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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트 신조 : 둘째 교리 –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것을 통한 인간의 구속

하나님아들 2019. 9. 17. 23:21

도르트 신조 둘째 교리 –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것을 통한 인간의 구속



제 2조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만족

그렇지만 우리가 스스로 그 만족을 이룰 수 없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해방시킬 수도 없기 때문에하나님께서는 독생하신 아드님을 그분의 무한한 자비하심 가운데 우리에게 보증으로 주셨고독생자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또한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여기심을 받아 십자가에서 저주를 당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공의를 만족시키셨습니다.


 

만족을 위한 보증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둘째 교리 제 1조에서 배우게 된 사실은 우리의 죄가 가진 무게가 매우 무겁다는 것이었습니다둘째 교리 1조는 우리의 죄를 이런 방식으로 정의했습니다그분의 무한한 엄위를 거슬러 지은 우리의 죄들즉 우리의 죄는 그분의 무한한 엄위를 거슬러 지은” 것입니다.

 

여기 무한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은 언제나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무한에 대한 감각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인생은 본질상 유한한 존재라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상상하더라도 유한의 입장에서의 상상일 뿐 진정한 무한은 어떤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엄위에 대해 생각하더라도우리가 생각하는 엄위는 언제나 유한한’ 엄위일 수밖에 없습니다하지만 신조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무한한 엄위를 생각하라고 합니다그리고 우리의 죄는 그 하나님의 무한하신 엄위를 거슬러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따라서 이 죄의 무게를 생각하자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죄라는 것입니다아마 우리가 어떤 종류의 커다란 죄악을 상상하더라도, “하나님의 무한한 엄위를 거슬러 지은 죄의 무게가 어떤 것인지를 진정으로’ 깨달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우리는 그저 상상 정도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둘째 교리의 두 번째 조항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합니다하나님의 무한하심을 범한 유한한 존재인 우리들이 이에 대해서 도대체 무엇으로 맞설 수가 있겠는가?”라는 것이지요말하자면 둘째 교리의 주제인 속죄’, 즉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에 대한 가르침은 유한한 존재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방식으로 저질러 버린 이 커다란 해악에 대하여우리가 무슨 방식으로 회복할 수가 있겠는가에 대한 가르침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첫째불가능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예상 외로 매우 간단합니다불가능이지요갚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2조의 첫 부분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스스로 그 만족을 이룰 수 없고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해방시킬 수도 없기 때문에......”

 

둘째 교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어떻게 속죄를 이루셨는가를 말하고 있는데, “왜 그리스도의 속죄가 필요한가?”, “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는가라는 이 중요한 질문에서가장 기초가 되는 사실은 바로 이것입니다바로 불가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엄위를 거슬러 죄를 지었습니다하지만 우리는 유한하고따라서 무한하신 하나님을 촉범한 죄를 유한한 존재자로서 도무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그래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등장하는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불가능도무지 우리로서는 해결할 수가 없는 불가능그리스도의 속죄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는 1조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어야 한다라는 문장을 보았습니다.

여기 만족이라는 단어는영어의 satisfaction을 번역한 것입니다하나님의 공의가 요구하는 선하나님의 공의가 요구하는 기준에, ‘만족된다, ‘충족된다그 기준에 부합한다는 뜻으로 여기 satisfaction, 곧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에 만족된다......이런 단어를 썼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우리가 영어로 satisfaction을 검색해 보면이 단어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공의의 만족” 이런 방식으로 사용되지만다른 한편으로 이 단어가 다른 쪽에서 또 유명한 신학적인 의미로 사용이 된다는 것인데그것은 바로 보속입니다보속이 영어로 satisfaction입니다.

보속이 무엇입니까보속이란 지은 죄에 대한 죄책을 용서받기 위하여 사제가 명하는 여러 방식의 속죄 제도입니다일을 시키기도 하고벌을 주기도 하고돈을 내라고 하기도 하고......자기가 지은 죄의 가격에 따라서 그 죄가 사함 받기 위해 행하는 여러 종류의 속죄 행위인 것입니다이것이 그 다음 단계로 가게 되면 몸에 채찍질을 하거나고행을 하면서육체적으로 자기를 괴롭게 하는 일로 죄를 경감받게 됩니다우리가 잘 아는 보속의 최종 형태보속의 완성적인 형태가 바로 루터 당시의 면죄부였습니다.

 

우리가 이런 시스템에서 발견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중세라는 커다란 시스템에서는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이런 여러 가지 사람의 행위들을 통하여 자신의 죄가 사함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양상이 모두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말하자면죄 사함이라는 것이 나의 어떤 행동들을 통해서’ 가능하다는즉 죄에 내려지는 죄책과 벌들이 나의 어떤 고통스런 일들이나 재산의 감소를 통해서 감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는바로 이런 문제입니다.

 

하지만 여러분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내가 채찍으로 내 몸을 때린다고 해서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노여움이 어떤 식으로 줄어들 수 있습니까내가 고통을 받는 것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흡족하게 합니까사실 냉정하고 침착하게만 생각해 보면 내가 받는 고통과 하나님의 만족은 아무런 연결선이 없다는 것을 곧 발견하게 됩니다.

돈 역시 마찬가지노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하나님은 돈이 필요하지 않으시고 우주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그런데 내가 하나님께 돈을 드린다고 해서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노여움이 어떤 식으로 줄어들 수 있겠습니까중세 때는 이 보속의 절정인 면죄부 파는 일을 통해서 교황청에 금이 산처럼 쌓였지만루터가 95개조에서 지적하지 않습니까정말 교황이 면죄부 같은 것으로 죄를 사할 능력이 있다면왜 그것을 돈을 받고 파는가교황이 일방적으로 죄사함을 주면 되지 않는가또 정말 돈을 주고 그것을 사야 죄가 사해진다면 왜 교황청이 자신들이 가진 돈으로 그 면죄부들을 모조리 사서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지 않는가왜 오히려 백성들에게 그것을 사게 만드는가?

오늘날 헌금헌금 노래를 부르는 목사들도 하나님이 정말 돈이 필요하십니까?”라고 질문하면 대답할 수도 없으면서 그렇게 하고 있지만사실 이런 것들은 결코 하나님과는’ 관계가 없습니다하나님은 돈을 받고 노여움을 푸시는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노동도 마찬가지지요내가 무슨 종류의 섬김과 봉사와 일을 한다고 해서어떻게 그것이 내 죄에 대한 값을 치러줄 수가 있습니까절대로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보속이라는 말이 satisfaction의 또 다른 번역이라고 했지요? ‘만족’, 하나님이 이런 내 행동을 받으면 그분의 공의가 만족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과연 내가 일을 하거나고통을 당하거나돈을 바치면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될까요과연 그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불가능한 것입니다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그것이 우리의 죄에 대한 죄책을 없앨 수가 없습니다. 죄를 물으시는 하나님그 무한한 엄위를 거슬러 저지른 우리의 죄를유한한 우리 인간이 무슨 짓을 하든 간에어떤 수로도 그 죄책을 없앨 수가 없는 것입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안에서 인류는 언제나 죄의 해결을 이런 식으로 궁리해 왔습니다불교나 도교 같은 다른 종교에서도 물론이거니와사람들의 일반 도덕률에서도 그렇습니다. “착한 일을 해서 악한 일을 갚자”......안 갚아집니다저지른 죄악 위에 다른 일을 해 본들 저지른 일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중세 천 년이 보속의 신학하나님 앞에서 네가 무언가 하나님께 드릴 만한 것을 드린다면 너는 그것으로 인해 네 죄에 대한 속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 모든 것이 헛되고 무익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조의 첫 부분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합니다우리가 스스로 그 만족, satisfaction을 이룰 수 없고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진노에서 해방시킬 수 없다.” 그렇습니다. “결단코 불가능입니다유한의 존재인 우리가 행하는 어떤 종류의 일도아무리 무언가를 많이 바치고많이 희생하고열심히 노력하더라도무한하신 하나님의 엄위를 거슬러 저지른 우리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불가능을 인정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분이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신앙 양상을 다루는 책에서 한국교회의 이런 부도덕성과 종교적 폐해들은 모두 그 양상의 문제가 아니라 결국 신학의 문제다라고 말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문제가 겉으로 보기에는 윤리적 실패처럼 보이나 사실 근본 원인은 다른 데 있다윤리적 실패의 이면에는 신학적 실패가 자리 잡고 있고신학적 실패의 이면에는 올바른 복음에 대한 이해와 체험이 결핍되어 있다.”

 

우리는 도르트 신조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한국교회의 아르미니안적 성향에 대해 많이 들었습니다한국교회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가 절대적입니다따라서 우리는 적어도 중세 천년처럼 구원이’ 행하는 일에 의해 좌우된다고는 가르치지 않습니다하지만 우리의 신앙생활의 면면을 보면실상은 우리가 방금 말한 중세적 업적주의’, 즉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들으실 것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많습니까?

단지 우리는 중세와는 다르게 교묘하게 꼬아서 생각할 뿐입니다중세는 직선적으로 내가 행하는 이 보속의 행위가 하나님을 만족시킨다라고 생각했습니다하지만 현금의 한국교회는 이것을 구원이나 보속과 직접 연관시키지는 않아도 언제나 이런 방식으로 사고합니다내가 헌금을 더 많이 하면”, “내가 봉사를 더 많이 하면”, “내가 정성을 더 많이 바치면 ...... 구원론은 예수 믿어야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면서도우리 신앙의 토대는 언제나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마르바 던이라는 한 여류 신학자는 예배에 관하여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삶을 헌신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조금이라도 더 사랑하시거나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더 큰 축복을 베풀지는 않으실 것입니다왜냐하면 그분은 이미’ 우리가 상상하거나 바랄 수 없을 만큼 우리를 무한히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많은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던은 우리의 예배의 성격을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예배에 참석해서 얻는 유익은 전혀 없다그러나 예배를 실리적 관점에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예배의 목적은 점수를 따거나 성공한 교회임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다우리가 예배하는 단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이다......그래서 이 글은 에배를 하나님께 사람들을 이끄는 수단으로 삼으려는 이 시대의 시도를 좌절시키기 위한 것이다물론 우리가 예배를 잘 드린다면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이끌릴 것이다그러나 이러한 호소가 예배의 초점이 된다면 그 예배에는 더 이상 하나님이 계시지 않을 것이다예배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는 완전한 시간 낭비가 아니라면 우상 숭배일 뿐이다.”

 

이 책에서 던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일들도 마찬가지로 평가합니다봉사가 되었건 섬김이 되었건그것이 하나님을 흡족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목적이 비뚤어진 것이라고 말입니다그건 언제나 받은 자로서 드리는 감사일 뿐이지우리가 드리는 것이 결코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님의 행동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될 수도 없고하나님 기쁨의 근원이 될 수도 없다는 것 말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점을 잘 아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의 첫째 주제는 불가능입니다우리 편에서는 죄에 대한 어떠한 보속도 할 수 없습니다우리 편에서는 하나님의 만족’, satisfaction을 위해서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습니다유한한 존재로서 무한의 영광을 촉범한 그 악을우리는 어떤 방법으로도 갚거나 해결할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한 이해깨달음그래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고 할 때제일 첫 단추가 무엇입니까바로 이것불가능을 깨닫는 것입니다개혁자들특별히 마틴 루터가 통렬히 깨달았던 것! “내가 무언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통해서 내 죄의 보속을 받으려는 모든 시도는허망하고 무익한 시도에 불과하다!” 이것을 바르게 아는 것이것이 여러분죄에 대해 올바르게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불가능즉 아무것도 하나님께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 필요한가?

 

그렇기 때문에 무엇이 필요한 것입니까신조의 때문에” 다음 부분을 보십시오.

 

“......(그 이유 때문에하나님께서는 독생하신 아드님을 그분의 무한한 자비하심 가운데 우리에게 보증으로 주셨고독생자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또한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여기심을 받아십자가에서 저주를 당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공의를 만족시키셨습니다.”

 

아멘!

이 문구에서 의도적으로 만족시키셨다라는 표현을 쓴 것에 유의하십시오우리가 앞에서 계속해서 보속’, 즉 만족에 대해서 배웠지요우리 편에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그런데 이 문구에서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통해 이 공의를 만족시키셨다고 말합니다우리가 살핀 내용의 정반대 내용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서 배우겠지만 3조와 4조의 제목도 보시기 바랍니다. 3조의 제목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무한한 가치입니다여기무한하다라는 말에 주의하십시오. 4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4조의 제목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무한한 가치가 있는 이유입니다앞에서 역시 무한에 대해서도 말했지요역시 이 제목들은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유한하기 때문에 무한하신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그런데 여기에서는 이제 하나님께서 방법을 내신 것을 말합니다. “무한하신 분을 무한히”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다불가능을 깨달았다면그 다음 질문그러면 어떻게”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무엇입니까바로 그리스도께서인 것입니다.

 

보증

이 방식을신조가 표현하고 있는 성경의 언어를 따라가보면서 생각해 봅시다신조는 이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할 수 없는 만족의 부분을 채우신 방식을 보증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해당 부분을 읽어봅시다.

 

하나님께서는 독생하신 아드님을 그분의 무한한 자비하심 가운데우리에게 보증으로 주셨고

 

그렇습니다하나님께서 택하신 죄책에 대한 해결책은 바로 독생하신 아드님을 우리의 보증으로 사용하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보증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증으로 사용하셨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이 보증이라는 말은 대표적으로 히브리서 7장 22절 말씀에서 사용된 것입니다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이 때 보증이라는 말헬라어 엥귀오스는 외경에서 사용되었을 때 법정 의무 이행에 대한 보증을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이 때 예수님께서 우리의 법정 의무 이행에 대한 보증이 되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성도들께서도 사회 생활에서 잘 아시는 대로우리나라에는 보증을 선다라는 제도가 있습니다보증을 선다는 것은 그 사람을 대신해서 자기가 빚을 갚겠다는 것이지요이것은 법정에서 효력을 갖습니다여기 헬라어 엥귀오스가 이것과 매우 비슷합니다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이 보증이라는 말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보증인은 우리를 대신하여 빚을 갚겠다고 서명하는 사람입니다그래서 은행은 우리가 빌린 돈을 약속된 시간에 갚지 못하는 경우에 우리의 보증인에게 그 돈을 지불하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다하나님 앞에서 보증인의 개념은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우리의 무능우리의 불가능에 대해 말했습니다그리고 신조는 성경의 개념을 빌어서 이제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을 말씀하고 있는데이 때 성경이 택한 방법하나님께서 택하신 방법은바로 보증인”, 즉 우리가 빚을 갚을 수 없으니우리를 대신해서 빚을 갚을 자를 세우시는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개념이 아닙니다우리는 방금 히브리서 7장 22절 말씀을 읽었습니다히브리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까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보증인즉 우리가 갚을 수 없는 한량없는 빚즉 유한한 우리가 무한하신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하여 저지른 그 커다란 죄에 대하여하나님이신 분께서 그 죄에 대한 대가를 갚아주시기로 정하셨다고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이 방식이 바로 보증인입니다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보증인이 되셨고그래서 우리는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이것을 우리가 오늘 본문으로 읽었던 고린도후서 말씀을 통해서 확인해 보도록 합시다고린도후서 5장 말씀인데요이것을 보기 위해서신조의 표현을 먼저 주목함이 좋겠습니다신조 2조에서 하나님께서 아드님을 우리에게 보증으로 주셨다” 할 때그것을 좀 더 설명하는바로 그 다음에 이어지는 표현이 무엇인지를 먼저 보고 고린도후서를 봅시다. 2조의 이어지는 내용은 이것입니다.

 

독생자께서는 우리를 위하여또한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여기심을 받아 십자가에서 저주를 당하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공의를 만족시키셨다.”

 

여기에서 두 번 반복해서 우리를 위하여또한 우리를 대신하여” 이렇게 전치사를 다르게 써서 두 번 반복한 이유를 고린도후서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아멘!

고린도후서 5장 14절과 15절에는짧은 문장 안에 계속해서 반복되는 전치사가 하나 있습니다. 14절에서 대신하여”, 그리고 15절에서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할 때의 대신하여”, 그리고 조금 뒤에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할 때 (원문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의미상) “위하여”, 그리고 그 다음에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할 때 다시 대신하여” ...... 고린도후서 5장 14절과 15절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묘사하면서 이 단어를 계속해서 반복하여 사용합니다이 말이 바로 대신하여” 라는 말인데(휘페르), 이 말은 대신하여라는 뜻도 되고 위하여라는 뜻도 됩니다.

이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면왜 신조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증이 되셔서 죽게 되시는 일을 말할 때 우리를 위하여또는 우리를 대신하여라고 썼는지를 읽을 수 있게 됩니다신조는 이 헬라어 휘페르의 의미를 잘 이해하고 표현한 것입니다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보증이 되셔서 죽게 되신 것은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이며이것은 달리 말하자면 우리를 대신하여” 하신 일인 것입니다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우리를 위하여 보증이 되심은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우리를 대신하여” 대신 죽으심을 당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린도후서 5장이 우리에게 전달해주려는 바가 무엇인지 깊이 묵상합시다.

고린도후서 5장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17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는 마치 여러 장으로 된 그림을 겹쳐서 한 장의 그림이 되는 것을 보여주듯이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겹쳐 그리고 있습니다여러분새로운 피조물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새 마음을 먹는다거나새롭게 각오를 가진다거나,혹은 옷을 새로 갈아입는 것으로 되지 않습니다. 17절 말씀은 14절과 15절을 반드시 그 배경으로 깔고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탄생하나님의 자녀로새로운 피조물로그래서 영원한 생명에 뿌리를 두고 있는참 삶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무엇에 그 기반을 두고 있습니까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그것도 참혹한 죄인하나님의 무한하신 엄위하심을 거스른 악랄한 죄인이었습니다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나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에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보증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모든 법정적 책임을 자신이 떠안겠다고 나서셨기 때문입니다. 14절과 15절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위하여와 대신하여의 문구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보증이 되셔서우리의 빚을 모조리 떠안으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이 교리를 설명할 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른 이의 위치에서 죽으셔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이들은 주장합니다인간의 법정에서조차 무죄한 사람이 죄 있는 자를 위하여 대신 벌을 받을 수 없는데하나님의 법정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이 목사님은 이어서 설명합니다. “그렇습니다그런 일은 하나님의 법정에서 일어날 수 없습니다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무죄하게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하나님은 무죄한 자를 결코 벌하지 않으십니다하나님은 오직 죄 있는 자만 벌하십니다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결코 무죄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교회와 자신의 백성의 죄책을 짊어지셨고그리하여 유죄한 자로서 법적으로 죽으신 것입니다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죄 없는 분으로 대하시지 않으셨습니다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당신의 백성의 죄책을 짊어진 죄인으로 대하셨습니다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백성과 법적으로 하나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가능이라는 첫째 주제에 이어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어떤 속죄의 방식을 제공하는가?”라는 질문인데이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증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이 때 보증은위하여와 대신하여가 합쳐진 것으로서그분은 우리가 갚을 수 없는 죄악을 친히 담당하셔서우리의 모든 죄악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시고 대신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받으심으로써 이 일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장면을 통해 다시 하나님의 의를 생각함으로 말씀을 맺읍시다.

우리가 보고 있는 고린도후서 5장의 마지막 절입니다. 2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멘!

satisfaction! 만족이 어디에서 오는가하나님의 의로우심의 만족은 어디에서 오는가하나님 그분께서 자신의 아들을 우리를 대신하여 벌하시는데서 옵니다이것이 우리의 대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