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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적 돌봄에서 신학과 심리학의 상호관계[1]

하나님아들 2020. 2. 11. 16:26

목회적 돌봄에서 신학과 심리학의 상호관계[1]  

목회적 돌봄에서 신학과 심리학의 상호관계:

돈 브라우닝과 토마스 오든의 방법론 비교

Interrelatedness between Theology and Psychology in Pastoral Care:

Comparative Study on Methodology of Don Browning and Thomas Oden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심리학은 미국 문화 전반에 걸쳐서 뿐만이 아니라, 신학 특히 목회상담학을 중심으로한 실천신학 분야에 큰 영향을 끼쳐왔다. 이러한 심리학을 실용주의 노선을 따르는 미국의 실천신학계에서 크게 환영하며 받아들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겠다. 역사적으로 보면, 1920년대에 임상목회교육(CPE)의 등장과 함께, 정신요법적 심리학들이 목회적 돌봄 특히 상담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켜 왔다. 1950년대 초기 이후에는, 특히 일대일의 심리학 지향적인 상담모델에 대한 강조가 주요 개신교 목회적 돌봄에서 있어 왔는데, 이때에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적 심리학이 일반적인 구조를 제공했고, 또한 로저스의 내담자 중심 상담이론이 주요 자원으로 등장했다. 목회학 분야에 있어서, 이런 심리학의 영향은 대표적인 실천신학자인 힐트너, 와이즈, 오츠, 클라인벨 등의 글에서 잘 나타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심리학과 신학의 경계에 대한 질문은 늘 제기되었는데, 70년대 이후의 목회적 돌봄에 있어서 현대 심리학의 도움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기독교 전통의 뿌리를 회복하고자 하는 새로운 경향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이 질문은 보다 깊어지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목회적 돌봄에서 심리학의 무비판적 수용으로 상실된 신학의 뿌리를 회복하고자 노력하였지만, 본 글에서는 다원주의라는 오늘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런 작업을 한 두사람의 접근 방법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이 둘은 신학을 다른 학문과의 비판적 대화를 통해 공적신학으로 정정당당히 인정을 받아 목회적 돌봄에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카고대학의 브라우닝과, 현대성에 환멸을 느끼고 성서와 교회 교부들 그리고 루터, 캘빈, 웨슬리와 같은 20세기 이전의 신학자들 안에 있는 기독교적 돌봄과 상담의 고전적 자료들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드루대학의 오든이다. 이들이 가졌던 처음의 관심--목회적 돌봄에서 신학적 뿌리의 회복--은 매우 유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기독교 신앙과 심리학적 통찰력에 대한 접근이 각기 달라졌기 때문에, 이 둘의 비교는 목회적 돌봄의 분야에서 심리학과 신학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1. 브라우닝과 오든의 공동 기반과 차이


브라우닝과 오든이 함께 나누는 중요한 가정이 있는데, 그것은 세속적 치료에서 내담자에 대한 치료자의 수용은 지금 여기서의 치료적 상황을 뛰어넘는 보다 큰 존재론적 수용의 구조 위에 기초를 둔다고 보는 것이다. 이 전제는 이 둘이 60년대에 취했던 것으로 심리학과 신학과의 관계를 긍정적인 입장에서 보고자 했었음을 보여준다.

오든은 바르트의 정통적 신학과 로저스의 "내담자 중심" 심리학을 유비적으로 연결시키면서, 하나님의 행위와 치료자의 행동 사이에는 상호 관련이 있음을 가정한다. 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예수의 성육신과 상담자의 공감 사이에 존재하는 유비이다. 오든에 따르면, 성육신에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유한성과 소외의 상황에 들어오시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조건을 나누시면서, 우리의 준거 구조를 취하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하면서, 오든은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빌 2:5-7)과, 치료자가 자신을 다른 사람의 준거 구조에 놓고, 세상을 그가 인식하는 대로 인식하고, 그의 세계를 함께 나누고, 그래서 내담자가 스스로 수용되고 이해되었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치료적 과정에는 유비적인 상호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66년에 처음 썼던 그의 글과는 달리 78년에 다시 나온 그의 책 「케리그마와 상담」에서는 신학과 심리학과의 유비를 시도하면서도 또 한편으로 심리학의 한계를 분명히 설명한다. 비록 그런 유비적 추론이 상담에 관한 강화된 전망을 제공한다 할지라도, 치료자가 내담자의 고통을 상상적으로 나누는 것 이상을 하지 못하는 반면, 하나님은 그 자신이 우리의 죄와 소외를 직접 담당하신다는 어떤 결정적인 점에서 이 유비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다.

브라우닝 역시 치료자의 수용 배후에 있는 보다 큰 존재론적 수용의 구조에 기독론적 표현을 주는 것은 적절하다고 동의한다. 여기서 브라우닝은, 만일 치료자의 공감적 수용과 그 뒤에 있는 보다 큰 구조사이에 유비적 관계가 있다면, 그 유비는 어떤 방법으로 작용하는가? 즉, 어떤 구조가 유비의 척도인가, 작은 것인가 또는 큰 것인가 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이 질문에 대해, 그는 치료적 상황 안에서 작용하는 수용의 보다 큰 구조는 보다 작은 구조의 근거요 척도요 전제이며, 그것의(보다 작은 구조) 가능성을 구성한다고 본다. 그는 모든 유한한 것은 신앙이나 계시 사건에 뿌리를 둔다고 믿는다. 그러나, 여기에서 계시와 신앙의 본질에 대한 브라우닝과 오든의 미묘한 차이가 시간이 가면서 노출된다.

오든에게 있어서,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자신을 노출하는 하나님에 의해 전해진 말씀이다. 그리고 신앙이란 이처럼 성서에 의해 증거 되고 예수의 인격 안에서 전해진 그 말씀을 믿는 문제이다. 그러므로 모든 유한한 것의 척도인 완전에 대한 궁극적인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있다고 오든은 본다.

그러나 브라우닝은 하숀에 의해 주장된 입장을 추가해서 제안한다. 이 제안에 따르면, 완전에 대한 직관은 신앙 경험 안에서 일어나지만, 그러나 그것의 결정적인 입증은 신앙의 범위밖에 있는 근거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과 정신요법적 심리학사이의 대화는 이 두 입장을 종합하는 맥락 안에서 가장 잘 진행될 수 있다고 브라우닝은 본다. 이처럼 브라우닝은 계시를 그의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지만, 긍정적인 신학적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적 사건 밖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고 믿는다.

오든의 근래의 저서들을 보면, 계시를 그리스도로 제한하지 않는 미묘한 언급을 한다. 그는 신적인 은혜가 자연 신학과 계시 신학 사이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틈새를 이미 다리 놓았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오든의 우선적인 목표는 언제나 성서의 계시로부터 이야기하는 것이다. 다른 계시의 가능성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그것으로부터 얘기를 시작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에 비해서, 브라우닝은 유비적 과정이 양쪽으로 작용한다고 제안한다. 첫째로 위에서 아래로(선험적으로), 그러나 또한 아래에서 위로(귀납적으로) 작용을 한다. 즉 브라우닝에게 있어서 치료자의 공감적 수용은 "명백히 하는 유비"가 될 수 있고 또 한편 그것으로 하나님의 수용의 본질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돈 브라우닝의 접근 방법


1) 심리학과 신학의 대화 필요성


현대심리학은 기본적으로 과학적이며 따라서 삶의 의미에 대해서는 대답을 제공하지 않는다고 일반적으로 생각되어왔다. 사실 현대심리학이 과학적 지식인 한에 있어서는, 그것이 논리적으로 신학의 주장들과 갈등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다. 이반 바버는 이런 견해를 분명히 말한다.


이것은 과학과 종교의 문제에 대한 매력적인 해결책이다; 이 두 분야는 그들이 만일 전적으로 다른 기능을 한다면 갈등을 일으킬 가능성이 없다. 과학적 언어의 기능은 자연에 대한 예측이고 통제이다; 종교적 언어의 기능은 자기 위탁, 윤리적 헌신, 그리고 실존적 삶의 방향에 대한 표현이다.


그러나 브라우닝은 대부분의 뛰어난 심리학들은, 그들이 갖고있는 기술적 가치가 무엇이든 지간에 그것에 덧붙여서, 긍정적인 문화 즉 현대인의 삶에 영향을 주는 형이상학적 상징체계와 윤리적인 차원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 심리학 특히 임상심리학은 비록 그들이 인식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종교적, 도덕적 지평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프로이드의 삶에 대한 은유는 '삶과 죽음에 대한 본능'이고 윤리는 '이기주의' 차원이고, 인본주의 심리학의 은유는 '조화'이며, 이들도 윤리적 이기주의 형태를 가진다고 분석한다.

따라서 심리학과 신학 사이의 대화를 촉진하기 위하여 브라우닝은 과학적이고 서술적인 심리학의 한계를 넘어서 심리학의 내면세계를 밝혀야 한다고 제안한다. 즉, 그는 심리학을 과학적 또는 임상학적 관점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우리 사회의 성격과 우리가 사는 방법에 영향을 주는 '실천적 도덕 체계'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비록 감추어져 있지만 치료의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유사종교의 영역으로 빠져드는 심리학의 형이상학적, 윤리학적 차원은 인식되고 비판적 분석을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심리학과 신학은 별개의 것을 다루는 분야라기 보다는, 세계관과 윤리관이라는 같은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둘은 서로 갈등할 수 있으며, 서로 상호간의 비판적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때 대화의 기준은 믿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즉 심리학이 비신앙적이고 무신론적이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이유로 인해 비판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단순한 기술적 경험적 이성이 아니라 보다 높은 차원의 이성)에 근거해서 각자 안에 있는 세계관과 윤리관을 비교함으로 어느 것이 더욱 바람직한 것인가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심리학에 있어서의 형이상학적, 윤리적 차원을 브라우닝은 밝히려 하는 것인가? 이렇게 해서 신학과 심리학의 대화를 하려는 그의 의도는 어디에 있는가? 무엇보다 브라우닝의 가장 큰 관심은 다원주의 상황하에서의 효과적인 목회적 돌봄인데, 현대 목회적 돌봄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도덕 규범(윤리)의 결핍이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상담에서 많이 강조되는 사랑, 수용, 용서 없이는 깨어진 관계가 회복될 수 없으나, 또 한편으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얘기하는 도덕 규범이 없다면 사람은 더 깊은 정신적 혼란으로 인해 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무엇이 옳고 최선인가를 알고 싶어 하나 오히려 도덕 규범에 혼란을 갖게 되는데,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전통과 세속가치의 경계선상에서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전통은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전통적인 규범이 자동적으로 오늘 상황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 우리의 상황에 맞는 실천적인 도덕 규범을 만들기 위해 그는 전통(신학)과 세속 문화(특히 심리학)와의 상호 비판적 대화가 다음 다섯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1. 은유적 차원 (우리는 어떠한 세계에 살고 있는가? 무엇이 가장 궁극적인가?) 2. 의무적 차원(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3. 욕구-경향성 차원(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와 추구하고자 하는 성향은 무엇인가?) 4. 상황 차원(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상황은 무엇인가?) 5. 규칙-역할 차원(마지막으로, 우리의 삶의 규범은 무엇이 되어야 하나?). 이러한 차원들에서의 대화를 통해, 권위주의에 빠지지 않고(권위를 갖고 강제로 강요할 때 오히려 신경증적 질병을 초래하게 되는 권위주의의 폐해는 오늘날 심리학의 도움으로 잘 알려졌으므로), 어떻게 오늘에 맞는 도덕 규범을 세울 것인가를 그는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여기서 데이빗 트레이시를 따르면서, 브라우닝은 그의 방법을 "수정된 상호연결방법"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틸리히의 상호연결방법--심리학 같은 세속 분야에서 제기되는 실존적 질문들을 종교적 전통으로 연결시키는 방법--과 달리, '질문들'뿐만이 아니라 '답들'도 심리학에 의해 제시된다고 봄으로, 상호연결방법(실존은 질문하고 계시는 답을 한다는 일방적인 방법)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브라우닝은 일반 세속문화(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예술 등) 중에서도 특히 심리학에 큰 관심을 보이는데, 그 이유는 심리학이 현대 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그는 필립 리프의 "정신요법 분야들이 현대 개인들의 자기 이해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문화적 영향력"이라는 주장을 포용한다. 미국이라는 상황에서, 오늘날 삶의 복잡성, 종교적 언어의 상대적 약화, 우리 세계 안에 넘치는 의미성에 대한 요구 때문에 심리학이 점점 종교의 영역을 차지해 가고 있음을 그는 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는 심리학의 기술적 배후에 있는 철학들과 기독교 신앙과의 상호 비판적인 대화를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에게(더나아가 비기독교인인 현대인에게도) 오늘에 맞는 도덕 규범을 제시 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2) 심리학과 신학의 상호 영향


심리학 배후의 함축적인 은유들과 윤리들은 이미 심리학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즉, 우리의 새로운 과학적 신화들은, 그들이 우리의 불안에 대답을 주려고 시도하고, 세상에 대한 일반화된 이미지를 제공하고, 삶의 가치, 죽음의 본질, 그리고 도덕성에 대한 근거에 대해 우리가 취해야할 태도를 형성하는 한에 있어서, 종교적 사고의 현대적 형태들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심리학은 심리학이 아니라 종교의 형태를 취하는 무엇으로서 종교와 경쟁을 하기도 한다. 이제 이러한 심리학이 신학에 대해 어떤 영향을 주었으며, 또한 신학은 심리학에 대해 어떻게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브라우닝은 깊은 관심을 갖고 분석한다.


(1) 신학에 대한 심리학의 영향


심리학 특히 인본주의 심리학의 자아실현, 자기배려, 자기존중에 대한 주장은 더욱 효과적으로 전통적인 이웃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했다. 로저스는 개인들을 "피상적이고 외적인 근거에서 바라볼 때 그들은 우선적으로 자아사랑의 희생자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하면서, 자기가 치료했던 수많은 사람들을 근거로 해서 "문제의 핵심적 원인은... 그들이 그들 자신들을 경멸하고, 자신들을 무가치하고 사랑 받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로, 그가 사랑 받고 있다는 관계의 경험 안에서만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솟아오르는 존경, 수용, 그리고 자신을 좋아함을 느끼기 시작할 수 있다. 그 자신을 사랑스럽고 가치 있다고 느끼기 시작할 수 있을 때, 그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부드러움을 느끼기 시작할 수 있다. 그렇게 그는 자신을 실현화하기 시작할 수 있고, 그가 되고 싶어하는 더욱 사회화된 자아가 되는 방향으로 움직이도록 그 자신과 행동을 재조직하기 시작할 수 있다.


여기에서 다른 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의 입장도 비슷한데, 인간 실존에서 심각한 문제는 '자기사랑'이 아니라 '자기혐오'이며, 사람이 자기사랑을 느끼면(자아가 사랑 받고 또 사랑받을만하다고 느끼면) 자동적으로 타인 사랑이 뒤따를 것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현대심리학 특히 인본주의 심리학은 도덕성의 핵심으로서 상호성에 대해, 그리고 아가페와 에로스의 관계에 대해 더욱 적절하게 이해를 할 수 있도록 공헌을 하였다. 이처럼, 근본적인 자기존중을 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신학은 말을 하지만, 인간 조건의 분석에 있어서 자기혐오나 자기존중의 상실의 문제에 대해서는 현대심리학이 신학자들보다 많은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신학은 일반적으로 아가페를 타자에 대한, 특별히 모든 사람들을 위한 '자기희생의 사랑'으로서 해석한다. 예를 들면, 니버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희생적 사랑의 대표적인 예이고 십자가는 그것의 완전한 상징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본성은 희생적 사랑이고, 이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서 노출된다는 것이 니버가 보는 아가페에 대한 해석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자아사랑, 자기실현의 욕구가 삶에서 어떤 역할을 가져야 할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때 인본주의 심리학은 이웃 사랑의 해석을 자아와 타자에 대한 동등한 배려의 방향으로 이끌면서, 보다 이웃 사랑을 현실적으로 이행할 수 있도록 돕는다고 브라우닝은 본다.

특히, 에릭슨의 동등한 배려 또는 상호성의 윤리는 이웃 사랑을 더욱 분명히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브라우닝은 에릭슨이 인본주의 심리학에서 말하는 소극적인 건강한 자아의 개념--즉 인간의 기본적이고 자연적인 관심인 자기실현을 이루는 것--을 넘어서고 있다고 하며, 그 근거로 에릭슨의 '상호성'에 대한 이론을 다음 세 가지로 부각시킨다. 첫째로, 이것은 계속되는 세대에 생식적인 문제뿐 아니라 폭넓은 돌봄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즉, 단지 자신의 아이들 뿐만 아니라 다음세대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이다. 둘째로, 에릭슨의 상호성 이론은 '세대에 기초한 이론'위에 세워졌다. 즉, 아이들의 필요를 채워주면서, 어른들은 또한 자신 안에 있는 필요들을 채운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유아들이 어른들의 따뜻하고 인정하는 얼굴을 보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어른들도 유아들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유아가 음식물을 필요로 하는 동시에 어머니는 젖을 빠는 아이들로부터 기쁨을 얻는다. 또한 아이들을 돌보는 바로 그 행위 안에서 부모들은 그들 자신의 "가르치는 본능"을 만족시킨다는 것이다. 셋째로, 에릭슨은 「간디의 진실」라는 책에서, 황금률을 자기 희생을 포함하는 것으로 재해석하면서, "진실한 행동은... 상처를 주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받을 준비에 의해 지배된다. 이것은 비폭력의 원리에 의해 지배되는 행동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비폭력행동을 취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더 정당하고 상호적인 행동을 가질 수 있도록 기꺼이 자신이 고통받고 상처를 받는 것인데, 이것은 진실한 상호성과 정의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일시적인 것이다. 이와 같은 에릭슨의 상호성을 브라우닝은 높게 평가하며, 이것은 이웃 사랑과 황금률을 더욱 적절히 해석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본다.


(2) 심리학에 대한 신학의 영향


기독교 전통은 하나님에 대한 은유를 창조자, 심판자 또는 통치자, 그리고 구원자 등으로 표현해 왔다. 이것은 라인홀드 니버의 신학에서 분명히 나타나는데, 니버가 얘기하는 은유 즉 창조주로서의 하나님, 섭리자로서의 하나님, 구원자로서의 하나님은 은유적 표현으로 이들은 각각 창조는 선하고, 우주에는 도덕적 질서가 있으며, 구원(갱신)은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신학의 은유들은 인간 경험의 광대한 영역에 질서를 부여한다.

기독교 신앙의 이러한 기본적인 은유들은 현대심리학의 은유들과 비교할 때 훨씬 더 풍요하고 다차원적인 것을 알 수 있다. 현대 심리학의 은유들--삶과 죽음, 조화--은 단순하고 일차원적인 경향이 있다. 따라서, 만일 종교적 전통의 오래된 은유와 관련된 이미지들을 우리가 기억할 수 없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인간은 과학적 신화들만 갖고 살 수 있을까? 이런 것들은 실제적인 삶의 영역들을 충분히 설명하기에는 너무 단순하고 너무 일차원적이고 풍부하지 못하다. 이런 의미에서 서구 종교적 전통의 다양한 은유들은 좋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점에서 브라우닝은 그가 선호하는 에릭슨에게도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에릭슨이 가진 것은 '조화'와 '구원'의 함축적인 은유이며, 이 두 가지는 서구 종교전통의 근원적인 은유들이지만,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은유나 이것과 유사한 은유들을 에릭슨은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즉, 도덕적 체계를 필요로 하는 삶에 있어서 도덕적으로 살 수 있도록 힘을 주는 은유들, 다시 말해 그가 삶에 있어서 근본적이라고 보는 일시적인 자기 희생과 상호성을 사람들이 갖도록 힘을 부여할 깊은 은유들이 없다는 것이다.

윤리에 있어서도 이기주의로 빠지는 일반 심리학보다 기독교의 도덕적 핵심은 상호배려로 이해되는 상호성임--물론 에릭슨에게서도 이 점이 나타나지만--을 주장한다. 여기에서 브라우닝은 이제까지 기독교 윤리를 자기 희생에 근거하여 이해한 니버의 견해를 뛰어 넘어 자율성과 상호배려의 원리를 강조한 카톨릭 신학자 쟌센의 견해에 큰 영향을 받았다. 쟌센은 "이웃 사랑은 공평한 것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모든 사람에 대한 동등한 배려이다"라고 말한다. 니버와 대조적으로, 자기 희생이 기독교인 삶의 이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상호성과 동등한 배려가 이상적이고, 희생적 사랑은 이들로부터 파생된다는 것이다. 즉, 자기 희생은 목적이 아니라, 진실한 동등한 배려와 상호성의 유지와 회복을 위한 일시적인 전이의 과정인 것이다. 이와 같이, 쟌센의 아가페에 대한 정의는 자아실현, 타인에 대한 동등한 배려, 그리고 상호성을 회복하기 위한 일시적 윤리로서의 적절한 자기희생, 이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이와 같이, 쟌센에게서 우리는 동등한 배려로서의 아가페의 모델을 발견하는데, 이 모델은 건강에 대한 자기 배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현대심리학으로부터의 통찰력을 통합시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이 모델은 자기배려와 타인에 대한 동등한 배려의 도덕적 요구와 균형을 이룬다. 이 이론에 따르면, 예수의 이웃 사랑은 공평무사한 것으로서 모든 사람이 상호 배려하는 것에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는 해석이다. 예수의 황금률도 상호 배려로서의 사랑이다. 이것이야말로 도덕적 행동의 근본 원리라고 브라우닝은 말한다.

따라서 이것은 심리학에 대해 중요한 교정을 할 수 있다. 프로이드는 윤리 차원에 있어서 파괴적인 본능을 가진 인간으로서 이웃사랑은 불가능하다는 윤리적 이기주의의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은 세상은 깊은 차원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각자 자아의 실현은 타인의 자아 실현화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화'를 궁극성의 은유로 갖음으로 말미암아, 결국 그들은 이웃에 대한 고려 없이 자신들의 가능성 실현화에만 관심을 갖음으로 윤리적 이기주의로 흐르게 되는데, 이는 비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특히, 윤리적 이기주의의 성향을 띠는 자아실현의 개념을 폭넓은 도덕적 규범으로 확장시키려는 인본주의 심리학자들의 경향성과, 건강의 개념을 자아실현에 제한하는 그들의 한계를 신학은 밝히고 교정할 수 있는 것이다.


3. 토마스 오든의 접근 방법


1) 오든의 초기 입장: 60-70년대


오든이 말하는 심리학과 신학의 핵심적인 유비 관계를 도표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전적 신학(바르트) 구조
심리학(로저스)의 구조

인간의 곤경(죄)
내사된 가치들에 의한 부조화, 또는 갈등

구원의 사건(구속)
(상담자의) 공감, 조화, 무조건적 적극적 배려를 통한 자기수용

은혜안에서의 성장(본래성)
경험에의 개방, 조화, 완전히 기능 하는 인간



여기에서 내담자가 상담자를 찾아올 때 부조화 혹은 갈등의 상태에 있다는 것은 죄인이라고 하는 인간의 실존적 모습과 유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학생이 장래에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되고자 계획을 세웠다고 하자(어쩌면 이것은 자신보다는 부모의 가치나 사회의 요구가 자신 안에 내면화되어 마치 자신의 뜻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런데 대학에서 그의 성적은 보통 이하여서 세계적인 물리학자의 꿈이 실현 불가능하게 보일 때, 그 대학생은 이상적인 자기 개념과 그의 성적에서 보여주는 실제적인 자기 모습 사이에 커다란 간격이 있어, 자신감을 잃고 불안에 빠지며 드디어는 상담자를 찾아오게 된다.

이 때 초기의 내담자의 감정을 말한다면, 극단적으로 경직된 신념과 태도, 진실성의 결여, 자신의 감정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무감각,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어 보여주기 싫어함,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 모든 부정적 감정들과 문제들의 책임을 외부에 돌리는 것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담자의 진실성(조화), 내담자의 감정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임, 내담자의 타고난 독특성을 깨닫는 능력 등으로, 내담자는 차츰 방어의 벽을 한 꺼풀씩 벗겨 나가면서 가면적인 겉모습 뒤에 숨겨진 참 자아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상담이 진행되어 가면서, 내담자는 점점 더 완전하게 자신의 감정들을 찾아낼 수 있다. 이제 내담자는 이제까지 자신이 볼 때 수치스럽고 부정적이어서 받아들이기를 거절했던 자신의 감정들, 공포, 불안, 죄책, 미움, 분노 등의 감정들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내담자는 자아에 관련해서 서로 모순되고 혼동되는 감정들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한다. 이와 같이 상담자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발견하는 것이 모든 문제의 해결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데, 이는 죄인으로서의 자기 모습을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구원과 유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머물지 않고, 구원받은 이가 은혜 안에서 계속해서 성장해 가야하는 것처럼,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내담자는 자신의 경험에 더 이상 수치스럽거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더 개방적이 되어가며, 덜 방어적이고, 과거에 매이지 않고, 자유스런 결단의 존재로서 자신의 삶을 효과적으로 관리해 갈 수 있도록 자신의 능력을 더욱 신뢰해야 한다. 이와 같이 심리학과 신학간에는 인간 내면 흐름에 대한 유비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든은 이러한 유비를 설정하면서도, 로저스는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인정을 받았다고 하는 깊은 차원에서 인간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를 갖고 있으며, 구속에 대한 그의 교리는 개인적인 자기-화해로서 사회적 화해라든지 우주 전체에 대한 구속의 폭넓은 희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한다. 그리고 내사된 가치들(Introjected values, 부모나 사회에 의해서 즉 밖에서 내 안으로 주어지는 가치)을 로저스는 부정적으로만 보려고 하는데, 이는 성숙한 양심과 사회적인 책임감을 갖춘 개인적 자유인으로서 성장하는데 필요한 정당한 도덕적 구조와 외부에서 주어지는 정당한 요구들을 무시하는 것이며, 사회적 통제라는 합법적인 수단들을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으로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