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오순절운동의 정의와 종류

하나님아들 2019. 4. 20. 00:23

오순절운동의 정의와 종류 

이 글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오순절운동'이란 용어가 사용되는데 과연 오순절운동이란 무엇인가? 이 오순절운동이란 용어는 1900년대부터 현재까지 오순절운동의 가장 일반적인 표현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한마디로 말하면 성령운동을 가리킨다. 

이 오순절운동을 일반적으로 세 종류로 구분한다. 정통적 오순절운동(Classical Pentecostal Movement), 신오순절운동(Neo-Pentecostal Movement or New Pentecostal Movement) 그리고 카톨릭 오순절운동(Catholic Pentecostalism)이 그것이다. 
정통적 오순절운동에는 20세기 초엽에 결성된 교단들이 속해 있다. 이에 속한 교단들은 가장 큰 하나님의 성회(The Assemblies of God), 하나님의 교회(The Church of God in Cleveland), 흑인들로 구성된 그리스도 하나님의 교회(The Church of God in Christ), 연합오순절교회(The United Pentecostal Church, 이 교단은 오직 예수파로서 비삼위일체 신자들이다), 미국 오순절 하나님의 교회(The Pentecostal Church of God in America), 국제 복음교회(The International Church of the Foursquare Gospel), 오랄 로버쯔(Oral Roberts)가 속해 있었던 오순절 성결교회(The Pentecostal Holiness Church)등이다. 

신오순절운동은 최근에는 은사운동(Charismatic Movement)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왜냐하면 성령세례 받은 증거를 방언으로 못박지 않고 다른 은사를 체험하여도 성령을 받은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들은 개인적으로 자유스럽게 가정에서나 아파트에서 모여 기도회를 가짐으로 오순절 체험을 함으로 영적 갈증을 해결하며 은사운동을 하고 있다. 
이 운동은 1950년대에 전혀 예상치 않았던 오순절 현상이 나타남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1960년 4월 3일 Dennis Bennett 신부가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밴 나이스 성공회(Van Nuys Episcopal Church)의 그의 회중 앞에서 '성령이 나의 입술을 사로잡아 방언과 새로운 형식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능력있는 찬양과 감사의 말을 했다'고 그의 강단으로부터 고백함으로 공식화 되었다. Dennis Bennett은 지금도 오순절운동의 지도자로 일하고 있다. 
이 신오순절 신자들은 성공회,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개혁교, 침례교, 형제교회(Brethren Church),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 그리스도교회(Church of Christ), 그리스도 제자교회(Disciples of Christ), 멘노나이트교(Mennonites), 그리고 다른 개신교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오순절운동의 마지막 종류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여 일어난 놀라운 카톨릭내에서 일어난 오순절운동이다. 이 카톨릭 오순절운동은 1967년 몇 명의 교수들과 학생들이 두퀘스트(Duquesne)와 노틀 담(Notre Da-me)대학에 함께 모여 오순절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하나님께 구하였고, 그후 수천의 카톨릭 신자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였고 방언을 말하였다. 
카톨릭 오순절운동의 지도자인 Edward D. O'Conner는 그때를 더 자세히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사건은 초대교회에서나 알고 있는 것같은 은사적 활동(Charismatic activity)의 나타남으로 특징지어졌다. 그들 중 대부분이 방언 은사를 받았고, 또 다른 은사 즉, 예언, 영분별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The Power of exorcism)을 받았다. 이 체험의 결과로 하나의 작은 기도 모임이 형성되었다. 
이상과 같이 오순절운동을 세 종류로 구분했으나 분명한 구분을 하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왜냐하면 정통적 오순절 신자들 중에도 성령세례 받은 증거를 방언이라고 확실히 고백하지 않는 자들도 있고, 반면에 신오순절 신자들 중에도 성령세례 받은 증거로 방언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2. 현대 오순절운동(1900-) 
현대 오순절운동의 초기에 오순절 체험을 한 신자들은 그들 자신의 교회들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래서 오순절 체험을 한 신자들은 가정이나 교회 이외의 장소에 모여 오순절 예배의 자유를 누렸고, 성령의 세례를 받은 목회자들이 이 운동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전통적 교회들은 이들을 이해하고 포용하기보다 오히려 배제함으로 오순절 체험을 한 오순절 신자들은 그들의 교단을 창설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20세기 초기에 하나님의 성회, 하나님의 교회(Cleveland), 오순절 하나님의 교회, 성경표준교회 등이 조직되었다. 
오순절 신자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거리에서, 교도소에서 복음을 전했고, 건물을 빌려 교회와 선교기관을 설립하였고, 사회 밑바닥에 있는 자들에게 복음 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특히 치료의 복음을 전함으로 가정의 문을 쉽게 열게 하여 전도의 큰 성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초기 현대 오순절운동은 오순절 체험을 한 신자들이 자신의 교회의 핍박으로 교회를 나와 오순절교회에 다녀야 했으나, 1960년대 이후에는 자신들의 교단에 머물러 있으면서 오순절운동을 하고 있다. 
이 운동을 신오순절운동 또는 은사운동이라 부른다. 이 은사운동에 참여한 신자들은 성공회, 루터교, 장로교, 침례교, 형제교회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주시할 것은 우리의 이성을 초월하여 일어나고 있는 카톨릭 오순절운동이다. 이 운동은 1967년부터 카톨릭대학에서 교수들과 학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운동으로 카톨릭에 큰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1)초기 현대 오순절운동의 인도자들 
가. 촬스F.파아함(Charles F. Parham) 
① 파아함의 생애 

② 파아함의 사역 
파아함은 1896년 Sarah E. Thistlethwaite와 결혼하여 1878년 토페카에 와서 '벧엘 치유의 집'(The Bethel Healing Home)을 설립하였다. 
파아함은 믿음으로 이 기관을 운영하였고, 어떤 봉사나 접대에도 돈을 받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관심있는 성도들의 연보를 통해 필요한 물질을 제공하신다는 믿음에 기초하여 운영하였다. 
또한 그는 「사도적 믿음」(The Apostolic Faith)이란 잡지의 출판을 시작하여 한달에 두 번씩 출판하였다. 이것은 무료로 배부하여 오순절 메시지의 전달을 위해 사용하였다. 
1900년 후반에 파아함은 놀라운 영적 사역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 그들의 사역을 알기 위해 여러 곳을 여행하였는데 매인(Maine)주의 Shiloah에 있는 Stanford의 성경학교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이 학교는 수업료도 없었고, 기도가 교과과정의 중요한 위치에 있었고 사용되는 교과서는 셩경이었다. 이 모든 것이 후에 설립한 그의 학교인 벧엘학교에서 사용되었다. 
Kendrick은 '그는 이 학교가 현대 오순절운동의 탄생지가 되리라고 거의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토페카에서 1900년 10월 15일 '벧엘 신학교' (The College of Bethel)로서 후에 알려진 성경학교를 열었다.…교과서는 오직 셩경이었다…약 40명의 학생이 입학하였다. 수금이나 간청이 없었고 식비나 수업료를 징수하지 않았다.” 

'벧엘 신학교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위한 효과적인 증인 개발을 위해 영적 분위기에서 집중적인 연구를 위한 것이었다.' 이 학교의 중요한 세 가지 프로그램이 있었다. 
첫째는 성경의 주제를 가지고 성경만을 교과서로 사용하면서 귀납적인 성경연구방법을 사용하였다. 
둘째는 기도였다. '기도탑'(Prayer Tower)에서 자원한 학생들이 계속하여 3시간씩 기도 하였고, 때로는 밤을 새며 주님을 기다렸다. 
셋째는 실천적 봉사였는데, 학생들은 파아함의 선교와 토페카 시민들의 가정방문을 하여 전도하였다. 

그런데 파아함은 1900년 12월 31일에 집회에서 돌아와 아침 10시에 종을 울려 학생들을 교회에 모이게 하고, 집회가기 전에 그가 학생들에게 준 과제의 연구결과를 보고하게 했는데 사도행적에 나타난 오순절 축복의 여러 이야기에서 비록 다른 일들이 일었으나 모든 경우의 공통분모는 그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이 참된 성령세례의 성경적 증거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후에 J. Roswell Flower는 이 결정이 현대 오순절운동 탄생을 특수하게 표시한 것이라고 하였다. 

③ 파아함의 신학 
㉠ 구원의 위기체험을 강조하였다.
Horace Bushnell같이 양육(nurture)에 의한 점진적인 개종의 개념을 완전히 거부하고 오직 '위기체험'(Crisis Experience)의 개종을 주장하였다. 다시 말하면 파아함은 분명하고 순간적인 구원의 체험을 강조하였다. 

㉡ 파아함은 성화를 가르쳤다. 
구원의 교리와 함께 성화의 교리를 가르쳤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두 번째 역사인데, 이 은혜의 역사는 완전히 타고난 죄(inbred sin)를 파괴시킨다고 보았다. 

㉢ 파아함은 성령세례의 첫 증거를 방언으로 보았다. 

㉣ 파아함은 믿음치료의 교리(The Doctrine of Faith Healing)를 가르치고 사역을 하였다. 

㉤ 파아함은 전 천년주의(Premilleninialism)를 강조하였다. 전 천년주의란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 왕국의 수립과 구원받은 성도들의 부활이 환란 전에 있을 것이라고 믿는 교리이다. 

위의 ㉠,㉡,㉣,㉤은 파아함이 성결운동(Holiness Movement)에서 영향을 받았으며, 위의 다섯가지 교리는 현대 오순절운동의 교리적인 기초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나. 윌리암 J. 씨무어(William J. Seymour)-Azusa Street부흥 
토페카의 벧엘신학교에서 일어난 부흥은 Los Angeles의 Azusa Street에서 일어난 부흥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남흑인성결교(Southern Black Holiness Church)의 설교자인 Seymour는 파아함의 휴스톤 신학교에서 1905년부터 1906년의 가을학기까지 교육을 받았다. Seymour는 파아함의 기본적인 교리인 '칭의', '성화', '성령세례의 첫 증거로서의 방언 말함', '신유' 그리고 '전 천년 그리스도의 재림'을 받아들였다. 

① 본니 브래 거리 (Bonnie Brea Street) 
Seymour는 1906년 Los Angeles시에 있는 흑인 나사렛교회의 여자 설교사인 Hutchinson 여사로부터 초청을 받아 L.A.에 와서 첫 주일 아침예배에 사도행전 2장 4절을 본문으로 성령세례에 대하여 설교를 하였다. 그때까지는 자신도 성령세례의 체험을 하지 못했었다. 
그날 오후에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교회로 갔으나 교회의 문은 잠겼고, 그는 거짓 교리를 설교했다는 이유로 배척당했다. Seymour는 할 수 없이 그의 집회를 North Bonnie Brae Street 214번지에 있는 침례교인의 가정집으로 옮겼다.
여기에서 첫 오순절의 확산이 있게 되었는데, 1906년 4월 9일 집회는 다음과 같았다. 
마치 번갯불이 전광에 맞은 것같이 모든 사람들이 의자에서 마루로 떨어졌다. 일곱명이 갖가지의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고 하나님을 찬미하였다. 그 외침들은 강렬했고 컸었다! 밖에 모여든 군중들은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 하면서 놀랬었다. 즉시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셨다는 소문이 그 도시에 퍼졌다. 백인들이 흑인 성도들과 합류하였고, Lydia Anderson이 백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은혜 받게 되었다. Seymour도 4월 12일 그가 설교한 사도행전 2장 4절의 체험을 하였다. Bonnie Brae 거리의 집은 몰려드는 수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가 없었다. 

② 아주사 거리(Azusa Street) 
Bonnie Brae 거리에 몰려 온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집회장소를 Azusa Street 312번지로 옮겼다. 이곳에서는 3년간이나 부흥이 계속되었다. 한 목격자는 다음과 같이 아주사 부흥에 대해 말했다. 
Los Angeles에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이 임하고 있다는 뉴스가 멀리 퍼졌다…악기도 사용치 않고, 필요치도 않았다. 성가대도 없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천사들의 밴드 소리가 성령 안에서 들려졌고, 하늘의 노랫소리도 들려졌다. 헌금하지 않았고 집회를 광고하기 위해 안내장들이 우송된 적도 없었다. 
이 집회 뒤에 조직은 없없다. 하나님과 만난 자마다 자신이 성령께서 이끌고 있는 집회에 들어왔음을 금방 깨달았다. 한 형제는 그의 기차가 도시에 들어오기도 전에 부흥의 능력이 임하고 있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멀리서 온 여행자들은 Azusa 거리에 있는 본부로 향했다. 
그들은 거기에서 석회도료로 칠해진 2층 상점 건물을 보았다. 당신이 베들레헴의 마굿간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그곳에 하늘로부터 방문이 있으리라고 기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 사람들은 아침 10시부터 밤 12시까지 계속되는 강력한 오순절 부흥을 체험했다. 오순절은 수백의 심령에 왔다. 
다른 목격자인 A. W. Orwig는 'Seymour는 지금 이 집회에서 방언하는 것으로 돌아가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노력하자고 말했다… Seymour 형제는 계속적으로 기름부은 그리스도의 역사와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고, 매우 진지하게 철저한 회심, 심령의 성결, 삶, 그리고 성령충만을 역설하였다'고 하였다. 
부흥이 계속되자 Seymour와 그의 동료들은 4면의 월간 팜플렛인 「The Apostolic Faith」을 간행하였는데 첫해에 보급부수가 5,000부에서 20,000부로 증가하였다. 뉴스는 계속 퍼지고 부흥은 계속되었다. '아주사 거리 부흥의 큰 의미는 이것이 오순절 부흥의 태동을 세계적인 운동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한 것이다.' 

③ 아주사 거리 부흥의 특성 
㉠ 거룩한 삶의 강조 
성결이 하나의 신학적인 개념에 불과한 것이 아닌, 그들의 실제 생활임을 말하였다. 
성결운동에 가담한 Seymour는 특히 성결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기도하는 자들이었고 그 들의 삶의 중심이 하나님을 구하는 것이었다. 오늘날은 의식적인 예배 순서와 악기의 반주로 인하여 참예배의 의미를 잃을 때가 많다. 

㉡ 성경의 권위 
그리스도의 중심과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였다. 

㉢ 복음전도 
구원받지 못한 영혼을 위해 큰 관심을 가졌다. 

㉣ 치료 
하나님을 인간의 모든 분야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으로 믿는 오순절 교인들은 육신의 병의 치료를 받았다. 현재에도 이 사역은 계속되고 있다. 

㉤ 종말의 예상 
'예수님의 곧 오신다'(Jesus is coming soon) 

㉥ 차별이 없었음 
아주사 거리 부흥은 얼굴색을 차별하지 않았고, 남녀의 구별이 없었고 무식한 자나 배운자나 다같이 기도하고 은혜받고 간증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겸손하였다. 얼마 후 에 백인교도들이 Azusa 거리에서 나와 그들만의 교회를 세웠으나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 BR>
다. 더함(W. H. Durham) 
W. H. Durham은 시카고의 오순절 부흥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였다. 처음 방언에 대한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냉담했으나 자신이 Los Angeles Azusa 거리를 방문하여 1907년 3월 2일 성령의 세례를 받고 시카고에 있는 North Avenue Mission에 돌아가 활동적인 오순절 설교자가 되었다. Durham은 Seymour 목사가 자기에 관해 한 예언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녁에 Seymour 목사는 일찍 쉬기 위해 가겠다고 말해다. 그리고 성령께서 자신에게 'Durham 형제는 오늘 저녁에 세례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면서 일어나 내려갔다. 그는 성령으로 충만한 시카고 목사의 앞으로의 모습을 보면서 '이 사람이 설교하는 곳은 어디나 성령이 임할 것이다'라고 예언하였다. 
Durham의 사역으로 하나님의 성회 초대의 의장이었던 E. N. Bell이 여기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 신유의 사역자인 Ainee Semple McPherson이 고침을 받았다. Durham의 사역에 관한 다음 이야기를 들어보자. 
어느날 저녁 그가 우리의 사도적 능력의 유산에 관한 설교를 하였었다. 루스드라에 있는 앉은뱅이에게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한 바울의 말을 인용하였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임하여 빛나는 눈으로 둘러보다가 손가락으로 첫 줄에 앉아 있는 젊은 절름발이를 가리키면서 '당신의 발로 일어서시오'하고 명령하였다. 그 젊은이는 캉가루같이 공중으로 펄쩍 뛰어 올랐다. 그리고는 달리기도 하고 발을 구르기도 하면서 치료에 대한 감사의 찬미를 드렸다. 
이 시카고의 부흥은 캐나다까지 펴졌고 그 후 Stone Church를 중심으로 계속되었다. 

② Durham의 신학 
Durham은 '성화는 십자가의 발 앞에서 받아야 할 선물'이라 하였다. 
나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그리고 깨끗케 하는 은혜의 두 역사를 취하는 교리에 반대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회심 때 죄의 본질을 하나님이 관계하지 않는다는 것에 반대하였고 아직도 반대한다. 나는 개종한 또는 거듭난 사람이 외면상으로 씻겨지고 깨끗해졌으나 그의 심령에 하나님에 대한 적의를 품고 있는 깨끗치 못한 것이 남아 있는 것을 반대한다. 
이것은 구원(Salvation)이 될 수 없다. 구원이란 내적 역사이다. 이것은 심령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본질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것은 옛 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모든 정죄와 죄책이 없어진 것을 뜻한다. 
위에서 말한 Durham의 견해는 Parham이나 Seymour의 3단계 구원(threestage way of Salvation)인 회심(Conversion), 성화(Sanctification), 방언 말하는 성령세례(Baptism of the Holy Spirit with Speaking in Tongues)의 패턴과 상반되는 것이다. 그래서 Durham은 Seymour에 의해 Apostolic Faith Church에서 추방당했다. 

Durham과 Seymour 사이의 신학적인 견해 차이는 현재까지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영속되고 있고, 이것은 미국 오순절운동이 당면한 가장 어려운 신학적인 문제로 남아 있다. Durham과 Seymour 사이의 불일치점은 다음 그림과 같다. 

(2)하나님의 성회 역사 
아주사 거리(Azusa Street)부흥은 전미국과 카나다에 급속히 퍼지게 되었다. Cashwell이 1907년 알라바마 주의 버밍험에서 부흥회를 열고 있을 때 전 감리교의 목사들인 H. G. Rodgers와 M. M. Pinson이 오순절 체험을 하였고, 이들이 후에 '미시시피 벨리의 오순절 협회'(Pentecostal Association in the Mississippi Valley)를 설립하였는데 이 협회가 하나님의 성회의 선조였다. 
그런데 왜 이처럼 오순절운동이 급속히 퍼지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이 오순절 부흥 직전에 복음주의 신자들은 초자연적인 체험을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성결교 계통의 교단들은 분열의 아픔을 겪으면서 인간적인 아닌 초월적인 신적 역사하심을 열망하였다. 그런데 오순절 신자들은 교리적 체계의 범위나 정치의 차원을 초월하여 체험을 강조하였으므로, 이와같은 범교단적인 특성이 이 오순절운동을 넓게 퍼뜨리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오순절 신자들은 전도단을 구성하여 대중집회를 하였고, 정규간행물이 1900∼1908년 사이에 34종류나 나와 미국 전역에 오순절 메시지를 보냈다. 
또한 오순절운동은 보통 사람들의 종교적인 필요를 만나 줌으로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다. 오순절운동은 신유를 강조함으로 집회마다 병든 자들이 많이 나와 고침을 받았고, 그 신유의 체험이 신앙의 확신을 주어 덤으로 사는 삶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열렬히 전도하였다.


1단계

2단계

3단계

성결교회(Holiness church)

회심, 중생이라 부른다

성화 '성령세례' '제2축복'으로 부른다.

Parham
Seymour

중생

명확히 결정된 시간에 성화, 이런 성화 이해의 배경의 목회적 주제는 성령이 오직 깨끗케 된 심령에만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이다.

방언을 말하는 성령세례

Durham

중생

방언을 말하는 성령세례. 여기서 성화는 일생동안 계속되는 과정으로서 이해한다. 침례교도들의 성화의 이해로써 알려짐.


이 운동은 보통 사람들의 심리적인 필요도 만나 주었는데 예배에 참여하여 감정의 억압에서 해방되어 심리적인 자유함을 얻게 되었다. 
또한 이 오순절운동은 윤리적 표준에 의한 엄격한 율법 대신에 손뼉을 치며, 열정적 찬양, 악기를 사용하는 음악으로 성결된 무리의 영적 활동을 보여줌으로 확실한 소속감을 갖게 해 주었다. 
그리고 현세의 환경에 실망을 느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오순절 메시지는 새 희망을 주었고, 생동력을 폭발하게 하였다. 

3. 한국 오순절 성령 운동의 역사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복음을 전하기에 가장 어려운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불교와 샤머니즘의 부리 깊은 전통 가운데서 외부 문화를 받아드리기를 거부하였으므로, 한국은 '은둔의 나라' 류 통할만큼 페쇄적이었습니다. 
이 한국 땅에 처음으로 기독교가 전래된 것은 1784년 천주교 신부들에 의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천주교 신부들은 그 당시 무관심과 핍박과 심지어는 순교까지 치루어야 하는 복음에 대한 거센 저항에 부딪쳤습니다. 특히 1866년 대원군의 집권 당시에는 그 핍박이 극에 달하여, 약 8천 명의 천주교 주교와, 신부와, 신자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했습니다.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들이 서울 서쪽의 인천 항구에 첫 발을 디딘 것은 천주교가 들어온 지 약 1백 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이들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하나님께서 길을 예비하셨으니, 많은 사람들이 중국과 일본에서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였을 뿐 아니라 이 수정에 의해 마가복음서가 일본에서 한국어로 번역 출판되었고 (언더우드 아펜젤러 목사가 이 성경을 가지고 한국에 입국), 또한 1870년대에 존 로스(John Ross) 선교사에 의해 중국에서 한국어 성경이 번역되었습니다. 
1844년, 장로교 선교사인 호레이스 언더우드(Horace Underwood)와 감리교 선교사인 헨리 아펜젤러(Henry Appenzeller)가 나란히 한국 땅에 발을 디디게 되었습니다. 두 선교사는 모두 학생 자발 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출신으로서 같은 배를 타고 나란히 한국에 선교사로 온 것입니다. 그런데 개신교 선교사로서 이들보다도 먼저 한국에 도착하였으나 순교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1865년에 영국 웨일즈에서 온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 선교사로 그가 탄 배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중 썰물 때에 배가 모래 위에 정지하게 되면서 당시에 서양 문물을 배척하고 증오하던 감정이 팽배해 있던 한국인들에 의해 순교를 당하고, 배는 불타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토마스 선교사는 순교 직전에 로스에 의해 한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구경꾼들에게 던졌습니다. 비록 성공의 대부분이 불에 탔으나, 일부남아 있던 성경을 읽고 토마스 목사를 죽였던 사람들도 회심하고, 주님을 믿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의 선교 역사는 초기부터 장로교가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교단으로 형성되었습니다. 그 주된 이유는 천주교나 감리교보다 장로교에서 더 많은 선교사들을 한국에 파손했으며, 또한 장로교가 네비우스 선교 정책을 효과적으로 적용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감리교와 천주교의 성장도 있었지만, 장로교보다는 뒤떨어진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의 19세기 선교 역사는 그리 평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900년이 시작되고, 20세기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지만 아직 한국의 기독교는 그리 크게 부흥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한국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이웃 나라 일본과 같이 소수의 기독교 인구를 가진 나라에 불과했습니다.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캐나다에서 온 감리교 선교사 하디(R.A.Hardie)의 주도하에 1903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이루어졌던 성경 공부를 통하여 회개와 자백의 거대한 물결이 일었으며, 이를 시점으로 하여 성령의 부흥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부흥 운동의 결과는 개개인의 성결한 생활로 이어졌는데, 이것은 그때 이후 지금까지 한국교회에 내려오는 대표적인 신앙 형태이면서 특징이 되었습니다. 
원산에 이어 평안남도 평양에서도 1904년에서 1907년 사이에 거대한 부흥 운동의 물결이 일어났는데, 회개를 촉구하고 성결한 삶을 강조한 이 부흥 운동으로 인하여 한국 교회는 급속하게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1906년에 평양 신학교 학생이었던 길선주 장로가 메일 새벽 4시 30분에 드리는 새벽 기도회를 시작하면서 이것은 철야 기도와 함께 지금까지 한국 교회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아름다운 신앙전통으로 지켜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존슨선교사(H.A.Johnson)가 20세기초에 전 세계 성령 운동의 시발지였던 영국의 웨일즈 부흥 운동이 같은 시기의 한국의 부흥운동과 무관하지 않음을 주장하였다는 점입니다. 
1907년에 또다시 거대한 부흥운동이 한반도를 뒤덮었습니다. 이 두 번째 부흥 운동은 말씀 사경회 운동과 열정적인 통성 기도 운동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길선주 목사의 인도 아래 남자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드리는 자리에서 큰 회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예배에 모인 남자들은 모두 가슴을 치고 통곡하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으며, 같이 참석하였던 미국과 캐나다의 선교사들까지도 일제히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블레어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말로 형언할 수 업는...... 혼돈스러운 무질서의 상태가 아니라, 건전한 성령의 역사가 광범위하게 조화를 이루어 그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심령을 하나로 엮었다. 그리하여 통성 기도는 하나님의 보좌를 흔드는 기도의 바다가 되어 울려 퍼졌다. 

이 열정적인 통성 기도는 그후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아름다운 신앙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비록 이 집회에서 방언이나 신유와 같은 성령의 은사가 나타났다는 역사적 기록은 찾을 수 업지만, 한국과 세계를 향한 새로운 오순절 부흥 운동이 일어날 것이라는 많은 예언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일어난 현대 오순절 운동이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한 때는 1928년이었습니다. 1903년부터 1907년까지 있었던 놀라운 부흥의 역사는 이후에 나타날 한국 오순절 부흥의 역사의 길을 예비한 셈이었습니다. 1928년 이전까지 한국에는 아직 성령 세례의 증거로 나타나는 방언에 대한 가르침이 없었습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아주사 거리에서 일어난 현대 오순절 운동을 한국에 소개한 사람은 1928년 봄에 인천항을 통해 입국한 미국 오순절 선교사 메리 럼시(Mary Rumsey)였습니다.그녀는 1907년에 아주사 거리에서 있었던 오순절 부흥의 역사와 성령 세례를 체험하고, 방언을 말하는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녀는 로스앤젤레스에서 고향인 뉴욕주로 돌아가 로체스터에 소재한 엘림 선교회(Elim Faith Home and Missionary Society)에 가입하였습니다. 그녀는 일본 선교사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1907년경 주님으로부터 '한국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던 것을 기억하고, 20년만에 그 명령에 순종하여 한국에 선교사로 왔습니다. 
럼시 선교사가 한국에 도착했을 당시인 1928년에 한국은 일본에 의해 강점을 당하고 있었고, 진정한 신앙의 자유도 거의 보장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처음으로 사역하기 시작한 곳은 1903년 원산 부흥의 주역이었던 하디 선교사가 세운 감리교 선교 재단이 운영하는 병원으로 이 병원의 일부 시설은 새로 부임하는 선교사들을 위한 임시 거처로 제공되기도 했습니다. 
이 병원에서 럼시 선교사는 방언을 말하며, 여러 가지 은사를 나타내면서 오순절 적인 예배를 인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당시 구세군 사역자이던 허홍을 만나게 되는데, 후에 허홍은 한국 오순절운동의 부흥 발전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럼시 선교사는 허흥과 함께 서울에서 서빙고 오순절 교회를 최초로 개척하였고, 일본에서 오순절 신학교인 성서 신학원을 졸업하고 돌아온 박성산 목사에게 이 교회를 목회하도록 맡겼습니다. 
이때로부터 10년 후인 1938년 10월에 서빙고 교회는 세 명의 목사를 인수하고, 교회 이름을 '조선 오순절 교회 포교소'로 바꾸었습니다. 이즈음에 다른 오순절 교회들도 개척되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당시인 1940년대초에는 한국에 6개의 오순절 예배처소와 10명의 안수받은 목회자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럼시가 한국에 도착하던 해에 한국에는 자생적인 오순절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것을 주도한 인물이 바로 감리교의 젊은 목사였던 이용도였습니다. 이용도 목사가 인도하는 집회에서는 많은 성도들이 방언과 신유를 체험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비록 럼시 선교사와 이용도 목사와의 연계성은 불확실하였지만, 이 두 사람은 1928년 오순절 운동을 한국에 소개하는 도구로 동시에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용도 목사는 1932년에 33세의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용도 목사의 사역은 너무 감성에 호소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국 교회에 업적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1928년에 처음으로 세운 기도원입니다, 그후로 많은 기도원들이 생겨나서 사람들은 바쁜 일상사에서 잠시 벗어나 오직 지도와 금식에 전념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또한 성령의 은사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하였으므로, 일부 사람들은 이용도 목사를 일컬어 '한국 오순절주의의 아버지' 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이용도 목사 이후 한국 오순절 운동을 일으킨 인물로는 1950년대부터 기도원을 통한 영성 개발에 힘쓴 나운몽 장로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기도원을 통해 대규모의 오순절 적인 부흥회를 인도하였습니다. 
1940년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메리 럼시 선교사를 포함한 한국 주제 선교사들을 강제로 출국시켰습니다. 이 일로 인해 한국의 오순절 운동은 잠시동안 성장에 지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일제가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면서 신앙의 도리를 지키기 원하는 성도들이 감옥을 가든지 아니면 몰래 지하 교회를 조직하여 예배를 드리는 등, 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다행스럽게도 1945년에 일본이 패전하여 전쟁이 끝나고, 교회는 다시 예배와 전도의 자유를 회복하고, 전쟁의 폐허 위에 새로운 교회를 건설하고자 기도하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미국에서 최초로 정식 오순절 교단 출신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한국에 오순절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하나님의 성회에서 한국에 정식으로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는 아브넬 체넛스(Abner Chesnut)입니다 그는 1952년에 입국하여 박성산 목사가 이끌고 있던 '한국 오순절 교회 선교회'를 돕게 되었습니다. 
1953년에 최초로 '한국 하나님의 성회'가 서빙고 교회에서 조직되었고, 여러 소속 교회들은 정식으로 하나님의 성회 교회임을 표방하게 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954년에는 한국에 최초로 하나님의 성회 신학교가 개교되었습니다. 여기서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 중에는 능력있고 경건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후에 순복음 중앙 교회(현 여의도 순복음 교회)를 개척한 조용기 목사였습니다. 
조용기 목사는 불교를 믿는 가정에서 성장하여 원래는 의사가 되는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청년 시절 앓게 된 결핵으로 인하여 사경을 헤매다가 기적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신유를 체험하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주의 종으로 부르시는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1958년에 서울 변두리의 불광동 빈민 지역에서 처음으로 천막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그는 여기서 3년만에 출석 성도수가 3백명인 교회로 성장하는데 성공하였고, 1961년에는 서대문으로 나와 다시 1천5백 석의 좌석을 가진 순복음 중앙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이즈음에 미국의 오순절 선교사 샘 타드(Sam Todd)가 한국을 방문하여 부흥회를 가졌고, 이때 조 목사는 통역을 하면서 신유와 축복 등, 귀중한 미국 오순절 신학을 타드 목사를 통해 배우게 되었습니다. 원래 타드 목사가 전해 준 신유와 축복 등의 메시지를 개발하여 전미국을 뜨겁게 부흥시키고 있던 분은 오랄 로버츠(Oral Roberts) 목사였습니다. 
타드 목사를 통해 알게 된 오랄 로버츠의 신앙적 강조점을 조용기 목사가 한국적으로 알맞게 적용시키자, 서대문의 순복음 중앙교회는 가난과 절망으로 신음하고 있던 전후 한국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람과 희망을 심어 주었고, 그 결과 교회에는 언제나 수많은 성도들로 인산 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이 서대문에 있는 순복음 중앙 교회에서는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1964년에는 성도수가 무려 2천명으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조용기 목사는 혼자서는 이렇게 많은 성도들을 모두 맡아 목회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고, 마침내 이후 교회 부흥의 기폭제가 된 '구역 조직'을 만들어 시행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