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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생명신학과 존 칼빈의 신학을 통한

하나님아들 2020. 2. 4. 23:23

개혁주의 생명신학과 존 칼빈의 신학을 통한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본질

 

정흥호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논평 이복수 고신대학교

1. 들어가는 말

선교는 궁극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사역이다. 그것을 이루어가기 위한 방법론은 문화에 따라, 상황에 따라 매우 다양해 질 수 있지만, 그 최종 목적은 죄로 인하여 죽은 생명을 복음을 통하여 다시 살려서 영원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는 것이다.

세계복음화라는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중차대한 과업(지상대위임, the Great Commission)을 이루어감에 있어서, 잘못된 신학으로 인하여 이 사명이 위축되거나 축소된다면, “불법을 행하는 자들”1)로 하나님 앞에 큰 심판을 면할 길이 없을 것이다.

이는 단지 학문적 경향의 문제가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서 죽느냐, 사느냐의 심각한 구원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에서 어떻게 선교적 관점으로부터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지를 짚어보는 것은 시기적으로 매우 시급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시대와 문화의 변화에 따라 하나님이 빠진 신학이 난무하고 있다. 서구 유럽의 신학을 중심으로 생명을 살려야할 신학이 도리어 생명을 죽이는 학문으로 전락하고 있다. 문화적 가치에 중점을 두게 됨으로써 문화적 상대주의(cultural relativism)가 나타나게 되었고, 이에 따라 현대의 기술문명이 급속하게 발전하게 됨으로써 기독교에도 종교적 상대주의(religious relativism)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2)

이는 곧 세계복음화라는 선교의 사명을 소홀히 여기게 되고 신학교육의 방향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결국 복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신학교육이 이루어져야한다. 이런 점에서 개혁주의 생명신학과 존 칼빈의 신학의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고, 이를 선교신학에 적용하여 말 그대로 “생명을 살리는 일”에 신학교육과 선교신학의 본질이 있는 것이다.

2. 개혁주의 생명신학의 본질

잘못된 신학은 잘못된 신앙을 갖게 하며, 잘못된 신앙은 잘못된 신학으로 인하여 나타난 결과이다. 기독교에 있어서 신학과 신앙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공생의 관계이다. 신학이든 신앙이든 기독교의 진리는 근본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것이 되어야한다. 서구의 자유주의 신학의 방법론은 신학과 신앙이 분리된 채 이성주의로부터 출발하여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에서 떠나 기독교를 단지 “신학적 종교”로 전락시켜버렸다.3) 신학이란 단순히 이론이나 지식이나 학문이 아니다. 신학은 신앙이 전제되어있는 것이며 성령의 역사를 통한 거듭남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4)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세계화는 급속하게 진전되고 있으며, 일률적인 사고형태나 방법론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실용적 상대주의(pragmatic relativism)가 팽배해 가고 있다.5) 다시 말하면, 어떤 사회가 문명화될수록 급진적인 개인주의가 등장하게 되고, 그에 따라 객관적인 진리에 대하여는 무관심해지고 자신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해석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소위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에 접어든 사회일수록 자유가 인간 가치의 최고봉이며, 이것 또한 문화에 의해 창출된 것이라고 간주하게 되면서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가치나 진리가 없어지고 윤리와 도덕도 상대적인 것이라고 보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유”에 대하여 언급하셨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 그러나 이 자유는 궁극적으로 죄로부터 자유인 것이다. 이 자유는 본질적으로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의 용서함을 받고 그 죄인이 변화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단순한 진리이며 기쁜 소식인 복음을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속박으로부터의 그런 자유가 아니라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과 영생에게로의 자유”6)를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믿음은 회개가 전제되어있다. 죄인이라는 자각없이 믿음이 생성될 수 없다.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은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눅 24:47)가 먼저 있어야 한다. 복음은 모든 인류를 향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회개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죄 사함의 은혜가 임하게 된다는 좋은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인류의 죄는 종족, 나이, 직업, 성별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과 사회와 조직 속에 퍼져있다. 이 죄의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면 결단코 인류의 평화와 정의를 실현할 수 없다.7) 성경에서도 왜 복음이 기록되어있는 지에 대해 분명하게 목적이 언급되어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선교적 관점에서 신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창조주되신 하나님을 바르게 연구하고, 그 하나님께서 어떻게 죄인된 인간을 구원하시는 가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학문적 접근만으로 알 길이 없다. 따라서 ‘개혁주의 생명신학’에서도 “신학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의 한계를 넘어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령 안에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구원의 사역이 그 중심”8)을 이룬다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가장 우선적으로 신학은 죽어가는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의 열망(딤전 2:4)9)과 그 심각성을 인식하는데서 출발한다.

이런 하나님의 구원의 열정을 타락한 인간의 지혜와 지식과 경험으로만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의 구속사를 알기 위해서 반드시 성령님의 인도함이 있어야 한다. 만일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지 못하는 신학이라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이해할 수 없고, 진정으로 생명을 살리는 신학으로 가지 못하는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10)

하나님은 “피조된 세계를 주관하시며 자신의 목적에 따라 세계 안에서 행동하시는 주권적인 조물주요 주님이시라고 전제한다. 예언, 기적, 종말론, 그리고 성육신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이러한 확신이 실재적임을 보여준다.”11)

문화적 상대주의적 개념으로 본다면 인간이 살아가는 문화는 중립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적 관점에서 본다면 어떤 문화이든지 성경적 관점에서 보는 세계관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결국 이 문제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기 때문이며 그 죄인들이 만들어놓은 문화이기에 죄악된 요소가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성경을 통해서 문화를 판단해야 하며 성경에 의해 문화가 구속받아야 한다.12)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부터 인간에게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권한을 부여해 주셨다(cultural mandate, 문화적 위임, 창 1:28).13) 하지만 인간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타락하면서 그 흔적은 모든 문화 속에 있게 되었다. 홍수를 통해 죄악된 인간과 그 문화가 징벌을 받았고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모든 인류에게 적용될 하나님으로부터 약속과 사회적 위임(social mandate, 창 8:21-9:17)을 받았다.14)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ie)만을 단지 훼손시킨 것이 아니라 인간의 손이 닿고 만들어내는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렇다면 복음주의 입장에서 어떤 신학이 생명을 살리는 신학인지 분명한 제시가 있어야 한다.

소위 종교상대주의나 종교다원주의는 기독교의 본질을 훼손시키고 있으며 생명을 죽이는 신학으로 전락해 버렸다.

개혁주의 생명신학의 입장에서 이 점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첫째, 생명신학은 전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신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생명신학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에게서 완성되는 신학”15)이라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생명임을 선언하였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요”(요 6:35),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니”(요 11:35),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죽었던 죄인이 생명을 얻고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예수님 밖에 없음을 성경은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종교에도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을 수 있다는 포용주의(Inclusivism)나 아예 다른 종교에도 구원에 이르는 길이 있다고 단정하는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는 전적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둘째, 생명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어야 한다.16)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이시며(요 1:14), 생명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다. 천지만물의 주인이시고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죄인된 인류에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으로 예수님 외에 다른 이름이나 길을 주신 일이 없다(행 4:12).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생명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따라 지키는 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요8:52).17)

셋째, 생명신학은 철저하게 믿음의 신학이다.18)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믿지않는 자에게 생명이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만을 강조하고 믿음을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만인구원론(Universalism)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에 있어서 회개와 믿음은 분리할 수 없는 관계이다(참조: 행 20:21). 회개를 통해 믿음을 얻게 되는 것이고, 믿음이 있는 자에게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생명신학을 ‘믿음의 신학’이라고”19)할 수 있다.

넷째, 생명신학은 세상에 참된 빛을 나타내는 선교신학이어야 한다.20) 예수님은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셨고, 또한 그를 믿는 자들은 그 일에 동참해야할 것을 명령하시고 위임(the Great Commission, 지상대위임, 마 28:18-20; 막 16:15; 행 1:8))하셨다.

선교는 영혼을 살리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는 나라와 인종과 지역의 장벽을 넘어서 전해야할 일이며, 따라서 “생명신학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이 세상에서 생명운동을 계속하는 ‘선교의 신학’”21)인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지키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라고 “복음의 위임”(the Gospel Mandate, 마 28:18-20)을 받은 사람들이다.22) 복음을 통하여 문화의 변화도 일어나야 한다. 어떤 하나의 문화가 다른 문화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새롭게 변화되어야할 문화적 요소를 발견하고 성경적인 관점으로 바꾸어가야 한다. 다른 문화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복음과 문화의 관계에서 직․간접으로 이런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비기독교인의 삶의 틀 안에서 관습과 예식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음으로 우상의 길을 따르게 되어있다. 선교인들(missioners)은 왜곡되고 잘못된 문화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고 다시 세워나갈 수 있음을 전해 주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능력자(마 28:18)임을 알게 해야 하며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줄수 있는 자임을 증거해야 한다.23)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이 세상에 역사하시며, 믿는 자들에게 그 능력을 주시어 믿는 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을 믿게 될 때, “생명신학”이 무엇인지 바로 아는 자들이며, 이는 곧 행동 신학의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선교의 진정한 신학적 의미는 예수 믿고 구원받아 새생명을 얻어, 죄의 길에서 벗어나 변화된 삶을 이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어떤 문화권에서 살든지 다른 사람들을 그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

사역에 있어서 훌륭한 형태의 발전은 헬라적 개념화나 계몽주의적 사고로부터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저 세상에 대한 확신만 가지고 되는 것이 아니며, 변화되어가는 세상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뜻이 살아있고 거룩한 희생물을 드림으로 우리의 삶을 증명하고 진리를 행함(요일 1:6)으로 형성되는 것이다(롬 12:1-2).24)

거룩한 삶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께 대한 영광 이외에 어떤 다른 것이 될 수 없다.25) 복음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자기 자신의 관계 회복을 강조하고 있다. 그 관계의 회복은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인정할 때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될때, 비로소 죄악으로부터 자신을 살려주신 그 하나님을 위해 담대하게 자신을 드릴 수 있는 것이다. 헌신이란 자신의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드려서 주님을 위한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다.26) 이 하나님은 단지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라 어느 나라, 어느 문화권에서든 역사하시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삶의 전 영역 가운데 그 하나님을 증거해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것이다.

2. 개혁주의 생명신학과 존 칼빈 신학의 상관성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가장 먼저 던져볼 수 있는 질문이라면 무엇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가일 것이다. 그것은 두 말할 나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지 않는 자들에게 다가올 멸망의 실재성과 보편성(the reality and universality of perdition)일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고 결국 심판받고 멸망에 이른다는 보편성은 남녀노소, 인종이나 문화를 불문하고 해당되는 것이며 여기에는 누구도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선교의 필요성은 “멸망”이라는 실재성과 멸망을 피하고 “천국백성”이 되어야함을 하루속히 전파해야 한다는 긴박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칼빈은 이 “하늘의 심판대”(a heavenly tribunal)를 인식하는 것이 기독교 종교의 시작단계라고 말하고 있다.27)

칼빈에게 있어서 하늘의 보좌와 심판과 영원한 형벌에 대한 확실한 인식 위에 기독교의 기초(the basis)가 서있는 중대한 요소가 되고 있다. 이 기초가 무너지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하여, 천국의 존재 여부에 대하여, 회개의 필요성에 대하여, 죽음 이후 심판과 영원한 형벌에 대하여, 모호한 신학적 자세를 취하게 된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을 동시에 문제를 삼으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잘못 이해하면 “구원의 경험”, 다시 말하면 “선행”(善行)을 경시하는 경향으로 흘러갈 수 도 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초점을 맞추어 강조하다보면 그 뒤의 문제를 놓치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자신의 문제를 처음부터 심각하게 제기하고 있다.28) 칼빈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기독교란 종교의 경험을 필요로 하는 “영혼구원”의 종교이다. “하나님 앞에 선”(Coram Deo) 존재로서 자신의 죄악성을 심각하게 문제 삼지 않는 사람은 칼빈의 신학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29) 칼빈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모든 선하심과 의로우심의 광명 앞에 서있는 우리 자신들에게선 무지, 허무, 빈곤, 연약함, 무엇보다도 타락과 부패(depravity and corruption)를 마땅히 느끼게(properly feel)된다고 보았다. 이 느낌이란 것은 바로 경험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느끼는 사람은 불의, 썩음, 어리석음, 부정함에 찔림 받는다(by clear proofs we stand convinced of)고 말한다. 칼빈은 소위 “종교적 경험”을 경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조했다고 말할수 있다.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체험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부분이다.30)

이런 점에서 본다면, 개혁주의 생명신학이 강조하는 체험의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연결시켜볼 수 있을 것이다. 신학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일인데 그것은 이론이나 지식될 수 없는 것이라고 본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이를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내적인 성령의 체험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강조한다.31)

以信得義혹은 以信稱義(justification by faith) 교리는 기독교의 핵심진리임에 틀림없다(롬 3:28). 바울은 계속해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고 말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롬 3:23)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롬 3:24)로 삼아주신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으로 인하여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신 것이며 그의 보혈로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언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임으로 그를 믿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길이 없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의 용서함을 경험했다는 것은 곧 회개와 중생의 경험으로 직결되는 것이고 이 점을 칼빈은 구원론 초반부에 분명히 언급하고 있다.32)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곧 선한 행위가 없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칼빈은 이 점을 여러 곳에서 강조하여 지적하고 있다.33) 사실상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선행이 없는 신앙에 대하여 무율법주의(anomism)라고 배격을 하였다. 이처럼 “以信稱義”의 신앙은 선한 행위, 즉 聖化(sanctification)와 반드시 연관이 되어있다. 칼빈은 선행이 없는 신앙을 꿈꾸어 본 일도 없다고까지 강력하게 피력하고 있다.34)

이것은 오늘날의 기독교인들 뿐만 아니라 이슬람권, 불교권, 힌두교권을 막론하고 사역자들이 삶 가운데서 적용해야할 중요한 신학적 기초라고 말할 수 있다.

죄인된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것은 분명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지만 선한 행위가 없는 구원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도 바로 이런 점을 지적하고 있다.35)

죄인이 회개하고 죄의 용서함을 받아 중생하여 다시 죄 가운데 빠지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해 주시는 사랑(pardoning love) 안에서 있음으로 선한 열매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칼빈은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칼빈은 이와 같은 선행을 제 이의 은총이라고 하였다.36)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통해 죄인된 우리들을 의롭다고 받아주실 뿐만 아니라 자비하심을 통해 “稱義”라는 은혜 위에 “聖化”라는 은혜를 더하여 주시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림으로써 그의 자녀들에게는 최상의 기쁨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선한 행위의 은혜를 베푸시는 것을 “의의 행위”(works of righteousness, operum justitia)라고 했다.37)

개혁주의 생명신학도 거룩한 삶을 강조하고 있으며, 이는 곧 세속적인 것, 즉 옛 생활의 유혹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향해 전진해 가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순종하는 것을 의미하며, 옛 생활과의 분리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거룩한 자녀로 살기 위하여, 날마다 우리 속에 뿌리 내리고 있는 세상의 욕심과 욕망, 즉 죄의 경향 및 영향력에서 벗어나도록 힘쓰고 애써야 하는 것”38)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참 회개(true repentance)가 있는지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 신앙(true faith)가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이 두 가지는 아주 밀접히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한 가지가 다른 것 없이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우리 안에 죽음뿐이다 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힘을 그에게서 찾는다면 우리는 약함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모든 행복이 그의 은혜 안에 있다면 그 행복 없이는 우리가 얼마나 비참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 안에 쉼을 얻는다면 우리 안에는 불안과 괴롬 뿐임을 느껴야 한다(must feel only disquietude and torment). 그런 느낌은 첫째로 우리의 삶 전체에 대해서 불만하여야 하며 둘째로 번민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마지막으로 의에 대한 갈망과 사랑의 마음이 생겨나야 한다.... 우리의 비참에 대한 이와 같은 찔림 아래서(under such a

conviction of our misery)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그의 뜻대로 제어하기를 원하게 되고 우리의 과거의 생을 완전히 청산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지기를 원하게 된다.39)

칼빈이 구원론을 강조하면서 선행을 강조한 것은 구원의 확신을 경험한 사람은 선행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중생한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죄의 용서함을 받은 영혼의 선행과 반드시 상호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이런 신학은 선교역사에 있어서 큰 업적을 남긴 모라비안 운동과 웨슬리안의 운동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40) 칼빈이 언급하였듯이 예수 믿고 선한 사람이 되어 선한 일을 행하여 하나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게 된다는 이 진리가 200년 후에 모라비안과 웨슬리안들의 신앙운동을 일으킨 것이며 그런 열정을 따르게 된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이다.41)

바른 신학은 결코 삶과 분리되어질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삶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할 지를 보여주셨다. 따라서 “생명을 주는 교육은 예수님의 생명을 생활 속에 보여주는 것”42)이어야 한다. 여기에는 반드시 섬김과 희생이 따른다. 선교인들에게 요구되는 성육신적 삶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삶 가운데서 보여주신 섬김의 도와 희생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역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4-45).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마무리하면서 증거한 복음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를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다;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행 20:21). 바울은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가장 먼저 복음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복음을 전달하는 사역자들은 가장 먼저 복음에 담겨있는 “구원의 심각성”을 자각해야 하며 이 구원이라는 하나의 공동목표를 가지고 “구원의 대한 소망”(earnest desire of salvation)을 이루어가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43)

무엇보다도 선교신학의 근간은 이 하나님의 구원의 열정을 항상 증거하고 선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구원론의 동기는... 선교연구의 불타는 심장”44)과도 같은 것이다. 이 구원론에 대한 것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신학의 유형이 달라지고, 선교의 방법론이 좌우되며, 선교를 수행해 가는 방향이 크게 다르게 된다.

개혁주의 생명신학도 가장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학을 말하고 있다. 참된“신학은 근본적으로 인간 지성의 탐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행위를 뜻”45)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참된 신학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이 만남은 지식적인 앎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신뢰하고, 사랑하고, 섬기는 것을 뜻하는 것”46)이다. 셋째, 기도하는 신학이 되어야 한다. 기도는 예수님의 삶 전체에 흐르고 있고 이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의 신학이 되어야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통로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고, 섬기고 예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47)

칼빈의 신학은 전적으로 하나님은 모든 것의 중심과 근원이 된다는 신본주의(theocentrism)에서 시작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인류가 창조되었으나 타락하였고, 그 죄인들이 결국은 교회의 복음사역을 통해 믿게 되고, 하나님께 기도로 간구함으로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된다는 단순한 진리인 것이다. 인간은 복음과 신앙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될 수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 스스로 신앙을 성장시키고 발전해 갈만큼 부지런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교회라고 하는 외적 도움을 통해 목적지를 향해 도달해 갈 수 있게 하였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복음이라는 보화를 간직할 수 있게 해서, 목사와 교사를 세우고 그들을 통해 그 복음을 설교하고 가르칠 수 있게 한 것이다. 칼빈은 교회를 통해서 무엇을 가르치고 전해야 하는 지를 분명하게 언급한 것이며, 그 목적은 신앙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성장하고 발전해서 결국 “영생”의 구원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제시한 것이다(참조: 딤후 3:15; 요 20:31).48)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을 기록하게 한 목적은 죄인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칼빈도 결국 사람들이 성경 안에서 복음을 찾고, 교회에서 선포되는 복음 설교를 통해, 그 복음을 믿어 구원을 얻고 영원한 복락을 누리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내용이라는 것이며, 칼빈의 주장이나 성경의 내용이 “구원”에 그 중심이 있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49)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신앙에서 볼 때, 신학이 단순히 이론적 체계라든가 교의적인 논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사람들을 바른 신앙으로 인도하고 “경건한 사람으로 양육하는 실제적 목적”50)을 갖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게 되는 것이며 결국 신학의 목적이 인간을 죄악으로부터 구원하는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다면 “창세기에서 요한 계시록까지 성경전체는 창조된 생명과 잃어버린 생명, 회복된 생명과 뻗어가는 생명, 그리고 완성된 생명의 스토리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51)

결 론

현 시대적인 상황을 보나, 현대신학의 흐름을 볼 때, 선교학이 접근해 가야하는 방향은 단순히 방법론이나 전략의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으로 신학과 신앙의 문제를 짚어보아야 한다.

어떤 눈에 보이는 가시적 성과라는 실용주의적인 차원을 논의하기에 앞서 신학의 본질을 살펴보고 그 문제점을 강력하게 주창해야할 시점에 이르렀다. 또한 계속해서 나오게 될 목회자와 선교사들을 위한 훈련을 책임지고 있는 신학교육과 세계선교의 진전을 위해서도 올바른 신학이 무엇인지를 점검하고 그 방향을 계속해서 제시해 주어야한다는 것은 복음주의 교육을 위해서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끊임없이 시대적 도전이 있었고, 다른 종교와 부딪힘이 있었다. 근본 기초가 잘못되어버린다면 시대적 사조와 타종교의 침투에 기독교는 무방비 상태에서 견디지 못할 것이다. 아쉽게도 서구 유럽의 선교는 타종교와 타협하고 절대적인 것을 주장할 수 없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적 흐름에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게 됨으로써 이제는 피선교지가 되어버렸다.

무엇보다도, 선교가 성경의 권위에 기초한 신학에 그 근거를 두고 있지 못한다면 그 선교는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많은 분야에서 제각기 방안을 강구하여 여러 프로그램을 만들고 기획하며 선교 전략을 세우고 있다. 그런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반드시 있어야 할 “최고 최대의 전략”이 될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최선의 전략을 이루는 구성요소는 반드시 최고의 전략가로부터 나와야 한다. 그 분은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분에 대한 발견은 성경 말씀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그 안에 기독교 사역과 세계 선교에 대한 본질이 들어있다. 성경의 권위와 함께 이루어지는 신학을 경시하고는 선교의 기초가 제대로 세워질 수 없으며 이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신학교육 또한 제자리를 잃어버리게 된다. 만일 신학교육이 성경적인 신학과 이에 기초한 선교학의 중요성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서 회복하지 못한다면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전해 주려는 사람들을 고무해 주고 격려해 줄 수 있는 소망을 점차로 잃어버리게 되고 말 것이다.52)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영적 전쟁은 무엇이며, “잃어버린 양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심오함이 어떤 것인지 성경에서 가르쳐주고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통계를 내보고 전략을 짜며 미래에 대한 어떤 계획을 세워 본들 하나님의 구원의 열심을 찾기가 어렵게 된다. 빈약한 인류학을 가지고도 선교는 수행될 수 있으나 잘못된 신학을 가지고 선교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말을 다시한번 숙고해 보아야 할 때이다.53)

존 칼빈이 그 당시 부패한 사회를 향하여 진정한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증거하고 선포했다면 오늘날 현대사회의 상황 속에서도 그것을 외치고 선포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는 철저하게 자신의 무지와 허무, 빈곤과 연약함, 타락과 부패를 보았다. 그에 반해 하나님은 지혜와 능력, 모든 선한 것의 부요하심과 순결하심, 의로우신 분임을 복음 안에서 찾았다. 서구 사회를 비롯하여 범세계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살인, 자살, 알콜중독, 마약,동성연애 등등, 사회적 부도덕이 만연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삶의 방법이나 추구하는 목적이 결코 물질적인 번영이나 편안한 삶을 누리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의 인류가 처해 있는 실재(res ipsa)이다. 생명을 살리는 선교는 사회적이고 영적인 현실을 바로 인식하는데 부터 시작한다.

진정으로 신학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면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드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삶의 표준이 자신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달려있다면 그 말씀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며, 세계 곳곳에서 죄악에 억눌려있는 자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54)

인간은 모더니즘이라는 시대사조를 통해 과학적 발달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인류의 타락과 부패가 늘어가고 있음을 경험하고 있다. 소위 개발도상국가라고 불리는 나라들조차도 서구의 물질문명을 경험하고 추구하는 나라들은 서구사회가 겪고 있는 실수를 그대로 답습해 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경제적인 만족이나 물질문명의 발달이 인간의 영적 갈급함을 결코 채워줄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선교에 헌신하는 자들은 복음의 능력을 믿고 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다. 이 복음에는 생명을 살리는 진리가 들어있다.

각 주

1) 마태복음 7:22-23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 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 Samuel Huntington & Lawrence Harrison. 『문화가 중요하다』(서울: 김영사, 2001), 19.

3) 한철하, “2001년 세계한인신학자대회 관계 논문”, unpublished, 2000, 15.

4) 장종현,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백석 장종현 박사 육영 30년』(백석대학교, 2007), 134-5.

5) Francis Schaeffer, 『기독교 성경관』, Vol. II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0), 23.

6) 장종현,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161.

7) 한철하, 『21세기 인류의 살 길』(서울: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출판부, 2003), 35.

8) 장종현, “생명신학”, 41.

9)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10) 장종현,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137.

11) Bruce Nicholls, Contextualization: A theology of Gospel and culture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78), 16.

12) Ibid., 19.

13)Harvie Conn은 이를 “Covenant Mandate”(언약적 위임)라고 하였다.

14) David Hesselgrave, "World-view and contextualization" in Perspectives on the

World Christian movement, ed. Ralph Winter and Steve C. Hawthorne (Pasadena, Calif.: William Carey Library), 1992, C 7.

15) 장종현, “생명신학”, 42.

16) Ibid.

17) Ibid., 44.

18) Ibid.

19) Ibid., 45.

20) Ibid.

21) Ibid., 46-47.

22) David Hesselgrave, "World-view and contextualization" in Perspectives on the

World Christian movement, C 8.

23) John Herman Bavinck, An introduction to the science of mission (Grand Rapids, Mich.: Baker Book House, 1969), 179.

24) Harvie Conn, Eternal word and changing worlds (Grand Rapids, Mich.: Academie

Books, 1984), 309.

25) Anthony A. Hoekema, "The reformed view". In Five views on sanctification (Grand

Rapids, Mich.: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7), 88.

26) 장종현,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 107.

27) John Calvin,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John T. McNeil (Philadelphia, Pa.: Westminster Press, 1960), III, 12:1.

28)한철하, “한국교회의 진로” (Unpublished, 2000), 12.

29) Ibid., 13.

30) Calvin,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 I, 1:1-3.

31) 장종현,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135.

32) 한철하, “한국교회의 진로”, 15.

33) 참조: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 III, 14.

34) Ibid., 16.1. "We dream neither of a faith devoid of good works, nor of a justification that stands without them."

35)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6); “너희도 정녕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엡 5:5-6).

36)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 III, 14, 9. "We confess that whole through

intercession of Christ's righteousness God reconciles is to himself, and by free remission of sins accounts us righteous, his beneficence is at the same time joined with such a mercy that through his Holy Spirit he dwells in us and by his power the lusts of our flesh are each day more and more mortified; we are indeed sanctified, that is, consecrated to the Lord in true purity of life, with our hearts formed to obedience to the law. The end is that our especial will may be to serve his will and by every means to advance his glory alone." 37)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 III, 17, 10. "Now whence does this pardon arise, save that God contemplates us and our all in Christ? Therefore, as we ourselves, when we have been engrafted in Christ, are righteous in God's sight because our iniquities are covered by Christ's sinlessness, so our works are righteous and are thus regarded because whatever fault is otherwise in them is buried in Christ's purity, and is not charged to our account. Accordingly, we can deservedly say that by faith alone not only we ourselves but our works as well are justified. Now if this works righteousness-whatever its character-depends upon faith and free justification, and is effected by this."

38) 장종현,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 106.

39) Calvin, "Short Treatise on the Lord's Supper", 22. 재인용. 한철하, “한국교회의 진로”,13.

40) 한철하, “한국교회의 진로”, 14.

41) 한철하, 『21세기 인류의 살길』, 283.

42) 장종현, “생명을 주는 교육”, 191.

43) 한철하, “ACTS 신앙운동에 있어서의 ‘구원의 심각성’ 공동자각의 위치” (Unpublished,

2000), 1.

44) J.D. Gort, "Human Distress, Salvation and Meditation of Salvation," in Verstraelen,

Camps, Hoedemaker and Spindler, 195. 재인용. 스티븐 B. 비반스 & 로저 P. 슈레더, 『예언자적 대화의 선교』, 124.

45) 장종현,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 141.

46) Ibid., 142.

47) Ibid., 143.

48) 한철하, “한국교회의 진로”, 5

49) Ibid., 6.

50) 전광식, “생명의 학문으로서의 신학”, 『생명과 말씀』(개혁주의생명신학회, 2010 가을),158.

51) Ibid., 140.

52)David J. Hesselgrave, "To Whom Are We Listening?" International J ournal of Frontier Missions. Vol. 11:1 (January 1994), 7.

개혁주의 생명신학과 존 칼빈의 신학을 통한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본질

논평 이복수 고신대학교

정흥오 박사의 논문 “개혁주의 생명신학과 존 칼빈의 신학을 통한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본질”은 현대의 자유주의 신학이 복음을 바르게 전파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복음을 통한 구원사역의 핵심을 내용으로 하는 복음주의 신학을 재천명하는 연구라는 점에서 감사를 드린다.

먼저 논문의 내용을 압축하여 정리한 후에 논찬자로서 입장을 밝힌다. 서론의 핵심은 잘못된 신학이 빚어내는 위기적인 상황으로서 사람을 바른 구원에로 인도하지 못하고 생명을 죽이는 학문으로 변질되어 나타나고 있으며, 이러한 신학의 영향은 결국 신학교육의 방향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따라서 생명을 살리는 신학교육과 선교신학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개혁주의 생명신학과 존 칼빈의 신학이 가진 공통점을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연구자는 본론에서 먼저 개혁주의 생명신학의 본질을 기술하였다. 개혁주의 생명신학이 재천명되어야 할 상황으로서 서구의 자유주의 신학이 신학과 신앙을 이원화함으로 성령의 역사을 통한 거듭남의 경험이 없어졌으며, 실용적 상대주의의 도입으로 절대가치와 진리를 상대화 시키는 경향이 일어난 것과 관련된 신학적인 문제들을 지적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재조명 되어야 할 개혁주의 생명신학의 핵심요소들은 1) 죄로 인하여 죽은 인간을 거듭나게

하는 예수님에 대한 신학, 2)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된 신학, 3) 이론이나 지식이 아닌 믿음의 신학, 4) 참된 복음을 선포하는데 중심을 두는 선교신학임을 부각시켰다.

본론의 두 번째 요소로서 개혁주의 생명신학과 존 칼빈의 신학이 가지는 상관성을 밝혔다. 개혁주의 생명신학이 중요하게 여기는 죄와 사망에서의 거듭남에 대한 강조는 역시 존 칼빈이 처음부터 심각하게 여겼던 죄의 심판에서 “영혼의 구원”에 대한 강조와 직결되었으며, 칼빈에게 있어서 이러한 영혼의 구원은 이신득이의 기독교 핵심진리에 근거한 것으로 행위를 통한 구원은 아니지만 행위가 따르는 믿음에 의한 구원임을 중요하게 여겼다.

칼빈에게 강조되었던 행위가 따르는 믿음은 개혁주의 생명신학에도 역시 표현되어 있는데, 그것은 신자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삶의 방향에서 날마다 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내용으로 강조되었다. 개혁주의 생명신학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이 된 순종의 신학이었다면 칼빈의 신학 역시 전적으로 신본주의의 토대위에 세워졌다는 점에서 상관성이있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기독교신앙의 핵심적인 요소들 안에서 두 신학은 공통점을 가진 것을 밝히면서 선교신학은 이러한 토대위에서 구원의 열정을 증거하고 선포해야 할 필요

가 있음을 제안하였다.

연구자는 결론의 부분에서 오늘날 서구의 자유주의 신학의 배경을 가지는 선교신학은 기독교의 바른 핵심진리가 빠진 상태에서 선교의 프로그램과 전략을 세워나가는 상태에 있어서 많은 문제들을 노출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개혁주의 생명신학과 칼빈의 신학이 가지는 공통적인 요소가 강조되는 신학의 회복을 통하여 진정한 복음의 능력이 선포되고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나야 할 것을 제시하였다.

논평자의 입장에서 본 연구는

첫째, 복음이 왜곡되게 선포되는 오늘의 신학교육과 이러한 교육의 영향으로 인하여 생명을 죽이는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을 심각하게 드러내는 연구로서 오늘의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는 부분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기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오늘의 기독교 강단에는 무성한 많은 말들이 다양한 전달의 방식을 통하여 사람들을 사로잡지만 복음이 없으며, 선교의 현장 역시 사람들의 환심을 이끌어 내는 도움들을 주고 있지만 복음이 빠져 있는 상황을 예리하게 발견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둘째, 개혁주의 생명신학과 칼빈의 신학은 기독교가 선포해야 할 복음의 핵심부분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밝힘으로 개혁주의 생명신학이 칼빈 신학의 전통을 이어가는 신학임을 부각시키는 긍정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신학의 사조가 혼란 할 때에 칼빈 신학의 전통을 이어가는 흐름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각시키는 작업은 칼빈 신학의 중요함을 재천명하는 요소가 되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셋째, 논평자의 입장에서 본 연구에 더욱 보충되어야 할 부분으로는 연구자가 개혁주의생명신학으로 제시하고 있는 내용들이 복음주의의 입장들과 특별히 다른 내용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개혁주의 생명신학이란 특수한 명칭을 부여하였다면 특수한 명칭에 따르는 내용들이 반드시 함축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개혁주의의 여러 특징들 가운데 하나를 지적한다면 하나님의 우주적인 주권에 대한 강조이다. 따라서 연구자가 개혁주의 생명신학의 내용을 확립해 나가는 내용 속에는 바른 복음을 통한 영혼의 구원을 강조하는 차원을 넘어설 필요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주권이 구체적으로 시행되는 일에도 바른 역할을 담당하도록 비전과 사명을 제시해야 내용이 포함되어야 할 것으로 고려된다.

넷째, 논평자의 입장에서 볼 때 연구자가 개혁주의 생명신학과 칼빈 신학을 서술해 나가는 과정에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제시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진다. 이러한 요인은 인용하는 자료들을 논술적인 차원에서 활용하기 보다는 필요에 따라 단편적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논문이 다소 산만한 느낌을 가지게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귀한 연구로 복음주의 신학과 선교에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켜 나가는데 도움을 주신 정흥호 교수님에게 거듭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