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르트 신조 : 둘째 교리 –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것을 통한 인간의 구속
제 4조 :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무한한 가치가 있는 이유
이 죽으심에 그렇게 큰 가치와 효력이 있는 이유는, 죽음에 자신을 내어 놓으신 그분이 단지 참되고 완전하게 거룩하신 사람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 곧 성부와 성령과 함께 똑같이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본질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속주는 바로 그러한 분이셔야 하였습니다.
이 죽으심에 그렇게 큰 가치와 효력이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우리의 죄들 때문에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했던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그분이 그 죽으심에서 모두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으심의 무한한 가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도르트 신조 둘째 교리의 3조와 4조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3조를 배우면서 “왜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무한한’ 가치가 있다”고 신조가 고백하고 있는지를 배웠습니다.
아르미니안들은, 개혁신앙의 선조들이 ‘제한속죄’를 가르치는 것을 ‘그리스도의 구속의 속죄의 효력이 제한된 것으로’ 곡해했습니다. 이것에 대해 우리 선조들은 지극히 온당하게, 그리스도의 속죄의 효력은 제한되지 않음을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능력은 참으로 완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주일에 히브리서 말씀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1)완전하시며, 다시 반복할 필요가 없는 2)단번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셨음을 말씀을 통해 들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우리의 구원은 ‘내가 얼마나 잘 믿느냐’ 같은 것에 달린 것이 아니고, ‘우리가 믿고 신뢰하는 이 복음이 참된 것이냐’에 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르미니안들의 입장에서는 구원이 언제나 ‘내가 얼마나 잘 믿느냐’에 달린 것이지만, 개혁 신앙을 가진 우리들은 ‘내 믿음’을 수호하려는 대신에 ‘내가 믿는 복음을’ 수호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언제나 ‘복음의 내용의 순수성’이 중요합니다.
‘믿는 내용은 어떻든 상관 없고 내가 얼마나 열심히 믿느냐가 중요하다’와 같은 그릇된 생각을 가진 분들이 꽤 있지만, 그것은 복음의 본질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내가 무엇을 얼마나 잘 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복음이 얼마나 참되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신실성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복음을 수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은 참으로 ‘무한한 가치’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분의 죽음은 정확하고 온전한 의미에서 ‘완전’한 속죄 제사였으며, 따라서 ‘반복될 필요가 없는, 영 단번의’ 제사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난 주일에 배운 것입니다.
제 4조가 다루고 있는 주제
4조는 3조와 연결하여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제목도 비슷하고 내용도 비슷합니다. 3조의 제목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무한한 가치”였는데, 4조의 제목은 “이 가치가 있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내용도 보시면, 3조의 내용을 기반으로 하여 설명을 시작합니다. 4조의 시작은 이것입니다. “이 죽으심에 그렇게 큰 가치와 효력이 있는 이유는”......즉 4조는 우리가 지난 주에 말한,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으심이 그렇게 큰 가치가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4조의 내용은 우리가 지난 주일 설교로 들었던 내용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4조의 강조점을 따라서 두 가지 방향으로 말씀을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4조의 내용을 잘 읽어보시면,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무한한 가치가 있는 이유를 두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 먼저 첫 부분에서 신조는 ‘그리스도 그분의 가치’에 대해서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무한한 가치가 있는 첫 번째 이유는, 죽으신 그분께서 무한한 가치를 가지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조금 풀어서 설명하자면 4조의 설명대로, “그분은 단지 사람이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독생자이셨기 때문”, 곧 “성부와 성령과 함께 똑같이 영원하시고 무한하신 본질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4조의 첫 부분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가치가 무한한 이유를 첫 번째로는 ‘죽으신 그분이 무한한 가치를 지닌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2) 그리고 그 다음 부분을 보시면 “또 다른 이유는” 이라고 하면서, ‘그분이 겪으신 일’을 말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무한한 가치가 있는 첫째 이유는 그분 자신의 어떠하심에서 오는 이유이고, 두 번째 이유는 그분이 행하신 일, 겪으신 일의 성격, 즉 그분이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모두 담당하시는 ‘일을 행하신 것’, 그것에 있다......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두 주제를 큰 카테고리로 해서 오늘 말씀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 주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의 무한한 가치”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 주제는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겪으신 진노와 고통의 무한한 가치”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가지신 무한한 가치
예수님께서 사람들 곁으로 오셨을 때, 아무도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에서, 예수님은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막2:9) 하시면서“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10절) 하셨는데, 당시의 모든 종교 지도자들은 죄를 사하는 일은 하나님 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과 동등하게 말했던 예수님은 단번에 신성 모독죄로 인식되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을 하시면서, 그것만 해도 종교 지도자들의 분노를 살 만 한데, 거기다 대 놓고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라고 말씀하시는 바람에, 불에다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시에 랍비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은 안식일에도 일하신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는 말은 “나도 하나님이다”라는 말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아들이다”, 나는 곧 하나님과 동등하다, 이런 의미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말씀 바로 다음에 보면,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했다”(18절)라고 하면서,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18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예수님께서 사람들 곁으로 오셨을 때 아무도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고 부활하신 후에, 교회의 공통적인 신앙고백이 된 말씀은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라고 말씀합니다. 요한일서 4장 15절 말씀은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교회가 형성되었을 때, 그리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이 교회들 안에서 가장 중요한 신앙고백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이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고백에서는 물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의 중요성이 매우 크지만,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신다는 사실에 좀 더 주의를 한 번 맞춰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은 조금 풀어서 설명하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구속을 담당하시는 일을 하실 때 그분이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이렇게만 말해도 그 의미가 충분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앞서 들은 성경 말씀에서도 그렇고, 교회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고백해오는 신앙고백의 내용도 그렇고, 교회는 항상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다”라고만 고백한 것이 아니라, 특별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렇게 고백해 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고백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도 물론 담겨 있지만, 조금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의 중요성이 함께 강조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라고만 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때 더욱 강조되는 바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말씀인 빌립보서 2장 말씀에 보면 그리스도에 대해 고백하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아들되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우리에게 매우 잘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리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아멘!
빌립보서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근본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동등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근본”이라는 말은 “아래에”라는 뜻의 ‘휘포’와 “다스리다, 시작하다”라는 뜻의 ‘아르코’가 결합된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그 출발에 있어서나 본질에 있어서, 즉 그분의 존재론적 측면에서는 반드시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본체에 있어서(헬. 모르페), 그 형상에 있어서는 반드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셔야 하시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습니다. 이 말을 조금 더 풀어서 설명을 하자면(김세윤 박사의 주해), “마땅히 손만 내밀면 취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이 때의 강조점은 마땅히 동일한 것을 가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그것을 갖지 않은 것에 초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6절에서 “하나님의 본체”라고 할 때 사용했던 단어와 똑같은 단어인 ‘모르페’를 7절에서 “종의 형체”라고 할 때에도 동일하게 사용함으로써 대비를 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본체”, “형체” 다르게 번역했지만, 둘은 같은 단어입니다. 즉“하나님의 본체”를 손을 뻗기만 해도 취할 수 있는 것이 마땅하고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종의 형체”를 소유했다(헬, 람바노, 우리 번역에 “가져”)......빌립보서는 그리스도의 정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아들’이시라는 것, 성부와 똑같이, 성령과 똑같이 하나님이신데, 그분을 특히 ‘아들되게’ 만드는 것, 그것은 무엇입니까? 성자도 성부와 똑같이 하나님이신데, 성부는 아버지이시고, 성자는 아들되시도록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시편 2편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너는 내 아들이다” 이렇게 말씀할 때의 성부의 위치와 성자의 위치는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의 위격 안에서 누구는 성부가 되고 누구는 성자가 되시는 것입니까?
성자가 성자 되게 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그것은 성부께서는 보내시는 위치에 있고, 성자께서는 그 보내심을 받는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성자의 성부에 대한 차이점은 ‘성부께 대한 전적인 순종’입니다.
성부와 성자는 동등합니다. 두 위격 사이에는 차이도 없고, 높낮이도 없고, 격이나 품위의 차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성부와 성자의 유일한 차이는 무엇입니까? 성부와 성자의 유일한 차이는, 한 분께서는 명령하시고, 다른 한 분께서는 그 명령을 ‘듣고’,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명령’이나 ‘순종’ 같은 것을 죄에 물들어 있는 이해력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는 우리로서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이 기이하고 놀라운 순종의 관계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시의 지도를 받아서 흐릿하게, 대략 정도만, 이 놀라운 신비를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성자께서는 자발적으로 순종하시고, 성부께서는 자발적으로 다스리십니다. 성부와 성자 간에는 순종도, 명령도, 그 어느 것도 우위가 없습니다. 성부께서 명령하시니 더 높으신 것도 아니고 성자께서 명령을 받으니 더 낮으신 것도 아닙니다. 오직, 이 둘, 곧 명령하시는 분과 명령을 받아 순종하시는 분이 둘 다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시자, 이 둘이 합하여 이루어져서 놀라운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삼위가 어우러져 교제하시는데, 이 때 성부 편에서 다른 위격을 향하여 가지신 품성은 인도하고, 지도하고, 대표하고, 다스리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자 편에서 이 성부를 향하여 가지신 품성은 듣고, 명령을 받고, 순종하고, 명령을 이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특별히 삼위 하나님의 관계 안에서 ‘아들 됨’이 가진 특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관계 안에서 ‘아들 됨’이라는 것은 단순히 ‘그분 역시 하나님이다’를 능가하는 무엇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죄에 물들어 있어서 힘과 능력, 부나 높은 지위 같은 것으로밖에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인생인 우리들에게는 언제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은 더 힘이 있고, 더 지위가 있고, 더 행동 능력이 있는 것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하나님의 지혜의 편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의 문제 해결 방법도 있는데, 그것은 ‘듣고’, ‘낮아지고’, ‘명령을 받고’,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도 이것이 가능하다는 방법입니다.
이해가 잘 안 되지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삼위 하나님이 보여주고 있는 능력의 실체입니다. 성부께서는 명령하심으로 구속을 이루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자 하나님께서는 그 명령을 들으심으로 구속을 이루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능동적이고 결정적인 편에서만 문제를 해결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들음을 통해서 구속을 이루시는 분도 계시다는 것입니다. 아주 미약하게나마 예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술주정뱅이 남편이 있다면 그 남편을 힘으로 제압하거나, 커다란 곤경에 빠뜨려서 강하게 그를 변화시키는 방법도 있지만, 그의 수발을 들어주고, 그의 비위를 맞춰주고, 아침에 해장국을 끓여주면서 그를 변화시키는 방법, 즉 수동형의 성취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들 되심’을 통해서 이루시는 구속은 그런 성격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성하신 방식에는 언제나 플러스나 강력만이 능력을 갖도록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세상에는 작고 미약하고, 낮고 약한 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도 있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부와 성자께서 그 안에 갖고 계시는 품성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부를 제압하는 방식으로 구속을 이루신 것이 아니라, “마땅히 손을 뻗어 취할 수도 있는 것을 갖지 않으시는 방식을 통하여” 구속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구속의 능력이 무한합니다.”라고 고백할 때,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은 그분이 가지신 순종의 성격, 구속의 역사를 이루시는 일에는 반드시 그분의 순종이 필요했고, 하나님의 구속은 바로 이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된 일이다......라는 사실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무한한 가치에 대해 생각할 때, 그분이 ‘아들이셨음’이 주는 깊은 함의를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순종과 복종, 낮아지심과 받아들이심, 명령을 하시는 입장이 아니라 받으시는 입장을 통해서 구속을 이루셨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 구속의 은택을 입은 우리들 역시, 구속의 그 면 또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은 한량 없는 죄 사함은 반드시 ‘이기고’, ‘승리하는’ 방식으로서가 아니라, 겸손하게 낮아지고 순종하는 면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덕목으로서 ‘겸손’을 갖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들 되심’으로서 성부께 순종하신 일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주어진 구속의 한 측면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교회는 오고 오는 모든 시대에 그리스도을 “하나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해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무한한 가치, ‘죽으심’, 즉 네거티브적인 측면, 수동적인 측면, 당하는 측면, 희생하는 측면......그것이 가진 무한한 가치를 생각합니다. 주님의 이런 수동적인 위치에서 이루신 구속의 능력이 우리의 구원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가치를 기억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며, 또 교회는 이런 그리스도의 들으심과 낮아지심과 순종의 자세를 생각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겪으심”이 보여주는 그리스도 죽으심의 무한한 가치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가치에 대한 두 번째 고백은, 제가 나름대로 요약하기는 “겪으심”입니다. 4조 뒷부분 “또 다른 이유는”이라고 설명되어 있는 부분을 한 마디로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그분께서는 “겪으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오늘 첫 번째 주제를 통해서 ‘아들 되심’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의미, 즉 명령하지 않고 명령받으며, 지휘하지 않고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구속을 위하여 어떤 역할을 했는지, 또 이것이 삼위 하나님의 관계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에서, 바로 이 점에 기초하여 그리스도께서 그 아들 되심으로 말미암아 성부 하나님의 구속의 뜻에 순종하시고 또 그것을 실행하실 때, 어떤 방식으로 그 순종을 이루셨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빌립보서에서 우리가 생각했던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마땅히 받으셔도 될 것을 받지 않으시는 것”을 통해서 아들 되심을 이루셨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일을 행하셨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무엇을’ 취하셨습니까? 근본 ‘하나님의 모르페’, 즉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신 분께서, ‘누구의 모르페’를 취하셨습니까? 네 ‘종의 형상’을 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 다음 말씀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그 다음입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여기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본체” 대신, “종의 본체”를 취하셨을 때, 그것을 행하신 방법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종의 본체를 취하신 방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기를 낮게 하셔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음”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순종의 방식을 취하신 것은 ‘매우 실제적인 것’, 곧 사람의 몸을 입는 일을 실제로 체현한 것......그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신학자는 이 부분을 이렇게 주석했습니다.
“신성의 존재가 인간과 같이 되어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으로 들어오심, 인간의 가난한 처지에 참여하심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신성의 충만함을 견지하면서 어떻게 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 속으로 들어왔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이 시의 의도가 아니다. 이 시는 다만 그리스도가 우리의 운명에 동참했다는 것, 그것을 위해 그가 스스로를 비우셨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부께 순종하셨을 때, 그것은 단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기쁘게 받은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음이 중요하다, 생각이 중요하다, 의지가 중요하다, 이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그것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 행동으로 나타난 것만 가지고는 그 사람의 진정성을 알 수 없다는 이야기는 많이 하지만, 어떤 사람의 행동이 그야말로 그 사람의 됨됨이의 표현이라는 것은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리스도의 순종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순종은 어떤 방식으로 ‘의미를 획득’하였습니까? 그것은 바로 친히 그분이 ‘이 땅에 들어오심’입니다. 방금 읽은 인용문의 말대로, “인간의 가난한 처지에 참여하심”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순종의 방식은 친히 그 일 속으로 자신을 들이미는 것, 그것이 비록 하나님의 권능의 자리를 포기하고 인생의 여러 가지 열악한 제약 조건 속으로 들어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순종을 이루시기 위하여 ‘현실 속으로’, ‘현실의 열악함 속으로’, 고통이 있다면 ‘그 고통의 실체 속으로’ 그렇게 들어오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오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무한한 가치가 있는 이유”를 두 가지로 살펴보겠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그 분 자신의 가치’입니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마땅히 취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순종을 선택하셨으며, 그 순종을 통해 ‘아들 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순종, 이 아들 되심은 마음만으로, 생각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똥통에 빠지는 일을 실제로 하지 않으면 이 일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인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들을 긍휼히 여기셨기 때문에 우리들과 같은 처지가 되는 것을 거절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무한한 가치가 있는 두 번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그분이 죽으심을 통해서” ...... 신조의 그 다음 표현이 무엇입니까? “모두 겪으셨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무한한 가치가 있는 이유는, 그분께서 이 순종을 위하여 이 고초를 “겪기로” 결정하시고, 또 실제로 “겪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으로 함께 읽은 히브리서 4장 15절 말씀은 우리에게 이 사실을 ‘체휼’이라는 단어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아멘!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분이시다!”,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여기 “한결같다”는 말은 직역하면 “우리와 똑같이 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우리와 똑같이 되어 시험 가운데 던져지셨다. 바로 그런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예전에 유치원에 다니는 어린 아이들에게 ‘사랑이 뭐냐’는 질문을 한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대답합니다.
“사랑이란, 엄마가 아빠에게 닭고기를 주실 때 그 중 제일 맛있는 부분을 골라 주시는 거예요”(일레인, 5세)
“사랑이란, 누가 나에게 상처주는 말을 하거나 날 아프게 해서 내가 너무나 화가 나도 그 사람에게 소리를 지르지 않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그러면 그 사람 기분이 나빠질테니까요”(사만다, 6세)
“사랑이란, 한 소녀가 향수를 바르고 또 한 소년이 애프터쉐이브를 바른 후에 만나서 서로의 향기를 맡는 거예요”(칼, 5세)
“사랑이란, 엄마가 아빠를 위해 커피를 끓인 후 아빠에게 드리기 전에 맛이 괜찮은지 한 모금 맛을 보는 거예요”(대니, 7세)
“사랑이란, 어떤 남자애에게 너의 셔츠가 이쁘다고 말했을 때 그가 그 셔츠를 매일 입고 오는 거예요”(노엘, 7세)
사람은 나이가 들어가면 ‘추상’과 ‘관념’이 발달합니다. 몸을 움직이는 대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일에 ‘마음을 먹으면’ 나는 사실은 그것을 원하거나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가면 매일 약속에 지각을 하면서도 “나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야”라고 생각하고, 끊임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으면서도 “나는 참 너그러운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며, 항상 말씀과 어긋나는 삶을 살면서도, “나는 하나님을 실제로는 매우 사랑하고 있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로, 저 아이들의 말처럼, 사랑이란 매우 구체적인 어떤 행동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께 그대로 적용되었습니다. 로마서 5장 8절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달되었다고 말합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아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자신의 죽으심’이라는 구체적인 일을 통하여 확증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무한한 가치는 그분의 “겪으심”에서 옵니다. 하나님은 저기 멀리 사닥다리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시면서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그냥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똑같은 것을 체휼하신 후에,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모든 죽으심의 고난을 감내하신 후에, 그 다음에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내가 너희를 사랑한단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무한한 가치는 한편으로 그분의 아들 되심에서,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을 실천으로 옮긴 것에 의해 나타났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의 순종을 배울 뿐 아니라, 교회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것을 통해서도 드러난다는 것을 배울 뿐 아니라,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험난한 삶의 현장의 자리에 우리의 발을 직접 담그는 것을 통해서 이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체휼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되심 후 모든 죄의 짐을 지시고 죽으신 것처럼 말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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