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보혜사인 성령님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한복음 14장 16∼18절>
어린아이는 사실상 부모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존재 입니다. 그리고 자라서 학교에 가더라도, 선생님의 도움이 없이는 지식을 습득할 수 없는 것입니다. 도서관에 수 만권의 장서가 있다할지라도- 가르치는선생님이 없이는 그 장서가 아무 소용이 없듯이- 우리가 성공적인 인생을 살려면, 우리를 돕기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남아공에서 크리스 목사님의 말씀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말씀은- 그가 성공적이고, 효과적인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님을 의뢰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면서- 우리가 실패하고 좌절하는 것은 보혜사 성령님의 도움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을- 다른 보혜사로 소개해 주셨는데- 이는 주님 자신도 우리를 도우시는 보혜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은 처음 보혜사이시고 두 번째 보혜사는 성령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담 이후 타락한 인간들은 죄의 굴레에서 스스로 해방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쫓겨나 마귀의 노예가 된 인간은- 죄의 종이요, 세속과 부패의 종이며, 질병의 종이 되고- 저주와 가난의 종이 되어서,죽음과 절망 속에 갇혀 버렸기 때문에- 스스로 어떻게 마귀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애를 쓰고, 노력해도 우리 스스로 마귀의 노예에서 죄의 종에서 해방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우리는 죄 가운데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이 바로 처음 우리 가운데 오신 보혜사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보혜사고 성령님은 다른 보혜사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우리를 돕기 위해서 항상 우리 곁에 계신 이가 바로 보혜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대속 물로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는 동안 가는 곳마다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들을 치료해 주셨으며- 또한 가난한 자를 먹여 주시고, 환난에 처한 자를 건져 주시며- 죽은 자를 살려 주시면서 인간을 돕는 주님이심을 우리에게 확실히 보여 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해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몸 찢기고 피 흘리며 극한의 고통을 당하시면서 우리의 죄와 불의에서- 저주와 절망과 죽음을 청산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10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우리를 합법적으로 죄와 세상과 병과 저주와 사망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로마서 8장 1절로 2절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를 해방시키는 놀라운 역사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해방의 원천이 됩니다. 누구든지 십자가 아래로 나아가면 죄에서 해방됩니다. 세속과 마귀에서 자유를 얻습니다. 그리고 질병에서도 고침을 받습니다. 저주와 가난에서 놓임을 받게 됩니다. 사망과 음부에서 자유와 해방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을 얻어 자유와 평안을 얻게 되는 놀라운 축복이 바로 보혜사 예수님을 통해서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세계 제일의 강철 왕 카네기는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서 “빚은 다 갚을 수 있지만 우리가 받은 은혜는 영원히 갚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나는 이 은혜를 공짜로 받았지만 하나님은 엄청난 값을 지불하신 것이 십자가의 은혜이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수고하지 않고서- 있는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손 들고 주님께 나와서- 단지 믿음으로 구원 받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독생자를 주셨고- 예수님 편에서는 자신의 몸을 찢고 피를 흘리는 엄청난 고통의 대가를 지불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거저 주신 것입니다. 너무 값이 비싸기 때문에 도저히 그 값을 지불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햇빛은 값을 치르지 않고 받는 것처럼, 공기도 값을 지불하지 않고 숨을 쉬는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도저히 계산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희생적인 사랑은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 것입니다. 외아들을 내어 주셨고,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찢고 피를 흘리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시면서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그 은혜를 우리에게 실재(實在)로 나누어 주기 위해서-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해 준 것입니다. 릴레이 경기를 할 때 아무리 잘 뛰어도 바통을 제대로 전달해 주지 못하면 안 되는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 놓은 사역일지라도- 보혜사 성령님이 그 바통을 받아서 그 은혜를 실재로 우리에게 나누어 주고, 체험하게 해 주시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17절에서 “그는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여기서 <진리의 영>이란 <실재의 영>이란 뜻입니다. 곧,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서 <생명주는 영>으로 다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33년 동안 사시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돌아가셨던 것은- 그가 우리와 같은 혈육을 입으셨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에 제약을 받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심으로서- 이제 살려주는 영, 곧 생명주는 영이 되심으로- 다른 보혜사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18절을 보시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육체 안에 계셨던 그리스도께서 죽음과 부활을 통과하시고, 이제 생명주는 영으로 우리의 호흡처럼 우리의 생명이 되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다”고 말씀해 줍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이 오시지 않으셨으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유대 땅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2천 년 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그 영원한 구속의 사역은 성령님이 그 바통을 받아서 완성하시고 계십니다. 성령님은 바람과 같이, 우리의 호흡처럼 우리와 함께 계시고, 지구상 어느 곳에도 계십니다. 성령님은 처음 보혜사이신 예수님의 사역을 품에 안고 오셔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는 역할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보혜사로 소개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성과 사역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심으로 우리를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는 말씀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령님이 오신 것은 예수님이 오신 것이고- 따라서 성령의 임재는 예수님의 임재이며- 성령 충만은 예수님의 영으로 충만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령은 완전히 동일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처음 보혜사고 성령님은 다른 보혜사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위대한 역사를 다이루어 놓으셨어도-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깨닫게 해주시지 않으면 실재(實在)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호세아 선지자가 말했는데- 이는 깨닫지 못하면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캄캄한 밤에 물건을 찾으려고 방안을 아무리 찾아다녀도 못 찾지만- 전등불을 켜면, 곧바로 발견 할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의 전등불이 머릿속에 켜지면, 영안이 밝아짐으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보혜사 성령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성령님이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죄는 예수님 안 믿는 것이 죄이고, 의(義)는 예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의 의(義)인 것을 깨닫는 것이며- 심판은 세상 마귀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심판을 받았다는 진리를 성령이 깨닫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말해도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깨달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에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깨닫게 할 뿐 아니라- 우리 마음에 은혜를 주셔서 믿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안 믿어지는 사람도- 성령의 감동과 감화를 받으면 쉽게 마음속에 믿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신 곳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 쉽게 마음 문이 열리고 믿음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우리 가운데 부어주십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고 할 수도 없고, 아버지를 믿을 수도 없는데- 성령이 오시면 마음속에 믿음을 넣어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장 13절에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 심을 받았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령이 믿음을 주시고 인(印)을 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 가야만 믿음이 자꾸 자라지- 성령이 없는 곳에 있으면, 인간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진리가 믿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감각적인 진리가 아닙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이성적으로 깨달아 아는 것이 아니라 계시적인 지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계시를 주셔서 믿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성령께 마음을 열어야 마음속에 믿음이 인(印)쳐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 속에 와서 놀라운 변화를 입혀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 그 사랑의 아들 나라로 옮기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고후5:17)하는 것은- 성령으로 우리 속에 변화를 일으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바람같이 우리에게 와서 모든 혼탁한 공기를 몰아내어 주는 것입니다. 황사현상도 바람이 불면, 다 사라지고 맑아지는 것처럼- 우리 마음을 변화시켜 주는 것입니다. 바람으로 우리에게 생기로 채워 주시고, 성령은 불과 같이 임하여서 모든 더러운 것을 태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뜨겁게 만들어 주시고, 새로운 능력과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변화시켜서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셔서 우리가 변화를 받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가 성령받기 전에는 기도해도 힘이 없고, 전도를 해도 힘이 없고 신앙에도 능력이 없는데- 성령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영분별의 은사를 주시고 방언, 방언통역, 예언도 주시고 믿음, 기적, 병 고치는 은사를 주셔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자비의 역사가 나타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역사와 은사를 주어서 하늘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성령은 우리의 생활을 끊임없이 인도해 주십니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도우미가 되시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해야 될 일과 안해야 될 일, 가야할 곳과 안가야 할 곳을 분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와 같이 계신 성령은 우리에게 늘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슬픔에 몸부림치고, 우울증에 걸리는 고통 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시면 위로를 해주어서 여유를 갖고 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성령은 위로의 영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강하고 담대하게 고백하므로 기적을 베풀어 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입으로 고백할 때 성령은 그것을 다윗의 물맷돌로 사용하셔서 원수 마귀를 쳐서 무너뜨리고, 승리를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5절에-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고 한 것처럼- 우리는 말씀을 언제나 입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여러 가지 어려움과 고난을 당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성령이 말씀을 기억나게 하실 때, 그 말씀을 입술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영과 혼과 및 관절과 골수를 쪼개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말씀을 물맷돌로 사용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 가운데 있어도 어떻게 체험하는 바를 모르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회개하고 보혈을 의지하면, 성령이 우리를 거듭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서 생명을 얻은 것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임금으로 모시면- 그의 보혈로 죄 씻음 받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아버지께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성령이 우리 속에 오심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서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옛날에 제가 거듭나기 전에 남들이 다 하는 기도를 나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기도를 해 봤는데- 와, 기도가 그렇게 힘든 것이지 몰랐습니다. 아직 하나님의 자식도 아닌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양자의 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인(印)침을 받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을 받고서 기도하면- 성령은 권능의 영으로 우리에게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 충만 혹은 성령세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120 문도가 한자리에 모여서 기도할 때 갑자기 하늘로서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 같은 것이 집에 꽉 들어차고 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이 각사람 머리에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 곧 성령세례를 받으면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높입니다. 그리고 그 뒤에 증거의 능력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고, 전도의 능력이 나타나고, 안수의 기적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면, 성령 충만을 통해 ‘권능의 영’인 성령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우리는 늘 성령님과 인격적으로 교통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보좌에 계시고 예수님은 보좌 우편에 계시며, 성령님은 지금 우리 안에 와 계십니다. 성령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인격자이신 것입니다. 성령님을 인격자로 모시지 아니하면- 성령이 슬퍼하시고 섭섭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항상 인정하고, 환영하고, 의지하시고, 성령과 친교를 나눠야 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성령님인정하시고, 환영하시고,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성령님이 나를 도와 주서고, 기도해 주시고, 성령님 나를 이끌어 주십니다. 성령님이 친히 성경말씀을 깨닫게 해 주심으로 나는 인도해 가십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했습니다.
성령이 지금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 곁에 계시고 안에 계십니다. 바람은 우리 곁에 있고 코를 통하여 우리 폐 속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성령은 우리와 함께 거하시고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요한일서 4장 13절에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고 하신대로- 하나님과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를 인도만 할뿐 아니라, 우리와함께 동역을 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사업을 하는데 한 사람은 기술을 대고 다른 사람은 자본을 대는 것처럼- 우리는 몸을 대고, 성령님은 능력을 가지고 우리와 인생동역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남아공에서 꿈을 꾸었는데- 제가 밥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자기는 유능한 요리사이니, 나하고 동업을 하자고 했는데- 내가 그 요리사와 동업을 하자, 장사가 너무도 잘 되는 꿈을 꾼 거처럼- 오늘날 성령님은 우리더러 동업을 하자고 제안하시는 것입니다. 큰 도움을 주시는 성령님의 제안을 받아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일을 성령님과 함께 의논해야 하는 겁니다. 성령이 우리를 인도해 가실 때, 우리로 성공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는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고아처럼, 아무런 도움을 얻지 못하는 고달픈 인생을 사실 필요가 없습니다. 성령님이 항상 우리를 돕는 자로 우리 곁에 계셔서- 동역을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님을 기다리고, 성령님의 뜻을 받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과 동역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한 도시의 목사님들이 모여서 유명한 무디 목사님을 초청하여 전도 대회를 하자고 회의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의 한 목사님이 반대하면서- “목사님들은 왜, 강사로 무디 목사님만 고집합니까? 무디 외에는 설교자가 없단 말입니까? 그가 성령님을 독점하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하고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자 존경받는 원로 목사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무디만이 성령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무디를 독점하고 있어요. 그러니 무디를 청하는 것은 성령님을 초청하는 것입니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우리들을 독점하기 원하시는 겁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의지하시면 성령이 예수 그리스도의은혜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서 우리들을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된 것입니다.
2천 년 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 후, 50일 만에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교회가 탄생하고- 온 천하만국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성령이 강림하지 않으셨으면- 십자가 사건은 온 천하만국에 전파되지 아니했을 것이고- 구원의 역사도 온 천하만국에 일어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길선주 목사님이 성회를 인도하실 때 강림하신 성령께서 100년 동안 한국에 1200만 성도, 5만 교회가 되도록 복음이 전파되게 하신 것입니다. 아프리카 땅에도 T.L 오스본이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함으로서 크리스 목사님 같은 분이 구원을 받앗고, 지금도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그 가난한 아프리카 땅에 부흥은 없었을 것입니다. 성령이 없이는 비 없는 구름과 같은 것입니다. 성령이 없으면 물 없는 우물과도 같은 것입니다. 성령이 없이는 불 없는 화로와 같다는 것입니다. 형식은 있으나 내용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성령 충만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성령으로 거듭났으면, 이제 간절히 기도해서 성령세례를 받고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항상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의지하며 성령과 동역하고 성령님의 도움을 간구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때마다, 시마다 순종하고, 복종함으로 성령님과 함께 동역하는 삶을 사셔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까?
첫째로 성령님은 우리가 맡기는 만큼만 인도하십니다. 잠언3장 5-7절을 보시면-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 말씀은 우리가 범사에 주님을 인정하고 의뢰하면 주님께서 우리의 길을 지도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떤 일든 하나님께 묻기 전에 우리 스스로 결론을 내려버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분야에 대해선 내가 더 잘 안다”고 생각하고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면, 결국은 성령의 인도함을 거절하는 꼴이 됩니다. 그러나 사람의 지혜는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모두가 어리석은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지혜를 인간의 지혜로 대신하는 것은- 구리로 황금을 대신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범사에 주님을 인정하고 의지한다면- 내가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쉽게 설명한다면, 차를 운전하는 모습을 그려보면 쉽습니다. 운전대에 앉은 자는 바로 나입니다. 성령님께서는 내 인생의 운전대에 직접 앉으시는 법은 결코 없습니다. 그분께서 앉아 계신 곳은 옆 좌석인 조수석입니다. 운전은 내가 하고, 주님께서는 다만 내가 어디로 가야할지를 물을 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온유하셔서 아무 때나 끼어들어서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우리가 물을 때만 대답해 주십니다. 우리가 묻지 않고 멋대로 운전하더라도, 주님은 옆 자리에 가만히 앉아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회전하라고 말씀하셨어도 핸들을 꺾어 오른 쪽으로 가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 범위는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많이 내어놓고 여쭈어보느냐에 따라 정해지는 것입니다. 주님은 맡기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관섭하지 않으십니다. 왜냐면, 주님은 성품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절대로 남을 주관하거나 조종하거나 지배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항상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시고 우리의 의지를 존중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돌아서 가는 길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원하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뜻>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아직은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이 아닌 <허락하신 뜻>을 많이 선택하면서 영적인 성장의 과정을 통과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10단계를 온전한 수준이라고 가정해 보면- 영적으로 어린 아이들은 10단계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1단계나 2단계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를 하나님께 여쭙게 되는데- 이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온전한 뜻은 10이지만, 그 사람에게는 “2단계를 택하라”고 말씀하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는 <성령의 인도함>은 각자의 영적인 수준의 틀에서 인도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온전한 성령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최고의 선택을 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은 신실하게 끝까지 은혜로 보호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내비게이션이 길을 알려주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처음 안내 받은 최선의 경로를 이탈하더라도, 내비게이션은 “현 위에서 최적 경로를 다시 찾아서 알려줍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상황에서라도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면, 거기서 다시 최고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긍정적인 접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큰일을 당하리라는 두려움에서 출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보다 온전하고 효율적인 길을 찾기 위해서 성령의 인도를 구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실수를 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심이 바르다면, 문제가 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정죄감이나 열등감 없이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의(義)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거듭남과 동시에 새로운 본성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인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영적 어린 아이들은 스스로 온전한 인도를 받을 수 있기까지 영적 권위자를 통해 지도받고 훈련해야 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습니다.
요한복음 10장 27절에-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는 말씀을 보면- 아직 한 번도 성령의 인도를 제대로 받아본 적이 없더라도- 내가 주님의 양이라면 <나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로마서 8장 14절을 보면-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했는데- 여기서 ‘아들’이라는 단어로 쓰인 원어는 “휘오스“입니다. 상속받기로 택정된 성숙한 아들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성숙한 아들일수록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잘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성령님은 우리에게 계속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들을 수 있는범위는 각자가 다른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범위를 계속해서 성장시켜야 합니다.
셋째, 우리의 생각과 계획보다 그분의 생각과 계획이 더 위대함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조언을 해 주려고 할 때, 그 사람이 그 문제는 자기가 잘 안다고 하면서 고집을 부린다면- 제대로 조언해 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항상 나의 생각보다 그분의 생각이더 위대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믿어야 합니다.
잠언 14장 12절에-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라”했고- 이사야 55장 8,9절을 보면- “이는 내 생각이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름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음이니라.”는 말씀대로- 내 생각보다 내 계획보다 주님의 생각과 계획이 더 위대하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결정하기 전에 주님의 뜻을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넷째, 우리는 인생의 중요한 일부터 아주 사소한 일까지 모든 일에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관심 있는 문제는 다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무언가 영적이고 중요한 일만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성령님은 우리가 관심 있는 분야는 무엇이든지 인도받고 싶은 갈망을 가졌다면 반드시 인도해 주십니다. 결혼이나 직장이나 사역의 문제는 물론, 아주 사소한 일도 성령님은 우리 각자의 수준에 맞게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신명기 1장 33절을 보면-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전반적인 모든 문제를 일일이 지도하시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를 가실 때나, 직장을 옮길 때나, 하다못해 어떤 물건을 살 때에도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 성령의 음성은 밖으로부터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영의 음성은 항상 내 안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상황에 대한 해석도 항상 우리 안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깥의 환경으로부터 보고 들리는 것들을 거절하고 그것에 좌우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내 안에 살아계신 성령님이 계시다는 계시를 바탕으로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바깥 환경에 눈을 돌리고 기드온의 양털과 같이 바깥의 환경이나 징조를 보고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는 분들이 있는데- 그 시대는 성령님이 오시지 않았던 때임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을 통해서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생각은 아직 말씀으로 완전하게 변화되지 못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견고한 진을 통해서 잘못된 충동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은 성령의 인도는 바깥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오는 것은 단지 참고할 정보일 뿐, 어떤 선택의 결정적인 기준이나, 근거로 여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여섯째, 성령의 인도는 하나님의 신호를 보고 내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음성을 듣는 다는 것은 막연히 어떤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앉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음성이나 감동이 있으면 그것을 취하여 결정을 내리고 행동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인도해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듣고, 내가 분별하고 내가 순종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운전대를 잡고 있는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사도행전16장 6-10절을 보시면-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더라.”는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본래 아시아 쪽으로 가려고 했지만, 성령께서 허락지 않으셨고, 다른 지역으로 가시려고 해도 계속해서 막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가야할지 찾고 있었는데- 마게도니아 사람이 이라 와서 우리를 도와 달라는 환상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인정하고 행방을 정했음을 봅니다. 이것은 결국 환상 자체 보다는 환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그들의 행방을 인도한 것입니다. 이처럼 때가 되면, 성령님의 신호를 보고 내가 결정해야 합니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성령의 음성은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일곱째, 끝까지 세밀하게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성미가 급해서 빨리 해결되기를 바라고 서두르곤 하는데- 조급함은 상령의 인도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특히 중요한 일일수록 여유를 가지고 확실한 응답을 받을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반드시 성령의 인도를 받고 움직이기로 작정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가장 좋은 시기에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내가 인도하심을 구한 문제라면 반드시 정확한 응답을 주실 것입니다. 확실한 인도가 있기 까지 기다릴 줄 아셔야 합니다. 응답의 방법도 하나님은 다양한 통로 말씀하십니다. 예배 시간의 강단의 말씀으로 올 수도 있고, 영적인 직감일 수도 있으며, 영적인 꿈을 통해서 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특정한 방법을 정해 놓고 응답을 구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결정한 후엔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고 해서 항상 형통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려움이 생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인도함 가운데 생긴 일이면- 그것은 우리를 더 온전케 하려는 필요한 훈련인줄 압니다. 그러므로 일단 결정을 내릴 후에는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돌파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 속에서 분명하게 주님의 도우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거듭난 성도들 안에는 항상 거룩한 성령님이 계십니다.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은 우리를 돕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성공한 인생을 사시려면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사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범사에 주님을 인정하고, 그에게 우리의 삶을 양도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을 신뢰하고 감사함으로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 설교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종류의 심판대 (0) | 2019.10.17 |
---|---|
눈물의 기도를 드리자 욥16:20-22절 (0) | 2019.09.29 |
믿음의 사람도 실수를 한다 (0) | 2019.07.24 |
약속을 붙잡고 기도합시다. 시 89:1-52 (:1-4, :46-52) (0) | 2019.07.17 |
기도, 이제는 제대로 합시다 마 6:5-8 (0) | 2019.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