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론!! 영!! 혼!! 육!!

[스크랩] 인간론/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아들 2019. 2. 27.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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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론>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강대훈 엮음



                                              1. 인간 이해의 중요성

 인간에 대한 이해에 따라 세계관이 달라진다. 분파의 원인이 된다. 삶의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로 인간 이해는 중요하다. 인간 이해에 따라 목회자와 성도들 사이의 관계가 결정된다. 성도들의 문화관에 영향을 준다. 윤리적 사건에 대해서도 해석과 적용이 인간 이해에 따라 달라진다. 해석의 차이에 따라 죄가 되기도 하고 자유를 위한 몸짓이 되기도 한다. 인간 이해에 따라 동일한 사건인데도 죄책감을 주기도 하고 자긍심을 준다. 기독교인은 어떻게 인간 이해를 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인간 이해는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모두에게 중요한 개념이다.
 우리는 인간이다. 인간은 지식의 주체이자 대상이다.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고 자신에 대해서 반성할 수 있다. 인간만이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고민할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그의 저술 중의 하나인 대화록을 통하여 자기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묘사하고 있다. 플라톤이 묘사하고 있는 소크라테스는 다름아닌 “자기를 알기 위한”지혜를 추구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는 사람이다. 그래서 철학적 인간학의 창시자인 막스 쉘러(Max Scheller)는 철학의 문제는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Was ist der Mensch?)라는 하나의 문제로 귀착된다고 했다. 인간학은 자연과학적 인간학, 철학적 인간학, 신학적 인간학으로 구분된다. 자연과학적 인간학은 자연과학적 방법에 의해 획득된 지식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인간에 관한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이론을 성립시키지 못하고 경험과학에 의한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인간의 양상을 사실적으로 기술하는 정도에 그치기 때문에 윤리나 종교적인 영역에는 함구할 수밖에 없다. 철학적 인간학은 인간의 본질을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이해하려고 한다. 인간에 대해서 각자 다른 견해를 가지게 되며 절대적인 기준을 갖지 못한다.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인간을 이해하기 때문에 독단성에 빠지기 쉽다. 반면 신학적 인간학은 계시의존적이다. 현상적인 것도, 경험적인 것도, 귀납적인 것도 아니며 오히려 연역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를 부여하고 인간을 이해한다. 인간을 하나님의 천지 창조의 목적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존재로 보기 때문에 창조론의 구조 속에서 인간을 이해하며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을 이해한다. 인간을 하나님, 다시 말해 인간론을 신론의 구조 속에서 다루는 궁극적인 이유는 인간을 이해하는 목적과도 연결된다. 우리가 인간을 이해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기 위함이요 하나님을 경외하고 더욱 깊이 섬기기 위함이다. 하나님 중심으로 인간을 이해하려고 할 때 반드시 기억해야할 점은, 성경 본문에 기초해서 인간을 이해해야지 인간이 처한 상황에서 시작하면 인간 이해가 변질될 수 있다. 상황에 따라서 갖게 된 인간 이해는 성경의 절대적인 가치 앞에서 모두 상대화되어야 한다. 성경 계시에 의존해서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은 구원사적 순서에 따라서 인간을 이해한다고 할 수 있는데, 바빙크(Bavink), 베르코프(Berkhof) 등의 개혁파 신학자들은 창조­타락­구속이라는 구원사적 틀로 인간론을 서술했다. 이들의 견해는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 ① 원래 상태의 인간, ② 부패 상태의 인간, ③ 은혜 상태의 인간, ④ 영광 상태의 인간의 순서를 따르는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 실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본 논문에서는 구원사의 순서에 따라 1) 인간의 형상, 2) 인간의 구조적 본성, 3) 부패와 은혜 상태의 인간에 대해서 다루도록 하겠다.


                                              2. 인간, 하나님의 형상

 무엇이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가?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다른점은 무엇인가? 성경은 오직 인간만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을 창조의 면류관으로 본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어떤 의미인가?

 2.1. 성경적 근거

 2.1.1. 유독성(唯獨性)
 인간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점에 있다. 인간은 ‘종류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되었다.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계시요 하나님의 완전하신 덕을 반영하는 거울이지만,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독 인간만 하나님의 형상이다. 기독교인의 삶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 회복을 위한 계속적인 과정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신형상 개념은 기독교인에게 대단히 중요하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Then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in our likeness, and let them rule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air, over the livestock, over all the earth, and over all the creatures that move along the ground.”(창 1:26) 창세기 1:26은 인간 창조에 앞서 특별한 신적 협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점은 인간 창조의 유독성올 다시금 드러낸다. 왜냐하면, 다른 아무 피조물에게서도 인간 창조시 나타난 것과 같은 표현을 결코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2.1.2.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
형상은 히브리어로 첼렘(םꗞꙈ)이고 모양은 데무트(פוּחꕖ)다. 두 단어 사이의 개념 차이를 보자면, ‘첼렘’은 ‘새기다’(to carve)의 뜻을 ‘데무트’는 ‘비슷하다’(to be like)는 뜻을 갖고 있다. 그러나 두 단어는 별개의 내용이 아니라 히브리인의 ‘연구법’(parallelism)에 따라 표현된 것으로 교호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70인경과 벌게이트 라틴어 성경에는 접속사 kai와 et가 있어서 별개의 내용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이지만 히브리어 원문에는 접속사가 없다(ונחומדכ ונמצב). 따라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서 ‘형상’과 ‘모양’은 동일 실체를 나타내는 다른 단어로 보아야 한다.
 창세기에는 ‘모양’과 ‘형상’이 교호적으로 사용된 예가 나온다. 창세기 1:27에는 ‘형상’만 나온다. 5:1에는 ‘모양’, 9:6에는 ‘형상’으로 표현되었다. 의미에 있어 본질적 차이는 없다.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창 5:1)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 9:6)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2.1.3.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인가?
 창세기 1장에서 우리는 인간이 어떤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인가에 대해 유추해 볼 수 있다. 1) 피조물에 대한 통치에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여기서 최고의 통치권은 하나님께 있다. 2) 남자와 여자로 창조된 부분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남자와 여자가 창조됨으로써 인간은 사회적 존재(social being)가 되었다. 삼위일체로 합의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 반영된 것이다. 3) 하나님의 명령을 받으며 책임을 지는 존재, 곧 인격적 존재로 지음받은 것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발견된다(1:28).

   2.1.4. 타락하여 신형상을 상실했는가?
 어떤 이들은 인간이 죄악으로 타락했올 때 전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올 상실하였고 따라서 더 이상 신형상의 소유자로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창 5:1은 그와 같은 주장에 대하여 아무런 근거도 제공하지 않는다: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본문은 타락 이후에 일어난 사건의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아담에 대하여 여전히 하나님의 모 양으로 지은 바 되었다는 사실을 진술하고 있다. 만일, 그 당시 하나님의 형상이 전적으로 상실되어 버린 상태라고 한다면, 본문은 그와 같이 기술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의 형상이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더럽혀졌다(창 6:5; 롬 7:18)고는 생각할 수 있으나, 타락 이후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올 전적으로 상실해 버렸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범죄한 이후에도 인간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은 창세기 9장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1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 여 땅에 충만하라”는 명령은 다시 반복된다. 그리고 이제 동물들이 인간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계시되어지고, 인간은 동물의 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3절). 그러나 피채로 먹는 행위는 금지되었고(4절). 또한 사람을 죽인 동물이나 사람을 살해한 자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의 피를 요구하신다(5절).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올 지었음이니라”(6절)
 신약은 구약보다 더 많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임을 가르치고 있다.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약 3:8-9) 야고보는 확실히 동료 신자들을 향하여 저주할 때만 죄라고 하지 아니하였고,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그들을 저주할 때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 은 하나님의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고 그뿐 아니라 여전히 그 모 양올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 귀절이 제시하는 분명한 교훈은 비록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막대한 영향이 미쳐졌다고 할지라도 그 것으로 인해 신형상이 전적으로 제거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구속과 성화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을 수 있다. 신약의 여러 귀절들은 타락 이후의 인간에 대하여 하나님의 형상에로의 회복이 요청되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으며(엠 4:22-24; 골 3:9-10), 또한 그와 같은 귀절들은 인간의 영적이며 도덕적인 갱신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져 가는 점진적 과정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의 목적은 우리가 더욱 더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요 혹은 더욱 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다(롬 8 :29; 고후 3:18; 골 3:9-10; 엠 4:22-24).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안에 회복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은 신형상이 우리 속에 왜곡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처럼 타락한 인간일지라도 인간이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의 또 다른 국면은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을 올바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왜곡된 하나님의 형상은 회복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아직 마땅히 되어져야 할 완성된 하나님의 형상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성령에 의하여 점점 하나님을 온천히 반영할 수 있도록 변화 되고 있는 중이며, 미래에 언젠가는 온전히 하나님을 반영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형상에로의 갱신은 우선적으로 구속의 과정 속에서 성령의 내적 역사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 가능해진다.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되는 일은 직설적으로 묘사될 뿐 아니라(골 3:10), 동시에 명령적인 요구로 나타난다엠 4:24; 5:1).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 은사일 뿐아니라 또한 과제임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을 정리해 보면, 1) 구약과 약 3:9로부터 하나님의 형상에 관하여 매우 중요한 국면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타락한 인간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이다. 2) 그러나, 신약의 여러 귀절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또 다른 국면은 타락한 인간은 더욱 더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회복은 현재에 있어서 비록 하나의 과정이지만 미래에는 완성될 것이다. 이를 환언하면, 인간은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신형상의 온전한 회복은 절대 필요한 것이다. 결국 이와 같은 의미에서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죄로 말미암아 부패되고 오염되었다. 3) 타락한 인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볼 수밖에 없지만, 본질상 성령의 중생과 거룩케 하시는 사역을 떠나서는 불가능하다. 4) 하나님 형상의 왜곡은 구속의 과정 속에서 점진적으로 제거되어지며 마침내 도래할 삶 속에서 우리는 다시금 하나님을 온전히 반영하게 될 것이다. 5) 그러므로, 신형상 이해에 있어서 형상 개념이 가지는 두 가 지 측면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먼저,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잃어버릴 수 없는 국면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본질이다. 인간이 인간됨을 중지하지 않는 한 결코 상실될 수 없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은 또한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왜곡된 하나님에 대한 모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왜곡된 신형상은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회복되고 갱신되어야 한다.

 2.2. 자연주의적 견해

 자연주의적 견해의 대표적 학자들로는 클레멘트(Clement), 오리겐(Origenes), 저스틴(Justinus), 펠라기우스(Pelagius) 등이 있다. 이들은 알렉산드리아 학파 소속으로, 인간 이해에 있어 바울의 견해보다는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창1:26과 1:27을 관찰하면서 26절은 의도이며, 27절은 행동이라고 보고,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이렇게 생각했다: 하나님의 원래 계획은 인간을 ‘형상’(첼렘, םꗞꙈ)과 ‘모양’(데무트, פוּחꕖ)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창1:27)처럼 형상대로만 지으셨다. 그들은 형상을 플라톤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이성적 존재가 되게 한 것으로 해석했다. 본래 하나님의 계획 중에 있었던 ‘모양’은 창조시에 주어진 ‘형상’인 이성의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획득된다고 보았다. 하나님의 형상에 관해 공로주의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자유의지는 항상 죄의 문제와 함께 거론되게 되는데, 이들에 따르면 죄는 인간의 책임이며 거룩하게 되는 것도 역시 노력에 의한 인간의 자의적 산물이다. 인간은 원래 도덕적 중립의 상태로 지음받았고 인간의 공로로 거룩하게 될 수 있다고 봄으로써, 그들은 인간본성에 대한 낙관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이들 중에서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을 ‘가능성’으로 이해한다. 여기서 가능성이란 ‘완전을 향한 가능성’이다. 이런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 가능성은 결코 상실될 수 없다. 인간이 타락이라 할지라도 그대로 존재한다. 그는 창조시의 인간에게는 선택 능력으로서의 자유의지가 주어졌는데, 그것은 가치중립적인 것이라고 했다. 즉 거룩하지도 불결하지도 않은 중립적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자연주의적인 견해는 몇 가지 점에서 비판된다.
 1) 성경적 관점에서의 자연주의적 입장 비평: 성경의 여러 자료들을 살펴볼 때 불가하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아 선하고 의롭게 창조되었다. 중립적 인간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하고 의로운 존재로 창조되었다. 물론 창조주와 피조물의 간격은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닮았으나 피조적 양상으로 닮았다. 성경은 첫 사람 아담이 어린아이가 아니라 이미 성숙한 성인으로 지음받았다. 아담은 하룻 동안 이름을 지었는데, 이름짓기는 존재를 객관화하는 작업으로서 대단한 재능을 갖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주어졌다는 것은 인간이 책임적 결단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인격적 존재, 판단하고 결단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명령을 하신다. 첫 사람은 의식이 있고 본성도 선했으며 비록 유한하지만 참된 지식을 가졌다. 의로운 본성을 생래적으로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성경의 가르침은 중립적 본성을 주장하는 자연주의적 견해에 배치된다. 전도서 기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부터 정직하게 지으셨다고 한다. “나의 깨달은 것이 이것이라 곧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이니라”
 2) 자연주의적 사상 자체가 철학적 허구에 불과하다: 자연주의자들은 중립에서 도덕적 노력으로 거룩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데, 특색도 없고 개성도 없는 중립적 존재는 가능하지 않다. 아담은 역사적으로 실재한 사람으로서 차별성, 독특성을 갖고 있다. 단감에서 단감이 나온다. 엉겅퀴에서 포도가 맺히지 않는다. 선한 본질에서 선한 행동이, 악한 본질에서 악한 행동이 나온다.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본질에서 선이 나올 수 없다.
 3) 자연주의 견해로는 부패 상태와 원래 상태와의 구분이 모호하다. 인간이 타락했다는 것은 인간의 내면이 부패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는 자연주의자들은 인간은 타락했지만 이성 능력은 항구적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실질적 신앙 윤리적인 삶이 부패했는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이성이 부패하지 않았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는 논리다.

 2.3. 로마 카톨릭의 견해

 로마교회 안에도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다양한 이론이 존재하지만, 대체로 창조시 인간은 두 가지 은사, 자연적 은사와 초자연적 은사를 받았다고 한다. 이는 보통 자연과 은총이라는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자연적 은사란 이성, 양심, 판단력, 도덕성, 의지, 자유 등을 가리키는데, 이들이 서로 충돌되지 않고 조화를 이룬 상태로 창조되었고 한다. 그러나 타락 이전의 이러한 조화로운 자연적 의의 상태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저급한 욕구가 있어서 이성이나 양심에 대항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의지가 여기에 굴복하여 행동으로 나타나면 죄가 되는데, 이러한 경향을 인간이 스스로 제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연적인 은사 위에 추가적인 초자연적인 은사를 덧붙여주셨다고 한다. 이런 초자연적인 은사가 필요한 것은 인간의 저급한 욕구를 통제하기 위함이요, 자연적 은사만으로는 초월적 세계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연적인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구원에 이르는 지식, 삼위일체에 대한 신지식, 초월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 등과 같은 초자연적 은사가 덧붙여진 것이다.
 그런데 로마교회는 아담이 타락했을 때 파괴되고 상실된 것은 덧붙여진 초자연적 은사라고 한다. 그래서 구원에 이르는 지식도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자연적 은사들은 타락과 상관없이 건재하다고 한다. 이성도, 양심도, 도덕성, 의지도 타락 전이나 후나 역시 죄의 영향을 받지 않고 건재하게 창조된 그래도 유지된다고 한다. 따라서 로마교회에 의하면 타락한 원죄상태는 초자연적 은총의 내용들만 상실했을 뿐 자연적 은총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타락 이전의 상태와 동일하다. 그러니까 아담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초자연적 은사의 결핍 상태에서 태어나는 셈인데, 이러한 결핍 상태가 바로 원죄의 상태이다. 따라서 로마교회는 자연적 은사와 초자연적 은사를 나누는 이원론적 사고 속에 자연과 은총이 연결되지 않는, 즉 기계적 병립 관계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비록 인간이 타락했지만 자연적 은사는 창조 때의 상태 그대로 여전히 건재하다는 낙관적 인간관은 공적 사상으로 나아가게 된다. 즉 인간은 자연적 은사를 통해서 충분히 선행 공적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노력은 세속적인 선행에 불과하며 인간을 구원으로 이끌 수 없다.
 문제는 상실한 초자연적인 은사를 어떻게 회복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로마교회는 영세를 통해서 초자연적 은사를 회복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초자연적 은사를 회복한 사람은 영광의 상태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 영광의 상태란 그리스도와 성령에 의하여 신자의 신분이 승귀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승귀, 양자의 신분이 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영광의 상태란 신을 보는 것을 말하는 데 신(神)을 본다는 것은 신과의 합일을 말한다. 즉 영광의 상태란 영과 육을 초월하여 하나님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제 영세를 통하여 초자연적 은사가 회복되면 ‘영광의 상태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선행’을 할 능력을 부여받게 되며, 그 행함의 댓가로 영광의 상태에 들어가게 된다고 한다. 자연적 은사로서의 선행으로는 영광의 상태에 들어가기가 어렵고 덧붙여진 은사를 통해서야 구원에 이르는 선행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로마교회의 견해는 1) 원죄가 초자연적 은사의 결핍이라고 하는 측면에서는 플로티누스의 유출설이 말하는 선의 결핍으로서의 죄라는 견해를, 2) 인간의 공로로 영광의 상태로 들어간다고 하는 견해는 펠라기안의 견해를, 3) 초자연적 은사와 자연적 은사의 기계론적 구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의 견해를, 4) 영광의 상태로의 회귀는 신플라톤주의가 말하는 일자로의 회귀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러한 로마교회의 신형상론은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다. 1) 타락 이후 초자연적 은총은 상실되었지만, 자연적 은총은 건재하다고 하는데, 이는 양자를 기계적 병립의 관계로 보는 것으로서 죄의 심각성을 간과하고 원죄의 개념을 피상적으로 만든다. 2) 은혜의 상태에서 영광의 상태로 넘어가는 과정에 인간의 공로를 개입시킨 것은 펠레기안적이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참가했다는 점에서 세미 펠라기안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이 주어지는 것은 언약의 원리이지 노력의 대가가 아니다. 3) 초자연적 인간과 자연적 인간 사이에 무수한 계급이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을 인정하여 계급 사상에로의 길을 열어주고 있는데, 이는 매우 비성경적이다.

 2.4. 루터파

 루터파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제한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다. 즉 원의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이해한다. 원의란 영적인 특질, 도덕적 자질로서 엡 4:24, 골 3:10에서 말하는 참된 지식, 의, 거룩이 그 중요 덕목이다. 루터파는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되, 전적으로 상실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러한 인생을 죄악 덩어리라고 묘사한다.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이 전적으로 상실되었다면, 그에게 남아있는 인간의 자연적인 것도 함께 부패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루터파가 로마교와 달리 자연과 은총의 관계를 유기적 관계 속에서 보았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루터파의 견해는 로마 교회의 선행 공로주의 반동으로 나온 것으로 원의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고 본 결과 타락 이후 인간의 상태를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는 편협성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루터파의 이러한 단조롭고 비연속적이고 단절된 주장들은 개혁파가 일반은총의 교리에 의해 완화되었다.

 2.5. 칼빈과 개혁파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은 다른 피조물에 대한 인간의 탁월성과 관련된다고 보았다. 그 탁월성은 인간의 전인 속에 드러난다. 하나님의 형상은 모든 재능과 능력 속에, 모든 상태와 관계 속에 반영된다. 지성 속에, 정직한 마음 속에 드러났으며,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함(골 3:10; 엡 4:24)올 포함했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 가운데 드러났으며, 피조물에 대한 통치 속에서도 비록 적은 정도이지만 드러났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상실하였는가?’하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중세 스콜라주의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그 이전에 존재했던 여러 신학자들의 주장과 유사하게 형상과 모양은 서로 다른 실체로 파악되었다. ‘모양’은 초자연적인 은사로서 인간의 본성에 ‘덧불여진 은사’로 간주되었다. 이와는 달리 ‘형상’은 인간에게 있어서 생래적인 은사, 곧 이성, 양심, 도덕성, 의지의 자유 등으로 이해되었다. 이들에 의하면, 죄로 말미암아 나타난 결과는 모양의 상실뿐이었고 형상에는 아무런 변화도 발견되지 아니한다. 즉 덧불여진 초자연적인 은사만 상실되었을 뿐 생래적인 자연적 은사는 건재한다는 주장이다. 칼빈은 이러한 형상 이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루터는 로마교회에 대해서 반동적으로 나오다 보니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고 보았지만, 칼빈은 타락한 이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되게 하는 것이기에 인간이 인간이기를 중지하지 아니하는 한, 비록 타락하였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를 칼빈은 편다. 칼빈은 심지어 타락한 인간성 가운데서도 어느 정도 신의 형상이 잔존하는 흔적을 발견하게 되며, 바로 그 점이 다른 피조물들과 인간을 구별시킨다고까지 말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 안에서 전적으로 말소되고 파괴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부패가 너무 심하여 남아 있는 형상상까지도 무서을만큼 추악하게 기형이 되어 버렸다.”고 했는데, ‘남아 있다’고 함으로써 루터파에 반대했고 ‘파괴되었다’고 함으로써 로마교에 반대했다. ‘원시의’라고 할 수 있는 ‘참된 지식과 의와 거룩’(엡 4:24, 골 3:10)은 상실되었고 이성, 양심, 도덕성, 의지의 자유 등과 같은 자연적 은사는 잔존하고 있다. 두 부분이 기계적 병립의 관계로서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포도주가 나쁜 그릇에 담길 때 나쁜 맛으로 변하지만 그것도 포도주임이 분명하듯, 인간의 자연적인 은사는 잔존하지만 맛을 잃었다. 따라서 이러한 자연적인 은사(이성, 양심, 도덕성...)으로는 신형상의 회복이 불가능하다. 칼빈은 초자연적인 은사는 박탈당하였고 자연적인 은사는 부패되었으나 타락한 인간에게 짐승과 구별될 수 있는 이성은 잔존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이성이 성령의 조명 없이는 구원에 이르는 데에는 전적으로 무능하다. 사람의 내적인 변화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가능해진다.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워지는 것은 인간의 공로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하나님의 은혜 때문인데, 그 은혜는 말씀을 통한 성령의 역사 속에 나타난다. 한편 하나님의 형상 회복에 있어서 인간의 책임성이 강조된다. 신형상의 갱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웅답인 믿음올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인간 편에서 볼 때에 인간의 책임성이 불가피하게 따라 나올 수밖에 없다. 신형상의 회복은 은혜인 동시에 은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다.

 개혁파는 하나님의 형상을 ‘협의’와 ‘광의’로 나누고, 타락으로 말미암아 협의의 신형상(기능적인 면)은 파괴되었으나 광의의 신 형상(구조적인 면)은 타락 이후에도 잔존한다고 한다. 타락 이후에도 광의의 신 형상이 잔존한다고 하는 것은 성경이 타락한 이후의 인간에 대해서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전적 부패를 말하는 것은 죄의 영향 아래 광의의 신형상도 들어갔기 때문이다. 즉 개혁파는 전적 부패를 말할 때는 질적 타락뿐 아니라 범위에 있어서도 죄의 영향력을 받지 않는 범위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나 협의 형상이 파괴되고 상실되었다고 해서 인간의 실질이 상실되어 인간이 아닌 인간 존재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인간이기는 하지만 비정상적인 인간이다. 성경의 용어로 말하자면 죄인이요, 영적으로 죽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이 단순히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정도가 아니라 인간 그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이 인간의 원형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전인에게 나타나며 또 전인을 통해서 나타난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영혼과 육체 속에 나타날 뿐 아니라 재능과 능력 속에, 또 모든 관계와 상태 속에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2.6. 결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형상 회복”

 그리스도는 참된 하나님의 형상이다. 따라서 인간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알기 원한다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아야 한다. 예수님을 통해서 본 인간의 모습은 무엇인가? 1) 예수님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사셨다. 인간은 예배적 존재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하늘 끝, 바다 끝을 가더라도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없다. 여기에 인간의 인간됨이 있고 탕자의 모습에서 깨어진 인간의 모습이 보인다. 2) 예수님은 사회적 존재로서, 전적으로 이웃을 사랑하셨다. 3) 예수님은 문화 창달적인 존재로서 자연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셨다. 이 3중 관계 속에서 인간의 본래적 위치를 볼 수 있다.
 이전에는 1)번(하나님과 나와의 수직적 관계)이 너무 강조되었다. 최근에는 수평적 관계가 강조된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화해 없는 나와 너의 관계 개선은 ‘인간화’가 된다. ‘익명의 그리스도인’(K. Rahner) 개념이 보편화되어 불신자, 무신론자일지라도 하나님 편에서 보면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자녀이므로, 양심이 말하는 대로 결단한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본다. 그러나 성경의 교훈대로 인간의 전적인 부패 사실을 인식하고 고백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총밖에 소망이 없다는 진리가 따라 나온다. 은총을 강조해야 하지만, 너무 은총만 강조하면 루터파의 오류에 빠진다. 인간의 책임적 과제를 함께 강조해야 한다. 회복은 은사이면서 인간의 과제다. 생명은 주어져야 한다. 그러나 인격적 존재이기에 책임을 수행한다. 하나님께 100% 의존해야 하고, 인간은 100% 책임성을 가진다. 200%가 아니라 100%다.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조화가 된다. 둘 중에서 하나를 더 강조하면 문제가 된다. 모순이 아니라 역설이다. 하나님의 100%만 강조하면, 워치만 니 사상이나 구원파 사상으로 빠진다. 인간의 책임만 강조하면 기독교가 도덕적 종교가 된다. 둘의 조화가 필요하다. 형상 회복의 방편은 ‘말씀’과 ‘성령’이다. 이 유일한 방편을 통해서 형상이 회복된다. 따라서 1), 2)와 함께 3)이 강조되어야 한다. 기독교적 문화 창달에 노력해야 교회가 세속화되지 않는다.


                                              3. 인간의 구조

 G. E. Ladd는 그의 「신약신학」에서 바울의 인간관을 세 가지 방식으로 이해했다. 삼분설적 이해, 이원론적 이해, 전인적 이해가 그것이다. 본 글에서는 삼분설과 이분설을 살펴 보고 평가하며, 대안으로 제시된 단일설을 평가한 다음, ‘조건적 유기적 통일체’로 인간의 구조를 규정하려고 한다.

 3.1. 삼분설

 삼분설과 이분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헬라적 이원론을 먼저 살펴 보는 것이 좋겠다. 플라톤은 세계를 현상과 이데아의 이원된 두 세계로 이해하는 이원론적인 철학에 근거하여 인간을 이해했다. 즉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졌으며,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라고 했다. 플라톤의 이원론을 반대하면서 그것을 극복하려고 했으나 결국 넘어서지는 못했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질료와 형상이라는 원리를 통해 현실 세계에 더 큰 의미를 두었는데,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중세의 스콜라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의 전제가 되었으며, 또 그의 철학은 로마교회 교리의 기본이 되었다. 또 범신론적 경향을 가졌던 플로티누스는 유출설을 통해 일자로부터 유출된 최하위의 존재인 물질은 악하다는 영육이원론적 사고를 가졌다. 이러한 플로티누스의 사상은 어거스틴에 의해서 선별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어거스틴은 악에 관한 형이상학적 해명을 할 때는 유출설적 견해를 빌어 썼지만, 세계에 관한 유출설적 설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삼분설은 인간의 구조를 영, 혼, 육으로 이해한다. 육체는 물리적 육체이며 동물과 본질은 같으나 그 구조가 좀더 복잡하다고 본다. 혼은 이성과 감성의 근거이며 정신적 요소인데, 동물보다 더 복잡하고 발전되었다고 본다. 영은 종교적 요소로서 혼 속에 거한다고 본다. 이는 하나님은 선하고 물질은 악한데 이 둘을 중재하는 것이 로고스라고 하는 헬라철학적 개념에서 유래하였다. 삼분설은 영과 육을 대립관계로 보고 이 둘을 중재하는 것을 혼이라고 본다. 그리고 영과 혼은 둘 다 생명의 원리이지만, 혼은 동물적 생명의 원리이고 영은 신과 관련된 이성적이고 더 가치 있는 비물질적인 요소로 해석하고 있다. 고대 교회에서는 헬라철학의 영향을 받은 오리겐과 영지주의자들이 삼분설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서방 교회의 어거스틴과 터툴리안 등은 이분설을 지지했다.

 3.2. 실체적 이분설

 이분설은 인간의 구조를 영과 육으로 나눈다. 삼분설은 프뉴마(영)와 프쉬케(혼)를 구별하지만, 이분설은 영과 혼을 같은 것으로 본다. 왜냐하면 성경이 ‘프뉴마’와 ‘프쉬케’를 같은 의미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마6:25, 10:28은 인간의 구조를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프뉴마’와 ‘프쉬케’가 같은 의미라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죽음과 관련하여, 또한 죽은 자와 관련하여 양자가 교호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행 7:59절에서 스데반은 ‘내 프뉴마를 받으소서’라고 하였고, 창 35:18에서는 라헬의 ‘프쉬케’가 떠나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영’과 ‘혼’은 단일 실체를 가리키는 두 용어라고 할 수 있다. 교호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나 실체적 이분설자들이 삼분설을 비판했지만 이원론적 경향성은 여전히 발견되고 있다.

 3.3. 삼분설과 실체적 이분설에 대한 평가

 성경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분설은 전인적인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분설이란 단어 자체가 인간을 두 부분으로 구분하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어떤 요소로 구분되는 존재가 아니라 전인적인 존재이다. 즉 인간은 단일적 존재가 아니라 영과 육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존재, 즉 전인적 존재로 이해하여야 한다.
 예컨대, 살전 5:23에서 ‘영, 혼, 육’ 이 2개의 ‘그리고’라는 접속사와 연결되어 있다고 해서 영, 혼, 육을 별개의 독립적인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살전 5:23은 삼분설을 말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전인적’ 인간으로서의 우리가 죄에 물들지 않도록 보존할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 문법적으로 보면 영, 혼, 육을 수식하는 ‘보전되기 원하노라’의 표현은 복수가 아닌 단수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리델보스의 말대로 전인적, 즉 통전적인 인간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히 4:12 역시 영과 혼과 골수를 구별하고자 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심판하는 능력을 가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눅 10: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 10:27)는 말씀은 인간을 네 개로 구분하는 표현이 아닌 것처럼, 위의 두 구절은 인간은 전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롬 7장에 나타난 사도바울의 갈등은 영과 육의 갈등이 아니다. 영적인 삶과 육적인 삶의 갈등이다. 옛사람과 새사람 사이의 윤리적 갈등인 것이다. 바울을 구성하는 영과 육이 싸운 것이 아니다. 한 인생을 보아도 ‘이미 그러나 아직’(already but not yet)의 삶을 살기 때문에 늘 이런 갈등이 있다. 영육 이원론의 갈등이 아니므로, 바울서신에는 존재론적 갈등이 없다.
 그리고 히브리 성경에는 사상에는 영과 육의 이원론적 대립이 발견되지 않는다. 타락한 인간의 영은 거룩하고 육은 더럽다는 표현이 없다. 히브리어의 ‘바사르’(몸, רשׁב)와 ‘네페쉬’(혼, שׁפנ)는 대치개념이 아니다. 영(프뉴마)을 나타내는 ‘루아흐’(הור)와 ‘혼’을 나타내는 ‘내페쉬’는 중복되는 개념이다.
 이처럼 성경은 인간의 복합성을 인정하지만 인간 본성을 두 부분으로 나누지 않는다. 즉 모든 인간의 행위는 전인적인 행위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격적 단일성을 지지하고 있는 전인적 인간을 말하고 있으며 구조적 이중성을 전제하고 있다. 이중성이란 두 측면이 있다는 것으로 조화와 통일성 속에서 ‘두 면’이 존재하고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결론 내릴 수 있다. 1) 삼분설과 실체적 이분설은 헬라 사상의 영육 이원론적 전제와 관계가 있다. 2) 그들이 인용하는 성경구절은 문맥에서 본문을 이해하는 해석학적 관점(James Barr)에서 근거가 희박하다. 3) 히브리적 관점에서는 이원론적 긴장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4) 성경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본성을 하나의 통일체로 볼 것을 가르치면서 독립된 두 요소로 구성된 이원론 존재로 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각 요소는 하나의 단일한 유기체를 형성하는 실재이다.

 3.4. 단일론

 단일론자들은 인간은 나뉠 수 없는 존재로 본다. 인간은 구분될 수 없다. 인간은 유기적 통일체다. 이 견해는 히브리적 관점에서는 타당하다. 물론 이들은 이분법이나 이원론을 부정하지 이원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분법(Dualism)은 영육 이원론적인 대립이다. 이원성(Duality)에 대해서, 성경은 통일성 속에 있는 이원성을 인정한다. 영과 육 사이의 궁극적 긴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화가 있는 이원성을 인정한다. 단일론자들은 인간의 이중성(마음/몸)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둘 사이에 긴장이 없고 조화가 있다고 본다. 실제로 인간의 육은 후패해가고 쉬지나간다. 이들이 인간은 둘 이상의 부분들이 집적된 것으로 볼 수 없고 단일하다(불가분적)고 보고 플라톤적인 이원론을 극복하려고 한 점에서, 그리고 창세기를 문맥 속에서 보는 점에서 타당한 입장이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이 ‘절대적 단일론’이 될 때 문제가 된다.

 3.5. 단일론에 대한 평가와 성경적 관점: "조건적 영육 단일체“

 인간은 유기적 영육 통일체로 본 것은 단일론자들의 긍정적인 면이다. 1) 인간은 창조시부터 전인적으로 파악된 존재다. 창 2:7에서 인간은 ‘생령이 되었다’(내페쉬 하야, היח שׁפנ). ‘살아있는 존재’이므로 분리 개념이 들어가 있지 않다. 2)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인간의 순종, 불순종은 전인적인 면과 관련된다. 몸은 하나님에게 불순종하고 영은 순종할 수 없는 것이다. 3) 구속의 역사에서 전인이 구속을 기다린다. 이처럼, 인간은 물리적, 비물리적 요소를 가졌지만 불리될 수 없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런 조건이 성립되지만 인간이 죽은 후에는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 통일체라고 한다면 전인으로 죽어서 예수님 부활할 때 전인으로 부활한다. 단일론자들은 인간이 죽으면 존재가 멸절된다고 보거나 모든 기능이 정지되어 무의식 상태(영혼 수면설)에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성경은 어떻게 말하는가?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 죄수에게 오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눅 23:43). 바울의 고민을 보면, 그는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좋으나”라고 했다. 죽으면 즉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다. 죽은 자는 수면 상태에 있거나 무의식 상태에 있지 않는다. 단일설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성경의 가르침에 소홀했던 것이다.
 성경은 인간이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다고 말한다. 살아 있을 때는 영육이 유기적 통일체이지만 죽을 때에는 일시적/잠정적으로 분리 형상을 겪는다. 따라서 우리는 ‘조건적 영육 단일체’라고 인간의 구조적 본성을 규정해 볼 수 있다. ‘조건적’이라는 말은 ‘중간기’를 고려해서 나온 표현이다.

 3.6. 인간의 구조적 본성에 대한 결론

  인간이 인간을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모두 성경의 계시 앞에서는 상대화해야 한다. 반동으로 나온 사상은 전인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면을 경험하게 되므로 항상 성령에 의지하여 전체를 조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구조적 본성에 대해 몇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1) 우리의 인식 전환이 요청된다. 우리의 의식 속에 깊이 스며 들어와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영육 이원성의 경향으로부터 성경적 관점으로 전환해야 한다. 성경적 세계관은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는 명분 아래, 피조적인 물질 세계를 죄악된 것으로 정죄하지 아니한다. 만물은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그 자체로는 선하며 가치있는 것들이다. 노동도 기도처럼 중요 하다. 주일만 중요한 날이 아니다. 성과 속은 공간적이거나 물리적인 개념이 아니다. 우리는 초자연을 무시하는 자연주의나, 자연을 무시하는 초자연주의를 모두 비판해야 한다. 자연을 죄악시하여 이 세상 문화 영역으로부터 도피함으로써 자연과 초자연을 대립시키면 안 된다. 자연이 죄로 인해 오용되고 부패되었으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회복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은 우주적인 부분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2) 우리의 상황에서 특별히 구원을 전인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인간은 영육 단일체다. 영적으로 강건해지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육체적인 운동이나 휴식 같은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인간의 영적인 일올 살피는 어떠한 일도 인간의 신체적인 조 건과 심리적이며 감성적인 상태를 도외시하고는 올바로 수행될 수 없다. 그 점은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어떠한 고려도 하지 않고, 인간의 지성이나 의지나 감성만을 다루려는 태도에서 도 마찬가지다. 구원의 한 과정인 성화도 역시 동일한 원리 아래 이해되어야 한다. 영적인 성장이나 성숙은 인간 본성의 어느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을 정복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은 그 본성 전부가 죄의 영향 하에 들어갔고, 따라서 인간의 본성 가운데 어느 한 부분도 배타적으로 선의 장소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육체 자체를 죄악된 것으로 보고 영혼 올 선한 것처럼 간주하는 금욕주의는 비성경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3) 기독교 문화관 정립이 필요하다. 보수적 성향을 가진 자들은 영혼의 구원을, 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은 사회 변화를 선호하였으나, 사실 이 둘은 양자택일의 관계도 아니요 어느 것에 우열을 두는 관계도 아니다. “땅에 충만하라”(창 1 :28)는 문화명령은 “땅끝까지 가라”(마 28:19-20)는 명령과 연결된다. 두개의 명령이 아니다. 전자는 인간의 의무를 강조한다면 후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회복된 약속을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 으로 제자를 삼아…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 : 19-20)에서, “모든 것”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이와 같이 타락으로 인해 문화명령이 철회된 것이 아니라, 타락 후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복음 안에서 회복된다고 할 때, 이 세대에서의 그리스인들이 맡은 사명은 너무나 중차대하다.


                                              4. 인간의 타락과 구원

 본 글에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나타난 인간이해에 기초하여 인간의 죄를 다루고자 한다. 우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인간을 이해하는 출발점 혹은 관점이 어떠한지를 살펴 보려고 한다. 이어서 타락하기 전의 인간을 살피고 그 다음에 타락한 인간의 모습을 보려고 한다. 타락한 이후 죄의 결과는 어떻게 아담과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는가? 본 글에서는 특히 죄의 보편성 문제에 관심을 갖고 탐구하겠다. 죄의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있고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다면 과연 소망은 없는 것인가? 죄와 함께 다루어야 할 중요한 주제는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관점에서, 죄인(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정리해 보겠다. 죄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서 죄 고백은 보배로운 선물이다. 죄 고백 중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없는 ‘상호 죄 고백’ 개념에 대해 고민해 보면서, ‘상호 죄 고백’도 성경에 근거하고 실제로 은총으로 경험될 수 있다는 사실을 탐색해 보겠다. 마지막으로 이제까지의 인간 이해가 목회 현장이나 현대 사회와 교회에, 좁게는 필자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고 몇 가지로 정리해 보려고 한다.

*파일에서 참조하실 것.

출처 : 그리스도와 함께
글쓴이 : 나라일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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