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생각! 말!! 행동!! 영성!!

성서적 영성과 교회발전

하나님아들 2020. 2. 4. 23:26

성서적 영성과 교회발전

 

 

 

김 중 기 교 수

(연세대)

 

서 론

 

기독교가 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의 내용은 “당신은 변할 수 있습니다.”라는 메시지입니다. 변해서 어떻게 되자는 것입니까? 새로워지자는 것입니다. “당신은 변해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이것이 기독교가 늘 전하는 복음의 핵심 내용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우리 모두가 바라는 교회 발전에 대한 것입니다. 성장하고 싶은 열망 내지는 현재의 나의 목회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하는 문제의 해답을 찾아 보려는 것입니다.

 

그러한 해답의 첫 번째 메시지는 “당신은 변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변하면 섬기고 있는 교회도 변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변해서 새로워지면 당신의 교회도 변해서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는 내용입니다. 오늘날 교회 성장과 발전은 교회의 교인 숫자가 늘어가는 것만이 아니라 교인들이 새로워지고 교회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제 강의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내가 변해서 새로워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교인들이 변하여 새로워지느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교회가 변하여 새로워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문제는 “무엇이냐?”가 아닙니다. “왜 그런가?”도 문제지만 그것도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가능하냐?”입니다.

 

21세기가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5년 반이 지나면 21세기입니다. 아니 지금 21세기가 도래했다고 해도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모인 사람 중에 이 21세기가 자기의 것일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21세기에 어떤 사람은 성공을 보장받을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은 낙오자가 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기로에 서 있습니다.

 

김대중 선생께서 앞서 강연하면서 이 나라가 제대로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이대로 주저않고 말 것이냐 하는 기로에 서 있다고 말씀한 것처럼 우리는 또 하나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2천 년대의 찬란한 아침에 우리는 우뚝서서 다시 새로운 역사를 이어갈 수 있을지 그냥 절망하고 말 것인지 오늘 이 순간에 그 기로에 서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미래는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에게만 도래합니다. 오늘 당신이 2천 년대의 목회를 준비하지 않고서는 결코 21세기는 당신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제가 강의하는 내용은 이처럼 심각한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변할 수 있습니까? 제가 성경공부를 인도했는데 그 성경공부에 참여한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고 자꾸 계속해서 모입니다. 금년까지 14년이 되었는데 모여서 헌금하더니 회관을 지었습니다. 이 모임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모였고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모였으니 선교회라고 이름합시다,라고 해서 제가 대답하기를 내가 성경공부를 인도할 때 내 입으로 가장 많이 쓰는 단어를 선교회의 이름으로 하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새사람’이라고 말해서 선교회의 이름을 ‘새사람 선교회’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공부할 때 말끝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이면 당신은 변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이면 당신은 새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받아들이면 당신은 새롭게 살 수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성경공부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말하기를 자기는 새사람이 되지 않겠답니다. 그러면서 자기 옆 사람을 변화시켜 달라고 말합니다. 그 옆 사람이 자기 남편이고, 자기 자식입니다. 그런데 자식이 문제가 아니고 그 남편이 문제가 아니라 그녀 자신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 학생들이 대학입시 때문에 고3병에 걸리고 어려움을 겪습니다. 부모들은 그 자식이 문제라고 합니다. 자녀가 변해서 새롭게 되어 좋은 대학에 들어갔으면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모가 문제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면 항상 ‘당신이 문제’라고 말합니다. 교회가 잘 안되고 교회가 은혜롭지 않아도 무엇이든지 당신이 문제요, 당신 때문에 그렇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당신 때문이라고 당신을 지칭하는 손가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 때문이라고 할 때 사실은 세 손가락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당신 때문이라고 할 때 자기는 세제곱의 문제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사실은 모든 것이 나 때문입니다. 나 자신이 먼저 변하여 새사람이 되어야 우리 교인들도 변하고, 우리 교인들이 변해서 교회가 변하고, 교회가 변해야 이 나라가 변화되게 됩니다.

 

앞에서 강의하신 김대중 선생님의 말씀이 다 옳다고 생각하는데 한가지 추가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내가 변하고, 내 교회가 변하고, 우리 사회가 변해야 통일이 됩니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통일에 대한 준비가 전무합니다. 이북도 준비되어 있지 못하지만 이남도 준비되어 있지 못합니다. 빨리 준비해야 합니다. 1995년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 남북이 분단된 지 50년이 되는 희년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가 변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두 가지의 전제조건이 나옵니다.

 

진리가 그리스도의 말씀 가운데 있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음을 받아들이고 그에게서 직접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성경공부를 가르치고 인도할 때에 자기가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부활의 영, 그리스도의 성령이 직접 말씀하실 수 있도록 가르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성경공부를 제대로 하는 비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공부를 하는데 제대로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세를 잘못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고, 그 진리는 예수님께로부터 들어야 하고 그 진리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 하나씩 배워가야 합니다. 세상의 속담 가운데 도둑질도 배운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또한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데 있어서도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인도자가 성경공부를 바르게 인도하고 있지 못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공부방법 중에 무조건 외우라는 식은 잘못된 방법입니다. 저는 성경공부를 35년 간 인도해 오고 있는데 속된 말로 표현한다면 성경공부를 가르치는 데에 있어서 반쯤 귀신이 되어 있다고 해도 맞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공부를 바르게 가르치는 비결의 하나는 교인들로 하여금 성경말씀을 읽을 수 있도록 지도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스스로 읽어서 그 말씀이 진정 살아 있는 말씀으로 그에게 들려오게 될 때에 그것이 성령 체험이며 하나님 체험입니다. 성경 체험이란 성경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성경을 읽어가는데 성경에는 모세를 부르시고 아브라함을 브르시며 사무엘을 부르시는 등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르시는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이 성경 말씀을 읽어가면서 그들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 말씀을 읽어가다가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온다는 내용의 한 예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그 순간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성령은 반드시 말씀을 통해서만 역사하십니다.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버려야 합니다.

 

습관이 문제입니다. 인간은 습관의 동물입니다. 태어나서부터 습관적으로 모든 일을 합니다. 습관에는 독특한 특성이 있습니다. 습관에는 중간이 없습니다. 모든 습관은 좋은 것 아니면 나쁜 것,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독특한 특성은 좋은 습관이든지 나쁜 습관이든지 먼저 내 안에 들어온 것이 나중의 것을 지배합니다. 즉 먼저 들어 온 것이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일단 습관이 내 안에 들어오면 절대로 나가지 않습니다. 늦게 일어나는 습관을 가지면 일찍 일어날 수 없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가지고 있으면 늦게 일어날 수 없습니다. 늦게 일어나는 습관과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동시에 가질 수 없습니다. 먼저 들어간 것이 늦게 일어나는 습관이면 그것을 내어 쫓기 전에는 일찍 일어나는 습관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담배 피우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담배 안피우는 습관을 동시에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변하여 새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나쁜 습관을 고쳐야 합니다. 나쁜 습관을 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습관의 동물이기 때문에 한 번 좋은 습관을 들이면 아주 좋아지고 한번 나쁜 습관이 생기면 아주 나쁘게 됩니다. 특히 나이가 들면 들수록 온갖 종류의 습관을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옛 습관을 버리기 위해서는 깨어져야만 합니다.

 

성격은 습관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그런데 성격과 습관은 거의 고치지 못한다고 합니다. 유일한 방법은 깨어져야만 고쳐질 수 있습니다. 정신과 의사의 말에 의하면 정신병은 고칠 수 있지만 성격은 고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결혼해서 부부가 함께 사는데도 남편과 부인의 어렸을 적 성격은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성격은 참으로 고치기 어렵습니다. 상대의 성격을 고치려고 할 때에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편지하는 사도 바울이, 어떻게 변하여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 말씀은 성경의 구석구석에서 우리에게 말씀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것의 첫째는 진리가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습관을 버려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의 말씀대로 좋지 않은 습관을 버려야 합니다.

 

저에게는 두 아이가 있는데 공부를 다 잘합니다. 그 아이들이 공부를 잘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는 저와 아내가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고, 둘째는 저와 아내가 항상 책보는 습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밖에 나갔다가 오면 손과 발을 씻고, 양치질 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우리집 두 아이는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어디를 나갔다 오면 손과 발을 씻고 양치질을 합니다. 두 아이가 일찍 일어납니다.

 

저와 아내가 둘다 선생이기 때문에 항상 보는 것이 책이다 보니 이들은 항상 공부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습니다. 아내가 두 아이를 키우면서 하는 말이 한 시간만 나가서 놀면 1,000원을 준다고 말합니다. 아이가 나가서 10분을 놀고 다시 들어와서 하는 말이 “엄마, 제가 1,000원 도로 줄테니 공부할 수 있게 해줄테야?”라고 말합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식 자랑을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습관이 이처럼 무섭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함입니다.

 

성경 말씀이 옳습니다. 너희 자녀들이 어려서 일찍부터 주의 말씀으로 양육되면 저가 장성하여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습관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변하여서 새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잠언의 말씀에 하늘 아래에는 새것이 없고 모든 것이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 있는 모든 것은 옛것의 그림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새것이 없다”는 말의 의미는 물건을 말하는 것이지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물건은 새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새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물건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사람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당신은 변하여 새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을 수없이 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무엘상 10장 6절에서는 “네게는 여화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너는 변하여 새사람이 되리라.”는 말씀은 당신도 변하여 새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울도 변하여 새사람이 될 수 있는데 나라고 안 될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울이 누구입니까? 사울은 그 당시의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크고 다른 사람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잘 생긴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외형적으로 우월할 경우 대부분은 여러가지 문제(여자문제 등)를 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울이 변하여 새사람이 되어 왕이 되었습니다. 그가 왕이 된 것은 기룸부음 받음을 통해서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시에 유행어가 생겼는데 “사울도 변하여 예언을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세상의 모든 사람은 변해도 사울은 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변하여 왕이 되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왕 노릇을 잘했으나 나중에는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다 그 인생을 비참히 마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변하여 새사람이 된 자입니다.

 

신약의 사울도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도 변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도 변하여 바울이 됩니다. 그렇다면 나도 변하여 새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와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여 새 사람이 된 이야기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새로워진다는 의미는 속사람이 새로워진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내 속사람이 새로워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를 볼 때에 새로워질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같아 보입니다. 내게서 새로워질 것이 있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관계가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나와 당신의 관계가 새로워지면 내가 새로워집니다.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가 새로워지면 나는 새로워집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면 나는 새로워집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내게서 새로워질 것은 관계가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번 강의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드린 기억이 있습니다. 성경 맨처음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실 때에 빛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다음으로 맨처음에 있었던 것은 요한복음 기자에 의하면 말씀이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빛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말씀이 있었다는 의미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있었고 그 말씀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이라는 말은 관계형성이요, 관계대입입니다. 더욱 쉽게 표현한다면 ‘관계’입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책 서설에서 “태초에 관계가 있었느니라.”라고 썼습니다. 관계가 제일 중요한 내용입니다. 목회를 성공적으로 하려면 대인관계에서 형통해야 합니다. 목회를 진정으로 잘 하려면 자기와의 관계가 잘 풀어져 나가야 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어야 합니다.

 

정치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대인관계입니다. 대인관계가 어긋나게 되면 결정적인 순간에 실패하고 맙니다. 사업이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대인관계입니다. 목회 또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대인관계입니다. 목회를 성공적으로 하려면 어느 누구와도 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대인관계가 가장 중요합니다. 내가 새로워질 수 있는 것이 바로 대인관계입니다. 관계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살다보면 기분 나쁜 때가 있습니다. 기분이 나쁜 이유가 무엇입니까? 회사에서 퇴근해서 집에 들어와 아내 앞에서 오늘 하루 기분 나빴던 자기 심정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아내는 남편의 기분이 왜 상했을까를 알아내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거의 확실한 내용은 남편이 누군가와 부딪쳤구나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남편이 돈을 얼마 벌지 못해서 기분 나쁘거나, 일이 잘 안되어서 기분 나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부딪친 것 때문에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윗사람에게 지적을 받았거나 동료에게 업신여김을 받았다거나 아랫사람이 무례히 행한 것 때문에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저도 아내와 가끔 다투곤 합니다. 그러나 손해는 나에게 옵니다. 그래서 아내와 화해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화해가 잘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화해가 되지 않아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기를 아내와 화해가 되지 않는 까닭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즉 아내와의 관계가 새로워지지 않는 까닭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내와 바른 관계가 유지되려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게 형성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할 때에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잘못되며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틀어질 때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바르게 되지 못하여 좌충우돌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은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변하여 새사람되는 항목입니다. 먼저 하나님과 단절되었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면 나와 내 자신과의 관계가 새로워지고 그렇게 되면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하나씩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저의 가친께서 제가 어렸을 적에 이야기하기를 “중기야, 내가 너에게 평생 소원이 있는데 네가 세상에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면 너의 마음을 넓게 열어라. 사람이란 누구를 막론하고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면 제일 먼저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빨리 찾아라. 사람들은 생활에 바쁘다 보면 자기의 좋은 점을 잊어버리고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빨리 찾아내서 그 사람을 따로 만나서 ‘당신의 장점은 이런 것입니다. 그것을 살려서 잘 해보세요. 그러면 잘 될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해주어라.”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이상할 정도로 사람을 만나면 단점만을 찾습니다. 약점만 찾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단점과 장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장점만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없고, 단점만 가지고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부딪치는 이유는 상대방의 단점만을 이야기 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아버지가 “너는 누구를 만나든지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보고 찾아내어 그 좋은 점을 상대방에게 이야기하면서 지내라. 그러면 그 사람들이 너에게 잘 할 것이고 너의 인생은 크게 성공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40세가 되어서야 깨달았고 그대로 행해 오고 있습니다.

 

관계가 새로워진다는 의미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자신과의 관계도 이웃과의 관계도 바르게 형성되어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면 나는 나 자신을 귀하게 여깁니다. 내가 나를 귀하게 여길 때 남이 나를 귀하게 여깁니다. 아무리 못생긴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를 비하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를 귀한 존재로 인식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나는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입니다. 변하여 새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 나서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자신을 향하여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가장 귀한 존재임에 대하여 자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으로 자학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나는 죄인이지만 아나님께서 나를 죄에서 해방시켜서 변하여 새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새사람의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새사람이 되는 비결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이나 그 사람이 새로워지는 것은 생각에 의하여 결정이 됩니다. 아무리 젊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구태의연한 생각을 하고 있을 수 있고 육신은 늙었어도 그 생각이 새로울 수 있습니다. 생각이 새로운 사람이 새사람입니다. 생각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면 우리의 생각이 새로워져 새로운 아이디어가 무진장하게 솟아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형성은 새로운 아이디어의 보고입니다.

 

제가 직접 들었던 간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북에서 이남으로 피난온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이북에서 사업을 하다가 서울에 내려와 서울에서 사업을 하였습니다. 6.25가 발발하자 부산에 내려가서 사업을 했습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되자 서울에 올라온 그는 사업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부산에서 사업에 실패하고 이제 남은 것이 하나도 없어 사업을 하려고 해도 쉽게 시작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당시에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무슨 사업을 할 것인가를 연구했으나 마땅한 사업이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참으로 신실한 신앙인이었는데 집에 돌아와서 엎드려 기도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 아버지,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재건의 물결 속에서 사업을 재건시킬 수 있겠습니까? 서울 시내를 아무리 돌아다녀보아도 사업이라고는 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며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관계개선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는데 “내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줄테니 서울 시내를 다시 한번 돌아보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다녀 볼 때에는 서울 시내에서 제일 많이 깨어진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보아서 그것을 재건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돌아다녀보니 유리가 제일 많이 깨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깨어진 유리를 모아 인천으로 싣고 가서 거기에서 그것을 녹여 판 유리를 뽑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겨울은 다가오는데 창문에 유리를 끼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유리가 날개 돋친 듯이 팔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바르게 될 때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입니다.

 

만일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겨서 새로운 생각을 할 줄 안다면 새로운 사람인데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도 일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새사람이 아닙니다.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면 새 일을 해야만 새 사람입니다. 당신이 새 일을 하고 있으면 새사람입니다. 당신이 새 일을 하지 않고 있으면 새사람이 아닙니다. 이사야서에서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라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라고 했습니다. 새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했습니다. 무엇이 새 일이냐 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새 일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미 새일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새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목회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목회를 할 때에 그것은 옛일이 되고 나아가서 목회는 아주 어려운 일이 됩니다. 목회가 쉽다고 하는 사람은 없고 목회가 어렵다고 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목회를 하기 때문입니다. 목회는 주께서 하십니다. 나는 다만 거기에 업혀서 하는 것입니다. 내가 목회를 하면 실패하고 맙니다. 목회는 내 생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대로 하는 것입니다. 본래 목회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주님의 일입니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그가 시골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 교회에 소망이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는 3~4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더 줄지 않고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기 때문에 희망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새로운 목회자가 되어야 합니다. 새로운 목회자가 되려면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고백하며 목회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휴가도 가고 쉬기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 암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암 진단의 최고 권위자인 이규학 박사가 있는데 그는 암을 연구하며 세계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말에 의하면 5만명의 환자를 다루었는데 자기 앞에서 죽어나간 환자의 수가 1만 3천 명이 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보기만 해도 그 사람이 암 환자인지 아닌지를 식별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분의 말에 의하면 암의 원인 중의 50%가 걱정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걱정하면 안 됩니다. 목회자는 일할 때는 일하고 쉴 때는 쉬어야 합니다. 괜한 걱정으로 목회의 중심에 자기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휴가도 가지 않고 365일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면서 쉬지 못해서 얼굴이 말이 아닙니다. 어떻게 이러한 사람을 새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새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목회자는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하며, 목회는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배짱을 가지고 일해야 합니다.

 

광야(사막)에 길을 내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새 일은 사막에 길을 내는 일이며, 광야에 길을 내는 일입니다. 여러분 광야가 어디에 있습니까? 사막이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날 지구본을 돌려보면 사막과 광야가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이스라엘 땅의 광야는 베들레헴 아래에 위치해 있는데 그 광야에서 꽃을 재배하여 유럽의 꽃시장을 꽉잡고 있습니다. 요즈음은 사막에서 기름이 쏟아지고 사막에 길을 놓아 고속도로가 통행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지구본을 돌려 보아도 어디가 광야이며 사막인지 식별이 불가능합니다. 광야는 D.M.Z입니다. 한국인이 지금 가지 못하는 곳이 어디입니까? 독립국가연합, 중국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북은 가지 못합니다. 휴전선이 가로막혀 있는 곳이 광야입니다. 거기에 길을 뚫어 주시며 강물을 솟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막은 어디입니까? 우리의 마음의 밭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의 심령의 밭이 사막이 되어 있습니다. 누가 무엇인가 말 한 마디를 하면 바짝 긴장합니다. 여유가 없습니다. 또한 우리의 눈망울이 사막이 아닌가 합니다. 우리의 눈에 언제 은혜의 눈물이 괴어 보았습니까?

 

오늘 우리 한국 땅이 광야요 사막입니다. 세계에 가지 못할 곳이 없는데 가지 못한다면 그곳이 사막이요 광야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분명히 한국 땅에 길을 내고 강을 흐르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 기독교인들의 참된 통일의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새사람이 누구입니까? 어떻게 새사람이 됩니까?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가져서 하나님과 관계를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면 나의 생각이 새로워지게 됩니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새로워지게 합니다. 그리고 생각이 새로워지면 말이 새로워집니다. 그런데 말을 하게 되면 몸이 말을 알아 듣습니다. 생각이 새로워지면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몸이 말을 알아들어서 행동으로 습관화됩니다.

 

뿐만 아니라 생각이 새로워진 사람은 새일을 시작하게 됩니다. 새일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새사람입니다. 그리고 새 일을 하려 하니 새 힘이 생깁니다. 힘이 있어야 일하는 것입니다. 힘은 일하면 생기게 됩니다. 새 일을 하려고 하는 자의 심령에서 새 힘이 솟아납니다. 일을 해보지 않은 많은 사람들은 내가 힘이 있어야 일하고, 능력이 있어야 전도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전도하면 능력이 생깁니다. 새 일을 할 때에 힘이 생깁니다.

 

이사야 40장 28~31절에서는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외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너나 할것없이 모두가 사업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으나 사나 그 사업에서 성공해야 합니다. 누구나 한평생을 사는데 그 한평생이 실패할 것인지 아니면 성공할 것인지는 내게 달려 있습니다. 나의 목회도 승리하고 성공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교인들에게 사업에 성공하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사업할 때 이 세상의 사업만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사업도 해야 함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세상 사업의 궁극적인 성공은 하나님의 사업과 병행될 때에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때의 하나님의 사업이 바로 새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새일을 해야만이 세상의 사업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사업에 성공하는 방법으로는 첫째는 자기의 이미지를 새롭게 바꾸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내가 진정한 내가 아니고 새로운 존재라는 이미지가 부각되어야 합니다.

 

둘째는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적이 없어 실패하게 됩니다. 여기에 보인 사람들에게 종이를 나누어 주고 당신의 원대한 목적과 구체적인 목적 그리고 중간 목적이 무엇이냐고 기록하라고 해보면 “저는 그러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기록할 사람이 절반은 될 것입니다. 사업은, 이 세상의 사업이나 하나님의 사업이나 성공하려면 분명한 목적이 세워져야 성공합니다.

 

셋째는 나 혼자만이 아는 Know-how를 개발해야 합니다.

 

넷째는 끊임없는 추진력이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목적도 분명하고 기발한 Know-how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기 긍정의 자신감도 가졌습니다. 그런데 추진력이 없어 실패합니다. 추진력은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성령이 역사해야 하는데 성령은 능력입니다. 말씀은 구원의 능력입니다. 성령과 말씀이 함께하시지 않고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새로워질 수 없습니다. 시작도 하나님의 말씀이고 결론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임해야 성령이 역사합니다. 성령이 따라와야 예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이 함께하실 때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공부는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성령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조금 틀리게 이야기한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엠마오 도상에서 두 제자가 이야기하는 것이 틀렸을 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 주시고 그들이 틀린 부분을 고쳐주셨습니다. 틀리게 이야기할 때에 예수님께서 고쳐주십니다.

 

결 론

 

여러분이 하는 일은 세상일인 동시에 하나님의 일입니다. 진정으로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는 비결은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되 이 세상만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나라를 앞당겨서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을 동시에 살아간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교회만’이라고 하면서 교회에 집착하면 실패합니다. 이 세상밖에 없다고 생각해도 실패합니다. 이 세상과 하나님의 나라에서 동시에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로워지면 새로운 아이디어가 속출하게 되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기면 그것으로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에게 무궁무진한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에게나 기발한 아이디어를 개발해 낼 수 있는 12억만 개의 메모리 칩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죽을 때까지, 많이 이용하는 사람은 5%, 그렇지 않으면 보통 사람은 2~3%밖에 그것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참으로 무궁무진한 능력이 자신에게 주어졌는데 생각을 잘못하고 관계를 바로 정립하지 못하여 모든 능력을 사장시키는 것입니다.

 

목회는 자기 긍지가 강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남의 것을 모방하지 않고 자기 고유의 Know-how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는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