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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본질과 예배회복

하나님아들 2020. 2. 1. 15:28

신앙의 본질과 예배회복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을수록 예배는 형식화되었다. 그러나 신앙이 회복될수록 예배는 성령이 주관하시는 예배가 되었다.


제1장 예배의 본질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호 6:1-6;4:1)

 

본질이 없는 의식은 무의미합니다.

 

예배는 의식입니다. 기도 역시 의식입니다.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는 그 본질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본질을 담는 의식입니다. 그릇입니다. 예배는 본질을 담을 때 의미가 있게 됩니다. 반면에 아무리 예배가 가득하다할지라도 본질이 없으면 예배는 무의미합니다.

 

본질이 없이도 의식이 가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이제부터 살펴볼 내용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본질이 없이도 의식이 가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이게 문제입니다. 본질이 없이도 예배가 가득할 수 있는 점, 오늘날 예배에서 이 같은 면을 우리들 주변에서 너무나도 자주 봅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신앙의 본질이 없으면 죄가 가득하게 마련입니다. 실제로 신앙의 본질이 우리 삶 가운데에서 회복되지 않으면 성도라 할지도 절대로 세상과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들의 삶 가운데 죄가 가득한 이유는 신앙의 본질이 없기 때문입니다.

 

본질이 없어도 수많은 제사가 드려졌습니다.

 

이사야1장입니다. 12절은 신앙의 본질이 없으면 마당만 밟고 헌금을 드는 예배임을 말해줍니다. 13절과 14절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렸던 수많은 예배의 종류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예배가 있었음에도 하나님은 기뻐하시기는커녕 도리어 “지기에 부담스러운 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그 예배를 가리켜 “마당만 밟고 돌아가는 예배”, “헛된 예배”라고 말씀하십니다. 부담스럽고 미워하시는 예배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본질이 없으면 하나님께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수많은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호세아 시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하나님을 대단히 사랑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하나님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저들은 왜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토록 수많은 예배와 무수히 많은 헌금을 바쳤을까?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신앙의 본질에 대한 참다운 의미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기에 하나님의 기준에 의해서만 나아가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아무리 우리 속에 순수한 동기를 가지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해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기준만이 참다운 예배를 드리게 만듭니다. 우리의 동기와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자시라는 개념을 유념 하십시오.

 

이것은 지식의 양과 관계가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자세와 관계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누구보다도 자신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믿었고 그래서 예배를 잘 드렸던 자들입니다. 의식을 누구보다도 잘했습니다. 예배를 누구보다도 잘 드렸던 자들입니다. 거짓신앙체계에 빠지면 이런 문제가 생깁니다. 즉 하나님의 관점에서가 아닌 자신들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사랑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의 관점만 통할 뿐입니다.

 

기복신앙은 본질이 없는 예배를 가능케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토록 많은 예배를 드렸던 두 번째 이유는 기복신앙의 방편으로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6장 12절부터 15절입니다. 호세아서는 북방 이스라엘이 멸망당하기 직전에 주어진 말씀이고, 예레미야서는 남방 유다가 멸망당하기 직전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와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백성들의 영적 상태가 비슷한 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 당시도 신앙의 본질이 상실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당시도 호세아 시대처럼 예배가 많이 드려지고 있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당시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자기들이 세상에서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기복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사업이 잘 풀리기를 바라며,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며, 건강하기 위하여 그들은 예배했던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빌리기 원했던 겁니다.(렘6장)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기복신앙과의 차이)

 

이 구절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항상 이 예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부잣집 무남독녀의 예입니다. 한 남자가 부잣집 무남독녀를 얻기 위해 무지무지하게 노력하고 애를 쓴다고 합시다. 그런데 이 남자가 그녀에게서 얻고자 하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결혼 후에 찾아올 부귀영화라고 합시다. 여러분이 만약 그녀라면 그 남자와 결혼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바보가 아니라면 절대 결혼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도 아닙니다. 그런데 한 남자가 이 여자를 진실로 사랑한다고 합시다. 그녀가 부잣집 무남독녀이기 때문도 아니고 부귀영화를 꿈꾸고 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냥 그녀가 좋습니다. 그녀가 없으면 못 살 것 같아서 사랑합니다. 그 남자에게 돈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녀와 같이 있는 시간이 그저 좋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아서, 구원자이신 것으로 만족하여 예배했어야 했습니다.

 

사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주십니다. 그들은 예배를 잘 드리면 하나님이 더 큰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기복신앙인데도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그렇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주일날 예배하는 이유가 혹 예배 안 드리면 하나님이 벌을 내리실 것 같아서는 아닌지요. 아니면 주일성수를 해야 하나님이 축복을 주실 것이니까 예배드리지는 않은지요. 모든 예배에 안 빠지면 하나님이 축복하실 것이라는 생각 때문은 아닌지요. 아니면, 주일날 예배드리는 것이 습관이 되어있기 때문은 아닌지요. 목회자들은 적당히 이런 면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일에 전념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목회자들은 더 많은 헌금과 교회성장을 위해 사람들의 이런 욕구를 적당히 ‘평강’과 ‘축복’이라는 미명하에 이용하지는 않는지요!

 

반대로, 의식은 본질을 담는 그릇이니까 예배나 주일성수, 기도 등을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주일날 예배 안 드리고 놀러가면서도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날 사랑하시니까. 하나님은 주일 한 번 빠졌다고 벌주시는 분이 아니야. 굳이 매주일 교회에 올 필요는 없어. 현대는 바쁜 시대니까 한 주간은 일하러가고 한 주간은 교회에 오면 돼. 어쩌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 건데 한 번 빠지면 어때. 다음 주에 예배드리면 되잖아”하면서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으려는 소위 의식파괴론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기복신앙보다 더 나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여러분, 의식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마십시오. 단지 의식은 본질을 담는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의식이 있어야 본질이 담길 수 있으니까요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목적이 되어 진 예배가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본질이 담긴 예배가 되면 성령님께서 그 가운데 운행하시며 역사하실 것입니다. 이런 자세로 예배하는 자들이 모여 예배드리면 예배는 회복될 것이며 그때에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