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들 설교 모음

[스크랩]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하나님아들 2019. 2. 23. 17:48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사도행전 13장 21-23절 // 2002-8-18

트럭 두 대가 뒤를 맞대고, 운전수가 이 트럭에서 저 트럭으로 나무 상자를 옮기느라 애쓰고 있었습니다. 그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고, 지나던 사람이 도와주겠다고 나섰습니다. 두 사람은 땀을 뻘뻘 흘리며 한동안 애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도와주던 사람이 숨을 몰아쉬며 말했습니다. "안 되겠네요. 우리 힘으로는 아무래도 짐을 내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운전수가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내리다니요! 난 내리려는 게 아니라 실으려는 거였어요."

서로 얼굴을 맞대고 일을 한다 하더라도 생각이 다르면 일이 성취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은 올리려고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내리려고 한다면, 힘만 들뿐 아무 결과도 얻지 못하게 됩니다. 뜻이 있어도 마음이 맞지 않으면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의 인생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인생이 되지 못하면, 그야말로 힘만 드는 안타까운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라면,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고자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을 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산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다윗입니다. 성경은 다윗에 대해 말할 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왜 하나님은 다윗을 보고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말씀하고 계셨을까? 성경은 그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 그 구체적인 사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는 사무엘상 16장에 나오는 기름부음을 받는 다윗의 모습을 통해서 그것이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을 뿐입니다.

새로운 왕을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이새의 집에 간 사무엘은 이새로부터 아들들을 소개받습니다. 사무엘이 처음 본 아들은 엘리압이었는데,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는 "바로 이 사람이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라고 말합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바로 이 말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라는 말씀을 볼 때, 다윗이 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윗의 중심, 다윗의 마음에 무엇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그 마음에 무엇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다윗을 통해서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까?



1. 첫째, 다윗은 항상 하나님을 알고자 힘썼습니다.

다윗이 블레셋에게 빼앗겼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오려고 했을 때의 일입니다. 다윗은 법궤를 가지고 올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흥분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법궤를 가져온다는 것 자체가 다윗에게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당한 의미를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온 민족을 하나로 뭉치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법궤를 가져오는 도중 웃사가 그만 법궤에 깔려 죽고 말았습니다. 웃사가 법궤에 깔려 죽자, 더 이상 법궤를 옮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큰 일을 하다가도 사고가 터지면 잠시 하던 일을 멈추지 않습니까? 다윗도 마찬가지로 법궤를 가지고 오는 것을 멈추고 대신 법궤를 오벧 에돔의 집에 머물게 했습니다. 다윗의 속마음은 법궤를 가지고 오고 싶어 안달이 났습니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법궤가 오벧 에돔의 집에 머무는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오벧 에돔의 집이 축복을 받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 모습을 보고, 그 누가 법궤를 가지고 오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운 마음이 없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다윗이 이 순간에 무엇을 했을까요? 법궤를 가지고 오지 못한 아쉬움에 사로잡혀 안절부절 했을까요? 그는 무엇이 잘못되었었는지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블레셋 사람들처럼 법궤를 수레에 실어 오려고 했던 자신의 모습이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역대상 15장 2절과 1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2가로되 레위 사람 외에는 하나님의 궤를 멜 수 없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저희를 택하사 하나님의 궤를 메고 영원히 저를 섬기게 하셨음이니라 하고",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충돌하셨나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저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렇습니다. 다윗은 웃사가 죽은 후에야 비로소 법궤는 제사장들만이 어깨에 메어 운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안 다윗은 법궤를 가지고 올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먼저, 궤가 위치할 장막을 쳤습니다. 또한 아론 자손과 레위 자손을 모아 그들 중 각 족속의 족장들로 하여금 몸을 성결케 했습니다. 노래하는 자를 세우고 문지기를 세우며, 노래를 가르치는 사람을 세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여섯 걸음을 갔을 때마다 행렬을 멈추게 하고, 소와 살진 양을 제물로 잡아서 바쳤습니다(삼상 6장 12절).

성도 여러분,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 앞에서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이 고난 가운데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가를 깨닫고 그대로 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이 했던 대로 암소에 메어 법궤를 운반하려고 할 때,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괜히 죄 없는 웃사만 희생되었을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으면 하나님의 복이 임하게 됨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랍 유목민이 살고 있는 어느 사막의 둥근 천막에 두 명의 보석상인이 들어섰습니다. 두 상인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보석에 대해 은근히 자랑을 시작했습니다. 한 상인이 일부러 큰 진주를 바닥에 떨어뜨렸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상인이 그 진주를 주우며 "이 진주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중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아랍 유목민이 웃으며 말했습니다. "나 역시 당신들처럼 보석의 소유와 매매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어느 날 사막 한가운데서 모래 바람을 만나 며칠 동안 먹지 못하고 탈진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큰 주머니를 발견하고 혹시 음식이라도 들어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열었는데 진주만 가득했습니다. 그 때의 절망감은 이룰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의 소유가 되는 것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가지지 못한다면, 아무리 큰 보화를 가지고 있다 한들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귀한 보석을 가지고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말 중요한 것을 가지게 되는 순간 그동안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헛된 것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져야 할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의 삶의 근본이 되어야 함을 믿으십니까? 잠언 3장 5절로 6절 말씀입니다. "5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6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인정하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라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을 알고자 힘쓰라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저와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얼마나 애쓰십니까? 직장을 선택하는 일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어떻게 역사하실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하십니까? 공부를 하더라도 왜 내가 공부를 해야 하며, 누구를 위해 공부를 하고 있는지를 생각하십니까? 결혼을 할 때는 어떻습니까?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고 싶어하는지 알고자 기도하십니까? 정말 많은 순간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자 애쓰기 보다는 자신의 발전만을 위해 힘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향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신 하나님의 음성에 둔감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쉽게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힘차게 타오르기를 바랍니다.



2. 다윗은 하나님만을 드높이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엄청난 고통의 세월 후에 예루살렘 왕좌에 앉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적들도 잠잠해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나단 선지자로부터 하나님께서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자손까지 축복하신다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때 다윗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들떴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때 취한 행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무엘하 7장 18절입니다.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아서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나는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여호와 앞에 들어가 앉았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감사의 고백을 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윗에게 있어서 지금이 어떠한 때입니까? 다윗의 일생일대의 가장 큰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때가 아닙니까? 만약, 여러분들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기쁨을 누구와 함께 나누고자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많은 분들이 그동안 함께 역경을 헤쳐 나온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든지, 사랑하는 가족들과 기쁨을 나누든지 할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힘들고 괴로운 일 있으면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즐겁고 행복한 일, 그리고 어떤 일에 성공하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려 하기보다는 나만의 즐거움에 도취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축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한다든지,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인생의 성공을 맛보더라도 주님 앞에 나갈 수 있는 것,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것이야말로 참된 신앙이 아닙니까?

아직도 월드컵의 감동이 식지 않고 있는데, 월드컵 기간 중 가장 감동적인 순간이 어느 때였습니까? 골을 넣고 기도하는 선수들을 볼 때, 그리고 한 경기를 승리로 이끌어 낸 후, 믿는 선수들끼리 그라운드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볼 때, 감격스럽지 않으셨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자신이 직접, "JESUS"라는 글씨를 자신의 속옷에 써놓고는 경기가 끝난 후에 그것을 자신 있게 보여주는 선수의 모습은 얼마나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습니까?

국가대표팀에 최태욱 선수가 있습니다. 비록 이번 월드컵 경기 때에 경기장에서 뛴 시간은 짧았지만, 이 최태욱 선수는 다른 선수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최태욱 선수가 국가대표팀에서 최 목사로 통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의 신앙은 참 대단합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한 그는 해외로 전지훈련을 가도 그곳에서 꼭 예배를 드리려고 힘썼답니다. 한번은 사이프러스로 전지훈련을 갔는데, 그곳에서 한인 교회를 찾지 못해 동료들을 자기 방으로 불러 간단하게 예배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슬람 국가인 이란에 머물렀을 때에도 한인교회를 물색해 예배에 참석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도 웃지 못할 일화가 있습니다. 최태욱 선수가 LG구단에 입단하게 되었을 때, 그는 구단으로부터 받은 계약금 중 2천만원을 십일조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가 노발대발 했습니다. 화가 난 아버지는 교회에 찾아가 목사님께 다짜고짜 "내 아이가 뭘 몰라서 드린 것이니, 다시 돌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만수 교회의 목사인 김 원영 목사는 "태욱이가 하나님께 드린 것이기 때문에 태욱이가 와서 되돌려 달라하면 돌려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최 태욱 선수의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가서는 최 태욱 선수에게 "내가 목사님께 잘 이야기 해 놓았으니, 가서 다시 돌려받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최태욱 선수가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방황할 수 있었던 사춘기를 잡아준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만약, 제가 그때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저는 지금 마약 중독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 은혜입니다." 결국 최태욱 선수의 아버지도 아들의 믿음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드높이는 것이야말로 성도의 본분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일 때, 하나님은 우리를 존귀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하나님을 높일 수 있습니까? 찬양입니다.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수 있습니다. 찬양을 살리세요. 찬양에는 힘이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의 여러 찬양을 통해서 하나님을 높였습니다. 시편 149편 1절로 3절 "1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양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지어다. 2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시온의 자민(子民)은 저희의 왕으로 인하여 즐거워할지어다. 3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지어다." 시편 150편 1절 "할렐루야 그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권능의 궁창에서 그를 찬양할찌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찬양을 회복하세요. 마음을 다하는 찬양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찬양은 우리의 상한 마음을 치유해줍니다. 지친 영혼에 새 힘을 공급해 줍니다. 그런데, 요즘 찬양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입술로는 찬양하는 것 같지만, 혼을 다한 찬양은 없어요. 마치 가요를 부르는 것이나 찬양하는 것이나 그 마음이 동일해요.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물론 목회자의 탓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찬양하는 우리의 모습에 더 문제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찬양하는 우리의 입술이 거짓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입술로 찬양을 합니다. 거짓을 말하던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성도 여러분, 과연 하나님께서 이런 찬양을 받으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정결하고 우리의 입술이 정직과 진실을 말할 때, 하나님은 그 찬양을 받으십니다.

성도 여러분,

다윗과 같이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가지고 그 심령으로 찬양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들을 높여주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성도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3. 다윗은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상 23장에는 다윗이 그일라 사람들을 도와주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느 날 블레셋 사람들이 곡식을 타작하고 있는 그일라 사람을 공격해서 많은 곡식을 탈취해 갔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다윗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일라로 가서 그들을 구원하라"는 응답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군사들과 함께 그일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군사들이 반대를 합니다. 그들은 그일라로 가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일라로 가는 것은 단순히 블레셋과의 싸움을 통해서 그일라 사람들의 원수를 갚아 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 일입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블레셋이 아닌 또 다른 적에게 죽게 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또 다른 적이 누군 줄 아십니까? 바로 사울이었습니다. 그일라는 사울이 있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곳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일라 사람들이 거하는 곳은 성이었는데, 그곳에 들어갔다가 잘못하면 포위되기 쉬운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사울 역시 다윗이 그일라 사람을 구하러 그곳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이 그를 내 손에 붙이셨도다. 그가 문과 문빗장이 있는 성에 들어갔으니 갇혔도다."라고 말하는 것 아닙니까?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다윗은 이제 독안에 든 쥐이다." 성도 여러분, 독안에 든 쥐를 죽이는 것이야말로 시간문제 아닙니까? 그럼으로, 이러한 상황이 전개될 것을 뻔히 알면서 도와주러 간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기에는 진실의 문제가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진실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다윗이라고 해서 자신의 군사들이 생각했던 것만큼 생각하지 못했겠습니까? 다윗은 자신이 처하게 될 위험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위태롭게 된다 할지라도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한 나머지 진실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이 진실입니까? 사무엘상 23장 2절입니다. "이에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내가 가서 이 블레셋 사람을 치리이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이르시되 가서 블레셋 사람을 치고 그일라를 구원하라 하시니"

다윗은 기도했고, 하나님께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일라 사람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응답은 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 한계는 자신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으로, 다른 사람들이 동조하지 않으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정말 진실인지 다시 한번 하나님께 묻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실천합니다.

성도 여러분,

진실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진실이라는 이름 앞에 우리 자신을 떳떳이 보일 수 있습니까?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Yes해야 할 상황에는 No하고, No해야 할 상황에는 Yes 하는 거짓된 인생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사명에 헌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면서도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다윗은 더 이상 그일라 사람을 구원하라는 하나님의 응답 앞에 단지 육신이 연약해서라는 핑계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기피하지 않습니다. 진실은 내가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입니다. 진실은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이라면, 그것이 내게 불리한 것으로 작용한다 할지라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그일라 사람을 구하라"고 응답하셨을 때,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그럼으로 진실된 사람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하나님의 응답이라면, 역경 속에서 묵묵히 실천해 나가는 사람이 진실된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성도는 진실로 사는 것이지, 자신의 감정에 치우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실하세요. 진실이라는 이름으로 여러분의 삶을 표현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성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정리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정이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어려운 순간에 처하더라도 그 순간에도 여전히 나에게 말씀하시고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음성이 우리의 힘이 됩니다. 그분의 음성이 우리의 능력이 됩니다. 그분을 찬양하세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때, 하나님께서 내 영혼을 소생시키고 나로 하여금 존귀한 자가 되게 하십니다. 또한, 진실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진실하시기를 바랍니다. 자기 자신을 향해 진실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께 진실할 수 없습니다. 진실하지 못한 사람은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감정에 맡기지 말고, 진실함에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오동석목사
글쓴이 : 오동석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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