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역사신학의 해석학적 입장3
II. 다른 역사신학 계열의 해석학 60년대 후반이래 그리스도 신학 조류는 역사신학 계열의 신학사상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그래서 판넨베르그가 주도하는 '보편역사' 신학외에도 몰트만 (Jurgen Moltmann, 1926- )이나 멧츠(Johann B. Metz, 1928- )같은 정행(正行) 위주의 신학노선과 가톨릭 튀빙겐 학파에 속하는 카스퍼(Walter Kasper, 1933- )의 역사신학의 해석학적 입장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들이 역사를 가장 포괄적인 실재로 간주하면서 그리스도 신앙의 역사적 보편성을 제시하려는 취지를 기본적으로 견지하는 한에서 판넨베르그와 공통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언급치 않고 고유한 해석학적 입장을 간략히 서술하고자 한다. 1.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의 해석학 몰트만은 판넨베르그의 역사관에 이의를 제기한다. 몰트만에 의하면 신학자에게 문제되는 것은 세계와 역사와 인간존재를 단지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이룩하실 변환에 대한 기대 속에서 이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몰트만은 판넨베르그의 보편역사의 신학이 실제에 있어서는 희랍의 우주신학의 재수용과 확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다. 판넨베르그가 우주에 대해서 말하는 대신에 역사의 전체성에 대해서 말하더라도 그것은 하느님의 '현현'(顯現, Epiphanie)으로서의 세계라는 것이다. 물론 그에게 있어 역사는 미래를 향하여 개방되어 있고 완성되어 있지 않는 한, 하느님에 대한 잠정적인 인식만을 제공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트만은 판넨베르그가 희랍의 우주신학의 사고구조에 사로잡혀 있다고 간주하는데, 그 까닭은 역사가 '우주'와 '전체성 속에서의 실재'를 드러내는 새로운 개념이 되면 새로운 우주 개념이 형성되고 역사는 더 이상 '역사적'으로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판넨베르그의 보편역사의 신학은 전체적으로 이해된 역사로부터의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이해이고 역사이해면에서 다분히 헤겔주의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몰트만이나 멧츠가 신학이 역사의 이론적해석에 만족해서는 안되고 미래의 이름으로 현재를 변혁시키는 실천에 이르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이면에 『희망원리』(Das Prinzip Hoffnung)의 저자인 블로흐(E. Bloch, 1885-1977)의 영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유다계 독일인인 블로흐는 의식적으로 새로움(Das Novum)의 성서적 범주를 수용하나 동시에 통상적인 그리스도 신앙의 내용을 부정한다. 그에 따르면 새로움은 원칙적으로 이미 있었던 것의 쇄신으로부터 구별되어야 하며, 새로움에는 결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전취가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불로흐에게서 새로움은 유토피아 계획이며 급진적인 것의 성격을 지닌다. 블로흐에 따르면, 종교인 일반,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추구되는 '추상적 유토피아' 계획이 원목표(遠目標)와 고차목표(高次目標)만을 매개하고 직접적인 근목표(近目標)를 뛰어넘는 데 비해, 자신과 같은 네오 맑시스트들이 추구하는 '구체적 유토피아' 계획은 행동의 지속적 전망으로 머무는 고차적 목표를 망각치 않으면서 자신의 시대와 내재적으로 유대를 맺고 있다. '구체적 유토피아'는 소외된 현실세계 속에서 보다 나은 세계의 건설을 위해 요청되는 실제적 상념들을 생겨나게 하고 미래를 성취할 수 있는 상상력이다. 이에 비해 '추상적 유토피아'는 소외된 현실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아무 공헌도 하지 못하는, 실현될 수 없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유토피아는 현재의 가능성과 전혀 상관없는 새로운 미래의 상상력을 제시함으로써 오히려 지성을 마비시키고 행동을 촉발시키지 못하게하여 인간을 몽상가로 만드는 이데올로기가 된다는 것이다. 오로지 '구체적 유토피아'만이 인간에게 희망을 일깨우고 새로운 미래로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 '구체적 유토피아' 계획을 포착하는 인간의 행동이 불로흐에게서 희망(Hoffnung)으로 규정된다. 이 희망은 이념화된 사회에서 인간의 품위를 모독하는 소외형태에 대항하는 자극이다. 이것이 블로흐에게서 역사의 구체성을 상실하지 않고, 이제까지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것을 시도하는 '현재적 종말론'(Pr sentische Eschatologie)의 의미이다. 몰트만은 블로흐의 네오 마르크스적 희망관과의 비판적 대화를 통하여 그리스도교의 신앙의 대상인 하느님을, 반복하는 역사 속에서 영원히 현존하는 하느님(희랍의 우주론적 신)으로 파악하지 않고 미래로부터 우리에게 다가오는 약 속의 하느님으로 규정하면서 미래의 차원을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의 고유성에 맞는 유일한 주제로 설정한다. 미래를 해석학적 기준으로 만듦으로써 신학은 '희망의 학문'이 된다. 즉 미래와 새로움과 미예견적인 것인 것에 대한 희망이 크리스찬 활동의 해석이 된다. 그리스도 신앙이 본질적으로 역사 종말의 예취적(豫取的) 사건으로서 부활에 대한 신앙이기 때문에 역사 종말의 선취의 현실화로서 교회의 선교활동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이 점에서 단지 해석의 학문 이상이려 하는 몰트만의 신학적 취지는 이해할 만하다. 이들에게서 신학은 '파견(派遣)의 해석학' 즉, '파견역사'의 범위 속에서 성서적 증언의 해석이 된다. 2. 멧츠의 '정치신학'의 해석학 멧츠는 이 파견의 해석학적 기점에서부터 미묘하게 오해를 불러 일으킬 염려가 있는 소위 '정치신학'(Politische Theologie)을 전개한다. 멧츠가 몰트만처럼 네오 맑시스트인 블로흐와 프랑크푸르트 학파Frankfurter Schule)의 '비판이론'(Kritische Theorie)의 기본취지를 원용하여 고난과 갈등으로 점철된 사회적 소외현실을 변혁시키려는 정행(正行, Ortho-praxis) 위주의 성격을 강력히 드러내기는 하지만 '혁명의 신학'이 아님은 물론이고 신앙을 정치화하려는 신학도 아니다. 멧츠에게서 정치신학은 정치논리도 아니며 정치사회적 강령을 전개하려 하지도 않는다. 멧츠나 몰트만에 따르면 사회는 인간존재의 가장 포괄적 지평이고 정치는 근세의 전제하에서 대하게 되듯이 인간의 삶과 세계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규정하는 실재의 총체적 차원이다. 그리스도의 신앙진리가 보편적 요청을 내세우는 한, 인간 존재의 포괄적 지평인 사회적 문제에 도저히 무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교회 자신이 정치적 입장을 취하기 전에 이미 사회적 제도로서 하나의 정치적 연관성을 지니게 마련이다. 교회가 정치적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지배적 권력체제의 시녀(侍女)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자신의 모든 진술의 정치적 함축성에 대해 비판적 사유를 통하여 사회적 실재의 구원에 이바지하도록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것이 '정치신학'의 취지이다. 정치신학은 현대 조직 사회의 탈인격적 체제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여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인간의 존엄성을 옹호함으로써 하느님 구원역사(救援役事)의 면모를 사회-정치적 차원에서도 드러낼 수 있도록 하자는 기본취지를 지닌다. 이를테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을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사회의 억압적 세력들에 대해 비판을 가아여 사회전체를 자유로운 분위기로 만들기 위해 투신하였듯이, 교회는 소외된 사회현실의 개선을 위해 투신하자는 것이 이 신학의 기본취지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뒤따르는 제자공동체로서의 교회는 사회 안에서 일종의 제2의 제도와 같은 실재로서 국가기관과 같은 정치제도에 대해 비판적 간격을 취하면서, 정치제도가 탈인격적이고 억압적일 경우에 불가침적 기본인권을 수호하여 자유로운 사회 건설에 기여하는 '자유의 제도'로서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비로소 구원의 교회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구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신학'은 신학의 일개 지엽적 영역으로서가 아니라 신학적 사고의 새로운 기점이려 하고 있다. 3. 카스퍼의 역사신학의 해석학 카스퍼는 가톨릭 튀빙겐 학파(Katholische T binger Schule)의 전통을 현대의 정신사조 안에서 창조적으로 계승하려는 자세를 지니면서 후기 하이데거로 부터 유래하는 해석학적 철학이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실천적 결의 속에서의 변증법적 철학, 그리고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 1889-1951)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영미계의 분석철학 등 방법과 형식내용에서 성격을 달리하는 현대 철학사조에서 공동적으로 마치 초제도(超制度, Metainstitution)와 같은 역할을 하는 언어현상에 주목하면서 그리스도 신앙원리를 적어도 기점적으로나마 발견하려 시도하고 있다. 카스퍼는 현대 일반 해석학의 학술이론적 통찰에서 보여지는 인간의 삶과 전통과의 관계를 신학을 위한 사전고찰로 수용한다. 인간적 삶은 구체적으로 세대의 계승 속에서만 존재한다. 즉 광의의 전통은 인간적 삶과 동일하다. 그런데 인간적 삶은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 이상의 것이다. 인간적 삶에는 삶의 의식, 세계에 대한 개방성 그리고 자기 자신의 주위세계를 이룩하려는 자유가 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삶과 함께 다양한 양상을 띠고 나타나는 특정한 이해방식과 관습, 문화 등의 실천을 이어받는다. 인간의 언어가 이 점을 가장 분명히 드러낸다. 언어는 동시대 인간 상호간에 그리고 선대 인간들과의 접촉을 가능케 한다. 언어는 전통을 가능케 하고 전통의 근거를 이룩한다. 그래서 언어는 본래 모든 인간이해의 초험적 전제이다. 인간 이성도 이에 따라 무전제적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역사적으로 전승되어 있다. 전통은 인간적 삶을 인간적 삶으로 비로소 가능케 하는 하나의 상징체계 속에 저장된 전세대의 체험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전통은 언어의 개입을 통하여 인간적 삶과 함께 함축적으로 주어져 있다. 전통은 주체와 수취인을 전제하며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공동체 속에 살아있는 포괄적이고 합일화하는 정신(Geist)이다. 이 하나의 전통(Traditio)은 예의, 관습등과 같이 다양한 '전통들'(Traditiones)을 통하여 현시된다. 하지만 전통은 전통들 속에서 용해되지 않는다. 전통들이 '실제적 상징'들이기는 하나 전통은 전통들과 동일시되지 않고 전통들을 거스르면서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자신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므로 개별적 전통들의 붕괴가 필연적으로 전통의 붕괴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전통은 결단과 비판, 그리고 새로운 결단을 내리도록 자극하는 가운데 전통들을 결속시킨다. 그러므로 본래의 전통의 효능을 다시 발하도록 하기위해 전통들이 파멸되어야 하는 필요성도 있을 수 있다. 카스퍼는 이러한 일반 해석학적 통찰로서의 인간 삶 속에서의 전통의 의미를 구명한 뒤에 신학적 이해원리를 정립하고자 한다. 그리스도 신앙에서 예수는 하느님의 위격속에서의 전통이다. 문제는 하나의 그리스도 전통(위격 안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이 세계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현존할 수 있게 되는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화는 사문자(死文字)를 통해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성령을 통하여 일어난다. 성령은 현재 안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전승이다. 하나의 성령은 개별적인 의식, 관습과 인습 속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그리스도 전승의 운반자는 개별자가 아니라 '우리'이다. 신자들의 공동체로서 교회는 신앙이 발생하게 되는 초험적 전제이다. 신앙의 내용과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양식인 성령이 거처하는 장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계시진리는 하나의 사건처럼 교회의 교역자들에 의하여 관리되는 고정된 대상이 아니다. 십자가의 순명 속에서 목표에 이르는 한 인간의 삶과 죽음 속에서의 하느님의 자기 전달은 본성상 인간들이나 인간적 요체들에 의해 관리될 수 없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이 자기 전달의 동화 가능성을 성령을 통하여 부여한다. 그리고 성령은 상호 인간적으로, 교회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성서는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를 현존케 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도구로 볼 수 있다. 성서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증언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계시의 종국적 성격은 문서적인 고정화에서 비로소 생겨나는 지속적 공표를 요청한다. 문서화 과정이 계시과정에 함께 속하는 것이기에 여기서 성서의 영감(靈感)이 거론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다른 계시증언에 앞선 성서의 질적 우위성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성서의 정경화(正經化, Kanonisierung) 사실은 성서의 사도성과 일반적 인정을 의미하고 있다. 이처럼 성서는 교회의 전통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 신앙공동체에서 생동하는 성령은 교회생활과 사상 그리고 선포의 증언 속에서 자신을 구현시킨다. 그런데 이 전통의 증언들은 모델과 표정들이지 법률들이 아니다. 이들은 방향을 제시한다.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 안에서 성서의 직접적인 증언이란 불가능하다. 시간의 격차가 사유되어야 한다. 전통의 증언들이 바로 성서의 개입의 연속을 형성하고 있다. 성서의 올바른 주석은 성서의 우위성에 의해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성서는 전통 밑에 위치하면서 개별인간들의 성서주석 위에 자리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4. 평가 앞에서 언급한 이들 '역사의 신학'의 해석학적 입장에 대한 간략한 평가를 내리기로 한다. 5.4.1 '희망의 신학'이나 '정치신학', 그리고 '성령론적 역사의 신학'과 같은 '역사의 신학' 유형이 개별 인간과 인간 사회, 인간과 세계 사이의 매개가 늘 개방되어 있는 과정으로서의 역사를 인간 실존의 역사성에로 용해시킴으로써 보편적인 그리스도 신앙을 주관주의 및 개인주의적으로 이해할 위험을 안고 있는 '말씀의 신학'이나, '실존론적 신학'과 '초월신학'을 지양하여 실재 전체를 포괄하는 역사의 지평속에서 그리스도 신앙의 보편성을 제시하려 추구한 점은 일단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이 신학적 시도들은 역사적 성격을 가지는 그리스도 계시진리와 현대의 실존체험양식에 부응하는 적합성을 지니고 있다. 이를테면 '역사의 신학'은 영원의 진리인 그리스도 신앙의 '쇄신'을 촉진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는 신학이라고 간주될 수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신앙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 '역사의 신학' 이전의 신학수준에로의 복귀란 있을 수 없다. 관건이 되는 문제는 이들 '역사의 신학'을 전개하는 신학자들에 의해서 역사가 정작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가이다. 5.4.2 판넨베르그는 역사가 그에게 있어서 우주처럼 하느님께 관련되어 있는 고정된 어떤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이점은 몰트만이 의문시하듯이 부인할 필요는 없다. 역사는 판넨베르그에게 있어 하느님의 역사 자체이고 그래서 역사속에 하느님의 간접적인 계시가 있는 것이다. 역사의 종말은 '이미' 예수의 부활속에서 선취되어서 역사의 최종의의는 이 선취된 종말에서 현시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역사관에 헤겔주의적 요소가 자리하고 있다. 헤겔에게서 역사는 자유의 전진 속에서의 보편역사적 과정으로 파악되고 있다. 전진은 점증하는 자유의식 속에서 보여진다. 모든 개별 인간들과 사건들은 전체속에서의 요인들에 지나지 않고 역사는 전진적 상승역사로 포착되고 있다. 헤겔은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자유의식의 전진으로서의 한 역사에 통합하려 시도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역사 안에서 최초로 모든 인간이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관계에 서고 모든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동등하고 자유롭다는 의식을 대하게 된다. 판넨베르그는 가톨릭 신학자들인 떼이야르 드 샤르댕(P. Teihard de Chardin, 1881-1955)이나 라너처럼 이러한 역사의 역동적 진화적 발전을 내세우는 현대의 대표자들중의 하나라고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역사는 전진의 범주만으로 해석될 수 없다. 사회의 산업화 과정에서 빚어지는 경제적 수탈과 착취, 기아현상, 인구초과 및 환경오염 등만을 고려해도 전진사고의 문제성이 드러난다.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 아도르노(Th. Adorno), 마르쿠제(H. Markuse)와 하버마스(J. Habermas) 등이 주축을 이루는 프랑크푸르트(Frankfurt) 학파는 현대인간이 만사를 숫자화, 대상화 하여 마침내 자기 자신까지 번호화 내지 물상화(物象化)할 위험에 처하여 있음을 올바로 간파하였다. 산업사회에서의 인간의 일차원성이 지니는 문제성은 낙관주의적인 전진적 역사관을 의문에 처하게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실재의 구원이 역사 종말에서의 인류의 진화과정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밖에도 전진적 역사는 순전히 승리의 역사임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다. 너무 짧게 살거나, 너무일찍 태어났거나 너무 늦게 태어날 사람들의 삶은 어쩌란 말인가? 역사속에서 빚어지는 온갖 고통의 의의는 무엇이란 말인가?" 강자에 의해 무참히 희생되는 무죄한 사람들의 피해는 단지 역사의 오물이란 말인가? 전진의 역사만이 아니라 고통의 역사가 실재 안에 엄연히 자리잡고 있다. 후자를 역사의 오물로 간주하는 것은 희생자들에 대한 또 하나의 새로운 불의일 것이다. 개인을 모두 귀하게 여기는 그리스도 신앙은 일방적인 전진적 역사관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점에서 판넨베르그의 보편역사이해는 수정되어야할 것이다. 5.4.3 그렇기는 하지만 그리스도 신앙은 역사를 '희망의 신학'에서의 몰트만이 그러하듯 미래적(Futurisch)으로만 볼 수는 없다. 몰트만에게서 역사적 실재는 소외되어서 자기 자신과의 비동일성 상태에 처해있다. 역사과정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선취된 모순의 해소를 지향하고 있다. 실재가 화해되는 세계의 종말은 소외된 기존양식 속에서는 단지 약속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종말관은 이 유다적 역사관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역사적 실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이미 화해되었고 종말이 현역사 속에 현존한다는 것이 그리스도 신앙의 견해이다. 5.4.4 신앙의 진술이 사회적 실재의 구원에 기여하도록 실천적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정치신학'의 취지는 정당하다. 그러나 사회적 실재를 모든 실재의 포괄적 지평으로 간주하는 이 신학의 견해는 협소하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 차원에 용해되지 않는 실재가 있다는 주장을 그리스도 신앙은 고수해야 한다. 인격의 존엄성은 사회나 제도에 의해 규정되는 실재가 아니다. 인격은 사회관계로부터 독립된 사적인 내밀한 영역을 지닌다. 이 말은 인격과 사회사이에, 인격적이고 공공적인 차원의 영역사이에 지양될 수 없는 긴장상태가 지속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두 실재는 서로를 필요로 하나, 상호간에 상대방 속으로 지양될 수는 없다. 인간은 사회적 차원을 능가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회적 노고만을 통해서 지양될 수 없는 소외의 차원을 지니고 있다. 자연이나 치료불능의 질병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고통이나, 인간과 인간사이의 상극성과 고독감으로 말미암은 형이상학적 소외는 사회적 개선활동에 의해서 극복되지 않는다. 이 사실들은 사회가 실재의 가장 포괄적인 지평일 수 없음을 단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정치신학'은 보편적 진리이고자 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요청을 축소시킨다고 지적할 수 있다. 5.4.5 카스퍼의 입장에서처럼 신앙의 기본원리를 추구하는 해석학적 형식사유에서는 물론 교회 안에서 현존하는 예수의 성령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가의 문제가 충분히 취급되어 있지 않다. 그에게서 인류와 세계의 구원을 선포하는 그리스도 신앙의 언어가 보편적으로 이해되기 위해서 실재 전체를 포괄하는 지평 즉, 개인과 사회 그리고 인간과 세계 사이의 개방되어 있는 과정으로서의 역사 지평하에서 구원을 갈구하는 인간의 요청에 상응하는 구원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칠 수 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