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르트 신조 : 둘째 교리 –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것을 통한 인간의 구속 제 1조 : 하나님의 공의가 요구하는 형벌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자비로우실 뿐 아니라 또한 지극히 의로우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분의 말씀에서 계시하신 것처럼, 이제 그분의 공의는 그분의 무한한 엄위를 거슬러 지은 우리의 죄들에 대해서, 이 세상 뿐 아니라 다음 세상에서도, 우리의 몸 뿐 아니라 영혼도, 반드시 형벌 받기를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지 않고서는 이러한 형벌들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제한 속죄 교리와 거기에서 죄의 함의
가끔 저는 무기에 대해 생각을 합니다. 과거에 무기는 사람을 매우 직접적으로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칼로 사람을 베면 피가 철철 흐르고, 칼질을 한 사람은 사람이 잘려나가는 질감을 자기 손에 그대로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무기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간접화’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처음에는 칼로 사람을 죽이는 방식이었다가, 나중에는 총으로 쏘는 것으로 바뀝니다. 총은 칼과 비교해 보면, 여전히 쏘아서 사람을 넘어뜨리는 것은 비슷해 보이지만, 총을 쏘는 사람은 화약이 터지면서 일어나는 총의 반동을 느낄 뿐, 총을 맞는 사람의 느낌이 자기에게 전해지지는 않습니다.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정도라고 해 봤자 시각적인 효과일 뿐입니다. 자기 총에 사람이 쓰러지는 것을 생각하면 끔찍할 뿐 죽는 사람의 고통이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기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점점 간접화됩니다.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가 탱크나 전투기, 미사일 같은 것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쩌면 탱크나 전투기를 타고 있는 사람은 집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탱크에서 포탄을 쏘거나 전투기에서 미사일을 쏘는 사람은 자기가 쏜 포탄이나 미사일에 맞아 죽는 사람이 아예 보이지도 않을지 모릅니다. 그저 디지털로 된 화면에 발사체가 어디로 날아가 떨어졌는지만 나타날 것입니다. 칼이나 총으로 사람을 죽이는 사람은 겨우 한 사람을 죽이는 데에도 직접적인 자극을 받지만, 탱크나 전투기에서 포나 미사일을 쏘는 사람은 수십 수백 명을 한꺼번에 죽일 수 있지만 자기가 직접 살인의 자극을 받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더 나아가 핵무기 같은 것은 어떻습니까? 핵무기는 단 한 발로 수백만명이 죽을 수 있지만, 실제 그것을 작동시키는 데에는 직접적인 자극은 전혀 없습니다. 그저 빨간색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마어마한 참상일 것입니다.
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그렇다 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종종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사과를 하나 따 먹었다고 해서 전 인류에게 저주를 쏟아 붓다니 그런 신이 제정신인가?” 맞습니다. 사과를 하나 따 먹었다고 해서 전 인류를 저주하는 신이 있다면, 그 신은 미친 신일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방금 했던 이야기를 이 문제에 그대로 적용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빨간 단추를 눌렀을 뿐이야! 그런데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는 거야?”
여러분!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저지른 죄를 혹시 ‘가벼운 죄’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하나님과의 작은 약속을 하나 어긴 것’ 정도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나는 빨간 단추를 눌렀을 뿐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입니다. 아담이 저지른 죄는 ‘빨간 단추를 눌렀다’는 것이 아닙니다. 단추 하나를 누르는 죄야, 커봤자 얼마나 크겠습니까? 사과를 하나 따먹은 것이 죄라면, 기껏해야 천원 정도를 쥐어주면 해결되는 문제인데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문제는 그 배후에 있습니다. 빨간 단추가 단순히 빨간 단추만이 아닌 것은, 그것과 연결된 시스템이 핵미사일을 쏘아 올린다는 데 있습니다. 아담의 죄가 단순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사과를 먹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행한 행위가 하나님 전체를 모욕하고 짓밟은 것이었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둘째 교리 1조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분의 무한한 엄위를 거슬러 지은 우리의 죄들”......“이 세상 뿐 아니라 다음 세상에서도, 우리의 몸 뿐 아니라 영혼도, 반드시 형벌 받기를 요구한다.”
오늘부터 제 1조부터 9조까지 이르는 둘째 교리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 교리 역시 첫째 교리와 마찬가지로 그 첫째 조항은 우리의 ‘죄’에 대한 것입니다. 둘째 교리의 전반적인 내용이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둘째 교리의 전망 안에서 죄에 대한 첫째 조항의 가르침의 내용이 무엇인지, 그것을 오늘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둘째 교리의 핵심
오늘부터 둘째 교리를 들어가기 때문에 이것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그 배경 아래에서 제 1조를 이해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둘째 교리는 제목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것을 통한 인간의 구속”이라고 되어 있는데, 보통 이것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는 “제한 속죄”라고 이야기합니다. 첫째 교리의 주제를 한 마디로 하자면 ‘선택과 유기’였다면, 둘째 교리의 주제를 한 마디로 하자면 ‘보편속죄인가 제한속죄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교리적 언어에 익숙하지 않으신 분들을 위해서 ‘보편속죄’와 ‘제한속죄’를 간단하게 설명드리자면 우리가 믿는 제한속죄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만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르미니안주의자들은 ‘보편속죄’, 즉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 즉 택함을 받은 사람이나 안 받은 사람이나 모두를 위해서 죽으셨다고 이해했습니다.
보편속죄와 제한속죄 1) 어떤 분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이 맞잖아?”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복음주의권에서는 흔하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때에는 예수님께서 불신자들을 위해서는 죽으시지 않았고, 오직 자기 백성들만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말하면 무언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홀대하신다는, 즉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말씀과는 배치가 되는 것처럼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겉으로 대강 보았을 때는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을 위해 죽으셨다”는 말이 더 큰 사랑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굉장히 위험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쉽게 이런 방식으로 생각해 봅시다. 그리스도께서 정말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도, 우리 삶을 통해서도, 주변에 결국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셨다는 주장은 커다란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속죄가 그런 사람들에게는 효력이 없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신 사람들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얻고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못 얻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별 생각 없이, 두루뭉술하게,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을 위해 죽으셨어!”라고 쉽게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2) 우리는 성경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세밀히 읽지 않을 때는, 그냥 두루뭉술하게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사랑하신다” 이렇게 말해야 할 것 같지만, 사실은 성경은 그 정반대의 것을 많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몇 구절만 생각해 봅시다.
요10:11,14-15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먼저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읽은 요한복음 10장에서 11절과 14-15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요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요10:14-15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의 말씀이 불특정 다수, 즉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아님은 이 말씀에서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목숨을 이야기하실 때, 즉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말씀하실 때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양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양들”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성경의 구도에서도 그렇고 이 본문에서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그렇고, 양들은 하나님의 언약 울타리 안에 들어 있는 자녀들입니다. 이 바깥에 양들이 아닌 이들이 많습니다. 특히 14절과 15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양을 말씀하실 때에는 “내가 내 양을 알고, 내 양도 나를 안다”는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자를 어떻게 아시는지와 결부지어 설명하셨습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의 관계와 같은 방식으로 묶여져 ‘서로를 아는’ 관계가 양과 주님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 하실 때 양은 항상 이런 관계성 안에 있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주님은 ‘불특정 다수를 위하여’ 죽으셨다고 결코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마1:21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말씀에서도 동일한 강조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21절 말씀입니다.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하시는 분이신지는, 이 말씀에서 명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실 때 ‘예수’라는 이름을 받으셨는데, 그 이름의 의미는 “구원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천사는 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해 설명하기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라고 대상을 국한하고, 사역의 성격을 국한하여 말씀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속죄 사역은 보편속죄를 옹호하는 이들의 생각, 복음주의자들의 두루뭉술한 생각처럼, 광범위하게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위하여 오셨고, 저희 죄를 위하여 오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막연하게 온 세상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생각은 좌초됩니다.
요17:9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직전, 요한복음 17장에서 소위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요한복음 17장 9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아멘! 이 말씀이 특히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부정’이 함께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적 기도를 하실 때 어떤 대상들은 ‘제외’시키셨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나의 비는 것은 세상을 위한 것은 아니다”라고 확정하셨습니다. 그 다음에 “오히려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우리가 하이델베르크를 배울 때에 우리의 위로의 근거로 ‘소유’에 대해 배운 적이 있습니다. 성경은 언약관계에 대해 말할 때, ‘자기 백성’, 즉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의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물론 온 세계를 사랑하시지만, 온 세계를 다 자신의 소유로 삼으시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베푸시는 구원의 사역은 자기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이 말씀이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역은 보편적이고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특정 사람들을 위하여 구속사역을 행하셨습니다. 이것은 성경 안에서 분명합니다.
3) 어떤 반론들에 대하여 그런데 이렇게 성경의 증거를 말씀하더라도, 여전히 세상 전체를 위한 구원을 포기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주장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아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많지 않아?” 앞서 본 대로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만을 위해서 죽으신 것처럼 말씀되는 부분이 많다 하더라도,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모두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는 부분도 많지 않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생각의 핵심적인 잘못은, 여기 나오는 “세상”이라는 말을 ‘자기가 읽고 싶은 대로’ 읽는다는 데 있습니다. 성경이 “세상”이라는 말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이, 오늘날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방식으로만 생각하여, “온 세계”라는 식으로만 생각하니까 이런 생각이 나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세상’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됩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1장 10절 같은 곳에는 ‘세상’이라는 말을 이렇게 사용했습니다.
요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며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한복음 1장의 이 말씀에서 세상은 명백하게 ‘하나님을 거스르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장의 문맥은 아들께서 세상에 오셨지만, 세상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때의 ‘세상’이란 명백하게 ‘하나님을 거역하고 거스르는 이들’이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하지만 동일한 ‘세상’이라는 말이 이렇게 사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같은 요한복음에서 6장 33절과 51절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요6: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요6:51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이 말씀에서 세상은 그리스도의 살을 먹어 생명을 얻게 되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불신 세계가 결코 그리스도의 살을 먹지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 앞서 요한복음 1장에서 말한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한다면 세상이란 여전히 그리스도를 거스르고 있어야 하는데,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그리스도 안으로 와서 그분의 살을 먹고 생명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때의 세상을 요한복음 1장의 세상과 똑같은 방식으로 볼 수 없습니다.
로마서 같은 곳에서는 세상이라는 말을 이렇게 쓰기도 합니다.
롬4:13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여기에서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세상의 후사”라고 불립니다. 우리는 교회가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가 결코 ‘세상’이라고 불릴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세상’이라는 말은 독특한 어법을 갖고 있어서 여기에서처럼 아브라함의 후손들, 곧 교회에도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종합적으로 성경이 ‘세상’이라는 말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사실 성경이 ‘세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나누어 이렇게 쓸 때도 있고 저렇게 쓸 때도 있다”라고 말하는 것은 세밀한 관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저는 성경이 그 대상에 있어서는 교회와 세상을 모두 포함하는 경우로 말할 때도 있고, 또 어떤 때는 교회는 제외한 하나님께 반역하는 이들만 세상이라 할 때도 있으며, 심지어 어떤 때는 교회가 되는 이들을 향해서 세상이라 할 때도 있다......즉 이렇게 대상에 있어서는 다양하게 말하지만, 그 용법에 있어서는 세상이라는 말이 항상 하나님 바깥에 있어서 하나님을 거스르는 이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 안으로 들어오게 된 이들, 혹은 구약 시대에는 열방, 이방에 속했다가 신약 시대가 되면서 하나님의 교회 안으로 포괄적으로 들어오게 된 이들......이라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이렇게 세상이 다양한 대상을 향하여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하게, “하나님이 온 세상을 사랑하셨어”라는 식으로 이야기해서는 성경의 의도를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세상에 속한 자들을 불러 자기의 백성을 삼으셨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실은 오히려 “하나님은 불신세계까지 포함한 모든 이들을 구원의 대상에 두시는 사랑으로 붙드신다”는 주장은 틀린 것임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느슨하게 하셨다 그리고 이제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서, ‘보편속죄’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를 조금 더 상세하게 이해해 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조금 전에 하나님께서는 온 세계, 즉 결국 믿지 않게 되는 모든 이들까지 포함하는 사람들을 위해 죽으신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사실은 아르미니안들 역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주장할 때에는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들의 주장은 조금 더 세밀합니다. 무언가 하면,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다 구원하셨다”라고 말하려 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대상이 ‘모든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조금 더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아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르미니안도 이것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르미니안은 여기에서 둘을‘구분’했습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속죄의 사역을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행하셨고”, 그 다음“그 속죄의 사역이 실제로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그 다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은 온 세상을 위하여 죽으신 것인데, 그것이 실제 ‘자기의 구원’이 되려면, 그 구원을 자기에게 적용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당연히......아르미니안들은 이 구원의 적용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가’ 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르미니안의 이러한 주장을 둘째 교리의 ‘오류들을 배격함’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함께 신조의 교리 부분 뒤편에 있는 ‘오류들을 배격함’ 3번과 4번을 보도록 합시다. 제가 오류 부분만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류 3 : 그리스도의 속상이 누군가의 구원 그 자체에든 혹은 이 속상을 자신의 소유로 삼는 방편인 믿음에든 실제적으로 공효로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분은 성부께서 사람들과 새롭게 상대하시고 또한 원하시는 대로 새로운 조건을 규정하시도록 하는 근거나 온전한 뜻을 얻으셨다. 하지만 그 조건들을 충족시키는 일은 사람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따라서 아무도 그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할 수도 있고, 반대로 모든 사람이 충족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아르미니안들은 그리스도의 속상이 “실제적으로 공효로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단정지어 말했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신 일이, 그 일 자체로서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사역을 통해서 나를 직접 구원하신 것은 아닙니다. 굉장히 끔찍한 말입니다! 그런데 17세기에 이들은 버젓이 이렇게 말했고, 많은 이들에게 먹혔습니다. 그러면 이들 말대로라면 그리스도께서는 무얼 하신 것이라는 말일까요? 다음 문장을 보시면 “다만 그분은” 이라고 하면서, “새로운 조건을 규정하시도록 하는 근거나 온전한 뜻을 얻으셨다”라고 합니다. 즉 성자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죽으셨을 때 그분이 하신일이란, 십자가 사역을 통해서 사람을 직접 건져 구원하신 일이 아니라, “어떤 조건을 규정하신 것”이라는 말이지요. 이것이 오류 4번에 나오는데, 쉽게 이야기하자면 처음에는 하나님이 ‘율법을 모조리 지켜야 의를 얻게 될 것’이라고 정하셨다가, 사람들이 실패하니까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 규정을 조금 완화시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신 일은 커트라인을 좀 낮춰 주신 것이지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한 일은 직접적으로 우리를 건져 구원하신 것이 아니고 ‘이전에 높았던 커트라인, 즉 율법을 모조리 다 지켜야 의에 이르는 것’에서, 커트라인을 완화시키셔서 ‘이제는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해 주시는 것으로’(오류 3에 “새로운 조건을 규정하시도록”의 의미가 이것입니다) 이렇게 조건을 변경하는 일을 행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설명이 오류 4에 나옵니다. 방금 제가 드린 설명을 이해하시면 이 4번 내용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오류 4 :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중보로 삼아 사람과 맺으신 은혜의 새 언약은, 그리스도의 공로를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을 얻는다는 것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의 요구를 폐하시고, 비록 불완전하더라도 우리의 믿음 자체와 믿음의 순종을 율법에 대한 완전한 순종으로 여겨 주셨다는 데에 있다. 은혜롭게도 그것은 영생의 상을 주시는 데에 합당하게 여겨 주셨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별 생각 없이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위하여 죽으셨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하려면 첫째 우선적으로는 앞에서 말했던 것, 즉 그리스도께서 뿌리신 속죄의 피가 만약 효력이 있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아야 하는데 실제로는 왜 그렇지 않은가라는 문제를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지 않는다는 것을 성경과 경험을 통해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 아르미니안들이 실제로 주장했던 둘째도 있습니다. 아르미니안의 주장은 그리스도의 피가 온 세상을 위해 뿌려지기는 했지만, 그것이 실제로 사람들을 구원한 것은 아니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단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는 조건의 난이도를 낮춘 것일 뿐, 즉 원래는 율법의 완벽한 순종을 요구하셨다가, 나중에 그게 잘 안 되니까 ‘예수님을 믿으면 그렇게 한 것으로 쳐 주겠다고 조건을 변경하신’ 일을 하셨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의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주위에 있는 복음주의자들이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온 세상을 위해서 죽으셨어! 너희 개혁파는 제한속죄를 말하는데 그건 너무 메마른 하나님이야!”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위해서 죽으셨다면, 1)그리스도의 피가 헛되게 뿌려진 곳이 있다고 해야 하거나, 2)혹은 그리스도께서 피를 뿌리셨지만 실제로 그것을 적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라고 말해야만 한다고 이야기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제한속죄의 문제는 ‘메말라서’ 생긴 교리가 아니라, ‘성경을 정확하게 살폈기 때문에’ 생겨난 문제인 것입니다.
따라서 1조의 죄에 대한 진술이 첫째 교리의 죄에 대한 진술과 강조점에서 차이가 나는 점
여기까지 두 번째 교리의 대략을 다루었습니다. 이렇게 해 놓으면 우리는 두 번째 교리가, “우리가 첫 번째 교리에서 선택에 대해서 배웠는데, 이제 이 선택이 구체적으로 사람들에게 적용될 때, 그리스도의 사역이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인지”를 다루는 교리임을 잘 아실 수 있으셨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도르트 신조는 이런 방향으로 구성됩니다. 첫째 교리는 “하나님의 선택”에 관한 것이고, 둘째 교리는 “이 선택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적용되는가?”, 즉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속을 이루셨는데, 그 이루신 구속이 개개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 그것은 온 인류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것인가, 아니면 특정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인가......이것을 다루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조는 셋째와 넷째 교리에서 “그렇다면 이것을 사람이 받아들일 때에 그것을 거절할 수 있는가”를 다룹니다. 즉 셋째와 넷째 교리는 “불가항력적 은혜”, 곧 사람이 그것을 받을 때 자기의 의지로 그것을 안 받을 수도 있는가의 문제를 다룹니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째 교리는 “인내”를 다루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받은 성도가 이후 세상을 살아갈 때, 은혜를 떠나서 다시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책에서는 이 교리들을 이런 방식으로 제목을 매겨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정리를 한 번 해 보시면 유익이 되실 것 같습니다. 이 책에서는 모든 장들의 제목을 Grace, 즉 “은혜”라는 말로 제목을 달았는데, 첫 장인 선택에 대한 장은 “예정의 은혜”, 둘째 장인 제한속죄에 대한 장은 “속상(satisfaction)의 은혜”, 셋째와 넷째 장은 “재창조(regeneration)의 은혜”, 그리고 마지막 다섯째 장은 “보존의 은혜” 이렇게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첫째 교리 제일 처음에 들으셨듯이, 매 장은 ‘죄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이것이 중요하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앞서 제가 장들을 요약한 데서 어느 정도 아실 수 있듯이, 이 때 죄에 대한 고백들은 매 장의 성격마다 조금씩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똑같이 죄를 고백하지만, 그것을 형식적으로 대강 “나는 죄인입니다”를 말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고, 각장의 주제, 성격에 따라서 죄가 거기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고, 그 장의 주제 안에서 우리가 죄의 어떤 성격을 알아야 하는지를 콕 집어서 그렇게 설명하는 식으로 매 장을 죄에 대한 진술로 열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교리에서 죄의 성격, 역할 그러면 둘째 교리에서 죄의 어떤 점을 지적하고 있는지를 한 번 보십시오. 우리가 앞서 살핀 내용대로, 둘째 교리에서 쟁점은 ‘속죄의 대상’입니다. 이 속죄의 대상이 모든 사람들인지, 자기 백성들인지, 즉 보편속죄인지 제한속죄인지가 이 장의 쟁점입니다. 그런데 이 속죄의 대상을 말하려면 반드시 먼저 그 앞에 말해져야 할 것이 있는데, 바로 “속죄의 필요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약하여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둘째 교리에서 죄에 대한 진술의 핵심은‘속죄의 필요성’이다.
이것을 우리가 이미 배운 첫째 교리와 한 번 비교하면서 생각해 보십시오. 첫째 교리에서 신조는 제 1조에서 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모두 아담 안에서 범죄하여 저주 아래 있으며 영원한 죽음을 받아 마땅합니다.” 첫째 교리 1조의 제목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정죄받아 마땅함”입니다. 이것은 이후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게 되시는 모든 일의 전제가 됩니다. 1조에서 이렇게 “우리는 죄를 지어서 멸망해야 합니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2조는 ‘그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심”이 되고, 3조는 “복음 설교”, 즉 하나님께서 이 아들을 보내신 것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전해지는지, 또 4조는 “이중적 결과”, 그 결과로 이중적 반응이 나타난다......이렇게 전개가 됩니다. 즉 첫째 교리에서 1조, 죄에 대한 진술은 ‘하나님이 선택을 하셔야만 하는 것의 배경’이 됩니다. 죄로 말미암아 멸망하게 되었으므로 선택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둘째 교리에서는 똑같이 죄에 대해서 진술하더라도 첫째 교리와는 그 초점이 다릅니다. 둘째 교리는 ‘속죄’를 주제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속죄가 무엇 때문에 이루어지는지를 말하기 위해서 ‘공의’를 이야기하는 데 죄를 말합니다. 둘째 교리 1조와 2조의 제목을 각각 보십시오. 1조의 제목은 “하나님의 공의가 요구하는 형벌”이고, 2조의 제목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만족”입니다. 즉 둘째 교리에서 죄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주어지는 벌’과 ‘그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 요구를 충족시켜서 우리의 죄를 도말해 주셨는가’를 말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도르트 신조는 각 장들마나 그 시작을 죄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하고 있지만 강조점이 다릅니다. 우리가 둘째 교리에서 죄에 대해 기억할 점은 이제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혹은 주의 백성들에게만 죄사함을 선물로 주셔야 하는데,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속죄의 필요, 즉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이 속죄가 필요했고, 그리스도께서 이것을 이루셨다는 것을 말함으로서 둘째 교리를 열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부터 둘째 교리의 각 내용으로 들어갑니다. 오늘 우리는 둘째 교리 전체의 주제를 한 번 훑어보았고, 그 중에서 이제 제일 첫째 조, 죄를 다루고 있는 첫째 조를 간략히 살펴 보았습니다. 첫째 교리에서 우리는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놀라우신 은혜를 보았습니다. 이제 오늘부터 시작되는 둘째 교리를 통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속하셨는가’에 대해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시간들을 통해서 첫째 교리를 배울 때와 마찬가지의 복된 은혜가 우리들에게 넘치기를 소망해 봅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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