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g130729 물러서지 않는 담대한 믿음 (히 10:32-39)
본문은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그 다음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 하리라" 36절 끝을 보면 "뒤로 물러가면 침륜에 빠진다."고 합니다. 또한 38절에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명령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버리지 말라'와 '물러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살아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히브리서는 A. D 60년경에 기록된 성경입니다. A. D 60년경이라면 이해하시기가 어려우실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좀 더 말씀드리면 그때는 그 이름도 유명한 악명 높은 로마의 황제 '네로'(A.D 37-68년)가 통치하고 있었던 시기입니다. 네로는 16살에 황제가 되어 황제로 있는 동안에 자기의 아내 '옥타비아'를 살해하고, 자기의 '모친'을 살해했는가 하면 그 형제들을 살해하기도 했던 황제입니다.
고난을 극복하는 믿음
네로 황제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할 구실을 찾기 위해 로마 시에 일부러 불을 지르고 기독교인들을 로마 대 화재의 방화범으로 몰아 핍박하고 죽였던 사람입니다. 주후 60년에 베드로가, 68년에 바울이 각각 그 네로에 의해서 순교 당했습니다. 바로 그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그때에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는 방법도 극도의 잔인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을 붙잡아다 그 몸에 짐승의 가죽을 씌워 사냥개에게 던지거나 굶주린 사자 굶에 던져 넣기도 했습니다. 아니면 높이 세운 쇠기둥에 사람을 산채로 묶어서 그 몸에 기름을 발라 불을 붙여, 인간 횃불을 만들어 거리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고, 비방거리가 되게 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로마 정부의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옥에 갇히고, 재산을 빼앗기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많은 고통이 뒤따랐습니다. 쫓겨나고 빼앗기는 박해 속에서 성도들이 흔히 겪을 수 있는 두려움이나 공포 때문에 담대함을 버릴 수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고 하면서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32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에 참은 것을 생각하라",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된 후'를 말합니다. 그리고 '고난의 큰 싸움에 참여 한 것'은 '믿는 이들을 핍박하는 자들에게 대하여 당당히 대항하며 목숨조차 기꺼이 내어놓았던 용기 있는 신앙의 행위'를 말합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고난은 참된 인간을 만들어주는 통로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고난이라는 통로를 통해서 우리는 참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어떠한 고난에서라도 승리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살펴보아도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서 쉽게 살 수 있도록 하지 않고, 광야라고 하는 고난의 과정을 통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게 하셨습니다. 사역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눈물 없이, 땀과 뼈아픈 고난의 과정 없이 선지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고난은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라고 고백했고, 로마서 8:18에 보면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했습니다.
한국의 초대 교회사를 보면 일본의 신사참배를 끝까지 반대하다가 순교를 당한 주기철 목사님같은 분들도 있습니다. 일제 때에 신사 참배는 분명한 '제 일, 제 이 계명'을 위반한 범죄적 행위입니다. 그 때도 어떤 분은 목숨 걸고 신사 참배를 거절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것을 '국민의례'이니, 단순한 '의식'이니 하면서 우상 앞에 굴복한 자들도 많았습니다. 오늘 날 우리의 현실 속에도 신앙이라는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세속주의와 인본주의 적인 신앙으로 빠져 전진보다는 편의주의 자기 합리주의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절대 그렇게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뒤로 물러가면 침륜에 빠집니다, 그러니 우리는 올라가야 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주승증 교수라는 분이 계십니다. 주승증 교수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의 손자입니다. 할아버지 주기철 목사님께서 감옥에서 겪었던 이야기를 할머니에게 들은 것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감옥에 갇혀 온갖 고문을 당하셨습니다. 정말 끔찍한 고문을 당하셨는데, 그 가운데 이런 고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길다란 꼬챙이를 가지고 요도에 쑤셔 넣습니다. 길다란 꼬챙이가 요도를 찌르는 고통도 고통이지만, 그런 고문을 당하고 나면 소변을 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소변을 보려고 하면 꼬챙이로 찌른 그 상처들 때문에 고통스러워서 몇 시간씩 감옥 바닥을 뒹굴어야 했습니다. 또 대나무를 얇고 길게 깎아서 손톱 밑에다 찔러 넣습니다. 우리는 손에 작은 가시만 박혀도 고통스러운데, 긴 대나무로 찌르니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분이 당하셨던 고문 가운데 가장 견디기 힘든 고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몽둥이로 때리는 것이 아닙니다. 발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발가락을 짓뭉개는 고문도 아닙니다. 손톱 아래 긴 대나무를 찔러 넣는 것도 아닙니다. 가장 견디기 힘든 고문은 잠을 재우지 않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3일이고 4일이고 잠을 재우지 않는 것입니다. 온갖 고문으로 인해 몸은 쇠약해져 있는데다 잠을 재우지 않는데, 며칠 잠을 자지 못하니까 정신이 혼미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순간순간 이러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앙을 배신하고 신사 참배하겠노라고 말해버릴 것만 같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참아냈습니다. 그런 고문에도 주기철 목사님이 끝까지 신앙을 배반하지 않고 순교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온갖 고문을 당하다가 가끔씩 집에 오실 때면 아내인 사모님에게 이런 고백을 했다고 합니다. “너무 힘들어 감옥 바닥에 뒹굴고 있을 때 주님께서 내게 오셔서 나를 가만히 안아 주셨소.” 여러분, 이게 주기철 목사님께서 순교할 수 있었던 힘의 근원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그런 고문을 참아내면서 순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감옥 안에서 찾아와 주신 주님 때문에, 조용히 찾아와 고통 속에서 신음을 토해낼 때 말없이 찾아와 자신을 안아주신 그 주님 때문에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고, 순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담대한 믿음
마음이 약해서 주저주저하는 사람보다는, 용기 있고 담대하게 사는 사람이 성공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통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할까, 말까? 갈까, 말까?? 하고 방황하고 쓸데없는 생각하며 헛된 세월을 보내는 사람보다는, 믿음으로 앞으로 전진하는 사람이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한 정신건강심리학자는 말하기를, ?앞으로 다가올 21세기에는 인간들이 지금보다 몇 십 배의 고통과 고독과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대처할 수 있는 용기와 담대함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건강한 사람도 있고 병든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건강한 사람은 몸 속에 병균이 침투하지 않아서 건강한 것이 아닙니다. 병균을 이길 수 있는 저항력 있기 때문에 건강한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저항력을 상실하면 각종 병균에 감염되어 합병증을 일으킵니다. 강남 압구정동의 큰 약국 주인 말에 의하면 1년 동안 그 약국에서 판 두통약, 신경통약이 큰 통으로 10통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만큼 두려움, 염려, 근심으로 병든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시험이 와도 담대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사람, 죄악과 싸워 이기는 사람, 가난과 저주를 물리치는 사람에게는 축복과 성공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하나님 앞에 담대함을 얻도록 기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국의 평론가이자 역사학자인 칼라일은 ?어떠한 위험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백성에게는 두려움이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개인생활, 가정생활, 직장생활 속에서 자꾸 근심하며 걱정하는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담대함과 용기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 왕은 시편 31편 24절에서 ?강하고 담대하라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담대하게 살아야 합니다. 독일의 시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인생을 실패하게 하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하나는 공포심이요, 또 다른 하나는 교만한 마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두려움과 공포, 교만은 다 같은 죄악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인생을 실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겸손하여지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용기 있게 앞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그럴 때 번창과 성공과 승리가 보장되는 것입니다. 담대란 쓸개 담(膽)에 큰 대(大)입니다. 쓸개가 크다는 말입니다. 간이 건강하고 쓸개가 크면 긍정적이고 진취적이며 담력이 커진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쓴나물과 무교병을 먹었는데 영적인 의미 외에도 과학적인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쓴맛은 심장을 강화하고 무교병은 신맛으로 분류되는데 간을 건강하게 합니다. 심장이 강하면 힘과 용기와 열심히 생기고 간이 강하면 긍정적이고 담력이 생깁니다. 간이 건강하면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담력의 은사를 하나님께 구하시고 음식의 도움이라도 입어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싸움터에 나서는 사람들에게 두 가지 요구되는 신앙의 덕목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담대함입니다. 본문 35절에 말씀합니다. “너희 담대함을 버리지 말라. 이것이 큰 상을 얻느니라.” 왜 우리가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합니까? 예수 믿고 편안하게 살면 더 좋을 텐데 왜 영적인 싸움터에 가서 어둠의 세력과 싸워야 합니까? 큰 상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싸움과 상이라는 말은 잘 어울리지 않는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본문 3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싸움’이라는 말은 ‘운동 경기’를 뜻하는 말입니다. 운동선수들은 매 경기마나 최선을 다해 싸웁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최후에 주어질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싸워 승리했을 때 주어지는 상급을 바라보며 최선을 다해 싸웁니다. 앞에서 잠깐 말씀드렸습니다. 만은 히브리서가 기록된 목적 중에 가장 큰 것은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려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집사님이 형을 전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런저런 방법을 다 써도 안되니까 ?하나님, 이제는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내 힘으로는 도저히 형을 전도할 수 없습니다.? 하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1년을 기도하고, 3년을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형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5년째 기도하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그의 마음속에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담대하라. 네 형이 교회에 안 나오고 믿음이 없는 것은 자기 스스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불신앙을 가져다주는 악한 마귀에게 사로잡혀서 그러는 것이다. 그러니 너는 마귀와 싸워야 한다. 마귀를 쫓아내라!? 그때까지는 전도를 해도 형이 교회에 나오지 않으니까 형한테 섭섭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음성을 들은 후로는 진짜 싸움의 대상은 마귀라는 것을 알고 기도를 달리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형 속에 있는 불신앙의 마귀는 물러가라!? 이렇게 일주일 동안 계속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주일이 되었습니다. 아무 말 없이 교회에 가려고 일어서는데 형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어디 가냐?? ?교회 가요.? ?나도 같이 가자.? 불신앙의 마귀를 쫓아내고 나니, 동생이 특별한 말을 한 것도 아닌데 형이 교회에 나가겠다고 자청한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담대해야 합니다. 마귀를 물리쳐야 합니다. 오늘날, 질병이라는 마귀에게 사로잡히고, 불신앙이라는 마귀에 사로잡히고, 교만이라는 마귀, 방탕과 죄악이라는 마귀에 사로잡혀서 고생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마귀를 물리치고 영적인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기도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도 기도를 통해서 악한 마귀와의 싸워서 이기고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내하는 믿음 (36-37).
"너희가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히12:1절의 끝 부분을 보면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인내에는 소망이 함께 있어야 참으로 인내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고생이지만 앞으로 이 고생의 때가 지나가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는 소망이 없으면 지칩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는 사람은 아무리 고생스런 일이라도 고생으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 고생, 고통은 더 나은 삶을 위한 한 과정에 불과 할 뿐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를 쓸 때에 칭찬하기를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칭찬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믿음에는 역사가 따라야 참 믿음이고, 사랑에는 수고가 따라야 참 사랑이며, 인내에는 소망을 가지고 인내해야 참 인내라는 것입니다(살전1:3).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에 이런 일! 저런 일을 당합니다. 옛날같이 그런 핍박이나 환난은 없습니다. 그러나 뒤로 물러가 신앙의 침체에 빠지고 뒤로 물러 갈 기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때에라도 우리는 인내해야 하겠습니다. 36-3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우리가 인내해야 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약속을 받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만 아직도 완전한 구원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그 날에 온전히 이루게 되는데 그 때까지 인내로써 믿음을 굳건히 지켜야 합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이 땅에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고 인내하는 자만이 영원한 천국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잠깐 동안의 핍박과 괴로움과 세상 재미 때문에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고 뒤로 물러가는 자는 결국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37절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라고 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고통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외치기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합2:3)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정한 때가 있습니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더딜지라도 기다리십시오! 주님은 속히 이르시겠고, 반드시 응답은 오고야 말 것입니다.
인내 없이는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현대인들은 참을성이 없는 것이 그 약점입니다. 기다릴 줄을 모르고 조금만 괴로워도 짜증을 앱니다. 약간만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참지 못하고 신경질을 냅니다. 쉽게 절망하고 쉽게 포기해 버립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굳게 붙드십시오!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인내하며, 넘어지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인내 없는 승리나 상급은 없습니다. 신앙은 인내입니다. 참으십시오, 견디십시오, 인내 뒤에 분명한 상급이 있습니다. 어떤 알코올 중독자가 있었습니다. 술 때문에 자기 아내에게, 자식에게도, 사람 노릇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분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습니다. 아들들은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가 싫었습니다. 큰아들은 나중에 커서 대학교수가 되고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모임을 이끌어 가는 핵심 멤버가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은 그렇게 싫어하던 아버지를 닮아서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습니다. 기자가 큰아들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당신이 오늘 이렇게 존경받는 교수가 되고 알코올 중독자를 위한 모임을 이끌어 가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 때문입니다.” 기자는 이번에는 알코올 중독자가 된 둘째 아들을 찾아갔습니다. “당신이 이렇게 알코올중독자가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버지 때문입니다.” 똑같은 환경 속에서도 큰아들은 아버지 때문에 대학교수가 되고 또한 아버지 때문에 알코올 중독자들을 위한 모임의 핵심 멤버가 되었지만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그대로 닮은 알코올중독자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똑같은 환경 중에서도 한 아들은 그 환경을 극복해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가 하면, 한 아들은 그 환경을 따라서 아버지와 똑같은 알코올중독자가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흔히 사람들은 환경은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들을 합니다.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최악의 환경 속에서 인내하며 꿈을 키우는 사람은 최악의 환경을 극복하고 성공적인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힘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38)
믿음으로 사는 길 말고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얼마나 많이 했는가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믿음으로 살았는가?, 믿음으로 행했는가?'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하지 않은 모든 것이 죄이기 때문입니다(롬14:23). 고대 로마인은 권력을 믿고 살았습니다. 헬라인은 지식을 믿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하나님을 믿고 살았습니다. 지금 어떻게 되었습니까? 권력을 믿고 살던 로마인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지식을 믿고 자랑하고 살던 헬라인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자랑하고 살던 유대인들은 지금 세계에서 빛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사십니까? 무슨 힘으로 사십니까? 돈을 믿고 권력을 믿고 삽니까? 시인은 말합니다. 시46:1절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시146:5절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뒤로 물러서면 안 됩니다.
38절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또 39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멸망)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뒤로 물러선다는 것은 신앙의 퇴보, 신앙의 침체 및 구원의 포기를 의미합니다.
눅9:62절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창19:26절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롯의 아내는 소돔과 고모라의 풍요했던 옛 생활을 잊지 못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뒤를 돌아보다가 그만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그 곳에 하늘에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보십니다. 그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서도 뒤로 물러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은혜를 체험하고는 뒤로 물러서는 사람이 있습니다. 일할 능력과 여건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게으름을 피우고 뒤로 물러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싫어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침륜에 빠지게 됩니다. 여기 '침륜'이란 '재산이나 명예가 굴러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즉 올라가지 못하고 내리막길을 치닫는 것을 침륜이라고 합니다. 또 '침륜에 빠진다.'는 말은 '지옥에 떨어진다.'는 말입니다. 뒤로 물러가면 죄악에 빠지고, 절망에 빠지고, 뒤로 물러가면 실패에 빠져 결국에 가서는 지옥에 빠져 버린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뒤로 물러간다는 말은 후퇴한다는 말로서 '철회하다, 뒤로 끌다'라는 의미입니다. 뒤로 물러가는 사람은 자신의 목적이나 계획을 쉽게 철회해 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남을 뒤로 끌어내리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도 보면 자신만 주저 않는 것이 아니라 남까지 주저앉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뒷걸음치는 믿음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을 뿐 아니라 멸망에 처할 길입니다. 믿음의 담대함을 잃지 말고 천성을 향해 달음질치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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