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교의
한현종 교수
교의란 본래 헬라어 “도케이”(dokei)에서 유래 된 말로써 “내가 보기에는 이렇다. 내 생각에는 어떻다. 내 결론으로는..., 내가 확신하기로는..., 나는 이렇게 확신한다”는 등의 뜻으로 사용하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교의란 그 자체가 확실성의 개념이 나타나는 것으로 이해된다.1)
교의에는 비단 종교적인 것만이 아니라 과학적(科學的), 철학적(哲學的), 정치적(政治的)인 의미에서의 교의도 있다. 근본적이고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과학의 원리(原理), 철학에서 자리 잡힌 가르침, 정부의 법령(法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 진 종교의 교리(敎理)등을 총칭해서 교의하고 말한다. 교의의 공통점은 모두가 어떤 권위(權威)를 옷 입고 있다는 점이다. 종교의 교의는 전적으로 성경진리에 근거하기 때문에 더 위대하다고 보다는 신적권위에 기초하고 있어 다른 교의들이나 또는 다른 종교의 교의보다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한다. 문제는 그 교의에 대한 견해의 차이점을 갖는다는 데서 분열을 일으키고 종파를 달리하게 된다는 약점을 갖는다. 같은 성경을 가지고도 그가 믿고 있는 신앙에 따라서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는 것은 여러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즉 성경에 대한 문서설(文書設)을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도덕이나 윤리적인 개념에서 이해되고 해석을 하게 될 것이나, 성경의 계시설(啓示設)을 믿는 사람에게는 전혀 다른 신비적인 이해와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기독교 운동 자체의 방향이 갈리게 되는데, 현세적이고 이상(地上)적인 것이냐, 아니면 내세적이고 천상(天上)적인 것이냐 로 갈리게 되는데, 여기에서 보수(保守)와 자유(自由)혹은 진보(進步)로 갈리게 된다.
교회의 통일성과 신앙의 보편성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교리나 신조가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실상 기독교를 교의가 아니라 생활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이 어찌 보면 상당히 설득력이 있고 옳은 것 같고, 그들이야말로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경건에 속한 사람들이고, 도덕적으로 완전한 사람일 것 같으나,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사회적인 요구의 충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에 순종하고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니 이다”라고 하셨다. (여17:3).
사도바울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노라”라고 하였다.(딤전2:4), 또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 한데까지 이르는 것이라”라고 하였다. (엡4:13)
사도베드로는 “신적 능력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라고 기록했다. (벧후1:3)
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믿음이 있어야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구원을 받은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라는 공동체의 유지를 위해서는 진리와 신앙에 대한 통일성이 확보되어야 하므로 이것은 교리와 신조로서 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는바 기독교가 사회적 유익이나 행복을 추구하고,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라는 뜻에서 행한,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생활이다”라고 한 말의 배후에는 전혀 성경적 요구에 충족 될 수 없는 기독교 사회주의적인 이론 이외에 영혼의 구원문제 같은 것에는 전혀 뜻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한다.
나. 교회의 통일성이 교의의 일치를 요구한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세우신 하나님의 교회의 통일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라고 선언했다.(딤전3:15). 그러므로 이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의 교회의 통일을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의 믿음”이 되어야 하고, 이 믿음은 하나님의 교회를 중심으로 한 하나의 통일을 이루어야 할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교의학의 역사는 초대교회부터라고 할 수도 있으나, 성경교리를 중심으로 적극적인 논쟁이 시작된 것은 3세기 초 알렉산드리아에서부터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 교리논쟁의 불씨를 던져주게 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대 신학자 오리겐(Origen: 185-254)의 저서 「원리에 관하여」로부터 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는 편의상 1)고대교회시대, 2)중세교회시대, 3)종교개혁기 교회시대, 그리고 현대신학 교회시대로 나누어서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옳을 것으로 본다.
속사도1)교부시대2)에는 터틀리안(Tertullian:160경~220경)에 변증적 방법 기독교 진리를 변호와 설득을 함.(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교의를 적극적으로 체계화시켜서 변증에 임한 것은 아니었다.)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오리겐, 어거스틴(354-430), 다마스커스의 요한(700-760) 대표
자 신학자이다.
- 교의사상(기독교 신학)을 최초로 체계화시키려고 시도한 학자.
「원리에 관하여」를 요약해서 분석해 보면,
첫째, 인간의 영혼이 선재하였고, 그들의 이전 존재 시절에 범죄 하였으므로 벌로써 육체를 입은 물질적인 몸에 갇히게 되었다. 3)
잘못된 견해 및 신학적 오류
사람이 선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신비한 경륜4)안에 있고, 범죄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하여 세상에 오게 되었다는 전통적인 교의사상에는 전혀 배치되는 잘못된 견해였다.
둘째, 그리스도의 인간 영혼은 그 선재 시에 이미 로고스와 결합되어 있었다.
잘못된 견해 및 신학적 오류
기독교의 교의사상에서는 로고스에 대한 개념을 선재한 인간에게 연관시켜서 해석하는 것을 거부함. (나중에 인간론에서 다름.)
오리겐의 주장은 성경진리에 맞지 않음.
셋째, 육체적인 부활은 있을 수가 없다.
예수그리스도의 육체적인 부활은 역사적인 사건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약속이며, 계획된 사건이다.
넷째, 만물의 회복에 사탄도 포함된다.
이 주장은 만인구원설(萬人俅援設)과 동시에 아주 무섭고 위험한 사상으로서, 죄의 절대성을 강조하고 있는 성경진리에 완전히 위반되며, 동시에 종말론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대심판과 심판 후에 있을 영원한 천당과 영원한 지옥형벌의 사상에도 전혀 맞지 않는 비성경적인 주장이며 잘못된 사상이다. 5)
결론적으로 오리겐은 신학계에 많은 영향을 준 것에 상관없이 이단 신학자라는 불명예에 낙인 찍혀있다.
- 사도바울이후에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성경적 바른신학의 해석자이다.
첫째, 믿음
어거스틴 믿음이란 주 된 조목들을 들어서 성경적으로 하나하나 해석하려고 시도했다.
둘째, 소망
소망은 기도론과 주기도문의 여섯 가지 간구에 관한 교리를 서술함으로서 기독교 신앙의 소망론을 서술하고 있다.
셋째, 사랑
어거스틴은 사랑을 하나님의 은혜로 행하는 행위라는 것으로 도덕적 선을 설명하고 있다.
오류: 예수의 어머니 성모마리아에 대해서 “하나님의 어머니, 만물의 주”라는 말들을 사용하고 있다.
이 시기는 신학에서 있어서 변증적 활동이 발전된 시기로서, 신학에 대한 깊은 학문적인 각성과 연구가 활발했던 시기이다. 하지만 이시기는 학문적으로 깊은 체계를 형성되었지만, 결론적으로는 우리가 추구하는 영적신학이 아닌 이성적 신학의 시대로 바꾸어 놓게 되었다.
우리가 신학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도적인 교의사상의 바탕 위에 성경진리에서 말씀하고 있는 교의적 정통성을 고수하면서 실상과 증거로 나타나야 할 것을 요구 받는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신학과 신앙을 비교해서 논한다면 “신학 위에 신앙이 아니라 신앙 위에 신학”이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신앙이 더 깊은면 깊을수록 그것이 신학적 이론으로 체계적인 설명이 따라야 하며 정통성을 갖는 교의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켄터버리의 안세름(1033-1109) 존재론적 주장자의 대부라고 할 정도로 지식과 경건한 신앙인이다. 안세름은 저서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논하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를 나타냈다.
첫째, 삼위일체 신앙과 말씀의 성육신
삼위일체 교리 시인과 함께 증거로 고백을 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6)에 대해서도 분명히 증거해주고 있다.
둘째, 조화
「조화」를 통해서 그의 예정론을 설명해 주고 있는데, 이 교리는 어거스틴의 정신을 이어받은 것이다.
셋째, 하나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
안세름은 속죄론7)의 만족설8)에 대해서 전형적인 해설을 하고 있다. 즉, “사람이 그 원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채무를 이행 할 수가 없을 때 죄가 없으신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을 대신해서 넘치도록 죄 값을 갚아 주셨다”고 고백하고 있다.
2. 피터 롬바르드 “명제설”(11005-1164?) - 당대 최고의 신학지침서, 해설서, 저서는 4권으로 이루어져있다.
1권, 하나님에 대하여
롬바르든는 하나님의 존재를 우주론적인 입장으로 증명.
삼위일체에 관해서는 어거스틴의 유비사상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적극적인 계시와 신앙이 없이는 그 유비들로부터 삼위일체 교리의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함. 그 중에서 사람은 어떠한 말로도 하나님의 본성을 만족스럽게 설명 할 수 없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2권,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하여
창조주 하나님의 의해서 천사와 인간과 우주의 모든 것들이 피조된 존재들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다. 인간 영혼의 기원에 대해서 영혼의 유전설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직접 창조설을 주장하고 있다.
3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속죄구원에 대하여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우리를 의롭게 만들었으며, 그의 죽으심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들 가운데 일깨워졌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4권, 성례 및 최후의 일들에 대하여
교회법의 문제를 성례전교의에 관한 그의 논의 속에 도입하였다. 성만찬에 관한 경우 그는 한 실체가 다른 실체 속에 전환된다고 말하며, 어떤 다른 것을 더 이상 규정하지 않고 있다.
저서는 “신학 대전” 다른 학자들과 힘을 모아서 집필한 것으로 전하고 있다.
하나님, 피조물, 구속주와 그 분의 사역 그리고 성례 등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책의 내용은 피터 롬바드의 내용을 담고 있다.
4.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1224-1274)
저서는 기독교 교의신학에 대한 모든 영역을 총괄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1권, 하나님의 사역
2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자기 존재의 최고 목표 발견
3권, 그리스도 및 그의 은혜의 수단
4권, 계시 지식과 이성 지식
종교개혁시대의 신학적 특징
1. 성경의 절대권위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
2. 누구든지 교리와 함께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 갈 수 있다 것.
종교개혁기를 중심으로 주로 개혁자들에 의해서 나온 신학서 들로는 멜랑톤의 “신학통론”, 쯔잉글리의 “참 종교와 거짓 종교에 대한 주석”, 죤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첫 번째 교의학 지침서로 전해지고 있다. 이 책의 특징은 로마서의 순서에 따라서 기독교의 진리를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특히 기독교의 윤리적 요소를 강조하면서 신앙을 구속받은 자들의 도덕적 행동이라고 강조함. 도덕적 행동과 자유의지를 강조하다 보면 은혜구원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배제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해 주고 있다. 9)
“참 종교화 거짓 종교에 대한 주석” 저서는 하나님의 절재 주권과 하나님에 대한 전적의존을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기독교 강요” 저서의 사상은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또한 신론에서부터 출발하여 기독교 진리의 정체성과 절대성을 통한 기독교의 참 모습을 바로 알 수 있도록 안내해주고 있다.
“현대신학의 아버지”라고 말학기도하나 그의 신학은 사실상 로마카톨릭 교회나 개신교는 물론 합리주의나 신비주의까지도 모든 견해를 시인하고 종교다원주의적인 입장에서 이들 모든 종교들을 결합시켜 보려고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로 끝나고 성공하지 못했다.
제2장에서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학은 언제나 첫째는 그 중심이 하나님이어야 하고, 그 사상의 출발 근거를 성경에다 두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이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어떠한 사상이나 학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없는 신학은 신학이 아니며, 성경에서 떠난 사상은 올바른 기독교 사상이라고 할 수가 없다. 동시에 기독교 신학은 신앙을 떠나서 행하는 것은 진실한 의미에서의 신학이 아니기 때문에 신학 이전에 먼저 신앙인일 것을 요구 하고 있다.
첫째, 헤겔의 경우
“초자연주의는 옹호할 수 없다”고 단정해 버렸다. 그들은 신학을 원리상으로나 본질상으로 사변적이기 때문에 철학적인 견지에서 신학을 연구하도록 장려했다.
둘째, 다우브의 경우
다우브는 개신교의 사변적 신학의 창시자로 통한다. 기독교 신학은 사변적이기 이전에 계시적이고, 동시에 경험적이어서 믿음의 실상과 증거를 나타내게 된다.
셋째, 슈트라우스와 비데르만의 경우
슈트라우스의 “:기독교 교의학”은 순전히 비판적이고 파괴적일 뿐이다. 비데르만의 “기독교 교의학”에서는 헤겔의 원리들을 순전히 범신론적인 방식으로 논했다. 그들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인격성까지도 부인해 버렸다.
이러한 의미에서 생각할 때에 사변적 신학은 신학 그 자체가 성경적이라거나 기독교 교의적인 것이 아니라, 기성교회와 신학에 대한 도전내지 부인 이라고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는 신학은 신학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학은 언제나 첫째는 그 중심이 하나님 이어야 하고, 그 사상의 출발 근거를 성경에다 두어야 한다는 분명하고 철저한 기준을 갖는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상이나 학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없는 신학은 신학이 아니며, 성경에서 떠난 사상은 올바른 기독교 사상이라고 할 수가 없다. 동시에 기독교 신학은 신앙을 떠나서 행하는 것은 진실한 의미에서의 신학이 아니기 때문에 신학 이전에 먼저 신앙인일 것을 요구받는다.
헤겔학파의 부정적인 입장은 자연히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신루터파는 성경에 근거하여 이전의 고백적인 진리를 회복하고자 진지하게 시도했다. 엘랑겐의 토마시우스는 그의 저서“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서 그리스도론을 중심적인 교리로 만들고 있다. 속죄론에서 만족설을 주장하고 있으나 삼위일체 교리에서는 일종의 종속설을 피하기가 어렵게 하고 있다. 카미스는 “루터교의 교의학”에서 삼위일체적 방법을 따르고 있다. 엘랑겐의 프랭크는 “기독교 진리의 체재”라는 그의 저서를 통해서 신학의 두 가지 인식의 원리를 요청하고 있다. 하나님은 존재의 원리에 의해 통일체로 유지되는 성경과 신앙에서 주체이시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성육신의 사상은 기도교 신학의 중심사상이며, 이것으로부터 그의 분류원리를 이끌어 내고 있다. 필립피는 독일에서 순수 루터교의 최대대표자로 알려지고 있다. 그의 “교의학”은 교회론을 엄밀하게 신앙고백적인 관점에서 명료하고 정연하게 해설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교의학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인간의 회복사상을 잘 설명하고자 추구하는 것이다.
루터파처럼 사변주의 운동을 심하게 비판하지는 않고, 그 중도에서 타협을 모색하고 나서기 때문에 중도파 신학이라는 말을 듣니다. 하나님의 객관적인 계시가 아닌 주관적인 종교의식에서 그들의 출발점을 찾고 있다. 도너는 신앙고백에 대해서 공감의 태도를 취하는 듯 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자유롭게 비판을 하고는 자기의 체계속에 정통 곧 성경과는 조화될 수 없는 온갖 종류의 사변적인 요소들을 혼합시키고 있다. 그의 “기독교 교의학의 체계”에서 삼위일체 교리를 설명하려는 시도와 로고스가 점진적으로 결합된 이상적 인간으로서의 그리스도 개념에 아주 뚜렷이 나타나 있다.
유리우스 뮬러는 위대한 도덕적 열심과 진리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진 사람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의 “기독교의 죄론”은 죄론에 관한 지금까지 가장 위대한 논문 중의 하나로 통하고 있다. 각 사람이 죄를 짓도록 현세 이전에 스스로 결정했다는 고대의 이론을 되살려서, 인간은 날 때부터 죄악 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각 개인의 삶에 있어서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아담의 죄에 의한 원죄나 죄의 유전으로 인하여 사람이 처음 모태에서 태아 날 때부터 죄 아래서 태어나게 된다는 문제 등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설명을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알버트 리츌을 추종하는 자들은 역사적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특징인 그 설립자에게 발견된다는 화신 외에는 의견의 일치를 이룰 수 없이 산만하다.
리츌의 저서“기독교의 칭의 및 속죄교리”라는 책에서 자기의 사상을 잘 드러내고 있는데 그는 여기에서 자기가 일반 개신교와 구체적으로는 루터교회의 교리와도 조화를 이룬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신학으로부터 형이상학 특히 존재론을 제거하려고 하면서도, 스스로는 완전히 사변적인 인식론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의 학문적인 입장을 불가지론의 입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헬만은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의 교제”라는 그의 저서를 통해서 리츌신학의 주된 원리들을 보편화 시키는데 크게 공헌했다. 그는 리츌 보다 더 주관적이고, 덜 성경적이며, 리츌의 합리적 요소들을 일종의 종교적 신비주의로 바꾸는 경향을 보인다.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합리주의, 초자연주의, 사변적 운동, 경험의 신학 및 주관주의를 철저히 반대하고 있다. 19세기 초는 사실상 개혁주의 신학의 사양기라고 할 수 있다.10) 오늘에 이르기까지 스코틀랜드의 힐(Hill)을 비롯하여, 딕크(Dick), 컨닝헴(Cunninghum)등이나 미국의 챨스 하지(Charles Hodge), 그리고 스미스(H. B. Smith), 워필드(Warfield)같은 유명한 개혁주의파 신학자들이 일어나서 개혁주의 신학의 기반을 탄탄히 구축해 놓았다. 특히 실용주가 판을 치고 있는 미국 사회에서도 성경적 개혁주의 신앙을 고수하는 보수주의 신학자들의 활동은 기울어져 가는 신학사상의 변질을 막는데 크게 공헌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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