약 20분 동안 금문교를 감상했습니다. 그저 그랬습니다. 혼자 보니까 아름답다기보다는 쓸쓸하고 처량한 느낌이었습니다. 교인들이 같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족들도 없으니까 하나도 재미가 없었습니다.
"내가 이것을 보려고 호텔비와 렌트카 비용으로 200불을 들였다니 정말 아깝다!"
다음 날 아침,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아침 8시 30분에 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 공항으로 들어올 때 돈 아까운 생각에 괜히 샌프란시스코에 들렸다고 생각했습니다. 허전한 마음으로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비행기 안에서 계속 저의 머리 속에 깊은 영상을 남기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금문교였습니다. 볼 때는 그저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나니까 그 영상이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미국에서 멀어질수록 그 영상은 더 남았습니다. 그 뒷맛이 정말 좋았습니다. 확실히 금문교는 사람들로 가득한 디즈니랜드나 유니버셜 스튜디오와 달랐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저 그런 것 같았지만 더 영상에 오래 남아있는 것은 금문교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때 생각했습니다.
"교회도 시간이 지나면서 이렇게 오래 영상에 남는 금문교와 같은 교회여야 한다!"
많은 분들이 교회생활도 디즈니랜드나 유니버셜 스튜디오에서 하는 것 같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회생활은 많은 군중 속에서 휩쓸려 즐기는 생활이 되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의 교회생활은 어떻습니까? 시간이 지나면서 더 영상에 남게 될 생활입니까?
< 창조자 하나님을 기억하며 사십시오 >
우리의 기억 속에는 항상 그런 아름다운 영상들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건강할 때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며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 1절에서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청년의 때가 언제입니까? 20대와 30대입니까? 아닙니다. 지금이 청년의 때입니다. 뚜렷한 삶의 목표가 없는 20대보다 삶의 목표가 분명한 때는 다 청년의 때입니다. 지금 우리가 나의 사명을 인식하고 살면 우리는 언제나 청년의 때를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처럼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면 얼마나 많은 은혜 체험이 있는지 모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미리 준비한 돈이 한 푼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신기하게 하나님께서 필요한 때마다 도와주셨고, 나중에는 돈이 남았습니다. 그런 믿음의 체험이 있으니 어떤 상황도 겁나지 않습니다. 믿음의 체험이 중요합니다.
이번에 미국에서 총회를 마친 다음날 식당에서 한 목사님과 식사를 마치고 나왔는데 누군가 제가 몰고 간 아버님 차의 유리창을 깨고 제 서류가방을 들고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여권, 국제운전면허증, 휴대폰, 총회회의록과 성경 등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돈도 안 되는 것을 훔쳐간 도둑이 밉기보다는 오히려 불쌍한 마음이 들어서 하나님께 도둑이 성경까지 훔쳐갔는데 성경 보고 회개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식당 주인은 자기 주차장에서 도둑 맞아 안절부절못하는데 저는 마음이 편했고, 또한 이런 경미한 사건으로 나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때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어렵고 불편한 상황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 인생의 브레이크가 없다면 우리는 교만해져서 얼마나 파괴적으로 살겠습니까?
저는 이번 주에 감기몸살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진실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감기 몸살이 창조하셨기에 자기 몸을 학대하다가 잠시 쉬지 않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감기 몸살이 얼마나 인생에 큰 도움이 됩니까? 그처럼 모든 상황과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하는 믿음으로 사십시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며 산다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반드시 선한 길로 인도하심을 믿으며 사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뜻과 비전을 생각하며 사십시오 >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며 산다는 것은 항상 하나님을 머리 속에 그리며 하나님의 뜻과 비전을 생각하며 산다는 것이고, 항상 하나님 말씀을 열린 마음으로 받으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 맺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돈이 필요하고, 학력이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하고, 그와 함께 운도 따라야 합니까?
아닙니다. 마태복음 13장에 의하면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 옥토밭이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는 마음에 따라 열매가 달라지고, 축복도 달라지고, 행복도 달라집니다.
오늘 전하는 말씀도 길가밭, 돌밭, 가시밭, 옥토밭 등의 여러 밭에 떨어질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도 옥토밭 마음으로 받으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실패는 환경 탓도 아니고, 건강 탓도 아니고, 사람 탓도 아니고, 내 마음 탓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비전이 회복되고, 말씀에 열린 마음이 되면 길은 열립니다.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배하는 사람과 설교를 듣는 사람도 많고, 교회 일을 하는 사람은 많은 것 같아도
하나님을 생각하기보다 다른 것을 더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많은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1순위에 두기보다, 돈, 자녀, 출세에 밀려 4-5순위쯤에 두지는 않습니까?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자녀의 앞날도 그렇습니다. 그것을 인식하며 항상 하나님을 삶의 1순위에 두고 사는 분이 예수님의 제자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제자에게 축복의 길을 여시고 좋은 사람도 붙여주실 것입니다.
어느 날, 인도의 고든 맥스웰 선교사가 유학 경험이 있어 영어를 아는 수도승에게 언어를 가르쳐달라니까 수도승은 전도하려고 접근하는 줄 알고 응하지 않았습니다. 선교사가 "절대 전도하지 않을 테니까 꼭 가르쳐달라"고 부탁해도 소용없었습니다. 그러면서 "당신과 가까이 지내며 믿지 않은 사람 있습니까?"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가슴 벅찬 말입니까? 모두 이런 말을 들을 수 있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항상 교회를 기억하며 사십시오 >
그리고 또 한 가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삶의 구체적인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사람은 교회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 구체적인 사랑의 손길을 베푸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데에는 많은 숨은 손길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제 저도 열심히 말씀을 준비했지만, 어떤 분은 힘써 청소하며 예배를 준비했습니다. 오늘 체육대회도 보이지 않는 수고의 손길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교회의 비전은 저절로 성취되지 않습니다. 누군가 수고해야 그 비전이 성취됩니다.
이제 여러분들의 손길도 교회를 위해 수고하는 주인의 손길이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에는 대접받는 손님도 필요하지만 손님보다는 주인이 되기를 더욱 힘쓰십시오. 우리가 주는 삶보다 받는 삶에 익숙하다는 것은 가장 큰 반성 제목일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받는 삶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그 삶이 달라집니다. 은혜 받은 삶이란 받는 삶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주는 삶을 실천하는 삶을 말합니다.
왜 교회가 중요합니까? 주는 삶을 실천할 수 있는 소중한 터전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주는 삶을 실천하면 우리의 삶에는 주고받는 삶의 균형이 생길 것입니다. 익숙했던 받는 삶을 줄이고, 낯선 주는 삶을 늘리면 삶의 지평은 반드시 넓어집니다. 교회는 주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주는 삶, 섬기는 삶, 나누는 삶을 실천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복음을 나눠주고 사람을 구원하는 구원의 방주 역할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왜 이 분당 지역에 세워졌습니까? 그 목적을 항상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성남과 용인 지역을 중심으로 구원받을 사람을 찾고 주님 제자를 만들라는 뜻입니다.
교회가 크든 작든 상관없이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되면 됩니다. 우리는 그런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교회의 주역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상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사람이 교회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기도하며 섬기는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 일을 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영적 순례자들로 가득한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오늘 새벽에 저는 초대교회 교인들을 생각하며 충격 받은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도대체 그들은 어떤 교인들이었기에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30년만에 당시 고린도, 에베소, 로마와 같은 유력한 도시들을 복음으로 정복할 수 있었습니까? 그들의 숫자는 적었습니다. 그들에겐 돈도 없었고, 학력도 없었고, 지위도 없었습니다. 또한 큰 예배당도 없었고, 좋은 프로그램도 없었고, 교회성장 세미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바로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그 영향력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나는 순례자다"라는 철저한 신분의식에서 왔습니다. 우리도 그런 철저한 신분의식을 가지고 우리 주변에 영향력을 미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영원히 정착할 자가 아니라 사명 받아 잠시 와서 사는 순례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수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파하고 오라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명을 가지고 힘써 일한 후에, 하나님 품에 안긴다면 얼마나 축복 받은 삶입니까? 세월이 참 빠릅니다. 금방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때가 우리에게도 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우리는 항상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손길이 있음을 기억하며 사시고, 항상 하나님의 뜻과 비전을 가슴에 품고, 더욱 교회를 사랑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된다.
얼마 전 KBS-TV가 밤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욱 요란해지고 사치와 환락이 판치는 강북과 강남의 유흥가를 현장 르포로 취재했습니다. 자정이 넘자, 밤이 되면 더욱 매상고를 올릴 수 있다는 과소비와 충동의 거리는 새벽 4시가 되어도 꺼지지 않는 네온사인의 요란함과 흥청망청 자기의 젊음을 술과 성적욕망으로 채워나가는 돈 많은 젊은이들의 비행, 국산차가 아닌 외제차가 있어야 더 쉽게 젊은 여인들을 유혹하고 노닐 수 있다는 새 풍속도가 담겨져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취재 기자는 '어찌할꼬?'하며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비단 그곳을 찾는 젊은이들만의 행동양식이겠습니까? 우리 시대, 우리 모두의 삶에 감추어진 뒷면은 아니겠습니까. 한국민 전체의 절반 이상이 고스톱을 한다는 이야기나 술 소비량이 세계 최고의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 성폭행이 늘어나고 마약 상용자가 늘며 부모를 구타하는 반인륜적인 자녀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닌 바로 우리의 현실적인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러한 불경건과 불의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극복해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이 교회이어야 하고 그리스도인들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과연 교회는 세상의 빛이 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이 되고 있습니까?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하여 거짓과 불의와 불경건을 회개하라고 할 만큼 하나님의 거룩한 영에 붙잡힘을 받고 이 시대 앞에 거룩한 빛을 비추며 서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이 시대 정신과 사고에 의해서 오히려 교회가 조정을 받으며 그 세속정신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 모두의 갈등과 혼란과 위기가 있습니다. 교회가 가야 할 길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어야 함을 피부로 느끼고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교회자체가 세속정신의 물결에 너무 깊이 발을 들여놓고 있다는 현실 떄문에 자조 하고 있습니다. 교단의 총회장을 선출하는데 금전과 향응이 난무하고, 지방색의 결속과 배타가 드러나는 것을 보면서도 이것이 어쩔 수 없는 당위성이라 수용하며 양심의 가책에서마저 면제를 받으려 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회가 도덕적 부패와 타락에서 회복해야 함을 역설한다는 것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러한 우리의 사고와 행동양식에는 신앙과 신학의 문제가 깔려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두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어지럽고 부패해도 그래도 나는 이런 사람들보다 윤리적으로 조금은 노력하고 애쓰는 도덕론자라는 자부심이며, 다른 하나는 만약 이 부정과 부패와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행해진다 해도 나는 예수를 믿고 있기 떄문에 안전하고 만약 내게 그 심판이 다가오더라도 불신자보다는 늦게 그리고 적게 주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과 내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다. 내 영혼을 구하려는 노력과 내 이웃을 도우려는 노력도 하나다.(토인비) 행복이란 남을 행복하게 해 줄 때 얻어지는 부산물이다. 행복은 설날처럼 모두 나눠갖는 기쁨이다. 미국 가요 가운데 <행복하고 싶어라. 그대를 행복하게 할 때 까지행복할 수 없어라.>이런 구절이 있다. 남녀의 애정표현이지만 진리다.
하나님과 남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 사람은 자유인이다. 주여, 내게 밀알처럼 썩는기쁨을 주시옵소서 나룻배처럼 살게 하소서 이름없이 살게 하소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는 욕구가 있어야 합니다.
무디는 "기도는 내 필요에 의하여 하나님을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나를 조종해 맞추는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동물 우화에서 사자는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고, 사슴은 "오늘도 사자의 위협에서 안전하게 풀을 뜯을 수 있도록 지켜주십시오"라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실지 의문이 생깁니다.
만약 이것이 자신과 관련된 문제라면 결정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올바른 기도'에 대하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 주여 당신은 무엇이 최선인지 아십니다. /
모든 일을 당신의 뜻대로 이루소서 /
당신이 선택한 것을, 당신이 선택한 양만큼, / 당신이 선택한 순간에 주옵소서. /
당신이 원하는 곳에 나를 두시고 /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나를 다루소서. /
나는 당신의 손 안에 있습니다. /
당신의 뜻대로 인도하소서. /
나는 무슨 일이든 준비된 당신의 종입니다 /
나 자신이 아니라 당신만을 위해서 살기 원합니다./
이렇게 완벽하게 살 수 있기를 얼마나 바라는지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들어 응답하시며, 응답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셨는데 내가 내어 쫓았지요
얼마전 시카고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주 부잣집 외아들이 이상한 마비병에 걸려서 걷지를 못했다. 또 한 가난한 과부에게 외아들이 있었는데 그 외아들도 똑같은 마비병이었다. 그 부자는 오스트리아에서 그 마비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를 많은 돈을 들여서 모셔왔다. 그 부잣집 아들의 병은 치료되었다. 그 과부의 아들은 신문을 가르키면서 말했다.
"엄마, 오스트리아에서 온 의사가 그 아이의 병을 고쳤대요. 엄마, 나도 걸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러자 어머니는 "얘야, 그것은 생각도 마라. 우리는 매 끼니의 빵을 걱정하며 사는 형편이고 그 아이의 아버지는 시카고에서도 제일 부자가 아니니."
그러자 아들이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그렇지만 기도해 보는 일이라면 해로울게 없지 않아요."
그래서 어머니와 아들은 하나님께서 그 의사를 자기의 집으로 보내 달라고 기도를 했다.
그 의사는 매일 오후마다 산보를 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 날도 산보를 하는 도중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때 보니 어떤 집의 부인이 의자들을 밖에서 집으로 들여놓고 있었다. 그 의사는 부인에게 집에 들어가 잠깐 비를 피해 갈 수 없겠느냐고 했지만 그 부인은 의사를 집안에 들어오게 하지 않고 그냥 처마끝 난간의자에 앉아서 기다리게 했다. 이튿날 아침, 조간 신문엔 오스트리아에서 온 의사가 어제 산보를 나갔다가 비를 맞고 감기가 들어서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기사가 나왔다. 그 의사가 비를 맞고 안에서 잠시 쉬어가기를 원했던 집은 그 여인의 집이었고 그 집안에는 마비병이 든 아들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 후 여자는 정신이 이상해져서 정신병 요양원에 들어갔는데 그 부인은 항상 똑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나녔다.
"하나님이 그 분을 우리집에 보내주셨는데도 내가 그 분을 내어 쫓았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기도의 응답은 내어쫓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마무리 손질
미국의 오랜 시에 “거장의 손이 닿을 때(The Touch of the Master’s Hand)”라는 시가 있다. 경매장에 낡은 바이올린이 있 었다. 3달러까지 부르는 사람이 있고 더 이상은 없었다. 이때 한 노인이 나타나더니 바이올린의 먼지를 털고 마치 보물을 다 루듯 자기의 손수건을 꺼내 구석구석 닦았다. 그리고 현들을 조여 음정을 잡고 연주를 시작하였다. 그 아름다움은 천사의 음악같이 청중을 황홀하게 했다. 한 곡을 끝내고 노인은 감 회 깊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잘 있었느냐, 내 사랑하는 아들아. 40년 만에 너를 만져보는구나.” 그리고나서 다시 연주를 시작하였다. 경매는 갑자기 활기를 띠어 결국 이 바이올린은 3 천 달러에 낙찰된다는 내용의 시다. 이 시는 누더기가 된 인간, 죄와 허물로 값없는 인간, 나 같은 죄인에게 거장(Master는 주 님의 뜻으로 사용)의 마무리 손질이 끝났을 때 아주 새로운 가치가 부여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광선 속에 먼지처럼 드러 나는 인간의 전부를 볼 때 걸작품은 하나도 없다. 오직 필요 한 것은 하나님의 마무리 손질이다. 그리스도의 피로 말끔히 씻음을 받는 일, 만신창이인 나를 하나님의 마무리 손질인 그 리스도의 십자가에 맡겨 용서를 받고 새사람이 되는 길만이 나의 인생을 걸작품으로 남기는 길이다.

하나님의 집
아주 꼬마 여자아이가 한 신사를 만났습니다. 그 신사는 하나님의 집을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꼬마 여자아이는 이 신사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왜 교회에 가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꼬마아이는 또 "선생님같은 분은 먹을 음식이 필요할텐데 어떻게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신사는 대답했습니다. "기도하라고 했는데 누가 너에게 먹을 것을 주니? 기도한다고 해서 먹을것을 주는 사람이 있니? 그리고 또 네가 교회에서 받는 음식이란 어떤 음식이냐? 도대체 어떤 음식인지 말해보지 않겠니? 라고 했습니다.
꼬마 여자아이는 점잖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걱정마세요, 아무걱정 마세요, 교회에서 저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가 공급받는 음식입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우리 어머니는 가난하시지만, 그래서 저에게 먹을 것을 주실수 없을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매 주일 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떡을 먹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가 고파서 괴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지냅니다. 배가 고프다는 느낌을 가져본 일이 없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생명의 떡은 이처럼 배고픔을 느끼지 않게 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 신사는 그 꼬마 여자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신사는 신기하기도 하고 놀라워서 설레이는 마음으로 교회 예배에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그 신사는 그의 결심을 지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습니다. 그후 그 신사는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면서 받는 은혜의 큰 기쁨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세계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빠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예배에 충성스럽게 참석하는 나라가 그린랜드 교인들입니다. 그들은 적어도 기후때문에 공공예배를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린랜드는 너무나 춥기 때문에 숨이 막히고 침을 뱉으면 얼어붙을 정도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의 얼굴에는 "아기 고드름"이 매달리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곳 사람들은 멀리 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린랜드 사람들은 남자나 여자나 아이들이나 누구든지 믿는 사람들은 눈과 얼음과 폭풍을 헤치며 교회로 또는 기도하는 곳으로 나아갑니다.
그린랜드 사람들은 기후 때문에, 날씨 때문에 교회에 가시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는 신실한 기독교인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어거스틴의 <고백록>과 루소의 <참회록>과 톨스토이의 <참회록>은 3대 참회록에 속하는 것입니다. 가장 진지한 인간들의 고백입니다.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보면 톨스토이는 죽음의 문제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야스퍼스도 모든 불안의 근원에는 죽음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죽음의 공포 때문에 많은 밤을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톨스토이는 그리스 정교의 가정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세례를 받았고 거기서 자라났습니다. 유년 시절, 소년 시절, 청년 시절에그는 신앙 교육을 줄곧 받아 왔습니다. 러시아의 기독교 귀족으로서 그는 철저한 신앙 분위기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18세때 아무 것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완전히 이교도가 되었습니다. 합리주의의 물결이 밀려 올 때 특별히 정서가 다
감했던 톨스토이가 그리스 정교의 신앙을 그대로 지키기에는 너무도 허탈했을 것입니다. 18세 때부터 교회도 기도도 다 졸업해 버렸습니다. 신앙을 버린 후에 그에게한 가지 새 신앙이 생겼는데, 그것은 인간이 자기의 힘으로 노력하면 완전 상태에이른다는 인간 완성의 신조와, 세계와 인류는 진화해서 무한히 발전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합리주의와 인문주의가 지니고 있는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을 그대로 신봉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런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사조 속에 얼마 동안 살다가 '나는 공포심과 혐오감과 마음 아픈 것으로 꽉 차 있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또 그는 '나는 전쟁 때 많은 살인을 했고 어떤 사람에게 결투를 걸기도 했고 도박을 하기도 했고 농노들을 착취하고 농노들을 처형하고 농노들을 희롱했고 사기도 했고 간통도 했고
훔치기도 했고 폭행도 했고 살인도 했다. 내가 범하지 않은 죄는 하나도 없다. 아!나는 죄를 많이 범한 사람이다. 그런데 친구들은 나를 도덕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라고 참회했습니다.
그러다 그는 그의 형님이 죽은 것을 보았습니다. 파리에 갔을 때는 많은 사형수들이 죽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기를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죽음이라고 했습니다. 그 죽음의 공포 때문에 그는 인간의 가장 실존적인 기본 문제가 되는 죽음을 중심으로 다시 한 번 인간을 죄에서 캐 보기 위해 과학을 다른 각도에서 밀고 나가 보기도 하고 철학적인 사고 방식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도 하고 상식에 물어 보기도 했습니다. 모든 각도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인문 지식의 모든것을 총동원해서 이 문제의 해답을 구하려고 했으나 아무 데서도 그 해답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기독교의 신학이나 교리나 의식에서도 해답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그는 마침내 소박한 농민과 서민층에 살아 있는 원시적인 복음 신앙 가운데서 그 답을 얻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가 없다는것이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는 것이로라(롬14:7,8)
 
하나님과의 관계
우리가 삶을 성공적으로 살아가려면 나 자신의 노력만 가지고서는 안 된다. 우리의 앞을 가로막는 갖가지 어려운 환경과 여건을 극복해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 힘이 아닌 다른 힘이 필요한 것이다. 유명한 러시아의 작가 톨스 토이는 원래 귀족출신으로 온갖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살아왔으나 참 만족을 얻지 못했다. 그는 작품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갈채를 받았으나, 죄에 대한 공포와 불안한 마음으로 늘 괴로움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적한 시골 길을 걸어가던 중 어느 시골 농부를 만났는데, 그 얼굴에는 유난히도 평화가 깃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그 농부에게 가서 평화스런 삶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 농부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 때문에 언제나 내 마음은 기쁠 뿐이다"라고 했다. 그말을 들은 톨스토이는 그날부터 진지하게 하나님을 찿기 시작하였다. 그후 결국 그는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과거의 불안과 공포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사는 길이다"라고까지 고백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적인 생활을 하는 것 같아도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맺어지지 아니하면 그 사람은 여전히 불안한 법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이 현실에서는 그 어떠한 것에서도 참된 의미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 만의 시간, 하나님의 시간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1:6-7)
몇 년 전에 우리는 결혼 25주년을 기념했다. 우리는 25년이 넘도록 함께 살아왔다. 우리는 나날이 새롭게 성장하고 있었으며 과거보다 더 아름답게 살아왔지만
우리는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다.
캘리포니아로 이사왔을 때 많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우리는 생애의 가장 중요한 것이 결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우리는 월요일 밤에 데이트 를 하기로 결정하고, 20여년동안 월요일마다 우리들만의 시간을 즐긴다.
이때 우리는 잘못된 것은 고치고 반성한다.
나는 결혼과 가족들을 매우 소중히 여기며, 우리는 서로 이해한다. 이리하여 우리는 사이좋게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심은대로 거두는 하나님의 법칙
이것이 곧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6-7).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래서 아름다운 신자가 되기로 결심한 사람들을 만나면 기쁘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 어떤 놀라운 일을 행하시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하나님과 함께 하면 무한한 가능성이 생긴다. 나는 어릴 때 아이오와 농장에서 경험한 것으로 인해 이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
우리에게 해가 거듭할수록 가족들에게 나누어 줄, 그리고 시장에 내다 팔아야 할, 또 우리가 이용해야 할 농작물이 점점 더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버지는해마다 땅을 더 많이 갈고, 더 많은 씨앗들을 뿌려야 하겠다.
나는 이때 진리 하나를 배운 것이다.
많이 필요하면 당신은 더 많이 주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큰 수확을 원한다면 당신은 더 많은 씨앗을 뿌려야 한다.
자연의 법칙과 성장의 법칙은 일치한다.심은대로 거두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원리’
미국의 어느 부둣가에서 있었던 일이다.어느날 정기 여객선이 도착해 사람들이 배에서 내리는 도중 그만 한 여자가 발을 헛디뎌 바다에 빠지고 말았다.
사람들은 모두 고함을 치면서 발을 동동 굴렀으나 선원들은 이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기만 했다.그러자 사람들은 이런 무책임한 선원들이 어디 있느냐며 거세게 비난하기 시작했다.선원들은 여자가 두 번이나 물 속에 떠올랐다 잠겼는데도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그런데 여자의 힘이 완전히 소진된 것을 알고서야 한 선원이 비호같이 다이빙을 해서 축 늘어진 그 여자를 구해서 올라왔다.그러자 사람들은 왜 처음부터 빨리 구해주지 않았느냐고 그 선원을 나무랬다.이에 그 선원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모르시는 말씀들 하지 마십시오.사람이 물에 빠져 자기 힘으로 살아보겠다고 안간힘을 쓸 때는 어느 장사가 구하러 들어간다고 해도 빠진 사람의 힘에 눌려 같이 빠져 죽게 됩니다.그래서 기다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원리도 이와 비슷하다.역경 가운데 사는 비결은 나를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
룬즈는 `당신은 학교 교실에서도 생활에서도 하나님을 비웃었다.
그러나 당신의 일생을 끝마쳐 정리하는 날 당신은 그 분을 결코 비웃지 못할 것이다.`
씨 마이어는 `성공적인 결혼은 항상 삼각형으로 이루어진다. 한남자, 한여자 그리고 하나님이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청지기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고 싶어합니다.이것은 인간의 인지상정이요,당연한 소원입니다.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토록 오래 살려고 할까요.주님은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특히 소유와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십니다.여기서 우리는 선한 청지기의 기본 자세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하나님의 주권성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마 25:14).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소유하고 있는 동안 먼저 감사해야 하고 주인의 뜻을 좇아 잘 관리해야 합니다.그리고 달라고 하실 때 언제든지 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이것이 바로 청지기의 정신입니다.
둘째,하나님의 공평성을 믿으라는 것입니다.`각각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마 25:15).
우리는 각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나만의 색깔과 개성,재능과 능력이 있습니다.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신경써서 만드신 걸작품인 만큼 크고 작음,많고 적음을 떠나 나의 길,나의 삶,나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친히 판단하신 재능에 맞게 달란트를 주셨으니 이 공평성을 인정하고 감사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하나님의 심판성을 인식하라는 것입니다.`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 새'(마 25:19). 인생은 심판의 연속입니다.이 세상에 여러 불합리한 일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아직도 인과응보가 삶의 원리입니다.즉 심은 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누구를 원망할 것도 불평할 것도 없습니다.우리의 삶에 심판성이 있음을 알고 복 받게끔 살아야 할 것입니다(갈 6:9).선한 청지기의 최고 자질은 `충성'입니다.그래서 성경은 거듭 충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딤전 1:12,고전 4:12,계 2:10).
충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십자가와 부활의 은혜에 감격해야 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하는 것입니다.선한 청지기의 비결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교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살인을 한 후 방황하다가 창녀인 소냐를 찾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기가 살인자임을 고백합니다. 그때 소냐는 자기 방에 걸려있는 십자가를 가리키면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의 기도를 하라고 권합니다. 십자가는 성스러운 교회당의 꼭대기에나 아니면 믿는 사람의 목걸이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소냐같은 창녀에게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십자가는 너무 성스러운 것이므로 창녀나 살인자에게는 필요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을까요?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무한하심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그것을 목걸이로 걸고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자들의 것이 아니라,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자기 가슴을 치며 죄를 슬퍼하는 자들의 것입니다. 2000여 년 전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모여들었던 것처럼, 참된 하나님의 교회는 가난하고 죄인이라고 따돌림을 받는 사람들이 기쁨으로 말씀을 듣고 구원을 얻으려고 나올 때 그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교회입니다
 
삶을 하나님께 투자하라
아이젠하워는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를 했습니다. "저는 꼭 사고 싶은 젖소를 보았습니다. 그래서 늙은 젖소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이 젖소의 혈통은 어떻게 됩니까 ?' 그러자 젖소 주인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또 물었습니다. `이 젖소한테서 일 년 동안에 얻을 수 있는 우유의 양은 얼마나 됩니까 ?' 그러자 젖소 주인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소는 정직한 소이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우유를 모두 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젖소와 같습니다. 저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여러분께 드리겠습니다."
아이젠하워가 국민들에게 했던 이 약속을 우리가 하나님께 할 수만 있다
면 얼마나 좋을까요 ?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위해 바치는 삶"은 진정 풍요로운 삶일 것입니다.
"주님, 저희에게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위해 바칠 수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위해 무엇을 드리고 계십니까 ?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을 위해 투자하라. 그리하면 상상할 수도 없는 소득으로 보상을 받을 것이다.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
지난해 2월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새로운 일을 찾아 낯선 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러가는 도중 한 건물이 유난히 눈에 띄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건물에 온기 같은 게 느껴졌다. 한참 동안 그 건물을 바라보던 난 어느새 기도하고 있었다. “하나님 제가 저 건물 안에서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동안 하고 싶었던 공부도 하고 일자리도 구해야 겠지만 언제나 면접 후 내게 돌아온 말은 다음에 연락드리겠다는 소리뿐이었다. 그렇게 1년이 끝나갈 무렵 12월 말에 우연히 선배로부터 전해들은 전화번호 하나로 한 회사에 전화를 했다. 이력서를 가지고 오라는 말에 그날 당장 찾아갔다. 그곳은 놀랍게도 10개월 전 내가 멈춰서서 잠시 기도드렸던 바로 그 건물이었다. 그러나 면접을 마친 내게 돌아온 말은 다음에 연락드리겠다는 내용이었다. 이번에도 안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10개월 전의 그 기도에 이제는 응답해 주시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음날 다시 한번 사장님과의 면접이 있었고 나는 그 곳에 취직이 되었다. 더욱 기쁜 건 사내에서 예배도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십일조와 감사헌금을 다시 드리면서 흘렸던 눈물, 그 눈물은 찬양처럼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의 고백이었다.

진정한 소망의 원천-하나님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42:5).
소망은 인간에게 필요한 가치관 7가지중 7번째이다.
나는 어느 유명한 정신과 의사가 소망이 갖는 힘에 대해 말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병원에는 매일 절망적이고 생기없는 눈에 빛이 없는 맥빠진 환자들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카운셀링을 통해 그들이 전적으로 변화되고 있는 것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갑자기 생기없는 눈빛이 살아납니다. 반쯤 감겨진 눈이 크게 떠지고 활기가 생깁니다. 혈색도 붉어집니다. 왜일까요? 소 망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 의사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소망의 중요성을 설명한 것이다.
진정한 소망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그것이 인간을 개조시킨다.
당신은 분명'생명이 있는 한 소망은 있다'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바꾸고 싶다.
"소망이 있는 한 생명이 있다!"

당신과 하나님만의 공간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여호와여 열납(悅納)하시는 때에 나는 주께 기도하오니 하나님이여 많은 인자와 구원의 진리로 내게 응답하소서"-시 69:13.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시 32:6.
복음 전도자인 폴 레이더 목사의 형제는 자그마치 열 명이나 되었습니다 . 때문에 레이더 목사의 어머니는 날마다 전쟁을 치루는 듯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때때로 아이들로 인해 화를 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레이더 목사의 어머니는 잠시 동안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다시 돌아와서는 찬송가를 흥얼거리며 하던 일을 다시 하곤 했습니다. 그 동안 다락방에 올라가 기도를 하고, 기도를 통해 위로와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화를 억제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 당신은 어떤 방법으로 화를 풀고 계십니까 ? 당신에게도 화가 날 때마다 달려가 기도할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있습니까 ?
"주님, 저희의 삶이 저희를 구석으로 몰아붙일 때 제일 먼저 주님 앞으로 달려 갈 수 있는 믿음이 저희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갚으시는 하나님
1940년경 마닐라에 사는 10살 된 소년이 자전거를 사기위해 저축을 시작했다. 그게 최고의 소원이었다.
어느날 저녁 아빠와 엄마가 얘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다른나라에서는 식량이 없어 수많은 어린이들이 죽어간다는 얘기였다. 소년의 마음이 움직였다. 다음날 아침, 돼지 저금통을 깨뜨려 저축한 14페소를 가지고 빵집으로 달려갔다. 소년이 살 수 있는 금액만큼 빵을 사서 손수레에 가득 싣고 그 지방의 YMCA 에 가지고 왔다. 소년은 이 빵을 굶주린 어린이 둘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고 가버렸다. 소년이 돌아가자YMCA 간사는 전화를 걸어 크리스챤 회원들을 긴급 소집하였다. 회원들이 도착되었을 때 한 소년의 관심과 희생에 대해 얘기했다. 회의가 끝나고 소년이 가지고 온 빵을 경매에 붙였는데 한 부인이 소년에게 자전거를 살수있는 돈을 주면서 하나님은 결코 사람에게 빛지지 않는 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하나님의 집
아주 꼬마 여자아이가 한 신사를 만났습니다. 그 신사는 하나님의 집을 어떻게 들어갈 수 있는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꼬마 여자아이는 이 신사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은 왜 교회에 가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 꼬마아이는 또 "선생님같은 분은 먹을 음식이 필요할텐데 어떻게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신사는 대답했습니다. "기도하라고 했는데 누가 너에게 먹을 것을 주니? 기도한다고 해서 먹을것을 주는 사람이 있니? 그리고 또 네가 교회에서 받는 음식이란 어떤 음식이냐?
도대체 어떤 음식인지 말해보지 않겠니? 라고 했습니다.
꼬마 여자아이는 점잖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걱정마세요, 아무걱정 마세요, 교회에서 저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 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제가 공급받는 음식입니다.
그것뿐만 아닙니다. 우리 어머니는 가난하시지만, 그래서 저에게 먹을 것을 주실수 없을 때가 자주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매 주일 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떡을 먹습니다. 그래서 저는 배가 고파서 괴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고 지냅니다. 배가 고프다는 느낌을 가져본 일이 없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의 생명의 떡은 이처럼 배고픔을 느끼지 않게 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 신사는 그 꼬마 여자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신사는 신기하기도 하고 놀라워서 설레이는 마음으로 교회 예배에 참석하기로 했습니다. 그 신사는 그의 결심을 지키려고 온갖 노력을 다 했습니다. 그후 그 신사는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면서 받는 은혜의 큰 기쁨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세계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것을 빠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 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예배에 충성스럽게 참석하는 나라가 그린랜드 교인들입니다. 그들은 적어도 기후때문에 공공예배를 빠지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린랜드는 너무나 춥기 때문에 숨이 막히고 침을 뱉으면 얼어붙을 정도입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의 얼굴에는 "아기 고드름"이 매달리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이곳 사람들은 멀리 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린랜드 사람들은 남자나 여자나 아이들이나 누구든지 믿는 사람들은 눈과 얼음과 폭풍을 헤치며 교회로 또는 기도하는 곳으로 나아갑니다.
그린랜드 사람들은 기후 때문에, 날씨 때문에 교회에 가시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는 신실한 기독교인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 쓴 편지
담임인 위버 선생님은 반 학생들에게 누구에게든지 감사하는 내용의 편지를 쓰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짐은 자기를 제일 사랑해주며. 자기를 위해서 가장 큰 일을 하셨던 분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짐은 드디어 연필을 쥐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안 되어 짐과 다른 모든 반 친구들이 편지쓰기가 끝나자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에게 각자의 편지내용을 소개하도록 했습니다. 학생들은 순서대로 일어나서 자기들이 쓴 편지를 읽었습니다. 끝으로, 짐이 읽을 차례가 되자 그는 일어서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저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저를 매우 사랑하신다는 사실도 압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으므로 저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늘 저와 동행해주세요. 제가 잘못을 행하지 않도록 지켜주세요. 사랑하는 짐으로부터” 짐이 앉았을 때 교실은 아주 조용해졌습니다. 그들 중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편지를 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담임 선생님은 반 학생들의 편지에 대해 만족하셨으나 특별히 짐의 편지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준 선물들과 은혜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하기를 잊지 않고 있었어요. 그러나 짐의 편지는 하나님께도 우리가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도록 잊지 않게 상기시켜주었어요. 성경은 '여호와께 감사함이 좋은 일이다'(시92:1)말하고 있어요.”
 
하나님과 영사기
6.25 전쟁 직후, 서울 변두리에 있는 어느 고아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원아들이 어찌나 빤질거리고, 말을 안 듣든지, 그 곳에서 일하는 선교사 한 분이 하루는 기발한 꾀를 냈다.
하루 날을 잡아 그는 원아들을 모두 사과가 탐스럽게 익은 과수원으로 보내 풀을 뽑으라 했다. 이 날만은 아무도 감독하지 않으니 알아서들 하라고 말만 해 두었다.
이윽고 해가 지고, 원아들이 저녁 식탁에 둘러 앉았다.
"오늘은 열심히들 일했으니, 영화를 보여 주겠습니다."
선교사가 광고를 하자, 와! 하는 함성으로 식당이 터질 것 같았다. 식사가 끝나고, 불이 꺼지고, 영사기가 쯔르르르 돌아간다.
원아들이 숨을 죽이고 눈만 반짝거린다.
이 때, 누군가가, "저기, 우리 과수원 아냐?"하고 소리를 질렀다.
맞다. 선교사가 원아들 몰래 원아들이 과수원에서 일하는 모양 모양을 죄다
찍어 가지고 보여 주고 있는 것이었다.
영화 속에는 열심히 풀을 뽑는 사람, 사과나 따 먹는 사람, 낮잠 자는 사람, 장난치는 사람, 도망가는 사람, 장기 두는 사람, 만화책 보는 사람, 오줌 누는 사람, 똥 누는 사람.... 자기가 어떻게 한 모양을 다시 보는 원아들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보고 있을까?
 
하나님의 계획이 주시는 격려
"걱정 말아요. 나에게 계획이 있으니까." 고장난 차 안에서 한 남자가 그 아내에게 말했다. 그들은 길옆에 차를 몇 시간이나 세워두고, 도와줄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잠깐만요. 당신계획이 무엇인지 궁금해요'라며 그의 아내가 반박했다. "이제 더 이상 당신의 계획을 믿을 수 없어요. 이 황량한 길로 우리를 데려온 것도 당신 계획이었잖아요." 인간의 계획이란 늘 이런 식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정반대이다 그는 결코 실패하지 아니하시며 그가 하려고 하신 것들을 이루시고야 만다. 하나님의 계획은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어떤 특정한 일뿐 아니라 모든 사건이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난으로 부르신 것은 마치 외과의사가 우리를 수술대로 부른 것과 같다. 그들의 칼은 무서운 고통을 준다. 이 고통을 부인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원하여 이 칼에 우리를 맡긴다. 왜 그런가? 우리의 몸을 맡기는 것은 그 고통을 통해 우리가 더 건강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어려움을 선으로 바꾸어 주신 것들을 많이 보아왔다. 그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시며, 또한 그의 완전한 계획을 일깨워주신다. 우리 눈앞에 있는 이 격려를 잘 받으면 우리는 어려운 고통을 견딜 수 있고, 우리의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잘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소망을 하나님께 두라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銅綠)이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마 6:19.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私事)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잠 23:4,5.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딤전 6:17,18.
한 농부가 기르던 암소가 어느 날 갈색 바탕에 흰 점이 있는 쌍둥이 송아지를 낳았습니다. 농부는 무척 기뻐하면서 "여보, 우리 저 두 놈을 잘 키워서 때가 되면 내다 팔아 수익금의 한 마리 분은 하나님께 바칩시다 !"하고 충동적으로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그의 부인은 두 마리 중 어느 것을 하나님께 바칠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농부는 잠시 주춤거리더니 "그런 것은 지금 생각하지 않아도 되오 !"하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 후 농부가 실의에 빠진 표정을 지으며 부인이 일하고 있는 부엌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나쁜 소식이오. 하나님의 송아지가 죽었소 ."하고 말했습니다. 농부는 왜 죽은 송아지를 하나님의 송아지라고 말했을까요 ? 욕심 때문입니다. 우리의 욕심은 자신을 향해서는 부유하기를,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가난하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
"주님, 저희로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게 하시고, 오직 저희에게 모든 것을 후시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관심
하나님은 당신의 직업이 선교사냐 아니면 목수냐에 보다는 당신이 믿음으로 살면서 당신의 직업에서 하나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또한 그는 당신의 그 동료들에게 사랑의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에 더 신경을 쓰십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당신의 가정 생활이 하나님의 질서와 관심을 나타내고 있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이지 당신이 대저택에 사느냐 아니면 전세 단간방에 사느냐가 아닙니다. 그는 당신의 자동차가 6년 묵은 중고차냐 아니면 번드르르한 최신형이냐에 관심을 갖고 계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교만과 탐심이 없는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주의를 기울이십니다.
물론 삶 가운데서 이런 영역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결코 요청하지 말아야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마십시오. 다만 하나님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인가를 알고 또한 그것을 당신의 관심사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직업이나 직장 또는 경제 문제에 관해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시도록 기도했으면 잠시 멈추어 일단 당신 자신을 점검해 보십시오. 혹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지금까지 당신이 해오지 않았던 어떤 일을 하라고 오래 전에 그의 뜻을 보여 주시지는 않았읍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데 그의 관심을 둘 수 있게 하고 당신은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에 지금 당신이 순종하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는데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의 선택 죠지 워싱턴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자기 고토에 두시리니 나그네 된 자가 야곱 족속에게 가입되어 그들과 연합할 것이며"(사 14:1)
"예루살렘을 택하여 내 이름을 거기 두고 또 다윗을 택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였노라 하신지라"(대하 6:6)
미국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너무나 몸이 약하여 곧 죽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17세 때 그리고 22세 때 등 모두 세 번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뻔하였습니다. 19세 때 천연두에, 20세 때 늑막염에 걸렸습니다. 35세 때에는 급성 이질에 걸려 죽을 고비를 또 넘겨야 했습니다. 43세 때에 치아가 거의 못 쓰게 되어 고통을 당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주시고 항상 같이 하여 주시기에 사명이 있다고 늘 자기가 자기를 믿어 주었습니다. 그는 43세인 1775년에는 미국 혁명군의 총 사령관이 되어 독립군을 지휘하여 승리함으로써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습니다. 12년후 그는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죠지 워싱톤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여 주셨다는 확신의 믿음은 그 사람을 머릿돌로 만들어 놓고 맙니다. 역사상 큰 일을 하였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이 자기를 특별하게 선택하여 주셨음을 알고 그렇게 받아 드리고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살아간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자기를 몰랐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를 이방 선교사로 택하셨음을 깨달은 순간부터 놀라운 사역자로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갈1:15-17).

하나님이 앞서 가셔야만 할 수 있다
" 힘으로 능으로 할 수 없는 그것을 여호와의 성령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 (스가랴 4 : 6)
인목사는 신대원에서도 수재 가운데 한 분이었고 외모에서 목사의 향기가 나는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미국으로 유학하여 일류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맏은 후에 곧바로 미국의 이민교회에 초청을 받아 담임목회를 시작하였다. 우리들은 그의 소식을 들어면서 그가 성공적인 목회를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공부도 많이 하였고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어 목회는 평탄치가 못했다. 2년여를 목회하는 가운데 끊임없는 갈등이 생겨나고 불화와 위기가 끊이지 않았다. 교회는 성장하는 것 같다가 정체되었고, 교인들은 불평과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하였다. 목사님 부부는 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7일 금식을 하기도 하였다. 고난주간 내내 금식을 했기에 부활절의 설교는 은혜로울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설교중의 예화에 시험을 받은 한 성도가 상처를 입고 예배후 야단 법석을 피웠다.
차를 타고 근처 야산에서 함께 기도하던 목사님 부부는 지나가던 경찰에 의해 미쳐서 소리지는 줄로 착각하여 경찰서에 끌려갔다.
울어도 안되고 힘써도 않되고, 부르짖어도 안되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다른 도시로 가서 부흥회에 참석하여 자신은 목회를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고백하기에 이르렀다. ㅡ러나 그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힘으로 능으로 할 수 없는 그것을 여호와의 성령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슥4:6)" 그들은 새로운 힘을 얻고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일은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재주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남들이 평가하기에 잘 할 수 있으리라 믿겨지는 외적인 요인에 의해 되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행하신다. 그렇기에 우리의 행할 바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무능함을 완전히 고백하는 일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사역의 시작이 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성공과 실패)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 죽음을 기다리게 되었을 때, 과거를 돌아보며 성공적이었고 만족한 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이런 질문은 별로 듣고 싶지 않겠지만 일견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공과 실패에 관해 어떻게 이해할 것이며, 삶을 어떻게 평가하고 그 삶에서 궁극적으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에 대한 도전을 주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의 18∼24세 젊은이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30세가 되기 전 삶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면 실패자 취급을 당하고 성공에 대한 중압감에 시달리며 건강과 여가를 희생해야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배우자를 찾거나 돈 버는 일 그리고 직장에서 성공하여 집을 사는 것 등에 관한 구체적 계획을 세워놓은 젊은이들이 많았다. 절반 이상 26세에 집을 사고 27세에 결혼하며 29세에 부자가 되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41%는 건강한 식생활이나 생활 패턴을 포기하고 목표 성취를 위해 노력하며, 절반은 성공을 위해 휴식이나 취미 생활 또는 가족과 친구 만나는 것도 포기하는 것으로 응답했다.
이기는 것과 지는 것
성공과 실패는 이기고 지는 것과 관련된다. 이기고 지는 것은 스포츠 세계와 깊은 연관이 있다. 스포츠가 성공과 실패에 관한 생각에 끼치는 영향력이 학교에서 시험의 중요성만큼 강력하다. 실패에는 엄청난 피해가 따르며 시험에서 통과는 필수이며 높은 점수를 얻어야만 한다. 즉 성공하기 위해 어떤 기준에 도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경쟁에서도 이겨야 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성공하면서 동시에 실패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요소들은 모든 도시의 경쟁 영역에서 작용하고 있다. 누군가 말했듯 이기는 것은 전부가 아니라 유일한 것이다. 단순한 성공은 부적절하며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성공이어야 한다. 한번의 성공으로는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고 최후까지 성공해야 진정 성공한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스포츠 세계에도 마찬가지다. 운동 선수에서 정치가로 변신한 세바스찬 코어는 “성공이란 항상 보장되어야 한다. 가장 어려운 부분에서도 계속 성공해야 한다”고 했다. 성공을 위해 어떤 결과를 산출해야 한다면 잠재성과 장기적 관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낫웨스트(NatWest)사 전 회장 밥 알렉산더는 “어떤 사람이 최대한 노력해 이룩한 성공이 다른 사람에게는 일상적인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최근에 운동 선수 로저 블랙은 자신이 은메달을 수상한 것에 대해 “은메달은 나에게 금메달이다. 왜냐하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고 했다.
또한 장기적 관점은 필수적이다. 현대 사회는 위험하게도 즉각적인 성과에만 연연한다. 그러나 좀더 넓고 전략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성공이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알 수 있고 평가할 수 있으며 인정되는 것이다. 세바스찬 코어는 “이겼을 때만 성공적인 결과라고 말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이제껏 경험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경주는 내가 3등 했을 때이기 때문이다”고 했다.
통념적인 성공과 실패
성공이 부나 물질적 번영의 의미로 여겨지는 것은 심각한 문제지만 그것이 우리의 목덜미를 쥐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 경향은 미디어나 광고 특히 고용, 승진, 보너스, 각종 혜택 등에서 부끄럼 없이 강조되고 있다. 성공에 관한 신화는 흔한 것이 되었다. 최근 기사로 예를 들어보자.
“지난 12년 간 게리 로빈슨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꿈에도 생각지 못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엄청난 재산, 아름다운 집과 가정을 갖게 되었으며 호텔 경영과 독립 방송국으로 휘청대던 그라나다 그룹을 주요 기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1948년 로빈슨 씨가 태어나 9남매와 함께 자란 곳은 아일랜드 북동쪽 작은 어촌 마을 던파너기에서도 더 멀리 떨어진 곳입니다. 로빈슨 가족은 마을 가장자리 작은 방갈로에 살았으며 자동차도 거의 볼 수 없었습니다. 그가 살던 집은 너무 작아 아이들이 모여 식사하기에도 비좁았습니다.”
이런 자수성가형 성공 신화는 무의식 중에 각인된 전형적인 이야기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잘못된 성공에 대한 인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아름다운 집과 가정이라는 말을 함께 사용함으로써 마치 재산과 사람이 같은 가치를 지닌 소유물처럼 취급하고 있다. 아마 작가에게 실패란 집과 가족이 아예 없는 사람이 아니라 허름한 집과 초라한 가족에 무게를 두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글은 통념적인 성공과 실패를 암시하는 좋은 예이다. 가난하게 태어나 부자가 되었다면 성공한 사람이지만, 부자로 태어나 가난하게 되었다면 실패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가난하게 태어나 계속 가난하다면 역시 실패한 사람이다. 부자로 태어나 계속 부자로 남았다면 실패한 사람으로 보지 않지만 그렇다고 성공한 사람으로도 보지 않는다.
21세기 성공은 영적 실체를 경시
21세기 물질적 성공의 개념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 성공에 이끌리고 있다. 그러나 성공에 대한 그런 개념은 본질적으로 영적 실체의 존재조차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뜻밖에도 정신적 가치 회복을 주장했던 인물은 무신론자 니체였다. 그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1882년 그 무렵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배금주의로 부를 얻기 위해 쉴새없이 일하는 미국인들은 이미 유럽을 무섭게 전염시켰고 영적 실체의 빈곤을 퍼뜨렸다. 사람들은 쉬는 것을 부끄러워하게 되었고 장시간 명상하는 것 등은 양심을 건드리는 것이 되어버렸다. 어떤 사람은 시계를 보면서 골똘히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점심 식사를 하면서 주식 시세의 최근 뉴스를 읽는다. 무언가 얻기 위해 숨가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항상 앞서가려 하고 이기려 한다. 따라서 영적으로 녹초가 되도록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고 살아간다. 이제 선이란 어떤 일을 다른 사람보다 더 빨리 끝내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즐거움의 부재
니체가 영성이나 인간 정신에 대해 말할 때 삶의 특정한 영역을 언급하고 있다. 즉 교양, 기호, 약동하는 운율에 민감한 귀와 눈, 정직, 개방성, 사회성, 예술, 친구들과 사색하며 걷는 것 그리고 특별히 즐거움이다. “사람들은 점점 모든 즐거움에 대해 의심하게 되었다”고 했다. 흥미롭게도 영화 <아메리칸 뷰티>에서 주인공 레스터는 성공에 정신이 팔린 부인 캐롤린에게 “언제부터 인생의 즐거움을 잊기 시작했니?”라고 한다.
오늘날 윌리엄 제임스(미국 소설가 헨리 제임스의 형)의 말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1906년 H. G. 웰즈에게 보낸 편지에서 성공의 여신을 지나치게 숭배한 나머지 무너져 가는 도덕적 관념에 대해 언급했다. ‘성공을 돈으로만 해석하는 썩어빠진 짓은 망국병’으로 규정했다. 그런 종류의 성공은 인간 정신을 갉아먹으며 실패를 의미하는데, 책 제목 「성공의 모순: 직장에서 성공이 삶의 실패를 의미할 때」가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미국 수도회 사제 토머스 머튼은 20세기 후반 작가로서 많은 부와 명예를 얻었다. 그는 미국에서 존 F. 케네디 다음으로 유명한 가톨릭 신자로 불리기도 했다. 머튼은 작가로서 성공에 대해 날카롭게 두 가지를 지적했다. “하나는 개인적인 것이다. 나는 부와 명예로서 성공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다.” 성공에서도 실패에 대한 엄청난 부담감을 느끼는 것은 미국이 직면해 있는 일이기도 하다. 머튼도 분명히 성공 중에 실패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성공이란 단어의 금전적 해석은 성공 추종자들을 영적으로 빈곤하게 만든다. 이것은 개인만이 겪는 게 아니라 회사나 단체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기저에 성공은 개인이 만드는 게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환상이 지배적이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고난을 발생한다
성공과 실패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말하는가? 먼저 강조할 점은 오늘날 사용되는 의미의 성공과 실패라는 단어가 성경에 없다는 사실이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번역한 어떤 영어 성경은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계획’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성경에 언급된 성공과 실패에 관한 주제는 성공과 실패로 인도하는 특정한 행동 유형이 있음을 말한다. 최종 결과는 대부분 하나님이 함께 하셨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그러나 어느 성경 기자도 개인이 성공자 또는 실패자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성경이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사실 정반대이다. 특히 구약에서 번영과 고난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 말에 잘 요약되어 있다.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신 30:19).
모세는 이 말씀에서 성공과 실패에 대한 구약의 이해를 정확히 담아내고 있다. 번영은 하나님이 복 주신 결과이며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하심 그리고 공급의 결과이다. 성경 기자들은 물질적 번영은 하나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해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것은 단순히 물질에 머물 뿐 풍요한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모든 면에서 하나님과의 단절은 고난을 불러온다. 그것은 분명히 저주 아래 사는 것이며 축복이 아니다. 실패란 하나님이 축복을 거두신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경외함을 잃은 것이고 영적 위축이며 영혼이 작아진 것이다.
형통은 하나님이 주신 성공을 의미
구약의 중요 관점 중 하나는 이스라엘의 가장 성공적인 지도자 다윗의 말을 통해 마치 후렴처럼 반복된다. 다윗은 16세에 골리앗을 물매돌로 쓰러뜨릴 때부터 어떤 성공이든지 하나님의 임재와 복 주심에 의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윗에게조차 성공은 넘어지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이스라엘 왕으로 높여진 그는 하나님과 교제를 잃고 자신의 예감을 따랐다. 그 결과 하나님 뜻에 불순종하는 행위를 하였고 하나님의 복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가정과 일에서 연속으로 불행이 닥쳐왔다. 다윗은 성공한 시점에서 실패한 것이다. 물질적으로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지만 그의 영혼과 심령은 상처받았고 가족도 상처받았다.
따라서 성공이란 말보다 ‘형통’이란 말이 더 도움이 된다. 구약에서 이와 관련된 히브리 단어는 65번 나온다. 의도한 것을 효과적으로 성취한다는 의미로도 쓰이며 알맞게 작동한다는 의미도 있다. 형통이란 단어는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공을 주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는 사람이나 사물을 효과적으로 움직이게 한다. 즉 생명의 창조자, 보존자이신 그분의 소망을 만족시켜 드리는 상태이다.
하나님의 평안
성공에 관한 성경의 또 다른 히브리어 단어는 ‘샬롬’이다. 무려 250번 이상 나온다. 샬롬이란 단어는 구약시대 못지 않게 지금도 흔히 인사로 사용한다. 샬롬은 인간이 그토록 갈망하고 하나님이 세상을 위해 작정하신 것들을 간직한다. 평화, 우정, 행복, 복지, 번영, 건강, 행운, 친절 그리고 구원 같은 기본적인 현실을 내포한다.
그래서 샬롬은 우리에게 성공에 대한 집착 대신 대안적인 목표를 제시한다. 모든 샬롬은 하나님에게서 오며 하나님은 샬롬의 근원이시다. 샬롬은 회복된 의로움이며 인간이 죄와 악을 행하는 한 샬롬의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샬롬을 발견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일상 생활과 직장, 가정에서 다른 사람들과 또는 우리에게 샬롬을 확립할 수 있는가? 여기서 성공이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성취할 대상이나 결과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 먼저 어떤 사람이 되려 하는가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하나님의 계획, 뜻, 말씀, 방법에 항상 열려 있는 사람이 된다.
평강의 왕 예수 그리스도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평강의 왕이며 구주로 영접하는 자에게 주시는 샬롬이다. 평강의 왕은 온전한 인간이시며 하나님과 하나이신 분이다. 그분은 완전한 인격자로 우리가 나라마다 그분에게 자리를 내어 드리면 그분은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신다. 개인 차원에서 평화란 성취를 의미한다. 평화롭게 죽는 것은 성취된 삶을 산 것이며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을 이루었다는 의미이다.
평화는 평안이며 걱정이 없는 상태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평화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완전하게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공이란 우리가 삶의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 것,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 스스로 달성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은혜와 복 주심이 필요하다. 그보다 날마다 하나님의 임재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샬롬은 하나님의 은사이며 오직 그분의 임재를 통해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샬롬이시며 또한 샬롬을 전파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샬롬을 가능하게 하셨으며 십자가의 보혈로 샬롬을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으로서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돌보고 계신다. 모세가 아론에게 제사장직을 물려줄 때 하나님의 영광스런 복 주심의 기도가 있었으며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렇게 선포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민 6:24∼26).
하나님의 복, 보호, 임재, 은혜, 평강…. 이 모든 것이 성취를 이루며 완전함을 이룬다. 그것이 성공이다. 그 외 다른 어떤 것도 결국은 실패다.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오라 가라 할 수 있다",
<교회와신앙> 상대 신현옥 고소 '무혐의'
'자칭 하나님' 테이프 사실...신 목사 엽기발언 또 드러나
가 자신의 '자칭 하나님설' 녹음 테이프 내용을 보도한 주간 <교회와 신앙> 기자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형사 고소한 건에 대해 서울지방검찰청이 8월 23일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신 목사는 고소에서 <교회와 신앙>의 보도 테이프 내용은 조작된 것이고 자신의 목소리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서울지검(담당검사 이중희)은 고소인의 이 같은 주장과 관련, 테이프 조작 여부, 동일인 음성 여부 등을 수사한 끝에 "피의 사실을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며 무혐의 처분을 내린 것이다. 따라서 검찰의 이번 처분은 '자칭 하나님설 신현옥 테이프'가 사실임을 입증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와 신앙>은 2003년 1월 8일, 15일, 22일, 29일자에서 한국기독교복음단체총연합 여성총본부장 등 기독교계 각 기관의 요직을 맡으며, 교계 언론 홍보 기사 및 광고를 통해 유명 부흥사로 선전되어온 신 목사가 '자칭 하나님설'을 주장한다고 보도했다. 특히 신 목사의 '자칭 하나님설'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는 신 목사-A 목사 상담(2001년 5월 15일) 녹음 테이프를 단독 공개하기도 했다.
이 테이프에서 신 목사는 "하나님을 내 마음대로 오라 가라 할 수 있다", "내가 하나님의 영이다", "나는 성령 하나님으로 와서 이 세상에서는 성부 하나님으로 역사한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됐고 나는 육신이 말씀이 됐다", "나는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거룩한 예루살렘 성이요, 시온산이다" 등 황당한 발언을 했다. 심지어 신 목사는 '마리아 간음' 등 기독교인으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 같은 테이프 내용을 밝힌 <교회와 신앙>의 보도에 대해 신 목사는 수사당국의 조사에서 "2001년 5월 15일 A목사와 면담한 사실도 없고 '나는 성령 하나님으로 와서 이 세상에서는 성부 하나님으로 역사한다'라고 말한 사실이 전혀 없다"며 자칭 하나님설 테이프 내용을 전면 부인했다. 신 목사는 심지어 "녹음 테이프와 녹취록은 100% 조작된 것이고, 녹음 테이프의 목소리도 고소인(신현옥 목사)의 목소리가 아닌 것 같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러나 검찰은 증거로 제출된 녹음 자료와 검찰이 직접 녹음한 신 목사의 음성을 비교 분석한 후 "신현옥 목사와 A 목사의 상담 내용의 테이프는 복사를 위한 녹음 행위 이외에는 기자나 제3자가 손댄 바가 전혀 없는 녹음 테이프"라는 <교회와 신앙>측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했다.
신 목사는 <교회와 신앙>의 보도 이후 <새누리신문> 1월 26일자, <기독평론신문> 8월 25일자 등 일부 교계 신문들을 통해서도 수사당국에서의 주장과 같은 말을 해왔다. 이에 따라 이단옹호 전력이 있는 전 <기독저널> 발행인 이흥선 씨가 최근에 발행하기 시작한 <기독평론신문>은 "자칭 하나님 발언 상담 테이프 완전 조작됐다"는 중간제목과 함께 신 목사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유포했다. 새누리신문(편집국장 홍시환)은 "신현옥 목사의 자칭 하나님설이 터무니없는 조작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면서 "만에 하나 테이프가 있다거나 그러한 내용(자칭 하나님설)이 조금이라도 담겨 있다면 당장이라도 목회를 그만두겠다"는 신 목사의 주장을 보도했다.
신현옥 "목사는 다른 여자 데리고 자도 괜찮아" "난 동성애 빼고 다 해봤어"
한편 '자칭 하나님설 신현옥 테이프' 중 <교회와 신앙>이 아직 공개하지 않은 부분에는 건전한 상식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내용까지 담겨 있다. "목사가 술 마시고, 담배 피우고, 다른 여자 하루 데리고 자도 괜찮아요", "나는… 동성연애 말고는 다 해봤어. 그런데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 일어났어", "도둑질을 하든,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만 되면 아무 것도 아니야" 등 충격적인 내용들이다.
신 목사는 현재도 교계 일각에서 유명 부흥사들과 함께 활동하고 있다. 그는 한국복음단체총연합(대표의장 윤석전 목사) 여성총본부장, 국제여성부흥사협의회 총재, 문화예술신학원 총재, 세계기독교부흥사협의회 여성총재 등의 직책을 가지고 있다.
(이 기사는 주간 <교회와 신앙> 9월 3일자에 보도한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호감을 사는 비결
에프케이메카테크(FKM)의 심재수 사장(영락교회 집사)은 회사 대표직을 떠맡으면서 너무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려고 일천번제의 예배를 드렸습니다. 새벽기도를 비롯해 모든 종류의 예배를 한 번의 예배로 계산해 드렸고 열 번의 예배마다 한 번씩 헌금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일천번제의 예배를 다 드리는 데 꼬박 3년이 걸렸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성전을 건축하고 자기 회사와 거래처의 직원들에게 전도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목회자들을 도울 수 있게 해 주시라는 제목기도도 아울러 드렸습니다. IMF 위기 때 살던 집이 경매로 처분되는 아픔도 있었지만 1998년 그가 사령탑을 맡은 회사는 승승장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업계 최하위였던 은행현금자동입출금기(ATM) 시장점유율이 1위를 다투게 된 것입니다. 그가 FKM 대표를 맡게 됐을 때 직원 80명, 매출액 30억 원에 머물렀던 사세는 2003년 현재 직원 250명, 매출액 750억 원으로 급증했습니다. 그는 끈질기게 기도하는 CEO입니다. 급하다고 몇 번 반짝 기도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매일 기도의 무릎을 꿇습니다. 그가 자랑하는 기도노트만 해도 15권이 넘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일천번제를 좋아하십니다. 일천 번이나 계속 반복해서 기도하고 예배드리는데 어찌 진실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간절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백성을 잘 다스리도록 지혜를 주시라던 솔로몬의 일천번제 제사는 하나님의 마음을 뒤흔들었고 전도의 사명을 잘 감당하게 해 주시라던 엄호섭 엘림전도훈련원 원장의 일천번제 기도도 하나님의 마음을 사로잡았지요. 계속되는 반복 속에 진실함이 있고 간절함이 있습니다.
우리가 수고하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수고 위에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합니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신12:7). 우리가 수고하고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풍성한 열매를 거두고 그래서 즐거운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즐거운 인생이 되려면 복이 임해야 합니다. 수고만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복을 받으려면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호감을 사야 합니다. 누가 하나님의 호감을 삽니까. 첫째로 하나님께 집중하는 사람입니다. 일천번제를 드릴 정도로 진실하고 간절하면 하나님의 호감을 살 수 밖에 없겠지요. 둘째로 즐겁게 사는 사람입니다. 형편을 초월해서 즐겁게 사는 사람을 당할 재간이 없지요. 셋째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천하무적입니다. 우리가 기도와 말씀과 예배로 하나님께 집중하고 항상 즐겁게 살고 무조건 감사하면 하나님의 호감을 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커먼 구름처럼 우리 시대를 꽉 누르고 있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스트레스와 우울증입니다. 스트레스는 모든 질병의 근원이고 우울증에 안 걸리는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이길 수 있습니까. 기도와 말씀과 예배로 하나님께 집중하고 항상 즐겁게 살고 무조건 감사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심령이 강해지고 우리의 육체가 강해져서 그 어떠한 스트레스와 우울증도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하게 살고 싶어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인생에는 크고 작은 고난이 그치지 않고 불어닥칩니다. 그래서 온갖 스트레스와 우울증에 시달리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찌 하나님이신들 호감을 안 가지시고 남인들 호감을 안 가지겠습니까. 스트레스와 우울증이 시커먼 구름이라면 즐거움과 감사는 밝은 빛입니다. 밝은 빛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에 돈도 있습니다.
오징어잡이 배의 환한 불빛을 보고 오징어들이 몰려듭니다. 편의점의 환한 불빛을 보고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즐거움과 감사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환한 불빛입니다. 아니, 하나님도 즐거움과 감사가 있는 곳으로 그 얼굴을 돌리십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이고 항상 기뻐하는 것은 항상 즐겁게 사는 것이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무조건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3가지는 돈을 많이 버는 비결일 뿐만 아니라 행복하고 멋지고 아름답고 존귀한 인생을 사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조건없는 사랑
하나님의 사랑에 관하여 우리는 무어라 할 수 있을 까요?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만일 네가 어떤 일을 한다면,나는 너를 사랑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는 만일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우리들에 대한 사랑은
우리의 행동이나 말이나 또는 외모나 지식, 그리고 우리의 성공이나 인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고, 우리가 죽고 난후에도 존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에서 영원으로 존재하며 시간이나 환경의 제약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우리들이 어떤 행동을 하든 또는 무슨 말을 하든 하나님께서는 상관하지 않으시리라는 의미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상관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의 사랑은 참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건 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 관심없이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과 관계 맺기를 원하시며 그것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들도 하나님을 사랑해 주를 바라고 계십니다.
두려움없이 하나님과 친숙한 관계를 맺으십시오.
그리고 우리는 항상 더 많은 사랑을 받으리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교회(안상홍 증인회, 이하 안증회),
언론 통해 한기총 '정면도전'
최근 한국기독교총연합회(대표회장 길자연) 이단대책위 부위원장인 진용식 목사(안산상록교회)에 대해 하나님의 교회(안상홍 증인회, 이하 안증회)가 음해 비방의 뜻이 농후한 보도자료를 교계에 배포, '한기총에 대한 정면도전' 양상을 보이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문제의 보도자료에서 하나님의 교회측은 "진용식 목사가 현재 부녀자 세 명을 강제 개종시키려 정신병원 등에 수십일씩 감금했다"고 주장하고, "진목사는 현재 감금 등 폭력행위로 재판에 회부 되었다"며 '진목사에게 문제가 있다'는 내용으로 일관, 의구심을 자아내게 했다.
특히 하나님의 교회측은 " 지난 5월 한기총 전대표회장 김기수 목사가 하나님의 교회 성도들의 아시안게임 서포터즈 공적으로 국민훈장을 받았던 사실이 있다"고 주장하고, "한기총의 부도덕성을 질타하는 여론의 화살을 피하기 위해 진목사를 내세웠다"며 '한기총은 부도덕한 단체이며, 진목사는 한기총이 하나님의 교회를 압박하기 위해 내세운 인물'이라는 '한기총 음모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진용식 목사는 "보도자료의 내용은 2년 전부터 지금까지 진행된 고소사건의 내용이어서 새로울 것이 없다"고 밝히고, "이미 무혐의 무죄판결을 선고 받은 일들에 대해 다시금 문제삼고 있는 것이며, 이번 일 역시 무죄 판결이 날 것으로 예상된다"고 설명했다.
하나님의 교회측은 아직 재판결과가 나오지 않은 시점에서 언론플레이를 함으로써 '진용식 목사를 공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재판결과가 나오기 전 비방성 글을 언론에 유포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비난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또 "(한기총은) 특히 진용식목사의 개종활동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를 표명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비난한 바 있어, 검찰의 이번 결정으로 한기총은 오히려 범죄행위 옹호단체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됐다"는 식으로 한기총 공격의 수위를 높여 앞으로 한기총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도 관심의 촛점이 되고 있다.
한편 기독교계 C신문은 진용식 목사를 비방하는 하나님의 교회측 보도자료를 여과없이 기사화 하면서 은근하게 한기총과 진용식 목사를 비방하고 하나님의 교회 옹호하는 듯한 내용의 글을 내보내 '교계신문인 C신문이 이단으로 규정된 하나님의 교회를 왜 감싸고 도는가?'라는 의구심을 갖게끔 만들고 있다.
진용식 목사는 "하나님의 교회 신도들이 전도함에 있어 C신문을 사용하고 있는 현실"이라고 전하고, "이단 들이 언론플레이를 함에 있어 오히려 교계 신문 몇몇이 도와주고 있다"며 "이러한 신문들을 보는 일반 성도들이 이를 통해 이단에 현혹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면, 교계신문들은 앞으로 경각심을 가져야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진용식 목사는 이어 "이단들이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고 있는 요즘, 한국교회의 이단대처는 아직 많이 미흡하다"고 지적하고, "범 교단적으로 연대해 이단에 대처해야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독교계 C신문에 대해서는 "최근 한기총 회의를 통해 기독교계 신문으로 인정해 주지 않기로 결의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로 말미암아 가정파탄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는 '피해자'들과의 소송에 연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지난 6월 14일(토) 이후 약 3주간 토요일마다 하나님의 교회 앞에서 시위를 하는 피해자들과 몸싸움을 벌이는 등 큰 충돌이 있어왔다.
이 당시 하나님의 교회 관계자들은 시위 초 피해자들 뒤에서 진용식 목사의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들고 함께 시위를 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하나님의 교회는 지난 2000년 11월 22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당시 회장 이만신)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받았다.

하나님은 없다?
고집이 센데다 더 없이 교만한 사나이가 있었다.
그가 즐겨하는 일이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GOD IS NO WHERE" (하나님은 아무데도 없다)
라는 자신의 주장을 지껄이는 일이었다.
하얀 종이를 보면 거기에 또 "GOD IS NO WHERE"를 갈겨쓰곤 했다. 그짓을 평생 동안 계속하고 다녔다.
그런 그에게 다정한 이웃이나 친구가 있을 턱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늙은이가 된 그는 마침내 자신의 외로운 생애를 마감하지 않으면 안되는 때에 이르렀다.
텅 빈 방에서 홀로 누워 죽음을 기다리다가 문득 자기가 아직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떨리는 손으로 펜을 들었다.
정신이 가물거렸지만 평생동안 수 천번도 더 익숙하게 써 왔던 글귀이기에 겨우 그것을 써서 유언으로 남길수 있었다. 그리고 숨을 거두었다.
며칠이 지난 후 동네 사람들이 그의 주검과 한 장의 종이를 발견하고는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남긴 유언 때문이었다.
"GOD IS NOW HERE!" (하나님은 지금 여기 계십니다).


하나님의 휴가
어린아이가 하나님께 한 장의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하나님, 오는 금요일에 우리는 두 주간의 휴가를 떠납니다. 그래서 교회를 빠지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교회에 계시기 바랍니다. 참, 하나님은 언제 휴가 가시지요?" 어린이답게 순진한 데가 있어 참 좋다. 하나님을 교회에다 떼어놓고 휴가를 가고, 휴가 갔다 왔을 때 하나님께 서 교회에 계시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하고, 또 하나님도 휴가를 즐기시는 줄 아는 동심 그대로의 표현이다. 어린아이 생각은 어린아이에게 어울린다. 그런 생각이 어른에게 있다면 큰일이다.
신앙생활을 오래해 온 당신이 휴가 때에 하나님을 떼어놓고 가는 줄로 생각할리는 만무하다. 그러나 행위가 그것을 증명해야 하지 않겠느가? 열번 잡아떼도 휴가 떠난 다음에 하나님을 교회에 떼어놓고 나온 사람처럼 산다면 하나님을 더없이 얕보는 것이다. 어찌 휴가뿐 이랴. 교회 밖에서의 당신의 생활 전체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당신을 떠나지 않으신다. 어디로 가서 하나님을 피하겠는가? 니체처럼 불신앙으로 볼 때 그것은 하나님의 지독한 간섭으로 보일 것이나 믿음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하나님의 극진하신 사랑의 표현이다.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면
어느 날 밤 10시경, 세인트 루이스에 사는 젊은 그리스도인 사업 가에게 그의 사무실 옆에 있는 가구점에 화재가 발생했다는 전화가 왔다. 그는 급히 현장으로 달려갔다. 현장에 도착해보니, 36대의 소방차가 맹렬한 불길을 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으나 속수무
책이었다. 불길은 화염에 휩싸인 건물의 옥상으로부터 하늘로 10미 터 높이로 치솟았으며, 그 사업가의 사무실과 맞붙은 벽에까지 번져가고 있었다.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폭발성이 강한 화공약품이 보관되어 있는 그의 사무실로 들어가 급히 중요한 서루을 싼 뒤 무릎을 끓고 기도를 한 후, 모든 사태를 하나님께 맡기고 사무실을 나왔다. 다음 날 아침, 그가 사무실에 도착해보니 가구점 건물은 심하게 파손된 다른 건물들과 함께 완전히 타버렸다. 그러나 그의 사무실 창문으로부터 불과 2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까지 소방수들이 수백 리터의 물을 뿜어댔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무실은 전혀 피해가 없이 고스란히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가보니 채광창을 통해 들어온 몇 방울의 물이 그가 견본품으로 받았던 소금 봉지에 떨어져 있을 뿐 다른 피해는 전혀 없었다. 하나님께서 믿는 자의 앞날을 보살펴주신다는 것,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가?
우리의 미래가 아무리 불확실할지라도 우리가 자신의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기만 하면, 그분께서는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며 보호하신다.

하나님께 쓴 편지
담임인 위버 선생님은 반 학생들에게 누구에게든지 감사하는 내용의 편지를 쓰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짐은 자기를 제일 사랑해주며. 자기를 위해서 가장 큰 일을 하셨던 분에게 편지를 쓰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짐은 드디어 연필을 쥐고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안되어 짐과 다른 모든 반 친구들이 편지쓰기가 끝나자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에게 각자의 편지 내용을 소개하도록 했습니다. 학생들은 순서대로 일어나서 자기들이 쓴 편지를 읽었습니다.
끝으로, 짐이 읽을 차례가 되자 그는 일어서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하나님, 저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저를 매우 사랑하신다는 사실도 압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으므로 저의 죄를 용서해주신 것 감사합니다.
늘 저와 동행해주세요. 제가 잘못을 행하지 않도록 지켜주세요. 사랑하는 짐으로부터” 짐이 앉았을 때 교실은 아주 조용해졌습니다. 그들 중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편지를 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담임 선생님은 반 학생들의 편지에 대해 만족하셨으나 특별히 짐의 편지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준 선물들과 은혜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감사하기를 잊지 않고 있었어요. 그러나 짐의 편지는 하나님께도 우리가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도록 잊지 않게 상기시켜주었어요. 성경은 '여호와께 감사함이 좋은 일 이다'(시92:1)말하고 있어요.”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면...
유명한 앗시시의 성자 프란시스에게 어느 날 한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 도대체 겸손이란 무엇입니까?"
이 때 프란시스는 겸손에 관해 참으로 아름다운 정의를 남겼습니다.
"겸손이란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네."
어느 수련회에서 예배를 인도하던 목사님이 질문을 하나 던졌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보면 나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사람, 한사람 대답을 합니다. 어떤 남학생의 차례가 되었는데 그의 대답을 듣고 모두가 웃었습니다. 그러나 그 학생의 대답이 얼마나 진리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았을 때 나는... 그야말로 죽일 놈이죠."
인간과 인간과의 상대적인 비교가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눈을 통해서 보았을 때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가 하는 사실 앞에서 아무도 겸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계십니다
동독 멕클렌부르크의 한 기독교 가정의 딸인 10세 된 소녀가 지방 공산당 학교에 다니 고 있었다. 하루는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모두 일어서라고 해서 자신이 말하는 것을 따라하 라고 시켰다."하나님은 없다." 그 어린 그리스도인 소녀는 선생님께"그렇지만 저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선생님이 시키는 말을 따라하는 것을 거절했다. 그 선생 님은 "너는 오늘 저녁 집에가서'하나님은 없다'라는 문구를 50번 써오도록 해라"라고 아이 에게 시켰다. 어린아이는 집에 돌아가 그녀의 부모와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한 후에'하나님은 존재하십니다'라는 문구를 50번 썼다. 그녀의 선생님은그것을 읽고 크게 분노하면서"내일
은 '하나님은 절대적으로없다'라고 101번 써 갖고 와라. 만약 이렇게 계속 반항하면 내가 경찰에 가서 너와 너의 부모를 신고할 테다"라고 소리쳤다.이것은 빛의 세력과 어두움의 세력의 싸움이었다. 그 어린 소녀의 부모는 주님을 부인하기보다는 차라리 고난을 당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래서 그 어린 소녀는 다시"하나님은 절대적으로 계시다"라고 101번을 썼다.
다음날 그 선생니은 그렇게 씌어있는 종이를 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치며 "좋아,이제 내가 경찰에 가서 너를 고발할 것인데 너의 하나님이 너를 도우시나 어디 두고 보자"라고 했다. 이 말을 하고 그 선생님은 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자전거를 타고 길 쪽으로 달려나갔다.그러나 그 선생님은 얼마가지 않아서 학교 정문을 지날 즈음 자전거에서 떨어졌다. 이윽 고 그 선생님은 심장이 멈취 땅 위에 죽은 채로 누워 있게 되었다. 우리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하나님께 드릴때 그 어떤 사탄의 세력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서는 우리를 구원해주시든지 아니면 그의 이름을 위한 고난을 능히 감당할 힘을 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계획과인간계획
미국으로 들어오는 배에 한 선교사가 타고 있었다. 그는 거의 40년 남짓한 긴 세월을 각지에 다니며 선교활동을 하던 사람이었는데 간판도 없는 작은 방에서 피곤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배에는 이웃나라를 방문하고 돌 아오던 그 나라 대통령이 같이 타고 있었다. 배 안에는 당연히 서비스를 최 고로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배가 항구에 도착하자 많은 사람이 환영을 하느라고 나와 있었고 사진기자들은 사진을 찍느라 여기저기서 후레쉬를 터뜨렸다. 왁자지껄한 환영객의 물결이 빠진 뒤를 따라서 내려서 선교사는 자신
이 묶을 호텔방에 힘없이 들어 왔다. 잠시후 그는 울면서 `하나님! 뭔가 공평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웃을 방문했던 대통령에게는 박수와 환영의 인파가 있었지만 40년 간이나 당신의 일을 했던 저를 맞아주는 환영객도 없었습니다.` 하고 기도를 했다.
그러자 허탈감과 슬픔에 젖어있던 선교사의 귀에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
`너는 아직 돌아온 것이 아니다` 라는 부드러운 음성이 들렸다. 이렇듯이 하나님의 계획과 인간의 계획은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택하지 않는다
성 구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약 4:6)
만약 한 회사가 유능한 신입사원을 뽑기 위해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대상으로 인물 분석을 했다고 가정합시다. 회사가 이들의 학력, 경력, 적성을 종합해 컴퓨터에 분석을 의뢰했다면 아마 이런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의 출세만을 위해 사는 매우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영광의 자리를 청탁하려 하였습니다. 도마는 매사에 의심이 너무 많고 부정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성격이 급해서 일을 그르치고 실수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안드레는 너무나 내성적인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 속도가 늦고 추진력이 떨어집니다. 야고보는 혁명가적인 기질이 있어서 회사로서는 채용하기에 좀 위험한 존재입니다. 세리 출신인 마태는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보더라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제자들 중 가장 이상적인 신입사원을 뽑는다면 가룟 유다입니다. 그는 학식과 경험을 겸비한 인물이며 실업가의 감각과 사교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기독교 역사를 변화시킨 사람은 실격자로 판정난 제자들이었습니다. 세상적 판단으로 가장 유능한 가를 유다는 배신자로 낙인찍혔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기도에 응답하신다
한 가난한 가족이 생활이 어려워 작은 마을로 이사를 가게 됐다.그런데 일곱살 된 딸이 근심스런 표정으로 어머니에게 물었다.
“그곳에도 예배당이 있나요.주일학교에 못가면 어떻게 하지요” 어머니는 슬픈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곳은 아주 작은 마을이란다.아직 예배당이 없단다” 가족들이 열심히 이삿짐을 챙기는데 딸이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가보니 딸이 무릎을 꿇은채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저희는 교회가 없는 곳으로 이사를 간답니다.
하나님,안녕히 계세요” 어머니는 딸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며 함께 무릎을 꿇었다. 그런데 이 가족이 작은 마을로 이사를 간 지 두달만에 교회가 세워졌다.
진실한 기도는 땅에 떨어지는 법이 없다.하나님은 순진무구한 어린이의 기도에 가장 먼저 응답하신다.기도하는 자녀를 둔 부모는 가정에 보화를 간직하고 있는 것과 같다.

하나님까지 잃어버리면
기독교 방송 드라마에 맹인 목사인 윤인수 목사의 간증 드라마가 방송된 적이 있습니다. 중병으로 앓아 누워 있는 어머니를 간병하기 위해 어린 소년 윤인수가 길거리에 나가 신문을 팔고 구두닦기를 시작했습니다.
친구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윤인수로서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날 윤인수는 열심을 일을 해서 돈을 벌었습니다. 기뻐하며 그 돈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돈을 내놓았습니다.
십일조를 내자는 어머니의 말에 인수는 버럭 화를 내었습니다.
"십일조는 무슨 놈의 십일조인가, 하나님이 우리한테 해준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나의 눈은 멀게 했고 엄마는 병들게 했고 공산당에게 쫓겨 피난민 신세가 되게 했고 재산도 다 빼앗기게 한그런 하나님께 무슨 놈의 십일조를 내라느냐"며 항변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병든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손목을 꼬옥 쥔 다음 "인수야 고향 잃어버린 것도 한스럽고 집 잃어버린 것도 원통하고 건강 잃어버린 것도 서러운데 하나님까지 잃어버리고 믿음까지 잃어버리면 뭐가 남겠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는 건강한 삶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지금 당장 하나님께로 돌아와 잃어버린 믿음을 회복하지 않으면 안 될 절박한 상황에 처한 모든 사람들에게 엄청난 교훈과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우리 모두는 치료받고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눈을 뜨자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2.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 심이니이다”-시 61:2,3.
연구소에서 근무하는 한 여성이 하루는 눈이 아파 안과에 갔습니다. 의사는 “눈이 너무 지쳐 있군요. 당분간 휴식을 취하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업무가 바빠서 한 시도 쉴 수 없었던 그 여성은 다른 방법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만약 일하시는 곳에서 산을 볼 수 있다면, 눈이 피로할 때마다 그곳을 바라다 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눈의 피로가 풀릴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문제에만 시선을 두고 있다면 우리의 영적인 눈은 곧 피곤함에 지치게 될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안과 의사의 처방대로 산을 바라다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산이란 바로 하나님이 십니다. 우리가 지쳐 그 분을 바라볼 때 그 분은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와 함께 휴식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무디교회 교인 가운데 양조장을 크게 짓고 개업 예배를 드리게 된 이가 있었습니다. 양조장 사업이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 설교 그리고 축사를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순서인 축도 시간이 되었습니다. 유명한 무디가 앞으로 나갔습니다. 무디는 두 손을 높이 들고 축복기도를 했습니다. "오! 하나님! 이 양조장이 오늘 예배드리고 내일 문을 열게 됩니다. 이 양조장 문이 열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문이 열리면 엄청난 술이 생산될 것입니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이 술을 마시고 타락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술을 먹고 취하여 제 정신이 아닐 것입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제발 오늘 밤 이 양조장 주인의 마음을 감동시켜주셔서 이 양조장 문이 내일 열리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내용의 축복기도였습니다. 사람들은 예배 후 축하 파티를 하려다가 모두 당황하여 돌아가 버렸습니다. 양조장 주인은 밤새 고민했습니다. 한숨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새벽에 그는 조용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듯이 무엇인지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양조장 문을 열지 않기로 하나님 앞에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건물이 후에 무디 신학교가 되었습니다. 죄와 멀리하면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죄와 가까워지면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죄와 싸워야 합니다.

고난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당신이 괴로워할 때도 하나님은 계시는 걸까요? 그 질문의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들로부터 고난을 당할 때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한가운데 계십니다. 질병과 비극과 재난과 기근으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그 분은 그들의 고통을 함께 극복하기 위하여 한 사람씩 이름을 불러가며 다가가십니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시 34:18,19). 고통의 와중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의 위로를 받아들여본 사람이라면 이 말씀이 진리임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나찌 독일의 악명 높은 수용소인 라벤스부르크에서 죄수로 지낸 바 있는, 유명한 코리 텐 붐 여사는 라벤스부르크의 악몽이 있은 이후 33년 동안 개인의 안식처를 가져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녀가 85세의 고령이 되었을 무렵, 몇몇 친구들이 그녀를 위해 캘리포니아에 사랑스런 집을 마련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그녀의 집에 머물면서 말했습니다. "코리, 너에게 이런 아름다운 처소를 주신 것을 보니 하나님은 선한 분이신가 봐?" 그녀는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습니다. "내가 라벤스부르크에 있었을 때도 역시 하나님은 선한 분이셨어. "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갈급하라
성경: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잠30:2,3)
한 젊은이가 소크라테스를 찾아왔다.
"선생님, 저는 지혜와 학식을 원합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를 데리고 해변으로 가서 물이 허리에 찰 때까지 바닷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갑자기 그의 머리를 잡더니 물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한참 후 소크라테스는 그를 데려다 해변에 눕히고는 돌아왔습니다. 정신을 차린 젊은이가 소크라테스에게 다시 찾아와 이유를 묻자 대답 대신 그에게 되물었습니다. "물 속에 있을 때 당신이 가장 갈급 했던 게 무엇이었는가?"
"숨을 쉬고 싶었습니다." "자네가 물 속에서 공기를 원했던 것만큼이나 지혜와 학식을 원한다면 그걸 가르쳐 달라고 그 누구에게 물을 필요가 없을 걸세."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하나님을 알면 알수록 인간의 무능력과 무지를 더 깊이 느끼게 됩니다. 아굴은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잠언을 전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굴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하나님이 너무나 크시고 원대하시고 심오하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너무도 미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무지를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사람(겸손한자)을 들어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 묵상: 당신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갈급한 심령을 가지고 있습니까?

합심기도로 하나님의 기적이..
그의 능하신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지극히 광대하심을 좇아 찬양 할지어다(시150:2)
어느 날 아침에 교회지도자훈련원에 참석한 미네소타주의 한 목사는 갑작스런 응급전화를 받게 되었다. 3살짜리 그의 아들이 풀장에 빠졌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그의 아내는 아이를 풀장에서 꺼내어 인공호흡을 시켰다. 그리고 구급차가 도착했을 때 아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우리 교회에 모인 4백 명의 목사들은 그 아이를 위하여 기도드렸다. 우리의 집회가 끝날 무렵에 그 부모가 아이를 데리고 교회에 나타났다. 그들 모 습을 보고 교회의 모든 사람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예배가 끄난 후 그 목사가 말했다. 그들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이의 폐속에 물이 찬 것을 엑스레이를 통해 발견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들 4백명의 합심기도로 인해 폐속의 물이 사라졌다며 하나님께 감사했다.
"그것에 기적이었어요.여러분과 하나님이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라
이탈리아 앗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는 본래 부자 집에서 태어났으나,그리스도께로 회심하고 나서는 자기의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혈혈단신 떠돌아다니며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어느 날 프란체스코는 앗시시의 교외로 말을 타고 지나가다가 한센씨병 환자 한 사람이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처음 무심코 그 병자 앞을 쓰쳐 지나갔던 그는 그 환자가 생각나서 도저히 그냥 갈 수 없었다. 그래서 프란체스코는 다시 돌아가서 그 환자에게 가지고 있던 일체의 것을 주었다.
한센씨병 걸인은 황송하여 썩어 진물이 흐르는 손을 내밀었다. 그때 프란체스코는 그 환자의 손을 덥석 잡고 입을 맞췄다. 그 한센씨병 걸인은 더욱 황송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바로 겁없이 주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요일 4:7).


사람의 약속...하나님의 약속
어느 젊은이가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했다고 합니다.
아무것도 없고 아는 집도 없고 해서 주일학교를 다니던 기억을 더듬어 교회로 찾아가 잠을 잤습니다.
저녁이면 교회에서 자고 낮이면 구걸을 하기 때문에 이 친구의 별명은 성씨를 따서 "박거지"라고 불렀습니다.
교회에서 잠을 잤기 때문에 새벽기도는 자연히 드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에서는 부흥집회가 있었고 교회를 짓기위하여 작정헌금을 하였습니다.
가만히 보니 자기 옆에 앉아계신 장로님이 1,500만원을 작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청년이 생각하기를 장로님은 교회에 일주일에 몇 번 나오시지도 않았으면서 1,500만원을 하였는데 나는 이곳에서 매일 잠을 잤으니 2,000만원 정도는 해야겠다고 2,000만원을 별 의무없이 적어냈습니다.
적어내고서는 한동안 까맟게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몇개월이 흐른후 새벽기도 때 갑자기 마음속에 충격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목사님의 설교에 성령이 마음을 움직여 주신것입니다.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청년은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그 작정한 것을 돌려줄 수는 없겠습니까?"
"글쎄 사람의 약속은 파기하거나 조정할 수는 있겠으나 하나님과의 약속은 지켜야지요."
그 청년은 한참을 깊이 생각한 후에 입을 열었습니다.
"목사님, 오늘부터 제가 고물을 주워 팔아 헌금을 하겟습니다.
작정한 헌금액이 되면 저에게 알려주십시요."
이 청년은 그날부터 고물을 주어 모았습니다.
그렇게 줍다보니 차츰 고물장사에 눈을 떠 1년 반만에 약속한 금액의 작정헌금을 드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때 이를 지켜보던 장로님이 이 청년을 후원하여 공부를 시켜주었고, 지금은 어느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기적
불신자인 학교 선생이 학생들에게 말했다. "성경의 기적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모세가 백성을 끌고 홍해를 건넜다고 하는데 홍해는 그 당시 깊이가 6인치밖에 안 되는 갈대밭이었습니다." 선생의 말이 끝나자 뒤에 앉은 학생 한 명이 "바로 그때 더 큰 기적이 있었으니,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기분이 언짢아진 선생이 "아니, 무슨 기적이 있었단 말이냐?"라고 묻자 학생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이 애굽의 전군대를 6인치 깊이밖에 안 되는 갈대밭에 빠뜨려 죽게 하신 일이야말로 더 큰 기적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자서전
리로이드 죤 오길비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자서전"에 이렇게 썼습니다. "어느 날 나는 이비인후과 의사를 찾아갔을 때 그는 진찰하기 위해 먼저 나 의 귓속을 소제해 주었다. 그는 강력한 펌프를 사용하여 오랫동안 쌓였던 귓 밥을 빼내 주었다.
나는 의사에게 물었다. '이렇게 많은 귓밥을 담고서 듣는데 별 장애가 없 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군요.'
그랬더니 의사는 나에게 멋진 말을 해 주었다. '귓밥이 조금씩 쌓이고 쌓여서 떡이 되면 그때에는 청력장애가 옵니다. 그렇 게 되면 귀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크리스챤과 같아집니다.'" 그렇습니다.
크리스챤이 마음에 들려오는 양심의 소리를 조금씩 외면하다 가 보면 필연코 양심이 무뎌져서 하나님의 말씀은 아예 귓전에 들리지 않게 된답니다.
그 결과 그는 영적인 귀머거리요 장님이 되어서 몸은 살아 있으나 영은 죽은 자와 같아집니다.

하나님을 보고자 한 왕
하나님을 보길 원하는 어떤 왕이 모든 현인들과 사제들을 위협했습니다. 자신에게 하나
님을 보여주지 못하는 자에게는 무거운 형벌을 내리겠다고 말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일
을 포기해 버렸을 때 왕에게 어떤 목동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왕을 궁전 밖의 정원으로 모
시고 나갔습니다. 정원에서 목동은 태양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태양을 좀 보십 시오." 왕은 고개를 올렸다가 금방 내리고 머리 위에 손을 얹어서 햇빛을 가리며 소리쳤습니다. "지금 내 눈을 멀게 하려고 하느냐?"
그러자 목동은 말했습니다. "임금님, 저 태양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 중의 하나에
불과합니다. 저 태양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희미하게 반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 태양도
바라보실 수 없으시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성 구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터하시리라 (마 6:33)
기독교 마리아 자매회는 1947년 3월 마더 바실레아와 마더 마티리아에 의해 창설되었다. 이 공동체는 독일 복음주의 루터교회에 속한 개신교 여성독신 공동체이며, 현재 5개 대륙 20여 개 지역에 서 200여 명의 자매들이 심기고 있다. 본부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의 다름스타트에 있으며, 호주, 이스라엘 미국에 지부가 있고, 90개의 언어로 소책자들을 출판하여 다섯 개의 대륙에 배포하는 한편, 라디오와 텔레비전 프로그램들도 23개 언어로 방송되고 있다. 기독교 마리아 자매회는 모든 쓸 것을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믿음의 선교를 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신성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현대 문화와 뉴에이지 등에 맞서 기독교를 옹호하는 문화 사역을 하기도 했다 이곳은 개신교 영성을 추구하는 순례자들이라면 프랑스의 떼제 공동체와 함께 꼭 방문하게 되는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이다. 이 단체의 창립자인 마더 바실레아는 독일과 유대인들 간의 화해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녀는 유대인들에게 독일인이 행한 유대 말살행위에 대해 용서를 구하며 깊은 상처의 뿌리를 치유하는데 삶을 헌신했다.


모든 발명은 하나님의 계시
미국의 유명한 전산 기계 발명가 사무엘 모리스 박사는 위대한 전신기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절망적인 벽에 부딪칠 때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빛을 보여 주었다고 고백하면서 "모든 발명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라고 말했다. 발명품이 완성되는 순간 발명자의 최초의 메시지는 "하나민의 역사는 놀랍다."였다. 출애굽기 31장에 보면 하나님이 브사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가지 재주로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출 31:1-11) 그 밖에 목공, 보석 공업, 금속 공학적인 지식을 계시해 주었다.

실수했을 때 만나주시는 하나님
1929년, 캘리포니아 대학의 축구 선수인 로이 리글즈는 장미 컵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을 했다.
전반전이 중반에 접어들었을 때 그는 상대편 조오지아 공대가 놓친 공을 가로채서 고울을 향해 갔는데 방향이 틀렸다. 그때 로이의 동료 선수인 베니 좀이 그를 뒤쫓았다. 리글즈가 상대편을 위해 득점을 하기 바로 전에 베니는 리글즈를 쓰러뜨렸다. 조오지아 공대는 고울 라인 지점에서 찬 공을 빼앗아 2점을 얻어냈다.
전반전이 끝나고 탈의실에 들어간 리글즈는 구석에 주저앉아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주체할 수 없는 울음을 터뜨렸다. 프라이스 코치는 침묵을 지키며 후반전을 위한 격려의 말도 하지 않았다. 선수들이 후반전에 나갈 채비를 할 때 그는 단지 “전반전을 뛴 선수 전원이 후반전에도 뛴다”라고 말했다.
프라이스 코치는 로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로이, 일어나서 가라. 경기는 반밖에 끝나지 않았다.”
그렇게 로이 리글즈는 다시 경기를 하러 나갔고 후에 조오지아 공대 선수들이 말하기를 그는 그때까지 그들이 본 어느 선수보다도 열심히 뛰었다고 한다. 제이 하돈 로빈슨 박사는 「캠퍼스 생활」이란 잡지에서 이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이 이야기를 생각할 때면 나는 ‘대단한 코치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나서 내가 살아오면서 저지른 모든 큰 실수와 항상 기꺼이 나를 용서하시고 다시 해볼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한다.”

하나님의 각본
역사의 각본은 다 쓰여져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가가 쓴 것이 아닙니다. 심리학자나 사회학자가 쓴 것이 아닙니다. 경제학자나 군사·정치 평론가가 쓴 것이 아닙니다. 인간 역사의 비밀한 열쇠는 그리스도가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이 세상을 창조했습니다.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그리고 통치하고 계십니다. 역사의 열쇠를 가지고 있습니다. 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개인 개인의 운명도 그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분의 것입니다. 그 분이 창조했습니다. 그 분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그의 허락 없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습니다. 이 역사는 잠정 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국가의 역사, 개인의 역사도 모두 하나님의 자본에 의해서 그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사람은 역사 속에서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나님의 모략 속에서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우리의 이성으로 얼마든지 반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계나 노예가 아니라고 하면서 반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 쓸데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창조자이시고 역사의 주관자이십니다. 인간의 운명을 주관하십니다.
해로 낮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케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시136:8,9)

헬렌 켈러와 하나님
삼중 장애인 헬렌켈러(Helen A. Keller)의 선생님이었던 설리반은 모든 것을 다 가르치고 나서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가르쳐야 했다. 어떻게 하나님의 존재를 가르칠 것인가. 이 어려운 문제를 놓고 깊이 고민하다가 드디어 하나의 방법을 찾아냈다. 선생님은 이미 나이가 많은 헬렌 켈러였지만, 어머니의 젖가슴에 손을 대게 했다. 그리고 몇 마디의 설명을 덧붙이려고 하자 헬렌 켈러는 말했다. "오, 하나님! 내가 벌써 알고 있습니다."

 
기사를 행하시는 하나님
본문 : 시편 9;2
“내가 주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지극히 높으신 주의 이름을 찬송하리니”
이 시편의 제목은 ‘영장으로 뭇랍벤에 맞춘 노래’라는 감사시입니다. 여기에서 ‘뭇랍벤’은 ‘아들의 사망’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아들의 죽음에 감사하는 시를 쓴 이유는 자신의 아들이 죽은 것이 아니라 갈대사본을 보면 ‘장막 사이로 나간 아들의 사망’으로 다윗이 죽인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승리한 후 영장에게 준 노래가 시편 9편입니다.
1. 찬양(1절)
그는 “내가 전심으로 여호와께 감사하오며”라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찬양의 모든 요소가 들어있습니다. 첫째 찬양의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이며,둘째 찬양의 자세는 ‘전심’으로 하는 것이며,셋째 찬양의 감정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며,넷째 찬양의 근거는 주의 모든 기사입니다.
2. 찬양의 이유(3∼6절)
여기에서 나타난 찬양의 이유는 하나님이 하신 놀라운 일들 때문입니다. 원수들이 물러가게 되었고,물러가다가 모두 넘어져 멸망하게 되었고,주님이 내 편을 들어 변호해주셨으며,보좌에 앉으사 의롭게 심판해주셨고,주를 거부하고 대적하는 열방민족들을 꾸짖으셨으며,악인을 멸절하셨고,악인의 이름을 영영 지워버리셨고,원수의 성읍들을 다 무너뜨리셨습니다.
3. 기사를 행하시는 하나님(2절)
이 모든 일은 인간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이 이루셨습니다. 칼과 창으로 오는 그는 키가 여섯 규빗(큐빗) 한뼘이나 되는 거구이며,머리에는 놋투구,몸에는 어전갑,갑옷의 중수는 놋 5000세겔,다리는 놋경갑,어깨사이는 놋단창,창자루는 베틀채 같으며 창날은 철 600세겔입니다. 이 어마어마한 거구를 향해 물맷돌로 대적하는 자를 승리하게 하셨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기사를 행하시는 하나님이며 그 기사를 통해 찬송받으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헨리.모어하우스는 자기가 짊어져야할 어려운 일로 말미암아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 그는 아내에게줄 보퉁이를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층계 아래에 있던 딸 미니에게 [어머니는 어디있니?]하고 묻자, 소아마비로 기동을 못하는 딸이 휠체어 안에서 대답했습니다. [2층에요. 그 보퉁이 어머니께 가져 갈거죠. 나로 가져가게 해주세요] [너는 갖고 갈 수 없지 않니?] 아버지가 그만 이렇게 말하자 딸은 말했습니다. [내가 보퉁이를 들고 아버지가 나를 이층 엄마 있는데로 데려가면 되잖아요]
[아아, 그렇군] 그는 그때 구름이 걷힌 듯이 깨달았습니다. [이 모어하우스가 아니다. 하나님이 해주신다. 이 짐을 안은채로 나를 예수께서 짊어져 주시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에게 무거운 짐이 있읍니까? 세상의괴로움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리라]고 부르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만 당신의 심령의 휴식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
성 구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 3:23)
지구촌의 식탁은 지금 광우병의 공포에 떨고 있다 초원의 풀을 먹고 자라도록 창조된 소에게 사람들이 동물사료를 먹임으로써 발병한 광우병이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그 쇠고기를 사람이 먹으면 광우병에 걸린 소와 유사한 증세를 보이다가 사망한다. 사랑의 대화가 오가는 식탁이 걱정과 근심의 자리로 바뀌게 된 비극적인 현실의 주범은 사람이다. 최근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자크 디우 사무총장은 소의 뼈가 섞인 동물사료가 유럽으로부터 100여 개 이상의 국가에 수출됐다고 공식 발표했고, 한국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세계 어느 나라도 안전지대가 아니다 더구나 수입 쇠고기를 즐겨먹는 우리로서는 간과할 일이 아닌데, 광우병은 전신 마비와 시력상실에 이어 뇌에 구멍이 뚫려 죽는 병이다. 사망한 후에야 병인이 확인된다는 사실도 공포스럽다 광우병의 인자는 '프리온'인데 이것은 100도 이상의 고열에도 소멸되지 않을 정도로 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다. 아직 치료법이 개발되지 않아 이 병에 걸리면 100% 사망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연의 관리자로 위임받은 인간이 본연의 직분을 망각하고 인간의 욕심을 위해 초식동물에게 동물성 사료를 먹임으로써 무서운 재앙이 초래되었다.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와 명령에 그대로 순종치 않았을 때 얼마나 무서운 재앙이 우리에게 다가오는지 를 광우병은 시사해 주고 있다.


공의로 갚아주시는 하나님
본문: 예레미야 39장 15-18절
오늘 본문에는 예레미야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 시드기야 왕에게 간청하여 예레미야의 목숨을 살려 준 구스인 에벳멜렉에게 하나님이 구원을 약속한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리를 배웁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몇 가지 살펴볼까요?
1. 항상 의롭고 양심적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때로 내가 가는 길이 소수만이 가는 길이라도 그 길이 정말 의로운 길이라면 의로운 소수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레미야를 배척하여 죽이려고 할 때 에벳멜렉은 예레미야를 살리는 극소수의 편에 섭니다. 소수가 가는 길에 동참하려면 어렵기에 솔직히 힘 좀 써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소수의 의로운 길로 가려면 갈등도 각오해야 하고, 청빈도 각오해야 하고, 고독도 각오해야 하고, 자기 부정의 아픔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소수가 가는 길이라도 그 길이 정말 선한 길이라면 그 길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진정 복된 사람일 것입니다.
시편 1편에는 복 있는 사람의 정의가 나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에벳멜렉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복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에벳멜렉은 무슨 대단히 큰 일을 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보기에 예레미야에게 한 방백들의 조치는 불법적인 태도라고 생각했기에 그는 예레미야를 살리는 길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양심에 충실하고자 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자기 양심에 충실하게 살면 됩니다.
보태지도 말고 빼지도 말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양심적으로 살면 그것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비방하는 사람들로 부끄럽게 하실 것입니다(벧전 3:16). 우리가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것은 '불의의 자리'이지 '소수의 자리'가 아닙니다.
2. 선을 행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보상을 해 주십니다.
에벳멜렉이 복을 염두에 두고 예레미야를 살려준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레미야를 살려 준 덕택에 복된 자가 됩니다. 하나님은 선으로 행하는 자의 선행을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베드로전서 3장 13-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은 최선을 다해 선행을 해야 합니다.
구로공단에 있는 어떤 대기업 회장으로 있는 장로님은
일년 동안 성경공부에 개근하고 성경도 많이 읽습니다.
그런데 그 구로공단에서 가장 봉급을 적게 주는 분으로 소문이 나 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지탄의 대상이 되다가
공단 내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 공장이 가장 시끄럽습니다. 평소에 선을 심지 않는 사람은 어려움을 만나면 외로워집니다. 그러나 평소에 많은 것을 심은 사람은 보통 때에도 적절한 보상이 있지만 특히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는 특별한 돌보심과 보상이 있게 됩니다. LA 폭동 때 평소에 친절했던 가게는 흑인이 스스로 지켜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선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선을 행하는 자가 될 뿐만 아니라
선을 선으로 갚을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메시지가 예레미야를 통해서 에벳멜렉에게 온 것은 예레미야에게 그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있었다는 증거도 됩니다.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면 감사하게 받고 자기도 최선을 다해 도우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은혜를 항상 잊지 말고 사십시오. 그리고 사람으로부터 도움 받은 것도 항상 잊지 말고 사십시오. 우리는 선을 선으로 갚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한 차원 더 나아가기를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선을 선으로 갚아야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우리 믿은 사람들은 악을 선으로 갚는 모습까지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9절에 정말 아름다운 말씀이 있습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가장 깊고 아름다운 영성은 바로 악을 선으로 갚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이와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미운 사람에게 떡 하나 더 주라..."
미운 사람과 싸우지 않고 상대방을 이기라는 영적 병법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매력적인 모습은 이런 모습일 것입니다.
3. 항상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느끼며 사십시오.
하나님의 보상은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모든 사건에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손길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믿음이 있어야 마음이 편해집니다.
그렇게 살면 불평할 것도 없고, 원망할 것도 없습니다.
불평과 원망이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유익이 된다면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한 점도 유익이 없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한 점도 유익이 없을 수 있습니까? 정말 없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불평과 원망은 정말 시간 낭비요, 인생 낭비요, 정말 내 인생에 하나도 보탬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평과 원망이 마음 속에 생기려고 하면 하나님의 손길을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은 반드시 간섭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을 생각하지 않으면 인간이 연약한지라 불평과 원망이 생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간섭하신다고 생각하면
기도하고 하나님의 창조적 손길을 기대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에게 한가지 탁월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의 처지와 사정을 보면 정말 할 말이 많을 텐데...
부잣집 앞에서 매일 연락하는 것을 보면서도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천국에 가서도 말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부자는 지옥에 가서도 얼마나 말이 많습니까?
오늘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말이 너무 많습니다.
너무 탓을 많이 하고, 불평과 원망을 많이 합니다.
우리는 나사로보다 훨씬 형편이 나은 데도 그렇습니다.
왜 나사로가 말이 없었을까요?
하나님의 섭리를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이런 섭리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삶, 나의 인생에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려운 세상에서도 능히 그 환경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생각하며 사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자비로운 하나님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바로 전에 그의 보좌 주위에 있는 천사들과 의논을 하셨다고 한다. 정의의 천사는 사람을 만들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사람을 만들면 그가 동료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사악을 자행할 것이고, 또 사람은 강퍅하고 잔인하고 부정직하여 세상은 불의로 가득 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진리의 천사가 반발하며 “사람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거짓되고, 그의 형제들을 속일 것이며 심지어 하나님 당신도 속일 것입니다”라고 했다. 거룩의 천사도 “사람을 절대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당신의 면전에서 당신의 이름을 더럽힐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자비의 천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저희의 하늘의 아버지, 사람을 만드시옵소서. 그가 죄를 짓고 정의와 진리와 거룩의 길에서 멀어질 때, 제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감싸고 사랑스런 음성으로 그에게 말하여 다시 당신께 데리고 오겠나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그렇다. 자비의 천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이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는 구제불능의 존재이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허물을 덮어주시고, 실수를 용서해주신다.

기적의 하나님은 당신을 사용하신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고 주의 이름을 찬송하 오리니 주는 기사를 옛적의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이라(사25:1)
어느 주일, 예배 후 나는 타지역에서 예배보로 온 한 가족과 악수를 나누었다.
"목사님.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셨어요."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다. 그때 다섯 살도 채 안되어 보이는 어린아들이 어머니의 말을 거들고 나섰다.
"그래요.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했어요."
그 가족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나는 어린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지.하나님은 너를 위한 계획을 갖고 계시단다."
그러자 소년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나를 위한?... 나를 위한?"
"그럼, 너를 인한 것이지."
내 말에 소년은 어머니를 보고 말했다.
"엄마, 나를 위한 것이래!"
소년은 문을 향해 나가면서도 어머니를 올려다 보며 '나를 위한...'하고 연신 되풀이 말하는 것이었다.
'나를 위한...' 이 말로 당신은 오늘 전혀 낯선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다. 당신은 우연한 만남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이 그들의 인생에 기적 을 안겨주길 원하신다. 당신의 전도로 그들의 인생이 변화될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기적을 일으키기 위하여 당신을 또 사용하신다.

하나님이 택하신 까닭
한동안 프란체스코를 진지하게 바라보던 마쎄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어째서 그럽니까? 당신은 어째서 그럽니까?” 마쎄오는 마치 프란체스코를 놀리기라도 하듯 그 말을 반복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서 조용히 물었습니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마쎄오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용모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높은 학식도 없으며, 귀족의 혈통도 아닌데, 어째서 모든 사람들이 당신의 말을 듣기를 바라며, 당신에게 순종하고자 하며, 또 당신과 함께 있기를 바라느냐는 것입니다. 어째서 세상 사람들은 당신을 따르려고 애쓰는 거지요?” 프란체스코는 이 말을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 그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명상에 잠긴 뒤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대답했습니다.
“그 이유는 가장 높이 계신 분의 시선이 그런 일을 하고자 하셨기 때문이오. 그분은 모든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들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계신다오. 그리고 그분의 거룩한 눈은 죄인 가운데서도 더 이상 죄인일 수 없는 작은 사람, 이보다 더 자격이 없고 이보다 더 죄인일 수 없는 사람을 찾을 수 없으셨던 것이오. 그래서 그분은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 놀라운 일을 성취하기 위해서 나를 택하신 것이오. 그분은 나보다 더 천한 인간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를 택하셨고, 그분은 이 세상의 고귀한 신분, 위엄, 강함, 미모, 그리고 학식을 깨뜨리시기 위해서 이렇게 미천한 나를 택하신 것이라오.”

하나님의 뜻을 아는 방법
성 구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달리다굼 선교회 김상섭 목사님은 본 선교회를 만들게 된 계기가 자신의 눈으로 본 장애인의 비참한 생활 때문이었다고 한다. 85년부터 88년까지 수원의 한 고등학교에서 교목으로 재직하던 김목사는 86년 2월 봄방학 때 학생들과 함께 강남시립병원 봉사를 갔다가 행려병자 병동을 돌아봤다고 한다. 욕창이 나고 대소변이 몸에 묻어 있는 장애인의 비참한 모습은 자신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이를 계기로 자비를 털어 이들에게 생필품을 사주고 보호자 자격으로 5명의 장애인에게 신림동 월세방을 선사하기도 하셨다. 장애인들의 아픔을 생각하며 잠 못 이룬 김목사는 87년 겨울방학 때 경기도 오산리 기도원에 들어가 20여 일 금식기도를 했다. 여기서 그는 장애인과 함께 하라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내려오면서 달리다굼 선교회를 창립하겠다고 마음을 굳히셨다고 한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

본문: 잠21:1-6
저자는 20장 전체에서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서 실망하지 말고 오직 선행과 의를 계속적으로 추구해 나가도록 권고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 장에서는 악인과 의인의 행실의 특징을 대조적으로 비교, 서술함으로써 실제적인 삶 속에서 지혜자가 취해야 할 삶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의와 공평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윌리암 바클레이는 '의'란 사람과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져야 할 것을 드리는 것이라고 정의 합니다. 윤동주의 시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마음과 행동'도 어떤 의미에서 이것과 일맥상통한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자연히 공평이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공평을 무조건적 평등, 차별없는 평등으로 이해하는데, 이것은 무리한 이해라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공평은 '정의'를 전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마땅히 받아야할 사람이 받고 주어야 할 사람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 공평과 의를 상실했을 때 선지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원하신 것도 義와 信과 仁의 실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스라엘 평민들과 더 깊은 유대 관계를 가지고 그들을 사랑과 공평으로 지도하길 원하셨고 지도자로서의 모범을 보이시길 원하셨지만 그들은 개인적인 기득권을 누리는데 만족하며 즐거워하였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로부터 공동체의 비극이 시작됨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2.겸손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자는 그의 교만에 의하여 자신의 도덕적 눈멂을 선언합니다. 그의 눈이 높은 것은 그의 안에 있는 빛이 어두워졌다는 것이고, 자신의 실제 모습을 전혀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하나님이 계실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여기에는 죄에 대한 고백도 없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순종도 없습니다.
3.거짓없는 사람입니다.
하나의 거짓은 다른 거짓을 낳으며, 작은 거짓의 성공은 또 다른 거짓을 연속적으로 낳게 되고, 더 큰 거짓으로 인도하여 물방울이 점점 커지나 막이 엷어져 터지듯이 터지고 나면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이러한 자들은 죽음을 구합니다. 속이는 사람들은 서로에게서 배웁니다. 그것을 당한 사람은 보복을 합니다. 그는 상대방에게 자기가 당한것과 동일한 또는 그 이상의 속임수를 쓰지 않는 한 만족을 모릅니다. 성공은 수많은 모방자를 만들어 냅니다. 속이고 속는 것이 역전되어 속은 자가 속이고 속인 자는 속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마음을 날마다 새롭게 하며, 의와 공평을 행하고, 겸손하고, 거짓을 행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축복이 있습니다.


성(性)도 하나님 선물…절제 필요
거짓말 대회가 열렸다. 세상에서 거짓말을 가장 잘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기로 했다. 온갖 거짓말이 난무했지만 일등은 "나는 거짓말을 할 줄 모릅니다"라고 진실을 고백한 사람이 최고의 거짓말장이로 뽑혔다. 타락한 죄성을 유전처럼 이어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한 본성을 간파한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거짓말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없듯이 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도 드물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성문화가 폐쇄적이며 은폐시키려는 경향 때문에 성욕이 왕성한 젊은이들에게 많은 혼란을 안겨주고 있다. 언젠가 남학생의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가슴이 두근거리고 쉬 피로하며 집중이 잘 안되고 얼굴이 달아오르며 코피가 자주 나서 온갖 종합 검진을 다해봤지만 원인 불명이요 약을 먹어도 치료가 안 된다고 했다. 동행한 어머니는 아이가 허약해서 공부에 지쳤다고 강조를 했지만 이런 경우 단둘이 터놓고 이야기를 해보면 대다수가 지나친 자위행위로 인한 정기 손상에 의한 질병으로 판명된다. 자위행위란 성 파트너 없이 자신의 생식기나 신체의 민감한 부분인 성감대를 만져 성적 쾌감을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자위행위는 유아기부터 시작되는 자연스러운 성장과정의 일부이며 남녀 구별 없는 인류의 자연 발생적 현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자위행위를 습관적으로 하는 상당수 학생들이 죄의식을 느끼게 되며 초조함과 자책감에 빠져서 심리적인 공황상태에 몰입하게 된다. 성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더럽혀지지 않도록 절제의 은사가 필요한 때이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자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 1:10.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마 12:25.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약 4:1,2.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높이 찬양하기 위해 모인 합창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같은 노래를 부르지 않고 각기 다른 노래들을 불러대어 합창을 망쳐 버리는 경우를 봅니다. 당신은 당신이 속해 있는 그리스도인 모임에서 어떤 노래를 부르고 계십니까 ? 좀더 우월해 보이기 위해 다른 사람과는 다른 노래를 부르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
아일랜드의 서해안 지방에서 고기를 낚는 어부들은 "키러"라고 불리는 특이한 구조의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다고 합니다. 그 배는 마치 한 사람이 노를 젓는 것처럼 모든 선원들이 한 마음이 되어 노를 저어야 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같은 `키러'에 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마음이 되어 저 천국을 향해 노를 저어야 합니다.
"주님,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모임이 주님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길 원합니다."
당신이 속해 있는 모임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는 곳에서는 성령의 폭발적인 역사가 일어난다.

하나님의 성품
몇년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있을 때, 그 얼마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반대해서 싸우고 있는 아프리카 국민 협회(African NationalCongress)와 접촉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던 한 흑인 그리스도인을 만났습니다.
몇달 동안 그는 심문을 받고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갖은 고문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잘못한 것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이 사람은 반죽음 상태로 병원 밖의 거리에 버려졌습니다. 내 친구 중의 한 사람이 이 사실을 조사한 결과, 어처구니없게도 이 흑인 그리스도인을 심문했던 책임자도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실제로 어떤 확실한 근거도 없이 소문만 듣고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형제를 때리고 고문하도록 도운 사람입니다.
나는 이 흑인 그리스도인의 집에서 그와 함께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고충과 그 상황에 저질러진 비인간성을 마음으로부터 해결하고 백인 형제를 용서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는 깊이 흐느꼈습니다. 이러한 사랑이 인간의 속성과는 반대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속성과는 완전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살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초인간적인 사랑입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 이러한 성품들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의 열매를 원한다면 그분이 우리의 삶에서 열심히 일하시도록 허락하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택하지 않는다
만약 한 회사가 유능한 신입사원을 뽑기 위해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대상으로 인물분석을 했다고 가정하자.회사가 이들의 학력 경력 적성을 종합해 컴퓨터에 분석을 의뢰했다면 아마 이런 결과가 나왔을 지도 모른다.
“야고보와 요한은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다.도마는 매사에 의심이 많고 부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다.베드로는 성격이 급해서 실수할 가능성이 높다.안드레는 너무 내성적이어서 매사에 추진력이 떨어진다.야고보는 혁명가적인 기질이 있어 위험한 존재다.세리 출신 마태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다.제자들 중 적격자는 가룟 유다뿐이다.그는 학식과 경험을 겸비한 인물이며 실업가의 감각과 사교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역사를 변화시킨 사람은 실격자로 판정난 제자들이었다.세상적 판단으로 가장 유능한 가룟 유다는 배신자로 낙인찍혔다.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택하지 않는다.우리의 겸손과 부족함을 들어 사용하신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왕래하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공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을 사하리라." (예레미아 5:1)

지금 정치개혁을 하라는 국민의 소리가 드높다. 낙천, 낙선운동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시민운동은 낡고 부패하고 줜워주의적인 정치를 타파하고 깨끗하고 민주적인 정치, 저비용 고효율의 정치를 하라는 국민의 요구요, 그것은 이제 시대의 대세가 되고 있다.
국민의 그런 요구를 받고 있는 사람이 누군가. 바로 정치권이요, 그 주에서도 정치지도자들이다. 그들이 답해야 할 당사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을 부르는 국민의 소리는 ㅣ높건만 정작 답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시민운동에 대하 지도자들은 공감을 표가혹 취지 수용의 뜻을 밝혔다. 그러나 아직은 그럼 말만 있을 분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고치겠다는 방안을 내놓는 사람은 없다.
자기들이 공천을 주고 감투를 씌원준 정치인들이 부패, 저질, 불성실 등을로 시민운동의 배척대상이 되고 있는 사실 자체에 대하 보스들은 스스로 낯을 붉히고 책임을 통감해야 할텐데, 이런 반성의 빛을 보이는 사람도 없다.
정치지도자들은 시민운동을 이용하거나 회피하려 해서는 안 된다. 국민하나의 위선이요, 이중적 형태이다. 지도자란 희생과 헌신을 통해 국민에게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먼저 하나님께 드려야
지금부터 약 3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제가 대학교 1학년 때인데 방학때가 되어 할머니가 계신 시골로 가게 되었읍니다.
그곳에 가까운 도회지까지 고속 버스를 타고 갔었는데 막상 할머니가 계신 지역까지 가는 버스는 2시만마다 있더라구요 그래서 소위 `빵차`라는 걸 타고 갔었읍니다. `빵차`는 빵집에서 5,000원 정도의 빵을 사는 대신 그 빵집에서 집까지 봉고차로 데려다 주는데
그 봉고차를 말하는 것이예요. 하옇튼 맛있게 보이는(울긋 불긋한)빵을 골라서 집까지 잘왔읍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집에와서 할머니랑 같이 빵을 처음에 먹어본 순간
맛이 영 아니더라구요.
빵집에서 볼 때는 제리하며 건포도 크림 별게 별게 다들어 있구나 하며
좋아했는데 막상 먹어보니 역겨워서 못 먹겠더라구요 그래서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에게는 무척 죄송했고 내가 갔다 버리겠다고 했읍니다(할머니께서는 나중에라도 먹겠다고 싸두셨습니다)
그 맛이 없었던 것은 찌끄레기 였기 때문이었읍니다.
비닐을 벗겨서 보니까 여러 빵조각을 뭉쳐 놨었고 다른 여러 맛있게 보이던 것들도 다른 빵을 만들고 남은 것들을 대중없이 꼽아 논 것 같았읍니다
이럴줄 알았으면 곰보빵이라도 신선한 걸로 사오는 건데... 그렇구나 주님도 처음 것을 기쁘게 받으시겠지. 우리가 좋은 시절 다 지내고 하고싶은 하면서 보내다가 나중에 주님과
교제를 하려고 한다면 얼마나 부끄럽고 염치없는 일일까요. 사실 그때까지 대학 1학년 생활을 일락에 빠져 지냈기때문에 무척 후회가 되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글을 보고 계신 고3 학생들이 있다면 저는 진정 권면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대학에 들어가거나 사회생활을 시작하거나 세상적인 놀음에 관심두지 말고 놀라우신 그분의 사랑에 순복하여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처음시간을 드린다면 주님께서 더 큰 축복을 해 주실 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성탄준비
기약이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다(갈4:4). 구약성서의 페이지 마다 이스라엘의 숨결마다 메시야 대망으로 꽉 차 있었다. 구약 성서에는 456개의 예수 예언이 있다고 한
다.
하나님은 정치적으로 로마제국의 문화와 언어를 통일시켜 예수의 복음전도의 세계화를 준비하셨다. 로마의 주민 세 사람 중 두 명은 노예였던 당시 사회는 신음속에 구세주 대망이 팽배했다.
고대세계는 유대나라에서 세계의 지배자이며 구원자인 왕이 난다는 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고 헬라의 극작가들은 인간의 죄와 고통과 죽음과 저주를 풀어주는 구속신에 대해서
말했고, 플라톤은 로고스에 대해서 소크라테스는 사랑의 화신에 대해서 석가는 또 다른 불타에 대해서 중국은 서방에 성인이 난다는 통념과 도성인신 사상이 있었고 세계의 민속
신앙들도 소박한 구세주 사상이 있었다.
동방박사들은 세계의 윤리와 철학과 모든 종교를 대표한 상징적 인물들이었다.


공평하신 하나님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 는데 어떤 사람은 부자집에서 태어나 호의호식하며 살고, 어떤 사람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평생토록 고생만 하다가 삶을 마감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건강하게 태어나 할짓 못할짓 다하며 사는데,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 부터 남의 도움없이는 한순간도 살 수 없는 장애인인가? 어찌 이것을 하나님은 공평하시다 라고 말 할 수 있는가? 하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평생토록 찾아 헤매는 것은 "행복" 입니다. 행복하고 싶어서 돈도 벌고 결혼도 하고 지위도 얻고 지식을 쌓습니다. 그런데 행복이라는 종착역에 도착해 보면 "행복"은 돈이나 지위나 물질이나 지식으로만 얻는것이 아니라는것을 알게 됩니다. 가난하고 장애인으로 태어났어도 행복할 수 있고, 천하를 다 얻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행복하지 않을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행복을 돈이나 물질로만 얻을 수있다면 세상은 너무나 불공평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물질과는 상관없이 누구든 행복을 얻을 수 있게 하셨으니 그것이 공평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입니까


하나님 믿고 의지하지만 외로움 많이 느껴요
하나님은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고는 있지만 살아가는 세상속에서 외로움의 상처가 깊습니다.믿음으로 극복하려고 하지만 마음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외로움의 상처를 치료하고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정받고 싶은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자기를 적극적으로 실현하고 타인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구는 누구에게나 깃들여 있다.이런 자기실현의 욕구가 분출되는 현대사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심리적 증상이 바로 외로움의 문제이다.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갈급함과 텅빈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가장 큰 이유는 자신의 자아가 흔들리고 있는 취약한 자아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심리학자들은 튼튼하고 응집력이 강한 자아 생성에 어린시절의 경험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본다.
특히 6세 이전의 가정에서의 경험이 가장 소중한 자원이 된다고 말한다.이때 가정에서 부모와 식구로부터 충분한 사랑의 산소를 공급받고 자랐으면 응집력이 강한 튼튼한 자아가 형성돼 자기중심을 지닌 사람이 되는 것이다.타인의 인정이나 칭찬에 굶주릴 필요가 없고 혼자 있어도 충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의 경험들이 칭찬받지 못하고 늘 다른 형제들과 비교되고 부모의 권위적 훈계와 고함소리 가운데 자란 사람들은 자기 존중감을 체험해보지 못하고 굶주린 자아를 형성,취약한 자아 구조를 지니게 된다.늘 누군가의 인정과 칭찬이 필요하고 곁에 사람이 있어도 항상 외롭다.
신앙생활을 해도 언제나 자신의 굶주린 자아를 채우는 목적으로 하나님과 타인들을 활용하기 때문에 진정한 믿음의 기반에 선 참된 만남의 관계를 경험하지 못한다.어린시절 사랑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며 칭찬에 인색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들의 상처입은 마음이 바로 외로움의 주된 원인이다.인간의 모든 심리적 상처들은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치유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진정한 사랑의 체험만이 텅빈 마음을 채울 수 있다.
신앙공동체에서의 이런 체험도 필수적이지만 좀더 전문적인 상담의 도움을 받아 보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외로움을 그때그때 임시 방편으로 채우려는 무분별하고 이기적인 인간관계에서 탈피하려는 자신의 노력이다.자신의 외로움에 대한 민감한 느낌만큼 타인의 심리적 욕구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결국 우리는 관계의 그물망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고 그 그물망은 서로 주고받음의 끈을 통해 얽혀있기 때문이다

방송을 통한 하나님 사역의 동반자가 되고 싶습니다
"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 (로마서 12 : 1)
작년 3월부터 프리랜서로 활동중인 전문 방송인 손범수씨, 방송국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때와 비교해보면 시간 사용과 조정면에서 훨씬 자유스로워졌다고, 이렇게 자유스러워진 시간 사용으로 손범수씨는 지난 8월 베트남을 다녀왔다.
기독의료인의 봉사모임인 '글로벌 케어'홍보대사로 이촉되어 그곳 환자들을 돕는 일에 동참하기 위해서였다. 이웃을 돌아보고 사랑을 베풀어야겠다는 자극과 도전을 받았다고, 사실 방송일을 해오면서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들어 사용하고 계시다고 고백한다. 그는 얼마전 교회에서 간증을 했다.
그리고 이것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여러 교회에서 간증요청이 왔다. 처음에는 그는 사양을 했지만 '아 저렇게 방송일을 하는 사람도 예수님을 믿는구나'라면서 청소년들에세 도움이 많이 된다는 말을 듣고는 하나님을 위한 기회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런 일들이 자신을 오늘 이자리에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일 거라는 마음에서다. 방송을 처음 시작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그는 지금도 프로그램 시작전 기도를 드린다.
오늘도 방송인 손범수씨는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 기도를 드린다. 감동과 사랑과 그로 인한 기쁨이 전달되는 방송이 되게 해달라고 말이다.

임마누엘의 하나님
1.예수님의 출생(18,20) 121
성령으로 잉태-성령-생령 인류 시조 아담의 출생=누가 낳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빚어 그 속에 생기를 불어 넣으므로 생령이 되었읍니다. 인류 시조의 출생이 부모로부터 낳음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생명의 영 호흡,생기를 불어 넣음으로 시작 된 것처럼 제이 아담이신 예수님도 성령으로 잉태되어 여인의 몸에서 태어났읍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전혀 믿을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흙 속에 생기를 넣어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 성령으로 처녀의 몸에서 아들을 낳게 하심은너무 쉬운 입니다.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태어나시므로 죄없으신 상태에서 태어나시어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서 대신 죽으실 수 있었읍니다.
2.이름이 예수-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21)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세상에 오신 것은 죄때문에 죽고 죄때문에 병들고 죄때문에 두려움과 슬픔과 어두움과 싸움과 전쟁과 고통 속에 놓여 있는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서 오셨읍니다.
3.성경에 예언된 말씀을 이루어짐(22)
하나님이 약속하신 성경대로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시고 성경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시고 성경대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십니다.
성경대로 하늘과 이땅은 없어지고 성경대로 예수님이 다시 재림하시고 심판하시고 성영 대로 믿는 자는 영생의 부활로 믿지않는 자는 영벌을 받을 것입니다.
4.임마누엘 하나님(23)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 인간이 하나님을 머리 떠나 고아처럼 버려져서 있기에 외롭고 고달프며,가난과 질병과 슬픔 속에 살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독생자 예수 님을 보내시므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함께 하시고 버리지 아니하시고 떠나지 않으시며 세상 끝날 때까지 함께 하사 우리와사랑과 구원과 보호와 공급해 주십니다.
인간의 최대의 축복과 하나님의 사랑의 표시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예수님은 그 이름대로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치료하시고 용기와 소망을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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