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적 돌봄에서 신학과 심리학의 상호관계[2]
목회적 돌봄에서 신학과 심리학의 상호관계[2]
2) 고전적 기독교 신앙의 회복
1980년대 논문인 "잃어버린 정체성을 회복함"에서, 오든은 교회의 '고전적 목회적 전통'이 현대 심리학 이론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어떻게 20세기에 크게 무시되어 왔는지를 심도 있게 논증한다. 예를 들면, 클라인벨, 힐트너, 웨인 오츠, 폴 뚜리니에 같은 20세기 목회학 저자들에 대한 조사에서, 오든은 그들이 어거스틴, 그레고리 교황, 죠지 허버트, 루터, 칼빈, 제레미 테일러 같은 전통적인 저자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프로이드, 융, 로저스, 프롬, 에릭 번 같은 현대 심리학자들만 인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 글에서 강조되듯이, 그가 60-70년대에 그토록 빠져있던 현대 심리학을 비판하면서 고전적 전통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빠지게 된 원인은, 현대성(modernity)--전(前)현대적 지혜에 대한 경멸, 절대화된 도덕 상대주의, 청소년의 부모 돌봄 거절, 자율적 개인주의의 이념화, 환원주의적 자연주의에 대한 경외적인 복종, 진리에 대한 질문에서 최종 결정권을 가진 과학적 경험주의 등으로 특징 지워지는 흐름--에 대한 그의 환멸에서 나온다. 특별히 그는 혁신을 주장하는 현대성의 경향--새 것은 좋은 것이고, 더 새 것은 더욱 좋은 것이고, 가장 새 것은 가장 좋은 것(New is good, newer is better, and newest is best)--을 공격하는데, 이것으로 인해 오히려 현대성의 '핵심'은 도덕적 하락의 극적 운동에 도달했다고 본다.
그러므로, 세속 치료의 새로운 물결이 등장할 때마다 휩쓸렸던 '운동 신학자'로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오든은 어떤 운동들이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역의 적합한 표현인지를 주의 깊게 식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한 마디로, 20여년간 신학과 심리학간의 다리를 세우는 역할을 하던 오든은 "교통의 왕래가 다리 위에서 오직 한 방향으로만 움직이고 있다. 즉, 신학은 심리학의 말만 듣는 자였다"고 말하면서, 아직도 도덕적 힘과 날카로운 지혜, 꿰뚫는 적절성을 가지고 있는 처음 17세기 동안의 목회적 돌봄의 전통적 지혜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서 "현대 세계의 실제적 상황 한가운데서 믿을 수 있는 방법으로 옛 정통주의를 보여주려고 시도하는" 현대-이후 정통주의(Post-modern Orthodox)를 제시한다.
오든은 신정통주의는 실패했고, 근본주의는 고전적 기독교에 대한 현대성의 도전 앞에서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고 믿는다. 그는 틸리히, 바르트, R. 니버, 브룬너, 불트만같은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은 니케아 이전의 전통을 지키기보다는 오히려 현대를 수용하려는 개혁적 변화를 추구하는 자들이었다고 비판한다. 다른 한편, 근본주의자와 카리스마주의자들은 현대성에 의한 부패의 위험을 피하려고만 하기 때문에, 그들의 신념은 정통주의이지만 고전적 신앙을 회복한 '현대-이후 정통주의'에 필요한 날카로움을 결핍하고 있다고 본다. 그는 현대-이후 정통주의가 현대-이전의 정통주의와 다른 것은 그것의 "본질적 교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현대성의 실패한 약속에 대한 환멸의 경험에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오든은 목회적 돌봄에 대한 고전적 견해가 오늘날 목회자의 목회 실천을 위한 규범적 교재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학적 뿌리를 상실하고 현대 심리학의 이론에만 의지하려는 현대 목회적 돌봄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고전적 전통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고전적 목회학 저자들은 성서적-신학적 근거와 목회 활동사이에 틈을 결코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 오든은 그의 책, Care of Souls in the Classic Tradition(고전적 전통에서 영혼의 돌봄), 에서 그레고리 (Gregory the Great, 540-604)를 신중하게 취급한다. 그레고리 연구를 통해서 그는 행동수정기술, 무의식의 분석, 내담자 중심치료의 세 가지 가정(공감, 조화, 무조건적 적극적 배려) 등의 현대 심리학 이론들이 이미 그레고리의 작업 안에 예시되어 있음을 증명한다. 즉, 상담과 심리치료의 실천과 이론적 성향이 고전적 목회전통안에서도 이미 알려져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전통신앙 노선을 떠나지 않으면서도 놀라운 심리학적 통찰력을 지닌 이러한 고전적 목회전통들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전통적 기독교를 위한 우리의 비굴한 변증을 그만둘 때이다. 대신에, 성서 본문과 초대 기독교 저자들에게 진지하게 귀 기울일 때이다. 이제는 우리의 깨어지고 혼돈된 현대 상황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도록 어떻게 고전적 기독교 스스로가 우리를 가르칠 수 있나를 물어보는 시간이 되었다.
그러므로 고전적이며 에큐메닉칼한 지혜의 근거 위에서 예수 역사에의 접근을 시도하는 현대-이후 정통주의가 필요하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현대이전 정통주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지하게, 교리적으로, 그리고 깊은 신앙심으로 연구하나, 역사 비평학적인 방법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 성서 비평주의는 예수를 역사적으로 연구했으나, 심한 환원적 자연주의적 철학적 가정과 전제를 갖고 연구했다고 비판하면서, 현대-이후 정통주의는 더 이상 현대성의 환영에 사로잡히지 않고, 현대성의 급격한 퇴락 한가운데서 사도적 신앙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오든은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오든은 목회적 돌봄과 상담의 분야에서, 현대 심리학으로부터 배운 것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고전적 기독교 유산을 진지하게 검토하도록 사람들의 관심을 돌이키게 하는데 가장 앞선 학자라고 할 수 있다.
목회적 돌봄의 고전적 전통과 현대 문화 상황을 연결하기 위하여, 성서와 전통과 개인 경험과 이성을 포함하는 사변형적 방법론을 사용할 것을 오든은 주장한다. 즉 목회적 돌봄에서의 새로운 노력은, 경험적인 것만 강조하는 즉 이해되고 경험으로 확증할 수 있는 것만 수용하려는 현대주의의 정신을 넘어서서, 웨슬리가 주장하고 아우틀러에 의해 다시 크게 강조되었던, 성서, 전통, 이성, 그리고 체험을 무시하지 않는 건전하고도 전체적인 신학적 방법론으로부터 작업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가장 먼저 강조되는 것은 역시 성서와 그리고 교회의 전통이었다.
4. 브라우닝과 오든의 비교
1) 비판적인 상호관련적 접근
오든은 현대의 과학적 통찰력과 신중하게 대화를 취하면서도, 이들의 역할에 대하여 조심스러워하며 의심의 눈길을 보낸다. 그는 신앙이 현대 세계와 직면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으면서도 이 안에서 기독교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계속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오히려 기독교 전통을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성서적 전통을 세속적 해석들과 본질적으로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하는 상호관련 방법론을 비판한다. 이 방법론은 기독교 전통을 더욱 소홀히 하는 결과를 가져오리라고 보기 때문에, 오든은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는 예수에 대한 본문이 기독교인에게 규범이며, 현대 신학의 형태와 내용에 대한 어떤 토의에서도 규범적이어야 한다는 가정을 가지고 대화를 시작하고자 한다.
그러나, 유대-기독교 전통으로부터의 신학적 주제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출발은 하지만, 오든과 달리 브라우닝의 기본적 추진방향은 비판적 대화를 전제로한 "수정된 상호관련" 방법이다.
(수정된 상호관련 방법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 기독교의 사실에 대해 역사적으로 해석학적으로 정확한 해석을, 일반인간 경험의 구조 위에서 철학적으로 이해할만하고 공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해석에다가 연결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즉, 전통의 신앙을 출발점으로 한다 할지라도, 전통으로부터의 주장은 일방적인 독백이 아니라 공적인 기준에 따라 자기의 주장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고 브라우닝은 본다. 이것이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우리가 취해야할 바람직한 자세라고 말한다. 이때에, 과학은 신학의 발전에 건설적으로 기여할 수 있고, 신학은 또한 과학이론의 규범적 지평을 비판할 수 있다고 브라우닝은 보며, 궁극적으로 신학과 과학은 논쟁에 의해 풍부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원주의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에서 나오는 이런 생각 즉 다원주의 상황 안에서 실천 신학은 언제나 철학적 반성이 되야 한다는 생각은 실제 행동을 취하는 데 있어서 사회 과학 특히 심리학적 통찰력(일반적으로 문화적 정보)으로 하여금 기독교 전통보다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만든다.
브라우닝의 주요 관심은 기독교의 이야기(전통)가 이웃 사랑이나 개인적 가치 같은 어떤 추상적 규범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이런 추상적인 규범들의 구체적 내용을 제시하는 것은 기독교 전통이 아니라 심리학적 정보이다. "에릭슨과 코후의 인간 본성 이해는 인본주의 심리학 보다 더 기독교적이다"라는 그의 말에서 보는 것처럼, 심리학적 인간 이해가 기독교 전통이 갖고 있는 신학적 인간 이해의 구체적 내용을 제공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방법론은 사회과학(특히 심리학적 통찰)으로 하여금 신학과 교회에 너무 지나칠 정도로 기여를 하도록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현대성이 쇠퇴하는 한 복판에서 옛 정통주의의 생존"에 대한 오든의 견해와 "현대의 신앙상실"에 대한 브라우닝의 견해와의 비교는 그들의 접근의 차이를 분명하게 예증한다. 오든은 오늘날 교회 멤버의 감소는 현대성이 급격히 쇠퇴하는 때에 너무 쉽게 기독교가 현대성을 수용함으로 온다고 믿는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대 에큐메니칼 가르침이 무시되는 곳에서는 설교가 판에 박힌 문구나 도덕주의에만 의존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한 종교적 전통은 그것의 문화적 대안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자신을 구별하지 못하면, 급격히 쇠퇴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브라우닝이 볼 때에, 기독교는 오히려 현대성을 충분히 수용하지 못했다. 브라우닝은 성서 자체 안에 현대의 신앙 상실을 가져오는 원인이 있다고 보지 않으며, 여전히 성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제시한다고 본다. 그러나, 한편으로 성서 안에는 서로 다른 그리고 뭔가 모순되는 개념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성서의 내용들은 생각과 행동의 효과적인 안내자로서 봉사하기에 언제나 충분히 명백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브라우닝은 현대 신학자의 눈으로 볼 때, 정통주의의 주장은 지적 책임의 거절이며 세속 경험과 훈련이 제기하는 심각한 질문들을 직면하지 않으려는 무책임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현대인은 신앙을 공적인 사회 속에서 잃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오든은 지금이야말로 고전적 기독교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교차 문화적 다원주의, 혼합주의, 그리고 광대한 역사적 변천 시대에서, 초기 기독교인으로부터 배운 전통을 계속되는 세대에 넘겨주는 것이 가능한가?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왜곡 없이 정확하게 가르칠 수 있을까? 어떻게 우리는 그것을 심각하게 퇴색시킬 해석에 대해 방어할 수 있을까?" 이다. 오든에 따르면, 정통주의는 현재 의견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의 에큐메니칼 회의에 의해 규정되고 반복적으로 재확인 되어온 그리고 계속해서 역사 속에 나타나는 현대성에 반복적으로 도전을 하고 변형시켜왔던 사도적 일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든은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역사 비평적 방법의 한계를 지적한다.
예수의 역사에 대해 객관적 탐구를 표방하는 성서-역사적 비평주의는, 19, 20세기의 자연주의적 환원주의의 가치를 신약성서 본문에 강요하는 아주 편견된 설명임이 종종 판명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소망, 열망, 신화, 계급의 이익, 그리고 사회적 영향 등으로 단순히 환원되었다.
즉, 과학적인 역사 연구는 모든 증거를 충분히 연구하기도 전에 초자연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든은 비판적 방법 그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가 단지 이념이 아니고 역사적 인물이었기 때문에 역사적 질문 없이는 예수에 대한 연구가 올바로 진행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아무리 환원주의적 철학적 경향에 의해 실제로 왜곡된다 할지라도, 역사적 방법 그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연구에 있어서 대단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현대 비판적 방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는 연구의 출발점으로 현대 자연주의적 환원주의 방법론이 아니라, 참으로 신이요 인간이신 예수를 인정하는 후기-비판적 고전적 기독교 방법이 필요함을 오든은 제시한다.
그러나 브라우닝은 전통적 믿음에 호소하지 않는다. 브라우닝에게 있어서, "비판적"이란 말은 세속적인 질문의 공동체 안에서 수락되는 진리와 의미의 판단 기준에 대한 충성심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은 두 번째라고 볼 수 있다. 브라우닝에게 있어서, 신학은 세속적 학문과 동등한 위치에 놓여지고, 전통적 신앙과 일반인간 경험과의 사이에는 불연속성이 없어 보인다. 브라우닝은 현대성을 수용하려고 시도하는 자유 신학의 사고를 지지한다. 따라서 그는 그의 목회학 방법론에서, 특히 현대 상담에서 강조되는 도덕 규범을 세우기 위해, 기독교 전통에 단순히 의지하기보다는 심리학적 통찰력에 더 의지하게 된다.
2) 다원주의와의 대화
브라우닝은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치에 자신을 위임하면서 동시에 종교적 진리에 대한 비판적 탐구, 자율적인 판단, 열려진 질문의 가치에 대해서도 역시 전적으로 자신을 위임한다. 그럼, 어떻게 그는 두 가지 위임을 다 책임 있게 수행해 나가는가? 여기에 있어서 그의 입장은 다소 불분명해 보이는데, 굳이 구분하자면 그는 신중심주의의 입장과 또한 동시에 포괄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브라우닝의 대화 목적은 기독교의 전통과 일반 문화 정보사이의 유사성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전통 안에서 아직 발견하지 못했거나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한 것을 다른 전통으로부터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기독교 전통과 문화 정보는 동등한 수준에서 대화를 출발해야 한다는 그의 방법론의 기본적 가정에서 나온다. 이 점에서 그는 신중심주의의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브라우닝의 전제는 심리요법에서의 모든 치료는 결국 하나님의 궁극적인 치유 행위 안에 근거를 둔다고 보기 때문이다. 즉 인간이 인간을 치유하는 이 유한한 활동 역시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 안에서의 한 활동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다른 종교들(문화들)에게 열려져 있다.
그러나 또 한편 아무리 브라우닝이 기독교가 신적 실재를 표현하는 많은 역사적 모델의 하나로 존재한다고 인식한다 할지라도,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명백히 하나님의 계시의 중심에 서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에서 그는 포괄주의에 속한 것으로 보인다. 브라우닝은 비록 과정신학의 도움을 얻어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 개념을 재해석하려고 시도한다 할지라도, 가장 중심적인 기독교의 하나님 교리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그럼에도 그는 예수의 유한성을 우상으로 바꾸어 하나님은 결코 다른 수단으로는 알려질 수 없다는 배타적이거나 절대적인 주장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만일 하나님이 기독교 밖에서도 말씀하신다면, 기독교는 이러한 밖의 증언들을 무시함으로써 그 자신의 자기 이해가 궁핍해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계시하는데 있어서 적어도 규범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포기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러한 브라우닝의 포괄주의적인 입장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명백하고 권위 있는 계시임을 여전히 주장하면서 한편으로는 비기독교 종교 안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임재를 본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브라우닝은 모든 세계 종교들을 동등하게 타당한 구원의 도구로 보려고 하는 윌프레드 스미스나 폴 니터, 죤 힉과 같은 다원주의 입장에 있는 자들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브라우닝의 입장은 그리스도의 특수성에 대한 포괄주의자의 강조와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보편적 활동을 강조하는 다원주의자의 강조 둘 모두를 조화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입장은 양쪽--기독교 절대화를 위험스럽게 보는 다원주의자와 기독교 신앙의 기본적 교리를 타협할 수 없다는 배타주의자--에서 비난받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그의 입장을 분석해 볼 때, 브라우닝의 학문적 입장에서는 비절대적인 기독론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논리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그로 하여금 그가 오랫동안 몸담아 왔던 신앙의 공동체에서 소외되게 하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교인의 개인적 위탁의 깊이와 확고함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불안 때문에 위에서 말한 약간의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는 다르게, 다른 종교들과의 대화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성을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은 오든에게 있어서 분명해 보인다. 물론 그도 다른 종교들(이슬람, 불교, 힌두이즘등)과의 계속되는 대화를 거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독교 공동체에게 예수에 대해 계속 진술하도록 도전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세계 종교들과의 대화에 있어서, "예수 오심의 우주적 성격에 대한 증언을 부드럽게 하거나, 세상의 생명이요 메시야로서의 예수에 대한 신약의 확증을 다소 우호적으로 돌려서 예수의 도덕적 가르침이나 그의 예외적인 삶에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 즉 예수의 복음을 희석시킴을 출발점으로 할 수 없음을 오든은 강력히 주장한다.
오든에게 있어서, 전통의 중심은 그리스도안의 삶이다. 그것은 현 교회의 실재의 유일한 기초가 되고 있는 살아 계신 주님의 부활한 임재이다. 그는 "만일 기독교에 대한 예수의 중심적 기여가 그의 도덕적 교훈이나, (어떤 자유주의 형태가 가르치는 것처럼) 종교적 통찰력이나, 또는 (어떤 종교사회학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회적 가시적 종교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기독교나 이슬람이나 불교가 구조적으로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것을 마음에 두고, 오든은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예수의 중요성을 그의 도덕적, 종교적 가르침, 조직적 능력이나 또는 그 자신의 과거의 삶의 차원에 놓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믿음의 공동체의 생명력 있는 중심으로서 예수의 현재 삶에 초점을 둔다. 이것은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더욱 효과적인 복음 증거를 위해서는 자신의 것을 더욱 굳게 지켜나가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4. 평가
브라우닝에게 있어서, 심리학과 신학간의 비판적 대화를 시도하는 것은 다원주의적 상황하에서 신학을 "공적" (public)으로 만들기 위해 가장 긴급한 일이었다. 즉, 신학이 더 이상 자기의 특권만을 고집하며 독백으로 고립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회학들의 주장과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를 통해 정당하게 신학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그의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따라서, 그는 대표적인 현대 심리학들 안에 있는 함축적인 윤리와 은유들을 명확하게 하며, 동시에 분석된 현대 심리학의 함축적인 은유와 윤리들을 유대-기독교 전통의 자원과 비교함으로써 이 일을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다원주의 상황에서 기독교전통은 세상에 줄 수 있는 풍부한 유산이 많이 있는데, 이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공적 토론에 참여함으로 같이 나눌 수 있다고 보며 심리학의 내면을 밝히는 깊은 통찰력을 보여주는 브라우닝의 입장은 시카고 대학 신학부라고 하는 경험을 강조하는 학문적 토양이 성숙된 곳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온 신학과 심리학의 관계, 특히 틸리히에게 있어서 보여지는 방법론보다 더욱 진보적인 방법임에 틀림없고, 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상당히 도전이 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사실, 브라우닝의 심리학과 신학과의 깊이 있는 대화는 우리가 희미하게 인식하던 이 둘의 관계를 분명하게 드러내 놓고 대화시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철학, 사회학, 심리학 등의 일반 학문들이나, TV, 영화, 책들을 통해, 인생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고 또한 결정하는데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이 갖고 있는(특히 구미에서 현대인의 삶에 가장 영향을 주고 있는 심리학) 배후의 은유와 윤리를 명백히 분석 제시하면서, 과연 어느 것이 삶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가를 체계적으로 토론하자는 것이 그의 의도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는 신앙과 세속 가치를 이원화시키지 않고, 우리의 현실을 깊이 있게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을 명시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원주의 상황하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바람직한 입장이라고 보며, 이 점에서 브라우닝의 공헌이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편 그는 다양한 기독교 주장들의 해석들과 다양한 인간 실존의 문화적 해석들 사이에서 어느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이성이 종국적으로 중심적 역할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의 우선적인 충성심이 교회 공동체가 아니라, 세속적인 질문의 공동체 안에서 수락되는 진리와 의미의 판단 기준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떤 종교적 전통의 진리 주장도 일반인간 경험에 대한 의뢰에 의하여 타당성을 얻을 때까지 불확실한 것으로 취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애매모호함은, 도덕적 경험을 종교적 신앙의 시금석으로 강조한 윌리암 제임스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은, 그의 종교에 대한 실용주의적 평가와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브라우닝은 "우리는 진리를 그 뿌리로 아는 것이 아니고 그 열매로 안다"고 말한다. 즉, 신학과 심리학의 깊은 은유에 대한 도덕적 평가가 그의 주요 관심이었다. 이처럼, 브라우닝은 도덕 규범이 인간의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차원에서 신학을 해석을 한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기독교의 영혼 돌봄은 전인적인 인간 구원을 목표로 하고, 정신요법은 정신적 건전함과 육체적 건강에만 관심을 가져왔다. 그렇다고 볼 때 브라우닝은 죄론 등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해를 단지 심리학적 측면에서 시도함으로 현대인에게 인간 내면의 정신적 흐름을 이해하는 데 적절한 해석을 주었을 지는 모르지만, 결국 전통적인 구원의 개념이 그에게는 약화된다. 그는 단지 윤리-종교적 영향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다라는 차원에서 기독교의 입장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인생의 의미를 묻기 때문에 윤리적 차원을 넘어서는 존재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사람의 윤리적 결정에 더욱 깊게 영향을 미친다. 현대 목회적 돌봄의 심각한 문제, 즉 도덕규범의 결핍을 심리학과 신학의 비판적 대화 방법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시도는 높이 평가되어야 하지만, 또 한편, 사람들은 실천적 도덕적 추론보다는 신앙의 근거 위에서, 은유적으로,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그들 대부분의 규범적 선택들을 하게된다는 사실을 브라우닝은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브라우닝은 신학과 심리학의 대화를 깊이 있게 시도했지만은, 도덕 규범을 만들고자하는 좁은 범주에서--실용주의적 차원에서--활용했다는 한계를 갖는다.
그리고 이 방법론은 사회학 특히 심리학에 대한 너무나 많은 연구를 필요로 함으로 보통의 목회자들에게는 실천하기 어려운 비현실적인 이론이 되기 쉬우며, 이것은 또한 영적이며 종교적인 모든 것들을 도덕적 기준으로 판단하는 도덕-환원주의에 빠지는 경향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 다원주의 환경에서 신학적 뿌리를 잃지 않고 기독교를 뚜렷하게 나타내 보이고자 하는 브라우닝의 열심 있는 노력은 실천신학 분야에서 인정을 받아 마땅하나, 비판적 대화를 위해 기독교 전통신앙인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리스도론 등을 약화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것 없이는 기독교 정체성에 혼란이 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마치 목회적 돌봄에서 엄격한 윤리적 규범이 없이는 정체성 혼란이 와서 사람들에게 정신적 질병을 유발시키게 된다는 브라우닝 자신의 주장처럼 말이다.
이 점에서 오든은 전통적 신앙에 대한 철저한 위탁으로 브라우닝과는 다른 입장을 취한다. 이것은 그의 책 Pastoral Theology(목회신학)에서 목회적 돌봄은 철저히 전통유산 즉 성만찬, 설교, 기도, 심방, 성경공부 등을 통해 행해져야 한다는 주장에서 잘 나타난다. 그리고 그의 목회적 돌봄 시리즈인 Crisis Ministry(위기 목회, 1986), Becoming a Minister(목사가 됨, 1987), Care of Souls in the Classic Tradition(고전 전통에서의 목회적 돌봄, 1987), Ministry Through Word and Sacrament(말씀과 성례를 통한 목회, 1989), Pastoral Counsel(목회상담, 1989) 등에서 전혀 현대 심리학에 대한 언급이나 심리학자를 인용함이 없이 오직 고대 전통에서의 문헌만을 사용하는 것을 통해 그의 입장이 잘 나타난다.
다원주의 상황에서, 크리스챤이 비판적인 대화 없이 다른 견해들을 잘못되거나 열등하다고 배척하는 배타주의자가 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다원주의에 좀 더 진지하자면, 기독교의 독특성을 주장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물론 기독교 우월주의나 배타주의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니라, 기독교에 분명한 것이 있어야만 다른 사람이 기독교로부터 배울 수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따라서 심리학과 같은 사회과학을 무조건 배척하여 신학의 폭을 좁게 하거나, 또는 브라우닝처럼 동등한 차원에서 대화를 시도함으로 기독교의 독특성을 희석시키기보다는, 교회의 상황에 맞게 심리학을 보조 수단으로 사용하되 그 철학적 배경을 비판하는 안목을 갖는 것이 바람직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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