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설교 모음

[스크랩] 십자가에서 보이신 사랑

하나님아들 2019. 2. 23. 18:24

십자가에서 보이신 사랑

누가복음 23:32-43

2009.4.5(고난주일)


들어가는 말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가장 아름답게 느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젊은 남녀의 러브스토리는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긴장하게 합니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주인공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은 매우 감동적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사랑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어머니의 사랑일 것입니다. 어머니는 우리를 낳으시고 기르시며 항상 우리를 보호하시기에 힘을 쓰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다른 누구보다 어머니의 사랑만은 항상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 결혼을 하면 자식을 낳고 자신이 받은 사랑을 이번에는 자식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에게 큰 사랑을 베푼 어머니의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사랑입니다. 우리는 처음 복음을 들을 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주려하심이라”(요 3:16)는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셨는가 막연한 사람에게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나셨다고 전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주셨습니다(롬 5:8). 그 결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1. 용서하시는 사랑


    죄인으로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사랑은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은 우리의 모든 죄를 담당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무런 죄도 없으신데도 불구하고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누가는 본문에서 예수님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장면을 상세하게 묘사하며 이와 더불어 두 사람의 사형수를 소개합니다. 다른 사형수와 함께 형장으로 끌려가는 예수님의 모습은 그분이 일반 사형수와 같이 강도나 범죄자와 동일한 취급을 당하여 처형되신 것임을 말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이사야서 53:12에서 언급된 예언의 성취한 것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들과 함께 죽으심으로 죄인처럼 여겨질 것이라는 예언이 성취된 것입니다. 두 행악자의 구체적인 범죄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마태(마 27:38)와 마가(막 15:27)에 의하면 그들은 강도였다 합니다. 아마 살인과 방화 등을 서슴지 않은 흉악범(凶惡犯)이었을 것입니다(41절 참조).

    예수님이 처형되신 사형 집행 장소는 ‘해골이라는 곳’입니다. 이곳은 다른 사형수와 함께 처형한 점으로 보아 로마군의 공식적 처형 장소로 보이며 성 밖의 어느 곳에 있는 무덤 근처였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지명은 해골(骸骨)이 많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붙여졌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형이 해골을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분명한 점은 성문 밖이었다는 것입니다(히 13:12). 불가타(Vulgate)역 성경에서는 ‘해골’이라는 말을 칼바리움(Calvarium)으로 번역하여 갈보리(Calvary) 언덕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이곳을 마태와 마가는 히브리말로 ‘골고다’라고 말합니다(마 27:33; 막 15:22).

    강도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못 박혔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양 쪽에 범법자 두 명이 같이 못 박혀 있음을 말하고 마태와 마가는 ‘강도’들이 양 쪽에 못 박혀 있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마 27:38; 막 15:27).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의 좌우에 사랑하는 제자가 아닌(막 10:37 참조) 흉악한 강도가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예수님의 치욕스러움과 제자들의 비겁함을 부각시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누가의 의도는 제자들의 비겁함이나 예수님의 치욕을 강조하기 보다는 22:37의 예언 성취를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병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가장 잔인한 처형의 방법에 따라 못 박히는 모습입니다. 누가는 못 박았다는 단순한 묘사를 하고 있지만 마태와 마가는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마태는 못 박힌 시각이 제 3시경이라고 밝히는데 유월절 다음날 오전 9시경으로 이해하면 됩니다. 마태와 마가는 십자가에 못 박은 것과 동시에 명패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씌어진 사실을 언급하는 반면(마 27:37; 막 15:26) 누가는 이후에(38절) 언급합니다. 따라서 마태와 마가는 조롱하기 위해 써 붙인 명패를 강조하는 반면 누가는 나중에 조롱하는 장면과 함께 언급함으로써 그 효과를 다소 완화시킨 듯합니다.


    용서의 기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까지 당신의 사랑을 보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뒤,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무리를 향해 측은한 마음으로 기도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34절) 이 기도문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마 5:44) 친히 실천하고 증명해 보이셨다는 점에서 적절한 문구로 보입니다. 여기서 용서의 대상을 지칭한 ‘저희’는 사형 집행자인 로마 군인들만이 아니라 주범인 산헤드린(Sanhedrin) 대표와 그 음모에 가담했던 모든 죄인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고전 2:8의 증언대로 그들은 무지 가운데서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베드로의 설교 내용처럼 ‘생명의 주’를 죽였습니다(행 3:15).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무지를 오히려 긍휼히 여기시고 그러한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회개와 죄 사함의 자리로 초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로마의 병사들은 예수님의 옷을 나눠 제비뽑았습니다. 처형자들이 사형수의 옷을 제비뽑아 나눠갖는 것은 당시의 관습에 따른 것으로 봅니다. 뿐만 아니라 시편 22:18에서 언급된 예언의 성취로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조롱하는 종교지도자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고 계실 때 이를 구경하고 있던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두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즉 백성들과 관원들입니다. 백성들은 예수님에 대한 모욕 행위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으나, 대신 지도자들은 직접 모욕하는 장면이 보이고 있습니다.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비방하며 ‘자신을 구원하라’고 조롱합니다. 여기서 ‘구원하다’라는 말은 예수님의 활동 가운데 치유 기적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택하신 자’ 란 십자가 처형을 바라보며 군중들이 예수님을 조롱하여 내뱉은 말이지만 실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 말입니다. 본서 9:35에서는 ‘택함을 받은 나의 아들’이라고 나옵니다. 누가는 이 단어를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택하신 자’란 의미로서 사용하였을 것입니다. 즉 누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택하신 분으로서 세상 구원을 위한 마지막 사역을 감당하고 계셨던 사실을 기록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 같은 조롱 행위는 시편 22:6-8에서 이미 예언된 바의 성취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함께 조롱하는 이방인들


    로마병사들이 예수님께 ‘신 포도주’를 줍니다.(36절) 군병들이 희롱하면서 신 포도주를 주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희롱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어서 먹기 힘든 포도주를 준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이 그러하다면, 하루 전날 밤부터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하신 예수를 조롱하는 그들의 잔인성은 실로 지독하였다 할 것입니다. 시편 69:21의 성취로 본다면 조롱하려는 목적이 강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먹을 수 없는 것으로 주어서 고통을 가중시키고 수치스럽게 하려는 것입니다.

    로마 군병들은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어든 내가 너를 구원하라”고 조롱합니다(37절). 로마 군병들은 정치적 의미에서 예수님을 희롱했다고 생각되며 그 이상의 문제에 대해서 그들은 알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특히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잘 몰랐을 것이고 다만 십자가상에 붙어있는 죄명을 보고(38절)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자칭 왕이라고 사람들을 선동하던 사람쯤으로 생각해서 왕이면 자신을 사형으로부터 면죄 받게 하여 다시 살려보라는 투로 조롱한 듯합니다. 누가는 이방인을 염두에 두고 정치적 문제에다 초점을 맞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었습니다(38절). 이 명패는 희롱하기 위한 목적으로 붙여진 것입니다. 요 19:20에 의하면 명패는 3개 국어로 씌어져 있었습니다. 즉 히브리어, 로마어, 헬라어로 되어 있고 또 그것을 빌라도가 직접 적은 것으로 언급됩니다(요 19:19). 이 명패는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참된 신원(identity)을 밝혀주고 있는 바, 조롱하기 위해 붙여준 이름이 결국에는 부활을 통해 예수님의 우주적 왕권을 확증하는 이름이 됩니다. 인류 역사상 수많은 영웅적인 왕들이 일세를 풍미하다가는 다 사라져 갔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그 절정을 보여주신 사랑으로써 오고 오는 모든 세대 모든 성도들을 통치하시는 위대한 왕이신 것입니다.


2. 회개한 자를 구원하시는 사랑


    비방하는 행악자


    그때 예수님의 옆에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좌우에서 못 박힌 두 죄수 중 한명이 예수를 비방하고 있는데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 죄수는 유대인으로서 종교적인 의미로 모욕하고 있습니다. 범죄자가 예수님을 비방했다는 사실이 예수님께서 당하신 치욕의 정도를 한층 더해 주고 있는데 이 범죄자가 왜 비방했는지 알 수 없으나 당시 사형을 당할 정도의 죄인이라면 셀롯당(Zealot)에 속한 무력 독립 투쟁가 중의 한 사람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이 죄인은 예수님에게서 기대했던 혁명적 변혁이 좌절된 것에 대한 실망에서 욕을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41절에서 다른 한 명의 죄수가 정당한 벌을 받고 있다고 진술한 것을 보면 이들 두 명의 죄수는 독립 투쟁가는 아니었을 듯합니다.


    회개하고 예수께 청원하는 자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말합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40절) 예수님을 가운데 두고 두 죄인의 논쟁 속에서 예수님의 본성이 규명됩니다. 예수님을 비방하는 죄인을 향해 반박한 본절 내용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로 미루어 보건대 이 죄수는 여호와 신앙의 전통에 익숙한 유대인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이 여기서는 징벌에 대한 공포의 차원에서 언급되었으나, 보다 깊은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인격적 존재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경외심을 지칭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동일한 정죄를 받았다는 말은 예수님이 동일한 죄를 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41절의 내용으로 보아 로마 총독으로부터 받은 재판정의 판결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계속하여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고 말합니다.(42절) 예수님의 의로움에 대해 말하기 전 이 죄인은 자신들의 형벌에 대해 마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문맥상 예수님에 대한 언급을 대비적으로 강조합니다. 이 죄인은 예수님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인 듯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있게 예수님의 언행(言行)에 있어서 옳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할 정도로 확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잘못을 긍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의 잘못을 긍정하고 예수를 정당하게 인정하는 것을 회개의 표현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여기서의 초점은 죄인의 회개에 있지 않고 죄인에 의해서 예수님의 의로움이 증언되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즉 예수님의 처형은 잘못된 것으로서 대적들의 음모와 모함에 의한 것이라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하면 처형대는 예수님이 계실 곳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어서 예수님께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청원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42절) 죽음을 앞둔 죄수의 고백은 매우 종교적이고 종말적인 성격을 띱니다. 특히 이 죄수는 죽음을 눈앞에 둔 시점에서 이와 같이 소망적인 고백을 하였다는 점에서 깊은 의미를 시사합니다. 당시 대다수 유대인들은 지상적(地上的)이고 정치적인 메시야(Messiah)를 기다렸고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통해 그러한 기대가 무산되고 말았지만, 이 죄수는 죽음 너머에 영존할 어떤 것으로서의 메시야 왕국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즉 이 죄수는 예수님 안에서 신적인 메시야상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초월적인 메시야 왕국의 도래와 ‘관련하여’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나를 생각하소서’라는 말은 자신을 너그럽게 보아 주기를 요청하는 말입니다. 이는 매우 겸허하고 소박한 요청이라고 할 수 있는데 특히 같이 죽어가는 사람에게 이같은 큰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왕권적 권위도 강조하지만 죄인의 믿음이 빛나듯 돋보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놀라운 믿음의 통찰이야말로 43절에서 언급되는 예수님의 약속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낙원의 약속을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예수님께 청원하는 죄인의 요청에 대해서 예수님은 즉각적인 답을 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43절) 자신에게 깊은 신뢰감과 믿음을 갖고 있는 죄수에게 예수님은 분명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과 함께 낙원(樂園)에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선언합니다. 여기서 언급된 ‘낙원’(파라데이소스)은 칠십인역(LXX)에서는 에덴동산을 표현 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창 2:8). 그래서 여기서 언급된 낙원은 이사야서 51:3에 나오는 미래적 에덴동산으로서 기쁨과 즐거움이 약속된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낙원이 의로운 사람이 사후에 잠시 안식을 취하는 중간적인 장소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눅 16:22-31과 고후 12;1-4은 죽은 의인들이 이미 낙원에서 주와 함께 거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 2:7의 ‘낙원에 있는 생명 과실’은 부활 이후에 누리게 될 축복과 연관된다고 생각됩니다. ‘오늘’이라는 말은 구원의 즉각성과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이며(2:11; 4:21; 5:26 참고), 죄인이 죽어가는 순간에 누리고 있는 믿음의 기쁨을 강조하고 그 기쁨이 죽음 이후에도 단절됨 없이 소유할 수 있는 것임을 확신시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나가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보여주신 두 가지 사랑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신을 향해 조롱하는 자들을 용서하시며 성부하나님께 기도하시는 모습과 마지막 한편 강도가 회개하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할 때 그를 용서하시고 낙원을 약속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사랑을 베풀어주신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서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예수님을 조롱하는 자였습니다만, 예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은혜를 주시어 구원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살 때까지 우리는 결코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를 위하여 날마다 십자가의 은혜를 기억해야합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 가운데 살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출처 : 센다바중앙교회
글쓴이 : kaporet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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