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계시록!!! 마라나타!!!

종교다원주의 이후의 선교(1)

하나님아들 2019. 12. 28. 15:53

종교다원주의 이후의 선교(1)

본문: 전도서 11-11, 마태복음 2816-20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주 야외예배로 아름다운 00동산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모처럼 야외에 나가 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음식을 나누며 사랑의 친교를 하는 귀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수고해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 모두 느끼시는 바이겠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교회 주일예배와 친교모임 등에 참여하시는 분들의 숫자가 갈수록 적어진다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이 교회에 전도사로 왔을 때에 비하면 주일예배 참여인원이 많이

줄어든 것이 사실입니다.

인원이 적다는 것은 물론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거룩한 주일예배의 신앙본질과는 직접적인 상관은 없는 일입니다.

열 명이 모이든, 만 명이 모이든 우리의 예배 가운데 살아계신 하느님에 대한 참된 믿음의 고백과 변화의 체험이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도 지방 소도시의 목수로서 제한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영향력을 미치신 분이었고요. 그러나 주일예배의 참석인원이 단순히 적다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 주목을 요합니다.

참석인원의 문제가 비록 신앙의 본질에 속한 문제는 아닐지언정 우리 공동체에 앞으로 일어날 어떤 일에 대한 ‘징후적인 현상’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저 간과할 수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여 저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오늘부터 세 번에 걸쳐

‘선교와 전도’를 주제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아마도 “종교다원주의 이후의 선교”라는 제목의 시리즈 설교가 될 것 같습니다.

세 번에 걸친 말씀에서 저는 “상대주의를 신앙에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할 필요성이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주의의 함정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골자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비판적 문제제기와 대안제시, 그리고 실천적 적용이라는 세 개의 틀을 바탕으로

말씀을 나눌 예정이기 때문에 첫 시간인 오늘은 불가피하게 다소 강의형식의 설교가 됨을 널리 양해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포도원으로서의 교회

 

저는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하나의 포도원에 비유하여 생각하곤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포도원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 포도원에 부름 받아 일꾼으로 참여한 이들입니다.

포도원의 목적은 무엇보다 풍성한 결실을 맺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꾼으로 참여한 이들이 먼저 그 열매로 풍성한 삶을 누릴 뿐만 아니라,

일꾼으로 참여하지 않은 이들에게까지 그 열매와 기쁨을 나누는 것이 포도원의

목적일 것입니다.

이 목적을 위해 주인과 일꾼은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것이 포도원에 참여한 이들의 꿈입니다.

전통적으로 목회자의 역할은 포도원의 관리자를 맡은 청지기쯤 될 것 같습니다.

그 역시 하나의 일꾼으로 참여하면서 주인의 뜻을 다른 일꾼들에게 충실히 전달하며 포도원이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포도원인 교회로 부름 받은 목회자의 사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때로 청지기가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포도원의 주인인 것처럼 행세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뜻을 주인의 뜻인 양 왜곡할 수도 있고, 모두의 노력의 결과로 얻은 열매를 자기만의 공로로 돌려버릴 수도 있습니다.

마름이 주인노릇을 하는 격입니다.

그러나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충실한 청지기는 포도원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우리 교우들 가운데에는 여러 사회단체에서 크고 작은 책임을 맡고 계시는 분이

많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잘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충실한 일꾼, 믿을만한 사람과 함께 일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일에 있어서도 우리 모두가 하느님의 충실한 일꾼, 믿을만한 청지기가 되어 드리는 것이 절실할 것이라 믿습니다.

그렇기에 하느님께서는 오늘도 당신의 거룩한 포도원 사역에 동참할 일꾼들을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어떤가?

우리 사랑하는 0000교회라는 포도원에 부름받은 일꾼인 여러분 각 사람, 그리고 잠시 청지기로 부름받아 이 자리에 있는 저는 이런 목적에 충실한 생활을 하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주일예배 참석인원이 적어지고 있다는 것은, 말하자면 포도원 사역에 참여하는

일꾼이 적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꾼들의 불성실함을 탓하기에 앞서, 우선 주인과 청지기가 일꾼들에게

적절한 동기부여를 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고, 그들이 이 일에 동참함으로써 보람과 기쁨을 느껴야 하는데, 그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일은 하는데 재미가 없고, 신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죠. 이것이 문제입니.  

 

이것은 단지 참여를 독려하는 수준에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제기와 변화의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학창시절 어떤 수업시간에는 선생님이 떠들지 말라, 자지 말라고 말씀하셔도

기어이 떠들거나 잠이 들고야 마는 시간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시간에 조셨습니까?

혹시 미션스쿨 나오신 분들은 성경 시간에 졸지 않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어떤 시간에는 선생님이 굳이 그런 말씀을 안 하셔서 귀를 쫑긋 세우고 듣는 시간도 있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재미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필요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그저 선생님에 대한 예의 차원에서 말씀을 듣지만 생각은 저 멀리 딴 곳에 있습니다.

유치원이나 중고등학교나 대학의 강의, 심지어 아침에 하는 교양프로그램을 볼 때도 기준은 같습니다.

재미나 필요, 이 두 가지 조건 중 하나라도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하면 청중의 주목과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용히 하라, 졸지 말라는 식으로 참여를 독려/강압하는 방식은

그 한계가 명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 역시 그렇습니다.

교회참여를 독려하는 방식은 한계가 명백합니다.

포도원에 참여하는 이들이 기쁨으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  

 

교회는 전통적으로 재미와 필요 가운데 후자(필요)를 선택해 온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비록 재미가 없어도 죄사함을 받고 지옥에 가는 것만은 피해야 하니 그런 필요에 의해 주일예배에 참석했던 인원이 적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수 잘 믿고 축복받아 건강하고 풍요로워질 것을 기대하며 역시 그런 필요에 의해 예배당을 찾는 인원도 많았습니다.

 

개신교 선교의 종말 – 19세기 계몽주의 선교 패러다임의 종말

 

그러나 오늘날 현대사회의 계몽된 교인들은 교회가 그동안 그들의 필요를 이끌어내기 위해 의존해 왔던 전제들에 심각한 문제를 제기함으로써 이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선교학자들 가운데에는 개신교의 폭발적인 성장을 이끌었던 선교적 패러다임이

 

이미 그 쓸모를 다했다고 진단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 패러다임은 다름 아닌 ‘계몽주의와 근대화’로 특징지을 수 있는 19세기 개신교 선교의 패러다임입니다.

교육과 의료 수준이 낮은 지역과 국가를 대상으로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며 그들을 계몽시키고 근대화에 도움을 주는 것, 이것이 19세기 세계선교의 주된 흐름이었고 이러한 흐름이 19세기 말 선교사들을 통해 우리나라에 이식되어 대략 한 세기동안 교회의 부흥과 성장을 이끌어 왔던 것입니다.

 

한국적 상황에서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신앙정체성으로 대표될 수 있겠는데

“예수 잘 믿으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된다”는 주장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런 패러다임 속에서 선교는 항상 부유한 나라/지역에 속한 이들이 가난한 이들을 향해 베푸는 행위가 됩니다.

문제는 이런 방식의 선교는 늘 선교주체들의 문화적 우월감을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예수를 잘 믿으면 우리처럼 풍요로워지고, 우리처럼 건강해지고, 우리처럼 강해진다”는 믿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케냐의 기독교인구 퍼센티지가 한국보다 훨씬 높아도 우리는 케냐선교사가 한국에 와서 선교한다는 말은 거의 듣지 못하는 반면, 케냐에서 한국선교사들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 유럽과 북미의 부유한 국가의 선교사들이 한국을 향하여 행했던 선교의 방식을 모방하여 재현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 선교는 다름아닌 ‘계몽주의와 근대화’의 선교적 패러다임인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 최소한의 교육과 근대화가 관건이 아닌 부유하고 교육받은 사람들이 이미 많아졌다는 데 있습니다.

이미 부유해진 나라의 사람들, 이미 학력과잉 시대에 접어든 국가에 속한 이들에게는 교육과 근대화에 의존한 이런 선교적 패러다임이 더 이상  극적인 효과를 발휘하지 못합니다.

말하자면 ‘기복주의 신앙’에 매료되지 않는 이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굳이 하나님의 축복에 의존하지 않고서도 충분히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사회, 근대화된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처럼 근대화의 프로젝트를 어느 정도 완수했다고 여겨지는 국가의 국민들은 19세기 선교적 패러다임에 아직도 의존해 있는 기독교를 이제 구시대의 산물로, 넘어서야 할 장벽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다수는 아직도 과거의 패러다임에 속해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여기에 비판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과거에 비해 크게 늘어난 것 또한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19세기 선교 패러다임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개신교, 기복주의와 성공주의 신학을 기반으로 한 교회와 목회자는 기독교인들에게조차도 이제 점차로 극복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기복적인 신앙과 성공신화를 배경으로 한 복음의 전파가

효과를 거두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새로운 선교의 패러다임이 요청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제가 알기로 0000교회는 이미 30년 전에 19세기 선교 패러다임의 한계를 체감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의 교회를 모색하며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이를 지속적으로 실천해 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 단계에서는 우리 교회가 새로운 도약과 돌파구가 마련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과거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적 문제제기에 그치지 않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신앙생활의 패러다임 마련할 뿐만 아니라 이를 삶에서 충실히 이루어내려는 구체적인 노력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교회만의 과제는 아닙니다.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의식과도 관련이 깊은 문제가 하겠습니다.

예컨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관한 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전근대적인 군사독재를 비판하고 민주주의 성공적으로 수립한 것으로 민주화의

과제가 완수되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생활세계에서 민주적 가치를 수립하고, 이에 따라 생활의 전 영역에서 이를 실천하기 위한 참다운 민주주의의 실현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하겠습니다.

교회 역시 전근대적인 목회자 권위주의와 기복신앙, 성공지상주의적 신앙의 패러다임 극복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이후에 문제의식의 초점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선교에 있어서는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을 극복하는 것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 그 이후가 더욱 중요한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에 근거한 ‘개종주의’를 극복하면서도 여전히 기독교신앙에 충실한 선교를 할 수 있는 대안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의식이 배타성을 극복해야한다는 당위적 명제를 반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라는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신앙에 있어서는 ‘다원화 이후의 다원주의’의 문제가 오늘의 과제로 놓여 있습니다.

 

 

신학에 있어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분야는 역시나 선교학과 조직신학입니다.

특히 ‘종교다원주의’의 문제는 현대선교신학과 조직신학이 공동으로 다루고 있는

쟁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종교다원주의에 관한 신학적 성찰은 우리교회가 놓여있는 딜레마, 곧 “배타주의적 신앙을 극복하고 다원주의를 포용하면서도 어떻게 진실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을까?”하는 문제의식을 해결하는데 일정부분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물음은 오늘날 지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여전히 신앙적이기를 요구하는 이들에게 교회가 반드시 응답해야만 하는 선교적 과제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이러한 물음을 오랫동안 버리지 않고 여러 모양으로 이에 답하고자

노력해 온 우리교회의 존재의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20세기와 상대주의(relativism)의 득세  

 

지난 주 밤속회에서는 특별히 의미 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번 학기 밤속에서는 속회원들이 한 분씩 돌아가면 자신의 삶에 영향을 준 책

한 권을 요약/발표하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난주는 000 장로님께서 과학과 신학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발표를 해 주셨습니.

긴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수학적 지식을 추구해 온 과학이 20세기에 들어서 그 자신의 방법론에 의해서도 절대주의를 고수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근대문명의 절대적 지표였던 과학마저도 어떤 하나의 명제적 진리에 대해 절대성을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학은 수학적 진리를 추구하는 합리적 사유의 방식을 채택하는데, 그런 철저한 사유의 방식에 의해서도-오히려 철저한 사유의 방식을 따르기 때문에-궁극적 확실성이 보증될 수 없다는 사실은 과학자(지식인)가 하느님을 믿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여전히 열어 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철학에서는 현상학의 흐름으로, 그리고 20세기 출현한 해석학과 구조주의를 통해 구체화된 내용입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비롯하여 슈뢰딩거와 괴델 등 20세기 과학사의 논쟁의 중심에 진리의 확실성에 대한 물음이 놓여있었다는 사실을 접하면서 기존의 철학적 이해가 더욱 풍부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진리에 대한 불확실성’이란 주제는 부인한다고 해도 피해갈 수 없는 20세기 인류의 지적인 유산으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20세기에 이르러 과학과 철학에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진리의 불확실성에 대한 관점을 일컬어 ‘상대주의(relativism)’라고 명명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상대주의의 영어표기인 relativism은 철학에서는 ‘상대주의’로 과학에서는 ‘상대성 이론’을 지칭하는 말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과학과 철학에서의 상대주의적 흐름을 신학에 적용한 것이 바로 1970년대 등장한 ‘종교다원주의’ 신학이라는 사실입니다.

한국에서는 1992년 감신대 변선환 교수와 홍정수 교수가 이 종교다원주의와 포스트모던 신학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어 목사직과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감리교단에서 출교당한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살펴보셨듯이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신학자들의 독자적인 사상이라기보다는 20세기 과학과 철학의 상대주의적 경향성을 타종교와의 관계성의 문제에

적용한 현대신학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시대의 상식적 흐름을 역행하지 않는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라도 신학자와

목회자는 당연히 그가 속한 시대의 흐름과 비판적인 대화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20세기, 그리고 오늘날로 이어지고 있는 이러한 시대의 흐름이란 다름 아닌 다양성(diversity)과 차이(difference), 곧 상대성(relativity)에 대한 존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교회에서는 상대성에 대한 과학자와 철학자들의 주장이 거의 백 년이 지난 상황에서 뒤늦게 한국에 이를 소개하고 신학적 사색을 전개하려 했던

두 명의 신학자를 이단으로 배척하여 출교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런 일련의 역사적인 과정을 지켜보면 신학과 교회가 얼마나 시대의 흐름에 뒤쳐져 있는지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특히 교회는 과학과 철학적 사유를 신앙생활의 토대로 수용하기까지는 적어도 한 100년이 걸리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진보적인 신학을 수용하는데 만도 한 30년은 걸리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상대주의가 득세하고 상식으로 자리매김한 20세기를 지나면서도 교회는 아직도

진리의 절대성에 대한 주장이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물론이고, 개신교마저 이러한 사고의 유연성을 신앙생활에 적용하는 것을 위험한 일로 여기며 금기시하는 현실이 이를 방증합니다.

 

영어 relativism이 ‘상대주의’ 혹은 ‘상대성 이론’을 지칭하는 것처럼, 절대주의의 영어표기 absolutism은 철학에서는 ‘절대주의’로 정치의 영역에서는 ‘공화주의(민주주의)’의 반대말인 ‘전제주의’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번역어상으로 상대주의는 공화주의(민주주의)와 친화성이 있는 반면,

절대주의는 전제주의와 가깝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정치의 영역에서는 아무도 독재자의 전제정치를 환영하지 않습니다.

 

정치의 영역, 생활의 영역에서는 상대주의를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종교와 신앙에 있어서만큼은 이 전제주의에의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는, 이것이 바로 동일한 용어로 표현되는 ‘절대주의’라는 체계입니다.

 

사회제도와 우리의 생활양식은 지극히 상대주의적인 가치관에 따르고 있는데,

우리의 신앙은 여전히 절대주의에 묶여있다는 데 삶과 신앙의 불일치의 한 원인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절대성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러한 절대성의 추구가 기독교신앙의 역사 그 자체였음을 들어 그 정당성을 지지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기독교가 그리스 형이상학과 만난 이래로 기독교는 진리의 확실성/절대성에 관한 형이상학적 추구를 지속해 왔고, 하느님 또한 이러한 형이상학적 동일성이라는

논리의 틀 속에서 ‘변함없이 동일하신 분’으로 이해해 왔기 때문입니다.

근대 과학의 출현은 이러한 그리스 형이상학의 동일성과 확실성에 대한 서양의 지적추구의 전통을 ‘과학적’ 지식으로 계승하기 위한 한 시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인종차별과 노예제도, 그리고 남녀차별이 인류 역사에서 지금껏 지속되었다는 논리를 들어 오늘날의 차별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와도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기에 기독교신앙이 상대주의의 도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못한 채 여전히

절대성을 독백적으로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이미 상대주의를 수용하고 있는 세상

사람들의 조소와 외면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종교다원주의는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이론적인 것을 길게 말씀드린 이유는 이렇듯 사회 전반에 걸쳐 상대주의의 불가피성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신앙에 있어서만큼은 배타적인 절대주의가 해답인가?”하는 질문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대다수의 교회는 복음주의라는 명목으로 절대주의적 신앙을

고수합니다.

그것은 다수의 교회가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안전하고 편안한 신앙노선임에 틀림없지만, 서구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회로부터 고립될 우려가 있습니다.  

이미 절대성의 토대가 무너진 상황에서 그런 절대성을 계속 주장하는 것이 교회의 고립을 가속화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는 거리전도자를 보고 교회에 나갈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이 상식인 사회에서 자신의 절대적 확신을 배타적으로 ‘선포’하는 것은 당사자에게는 보람이 있는 행위일지 모르지만, 기독교의 고립을

자초하는 어리석은 행위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반면, 상대주의적 가치를 교회가 전면적으로 수용할 경우에는 문제가 없을까요?

그렇다면 아마도 교회가 존재해야 할 이유, 나아가 종교가 존재해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정통과 이단의 경계도 구분 짓기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야말로 바람직한 일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정통과 이단 따위의 인위적인 구분에 집착하는 종교 없이 모든 인류가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한 노력에 힘을 쏟자는 것이 오늘날 상대주의를 전면적으로 수용한

무신론적 주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의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때문에 상대주의를 무비판적이고 전면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교회로서의 정체성과 역할을 상실할 우려가 있습니다.  

 

때문에 기독교인인 우리의 입장에서 더욱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절대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상대주의가 해법인가?

다시 말해, “상대주의를 신앙적으로 적용한 종교다원주의적 신앙, 타종교의 구원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타종교인을 개신교로 적극적으로 전도하려고 하지 않는 종교다원주의 신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합니다.

 

여기에 제가 드리고자 하는 말씀의 핵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오해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다원성의 배척과 수용의 양극단에 서서, ‘비판적 수용’이라는 제 3의 길에 대해서는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 종교다원주의 신학이 소개된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고, 그나마도 교권주의의 개입으로 인해 신학적 논의가 꽃을 활짝 피우지도 못한 채 사장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소개된 것이 소위 ‘신 중심적 혹은 실재 중심적 다원주의’라는 종교다원주의 신학의 한 패러다임입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오늘날 ‘산의 정상은 하나인데, 오르는 길이 다르다’는 비유로

대중화된 다원주의의 한 형식입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자면, 이것은 한계가 분명한 이론입니다.

무엇보다 선교학적인 답변에 매우 취약한 신학입니다.

92년 종교다원주의 신학이 이단시되었을 때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선교적 취약성에 대한 교권주의자들의 문제제기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의 억지 논리에도 일리(一理)는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적 노선을 채택한 교회는 사실상 교회성장을 꿈꿀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기존 구성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헌신도 이끌어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다양성과 차이, 그리고 상대성에 대한 무한긍정으로 회기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자기 정체성마저도 잃어버린 채 상대주의의 늪으로 용해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러한 ‘신 중심적 다원주의’는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이 극에 달했던 시기에는

대화와 공존을 위해 유용한 이론이었고, 또한 실제적인 기여를 많이 했습니다.

타종교 지도자들과 대화의 테이블에 앉아 대화하면서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려는

노력이 그 자체로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킨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지식인들에게 인정을 받는(?) 바람직한 종교의 모습은 이런 ‘신 중심적 다원주의’ 이론에 충실한 기독교로서 이러한 다원주의에 충실한 기독교인이 소위 진보적 기독교인의 역할을 담당해 왔던 것이 한국개신교의 역사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이것은 마치 북한에 대해 우호적이면 곧 진보로 인정되는 한국사회의 뒤틀린 근대화의 모습과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친북적이면서도 전혀 진보적이지 않은 이들이 존재합니다.

반대로 진보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지만 북한에 대해 비판적인 이들 또한 존재합니. 친북은 진보, 친미는 보수라는 식의 이분법적 사고의 틀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종교다원주의에 우호적이면 진보적 기독교인이고 비판적이면 보수적이라는 이분법적 사고 또한 극복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신 중심적 다원주의의 문제의식을 극복하는 것과 우리교회의 선교적 과제가 어느 정도 일치하는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 다수는 타종교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갖고 계시고, 또 그런 마음 때문에 선뜻 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 분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생활에 대한 전통적인 교회의 권위주의적인 강조, 이를테면 주일성수와 헌금, 전도와 선교에 대한 맹목적 요청 또한 불필요하다고 여기시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다른 교회에 비해 상대주의를 수용하는 정도가 다소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신 중심적 다원주의 신학의 패러다임이 나타나는 한계 또한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우리 교회처럼 다원성과 차이를 긍정하려고 노력하는 교회가 교회인원감소와 신앙생활의 활력이 사라지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 문제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본래 다원성을 긍정하고자 좋은 취지에서 시작한 교회들이 우리 교회와 같은 어려움에 직면하여 다시 보수주의로 회기하거나, 교회성장의 귀재인 목회자를 모셔서 각종 프로그램을 통해 활력을 성장을 도모하는 일들이 적지 않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타주의적 신앙으로 회귀하지 않으면서 다원주의의 난점을 극복하는 신앙생활에 대한 전망이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두 본문, 곧 전도자의 허무주의와 마태복음 기자의 선교명령 사이에서 갈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하는 전도자의 고백은 절대적 가치를 상실한 채 모든 것이 상대적 가치로 전락한 현대인들의 허무와 탄식을 담아내고 있는 듯합니다.

반면, 마태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대위임령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 하는 말씀은 분명한 목표와 방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편에는 상대성의 허무주의가 다른 한편에는 절대성의 행동이 놓여 있습니다.

이 두 극단에서 교회는 어떠한 신앙적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인가, 배타성을 극복하다원주의와 상대성을 수용하면서도 여전히 기독교신앙에 충실할 수 있는 제3의 길이 존재할 수 있는가, 쉽지 않은 질문이 우리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이 질문에 성실히 응답하며 보람과 기쁨 가운데 맡겨주신 포도원을 충실하게 가꿔나가는 것이야말로 주인되신 하느님께 기쁨이 되는 일이라 믿습니다.

모쪼록 다원성을 긍정하는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종교다원주의 이후의 선교(2)

 본문: 마태복음 67-13, 누가복음 191-10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과 각 가정 위에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국정원의 대선개입의혹, 그리고 전 대통령의 NLL관련 발언을 두고 일어나고 있는 사회계층간 갈등이 더운 여름을 더욱 뜨겁게 갈구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창조적 불화’를 민주주의 특징으로 꼽습니다.

국론분열을 지양하고, 갈등의 대통합을 이루는 것을 과제로 내세우는 정치담론이 아니라, 참된 민주주의는 오히려 갈등을 통해 이룩된다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목소리들의 충돌과 대립, 그 긴장 속에서 일어나는‘불화’야 말로 민주주의를 추동하는 힘이고, 이러한 창조적 불화를 통해 시민사회는 보다 성숙한 민주주의에 이른다는 통찰입니다.

 

해체 이후

 

지난 시간에 이어 우리가 오늘 함께 나누실 말씀의 주제와도 관련성이 있습니다. 민주주의에 관한 이와 같은 통찰이 ‘상대성’이라는 20세기 전반에 걸친 인류사의 통찰을 정치의 영역에 적용한 것이라면, 우리의 문제의식과 과제는 이러한 ‘상대성’의 통찰을 종교에, 특히 우리의 기독교신앙에 적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종교다원주의 이후의 신앙’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 신학은 절대성의 옹벽으로 둘러쳐져 있었던 종교와 신앙의 상대화를 가장 적극적으로 시도한 신학 가운데 하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해도 적지 않았습니다.

종교다원주의 신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신학의 단순한 해체가 아니라,

해체와 더불어 재구성에 이르는 것인데, 이러한 재구성의 측면이 그동안은 너무

간과되어 온 것이 안타깝습니다.

공들여 지은 건물을 허무는 데는 별다른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10년에 걸쳐 지은 아름다운 예배당을 허무는 데는 10분이면 충분합니다.  

집을 짓는 일은 일생일대의 결단과 헌신을 요구하지만, 공들여 지은 집을 허무는 것은 짓는 수고에 비해서는 사실 쉬운 일입니다.

때문에 정신의 집을 짓고 허무는 일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은 단지 허물고 마는 것이 아니라, 허물고 난 다음에 새로운 집을 짓는 일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존의 신앙행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통해 그것의 무용성을 지적하고, 이를 해체하는 일은 충실한 신앙생활을 통해 집을 짓는 수고에 비하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재미있기도 하고, 지식인의 교양을 갖춘 것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매력적인 일로 비춰지기도 합니다.

사실 요즘 지성인들에게 기독교비판은 거의 ‘교양필수과목’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기독교에 대해 저마다 비판적인 소리를 한 마디 할 수 없으면 지성인이 되지 못하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집을 지으려는 성실함과 노력이 없이도 얼마든지

집을 허무는 일에 동조할 수 있습니다.

 

만약 제가 목회자가 아닌 신학자의 정체성에 충실히 머물고자 한다면, 저는 아마 이 비판의 수위를 더욱 높이고 기독교신학의 해체를 그야말로 전면화하는 일에

매진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을 것입니다.

신학자는 교회-체제와의 ‘창조적 불화’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소신 때문입니다.

목회자도 그런 면이 있지만, 회중에 대한 부담을 덜어내며 급진적인 지적작업을

해내기에는 신학자의 역할이 더욱 수월한 것이 사실입니다.

더욱이 2000년간 형이상학의 토대 위에서 건축된 기독교의 집을 허무는 일은 10년 동안 건축한 예배당을 허무는 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일이고, 때문에 형이상학적 기독교의 해체는 아직도 요원한 과제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0000교회에 와서 000 목사님과 000 목사님의 영향으로,

그리고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가야 한다는 소명감으로 인해 점점 더 목회적인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말하자면 허무는 일에 더욱 철저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이제는 소박하게나마 살 집을 지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것은 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0000교회의 미래를 놓고 기도하며 고심하는 여러분들이 공유하는 생각이며,

“어떻게 하면 우리교회를 보다 생동적인 신앙공동체로, 지금껏 지속해 온 좋은

정신에 기초하여 더욱 발전하는 신앙공동체로 도약시킬 것인가?”하는 데서 일치를 이루는 생각이라 생각이 듭니다.

지금 해야 할 일,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은 담을 허무는 것이 아니라,

담을 쌓는 일입니다.

비판과 해체가 아니라 충실함과 재구성입니다.

 

 

 

'어설픈 종교다원주의'를 넘어

 

오늘날 지성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여전히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상대성’에

대한 비판적 수용이 불가피합니다.

종교다원주의는 그동안 절대성에 기초해 있던 신앙을 상대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지평을 넓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종교다원주의의 어설픈 수용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교회의 존재이유이자 사명이라 할 수 있는 ‘선교/전도’에 대한 이해를 부정적인 것에 한정시킨 데 있습니다.

종교다원주의가 기존의 배타주의적 신앙의 해체에 머물지 말고 충실한 신앙의 재구성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여기에까지 이르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고, 우리교회와 같은 교회들이 받아서 이어나가야 할 시대적 과제 가운데 하나라고 믿습니다. 말하자면 선교의 해체 이후의 재구성의 문제를 고심해야 합니다.

배타주의적 개종주의에 기반한 선교를 넘어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근거한 참으로 복음적인 선교가 되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좀 더 말씀을 드리자면, “산의 정상은 하나지만, 오르는 길이 서로 다를 뿐이다.”라는 신 중심적 다원주의는 개별 종교들의 특이성(singularity)을 고려하지 않은 비교종교학적 통찰에 근거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종교학에서 ‘비교종교학’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이미 많은 비판에

직면해 있습니다.

종교의 세계는 외부의 관찰자적 시점에서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종교에 충실하게 참여하지 않은 채 이를 외부에서 다른 종교와 비교할 수는 있지만, 그 비교는 어디까지나 표면적일 뿐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들 사이의 ‘비교’는 불가능하다는 자각을 종교학자들이 한 까닭입니다.

비교종교학, 그리고 이것의 논리에 기초한 신 중심적 종교다원주의는 일종의 서구제국주의적 인식론의 한 패러다임일 뿐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의 보편적 실재로 수렴시켜 통합시키려는 유럽중심적 식민제국주의의 이상이 정치경제뿐만 아니라 종교의 영역에서까지 시도하고 있는 것이 바로

비교종교학의 이념이며, 여기에 기반한 신 중심적 종교다원주의의 논리의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한계를 체감한 진중한 종교학자들은 그래서 ‘비교종교학’이라는 용어를 매우 조심스럽게 사용하거나 아예 폐기처분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종교학적 통찰에 있어서도 기독교나 불교나 힌두교나 모두 같은 하나의 실재를 향한 서로 다른 길이라는 식의 주장은 오늘날 더 이상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신 중심적 종교다원주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의 길을 따르면 기독교의 정상에 오르고, 불교의 길을 따르면 불교의 정상에 오를 뿐, 하나의 실재라는 것은 없습니다.

신학자 장왕식을 이것을‘어설픈 종교다원주의’라고 부릅니다.

절대주의의 옹벽을 허무는 다원주의적인 경향성을 수용하려는 시도는 좋았는데,

이것이 오히려 참된 신앙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여전히 어설프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20세기의 지적 경향성인 상대주의를 신앙에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상대주의의 함정에 빠지지 않는 기독교신앙의 특이성”을 꼭 붙잡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신앙의 특이성―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예수운동

 

기독교신앙의 특이성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제가 오늘 선택한 본문은 여러분들께서 이미 잘 아시는 ‘주의 기도’와 ‘삭개오의 회심’에 관한 것입니. 본문선택에서 이미 설교의 결론을 눈치 채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기독교신앙의 특이성에 관한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가 선택한 본문은 천국과 지옥, 동정녀의 탄생, 성육신의 교리, 보혈과 속죄, 죄인과 의인에 관한 구절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비록 이러한 교리적인 장치들이 전통적 기독교신앙의 내용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나 기독교의 특이성으로 내세울만한 것은 되지 못한다는 판단

때문입니다.

전통으로서 존중은 해야 하고, 신앙생활의 유익을 위해 활용할 수는 있겠지만,

이것으로 기독교신앙의 특이성을 주장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한 것들입니다.

 

이러한 교리적 특징들은 소위 ‘비교종교학적’시각에서 볼 때 그 맥락과 상황은 다를지언정 타종교전통 안에서도 대체로 발견되고 있는 것들입니다.

여기서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오늘날 형성된 기독교의 교리들은 하나같이

타종교, 타문화와의 만남을 통해 복음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것들이기 때문에 결코 본질적이라 할 수 없고, 언제나 변화하는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교회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교리화의 과정에 ‘권력’이 깊숙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리화의 전 과정을 통해 형성된 개념을 기독교신앙의 특이성으로

내세우기에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그렇다면 특이성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기독교신앙의 특이성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예수운동’에 있습니다.

 

아버지의 나라는 저 멀리 이상향(이데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루어져야 한다는 신념이 이 특이서의 밑절미를 이루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예수의 활동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 나라의 꿈과 그 지향적 운동이 바로 기독교신앙의 특이성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특이성에 관한 이같은 이해는 무엇보다 선교신학의 전환의 계기를 마련합니다.

이제 선교의 목표는 교회로의 개종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로의 초대가 됩니다.

물론 하느님 나라로의 초대는 자발적 개종까지 거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발적 개종자가 늘어난다면 이는 환영할 일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예수운동에 있어서 개종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어떠한 특정 종교로의 개종을 목표로 선교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시는 것을 선교사명으로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종교다원주의 이후의 선교가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를 삶 가운데 이루어내고 이를 전파하는 일에 초점이 놓여야 하는 까닭입니다.  

 

기독교신학이 2000년 동안 성공적으로 수행해 온 것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예수운동’이라는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변혁을 향한 열망을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치환해 온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루고자 하신 예수님의 삶의 신앙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의해, 그리고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의 신학적 종합을 통해,

그리고 근대 독일철학의 관념론을 통해 오늘에 기독교신학의 견고한 틀을 갖추게 되었는데, 그러는 동안 하나님 나라를 향한 예수운동의 역동성을 상실되고 말았습니다.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금과옥조로 여기는 교리, 곧 형이상학으로 아름답게 채색된 기독교신앙의 교리를 전파하는 것이 선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향한 예수의 목소리를 전하는 것이 선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통찰은 자유주의신학만이 아니라, 보수적인 신학자들도 주목하고 있는 주제입니다.

비록 역사적 예수연구의 시각에서가 아니라, 전통적 그리스도론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측면이 있기는 하나, 하나님의 나라를 기독교신앙의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데 있어서는 주제의 일치를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때문에 종교다원주의 이후 선교의 문제를 나누는 이 시간에 저는 그동안 무수한

비판에 직면하여 해체되고 와해된 개종주의적 선교를 넘어 이제 기독교선교가 ‘

 

하나님 나라를 향한 예수운동’에 초점을 두고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삭개오의 회심—‘앎’에서 ‘삶’으로

 

제가 드리는 질문은 “하나님 나라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이루어집니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는 무엇입니까?”하고 묻는 것과는 다릅니다.

“무엇인가?”하는 물음은 개념을 묻는 것이고,

이에 개념으로밖에는 답할 수 없는 물음입니다.

그렇기에 대답은 언제나 충분치 않습니다.

가령, “사랑은 무엇이냐?” 하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수천수만 가지가 되겠지만,

언제나 충분하지 않을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반면 사랑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라는 물음을 만나 더욱 생생한 체험으로 우리에게 각인됩니다.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도 우리는 먼저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입니까?”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 이루어집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서 이루어집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하는 것으로 우리의 질문을 변경하고,

이에 따라 신앙생활을 의식과 개념 중심에서 삶의 자리로 옮겨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삭개오의 회심이야기를 선택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 인식중심의 사고로부터 삶의 신앙으로 전환한 인물의 모델로 삭개오를 소개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려고(19:4) 뽕나무에 올라갑니다.

여기서 ‘보려고’하는 구절에 사용된 헬라어의 원형은 ‘에이도(eijdw)'’인데,

이것은 단순히 시각적으로 본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다, 깨닫는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영어로는 ‘to see’ 로 번역을 합니다. I see”하고 말하는 것이 생활 속에서 본다는 뜻이 아니라, 이해한다, 상황을 인식한다는 뜻으로 사용되듯이, 서양적 사고에서

‘시각’은 언제나 ‘인식’과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철학적인 의미에서 시각중심적 사고는 인식론중심의 사고, 개념과 언어 중심의 사고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삭개오가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려고(3)” 뽕나무에 올라갔다는 것은,

말하자면 개념적인 호기심에서, 인식론적인 호기심에서 예수님을 한 번 보고자

나무에 올라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삭개오는 예수를 지적인 호기심에서 한번 슬쩍 보고 내려오려고 한 것이죠.

 

이런 마음을 아셨는지 모르셨는지,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예수님은 시각 중심의 사고, ‘본다’는 의식에 사로잡힌 채 개념적 호기심으로

뽕나무에 오른 삭개오에게 어서 뽕나무에서 내려오라고, 그 개념의 탑에서 내려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오늘 내가 네 집에 묵어야 하겠다”하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말에 ‘묵어야 하겠다’고 번역했지만,

원어에는 ‘거주하다’, ‘계속해서 지낸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잠깐 머물다가 떠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곳에 거주하면서 그와

함께 삶을 나누어야하겠다는 예수님의 초청의 말씀이 바로 삭개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수군거리면서 말합니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7절까지 이어지던 본문은 8절에서 갑자기 단절과 도약에 이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에 집에 들어가셔서 지내시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성서기자는 전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삭개오의 집에 들어가신 이후 삭개오에게 변화가 일어난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로마의 식민체제 아래에서 세관장으로, 그리고 부자로서 지내오며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왔던 삭개오는 무슨 이유에서 인지 예수님에게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고, 또 내가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다”고 고백합니다.

 

본문의 하이라이트는 그 다음에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예수님은 지금 소유의 절반을 나눠주고 빼앗을 것을 네 배로 갚아주겠다는 삭개오의 결단을 ‘구원’의 문제와 관련지어 말씀하고 계십니다.

재산을 내 놓았으면 잘했다고 칭찬하는 것이 마땅할 터,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는 말씀을 하신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구원이란 이러한 변화의 체험 가운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시기 위해서입니. 구원이라는 변화의 체험과 이 체험으로 인한 삶에 있는 것이지, 무슨 개념을 받아들이고 말고 하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삭개오는 이로써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 나라에 속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바로 뽕나무에 오른 삭개오는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삭개오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구원의 의미를 여전히 ‘개념’을 중심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게 됩니다.

지성인들은 이러한 성찰에서 자유롭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구원의 행위,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루는 일에 참여하지는 않으면서, 상황을 잘 파악할 수 있는 인식의 탑(뽕나무)에 올라 그 ‘의미’를 묻는 일에 익숙한 것이 지성인들의 성향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 삭개오를 부르신 예수님의 목소리에 담겨 있는 뜻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구원은 언제, 어디에,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그것은 삭개오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를 모셔 들일 때(6)”이미 시작되었고, 예수님께서 “죄인의 집”(7)이라는 장소에서 일으키신 사건이며, 삭개오가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강제로 빼앗은 것은 네 배로 갚아주겠다”는 구체적인 방법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 어떻게’라는 삶의 구체적인 무늬와 얽혀 마침내 우리 삶 가운데 드러나게 되는 ‘밭에 숨겨둔 보화’와도 같은 것입니다.  

 

맺는 말

 

종교다원주의 이후의 선교라는 주제의 말씀으로부터 기독교신앙의 특이성을

‘하나님 나라를 향한 예수운동’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웃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려는 운동이야말로 개종주의적 선교의 종말 이후 선교의 새로운 방향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웃종교인을 기독교로 개종하려는 숨은 의도 없이, 우리의 ‘하나님 나라를 향한

예수운동’이 그들과 연대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하겠습니다.

참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선 우리가 그 운동의 길에 나서야 하고,

또 이웃 가운데에서도 그런 사람들을 만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만남이 유익은 아니듯, 모든 종교간 만남과 연대가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금관의 예수는 황금부처를 만나기 마련이고,

나무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나무로 만든 부처를 만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토착화신학과 종교다원주의 신학에 대해 열린 태도를 지니고 있는

0000교회의 선교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운동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종교다원주의 신학이 빠지기 쉬운 오류인 ‘선교무용론’과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기독교에 대한 현상적 비판을 넘어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루는 참된 선교의 길에 나서야 할 때입니다.

 

선교는 교회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라, 교회의 존재이유이며

사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선교하지 않는 교회는 이미 교회로서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선교가 교회의 인원을 늘리는 일에만 혈안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성장이 느리더라도, 그리고 효율성을 기대하기 어렵다하더라도, 이 길이 옳은 길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심지를 굳히며 그 길로 계속 걸어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제가 믿기로, 0000교회는 창립정신에서부터 성장주의와 물량주의를 포기하고,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공동체가 되기를 바라면서 출발했다는 점에서 옳은 길에

들어 선 교회라고 믿습니다.

단점은 개선하고, 어려운 일은 함께 극복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증언하고 선포하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충실히 감당하는 귀한 교회로 계속 성장한다면 이에 더 큰 보람과 기쁨이 없겠습니다.

모쪼록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당신의 귀한 일을 위해 교회로 불러주신 하느님의 뜻을 새기며, 기쁨과 보람 가운데 우리의 삶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종교다원주의 이후의 선교(3)

본문: 1:16-17, 고전 1:17-25.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우 여러분들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올해에도 어김없이 장마철이 돌아왔습니다.

장마철마다 드는 생각은 ‘무엇이든 지나치면 감사한 마음을 잃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생명이 자라기 위해서는 비가 내려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꼭 필요한 때 적당히 내리는 비를 단비라고 한다죠.

그러나 요즘같이 눅진거리는 장마철에 비를 맞으며 단비라는 생각을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연의 이치에서 볼 때 장마철이 꼭 필요한 때인지는 몰라도,

오늘 당장 느끼기에는 너무 과하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종교다원주의 이후의 선교’라는 다소 거창한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느끼는 기독교에 대한 인상을 비에 비유한다면 ‘단비’라기보다는 눅진한 ‘장맛비’와 같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거리에 넘치는 붉은 네온사인 십자가가 서울의 풍경으로 자리 잡은 지 이미 오래입니다.

저 십자가들을 보면서 우리시대 제도적 종교로서의 기독교가 ‘꼭 필요한 때 적당히 내리는 단비’라는 생각을 갖는 이들의 숫자가 갈수록 적어지고 있습니다.

한국기독교는 한국의 긴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지난 한 세기 반에 걸쳐 내린,

아니 산업화 시대라는 역사상 매우 짧은 시기에 마치 ‘집중호우’와 같이 내린 장맛비에 다름 아닙니다.

붉은 네온사인 십자가는 그런 장맛비가 이룬 홍수의 풍경이겠습니다.

오늘날은 교회의 단기급성장이라는 집중호우의 끝자락에 있는 시대이기에 사람들이 오랜 장마 끝에 느끼는 감정과 비슷한 감정을 기독교에 대해 느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이 고백은 오늘 한국에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얼마만큼

공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질문해 봅니다.

여러분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십니까, 아니면 자랑스러워하십니까?

 

저는 가까운 지인들로부터 이제 목사가 되었으니 기독교에 대해 좀 자부심을

가져야하지 않겠냐는 진심어린 충고를 듣곤 합니다.

아울러 목사라면서 복음을 부끄러워해서야 되나, 하는 질책도 듣곤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고 있는가?

‘내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분이 몸소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이상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는 이 복음을 담아내고 있는 동시대의 그릇으로서의 ‘교회’, 그리고 복음을 담고 살아가고 있다는 저를 포함한 동시대 ‘기독교인’ 일반에 대한 부끄러움은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는 않지만, 한국교회의 일원임은 부끄러워합니다.

 

이는 후기산업사회 이후 시대에 속한 한국의 기독교인들, 참된 복음적 가치를 추구하는 기독교인들이 어느 정도 공유할 수 있는 고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복음적 가치에 대한 신념과 자부심 그 자체가 없다면야 다른 문제가 되겠지만,

적어도 복음서에 드러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깊이 공감하며 교회생활을 통해 이를 추구하기를 원하는 이들이 좌절을 경험한다면 이는 복음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복음을 충실히 살아내지 못하는 사람의 문제, 그리고 교회의 문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하여, 오늘은 삼주에 걸친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종교)다원주의의 도전을 통해 보다 충실한 신앙생활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할지에 대해 잠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세례가 아닌 복음을 전하라

 

고린도전서 117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세례는 복음의 특정한 문화적 형식을 의미합니다.

세례를 받는/준다는 것은 그 행위를 통해 공동체의 일원이 됨을 의미하고, 공동체의 문화적 가치와 의미를 공유하며 살아내겠다는 다짐의 형식적 표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단순히 문화를 전달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그것이 뿌리내린 토양에서 자라면서 그 토양에 알맞은 열매를 맺습니다.

한국의 토착화신학은 이점을 일찍이 포착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씨앗으로, 문화를 토양으로 삼아 복음의 본질은 변하지 않으며 다만 그 복음의 씨앗이 심겨지는 토양이 달라질 뿐임을 주장했던 것이죠.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주라고 선교사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선교 역시 “세례를 주는 행위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일”이라 단순한 사실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특정한 지역문화의 전파를 복음의 전파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오늘 다른 본문에 의하면 복음은 ‘십자가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할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 ‘십자가의 말씀’이란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에게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는 실패의 표징이요, 연약함의 표징이요, 그러므로 수치의 표징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힘껏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로의 회개

 

지난 두 번에 걸쳐 저는 종교다원주의의 문제를 다루며,

종교다원주의 이후의 선교는 기독교로의 특이성에 더욱 주목해야 하는바,

이는 교리적인 차원의 전파가 아닌 하나님 나라를 향한 예수운동에 그 초점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결론적으로 지난 시간에 나눈 말씀에 이어 21세기 종교다원주의 이후의 선교는 “교회로의 개종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로의 회개”를 그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씀을 드리자면 ‘하나님 나라로의 회개’라는 선교이해는 ‘교회로의 개종’을 거부하는 개념이 아니라, 이를 포괄하는 보다 큰 범주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가 구원의 방주라 함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역사적 주장 그 자체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가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 나라로의 회개’를 선포하기 위한 전략적 거점, 즉 전초기지임을 드러내는 데 있습니. 한 마디로, 교회의 존재이유는 선교에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이를 통해 세상에 속한 이들의 가치관의 전환을 일으키고, 현세적 삶을 영원에

 

비추어 보다 가치 있는 삶이 되도록 돕는 것이 바로 선교의 목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회를 몇 개 세웠느냐, 세례를 통해 몇 명의 개종자를 만들어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울의 말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선교역사가인 앤드류 월스Andrew F. Walls에 따르면 기독교는 대체로 여섯 단계를 걸치며 발전해 왔다고 합니다.

철저히 서구중심적 기독교역사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기는 하지만 귀담아 들을 부분이 있어 잠시 소개드립니다.

첫 번째는 유대시대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전적으로 유대교적인 전통으로부터 출현하였습니다.

초기 유대기독교인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자신들의 종교인 유대교를 버리고 다른 종교로 개종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만큼

유대교적 정체성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로마 시대입니다.

그리스의 형이상학적 체계와 로마의 제도가 기독교의 근간을 이룬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가 소위 기독교의 정통교리orthodoxy가 형성되고 이를 토대로 예수의 가르침에 근거한 교회의 법제화와 효율적인 조직화가 이루어졌습니다.

 

세 번째 단계는 이민족 시대입니다.

서로마제국이 멸망함과 동시에  아랍인들이 세계적인 세력으로 부상하여 동유럽을 점령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로마 기독교 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네 번째 단계는 서유럽시대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로마 시대와 북방 이민족 문화권을 거치면서 서유럽 및 중부유럽에서 잘 짜인 체계로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학’ 그 자체와 동일시하고 있는 ‘서구신학’이 그 원형적 체계를

갖춘 시기입니다.

특히 ‘기독교 신앙은 개인적인 결정이며 개인의 실천의 문제’라는 의식이 서유럽시대를 거치며 서구 기독교의 한 특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다섯 번째는 유럽의 팽창 및 유럽 내 기독교의 쇠퇴 시대입니다.

이 기간 동안 기독교는 유럽의 경계 너머에 있는 수많은 민족과 나라로 이식됩니. 유럽의 팽창에 따른 비유럽세계에 대한 식민주의적 지배는 식민주의 정책에 기반 한 선교를 통해 유럽의 패권을 전달하는 역할을 합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는 타 문화 전달의 시대, 곧 세계기독교World Christianity의 시대입니다.

오늘날은 더 이상 ‘기독교 문화’ 혹은 ‘기독교 문명’과 같은 동일한 정체성이 존재할 수 없는 시대입니다.

기독교는 하나의 단일한 문화적 정체성으로 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파된 곳에 이르러 해석학적인 변형을 이루어 그 토양에 알맞은 것으로

성장하고 열매 맺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세계기독교의 시대, 복음의 토착화의 시대입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다양한 역사적 발전과정을 거치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어느 특정한 시기의 기독교가 기독교 전체를 대변할 수 없습니다.

앤드류 월스는 재미있는 비유를 드는데, 만약 외계인이 있어서 각각의 역사적 발전단계에 지속적으로 지구를 방문해 기독교인을 살펴본다면, 이들 사이에 공통점을 찾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기독교는 역사적 발전과정의 산물이며,

오늘도 변화의 과정 가운데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은 언제나 동시대의 문제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으며,

시대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응답함으로써만이 복음으로서의 가치와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다양한 종교적 전통이 한국인의 의식의 밑절미를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뒤늦게 전래된 기독교가 참으로 복음(福音)임을 알리기 위해서라도 종교다원주의의 문제는 심도 깊은 논의를 통해 기독교신학과 교회가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교회 확장사업’에서 ‘하나님 나라 확장사업’으로

 

이런 이유에서 종교다원주의 이후의 선교는 종교다원주의라는 동시대의 도전에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지난 주 성서와 문화에 기고하신 이계준 목사님의 글을 읽으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1992년 감리교의 종교재판 이후로 감리교뿐만 아니라 모든 신학대학과 일선목회현장에서는 ‘종교다원’이라는 말 자체가 금기시 되어왔습니다.

신학적인 견해의 차이도 한 원인이겠지만, 그보다 근본적으로는 변선환 교수가 종교다원주의 신학을 한다는 이유로, 그리고 그에 대한 기소장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교회확장사업에 장애물이 되는” 신학을 한다는 이유로 출교와 면직을 당했기 때문에 이에 동조하는 자들도 같은 취급을 당할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 이후로 한국에서의 선교는 오직 교회확장사업에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

하는 단일한 잣대로만 평가받는 것이 일반화되었습니다.

종교다원주의의 문제는 비단 타종교의 구원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다원화된 사회에서 기독교의 배타성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초점이 놓여 있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난 오늘날, 기독교의 배타성은 기독교 선교의 가장 큰 걸림돌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교회확장사업’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입니. 만약 종교다원주의에 관한 신학적 논의가 교회를 통해 일반신자들에게 잘 전달이 되어 그들이 열린마음으로 이웃종교와 문화를 대하게 되었다면, 그래서 오늘날처럼 기독교가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는 편견이 일반화되지 않았더라면 기독교 선교의 영역은 훨씬 더 넓어졌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오늘에도 달라진 것은 별로 없어 보입니다.

오늘날 스스로 기독교를 대표한다고 여기는 사람들, 곧 자신을 지도자라 칭하는

교계 지도자들의 위선적 의식과 신학을 제도적 테두리 속에 안주시키려는 권력지향적 신학자들의 탐욕, 그리고 티브이부흥사들의 그 부박한 세속성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우리가 딛고 서 있는 삶의 현실에서 기독교신앙의 참됨을 구현하는 구도적인 목회자와 신학자, 그리고 평신도의 역할이 더욱 절실합니다.

 

000교회는 목사님과 창립 교우들의 열린 태도로 인해 일찍이 종교적 다원성에

열린 교회로 출발했습니다.

 ‘종교다원주의’를 단지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닌 선교적인 측면에서 선용하기 위해 설교시간에 주제로 나눌 수 있는 소수의 교회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점에서 저는 000교회가 더욱 선교에 매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배타성의 옹벽이 철거된 열린 신앙, 타종교와 그 가르침에 대해 유연한 사고를 할 수 있는 기독교인, 그러면서도 복음적 가치를 소중히 여겨 이에 충실한 신앙생활을 해 나가는 교회와 성도들이 이 시대에 꼭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

 

폴 니터Paul F. Knitter는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truly)에는 오직(only)이 필요없다.” 우리가 ‘참된’ 기독교인이 되는 데 있어서는 ‘오직’ 기독교만이 참된 종교라는 인식을 갖지 않아도 됩니다.

‘오직’이라는 인식은 오히려 ‘참된’ 사랑의 지평을 축소시킬 뿐입니다.

자녀사랑의 경우에도 우리의 자녀들을 참되게 사랑하려는 마음이 지나쳐,

오직 우리 애만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 아이의 인격형성과 성숙에 걸림돌이 되는 것처럼, 참된 기독교이 되기 위해서는 오히려 ‘오직’이라는 환상을 벗어버리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이 니터의 견해입니다.

 

종교다원주의 이후의 선교, 그리고 000교회의 선교는 ‘오직’기독교인이 되는 것

아니라, ‘참된’기독교인이 되는 일에 더욱 매진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초점은 충실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그분이 몸소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꿈을 이웃과 더불어 이 세계 속에서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교입니다.

그것이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라는 바울의 고백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길이라 믿습니다.

 

맺는 말

 

기독교인임을 자랑스러워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랑스럽기는커녕, “내가 교회 안에 기독교인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순전히 인내심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느끼는 이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성을 종교적 경건의 강요와 교조적 가르침으로 억누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열린 태도는 비록 ‘교회 확장사업’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지 몰라도,

‘하나님 나라 확장사업’에는 도움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바울의 말처럼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확장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를 전파하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사실을 되새기며 앞으로 우리의 신앙인으로서의 소명이 하나님나라 선교에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며, 그 일에 동참함으로 함께 기쁨과 보람을 누리는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드립니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사랑하는 000교회 성도 여러분들과 한 주간도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