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거의 조건은 성령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단지 그리스도인이기만 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1. 버려둠을 당하는 자들과 데려감을 당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단지 불신자와 그리스도인을 비교해서 그리스도인을 데려간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라고 추정할 수도 있으나 그렇게 해석이 되지는 않습니다.
마태복음 24장
40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43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4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깨어 있으라는 말씀은 불신자를 포함한 온 세상에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깨어 있으라 하는 말씀은 너희 곧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 주가 오실 때에 그때가 언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너희 곧 그리스도인들이 예비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어찌하든지 하나님 아버지께 복받은 자들이라 그저 데려감을 당할 것이니 그냥 열심히 주를 섬기라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이 문장들의 문맥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데려감을 당하고 그렇게 되지 않는 자들이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위의 말씀을 반대로 바꾸어 봅시다.
우리가 주님 오시는 날을 알지 못하는데 열심히 자고 있다면? 데려감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40-44절은 그러므로 라는 접속사로 연결된 하나의 문맥입니다.
예비하고 있어야 데려갈 것이다 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비하지 않고 있다면 ? 인자를 만날 준비가 안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정결하고 거룩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 주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실 때에도 다 아시는 것입니다. 데려감, 버려둠을 그저 그 배경없이 생각하면 난해하지만 이런 문맥을 배경으로 보는 것은 합당한 해석입니다.
* 모든 그리스도인이 다 휴거되리라 생각하는 것은 이단의 생각입니다.
성령론을 모르는 자들의 말입니다.
2.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주님 앞에 온전히 서도록 우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정결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뵙는데 이런 것은 기본이어야 합니다.
살전 5장
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은 바로 우리에게는 휴거인데 그 때에 우리가 흠없이 주님 앞에 서야 합니다. 거룩해야 합니다. 영과 혼과 몸이 정결하고 거룩해야 합니다. 그저 구원받음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사도 바울은 고전 5장의 청년이나 고린도 교회의 병든 자, 잠든(죽은) 자들을 말하면서 자기의 죄를 처리하지 못한 자들의 결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성령의 임재가 있는 성만찬을 죄있는 몸으로 했을 때에 하나님의 치심으로 그들의 몸이 병들고 죽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휴거는 죄있는 몸으로 만나면 이런 일이 생길 것인데 성령께서 그 죄있는 자들에게 나타나지 않으실 것이니 결국 휴거되지 않고 환란기에 남겨집니다. 버려둠을 당하는 것입니다.
3. 참고로 잘못 해석된 말씀은 말씀을 왜곡함이고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면 그것은 죄입니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이냐 라고 하나님이 물으시면 할 말이 없을 터인데 그런 것이 바로 죄입니다. 이런 사실은 욥기에 분명하게 나옵니다.
욥의 세 친구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한 것이 부당하므로(사실과 같지 않으므로, 모르고 말하며, 자기 마음대로 말함으로서) 죄를 짓게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죄를 사함을 받으려면 제사를 드려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을 왜곡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것으로 바꾸는 것,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는 것은 분명히 죄악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성경을 봐야 합니다.
죄를 지어봤자 자기에게 유익이 없고 환란기에 떨어질 뿐입니다.
그 오랜 세월의 비참함을 견딜 육체가 없습니다. 고통으로 이를 갈 것입니다.
잘못된 말씀의 해석은 다 버려야 합니다. 자기에게만 해로운 것이 아니라 그 해석을 듣고 따라가는 타인에게도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왜곡의 죄는 몸으로 짓는 죄는 아닐지라도(입으로 말하면 죄가 됩니다.) 기본적으로는 마음의 죄이고 영의 더러움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별력이 없어집니다.
영과 혼과 몸이 다 정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하고 완전한 것인데 거기에 때를 입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악입니다.
무지한 자들이 이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무지한 자들은 올바른 성경해석을 자꾸 빗겨갑니다.
정말 자신을 사랑한다면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됩니다.
4. 휴거란 우리의 영혼의 구원 곧 거듭남과는 다른 것입니다. 휴거는 몸의 구속이며 구원의 완성입니다.
우리가 지금 구원받은 후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죄를 짓지 말고 살아가야 하고 순종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12)
빌립보서 2장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지금 사도 바울은 교회에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교회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입니다. 그 중의 어떤 불신자를 가정하고 그에게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자들에게 구원을 이루라 하는 것입니다.
처음 거듭날 때에는 우리가 할 일이 없었습니다. 물론 회개할 일은 있었으나 그것이 구원이라는 것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구원을 이루셔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요, 구원은 선물이요, 은혜요, 값 없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닙니다. (엡 2:5-8) 고난이 구원을 이룬 것이 아니라 고난은 구원을 받은 자가 구원을 잃지 않기 위하여 견디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 바울은 그 구원이 아니라 항상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하고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복종하여 너희의 구원을 이루라 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 거듭날 때의 구원이라면 빌립보서와 에베소서의 구원론이 다른 것이 됩니다. 그럴 리 없죠..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을 이상한 분으로 만드는 말을 하고 게다가 사도 바울도 정신없는 자로 만드는 말을 합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여기서의 구원은 구원의 시작인 거듭남이 아니라 구원의 완성인 몸의 구속(로마서 8:23) 곧 휴거, 데려가심입니다.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 그리스도의 날은 재림의 날이기도 하나 우리에게는 휴거의 날입니다.
(* 살후 2:2의 주의 날은 헬라어 원어는 the Lord's Day가 아니라 the Day of Christ 입니다. 즉 올바로 번역하면 그리스도의 날입니다. 그러나 살후 2장2의 두려워하는 날은 바로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곧 지상재림의 날로 봄이 옳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려가시는 날(휴거)를 두려워 하라 말한 적이 없고 유대인에게는 두려워하는 날은 주의 날(요엘2장)처럼 재림의 날입니다.)
휴거되는 날에 사도바울이 자랑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가 수고한 결과 많은 이들이 그가 전한 복음과 사역을 통하여 주님의 나라에 온전하게 들어가면 사도 바울은 그것을 자랑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옳습니다. 사람을 구원할 뿐 아니라 천국에 곧장 입성하게 한다면 그는 세상 그 어떤 일을 하는 것보다 잘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실 일입니다. 우리 모두 그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하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5. 우리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지만 우리 몸의 구속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영혼육의 존재인데 우리의 영은 혼을 다스리고 혼은 육을 다스립니다.
종종 반역을 하여 마음(혼)이 영의 지시를 거부하고 육신의 타락함을 따라가서 영을 약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우리의 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가야 하고 우리의 영에 주시는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분별력 없는 마음은 죄를 행함으로 반역을 하는 것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현재의 모습은 영은 구원받고 변화되었으되 아직 몸과 마음의 구원까지 갈망하는 상태입니다.
우리는 지금 철학적인 궤변으로 구원을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종류의 말들은 속이는 말입니다. 사실도 아닌데 사실인 것처럼 믿으라는 것입니다.
(* 예1) 영의 남편 이런 말은 궤변입니다. 영의 남편이 어디 있나요? 성경에 없죠.
이런 실존할 수 없는 말, 실존하지 않는 말이 궤변입니다. 스스로를 속이고 또 남을 속이는 말입니다.
예 2) 목회자이자 기업가 라는 말도 궤변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그런 두 가지 직으로 동시에 부르시지 않습니다. 기가 찬 거짓말입니다. 죄를 시인하고 회개하면 그래도 정신은 올바르구나 라고 인정할 것이나 그렇지 않다면 성경을 읽었으되 한국 문화, 불교문화를 벗어나지 못한 헛된 사상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환란전에 다 휴거된다고 설교도 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예3)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를 다 사하셨다 라는 말도 궤변입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에 미래의 짓지도 않은 죄를 사함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어이없는 거짓말입니다. 말장난입니다.
예 4) 구약의 성도들도 거듭난 것이며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받고 거듭났다 라는 건 정말 어이없는 거짓말인데 마치 그것이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말인 양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히브리서 9,10장을 잘 보면 절대로 그런 말이 나올 수는 없습니다. 결국 무지와 혼란 속에서 그런 말에 아멘 하는 것입니다. 주의해야 될 일입니다.
성경대로 말함을 떠난 모든 것은 거짓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
우리의 구원에 대한 말들은 사실중심 이어야 합니다. 우리 몸의 구속은 지금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과거에 거듭날 때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장차 일어날 것입니다. )
지금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이것은 몸이 아직 구속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와 싸워 이기고 정결하고 거룩하게 성령 안에서 살아간다면 성령께서 우리를 휴거의 날에 부활체로 변화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몸의 구속입니다. 그러나 정결하지 못하면 성령이 그냥 지나가버리실 것입니다. 그에게는 오시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가 휴거는 외계인이 UFO로 납치한 사건이라는 뉴스를 듣는다면 그는 휴거안된 사람일 것입니다. 슬피 울일입니다.
우리 몸의 장차 일어날 구속에 대한 다음 말씀을 잘 보아야 되겠습니다.
로마서 8장
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 거듭난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헷갈릴지라도 성령 하나님께서 너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라고 증거해 주십니다. 말씀도 주십니다. 평안함도 주십니다.
그러나 성령을 소멸하고 죄 가운데 살아가면 이런 확신조차 흐려질 것입니다.
렌즈가 선명해야 먼 곳이 잘 보이는 법입니다.
죄 속에 거하면 성경말씀도 잘 안 보이고 성령의 음성도 잘 들리지 않고 평안과 확신도 흐려집니다. 오직 우리가 정결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됩니다.
종종 말씀을 읽지 않고 지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지금 이 시대가 스마트폰에서 성경을 보도록 프로그램도 있지만 그것으로는 안됩니다. 실질적인 성경읽고 주님의 음성을 듣는 데에는 종이책으로 된 성경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 필수 코스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주님과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거부하고 복으로만 치닫는 것은 비정상적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난을 쳐다보되 그것을 이용하고 자기는 복만 챙겨가려는 것인데 그런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제대로 알고 변화되는 자라면 고난도 받는 것입니다.
물론 고난을 그냥 수용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도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피치 못할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죄로 인한 고난, 주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고난 두 가지가 있는데
(1) 죄로 인한 고난이 없었으면 하나 누구나 자기의 죄 특히 모르고 지은 죄나 죄를 짓고나서 모르고 당하는 고난은 있습니다. 고난을 당하여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누구나 영적으로 어릴 때에 그런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 죄로 인한 고난은 회개하고 벗어나서 다시는 그러한 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2) 죄로 인한 고난은 누구나 당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말씀을 순종하기 위하여 당하는 고난은 당하는 이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말씀을 잘못 전해서 받는 이단에 속한 자의 핍박은 자기의 죄로 인한 고난이고 주님의 영광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어리석게 주님의 영광을 위한 고난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래서 무지하면 고난을 벗어나기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이 있을 때에는 그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지 하나님께 여쭈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처리해야 합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집사님께서 우리가 성화되려면 말씀, 기도뿐 아니라 고난도 있어야 한다고 해서 맞는 말씀이라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열심히 읽고 순종하고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래도 고난이 최소화된 삶을 살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싸워야 합니다. 회개를 하고 죄의 자백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피를 뿌려서 정결하게 하고 예수님의 피와 말씀으로 악한 자를 이기고 미혹하는 자를 이겨서 승리해야 됩니다.(계 12:12)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 우리가 죄를 지어서 받는 고난도 결국 깨어있는 자들에게는 죄를 벗어나도록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위하여 받는 고난은 우리에게 상급의 원인이 될 것입니다.
고난을 당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고난의 의미를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 여쭈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고난은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비교도 안되는 엄청난 영광을 누리게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듭나서 주님의 인도로 이 구원의 길을 가는 동안 우리는 영광스러운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장차 받을 영광을 생각하고 기뻐할 수있기 때문입니다.
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 피조물은 타락한 상태에서 탄식하고 고통당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많아지면 그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기에 피조물은 안식할 것입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땅에는 식물도 잘 자랍니다.
그러나 악한 자들은 유전자를 변이시키고 닭이나 돼지 등도 지저분하게 고통스럽게 키웁니다. 동물에게도 자비함이 없습니다. 모두 다 고통을 당합니다.
6.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현재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1) 여기서 부터 잘 봐야 합니다.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는 바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들의 현재는 무엇인가요? 바로 우리의 몸의 구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구속이란 Redemption입니다. 값을 주고 가져오는 것입니다.
구원도 구속도 다 예수님의 피의 댓가, 그분의 죽으심의 공로 때문입니다. 희생제물이 되셨기 떄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기다라는 것은 몸의 구속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완성입니다. 구원받은 자가 이제 구원의 길을 걸어가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살아가야 됩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구속이 됩니다.
그런데 죄값을 다 치르고 정결해진 상태에서 성령으로 구속이 되는 것입니다.
두 가지입니다.
휴거되는 자 (1) 죽음은 죄값을 치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죽은 자들은 휴거의 날에 몸이 부활하여 부활체가 됩니다. 그 몸은 그냥 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이 있는 몸입니다. 그 몸에 그들의 영혼이 들어가서 온전한 자가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자' 라는 표현으로 해석이 된 것은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살아있는 자로서 휴거를 맞이하는 자는 어찌 될까요?
두 부류로 나눕니다. 휴거되는 그리스도인과 휴거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불신자는 휴거와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휴거되는 자 (2) 구속받을 정결함이 있는 자들.
이들은 예수님의 피로 씻고 말씀으로 씻고 회개하고 죄를 자백하고 살아가는 자들이며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속량하심(값을 치르고 가져옴)을 당하여 그 죄를 없이 하였으므로 몸의 구속을 받게 됩니다. 따라서 구원 이후로 죄가 없이 살아가는 자는 휴거됩니다.
휴거되지 않는 자들.
그러나 휴거의 날에 죄가 있는 자들은 어찌 될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구원하심도 있고 속량을 위한 제물도 다 있으나 그것을 스스로에게 적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즉 회개의 자리에 나가지 않고 살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남아 있습니다. 죄를 깨닫지 못해서 그렇게 되기도 했고 자기도 모르게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들은 몸의 구속을 당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하신 성령님은 죄인들의 몸을 변화시키지 않으십니다. 이들은 환란기를 거칩니다. 이들은 환란기에 많이 죽습니다. 엄청나게 죽습니다. 성령은 이때 음성으로 이제 주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다 라고 말씀하실 뿐입니다. (계 14:13,14)
우리가 성령에 대하여 알아야 하고 구속에 대하여 알아야 이렇게 정리될 수 있습니다.
(* 제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성경과 다른 내용이 아니면 어려운 내용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성경을 볼 줄 알면 이 정도로 정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이 내용이 어려운 내용이 아니며 일부 사람들이나 주장할 내용이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소수이건 다수이건 간에 성경대로 말하는 것이 중요하지 우리는 그렇게 해석하지 않아..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다 휴거되는 거야 라고 해석하고 믿는다 라고 고집을 부리면 잘못하면 휴거가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7. 구속의 개념, 구원과 구속이 다른 것, 성령님의 역사를 잘 모르면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1) 일부 사람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환란기를 거치면서 고난을 당한다. 라고 하지만 그건 아닙니다.
이 말은 마치 죄의 댓가를 고난으로 치르려 하는 것같습니다. 이건 이단적인 사상입니다.
고난은 주님이 주시되 죄의 댓가, 죄를 정결하게 하는 속량은 되지 못합니다.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게는 하지만 죄의 대속이 되지는 않습니다. 즉 고난이 많다고 죄를 사함받은 것은 아닙니다.
죄를 처리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뿐입니다.
죽으시면서 흘리신 그 보혈 때문에 우리가 정결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알고 회개하는 것이 죄의 처리입니다.
인간편으로는 고난을 당하면 "고난을 당하여 좀 매 좀 맞았으니 이제 용서해주세요'라고 할지 모릅니다만 예수님이 매맞으시고 고난당하시고 피흘리시고 죽으셨으니 우리는 회개하는 자리로 나아가서 그 은혜를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주님이 준비하신 구원의 길이 바로 그 길이며 그 길에서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감사하며 걸어가는 것입니다.
왜 주님이 해놓으신 일에 자기가 스스로 어떤 죄처리 기준을 만들고 은근히 믿고 그렇게 행동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지만 그들이 올바로 굳센 정신으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죄를 기준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환란기를 거쳐서 고난을 받으면 무언가 이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심각한 오류입니다.
환란기는 6장부터 어린 양의 진노가 이 땅에 임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은 하나이십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데 이 땅에서 성령이 막아서십니까? 그런 말을 하는 자는 심각한 정신병에 속합니다. 안 그러면 하나님을 분열시키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신이 나간 자가 아니고서는 그런 망언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일치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 * 정신병이라니 심한 말이다 하실 것이나 예를 들어서 하나님도 없다 라고 하는 말을 하는 자는 정신병일까요? 아닐까요? 하나님의 개념 조차 없는 자는 머리에 있어야 할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정상적인 정신이 아닙니다. 니체가 하나님은 죽었다 라고 했습니다. 그가 정상적인 사람일까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습에서 한참 어그러진 모습, 깨어진 모습, 죄로 타락한 모습, 복구되지 않은 모습입니다. 정신의 병인데 스스로도 고치지 못하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정신병이라고 해야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과 대화해도 답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은 결국 몸도 정신도 병들고 망가지고 사고를 치르게 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함부로 말을 하는 자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환란기에 이 땅에 남는 그리스도인들은 사실은 버려진 자들입니다. 주 예수님이 성령으로 역사하셔서 구원의 능력을 베풀지 아니하십니다.
그들은 구원을 받았으므로 구원이 약속되어 있으나 만약 짐승에게 절하고 짐승의 표를 받으면 배도하게 되고 결국 지옥에 갈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라고 해서 배도를 하여도 천국갈까요? 그런 자들의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져버릴 것입니다.
성령은 환란기 때에 예수님의 진노가 이 땅에 쏟아지는 때에 이 땅에 계시지 않으심이 당연합니다. 따라서 환란기에 성령 하나님이 이 땅에서 역사하셔서 대부흥을 일으킨다든지 하는 말을 하는 자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에게는 다릅니다. 1. 하나님의 인을 맞는 자들, 이들은 성령의 인치심이 아닙니다. 이들은 보호하시기 위함입니다. 2.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적인 능력이 전달되어 사역을 하는 자들입니다.
요한계시록11장
3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
4 이는 이 땅의 주앞에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니
이들은 천사에게 능력을 주시듯이 인간 두 증인에게 능력을 주시는 것이지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의 권세이며 죄인을 죽이는 권세입니다.
5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찌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2) 환란후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휴거된다. 이것도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가 이 땅에 없다는 것은 예수님의 진노가 곧 하나님의 진노하심이고 성령님의 순응하심으로 그 진노가 쏟아지는 땅에 없으신 것인데 환란기 내내 성령의 역사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환란기 마지막 때에 성령의 역사가 없습니다. (성령님은 막는 자로서 역사하시다가 하늘로 옮기우십니다. 그때에 휴거가 일어납니다. 따라서 환란전에 휴거가 됩니다.)
환란기의 마지막 인류 최후의 전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 글에서 나타날 것인데 이것을 보면 환란기 마지막에 성령의 역사가 없고 성령의 역사인 휴거가 일어날 리 없다는 것입니다.
휴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몸의 구속을 바라는 우리는 정결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죄를 지을 미혹에서 벗어나야 됩니다.
환란기 마지막 때에는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악령의 역사가 판을 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악령에게 사로잡혀 결국 정신없이 몰려가서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휴거된 자들을 대적하여 무기를 쏘아댈 것입니다. 그저 목소리로 데모를 하지는 않고 예수님과 휴거된 자들을 외계인의 지구 침공 쯤으로 여기고 공격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칼로 다 죽을 것입니다. 그렇게 환란기는 끝날 것입니다. 그리고 천년왕국이 시작될 것입니다.
우리는 몸의 구속을 바라는 간절한 심정으로 정결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우리는 지금 연약합니다. 죄를 이기는 절대적인 능력이 없으니 연약합니다. 그리고 말씀도 잘 깨닫지 못하고 헤메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올바르고 안전한 길로 가야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중재림하시는 날, 우리가 걸어가는 고난의 길, 정결한 길의 끝에서 우리는 우리의 몸을 구속하셔서 휴거시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잘 만나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