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내용!! 강해!!

[스크랩] 구약성경 개론, 구약66권 개괄

하나님아들 2019. 2. 4. 15:25

구약성경 개론, 구약66권 개괄



 


 

구약성경 개론과 각권별 특징을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가 공저한 책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성경신학적, 교의학적, 주석적인 관점에서 전체적인 개관을 필수적으로 해야 되겠지만 이번 강의의 초점이 아니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그러나 구조를 살펴보다보면 오히려 전체적인 맥을 잡을 수가 있게 된다.

 

 

 

『 구 약  개 론 』 

 

    구약은 신약을 짓는 토대를 형성하는 구속 역사다. 성경에는1)점진적인 계시가 있고, 구약에서 예시된 것은 신약에서 나타나 펼쳐진다. 모든 역사에서 가장 중심 되는 사건을 향하여 구약은 앞을 가리키고 신약은 뒤를 가리킨다. 메시야의 대속의 죽음을 향해서 말이다.  

 

   구약은 원래 율법과 선지서(마7:12, 눅16:16,29,31), 두 부분으로 나뉘어졌었다. 이것은 후에 율법(the Law), 선지서(the Prophets), 그리고 성문서(the Writings)라는 세 가지로 구분되었다(눅24:44). 구약에 속한 39권은 히브리 성경에서는 24권으로 분류되어 있다. 구약의 헬라어 역본은 오늘날 우리가 하는 것처럼 네 가지로 구분한다. 율법서(5권), 역사서(12권), 시가서(5권), 그리고 선지서(17권), 율법에 속하는 5권의 책들은 12권의 역사서와 연결될 수 있다. 전체 17권의 역사서들은 전체 이스라엘의 역사를 그 발생 초기부터 선지자 말라기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추적한다.  

 

   모세오경에서는 이스라엘이 선택되고 구속되어지며 연단 받고 교훈을 받는다. 나머지 12권의 역사서는 땅의 정복과  사사시대와 통일왕국의 건국과 그 왕국이 북왕국(이스라엘)과 남왕국(유다)으로 나뉘게 되는 것을 기록한다. 5권의 시가서는 의미 있고 솜씨 있는 말들로 엮어져 있는데, 아름다운 삶을 위한 기초가 되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7권의 선지서들은 정죄(이스라엘의 불의와 우상 숭배로 인한)와 위로(현재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있게 될 미래의 희망)이라는 양 날을 가진 메시지를 담고 있다. 종종 개인적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도 이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강력한 말씀을 희석시키려는 시도들을 온 몸으로 거부했다.2) 

 

『 모 세 오 경 』 

 

    모세가 쓴 다섯 권의 책은 율법, 토라(Torah, 율법이라는 의미의 히브리 단어), 모세의 율법, ‘5권으로 구성된 율법’ 그리고 모세오경 등 여러 가지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펜터튜크(Pentateuch)라는 말은 헬라어 penta(다섯)와 teuchos(두루마리 또는 책)에서 유래 되었다. 비록 이 다섯 권을 모세가 썼다는 많은 외적 내적 증거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두 세기 동안 많은 비평가들은 모세의 저작권에 도전했다. 각 권의 중심사상과 하나님의 명령을 살펴보면(p.26 도표참조), 창세기 - 시작들, “있으라!” 출애굽기 - 구속, “내 백성을 가게 하라!” 레위기 - 예배, “거룩하라!” 민수기 - 방황, “들어가라!” 신명기 - 갱신된 언약, “순종하라!” 이다.


 

   창세기 

   이 책은 그 역사와 신학에 있어서 성경 전체의 기초다. 창세기의 처음 열한 장은 태고 시절의 사건들을 간략하게 개관한다.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 인간의 타락, 홍수 심판, 그리고 나라와 민족이 퍼지게 된 사건 등. 12장에서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에게 구원을 가져다주고 복 주실-선택하심으로 말미암아 갑작스런 전환이 있다. 창세기의 나머지 부분은 아브라함과 그 후손인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출애굽기 

   야곱의 후손들은 가나안에서 애굽(이집트)으로 이주하게 되는데 후에 새로운 바로의 압제 밑에서 신음한다. 400년이 지난 후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해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하나님께서는 그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모세에게 힘을 주고 권능을 주어 발 앞에 서게 하시며, 무서운 10가지 재앙을 일으키게 하신다. 유월절을 통해 구속받은 후 이스라엘인들은 애굽을 떠나 바다를 건너 시내산으로 여행한다. 거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율법을 계시하며 장막을 짓기 위한 양식을 그들에게 주신다.


 

   레위기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구속 받고 구원받았으므로, 거룩한 삶을 살도록 하나님을 향해 그들은 구별되어야만 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희생제사와 제사장직과 관련된 지침을 주신다, 레위기의 나머지 부분은 백성에게 어떻게 해야 의식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순결하게 될 수 있는지 가르쳐 준다. 성화와 봉사와 순종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민수기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나아가기 전에 여전히 시내산에 머물면서 추가 지침을 받는다. 그들이 약속의 땅에 막 들어갈 시점에 그들의 믿음은 갑작스럽게 무너지고 만다. 이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불신의 세대가 다 죽어 없어질 때까지 그들로 하여금 방황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을 징계하신다. 새로운 세대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모압 땅에 다다른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을 유업으로 차지하게 될 백성에게 교훈을 주기 시작하신다.3)


 

   신명기 

   모세가 이제 죽음을 목전에 두자 여호수아가 그의 후계자로 지명된다. 광야에서 자라난 세대에게 베푼 마지막 고별 설교에서 모세는 그들에게 과거의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역사하심을 상기시키고, 현재의 필요한 의와 진실한 삶의 필요를 다시 강조하며, 또한 가까운 장래와 먼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계시한다.

 

   『 창 세 기 』 

 

1. 숲 보기  

   창세기는 시작의 책이다. 전체 50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창조로부터 바벨탑 사건에 이르기까지(1~11장), 그리고 아브라함에서 요셉에 이르기까지(12~50장)의 인류 역사를 스케치하고 있다. 앞부분 11장까지는 창조주 하나님을 소개하면서 생명과 죄와 심판과 가정과 예배와 그리고 구원의 시작을 말하고 있다. 나머지 부분은 믿음의 조상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들로부터 나오며, 궁극적으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온다. 

 

   창세기의 첫 부분은 죄가 시작되고 편만하게 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노아 시대의 파멸의, 대홍수 이야기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창세기의 둘째 부분은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부르고 쓰신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통해 세상에 구원과 축복을 가져올 것을 약속하신다. 아브라함으로부터·······이삭을 거쳐·······야곱을 거쳐·······요셉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약속들은 점점 열매를 맺어 결국 귀한 땅을 소유하는 위대한 민족으로 태어난다. 

 

   창세기(Genesis)라는 말은 ‘기원, 근원, 세대, 혹은 시작’이라는 뜻을 가진 희랍어다, 히브리 원어상의 제목(Bereshith)은 ‘시작에(In the Beginning)'라는 뜻이다. 창세기의 문학적 구성은 매우 간결하다. 즉 이 책은 “······의 대략(generations, 개역 성경에는 후예, 계보, 사적, 약전 등으로 번역되어 있음)은 이러하니라.”라는 말로 시작되는 11개의 구별된 단위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1)약전들에 대한 도입부분(1:1~2:3) (2)하늘과 땅(2:4~4:26) (3)아담(5:1~6:8) (4)노아(6:9~9:29) (5)노아의 후손(10:1~11:9) (6)셈(11:10~26) (7)데라(11:27~25:11) (8)이스마엘(25:12~18) (9)이삭(25:19~35:29) (10)에서(36:1~37:1) (11) 야곱(37:2~50:26)의 약전이다. 

 

   창세기는 세 가지 지역적 배경으로 나누어진다. (1)비옥한 초생달 지역(the Fertile Crescent, 1~11장) (2)이스라엘(12~36장) (3)애굽(이집트, 37~50장)이다. 앞부분 11장 까지는 약 2천년 이상의 기간을 다루고 있으며 약 2,400㎞의 지역을 무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 배경은 매우 속도감 있게 바뀌고 있다, 그리고 창조와 에덴동산과 노아 홍수와 바벨탑이라는 엄청난 사건들을 그리고 있다. 창세기의 중간 부분은, 비옥한 초생달 지역에서의 약 2천년에 달하는 기간으로부터 가나안이라는 조그만 지역에서의 200년이 채 안되는 기간으로 무대가 좁혀진다, 가나안 족속들은 우상 숭배와 부도덕이 만연한 가운데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경건함은 그의 후손들에게 계속 이어지지 못했으며, 그들 중 일부는 커다란 부도덕을 범한다. 마지막 부분 14장에서 하나님께서는 ‘70인’을 애굽으로 옮겨 거기서 그들이 번성할 수 있도록 하심으로써 장래 이스라엘이 될 미약한 씨족이 멸절되지 않도록 보존하신다. 애굽은 가나안의 매우 위협적인 영향력으로부터 이들을 분리시켜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택하신 민족으로 자라나기까지 그들을 품어주었던 전혀 뜻밖에 모태(womb) 구실을 했다. 

 

 

   창세기는 성경 어느 책보다도 긴 기간을 다루고 있다. 사실 이 책은 나머지 성경65권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긴 기간을 다루고 있다. 2000년이 넘는 기간이, 창세기의 1/5밖에 되지 않는 1~11장에서 다뤄지고 있다. 대조적으로, 창세기의 4/5(12~50장)는 300년도 안 되는 기간을 다루고 있다.  

 

   창세기는 모세 오경뿐만 아니라 전체 성경의 도입부(서론)가 되게 한다. 창세기는 성경의 모든 위대한 교리들의 기초를 제공한다. 창세기는 특별히 요한계시록의 이해에 필수적인데 그 이유는 성경의 첫 세 장과 마지막 세 장은 너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창세기의 주제는 모든 민족을 축복하실 수 있도록 하는 통로가 될 한 민족을 하나님께서 택하셨다는 것이다. 창세기는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과 그 이스라엘 민족이 영적인 눈을 가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언약 계획을 주신 것을 기록하기 위해 쓰여졌다. 창세기는 인간의 죄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간섭하시고 또 구속계획을 제공하시는지 보여준다. 창세기는 하나님을 제외한 모든 것의 시작을 제시하기 위해 기록되었다.4)우주(1:1), 사람(1:27), 안식일(2:2~3), 결혼(2:22~24), 죄(3:1~7), 희생제사와 구원(3:15,21), 가족(4:1~15), 문명(4:16~21), 정부(9:1~6),나라들(11), 그리고 이스라엘(12:1~3)의 시작이 들어있다. 

 

   창세기의 핵심 구절은 3:15(여자와 원수), 12:3(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이다. 핵심 장은 15장이다. 모든 성경의 중심이 되는 아브라함 언약이 12장 1~3절에 주어져 있고 15장 1~21절에 확증(비준)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세 가지 특별한 약속을 받는다. (1)광대한 땅의 약속 -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15:18) (2)위대한 민족의 약속 -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13:16) (3)커다란 복의 약속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12:2)    

 

   창세기는 메시야에 대한 예언에 있어서 점점 일반적인 면에서 구체적인 면으로 나아간다. 그리스도는 여자의 후손(3:15)이며, 셋의 계보에서 나오며(4:25), 셈의 자손이며(9:27), 아브라함과(12:3), 이삭과(21:12), 야곱의(25:23) 후손이며, 유다지파에서 나오게 된다(49:10). 모형에서 알 수도 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롬5:14)이다. 아담과 예수님, 그 둘 다 하나님에 의해 죄 없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왔다. 아담은 옛 창조의 머리며, 그리스도는 새 창조의 머리다. 멜기세덱(‘의의 왕’)은 ‘하나님의 아들’과 닮았다(히7:3).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온 살렘(평화)의 왕이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30~36) 

    

 

2. 나무 보기  

   창세기는 네 가지 커다란 사건들(1~11장)과 네 명의 위대한 사람들(12~50장)을 말하고 있다. 네 가지 커다란 사건들은 창조(1:1~2:25), 타락(3:1~5:32), 홍수(6:1~9:29), 나라들(10:1~11:9)인데 인류의 시작이 주제이며, 비옥한 초생달 지역(에덴~하란)에서 이루어진 사건들이다. 네 명의 위대한 사람들은 아브라함(11:10~25:8), 이삭(25:19~26:35), 야곱(27:1~36:43), 요셉(37:1~50:26)인데 히브리민족의 시작이 주제이며, 가나안(하란~가나안)과 애굽(가나안~애굽)에서 이뤄진 사람들이다(p.30 도표 참고).  

 

   1~11장은 성경 전체가 그 위에 앞으로의 내용을 펼쳐나갈 기초로서 네 가지 주된 사건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창세기는 인류의 하나 됨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께서 바벨탑의 반역 때문에 홍수 이후 세상의 단일 문화와 언어를 다양하게 만들어 사람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다. 일단 나라들이 흩어진 후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과 그의 자손들에게 초점을 맞추어 그들을 통해 모든 나라들을 축복하시려고 하신다(12~50장).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12장)은 창세기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세 가지의 언약들은(땅, 자손, 복) 세상에 구원을 가져오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매우 근본적인 것이다.5)(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36~42) 

 

 

   『 출 애 굽 기 』 

 

1. 숲 보기  

   애굽에서 약 400년간 민족의 형성기를 가진 후에, 갓 형성된 나라(민족)인 이스라엘은 이제 속박의 사슬을 떨쳐 버리고 새로운 자신의 영토를 찾으려고 한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의 애굽에서 해방과, 하나님의 이 새로운 민족이 시내 광야로 이동해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들을 종살이에서 해방시킨 위대한 지도자인 모세는 애굽에 무시무시한 열 가지 재앙을 선포하였고 그 후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을 향해 곧장 나아간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이 한민족으로서 탄생하는 것에 관한 기록이다, 애굽이라는 보호된 ‘모태’ 안에서 70여명의 히브리 씨족은 급속히 번식했다. 적절한 때가 되었을 때, 비록 심한 ‘출산의 고통’이 수반되기는 했지만, 200만에서 300만에 달하는 갓 태어난 이 민족은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 보호받고 공급받고 양육 받을 세상으로 나오게 된다. 히브리 원어상으로 보면 출애굽기는 ‘그리고’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어서 이 책이 창세기에 이어지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헬라어 제목은 ‘탈출, 떠남, 나감’이라는 뜻이다.  

   출애굽기의 두 가지 기본적인 주제가 있는데, 그 둘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첫 번째 주제는 구속으로 유월절 사건에 묘사되어 있고, 두 번째 주제는 구원인데 애굽으로부터의 탈출(출애굽)하는 사건에 묘사되어 있다. 이 구속과 구원은 피 흘림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성취된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통치를 지상에 드러낼 목적으로 이스라엘이 한 민족으로 탄생하는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이 책은 모세의 영도력 아래 이스라엘이 구속되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은 우상 숭배의 헛됨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출애굽기는 또한 구속받고 구별된 백성에게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필요함을 가르치고 있다.6) 

 

   핵심 구절은 6:6(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19:5~6(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이다. 핵심 장은 12~14장이다. 구약 전체의 절정이 되는 사건이 12~14장에 기록되어 있다. 즉 피(유월절)와 능력(홍해)을 통한 구원이다. 출애굽 사건은 마치 신약에서 그러하듯이 구약 전체에서 중심이 되는 사건이다.  

   출애굽기에는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 많이 나온다. (1)모세. (2)유월절 : 요한복음 1장29절과 36절, 고린도전서 5장7절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임당한 하나님이시오 유월절 양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3)일곱 절기 (4)출애굽 : 바울은 세례를 출애굽에 연관시키고 있는데 그 이유는 세례가 옛것에 대해 죽고 새것과 동일시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롬6:2~3, 고전10:1~2). (5)만나와 생수 : 신약은 이 둘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하고 있다(요6:31~35,48~63, 고전10:3~4). (6)성막(회막) : 성막은 분명 그리스도의 위격과 구속의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전개방식은 고난, 보혈, 그리고 죽음, 아름다움, 거룩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기까지 점진적이다. (7)대제사장 : 우리의 큰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하고 있다(히4:14~16, 9:11~12,24~28).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의 종교적 예식과 관습들, 성막의 건립, 제사장 제도의 확립, 모세 율법, 그리고 희생제사 제도 등에 대해 많은 것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의 후속역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이 책은 이스라엘 민족이 어떻게 애굽에서 탈출하였고,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었으며, 어떻게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의 역사하시는 뜻을 알게 되었는지 말하고 있다. 출애굽 사건은 그리스도 이전 시기에 있었던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위대한 예로서, 또 구약 전체에 중심으로 우뚝 서 있다. 출애굽 사건은 구약의 메시지에 있어서 나머지 부분에 뼈대를 제공한다. 유월절, 출애굽, 율법 그리고 성막은 이후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사상 세계를 지배하고 좌우한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44~49) 

   출애굽기의 위대한 주제는 단순히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 행위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하시고,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의 사역이 출애굽기의 주제인 것이다. 구속이란 말은, 구주께서 그 백성을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과의 특별한 관계로 인도하여 저들을 친히 사들여 소유하며, 자신의 보배(19:5)로 삼는 것도 의미하는 말이다.  

   본서의 첫 부분은 유월절에서 절정에 달하며, 또 갈보리 산에서 성취하신 더 한층 위대한 구원을 예표하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록하고 있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시내산에서의 언약으로 옮겨진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기 백성임을 선언하시고, 저희에게 십계명을 주셨다. 또 저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여호와로 삼고 복종을 맹세했다. 이 언약은 저들의 하늘나라 백성으로서의 존재 기반이며, 교회로 불러냄을 실행하시는 하나님의 새 언약의 원형이다(고전11:25, 히8:6~13).  

   

   마지막으로 성막과 예배에 관한 규례부분은 구속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인간으로서 반드시 행해야 할 생활 근거를 제공한다. 새 언약에 있어서 인간과 하나님과의 교제의 근거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러므로 성막과 예배에 관한 율법의 규례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이다(히8:5, 9:1, 10:1). 본서에 기록된 이적은 하나님의 사역의 증거이며(요2:11), 시내산에서 맺어진 언약은 “새 언약”의 그림자이며, 성막에서 드리는 예배 역시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이다(히10:1). (위클리프 주석 편찬실, p.13~14.) 

 

2. 나무 보기  

   출애굽기는 고통으로 시작해 자유로 끝맺는다. 이 책의 이야기는 백성의 탄식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동해간다. 이 책의 이야기는 가나안으로부터 애굽으로 이주해간 야곱의 70여 명의 자손들로부터 시작하는데 이것은 창세기에서 시작된 이야기와 이어져 있다. 그들은 역경 속에서도 계속 번성하여 200만이 넘는 거대한 민족이 된다. 이스라엘 민족이 노예 상태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드디어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신속하게 응답하여 ‘편 팔과 큰 재앙’(6:6)으로 그들을 구원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수세기 전 아브라함과 맺으신 약속(창 15:13~14)을 신실하게 성취하신다.  

   출애굽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1)애굽으로부터의 구속(1~18장) (2)하나님의 계시(19~40장)이다.   

   애굽으로부터의 구속: 4세기 동안의 노예생활 이후, 이스라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에게 자기들을 구원해달라고 부르짖는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해 이미 모세를 준비해 오셨다. 이제 그를 광야의 불붙는 떨기나무 사이에서 불러 이스라엘의 대변자로서 바로 앞에 서도록 하신다. 그러나 바로의 마음은 강퍅해진다.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5:2). 하나님께서는 곧 일련의 실물 교육, 즉 열 가지 재앙을 통해 바로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신다. 이 재앙들은 갈수록 점점 심해져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은 모든 애굽 가정에 장자의 죽음을 가져온다. 이스라엘은 유월절 양의 희생을 통해 이 재앙에서 벗어난다. 이스라엘 민족이 이때에 하나님에 대해 가졌던 믿음은 그들의 국가적 구속의 기초가 된다. 그들이 애굽을 떠났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며, 바다를 가르고 추격하는 애굽의 군대로부터 구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광야 생활 내내 그들을 보호하며 공급하며 붙잡아 주신다. 

 

   하나님으로부터의 계시: 구속받은 백성은 이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위해 따로 구별되어야만 했다. 바로 이것을 강조하는 것이 1~18장에서의 이야기 서술로부터 19~40장의 벌률 제정으로 넘어가는 이유다. 시내산에서 성막의 건립 설계도와 함께 하나님의 도덕법과 시민법 그리고 의식법을 받는다. 백성이 금송아지를 숭배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은 후 성막이 건립되고 봉헌된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49~58)   

 


 

『 레  위  기 』 

 

1. 숲 보기  

   레위기는 하나님 백성의 예배(worship)와 삶(walk)에 초점을 두고 있다.7)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은 구속을 받고 제사장 나라로 또 거룩한 백성으로 세움을 받았다. 레위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그들의 제사장적인 소명을 완수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그들은 종살이에서 건져냄을 받고(출애굽기), 그리고 하나님의 성소로 인도되었다(레위기). 이제 그들은 구속에서 봉사로, 구원에서 헌신으로 계속 나아가야만 한다. 레위기는 이스라엘이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며 순종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하나님께서 새롭게 구속받은 당신의 백성을 위해 마련한 지침서이다.8)희생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또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요구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얼마나 거룩하신 분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진정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거룩하기 때문에 너희도 거룩해야만 할”(19:2) 것이다. 레위기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당신의 은혜 안에서 죄의 형벌에 대한 값으로서 대속의 죽음을 받아들이시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히브리원서의 책 제목은 “그리고 그가 부르셨다.” 탈무드는 ‘제사장들의 법’ 그리고 ‘희생제사법’ 70인역은 ‘레위인들에게 해당하는 것’ 벌게이트역에서 이 단어를 따왔는데 이것이 영어제목으로 채용되었다. 레위기의 뚜렷한 주제는 거룩함(11:45, 19:2)이다. 레위기는 오직 희생 제사와 제사장의 중재를 기반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과, 또한 성화와 순종을 통해서만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을 살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레위기는 예배 규정과 법규와 제사장들의 성결에 대한 지침을 제공한다. 레위기의 핵심 구절은 17:11(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20:7~8(너희는 스스로 깨끗케 하여 거룩할 지어다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케 하는 여호와니라)이다. 핵심 장은 16장이다. 속죄일 때문이다(16:30).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유일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레위기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에 대한 모형과 암시들로 가득 차 있다.  

   (1)다섯 제사 : 번제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온전히 드리신 것을 예표한다. 소제는 그리스도의 죄 없고 흠 없는 봉사를 예표한다. 화목제는 십자가의 사역을 통해 믿는 자가 하나님과 가지게 되는 교제에 대한 모형이다. 속죄제는 우리의 죄짐을 지시는 분으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이다. 속건제는 죄가 초래하는 심각한 결과에 대한 값을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것을 예표한다.  

   (2)대제사장 : 첫 번째 대제사장인 아론과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 사이에는 몇 가지 유사점과 대조점이 있다.  

   (3)일곱 절기 : 유월절은 하나님의 어린 양의 대속적인 죽음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유월절 날 죽임을 당하셨다. 무교절은 믿는 자의 거룩한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전5:6~8). 초실절은 모든 신자의 부활(고전15:20~23)에 대한 첫 번째 열매로서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초실절 날 부활하셨다. 오순절은 그리스도의 승천에 뒤이은 성령의 강림에 대해 말하고 있다. 나팔절, 속죄일 그리고 장막절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된 사건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연중 절기 중 왜 이 세 절기가 첫 네 절기와 시간적으로 뚝 떨어져 있는지에 대한 이유가 될 것이다. 이 책에서의 예언적 모형들과 상징들은 신약에서, 특히 히브리서에서 성취 되고 있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6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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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위기는 이제 막 구속받은 백성을 예배와 봉사와 하나님께 대한 순종으로 이끌어가기 위한 책인 레위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1)희생제사(1~17장) (2)성별(18~27장)이다.  

   희생제사(Sacrifice) : 이스라엘 사람들이 희생 제사를 통해(1~7장), 제사장의 중재에 의해(8~10장), 부정한 것으로부터 민족을 성결케 하는 것을 통해(11~15장), 그리고 국가적인 정화와 교제를 통해(16~17장)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피의 희생 제사들은 예배자로 하여금 인간의 죄 때문에 거룩한 하나님께서 생명이라는 값비싼 제물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키신다(17:11). 무죄한 희생 동물의 피는 죄 있는 제물 헌납자의 생명의 대속물이 되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9:22). 

   성별(Sanctification) :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즉 그들에게 거룩할 것을 요구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 거룩하다는 것은 ‘구별됨’ 혹은 ‘분리됨’을 의미한다. 그들은 다른 나라들로부터 하나님에게로 구별되어야 했다. 레위기에서 거룩의 개념은 87회나 나오는데 어떤 곳에서는 의식적 거룩(예식적 요구)을 의미하기도 하고 다른 곳에서는 도덕적 거룩(삶의 정결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성별은 이스라엘 백성(18~20장), 제사장직(21~22장), 그들의 예배(23~24장), 가나안에서 살게 될 그들의 삶(25~26장), 그리고 그들의 특별한 서약들(27장)에까지 적용된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그들의 구원자와 교제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어떤 더러움들을 제거하는 일이 필요했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65~72)     

 

   『 민  수  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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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수기가 시작되는 시점은 애굽으로부터 탈출(출애굽)이라는 사건이 있고 단지 1년이 지난 때다. 하나님에 의한 징계의 책인 민수기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이 믿지 않거나 무책임한 결정을 내릴 때 그 결과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보여주고 있다. 민수기는 구  세대로부터 시작하여(1~12장), 비극적인 전환기를 거쳐(13~20장) 이제 가나안의 문턱에 도달한 신세대의 이야기로 끝나고 있다(22~36장). 민수기는 두 세대의 이야기, 두 번의 인구 조사, 약속의 땅의 축복을 향유하기 위한 두 번의 교훈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부드럽고 친밀하지만 그러나 그 사랑은 또한 엄할 수가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에만 앞으로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민수기는 방향의 책이다. 민수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두 번의 계수, 즉 한번은 시내산에서, 두 번째는 모압평지에서 그 이름이 비롯되었다. 그러나 책의 대부분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방황한 것에 대해 다루고 있다. 민수기의 교훈은 분명하다. 비록 광야의 경험을 통과하는 것이 필요한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거기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에게 열하루 정도의 쉬운 여정은 40년의 고뇌로 변하고 말았다. 민수기는 ‘여행의 책’ ‘불평의 책’ ‘모세의 네 번째 책’으로도 불린다. 레위기는 단지 한달 간의 기간을 다루지만 민수기는 거의39년에 걸친 기간을 다루고 있다. 민수기는 시내산에서 마지막 20일간에서 시작하여, 가데스바네아 근처에서의 방황을 거쳐, 궁극적으로 제40년에 모압 평지에 도달하는 이스라엘의 진행을 기록하고 있다. 

   민수기의 주제는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불신과 불순종의 결과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백성을 징계하시지만 그들의 변덕스러운 변절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언약적 약속에 끝까지 신실하시다. 민수기는 시내산에서 모압 평지에 이르기까지의 이스라엘의 방황의 역사를 더듬어보기 위해 기록되었다. 그러나 38년간의 방황 기간 동안의 기록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민수기가 주제에 충실한 매우 선별적인 역사 기록이라는 점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핵심 구절은 14:22~23(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20:12(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이다. 핵심 장은 14장이다. 민수기의 분기점은 이스라엘이 올라가 약속의 땅을 정복하기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을 거역한 14장이라고 할 수 있다(14:34).    

      

   민수기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문명한 묘사는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장대에 달린 구리뱀(21:4~9)이라고 할 수 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 반석 또한 그리스도의 모형이다.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니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 만나는 하늘에서부터 내려오신 생명의 떡을 미리 그리고 있다(요6:31~33). 발람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바라보고 있다(24:17). 

   하나님께서는 창세기에서 한 민족을 선택하시고, 출애굽기에서 그들을 구속하시며, 레위기에서 그들을 성별하시고, 민수기에서 그들을 이끄신다. 레위기는 믿는 자의 예배(worship)를 묘사하는데 비해 민수기는 그들의 행함(walk)을 묘사한다. 신약에서 두 긴 구절들은 영적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실례로서 이 광야 경험을 언급한다. 고린도전서 10장 1~12절에서 이 광야 경험은 방종과 부도덕의 위험을 예증하며, 히브리서 3장 7절부터 4장 6절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는 주제를 예증한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고전10:11).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7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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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년간의 광야생활을 통해 노예출신의 오합지졸들을 약속의 땅을 차지할 준비된 한 민족으로 탈바꿈시켰다. 민수기는 구세대로부터 시작하여(1:1~10:10), 비극적인 전환기를 거쳐(10:11~25:18), 이제 가나안의 문턱에 도달한 신세대의 이야기로 끝나고 있다(26~36장). 

   구세대 : 하나님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를 목도한 그 세대는 시내산 기슭에 머무는 기간 내내 하나님으로부터 계속 지침을 받는다(1:1~10:10). 

 

   비극적인 전환기 : 가데스에서의 결정적인 시점에서 그들은 불신앙 가운데 뒤로 물러선다. 그들의 불평은 그칠 줄을 몰랐다. 12명의 정탐꾼을 보내고 난 후의 그들의 불신앙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실 수 없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가데스에서의 거역은 이 책의 전환점이 된다. 즉 출애굽 세대는 정복세대가 되지 못하게 된 것이다. 불신앙은 징계를 초래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막는다. 하나님을 믿었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 

 

   신세대 : 전환기가 끝나자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 바로 동편의 모압 평지로 이동한다. 새로운 교훈을 받고, 새로운 인구조사가 다시 실시되며, 여호수아가 모세의 후계자로 임명되어, 백성의 일부가 요단 동편 지역에 정착한다. 

   민수기는 두 세대의 이야기(1~14장, 21~36장), 두 번의 인구 조사(1장과 26장), 두 번의 여행(10~14장, 21~27장), 그리고 두 번의 교훈(5~9장, 28~36장)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민수기는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롬11:22), 모두를 예증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할 때에만 앞으로 나갈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79~88)     

 

 

  『 신  명  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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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세가 ‘광야 북쪽에서 행한 강론’인 신명기는 120세 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행한 일련의 고별 메시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된 40년간의 광야 유랑 세대에게서 태어난 신세대에게 한 것이다. 신명기는 레위기처럼 많은 세부 율법 조항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그 주된 강조점은 제사장이나 희생제사에 있지 않고 평민 대중에게 있다. 모세는 신세대가 자기 부모들의 비극적인 본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교훈, 즉 순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로운 세대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회상의 책’이라고도 불리는 신명기는 ‘두 번째 율법’이라고도 불린다. 그것은 신명기가 두 번째가 아니라 시내산에서 주어진 원래의 율법을 새로운 세대에게 적용하고 확장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레위기처럼 신명기도 시간적으로 진전되지 않고 있다. 신명기는 여리고와 요단강 바로 동쪽에 있는 모압 평지에서 일어난 일들만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은 40년간의 유랑의 끝, 즉 신세대가 막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시점에 기록되었다. 모세는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신명기를 기록했다. “잊지 않도록 주의하라”가 신명기의 핵심 주제다.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1)그들이 번성하게 되었을 때 그 번성함을 가져다 준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2)그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할 때 하나님께서는 가데스바네아에서 하나님을 믿지 못했던 이전 세대에게 하신 것처럼 그들을 징계하시리라는 것을. 신명기는 축복의 조건으로의 순종에 대한 부름이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하나님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시며 그 언약을 신세대에게까지 연장시키신다.  

    

   신명기는 모세시대의 근동의 조약 형태와 똑같은 형식을 활용한 언약의 갱신 문서다. 이 조약들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다. (1)전문(조약을 맺는 쌍방 당사자들에 대한 열거, 1:1~5), (2)역사적 서문(과거에 왕이 베푼 은혜로운 일들에 대한 언급, 1:6~4:43), (3)조약 규정들(언약의 조건들, 4:44~26:19), (4)비준(축복과 저주, 27~30장), (5)연속성(언약의 지속에 관한 규정, 31~34장). 선택에 대한 강조가 있고 백성은 죽음보다 생명을 택하도록 도전받고 있다(30:19~20). 이스라엘 백성은 ‘듣고(50회)’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들을 ‘사랑의 마음(21회)’ 으로 ‘행하고’ ‘지키고’ ‘준수(177회)’하라는 말을 듣는다. 

   핵심 구절은 10:12~13(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30:19~20(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오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이다. 핵심 장은 27장이다. 언약의 비준이 27장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생생한 묘사는 18장 15절(“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희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에 나타난다. 신명기는 모세 오경의 다른 책들을 보완하는 책이며 이것은 마치 공관복음에 대한 요한복음의 역할과 유사하다. 신명기는 누락된 요소들을 채워주며, 모세오경의 다른 책들에 나오는 역사적인 이야기에 영적 중요성(의미)을 부여한다. 창세기로부터 민수기까지는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면, 신명기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있다. 이 책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강조는(4:37, 7:7~8, 10:15, 23:5)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진전이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이 책을 자주 인용(마4:4,7,10, 22:37~38, 막7:10, 10:19,29~30)하셨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9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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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명기는 시내산에서 주어진 옛 언약의 갱신에 대한 기록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루신 역사에 대한 회상적인 조망과 내면 성찰적인 조망, 그리고 미래적인 조망 등 세 번의 설교들을 행함으로써 그 일을 완수했다. 

   모세의 첫 번째 설교 : 모세는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역사에서 부정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들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과거를 돌아본다. (1)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도덕적인 심판, (2)순종했을 때의 하나님의 구원과 공급. 교훈의 명쾌한 핵심은 바로 순종은 축복을 가져오고 불순종은 징계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모세의 두 번째 설교 : 도덕적이고 법적인 내용을 다루는 이 부분은 책 전체에서 가장 긴 부분인데 왜냐하면 가나안 땅에서 지속하게 될 한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의 미래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속하는 장들은 율법의 세 가지 범주들이(계명들-십계명, 법규들-의식적인 의무-희생 제사들과 십일조와 종교적 축제절기, 법령들-시민법과 사회법) 있다. 

   모세의 세 번째 설교 : 이 부분에서 모세는 앞으로의 역사를 미리 기록하고 있다. 모세는 가까운 장래(축복과 저주)와 먼 미래(열국에 흩어질 일과 궁극적인 귀환)에 이스라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예언하고 있다. 모세는 백성들에 의해 곧 비준될 언약의 조항들을 열거한다.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기에 그는 여호수아를 그의 후계자로 임명하고 회중에게 고별사를 전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아무도 알지 못하는 장소에 직접 묻으시는데 이는 아마도 우상숭배를 막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모세는 변화산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나는데 결국 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간 셈이다(마17:3). 모세오경의 마지막 세 구절은(34:10~12) 이 위대한 사람에 대한 적절한 묘비명이라고 할 수 있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96~102)    

  

『 역사서 개론 』 

 

   열두 권의 역사서는 신명기가 끝난 시점에서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이 책들은 약속의 땅을 차지하여 정착하는 이스라엘, 사사 시대로부터 왕정 시대로의 전이, 왕국의 분열과 쇠퇴, 북왕국과 남왕국의 포로 유배, 그리고 남은 자의 귀환 등을 기술하고 있다. 역사서는 세 가지로 구분된다, (1)신정 정치 기간의 책들 -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 (2)왕정 시대의 책들 -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 (3)회복기의 책들 - 에스라, 느헤미야, 에스더 

 

신정 정치 기간의 책들 

   이 책들은 가나안의 정복과 정착, 그리고 사사 시대의 생활을 다루고 있다. 이 기간 중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 직접 다스림을 받는 민족이었다(신정). 

   여호수아 

   여호수아서의 전반부는 여호수아와 백성들의 믿음과 순종을 통해 성취된, 7년간에 걸친 약속의 땅 정복을 묘사하고 있다. 영적으로 실제적으로 준비를 마친 후 이스라엘 백성은 세 번의 정벌을 통해 땅을 차지한다. 즉 중앙 정벌, 남방 정벌, 그리고 북방 정벌, 이 책의 후반부는 열두 지파에게 땅을 분배하는 일을 자세히 말하고 있고 백성에게 도전을 주는 여호수아의 메시지로 끝을 맺고 있다. 

   사사기 

   사사기에 나타나는 불신앙은 여호수아에 나오는 믿음의 순종과 대조를 이룬다.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인들을 다 몰아내지 않았고 그들의 우상 숭배에 물들기 시작한다. 사사기는 외국의 압제와 회개, 그리고 구원이 7번 반복되는 것을 기록한 책이다. 백성은 이 반복으로부터 교훈을 얻지 못했다. 사사기는 우상 숭배와 부도덕의 두 실례로 끝을 맺고 있다. 

   룻기 

   이 작은 책은 어두운 시대에 한줄기 빛을 비추고 있다. 룻의 이야기는 사사시대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지만, 의와 사랑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 등을 힘 있게 예증하고 있다. 

 

왕정 시대의 책들 

   이 여섯 권의 책들은 주전 1043년의 왕정의 시작과 주전 586년의 몰락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왕정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사무엘상 

   사사 시대로부터 왕정으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사무엘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이끈다. 백성들은 극성스럽게 왕을 요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사울을 왕으로 기름을 부으라고 하신다. 사울은 처음에는 잘하지만 곧 불경건한 독재자로 전락한다. 다윗이 하나님의 선택한 자가 되지만 그는 시기심에 사로잡힌 사울에게 쫓기게 되는데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사울의 노력은 그가 죽음으로써 끝난다. 

   사무엘하 

   사울이 몰락하자 다윗은 유다를 7년간 다스리게 되고 그 후 열두 지파의 연합공동체를 33년간 통치한다. 다윗의 통치는 그가 간음과 살인을 범하기 전까지는 커다란 축복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 시점 이후로부터 죽을 때까지 다윗은 개인적, 가정적, 그리고 국가적 갈등들에 시달린다. 

   열왕기상 

   솔로몬은 왕국을 정치적 경제적 전성기로 이끌며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지만, 이방 여인들과의 일부다처 결혼이라는 어리석은 일을 저지른다. 주전 931년에 그가 죽은 후 왕국은 비극적으로 분열되는데 이때 이스라엘의 북쪽 지파들은 그들 자신의 왕을 옹립한다. 오로지 남쪽 왕국 유다(두 지파)만이 다윗 왕조에 충성한다.  

   열왕기하 

   분열 왕국의 이야기는 열왕기하에서 계속 되는데 결국 이스라엘과 유다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는다. 이스라엘의 열아홉 왕들 중 그 누구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사람이 없었고 그들의 타락은 주전 722년 앗시리아에 의해 그들이 포로로 잡혀가는 원인이 된다. 유다는 스무 명의 왕들 중 여덟 왕이 하나님을 따랐기 때문에 망하지 않고 좀더 지속된다. 그러나 유다 역시 심판에 의해 몰락하고 주전 605년과 586년 사이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간다.   

   역대상 

   역대기는 다윗의 시대로부터 포로 시대까지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님의 관점에서 읽어 주고 있다. 역대상은 아담으로부터 사울의 가문에 이르는 계보를 장장 아홉 장에 걸쳐 제시하면서 시작되는데, 그 이후에는 다윗의 생을 영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어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다. 

   역대하 

   역대하는 솔로몬의 생을 묘사하면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는데 성전의 건축과 봉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 후 역대하는 유다의 왕들의 역사만 다루고 있는데, 유다의 궁극적인몰락에 대한 영적 도덕적 이유들을 제시하고 있다. 

 

회복기의 책들 

   역사서의 마지막 세 책은 70년의 포로 기간(주전605년~536년)이후 유다의 남은 자들이 그들의 고토로 돌아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은 주전 536년부터 420년 까지 스룹바벨, 에스라, 그리고 느헤미야의 인도 아래 돌아온다. 

   에스라 

   페르시아는 주전 539년 바벨론을 정복하고 고레스는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칙령을 536년에 공표한다. 스룹바벨은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약 5만 명의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으로 이끌고 간다. 그리고 그후 458년 제사장 에스라는 거의 2만 명의 유대인들을 데리고 돌아온다.  

   느헤미야 

   성전이 지어졌으나 예루살렘 성벽은 여전히 폐허 상태로 남아 있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에게서 성벽을 다시 재건할 수 있다는 인가를 얻고 그 일에 필요한 모든 재료와 자금도 확보한다(주전444년). 성벽이 건설된 후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백성을 이끌고 영적 부흥과 개혁 사업을 일으킨다.  

   에스더 

   에스더의 이야기는 에스라 6장과 7장 사이의 기간에 있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페르시아에 남아 있기로 결정했지만 그들을 멸절시키려는 음모로 인하여 그들의 생명은 경각에 달리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으로 개입하셔서 에스더와 모르드개를 통해 백성을 구원하신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107~111)       

     

『 여 호 수 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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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두 권의 역사서(여호수아~에스더) 중 첫 번째 책인 여호수아서는 모세오경과 이스라엘의 남은 역사를 연결하는 고리다. 30여 개 이상의 도시 국가에 거주하는 적들을 정복하는 세 번의 정벌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능력 있는 여호수아의 지도력 아래 너무나 중요한 교훈을 배운다. 승리는 군사적인 힘이나 수적 우세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 온다는 것을. 여호수아의 원래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의 호세아(민13:8)였는데 모세가 그것을 “야웨는 구원이시다”라는 의미의 여호수아로 바꾸었다(민13:16). 이것은 헬라어 이름 Iesous(영어로는 Jesus)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다. 그의 이름은, 비록 여호수아가 정복 기간 중에 이스라엘 민족의 리더였지만 주님께서 정복자라는 사실을 상징하고 있다.9) 

   여호수아서는 세 지역적 배경을 따라 깔끔하게 나눠진다. (1)요단강(1~5장), (2) 가나안 땅(6장~13:7), (3)요단강 양편에 정착한 열두지파(13:8~24:33). 앞부분의 다섯 장의 배경은, 요단강 동편에서 여호수아가 모세를 계승하고 물이 멈춘 요단강을 건너며 그후 요단강 서편 지역에서 있을 전쟁을 준비하는 장면이다. 현명한 여호수아는 ‘분할 정복’의 정책을 사용했다. 그는 먼저 중앙 가나안 지역을 정복했고(6~8장), 그후 남부 가나안을(9~10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부 가나안을 정복한다(11~12장). 정복해야 할 아직 남아 있는 지역들을 열거한 후(13:1~7),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을 모든 지파에게 나눠주는, 시간이 걸리는 업무를 개시한다. 먼저 그는 두 지파와 반 지파를 요단강 동편 지역에 정착시키고(13:8~33) 그리고 아홉 지파와 반 지파를 요단 서편 지역에 정착시킨다(14:1~19:51). 이 일을 완수한 후, 여호수아는 모든 지파 중에 산재된 여섯 도피성과 48개의 레위인들의 성읍을 지정할 수 있게 된다.  

   여호수아서의 주제는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것과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것이다. 역사 가운데서의 여호수아서의 목적은 여호수아의 지도력 아래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한 것에 대해 기록하는 것이다. 여호수아서는 총17권의 역사책 중에서 11권의 역사책 중 하나이다. 다른 6권의 책들은(레위기, 신명기, 룻기, 역대상하, 에스더) 그 성격상 보조적인 책들이다. 11권의 목록 중에서 오로지 여호수아만이 이스라엘이나 그 지도층의 엄청난 실패를 담고 있지 않다. 신학적으로 여호수아서는, 승리와 축복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순종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여호수아서는 이스라엘을 위해 땅을 주시기로 한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강조하며 한편으로는 부도덕한 가나안인들에게 심판을 내리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강조한다.  

   핵심 구절은 1:8(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11:23(이와 같이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대로 그 온 땅을 취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별을 기업으로 주었더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이다. 핵심 장은 24장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몇몇 시기들은 지도력이 전환되는 때였다. 모세로부터 여호수아로, 여호수아에서 사사들에게로, 사사들에게로부터 왕들에게로 등등. 자신이 죽기 전에 지도력이 한 사람에서(여호수아 자신) 많은 사람들(사사들)에게로 전이되는 것을 준비하면서,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약속들을 성취하신 것을 백성들에게 상기시키며 또한 그들에게 언약에 헌신한 사실을 상기하도록 도전한다(24:24~25). 이러한 헌신이야말로 민족이 모든 성공의 근원이었다. 여호수아서에서의 핵심 개념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의 중요성이다(1:8, 8:32~35, 23:6~16, 24:26~27). 

   비록 여호수아서에는 직접적인 메시아 예언은 없지만 여호수아는 분명 그리스도의 모형(예표)이다. 그의 이름(“야웨는 구원이시다”)과 그의 역할에 있어서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히2:10)하실 예수님을 미리 예표하고 있다. 여호수아가 만난 ’여호와의 군대장관‘(5:13~15)은 분명 성육신하시기 전의 그리스도의 현현이다(출3:5, 5:15). 라합의 붉은 줄(2:21)은 피를 통한 안전을 묘사하는데(히9:19~22) 놀랍게도 이 이방 여인은 그리스도의 계보에서도 발견된다(마1:5).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114~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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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이스라엘은 창세기에서 주어진 후 이미 수세기 된, 땅에 대한 약속을 성취할 극적인 순간에 와 있는 것이다. 여호수아의 전반부(1:1~13:7)는 7년 동안 땅을 정복하는 것에 대해 서술하고 있고, 후반부(13:8~24:33)는 영토의 분배와 정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정복 : 임박한 가나안 정복을 위해 여호수아 자신과 백성을 영적, 도덕적, 물리적, 그리고 군사적으로 준비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두 명의 정탐꾼은 이전 세대의 정탐꾼들과는 대조적으로 반가운 소식을 가지고 돌아온다. 그래서 믿음과 순종이 결합되어 요단강을 기적적으로 건너는 놀라운 역사가 있다. 

   여호수아의 중앙 가나안 정벌 : 가나안인들이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대구모의 연합군을 결성하지 못하도록 북부와 남부 가나안을 끊어 전략적으로 쐐기를 박는 역할을 한다. 이‘분할 후 정복’이라는 전략은 효과적인 것이었지만 첫 번째 성읍(여리고)을 함락시키는데 있어서, 군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은 너무나 어리석은 일처럼 보인다.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이지, 그들 자신의 힘이나 영리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치는데 사용하신다. 죄는 즉각 다루어져야 하는데 그 이유는 죄는 심각한 결과와 함께 아이성에서와 같은 패배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남부 정벌과 북부 정벌 : 교묘한 기브온 사람들과 멋모르고 맺은 지혜롭지 못한 맹약은 가나안인들을 멸절시키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정착 : 여호수아는 이제 나이가 들었고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열두 지파에게 지파별로 영토를 분배해주라고 하신다. 많은 지역들이 아직도 정복을 기다리고 있었고 열두 지파는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도 믿음으로 정복을 계속한다. 가나안에서 계속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조건들이 무엇인지 기록하고 있다. 축복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에 순종할 때에만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깨닫고 여호수아는 감동적인 설교를 한다. 설교 후 이스라엘 백성 언약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으로 이 장면은 절정을 이룬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120~126) 

 

『 사  사  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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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사기는 여호수아서와 아주 대조적이다. 여호수아에서는 순종하는 백성이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는 가운데 땅을 정복한다. 그러나 사사기에서는 불순종하며 우상 숭배하는 백성이 그들의 하나님께 대한 반역 때문에 거듭 패배하고 있다. 죄와 구원의 뚜렷한 일곱 주기 가운데, 사사기는 어떻게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율법을 제쳐두고 그 대신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21:15) 행하였는지 보여준다. 하나님의 법을 버림으로써 야기된 되풀이되는 결과는 내적인 부패와 외적인 압제였다. 이 책이 다루는 대략 400년간의 기간동안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하여금 압제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순수하게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군사 지도자들을 일으키신다. 그러나 민족의 영적 상태가 지속적으로 냉각됨에 따라 너무나 빨리 ‘죄의 악순환’은 다시 시작된다. 사사기는 배교와 압제와 그리고 구원의 반복적인 주기를 보여주고 있다. 

   여호수아의 7년간의 정복이란 본질상 대략적인 것이었고 아직도 땅의 많은 부분을 이스라엘이 싸워 빼앗아야만 했었다(수13:1). 개개의 이스라엘 지파들이 빼앗아 차지해야 할, 가나안인들의 중요한 요새 성읍들이 여전히 있었다. 어떤 족속들은 ‘이스라엘을 시험’하기 위해서 남겨져 있었다(3:1,4). 이 시기에는 애굽사람들이 해안가를 따라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스라엘이 거주했던 산악 지역에는 관심이 없었다.        

   사사기가 역사 가운데 가지고 있는 목적은 여호수아의 죽음으로부터 사무엘 시대와 통일 왕국의 초기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것이다. 사사기는 이스라엘에서의 왕정에 대한 변호와 설명을 하고 있다(17:6, 18:1, 19:1, 21:25). 다른 역사서들처럼 사사기는 역사적 사실들을 어떤 주제에 따라 매우 선별적으로 다룬다. 예를 들어 17~21장은 시간적으로 보면 3~16장보다 실제적으로는 앞서지만 그 당시의 적나라한 도덕적 상황을 예시하기 위해 책의 끝부분에 나온다. 사사기는 배교의 광범위함을 예증하기 위해 지리적 개관을 제공하며, 또한 배교가 점점 심해져 가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연대적 개관을 제공한다. 신학적으로 사사기는 우상 숭배와 부도덕과 이스라엘의 강포를, 야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과 은혜로운 구원과 분명하게 대조하고 있다.  

   핵심 구절은 2:20~21, 21:25절이다. 핵심 장은 2장이다. 이것은 경건한 세대에서 불경건한 세대로 전이되는 것과 이후의 반복되는 주기가 어떤 모습인지 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가나안인들을 진멸시키시지 않으신 하나님의 목적 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체 사사기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사사기는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과 순종이 결핍으로 인해 야기된 신정(theocracy)의 실패를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왕이신 하나님께 불충실하였으며 후에는 지상의 왕을 따르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128~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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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수아와 정복 세대가 지나가자,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다(2:7~10, 수24:31). 사사기는 이스라엘이 타락하는 이야기로 시작되어 압제와 구원의 일곱 주기를 계속하며 이스라엘이 타락한 두 실례를 들으며 끝난다.  

   타락: 실패한 주된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순종의 결여였다(2:1~3). 원주민들을 쫓아내지 못함으로 인해(1:2,27,29~30), 가나안 거민들에 의해 만연된 도덕적인 암적 상태를 제거하기는커녕 도리어 거기에 감염된다.  

   구원: 일곱 주기는 죄(sin), 종노릇(servitude), 간구(supplication), 구원(salvation), 평화(silence)의 다섯 단계이다. 이것은 반역(rebellion), 보응(retribution), 회개(repentance), 회복(restoration), 안식(rest)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  

   부패행위: 사사시대의 종교적 배교 행위와 사회적 도덕적 부패 행위를 예시하고 있다. 사사기는 이 시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열쇠와 같은 표현으로 끝을 맺는다. “그때에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21:25)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133~139) 

 

『 룻     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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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룻기는 부도덕과 우상 숭배와 전쟁으로 얼룩졌던 사사 시대를 무대로 펼쳐진 아름다운 ‘사랑의 간막극’이다.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이 헌신과 충성의 이야기는, 과부 시어머니와 베들레헴에서 함께 살기 위해 고향을 버린 모압의 과부 여인인 룻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룻의 헌신을 귀히 보셔서 그녀를 가까운 친족인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하시는데 거기서 그녀는 곡식 낟알을 주으며 결국에는 남편을 얻게 된다. 이 책은 짧은 족보의 나열로 끝을 맺는데 이 족보에서 보아스의 이름은 다윗왕의 증조부로 부각되고, 이 다윗왕을 통해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오신다.  

   룻기는 짧지만 주옥같은 사랑과 헌신과 구속의 이야기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과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함께 하기 위해 자신의 이방 전통을 버린 모압 여인의 이야기다. 민족적인 불신실함(faithlessness)의 시대에 있었던 그녀의 충성됨(faithfulness)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녀에게 새 남편(보아스)과, 아들(오벳)과, 또 다윗과 그리스도의 계보에 오르는 특권적인 위치(룻은 다윗의 증조모이다)를 주심으로써 그녀에게 보상하신다.  

   룻기는 다음과 같은 시간대 구분이 가능하다. (1)1:1~18. 모압지방(대략 10여 년간) (2)1:19~2:23. 베들레헴의 추수터(수개월) (3)3:1~18. 베들레헴의 타작마당(하루) (4)4:1~22. 베들레헴 성읍(대략 1년간)  

   사사기 17~21장은 사사기 전체의 부록에 해당하며 사사시대의 횡횡했던 불의에 대한 두 예를 보여준다. 룻기의 이야기는 이 시대의 삶에 대한 세 번째 실례를 보여주는데 다행스럽게 이번에는 경건한 삶의 경우다. 룻기는 축복(4:13,17)으로 인도하는 진정한 믿음과 순종의 모습(1:16~17, 3:10)을 보여주고 있다. 룻기는 또한 이방인도 참 되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준다(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계보 중에 언급된 네 여인 중 세 사람이 이방인이다-다말, 라합, 룻).  

   룻기의 주제는 구속(redemption)인데 특별히 혈연-구속자-에 대해 말하고 있다. 룻기는 하나님 자신의 백성을 향한 야훼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성품과 주권적인 보살핌을 보여준다(2:12). 핵심 구절은 1:16, 3:11절이다. 핵심 장은 4장이다. 재산권을 무르는 법(redemption, 레위기25:25~34)과 죽은 자의 후손을 잇기 위한 형제의 의무에 관한 법(신25:5~10)을 통해, 보아스는 모압 여인을 다윗의 가문에,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족보에 맞아들인다. 혈연 구속자 혹은 고엘(goel)의 개념(3:9, 근족)은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중요한 것이다. 이 짧은 책에서 13번이나 사용된 고엘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잘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단어다.  

   룻기는 네 가지를 보여주고 있다. (1)문학적-룻기는 단순하지만 심오한 책이다. 룻기는 효성스런 사랑과 경건을 다룬 가장 훌륭한 모범적인 문학작품중의 하나다. (2)역사적-룻기는 사사기와 왕정 시대를 잇는 가교다(이 책의 마지막 단어는 ‘다윗’이란 말이다) (3)교리적-룻기는 이방인들도 구속의 은혜 바깥에 있지 않음을 가르친다. (4)도덕적-룻기는 관계와 결혼에 있어서 신실해야 한다는 수준 높은 이상들을 말하고 있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142~146) 

  

   룻기는 유대 예식 중 오순절에 읽혀졌다. (위클리프 주석 편찬실,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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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룻은 자기 시어머니 나오미와 자기의 근족 보아스에게 충성스런 사랑을 나타내는 ‘현숙한 여자’였다(3:11). 이 두 가지 관계에서 선과 사랑이 분명히 드러났다. 그녀의 사랑은 1~2장에서 드러났고, 3~4장에서는 그 사랑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 

   룻의 사랑이 드러나다: 이야기는 이스라엘에 있었던 기근 - 불순종과 배교의 징조(신28~30장) - 으로 시작된다. 엘리멜렉(나의 하나님께서는 왕이시다)이라는 한 이스라엘 사람이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 베들레헴(빵집)에서 모압지방으로 이주한다. 비록 그가 그 땅에서 새로운 삶을 추구했지만 그와 그의 두 아들 말론(아프다)과 기룐(쇠함)은 거기서 일찍 죽고 만다. 죽은 아들들 뒤에는 두 모압 과부가 남았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완고함)이고 또 하나의 이름은 룻(우정)이었다. 엘리멜렉이 남긴 과부 나오미는 이스라엘에 기근이 끝났다는 소문을 들은 다음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데, 그녀는 더 이상 자기 이름대로 나오미(즐거움)로서가 아니라 마라(쓰디 씀)의 마음상태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룻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그분의 보살핌으로 나오미의 근족인 보아스의 밭으로 가게 하신다. 보아스(하나님 안에는 힘이 있다)는 룻을 사랑하고 그녀를 보호하며 그녀를 위해 공급하기 시작한다. 

   룻의 사랑이 보상을 얻다: 하나님께서는 보아스를 룻에게 남편으로 주심으로 그리고 룻에게 아들이자 다윗왕의 조부가 될 오벳을 주심으로써 룻의 헌신에 보상하신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147~150) 

 

『 사무엘 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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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요 위대한 첫 선지자였던 사무엘은 첫 번째 왕을 기름 부어 세운다.10) 비록 사울의 외모는 인상적이었지만 하나님을 향해 무심했던 그의 마음으로 인해 사울은 왕국의 통치권을 그의 가문에서 빼앗기고 만다. 대신에 사무엘은 차기 왕으로서 젊은 다윗에게 기름 붓는다. 다윗은 제정신 아닌 채 시기심에 사로잡힌 사울에게 점점 위협을 느끼며 결국 자기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광야로 도망간다. 사울과 그 집에 하나님의 심판의 손길이 임하지만, 반면 다윗을 보호하는 하나님의 손길은 분명히 드러난다. 사울은 어리석게도 엔돌에 사는 영매를 찾아가지만 그는 자신의 비참한 운명에 대해 들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사무엘상은 이스라엘의 통치권이 사사에서 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묘사하고 있다. 이 책에는 중요한 세 인물이 등장한다. 마지막 사사요 첫 선지자인 사무엘,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 그리고 차기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아직 사울의 후계자로 인정받지 못한 다윗이다. 사무엘서는 초기 왕정에 대한, 예언적 성격의 역사서다. 사무엘상은 사사기 16장 31절에서 끊긴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시 이어받아 서술하고 있다. 삼손이 블레셋에 대해 영원한 승리를 쟁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무엘은 삼손의 업무를 이어받아 블레셋의 억압이라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사무엘은 통일 왕국의 처음 두 왕을 기름 부어 세웠던 사람이었다(king maker). 사울은 너무나 빨리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는 사람이 되어 독재자로 변해 버린다. 그래서 다윗이 진정한 의미에서 신정을 실천하는 첫 번째 왕이 된다. 즉 그는 자신을 통해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도록 했던 것이다. 사사 시대 때 백성들의 행습은 야훼를 그들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거역한 것이었다. 사무엘상에서 백성이 왕을 요란하게 요구하는 모습은 바로 이런 실제적 거역의 자연스런 결과였다(8:7).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왕을 주시려고 원래 의도하셨지만(창49:10, 신17:14~20) 백성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실 왕을 기다리기보다 자신들이 왕을 선택하기를 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상은 왕들을 세우고 폐하시는 야훼의 주권적인 통치를 가르치고 있다.  

   사울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15:22)는 진리를 끝내 배우지 못함으로써 하나님에 의해 폐함을 당하고 만다. 다윗의 경우는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않으신다.”라는 원리를 잘 예시하고 있다(16:7). 또한 사무엘서는 하나님의 뜻을 위임받아 이스라엘 왕들과 백성들을 권면하는 선지자들의 중요한 역할을 잘 보여 주고 있다.  

   핵심 구절은 13:14, 15:22절이다. 핵심 장은 15장이다. 15장은 사울에서 다윗으로 왕권이 넘어가는 비극적 전환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하여 한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축복을 옮겨 다른 사람에게 주시는데 이것은 사무엘상에 기록된 세 번의 경우 모두에 나타난 바와 같다.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15:23)  

   다윗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주된 인물 중의 하나다.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목자로서 섬겼으며 이스라엘의 왕으로 다스렸다. 그는 미래에 올 메시야 왕을 밀 암시하는 기름부음 받은 왕이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사람(13:14)이었던 다윗을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 되게 하셨다. 신약성경은 특별히 그리스도를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났다(롬1:3)고 말하고 있고, ‘다윗의 뿌리요 자손’(계22:16)이라고 칭하고 있다.  

 

   사무엘상은 메시야라는 말을 사용한 첫 번째 책이다(기름부음 받은 자, 2:10). 사무엘상은 하나님을 ‘만군의 여호와’라고 부른 첫 번째 책이기도 하다(1:3 등). 잘 알려진 이가봇(영광이 없음, 4:21)이나 에벤에셀(도움의 돌, 7:12)이라는 말도 이 책에서 나왔다.11)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15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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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엘상은 사사들을 통한 신정에서 왕정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전환기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사무엘상은 세 사람의 중요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무엘(1~7장), 사울(8~31장), 다윗(16:31)이다. 

   사무엘: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계시)이 흔히 보이지 않았던’(3:1) 시대에 하나님의 선지자로(3:20~21) 세움을 입었다. 사무엘은 마지막 사사 겸 첫 번째 선지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행3:24). 그의 선지자적 사역(7:3~17)은 이스라엘의 부흥과 언약궤의 탈환, 블레셋 족속을 물리치는 전과를 가져온다. 사무엘이 나이 들고 그이 아들들은 불공정한 사사가 될 것임이 분명해지자 백성들은 왕을 요구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군사적 사법적 통치자를 원했다. 즉 ‘열방과 같이’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8:5~20). 

   사울: 왕을 요구하며 안달하던 이스라엘은 결국 하나님의 최선에 미치지 못하는 선택을 한다. 그들의 동기(8:5)와 기준(9:2)이 잘못되었다. 사울은 시작은 잘 했지만(9~11장) 그의 좋은 특성들은 곧 변질되기 시작한다. 사무엘의 엄한 경고에도 불구하고(12장) 사울과 백성들은 악한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사울은 교만하게도 제사장의 일을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서(대하26:18) 희생 제사를 드린다(13장). 사울은 어리석은 서약을 하고(14장) 아말렉을 멸절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다(15장).   

  

   다윗: 사울을 버리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로 하여금 다윗을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 기름 붓게 하신다.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차기 왕인 다윗은 사울의 궁정에서 섬기는데(16:14~23:29) 후에 이스라엘에 위기의 순간이 왔을 때 블레셋의 골리앗을 쓰러뜨린다(17장).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158~163) 

 

『 사무엘 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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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기 왕으로 선택된 다윗은 사울이 죽은 직후 먼저 유다 지파의 왕이 되고(7년 반 동안 수도를 헤브론으로 정하고 통치함) 결국은 후에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33년을 다스림). 사무엘하는 기원전 약 1,000년경, 즉 아브라함으로부터 그리스도에 이르는 기간의 대략 중간 쯤 되는 시기에 살았던 다윗의 40년간에 걸친 통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 다윗이 거둔 승리들은 이스라엘의 나라를 권세의 절정기로 올려놓는다. 그러나 그가 범한 간음과 살인이라는 이중 죄는 주 하나님으로부터의 개인적, 국가적 징계를 초래한다. 평생 다윗은 하나님을 열심히 찾았고 자기 죄들을 즉각 고백한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합한 사람”(행13:22)(삼상13:14)이라고 부르시기에 합당한 사람의 행위다. 

   사무엘하는 다윗의 왕좌로의 등극, 간음과 살인이라는 결정적인 죄들, 그의 가정과 나라에 임한 그 죄들이 가져온 엄청난 결과들을 순서대로 말하고 있다. 다윗의 이야기는 사무엘상 16장에서 시작되어 열왕기상 1장에서 끝난다. 사무엘하는 다윗의 40년간의 통치 시기의 주요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다. 사무엘 상하는 반복적으로 북쪽 열 지파와 남쪽 두 지파 사이의 적대감의 예를 들고 있고 그들을 하나로 계속 뭉치게 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기원전 931년 솔로몬의 죽음 후에 있었던 이스라엘과 유다의 궁극적인 분열은 사무엘 상하를 보면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  

   사무엘하는 다윗 통치 40년간의 장점과 약점을 아주 솔직하게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편애하시거나 차별 대우하시는 분이 아니시며, 다윗 같은 성경의 영웅도 그들의 죄로 인한 결과로부터 면책되지 않았다. 창세기 이후 거의 모든 책들에서 강조되는 원인과 결과(인과응보)의 원리다. 순종(1~7장)은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오고(8~10장), 불순종은(11장)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끈다(12~24장).  

   핵심 구절은 7:12~13, 22:31절이다. 핵심 장은 11장이다. 사무엘 하 11장은 전체 책의 분기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밧세바와 그녀의 남편에게 범한 다윗의 비극적인 죄들을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징계하심으로 인해 다윗 가문과 그의 왕국에 임했던 모든 광범위한 축복들은 신속하게 사라진다. 다윗은 개인적인 삶에서 실패하기도 하지만, 결코 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들해진 적이 없었다. 다른 왕들과는 달리 다윗은 그의 통치 기간 중 절대로 우상 숭배가 문제가 되도록 허용한 적이 없었다. 다윗은 그 이후의 모든 왕들을 가늠해 보는 기준이 되는 왕이었다.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 집을 짓고 싶었지만 대신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집을 지으신다. 영원한 왕국, 왕좌, 그리고 후손이라는 똑같은 세 가지 약속이 후에 그리스도에게 약속되어진다(눅1:32~33). 한 영원한 왕조에 대한 약속은 ‘다윗의 자손’(마21:9, 22:45)이며 다윗의 보좌에 앉으실(사9:7, 눅1:32)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된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166~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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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무엘상은 어떻게 왕국이 건립되었는가를, 사무엘하는 그 왕국이 어떻게 견고해졌는가를 보여준다. 사무엘하는 어떻게 그 나라가 통일 되었고, 어떻게 예루살렘을 수도로 얻었으며, 어떻게 그 대적들을 굴복시키고 영토를 확장했는지, 어떻게 경제적 번영을 이룩했는지 말해주고 있다. 사무엘하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진다. 다윗의 승리(1~10장), 다윗의 범죄(11장), 다윗의 환난(12~24장)이다. 

   다윗의 승리: 1~4장은 다윗이 유다 지파의 영토를 7년간 다스린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 후로 다윗은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요새화하고 이 성읍을 통일화된 왕국의 행정과 종교이 수도로 삼는다.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오고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건축하려고 한다. 이러한 순종의 태도는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다”(8:14).  

   다윗의 범죄: 간음과 살인이라는 범죄는 사무엘하의 분기점이 된다. 이 범죄들 때문에 다윗의 승리와 성공들은 사무엘하의 나머지 부분에 계속되는 개인적, 가정적, 국가적 환난으로 바뀐다. 

   다윗의 환난: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죄를 지적했을 때 자기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에 의해 회복을 받는다. 죄의 결과로서 칼이 집안에 떠나지 않는다.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죽고, 다윗의 아들 암논은 근친상간을 하며,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암논을 살해하고 반역을 하게 된다. 다윗은 왕국을 하나로 만들려고 하지만 이스라엘의 북쪽 열 지파와 유다와 베냐민이라는 남쪽 지파사이에 갈등이 일어난다. 이러한 상황은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들고 요압은 반란군들을 진압한다. 사무엘하의 마지막 몇 장들은 책 전체의 부록과도 같다. 전체 백성들의 상황이 왕의 영적 도덕적 상태와 얼마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 보여준다. 온 나라는 다윗이 주 하나님을 순종할 때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고 다윗이 불순종할 때는 환난을 겪는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170~176) 

 

『 열왕기 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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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왕기 상의 전반부는 솔로몬의 생애를 자세히 개관하고 있다. 그의 영도력 아래 이스라엘은 영토의 크기와 국력에 있어 절정기를 맞이한다. 솔로몬이 예루살렘에 건축한 성전의 끝없는 광휘를 포함해 그의 위대한 업적들은 그에게 전 세계적인 명예와 존경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솔로몬의 열망은 그의 말년에 접어들면서 급속하게 퇴락하고 만다. 그 이유는 그의 이방인 아내들이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으로부터 그의 마음을 돌아서게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로 결국 나누어진 마음을 가진 왕은 왕국을 나누어지게 했다. 다음 한 세기 동안 열왕기는, 하나님의 선지자들과 그 계명들에 점점 더 무관심하며 불순종하는 백성들의 두 왕조와 두 나라의 역사를 연대별로 설명해 나간다. 

   열왕기는 바벨론 포로 전, 잔존 유다 왕국에게 쓰여진 것이다.(편집자 주: 의문됨 보충할 것) 대부분의 내용은 예레미야에 의해, 아니면 예레미야와 동시대의 한 인물에 의해 편집되었다(대략 기원전 646년~ 570년). 이 책은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의 포로로 잡혀가고(기원전 722년) 유다가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는(기원전 586년) 이유가 되는, 불순종과 우상 숭배와 불경건에 대한 기록이다. 열왕기는 솔로몬의 통치 시작(기원전 971년)으로부터 아하시야 왕(기원전 851년)에 이르기까지 120년간을 다루고 있다. 중요한 연대는 931년인데 이때 왕국은 북왕국과 남왕국 유다로 분열되고 말았다. 

 

                          르호보암 아비얌 아사                 여호사밧   

     사울  다윗  솔로몬  /------------------------------------유다(남왕국) 

  /-----/----/-------/   

1043  1011  971   931 /-----------------------------------이스라엘(북왕국) 

                          여로보암 나답 바아사 엘라 시므리 오므리 아합 아하시야


 

   열왕기상의 주제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번영과 안녕은 백성과 그들의 왕이 언약에 대해 충성했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열왕기 상하는 솔로몬 때의 위대한 번영 시대로부터 앗시리아와 바벨론의 포로로 귀결되는 퇴락과 멸망에 이르기까지 왕정의 역사를 추적하고 있다. 신학적으로 보면, 두 왕국에 정치적 경제적 영향들을 끼친 영적 도덕적 원인들에 대해 예언자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왕들의 생애는 몇 가지 근본적인 원리들을 가르치기 위해 사용되었던 것이다. (1)사람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식적으로 의지하지 않고서는 자기 자신을 올바로 다스릴 수 없다. (2)왕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집행자로서 큰 책임을 지니는데 왜냐하면 나라의 상황은 그들의 야훼에 대한 충성도에 크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3)왕들은 백성 전체의 모습에 대한 실례였다. 그들이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무시했던 것만큼 백성들도 그랬던 것이다. (4)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은 축복을 가져오지만 배교는 심판이라는 응분의 대가를 초래한다.   

   핵심구절은 9:4~5, 11:11이다. 핵심 장은 12장이다. 열왕기상에서의 중요한 분기점은 통일 왕국이 분열 왕국으로 나누어지는 12장이다. 솔로몬이 죽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는데 그는 지혜롭지 못하게 행동하여 나라가 내전에 휩싸이게 되고 이 내전으로 결국 나라가 비극적으로 나뉘게 된다. 하나 됨에 대해 기록하는 대신 열왕기상은 두 왕과 두 수도, 그리고 두 종교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사무엘상에서는 왕국이 세워지고 사무엘하에서는 그것이 견고하게 된다. 열왕기상은 왕국을 그 영광의 절정에 올려놓다가 분열과 쇠락을 걷게 된다. 열왕기상은 열왕기하에도 계속되는데 각 왕들을 묘사할 때 일정하게 고정된 패턴을 사용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두 왕조를 연대기적으로 동시대적으로 따라 가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묘사와 유다에 대한 묘사를 번갈아 하고 있다. 각 왕의 즉위 연대는 다른 왕조의 통치자의 통치 연대와 비교되어 계산되면서 언급되고 있다. 각 왕의 통치를 신학적으로 판단하고, 다윗의 생애와 통치는 유다 각 왕들을 비교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열왕기상은 또한 통일 왕국 말기와 분열 왕국 전반에 걸쳐 어떻게 선지자들이 사역이 왕성하게 일어났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178~184) 

   열왕기 상하의 언어는 ‘신명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역사를 판단하는 기준은 신명기에 규정된 법규이기 때문이다. 열왕기서 저자는 이스라엘과 유대의 역사를 이방 땅에서 포로 생활을 하는 자들 앞에 제시하면서, 그들에게 자유를 쟁취하는 유일한 길이 우상숭배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언약을 지키고 하나님의 약속들을 신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있다.  (위클리프 주석 편찬실, p.4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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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왕기상의 전반부는 솔로몬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다면 솔로몬은 인간 역사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다(마12:42). 그러나 그가 죽은 후에는 내분에 의해 두 동강이 나고 만다. 열왕기상은 통일왕국(1~11장)과 분열왕국(12~22장)으로 나뉜다. 

   통일왕국: 솔로몬이 왕위에 오르는 것과, 그의 지혜와, 농업분야의 업적과, 그의 명성과, 부와, 그리고 비극적인 말년의 불신실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신정의 관점에서 보면 솔로몬의 업적은 성전의 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 야훼께서 자신과 함께 했으므로 솔로몬은 그 명성과 부에 있어서 계속 높아진다. 그러나 그의 부는 나중에 그가 금지된 것들을 사들이기 시작함에 따라 환난의 근원이 된다. 자기의 부를 이용해 자신을 우상숭배하게 만든 많은 이방 아내들을 얻는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노년에 어리석은 사람처럼 행동하게 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선언하시며 솔로몬의 아들이 왕국의 일부(유다)만 다스리게 될 것임을 예언하신다. 

   분열왕국: 솔로몬이 죽자마자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으로 왕국이 나누어지게 되었다. 북왕국에서는 배교가 범람하고 남왕국에는 우상숭배가 만연하였다. 열왕기상에 기록된 모든 북왕국과 남왕국의 왕들 가운데 오로지 아사와 여호사밧만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184~191) 

 

『 열왕기 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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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왕기하는 열왕기상에서 시작된 드라마를 계속해나간다. 포로 유배라는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는 두 왕국의 비극적인 역사 글이다. 저자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치 군주들에 대해 연대적으로 체계적인 설명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에는 계속해서 19명이나(편집자 주: 20명의 왕 중에서 디브니 왕 생략됨) 되는 악한 왕들이 있었는데 그 종국은 결국 앗시리아에 의한 포로 유배였다. 상황은 유다에서는 상대적으로 다소 밝은데 여기서는 경건한 왕들이 종종 나타나 전임 왕들의 사악을 개혁하곤 했다. 그러나 종국에는 죄가 의를 압도하고 결국 유다는 바벨론을 포로로 끌려간다.  

   열왕기는 우상 숭배와 부도덕과 하나 되지 못한 것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과 유다에 임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유다는 이스라엘보다 136년간(722~586년) 더 지속했는데 그 이유는 유다의 스무 명의 왕 중에 비교적 선한 여덟 왕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한번도 여로보암이 세운 송아지 숭배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지만, 유다는 몇 번 정도 야훼 예배의 부흥기를 경험했다. 이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다. 엘리야, 엘리사, 아모스, 호세아가 북왕국을 위해서 사역했으며, 오바댜, 요엘, 이사야, 미가, 나훔, 스바냐, 예레미야, 하박국이 남왕국을 위해 사역하였다. 

   열왕기는 모든 것을 망라해서 기록한 것이 아니라, 두 왕국의 쇠락과 붕괴가 통치자들과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자들의 경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는 선지자적 관점을 반영하기 위해 선별적으로 기록된 책이다. 민족의 영적 상태가 정치적 경제적 상황들을 결정했던 것이다. 야훼의 선지자들이 열왕기 상하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신정의 집행자로서의 왕들에게 언약에 대한 그들의 의무를 상기시키기 위해 선지자들을 사용하신다. 왕들이 언약에 충실했을 때 그와 나라는 풍성한 축복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기를 거부한 자에게는 변함없이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다. 

   핵심 구절은 17:22~23, 23:27절이다. 핵심 장은 25장이다. 열왕기하의 마지막 장은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완전한 파괴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던 ‘남은 자들’에게 희망은 여전히 남아 있었는데, 즉 에윌므로닥이 여호야긴을 옥에서 풀어주고 그를 선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북왕국에 있었던 서로 이질적인 아홉 왕조와는 달리 유다의 왕들은 하나의 연속되는 왕조 안에서 통치했다. 아달랴 여왕이 다윗 가문의 씨를 말리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맺은 언약(삼하 7장)에 충실하여 그의 씨를 보존하신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도 다윗의 직속 후손이 되신 것이다.  

   신학적으로 볼 때, 열왕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다른 나라들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절대주권적인 주님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예언하고 주관하시며, 이스라엘이 언약에 충실하지 못했을 때 심판의 도구로서 다른 나라들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왕은 의의 삶과 주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 가운데로 나라를 이끌어야 마땅하지만, 대부분의 왕들은 그들의 도덕적, 영적 반역으로 인해 그들에게 주어진 직무의 목적을 저버렸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194~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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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열은 쇠퇴를 가져왔고 결국은 두 나라 모두 포로로 잡혀가는 결말을 가져온다. 이스라엘은 앗시리아에 의해 포로로 잡혀가고 분산되며 유다는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다. 열왕기하는 1~17장에서는 분열왕국의 역사를 추적하고 있고, 18~25장에서는 나중까지 잔존한 남왕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분열왕국: 아하시야에서부터 호세아에 이르기까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악한 왕들만 계속 나타난 부패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 기간 중의 유다의 상황은 다소 나은 편이었지만 이상적인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지도층에 의해 거부된다. 아람(시리아)이 이스라엘을 압도하고 실제적 지배를 시작하였으나 이러한 하나님의 징벌에 백성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왕들과 백성들이 회개하기를 거부한 것이다.  

   잔존왕국: 이스라엘의 아홉 왕조 중에서 단지 한 왕조를 제외하고는 모든 왕조들이 전임 왕들을 살해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단지 한 왕조밖에 없었던 유다에서는 20명 중에서 여덟 왕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행했다. 유다도 결국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고 만다. 신앙 개혁한 요시야를 계승한 네 왕들은 아주 사악했다. 바벨론에 의한 세 번의 포로 유배라는 모습으로 심판이 찾아온다. 그러나 열왕기는 여전히 하나님께서 남은 자들을 보존하신다는 희망의 어조로 끝을 맺는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199~207) 

 

『 역  대  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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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상하는 사무엘하로부터 열왕기하에서 묘사된 것과 같은 시기의 유대 역사를 다루지만 역대기의 관점은 다르다. 역대기는 같은 자료를 단순히 반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역사에 대한 신성한 논설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무엘서와 열왕기가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정치적 역사를 제공하고 있다면 역대기는 유다의 다윗 왕조에 대한 종교적 역사를 제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전자가 선지자적, 도덕적 관점에서 쓰여졌다면 후자는 제사장적, 영적 관점에서 쓰여졌다고 할 수 있다.  

   역대상은 다윗 왕조의 계보로부터 시작해 다윗의 의로운 통치의 영적 중요성을 더듬어간다. 성전과 제사장 직이 강조되고 있으며 신정이 기초가 되었던 남왕국 유다의 계보가 강조되고 있다. 역대기는 그 문체에 있어서 에스라서와 흡사하며 두 책 모두 계보들, 성전 예배, 제사장의 사역,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 등의 면에 있어서 제사장적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게다가 역대하의 종결 부분(36:22~23)은 약간의 변화만 있을 뿐 에스라서의 시작 부분에 반복되고 있다(1:1~3). 그러므로 역대기와 에스라서는 신약의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처럼 하나의 연속된 역사일지도 모른다. 

   역대기상의 1~9장의 계보는 아담으로부터 다윗까지 이르고 있으며, 10~29장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일 왕국을 다스린 33년간의 다윗의 통치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기원전 538년 바벨론으로부터 유대인들이 첫 번째로 귀환하는 것을 이끌었던(여고냐 왕의 손자) 스룹바벨에 대한 언급과 스룹바벨의 두 손자 블라다와 여사야에 대한 언급(3:21)에서 보여 지는 바와 같이 계보들은 기원전 500년대까지 미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에스라는 아마도 역대기를 기원전 450년과 430년 사이에 완성해서 귀환한 남은 자들에게 그것을 낭독해주었을 것이다. 에스라 때에 정치적 지도자는 느헤미야였으며 도덕적 지도자는 말라기였다.  

   역대기는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에 대해 너무 많은 비중을 할당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나라를 절정의 시점에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역대기는 이스라엘의 ‘두 번째 언약 공동체’를 격려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언약 민족으로 충실히 살아야 함을 상기시키기 위해 기록되었다. 역대기는 다윗의 시대로부터 시작해 기원전 538년 고레스의 칙령 때까지의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영적 조망을 제공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역대기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신의 백성을 위해 가지고 계신 계속되는 목적을 드러내기 위해, 멀리 뒤로는 인류가 시작되는 시점까지 이스라엘의 조상 계통도를 더듬어 올라가고 앞으로는 바벨론 포로 생활이 끝나는 시점까지 내려간다. 역대기가 귀환한 남은 자들에게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사무엘서나 열왕기보다는 더 긍정적인 강조점을 가지고 있다.  

   역대기는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실패했던 일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메시야의 계보와 성전과 영적 개혁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역대기를 읽는 독자들은 그들의 영적 유산을 재건하는데 있어서 격려가 필요했던 것이다. 역대기는 야훼께서 여전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로 하여금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셨고 성전을 재건케 하셨음을 가르치고 있다. 다윗의 왕조는 가버렸지만 다윗의 혈통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역대기는 율법과 제사장직과 성전의 역할을 강조한다.  

   핵심 구절은 17:11~14, 29:11절이다. 핵심 장은 17장이다. 역대상의 전환점이 될 뿐만 아니라 나머지 성경 전체의 전환점이 되는 것이 사무엘하 7장과 역대상 17장에 기록된 다윗 언약이다(대상17:14). 사무엘하 7장의 다윗 언약이 역대상 7장 11~14절에 다시 나온다. 솔로몬이 이 언약의 일부를 성취하지만 다윗 보좌의 영속성에 대한 약속은 메시야의 오심을 가리키고 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영어 성경과 한글 개역 성경은 70인역의 순서를 따라 역대기를 열왕기 다음에 두고 있다. 그러나 히브리 성경에서는 제일 마지막에 위치하는 책이므로 1~9장에 나오는 계보는 신약의 첫 번째 책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계보의 서문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아벨로부터 스가랴에 이르기까지’(마23:35, 눅11:51)란 말은,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창세기에서 말라기까지’라는 말에 해당하는 사실상 ‘창세기에서 역대기에 이르기까지’라는 말과 같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210~216) 

   창세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에서의 유사한 역사와 비교하여 볼 때, 민족적이며 신앙적인 순결을 유지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역대기는 계보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역대기는 올바른 제사장의 직무와 예배를 유지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그것은 모세의 율법, 성전, 언약궤, 레위인과 찬양하는 자들에 역점을 둔다. 역대기는 왕들의 세부적인 활동과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생략한다. 바벨론 포로이후의 고난에 환멸을 느껴온 자들을 격려하려는 목적으로, 역대기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유다의 인권 승리들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한다.   (위클리프 주석 편찬실, p.57)


 

2. 나무 보기  

   사무엘하처럼 역대상의 전체가 다윗의 생애에 다 할애되고 있다. 역대상은 다윗의 왕족 계보(1~9장)로부터 시작해서 다윗의 통치 기간의 주요 사건들을 개관하고 있다(10~29장). 

   다윗의 왕족에 초점을 맞춘 계보: 역대기가 북왕국에는 관심이 없고 남왕국과 다윗 왕조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계보들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혈통을 오랜 기간 동안 보존하셨음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지키셨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역대기의 제사장적 관점은 레위 지파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통해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다윗의 통치: 사무엘하와 비교해보면 역대기는 다윗이 사울과 겪었던 갈등, 헤브론에서의 7년간의 통치, 다윗의 많은 아내들, 그리고 압살롬의 반역 등을 완전히 생략하고 있다. 역대기는 또한 다윗의 여생에 큰 상처를 주었던, 사무엘하에서의 사건 - 밧세바와 저지른 그의 범죄 -을 생략하고 있다. 역대기는 포로 생활에서 막 돌아온 유대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강조하면서 좀더 긍정적인 관점에서 기록되었다. 역대기는 다윗의 성전 건축 준비와 성전에서의 예배 등 사무엘하에 나오지 않는 사건들을 추가시키고 있다. 사울의 통치에 대해서는 단지 한 장(10장)만 할애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옳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중요한 언약(17장)을 세우셨다. 역대상은 다윗의 아름다운 공적인 찬양 기도와 솔로몬의 등극으로 끝을 맺고 있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216~224) 

 

『 역  대  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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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하는 열왕기 상하와 같은 시기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북왕국 이스라엘은 사실상 무시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북왕국의 잘못된 예배 체계 때문이며 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역대기는 경건한 왕 다윗을 본받아 그들의 삶과 신앙의 모본을 보인 왕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역대기는 아사, 여호사밧, 요아스, 히스기야, 요시야 왕 같은 열렬한 개혁자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역대하는 솔로몬의 영광스런 성전으로 시작해, 무려 400년 이상이나 지난 이후에, 성전을 재건하라는 고레스의 칙령이 나오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역대기는 스물한 사람의 왕과 한 사람의 여왕의 통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역대하 1~9장은 기원전 971~931년까지의 40년간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10~36장은 기원전 931년~538년까지의 393년간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 바벨론 포로 생활을 70년간 하게 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대하36:21, 렘29:10)은 두 가지로 성취된다. (1)기원전 605년에서 536년까지 예루살렘이 전복당하고 훼파당한 정치적 의미의 포로상태, (2)기원전 586년에 있었던 성전의 파괴를 포함한 종교적 포로 상태에서 약 70년 후 기원전 516년 혹은 515년에 있었던 새로운 성전의 완성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이다. 

   역대하는 통일왕국(솔로몬) 말기와 남왕국 유다에 대한 역사서이다. 역대기는 단지 역사 연대기 이상의 책이다. 역대기는 참으로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예배하는 것을 원했고, 영적 개혁의 시대를 유지하는데 열망이 있었던 왕들을 묘사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점차 늘어나는 배교로 인해 불가피하게 하나님의 심판이 그 나라에 임하게 되었다. 예루살렘의 성전은 역대상하를 통합하는 중심주제다. 역대상 11~29장에서 중심 메시지는 성전 건축과 성전 봉사를 위해 다윗이 준비한 것이다. 역대하 1~9장은 성전의 건축과 봉헌을 묘사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10~36장은 북왕국 이스라엘 왕들에 대한 이야기를 생략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성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역대기는 성전에 관한 책으로서, 성전의 기안(다윗), 건축과 봉헌(솔로몬), 모독과 정화(유다의 왕들), 전란 중의 파괴(느부갓네살)를 개관하고 있다. 

   핵심 구절은 7:14, 16:9절이다. 핵심 장은 34장이다. 34장은 요시야 왕 시대에 ‘율법책’이 발견되고 읽혀지고 순종 되어졌을 때 일어난 극적인 부흥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역대하의 예수 그리스도를 살펴보면, 다윗의 왕좌는 파괴 되었지만 다윗의 혈통(계보)은 보존 되어 남아 있었다. 메시야의 계보는 아담으로부터 스룹바벨에 이르기까지 끊어지지 않고 보존되었다. 성전 또한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성전에 빗대어 말씀하셨다(요12:9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요한계시록 21장 22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대신한다(어린 양이 성전이심이라).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226~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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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하는 유다의 운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특별히 주 하나님 보시기에 옳게 행한 왕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역대하는 아사(14~15장), 여호사밧(17~20장), 요아스(23:16~24:16), 히스기야(29~32장), 요시야(34~35장)의 영적 개혁에 상당히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이 책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을 저버릴 때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거두어들이시지만 주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삶은 승리를 가져온다는 점을 반복해서 가르치고 있다. 역대기에 나오는 거의 모든 것들이 다 성전과 관계되기 때문에 성전을 재건하라는 고레스의 칙령으로 끝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솔로몬의 통치: 솔로몬의 통치는 평화와 번영과 성전 예배라는 이스라엘의 황금시대를 연다. 아홉 장 중 여섯 장이 성전의 건축과 봉헌에 관련되어 있다는 점은 역대기의 목적과 잘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유다 왕들의 통치: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의 영광은 단명했다. 솔로몬이 죽자마자 왕국은 분열되고, 가끔씩 있었던 개혁에 의해 잠시 지연되기는 했지만, 두 왕국은 다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36장의 내용 중 거의 70%에 해당하는 지면이 여덟 선한 왕들을 묘사하는데 할애되고 단지 30%만이 12명의 악한 통치자들을 설명하는데 할애 했다. 예배와 영적 활력의 중심지인 성전에 대해 각각의 왕들이 어떤 태도를 가졌는가 하는 점을 연관시켜 묘사하고 있다. 20명의 왕을 간단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유다 왕 

통치 내용 

유다 왕 

통치 내용 

(1)르호보암 

비록 의로운 왕은 아니지만 하나님 앞에 겸비했고 하나님의 진노를 모면한다(12:12). 

(11)요담 

성전의 문을 재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했기에 주 하나님께서는 번영과 승리를 주심 

(2)아비야 

짧게 통치했던 악한 왕이었지만, ‘유다 자손이 주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정복한다(13:18). 

(12)아하스 

악하고 우상 숭배 했기에 대적들에게 압제당하고 앗시리아에 성전의 보물들을 조공으로 바친다. 

(3)아사 

이방제단과 우상들을 허물고 승전의 가능성이 희박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구스를 무찌르고 또한 주 야훼의 재단을 회복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위협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한다. 

(13)히스기야 

성전을 보수하고 다시 사용케 했으며 그의 부친 아하스에 의해 세워진 우상과 제단을 제거했다. 그래서 앗시리아에게 멸망당할 위기에서 벗어난다. 열왕기는 몇 구절 묘사하지만 역대기는 세 장이나 할애되고 있다. 

(4)여호사밧 

커다란 부흥을 일으킨다. ‘저가 전심으로 여호와의 도를 행하여’(17:6). 우상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에게 가르치고 전쟁에 나가기 전에는 하나님을 의뢰했다. 

(14~15) 

므낫세 

아몬 

므낫세는 가장 사악한 왕이었다. 국토 전반에 걸쳐 우상과 재단을 세웠다. 그래서 앗시리아에 포로로 잡혀갔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로 다시 돌아오게 하시고 부분적인 개혁을 하지만 너무 늦었다. 아몬은 부친의 악습을 답습하여 둘 다 죽임을 당한다. 

(5)여호람 

악한 왕으로서 아합의 길을 따랐고 그 딸과 결혼했다. 유다를 우상숭배의 길로 끌고 갔다. 고통 중에 죽을 때에 그를 아끼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21:20). 

(16)요시야 

개혁과 영적 부흥의 지도자로서 성전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게 했고, 율법책을 발견하여 순종했으며, 유월절을 다시 지키게 했다.  

(6~7) 

아하시야 

아달랴 

아하시야는 그의 부친만큼이나 악한 왕이었는데 그의 모친 아달랴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죽임을 당했다. 

(17~19)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이들의 잔인한 사악함은 결국 유다의 멸망을 불러온다. 세 왕 각각의 통치 시기마다 성전은 유린당하고 약탈당했다. 

(8)요아스 

성전을 개수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죽었을 때에 요아스는 백성이 성전을 버리고 우상 숭배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했다. 

(9)아마샤 

하나님을 향한 태도가 애매했는데 후에 주 하나님을 버리고 에돔의 신을 좇는다. 이스라엘에 패배를 당하고 후에 살해당한다. 

(20)시드기야 

유다의 마지막 왕 또한 악했다. 예루살렘과 성전은 파괴되었고 포로 유배가 시작된다. 역대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조짐을 언급함으로써 끝냈다. 고레스의 칙령이다(36:23) 

(10)웃시야 

주 하나님과 좋은 관계 속에서 좋은 출발을 하여 여러 차례 군사적 승리를 거둔다. 그러나 자신이 강성해지자 성전에서 제사장의 역할을 대신하여 스스로 분향단에 분향하는 등 교만하고 무례한 행동함으로써 문둥병을 얻고 만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231~240) 

 

『 에  스  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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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라는 역대하를 이어받아 구약 성경의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는데,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백성을 70년간의 포로 유배 생활 후에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어떻게 성취하시는가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두 번째 출애굽’ - 이번에는 바벨론에서이지만 - 은 애굽으로부터의 첫 번째 귀환보다는 덜 인상적이었는데 그 이유는 이번에는 단지 남은 자만이 바벨론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에스라서는 바벨론으로부터의 두 번의 귀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첫 번째는 스룹바벨의 인도 아래 돌아와 성전을 재건한 것이고(1~6장), 두 번째는 에스라의 영도 아래 귀환하여 영적 상태를 진작시킨 것이다(7~10장). 이 두 귀환 사이의 간격은 약 60년 정도 되는데 이때는 바로 에스더가 페르시아에서 왕비로 살았고 통치하던 때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원래는 한 권으로 되어 있었는데, 왜냐하면 역대기, 에스라서, 느헤미야가 다 하나의 연속되는 역사책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성경에서 에스라서는 느헤미야서와 함께 한 책으로서 -마지막 책인 - 역대기 바로 앞에 있다. 에스라는 역대기에서처럼 제사장적인 관점에 강한 강조점이 주어지고 있는데, 에스라는 엘르아살과 비느하스와 사독의 계보를 이어받는 직접적인 아론의 제사장적인 후손이었다(7:1~5). 에스라는 교육받은 서기관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공부하고 실천하고 가르친 사람이었다(7:1~12). 에스라는 기원전 444년 예루살렘에 도착한 느헤미야(느8:1~9,12:36)와 동시대 사람이었다. 전승에 의하면 에스라는 구약의 정경이 확정되었던 위대한 랍비 회의(The Great Synagogue)의 창시자라고 한다. 또 다른 전승에 의하면 에스라가 성경의 책을 수집하여 한 단위로 묶었으며 또한 회당 예배를 창시했다고 한다. 에스라서에 의해 다뤄진 기간 동안에 부처(대략 기원전 560~480년)는 인도에 있었고, 공자(기원전 551~479년)는 중국에 있었으며, 소크라테스(기원전 470~399년)는 그리스에 있었다. 

   성전재건은 기원전 534년 중단되었다가 520년 다시 재건되었으며 515년 완공된다. 성전재건은 고레스 치하에서 시작되어 다리오 1세 때 끝난다. 중간에 두 왕 캄비세스와 스메르디스는 이 책들에서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는 기원전 520년과 그 이후 스룹바벨의 시대에 활동했다. 에스라는 느헤미야처럼 아닥사스다 1세의 통치 기간 중에 사역했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것이 세 번이듯(기원전 606, 597, 586년)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도 기원전 538년(스룹바벨), 457년(에스라), 444년(느헤미야) 등 세 번이었다.   

   에스라서의 기본적인 주제는 스룹바벨과 에스라의 영도력 아래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남은 자들(영적으로 충성된 귀환자들)’에게 있었던 영적 도덕적 사회적 회복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그들이 포로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강력한 제국의 권력을 사용하셔서 주권적으로 그 백성을 보호하시는 모습을 통해 드러났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29장 14절에서 하신 약속을 지키셨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희에게 만나지겠고 너희를 포로 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열방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잡혀 떠나게 하던 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느니라.” 

   핵심 구절은 1:3, 7:10절이다. 핵심 장은 6장이다. 에스라 6장은 유다의 남은 자들로 하여금 유월절을 지키고 또한 ‘자기 땅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구별케 하도록 자극을 준 사건인 성전 완공과 봉헌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에스라서는 다윗의 후손을 끊어지지 않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계속적으로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스룹바벨 자신은 여고냐(여호야김, 대상3:17~19, 마1:12~13)의 손자로서 메시야 계보 상에 있는 사람이었다.    

   에스라서는 바벨론으로부터의 처음 두 귀환 시기의 역사에 대해 말하고 있고 느헤미야서는 세 번째 귀환 시기를 다룬다. 에스라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할 필요에 대해 강하게 강조한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242~248) 

 

   에스라서는 예레미야를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기록한다. 바사의 세 왕(고레스, 다리오, 아닥사스다)의 보호와 도움으로, 그리고 스룹바벨, 여호수아, 학개, 스가랴, 에스라와 같은 위대하고도 독실한 유대인들의 지도력으로 예루살렘에 둘째 성전이 완공 되고, 참된 예배가 재개되었다. (위클리프 주석 편찬실,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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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라서는 역대하가 끝난 시점에서 이야기를 계속하며,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백성을 그들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어떻게 이루시는지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신의 백성과 함께 하신다. 바벨론으로부터 귀환은 스룹바벨과 에스라의 인도 아래 이루어졌다. 그 두 구분은 바로 성전의 회복(1~6장)과 백성의 개혁(7~10장)인데 이 두 사건은 58년의 간격을 두고 일어났으며 바로 그 중간 시간에 에스더서에 나오는 사건들이 발생했다.  

   성전재건: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은 기원전 539년 바벨론을 무너뜨리고 기원전 538년에 포로 유배지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고토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용하는 칙령을 공포한다. 스룹바벨은 2~3백만 명 중에서 단지 충성스러운 남은 자 49,897명과 함께 돌아왔다. 귀환자들은 주로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 레위지파였다. 스룹바벨은 성전재건 자체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제단에서 드리는 제사들과 종교적 절기들을 회복했다. 성전 재건반대로 중단되었으나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는 백성으로 하여금 성전건축을 다시 시작하도록 권면하고(5:1~2) 재건 역사는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의 지도력 아래 다시 시작된다.   

   백성의 개혁: 에스라의 인도 아래 더 작은 규모의 귀환이 기원전 457년에 있게 되는데 이것은 스룹바벨의 인도 아래 있었던 첫 번째 귀환 81년 후에 있었다. 제사장 에스라는 아닥사스다 왕에 의해 유대 백성을 예루살렘 성전에 드릴 헌물과 함께 데리고 가도록 권한을 부여받는다. 하나님께서는 2천명도 안되는 사람들을 보호하셔서 페르시아의 귀환 선물들을 가지고 무사히 예루살렘에 도착하게 하신다. 백성들과 제사장들이 이방 여인들과 통혼한 것을 에스라가 알게 되었을 때 백성의 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위대한 중보기도를 드린다. 백성은 에스라의 고백과 눈물에 신속히 반응을 보여 그들의 이방 아내들을 떠나게 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살기로 언약을 한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248~253) 

 

『 느 헤 미 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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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라와 동시대 인물이며 페르시아 왕궁에서 왕의 술잔 드는 자(심복 중 하나)였던 느헤미야는 바벨론 포로 유배 이후 세 번째이자 마지막 유대인 귀환을 이끈다. 예루살렘과 그 거민의 안녕에 대한 관심 때문에 느헤미야는 대담한 행동을 취한다.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허락을 받은 후 느헤미야는 그의 동포들에게 “일어나서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벽을 건축하자”고 도전한다. 밖으로부터의 반대와 안에서 있었던 악습에도 불구하고 이 과업은 단지 52일 만에 완수되는데, 이 놀라운 업적은 심지어 이스라엘의 대적들조차 “하나님의 능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인정하게 만든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렇게 빠른 시일 내에 성벽을 재건했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내적으로 부흥시키고 안으로부터 개혁시키는 일은 느헤미야의 경건한 삶과 지도력 아래서 수년 이상 걸린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동포들을 돕기 위해 왕궁의 호화스러움과 안락함을 포기했다. 느헤미야는 올바른 우선순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에 큰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었고, 격려할 때와 책망하기에 적절한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며, 또한 기도에 강하고 하나님에게 모든 영광과 명예를 돌려드렸던 헌신된 성도였다. 말라기는 느헤미야와 같은 시대에 살았고 도 활동했는데 말라기와 느헤미야서 두 책을 비교해보면 직면했던 많은 죄악들을 말라기에서 구체적으로 비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 책에서 묘사된, 하나님에 대한 냉담한 무관심은 하나님으로부터의 계시가 없었던 때인 그리스도 탄생 400년 전의 시기에 이스라엘에 지속되었던 문제였다. 

   에스라서가 주로 유다의 종교적 회복을 다루는 반면, 느헤미야서는 유다의 정치적 지리적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처음 일곱 장은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는 일에 대해 묘사하는데 그 이유는 예루살렘이 유다의 영적 정치적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성벽 없이 예루살렘은 성읍으로 간주되기 어려웠다. 통독으로서 느헤미야는 또한 강력한 통치력을 확립한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함께 협력해서 백성을 영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세움으로써 회복사역을 완수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느헤미야서는 자연스럽게 에스라서의 자연스런 후속편 기능을 하는 것이며, 이 두 책이 오랫동안 한 책으로 간주된 것도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또한 느헤미야서는 포로 유배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후 하나님 자신의 백성을 고국 땅에 다시 세우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손길을 보여주기 위해 기록되었다. 느헤미야의 지도력 아래 그들은 스룹바벨의 귀환 이후 94년간이나 이루지 못했던 일을 단 52일 만에 이룬다.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 그들은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던 반대와 장애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핵심 구절은 6:15~16, 8:8절이다. 핵심 장은 9장이다. 구약 성경의 열쇠가 되는 것은 언약인데 이것이 바로 구약의 주제이자 구약을 통합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조건적인 언약에 그 민족이 순종했느냐 또는 불순종했느냐에 따라 나누어질 수 있다. 즉 순종을 통한 축복과 불순종을 통한 파멸로 나누어진다. 느헤미야서는 9장에서 예루살렘 성벽의 완공과 더불어 백성이 언약에 대한 충성을 재확인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에스라서와 함께 느헤미야서는 포로 후 시대에 대한 배경과 그 시대의 세 선지자들의 사역에 대한 배경을 제공해 준다. 1~7장은 지도력에 대한 원리들로 가득 차 있고, 8~10장은 영적 원리들로, 11~13장은 도덕적 원리들로 가득 차 있다. 

   에스라서와 마찬가지로 느헤미야서는 그리스도를 그의 회복사역 측면에서 예표하고 있다. 이 책에서 보면 왕을 제외한 모든 것이 회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성전이 재건되었고 예루살렘이 재건되었으며 언약이 갱신되었고 백성이 개혁되었다. 메시야의 계보는 잘 보존되어 있었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256~262) 

   느헤미야가 술잔을 따라 올리는 자로서 섬겼던 아닥사스다 1세는 에스더를 자기 왕후로 삼았던 아하수에로의 아들이었다....... 우리는 느헤미야서에 대해서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위한 헌신적이며, 분별력 있는 열심에 대한 자극을 본서보다 더 크게 주는 책은 구약에 없다고 말해야 한다. 대가나 결과를 불문하고,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대한 느헤미야의 열정의 실례는, 실로 현대인들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실례이다. (위클리프 주석 편찬실, p.64~65)


 

2. 나무 보기  

   느헤미야서는 우리를 구약 역사 이야기의 끝부분, 즉 약속된 메시야 탄생 400년쯤 되는 시점으로 이끈다. 느헤미야서는 성벽의 재건(1~7장), 백성의 회복(8~13장)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성벽의 재건(The Reconstruction of the Wall): 기원전 586년 느부갓네살에 의해 파괴된 예루살렘의 성벽은 아닥사스다 왕의 허락과 재료확보와 안전보장으로 성벽재건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기원전 444년 느헤미야의 인도아래 있었던 귀환은 에스라의 귀환 13년 이후며 스룹바벨의 귀환 94년 이후였다. 느헤미야는 성벽이 무너진 것을 면밀히 답사하고 “일어나 건축하자”고 도전한다. 반대와 조롱에서 음모로 변했지만 기도와 단호한 행동이라는 두 가지 방법을 통해서 문제를 다룬다. 총독직의 녹을 희생함으로써 모본을 보인다. 대적들조차 이 일이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에 의해서만 가능했다는 것을 인정한다(6:16).  

   백성의 회복(The Restoration of the People): 성벽의 건축이 이루어지자 백성을 영적, 도덕적으로 정결케 하고 강화하는 일이 따른다. 성벽이 완공되자 에스라는 백성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히브리어로부터 아람어로 통역을 하면서 율법을 계속 낭독해준다. 백성은 울음과 참회의 고백과 순종과 기뻐함으로 반응한다. 하나님의 지나간 구속 역사와 그분의 신실하심을 개략적으로 설명해주며(9:6~31) 하나님과의 언약이 다시 갱신된다(9:32~38). 그러나 불행하게도 에스라에 의해 일어난 부흥은 오래가지 못했고 기원전 432년 페르시아로 돌아왔던 느헤미야는(13:6) 기원전 425년 백성을 개혁하기 위해 다시 예루살렘으로 두 번째 여행을 한다. 성전을 정결케 하고 안식일을 지키도록 하며 백성들로 하여금 모든 이방 아내들을 버리도록 요구한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262~267) 

 

『 에  스  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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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더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에스라 6장과 7장 즉 스룹바벨에 의한 첫 번째 귀환과 에스라에 의한 두 번째 귀환 사이의 기간에 해당한다. 에스더서는 성경에서 포로유배 이후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기보다는 페르시아에 남기로 선택한 대다수의 유대인들의 모습을 그린 유일한 묘사다. 비록 ‘하나님’이란 명칭은 나타나지 않지만 하나님 자신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의 손길은 책 전체에 분명히 드러나 있다. 하만의 음모는 유대인들에게 심각한 위험을 가져오는데 이것에 대해 아름다운 에스더와 그의 지혜로운 사촌 모르드개가 용기 있게 대처하여 유대인은 위대한 구원을 경험하게 된다. 그 결과, 부림절(the Feast of Purim)은 하나님 자신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념하는 연례 축제가 되었다.  

   아하수에로는 기원전 486년부터 464년까지 페르시아의 왕이었던 크샤야르쉬의 히브리식 이름이고, 헬라어식은 크세르크세스이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1장 3절의 연회에 대해 언급하기를 이것이 그리스를 정벌하려는 크세르크세스의 계획과 관련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기원전 479년 크세르크세스는 살라미스에서 그리스 군대에 의해 패배를 당하는데 헤로도토스는 크세르크세스가 그의 후궁들에 그 위안을 찾았다고 말한다. 이때가 바로 크세르크세스가 새로운 파트너를 구하는 작업을 시작해 결국 에스더를 페르시아의 왕비로 간택한 때로 간주된다. 이 책의 나머지 사건들은 기원전 473년에 벌어지므로 이 책이 다루는 기간은 10년 정도이다. 크세르크세스는 감정적 변화가 격심한 거친 사람이었고 그 행동들이 종종 기이하고 모순 되는 경우가 많았다. 유대인을 박멸하라는 조서에 인을 찍고 나지 단지 두 달 후에 이번에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대적들을 타도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조서에 인을 찍는 그의 모습에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에스더서는 고국으로 귀환하지 않은 많은 유대인들이 읽도록 하기 위해 쓴 책이다. 경건한 사람들 전부가 다 고향 땅으로 떠난 것은 아니다. 남아 있던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불순종적인 사람들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자의로 이방 땅에 남아있던 하나님 자신의 백성을 위해서도 계속 보살핌을 베푸신다. 

   핵심 구절은 4:14, 8:17절이다. 핵심 장은 8장이다. 8장은 ‘본토인 중에 유대인 되는 자가 많게’한 결과를 가져온 중요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에스더서는 유대 백성, 좀더 구체적으로는 메시야의 계보를 끊어 멸하려는 사단의 또 다른 위협을 드러내고 있다. 핍박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의 백성을 계속 보존하셨으며, 그 아무 것도 메시야의 오심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 

   에스라서가 주로 포로 시대 이후의 유대 백성의 회복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고, 느헤미야서는 그들의 물리적 영적 재건을 다루고 있다면, 에스더서는 그들의 보존이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경의 다른 어떤 책들보다도 드라마적 성격이 강한 특성 때문에 성경에서 배치되는 그 순서와 위치가 왔다 갔다 했었다. 70인역은 시락의 지혜서와 유딧(외경의 책들) 사이에 끼워 넣었다. 히브리 성경은 다섯 개의 두루마리(Megilloth) 중의 하나로서 ‘성문서(Writings)'에 속해 있다. 다른 네 두루마리 책은 아가, 룻기, 예레미야 애가, 전도서이다. 이 책들은 유대인들의 명절에 읽히는데, 에스더서는 지금도 부림절에 읽히고 있다. 

  에스더서를 영감 받은 정경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반대도 있어 왔다. 하나님의 이름이 어떠한 형태로도 나오지 않으면서도 페르시아 왕의 이름은 187회나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율법, 제사와 희생, 기도 혹은 어떤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언급도 없다.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누락된 이유에 대한 몇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1)에스더서는 페르시아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검열을 당하거나 이방신의 이름으로 대치될 가능성이 있었다. (2)고향 땅으로 돌아가 재건에 참여하는 고생보다는 페르시아의 정착된 생활의 안락함을 선호한 남아 있는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불순종이 또 하나의 다른 이유가 되었을 수 있다. (3)낭패스런 외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을 구원한 드러나지 않았지만 섭리적으로 역사했던 하나님의 손길을 예시하기 위해 고의적으로 누락한 것일지도 모른다. (4)야훼(Yahweh, 원어상으로는 YHWH)라는 이름은 히브리 원어상에는 머리말을 딴 약어적 형태로(네 단어의 머리글자를 합치면 YHWH가 되는 식으로) 4번 나타난다(히브리 성경 1:20, 5:4, 13, 7:7).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270~276)


 

2. 나무 보기  

   에스더서는 분명히 드러나는 메시지는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들을 극복하시고 하나님 자신의 은혜로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평범한 사람들을 쓰신다는 것이다.(편집자 주 : 에스더, 2:7. 에스라, 느헤미야, 모르드개는 예외) 1~4장은 들이닥친 위험을 묘사하고 있고, 5~10장은 유대인들의 승리를 그리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닥친 위험 (The Threat to the Jews): 이야기는 아하수에로 왕의 겨울 거처였던 수산궁에서 시작된다. 왕은 백성들을 위해 푸짐한 연회를 베풀고 왕의 영광을 전시하며 왕비 와스디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프로그램의 일부로 삼았다. 와스디가 사람들 앞에 나오기를 거부하자 신하들은 왕에게 그녀를 폐위시키고 다른 여자를 왕비로 삼자고 고하는데 그 이유는 와스디가 처벌받지 않고 넘어가면 신하들이나 평민들의 아내들도 교만해질 수 있다는 논리였다. 후에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의 눈에 들게 되고 왕궁에서 벌어진 ‘미의 경연 대회’에서 영예의 면류관을 쓴다. 

   그녀의 삼촌 모르드개의 조언에 따라 에스더는 자신이 유대인 출신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에스더의 도움을 통해, 모르드개는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왕에게 고할 수 있게 되고 그의 행위는 왕실 일지에 기록된다. 시간이 흘러, 하만이라는 자가 방백들의 두령이 되나 모르드개는 그에게 절하기를 거부한다. 모르드개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고 하만은 분노와 증오가 극에 달한 채 유대인을 말살하기 위한 계획을 일년 동안 짠다. 

   유대인들을 말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날을 택일하기 위해 이 기간 중 하만을 매일 제비(부림)를 뽑는다. 뇌물과 거짓말을 통해 하만은 아하수에로 왕으로 하여금 제국 내의 모든 유대인들을 11개월 후의 지정된 하루 사이에 다 진멸할 수 있는 조서를 공포하도록 한다. 하만은 시기심과 복수심으로 가득 차서 이 음모를 꾸몄으며 악한 계교를 가지고 이 음모를 추진한다. 

   이 조서는 황당하고 혼란스런 상황을 초래했으며, 모르드개는 에스더로 하여금 유대인들을 살리도록 아하수에로 왕에게 호소하라고 요청한다. 그녀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모험을 무릅쓰고 에스더는 왕을 알현하고 왕을 설득하기 위해 자신이 유대민족 출신이라는 사실을 밝히기로 결심한다. 모르드개는 이 목적을 위해 그녀가 이처럼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이 아니겠냐고 그녀를 확신 시킨다. 

   유대인들의 승리 (The Triumph of the Jews) : 금식을 한 후 에스더는 왕 앞에 나타나 지혜롭게 왕을 하만과 함께 잔치로 초대한다. 잔치자리에서 에스더는 그녀의 소청을 밝힐 좋은 기회를 얻기 위해 두 사람이 그 다음날 두 번째 잔치에 다시 참석하도록 요청한다. 하만은 기분이 좋았으나 나중에 모르드개를 보게 되자 화가 또 났다. 

   하만은 자기 아내의 제안대로 모르드개를 매달 큰 교수대를 마련한다(그는 모르드개가 죽임을 당한 11개월 후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날 밤 아하수에로 왕은 잠이 안 와서 궁정일기를 읽게 된다. 모르드개가 자기를 위해 한 일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아하수에로 왕은 모르드개에게 영예를 주기를 원한다. 하만은 왕이 자기를 영예롭게 하려고 하는 줄로 오해하고서는 영예를 주는 구체적인 방법을 왕에게 제안하지만 충격스럽게도 그 상이 모르드개에게 돌아가는 것을 보게 된다. 

   하만은 자기가 혐오하는 사람을 영예롭게 하는 역을 스스로 수행하면서 수치와 동시에 분노를 느낀다. 에스더의 두 번째 잔치 자리에서 아하수에로 왕은 에스더에게 나라의 절반이라도 줄 테니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고 한다. 그러자 에스더는 자기의 동포들을 위한 자기의 소원을 간청하면서 하만의 궤계를 폭로한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만든 교수대에 화가 난 왕은 오히려 하만을 매단다. 23미터나 되는 이 교수대는 모르드개를 매달아 그의 몰락을 온 도읍이 구경하도록 하만 스스로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교수대로 하만 자신은 모든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만다. 죽음을 당한 채로 말이다. 

   왕의 반지로 인친 페르시아의 법(3:12)은 변개할 수 없었지만 에스더의 간청에 왕은 유대인들이 공격받기로 된 그 날에 유대인들이 모여서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다는 새로운 조서를 각 도에 공포한다. 이 조서는 처음 조서에 의해 의도된 결과를 변경시켰으며 커다란 즐거움을 가져온다. 모르드개는 높은 자리로 올라가게 되고 하만의 집을 주관하게 된다. 두 조서가 지정한 운명의 그날이 오자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제국 전역에 걸쳐서 도시마다 그 대적들을 패배시키고 살육했지만 재산을 노략하지는 않았다. 

   그 다음 날은 경축의 날이 되었고 부림절이라고 불리는 유대인의 축일이 되었다. 이 단어는 ‘제비’라는 뜻의 앗시리아어 puru에서 유래되었는데 바로 하만이 유대인 살육을 위한 날을 택일하기 위해 제비를 뽑은 데서 연유된 것이다. 이야기는 모르드개가 왕 다음으로 높은 지위까지 높아지는 것을 언급하면서 끝을 맺는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276~281) 

 

 

   매우 어려워 보이지만 우리는 반드시 해내고야 말 것으로 믿는다. 지금까지 해보니까 되었다. 우리의 능력은 한계가 있으나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면서 긍정의 믿음을 가지고 자신감을 가지도록 하자. “할 수 있다!  해 보자! 하나님께서 하시니,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구약성경의 모든 주제를 분명하게 그릴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빌4:13). 

 

『 시가서 개론 』 

 

 

   최근에 이르기 까지 히브리 성경의 1/3이 완전히 시로 쓰여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구약 성경의 많은 부분이 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최근의 영어 성경과 한글 성경(표준 새 번역이나 공동번역 등)이 시나 시적 표현으로 된 부분들을 산문체 부분과는 구별하여 펴내기 시작하면서 일반인들도 분명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시나 시적 표현을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은 구약 성경의 책들은 레위기, 룻기, 에스라, 학개, 말라기 등 다섯 권에 불과하다. 시가서로 알려진 다섯 권의 책들은 역사서의 과거를 선지서의 미래와 연결해 주는 이음새 역할을 한다. 모세 오경이나 12권의 역사서와는 달리 시가서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말하고 있지 않다. 그 대신 고통, 하나님, 지혜, 삶, 사랑이라는 중요한 주제들을 탐구한다. 모두 현제 시제로 말이다. 

 

   욥기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종류의 환난을 포함하는 혹독한 시련에 휩싸이게 된다, 욥은 그에게 닥친 불행들이 죄 때문에 초래되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하는 그의 친구들과 세 번에 걸친 논쟁을 펼친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위엄과 능력 가운데 자신을 욥에게 드러내셨을 때, 진정한 문제의 초점은 고난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이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욥의 의문들은 전혀 답변되지 않지만 욥은 기꺼이 하나님의 지혜와 의 앞에 엎드린다. 

 

   시편 

   다섯 권으로 이루어진 시편은 저작 연대가 모세 당시로부터 시작해 포로 시대 이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며 인간의 감정과 경험의 모든 영역을 다루고 있다. 매우 다양한 종류의 시들은(애가, 감사, 찬양, 즉위, 순례 등)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위해 성전에서 사용된 찬송가로서의 역할을 하는데 적합했다. 시편에는 곡이 붙여져 있었으며 예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잠언 

   잠언서는 독자로 하여금 실제적인 지혜, 분별력, 절제와 훈련, 그리고 판단력 등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어졌다. 이 경구들은(maxims)은, 사람이 하나님을 깊이 의뢰하는 가운데 살아갈 때에야, 비로소 아름다움과 의가 어리석음과 악을 이길 수 있는 아름다움과 의로 삶의 모든 상황들을 이끌어가는 올바른 삶의 기술이 발전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전도서 

   전도서의 설교자는 그의 위대한 지성과 상당히 많은 자료들을 사용해 해 아래 살아가는 인생의 목적과 만족이라는 문제를 탐구한다. 그는 지혜, 부, 수고, 쾌락, 권세 등 모든 것이 헛되며 바람을 잡으려 하는 것과 마찬가지임을 발견한다. 문제는 삶의 불공평함과 불확실함, 그리고 죽음이라는 명백한 불합리에 의해 더욱 복잡해진다. 삶의 궁극적인 의미와 성취(실현)의 유일한 근원은 하나님 자신뿐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모든 길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삶의 은사들을 누려야 한다.  

   아가서 

   이 아름다운 노래는 솔로몬과 그이 술람미 신부와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묘사하고 있다. 아가서는 결혼 안에 있는 육체적 감정적 사랑의 미덕을 찬양하고 있다. 

 

 

 

   히브리 시 

  

  다섯 권의 히브리 시가서는 세 가지 종류의 시를 보여주고 있다. (1)서정시 - 수금으로 맞춘 음악이 수반된 이 시들은 종종 강한 감정적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대부분의 시편). (2)교훈시 - 금언이라는 형식을 통해 삶에 관한 원리들을 가르친다(잠언, 전도서). (3)극시 - 시적 형태로 된 대화(욥기, 애가). 

   히브리 시는 유운(각운)이나 운율에 기포를 두지 않는다. 히브리 시는 음조의 강조에 의한 리듬을 지니고 있으나 그렇게 두드러진 현상은 아니다. 히브리 시의 진짜 핵심은 대구법(parallelism)인데, 이것은 평행되는 사상들을 주의 깊게 배열함으로써 사상의 ‘운율’을 사용하는 것이다. 적어도 여섯 가지 종류의 대구법이 히브리 시에 사용되고 있다.  

   (1)동의 대구법 - 이 경우 두 번째 행은 처음 줄과 비슷한 단어나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행의 사상을 강화한다(욥38:7, 시3:1, 25:4, 49:1, 잠11:7,25, 12:28). (2)종합 대구법 - 두 번째 행이 첫 번째 행의 사상에 추가되거나 이를 완성한다(시1:1~2, 23:1,5, 95:3, 잔4:23). (3)반의 대구법 - 첫 행의 사상이 두 번째 행의 사상과 대조된다(시1:6, 18:27, 잠10:1, 14:34, 15:1). (4)상징 대구법 - 첫 행이 둘째 행에서 표현되는 주된 강조점을 예시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한다(시42:1, 잠11:22, 25:25, 27:17). (5)절정 대구법 - 둘째 행이 마지막 말만 빼놓고 첫 행을 반복한다(시29:1, 잠31:4). (6)형식 대구법 - 이 경우 행들은 단지 운율적 고려에 의해서만 결합될 뿐이다(시2:6). 대구법은 두 행의 짝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고 세 행의 짝이나 네 행의 짝 그리고 때로는 전체 연에서도 발견된다.  

   히브리 시는 또한 생생한 비유법을 사용하는 특징이 있다.  

   (1)직유(Simile) - 어떤 면에 있어서 서로 비슷한 두 가지 것들을 서로 비교하는 것(시1:3~4, 5:12, 17:8, 131:2) (2)은유(Metaphor) - 한 가지 사물이 다른 것으로 빗대어져서 칭해지는 비교(시23:1, 84:11, 91:4) (3)암시(Implication) - 한 사물의 이름이 다른 것 대신 사용되는 식으로  두 가지 사아에 암시된 비교(시22:16, 렘4:7) (4)과장(Hyperbole) - 한 가지 초점을 강조하기 위해 객관적 사실보다 강한 표현을 사용하는 것(시6:6, 78:27, 107:26) (5)수사학적 질문(Rhetorical question) - 한 가지 사실을 긍정하거나 부정하기 위해 질문을 사용하는 것(시35:10, 56:8, 94:6, 106:2) (6)환유(Metonymy) - 두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관계로 인해 어떤 것 대신 다른 명사가 사용되는 것(시5:9, 18:2, 57:9, 73:9) (7)신인 동형(Anthropomorphism) - 하나님에 대한 어떤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하나님의 인격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인간 몸의 어떤 적절한 부분을 집어내 표현하는 것(시11:4, 18:15, 31:2, 32:8) (8)조우어모피즘(Zoomorphism, 역자 주 : 어원원적으로는 동물의 형태라는 뜻임. 우리말로는 마땅한 용어가 없다) - 하나님에 대한 어떤 진리를 전달하기 위해 하나님의 인격을 묘사하는데 있어서 동물 몸의 어떤 적절한 부분을 집어내 표현하는 것(시17:8, 36:7, 63:7, 91:4) (9)의인화(Personification) - 무생물을 인간의 어떤 특성을 사용하여 묘사하는 것(시35:10, 77:16, 96:11, 104:19) (10)돈호법(Apostrophe) - 무생물을 마치 생물에게 하듯 부르는 것(시115:5) (11)제유(Synecdoche) -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거나 전체로 부분을 나타내는 것(시91:5). 분명 시각적 이미지는 시에 압도적으로 많이 쓰인다. 

   히브리 시에 사용되는 또 다른 기법은 알파벳순으로 올라가며 시를 짓는 것이다(acrostic poem). 한 행의 첫 번째 히브리 문자가 알파벳의 첫 번째 글자이고 두 번째 행의 첫 글자가 알파벳의 두 번째 글자이고........ 계속 이런 식이다(시119편, 예레미야 애가).  

 

   또한 시가서에는 욥기, 잠언, 전도서 등 지혜서 세 편이 있다. 이 책은 형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내용에 따라 지혜서로 분류되었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289~293) 

 

『 욥     기 』 

 

 

1. 숲 보기  

   욥기는 하나님과 사단간의 천상에서의 대화로부터 시작하는데, 곧 장면은 지상으로 옮겨져 욥이라는 고대 족장의 삶을 자세히 살펴본다. 돌연 눈 깜짝할 사이에 욥에게 축복이었던 모든 것은 비탄으로 변하고 만다. 즉 건강과 부와 가족과 지위, 그 모든 것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돌변한 운명을 끌어안은 채 혼란에 빠진 욥은 “왜?”라고 부르짖는다. 네 명의 친구가 상담을 해주지만 욥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통찰력은 제공해주지 못한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모든 일의 이면에서 항상 일하시는 주님에 대한 온전한 의뢰의 필요성에 대한 귀중한 교훈들을 욥에게 가르치셔야만 했다.  

   족장들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욥기는 아마도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책일 것이다. 에스겔 14장 14절, 20절과 야고보서 5장 11절은 욥이 실제로 역사상 존재했던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욥기는 하나님과 사단간의 천상에서의 논쟁으로 시작하여 욥과 그의 세 친구 간에 있었던 세 시리즈의 지상논쟁으로 이야기를 옮겨가며, 욥의 문제에 대한 극적인 ‘하나님의 진단’으로 끝난다. 종국에 욥은 그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이 시련 전에 가졌던 것보다 더 많은 축복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다. 

   이 책에서의 근본적인 질문은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전능하시다면 왜 의로운 사람이 고통을 받는가 하는 것이다. 고난 자체는 중심 주제가 아니다. 초점은 그의 고난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즉 모든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주권 말이다. 3~37장에서의 토론은 하나님께서 무죄한 사람에게 이런 고난이 생기도록 허용하실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욥의 세 친구들이 제시한 지나치게 단순한 해답들은 부족한 답들일 따름이다, 하나님께서 의인을 깨끗케 하기 위해 고난을 사용하실 수 있다는 엘리후의 주장은 목표치에 좀더 가까이 접근한 것이다. 회오리바람 속에서 주어진 결론은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시며 그분이 어떤 일을 하기를 선택하시든 간에 그분은 경배 받으실 분이라는 것이다.  

   욥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넓힘으로써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을 신뢰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었다. 심지어 이 ‘흠 없는’ 사람(1:1)도 그가 교만해지고 자기 의에 빠졌을 때 회개할 필요가 있었다. 욥은 자기가 의지할 모든 것이 고갈되자 자신을 낮추고 주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위엄을 인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욥기는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빌2:10)의 주님이심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께서 행하는 모든 길들은 때로는 사람이 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그분은 언제나 신뢰할 수 있는 분이시다. 1~2장과 38~42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관점이 없다면 3~37장은 ‘하나님의 미스터리’와도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2장에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욥은 모든 것이 반대로 돌아가는 것 같은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할 책임이 있었다. 고난은 항상 죄 때문에 초래되는 것은 아니며, 하나님께서는 종종 그분의 절대 주권 속에서 우리를 시험(test)하시거나 가르치기 위해 고난을 사용하신다. 

   핵심 구절은 13:15, 37:23~24절이다. 핵심 장은 42장이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은 욥이 자기 자신, 자기의 아내, 자기의 친구들,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과 가졌던 길고 어려운 갈등의 절정을 기록하고 있다. 주 하나님의 완전한 위엄과 절대 주권을 온전히 인식하자, 욥은 회개하고 더 이상 자기의 곤경이 초래한 “왜?”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욥은 구속자를 인정했고(19:25~27) 중보자를 갈구하며 부르짖는다(9:33, 25:4, 33:23). 이 책은 우리와 똑같이 고통을 겪으셨던 그리스도(히4:15)안에서 온전히 대답할 수 있는 문제와 질문을 제기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의 생명이시며, 구속자이시며, 중보자이시며 그리고 변호자이시다.  

   욥기는 그 아름다움과 깊이와 치열함에 있어서 견줄 수 없는 극적인 시로 구성된 책이다. 욥기는 동의 대구법, 반복 대구법, 종합 대구법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 배경에 있어서 욥기는 족장 시대의 비히브리 문화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욥기가 가진 보편적 풍미는 욥기가 전개하고 있는 보편적인 주제에 적절한 것이다. 욥기는 신명기 8장에 나오는 바와 같이 고난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5가지 길을 보여주고 있다. (1)우리를 겸손케 하시기 위해(22:29, 신8:2) (2)우리를 시험(test)하시기 위해(2:3, 신8:2) (3)우리의 우선순위를 바로잡으시기 위해(42:5~6, 신8:3) (4)우리를 징계하시기 위해(5:17, 신8:5) (5)미래의 축복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기 위해(42:10, 신8:7). 38~42장은 성경에서 피조물에 대한 묘사 가운데 가장 철저한 관찰을 담고 있다. 특히 욥기는 땅이 공간에 달려 있다고(26:7) 가르치고 있고 지구가 구(sphere)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22:14).(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296~301) 

2. 나무 보기  

   욥은 그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을 갑작스런 일련의 재난으로 잃어버리고는 “왜?”라는 질문과 끊임없이 씨름한다. 하나님께 대한 욥의 신뢰(1~2장)는 불평과 자기 의로 바뀌지만(3~31장, 32:1, 40:8) 회개를 통해(42:1~6) 그는 회복된다(42:7~17). 욥기는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1)욥의 곤경, (2)욥의 논쟁, (3)욥의 구원이다.  

   욥의 시험: 사단(참소자)은 순수한 동기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물질적인 축복이 주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욥을 참소한다(1:10). 사단의 고소를 반박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두 번에 걸쳐 욥을 치도록 허용하신다. 슬픔 가운데 자기가 태어난 날을 한탄하지만 하나님을 부정하지는 않는다(1:21, 2:10). 

   욥의 논쟁: 비록 욥의 ‘위로자’들이 잘못된 결론에 도달했지만 그들은 욥의 친구들이었다. 세 번에 걸친 토론이 벌어지는데 욥의 친구들은 그가 지은 죄 때문이라고 한다. 욥은 처음에는 친구들이 자기를 판단하는 것을 비난하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심판자요 피난처 되신 주 하나님께 호소한다. 욥은 세 가지 불평을 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는 말을 듣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벌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으로 하여금 번성하도록 허용하신다.” 욥은 자기 의라는 잘못에 빠진다. 엘리후는 욥이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것과 시련을 통해 삶을 정화시키시는 과정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욥의 구원: 하나님께서는 몸소 회오리바람 가운데 말씀하심으로써 논쟁을 매듭지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시고 보존하시는 분이시며,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통재하시는 능력과 지혜와 절대 주권을 드러내신다. 하나님께서는 욥의 개인적인 고통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으셨고 그동안 벌어졌던 논쟁의 실제적인 논점은 거의 다루시지 않으셨다. 사단의 도전은 욥의 삶을 더 강하게 세우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기회가 되었다(약5:11, 약1:12).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302~310) 

 

『 시     편 』 

 

 

1. 숲 보기  

   시편(“뜯는 현악기 반주와 함께 불리는 노래”라는 헬라어 단어로부터 유래)은 모세의 때(시90편)로부터 포로귀환의 시기까지(시126편) 대략 천 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기록되고 편집되어졌다. 다윗, 히스기야, 에스라가 시편을 수집하고 다섯 권으로 편집하였다. 이 책은 왕정 시대에 성전 찬송가로 사용되었으며, 구약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자주 인용되며 가장 다양한 내용과 형식을 지닌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시편은 성경에서 가장 부피가 큰 책이면서도 아마도 가장 널리 사용되는 책일 것이다. 시편은 매우 개인적이며 실제적으로 인간 경험의 광범위한 영역을 다루고 있다. 시편의 150개의 ‘노래들’은 창조로부터 시작해 족장 시대, 신정 시대, 왕정 시대, 포로 시대 그리고 포로 이후 시대라는 광범위한 시대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시편에서 놀라울 정도로 폭넓게 다루어지는 주제는 환희와 축제, 전쟁, 평화, 예배, 심판, 메시야의 예언, 찬미, 애가와 같은 다양한 것들이다. 시편은 현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도록 만들어졌으며 유대 백성을 위한 성전 찬송가와 경건 생활의 지침서 역할을 했다. 

   시편은 점진적으로 수집되었으며, 아마도 굉장히 다양한 자료의 성격으로 인해 원래는 제목이 없었다. 거의 모든 시편이 하나님께 대한 찬양에 대한 어느 정도의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은 곧 Sepher Tehillim(찬양의 책)이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70인역은 헬라어 Psalmoi를 붙이고 있는데 그 의미는 “악기의 반주에 따라 불려지는 시들”이라는 뜻이다. 라틴어 제목은 Liber Psalmorum(Book of Psalams)이다.  

   시편을 해석할 때 기억해야 할 네 가지가 있다. (1)표제가 역사적 사건에 대한 정보를 줄 때 그 역사적 사건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2)어떤 시편들은 이스라엘의 예배 의식의 특정한 측면들과 관련 있는데 이 사실은 그러한 시편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3)많은 시편들은 특정한 구조와 주제를 가지고 있다. (4)많은 시편들은 이스라엘의 메시야를 예기하고 있고 또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있다. 그러나 문법적-역사적 방법을 잊어버리고 그것들을 영해(allegorize)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시편의 공통된 주제는 예배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과 무슨 일을 해 오셨는가, 그리고 무슨 일을 하실 것인가를 인해 모든 찬양을 받으실 가치가 있으신 분이시라는 것이다. 그분의 선하심은 언제나 변함없으며 또 영원하다. 시편은 하나님 자신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인격과 역사에 대해 매우 개인적인 반응을 보여준다. 많은 시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속성을 개관하고 있는데 특별히 어려운 시기에 지어진 것들이 더 그렇다. 이러한 믿음은 상황이 어떻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신뢰를 산출한다. 핵심 구절은 19:14, 145:21절이다. 핵심 장은 100편이다. 예배와 찬양이라는 두 가지 중심 주제가 시편 100편에 아름답게 수놓아지고 있다.  

   많은 시편들이 수세기 후 이스라엘의 메시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을 구체적으로 예견하고 있다. 사복음서와 마찬가지로 시편은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에 대한 여러 가지 관점을 제공한다. 메시야 시편에는 다섯 가지 종류가 있다. (1)모형적 메시야 시편 - 시의 주제가 어떤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예표)이다(시34:20, 69:4,9). (2)모형적 예언적 메시야 시편 - 시편 기자가 오직 그리스도에게서만 역사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그런 자신의 경험을 묘사하는 표현을 사용한다(시22편). (3)간접적 메시야 시편 - 한 왕이나 다윗 왕가를 일반적으로 지칭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궁극적 성취를 기다리고 있다(시2편, 45편, 72편). (4)순수한 예언 - 다윗의 후손 즉 다른 인간 왕을 지칭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묘사한다(시110편). (5)즉위의 시편 - 야훼의 오심과 그의 왕국의 완성을 예기하고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될 것이다(시96~99편).


 

   다음은 시편에 나오는 몇 가지 구체적인 메시야 예언들의 목록이다. 

시편 

예언 

성취 

2:7 

하나님께서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언하실 것 

마3:17 

8:6 

모든 것들이 그(메시야)의 발 아래 복종될 것임 

히2:8 

16:10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것임 

막16:6~7 

22:1 

하나님께서 그(메시야)가 간절히 도움을 필요로 할 때 그를 버리실 것임 

마27:46 

22:7~8 

그가 멸시받고 조롱받으실 것임 

눅23:35 

22:16 

그의 손과 발이 찔리실 것임 

요20:25,27 

22:18 

다른 사람들이 그의 옷을 제비 뽑을 것임 

마27:35~36 

34:20 

그의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으실 것임 

요19:32~33,36 

35:11 

그가 거짓 증인들에 의해 참소 당하실 것임 

막14:57 

35:19 

그가 까닭 없이 미움을 받으실 것임 

요15:25 

40:7~8 

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오실 것임 

히10:7 

41:9 

그가 친구에 의해 배반당하실 것임 

눅22:47 

45:6 

그의 보좌가 영원하실 것임 

히1:8 

68:18 

그가 하나님의 오른편으로 높임을 받으실 것임 

막16:19 

69:9 

하나님의 집을 향한 열심이 그를 삼킬 것임 

요2:17 

69:21 

그에게 (식)초와 쓸개가 주어질 것임 

마27:34 

109:4 

그가 그의 대적들을 위해 기도하실 것임 

눅23:34 

109:8 

그를 배반한 자의 직무가 다른 사람에게 주어질 것임 

행1:20 

110:1 

그의 대적들이 그에게 복종하게 될 것임 

마22:44 

110:4 

그가 멜기세덱과 같은 제사장이 되실 것임 

히5:6 

118:22 

그가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실 것임 

마21:42 

118:26 

그가 주의 이름으로 오실 것임 

마21:9 


    

   시편은 구약의 다른 어떤 책보다 신약에서 많이 인용된다. 우리 주님께서도 지상생활 중 시편을 자주 인용하셨다(산상수훈, 대중 가르침, 유대 지도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 성전정화, 최후의 만찬, 십자가상 등). 시편을 노래하는 것은 초대 교회의 예배 중에서 규칙적인 순서 중의 하나였다(고전14:26, 엡5:19, 골3:16). 시편 외에도 구약에는 적어도 열한 편의 다른 시편들이 있다. (1)바다의 노래(출15:1~18) (2)모세의 노래(신32:1~43) (3)드보라의 노래(삿5장) (4)한나의 노래(삼상2:1~10) (5)다윗의 시(삼하22:2~51, 시18편) (6)욥의 비탄의 시(욥3,7,10장) (7)이사야의 송영(사12:4~6) (8)히스기야의 노래(사38:9~20) (9)예레미야의 애도의 시(애3:19~38, 5장) (10)요나의 기도(욘2:1~9) (11)하박국의 노래(합3:2~19)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312~320) 

   시편의 성격 - 고대의 모든 책들 중에서 시편처럼 강력하게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끼친 책은 없다. 성경의 다른 어떤 책에서도 시편에서와 같이 다양한 신앙의 경험을 찾아 볼 수가 없다. 시편의 표제(p.75~76) - 시를 (1)악기로 연주될 찬송(미즈몰) (2)노래(쉬르) (3)성가(마스길) (4)애가(믹담) 등으로 규정짓기도 한다. 150편중에서 34편을 제외한 모든 시가 어떤 형태로든 표제를 갖는다. 표제가 없는 34편의 시들은 유대인의 ‘고아들’이라 널리 불린다. 이 표제들은 원문의 일부는 아닐지라도 그것들은 상당히 오래된 전승에 근거하여 붙여졌다. 맛소라 사본과 70인 역을 비교해 보면, 표제는 70인 역 이전에 붙여졌음이 드러난다. 

   시편의 주제(p.76) - 시편은 주제별로 배열되어 있지 않다. 시편은 크게 5중 구분된다. 시편이 편집자들은 하나님의 5중 요청에 대해 백성의 5중 응답을 조화시켰을 것이다. 시편이 갖는 질서에 대한 다른 증거는, 각 권 말미에 송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시편 2, 42, 73, 90, 107편 등은 각권의 서론 격이다. 이런 세심한 구성은 전체 시편의 최종 편집이 유대인의 예배 구조에 맞도록 되어졌음을 암시해 준다. 모세 오경의 첫 네 권과, 시편의 첫 네 권 사이에는 현저한 상관관계가 있다. 팔레스타인의 유대교 경배자들은 매 3년마다 오경을 다 읽었다. 따라서 시편의 사용도 이에 맞도록 계획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위클리프 주석 편찬실, p.74~76) 

   권별 분류 - 1권(1~41편):인간의 복된 상태와 타락, 그리고 회복을 보여준 창세기 내용과 같다. 2권(42~72편):이스라엘이 실패, 구원자가 나타나 구속하는 출애굽의 내용과 같다. 3권(73~89편): 제사적 내용을 담은 레위기와 내용이 같다. 4권(90~106편):그 땅을 기업으로 받는 민수기의 내용과 같다. 5권(107~150편):하나님의 말씀을 주제로 하는 신명기와 내용이 같다. 

   명칭별 분류 - (1)미제모르(57편): 피리를 분다는 동사에서 온 명사로서 악기와 관련된 노래이 시를 가리킨다. (2)쉬르(120~134편): 성소를 향해 순례하는 자들이 즐겨 부르는 것으로 순례자의 ‘노래’라고도 한다. (3)마스길(142~144편): 시라는 뜻인데 주로 교훈적 시를 가리킨다. (4)믹담: 황금의 시. (5)테필라: ‘기도’체로 된 시. (6)테힐라: 찬양이란 뜻으로 하나님께 찬양 때 사용된 시이다. (7)식가욘: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회중을 모을 때, 또는 애통할 때 부른다.       

                               (이종윤, p.91~93)  

 

2. 나무 보기  

   시편은 다섯 권이 모여 한 권이 된 것이며 각 책은 송영(doxology)으로 끝나고 있다(41:13, 72:18~19, 89:52, 106:48, 150:1~6). 마지막 시는 제5권을 마무리하는 송영이면서 동시에 시편 전체를 마무리하는 송영이다. 시편이 기록된 후 그 중 116편의 시들에 편집자의 표제나 지침이 추가 되었다. 이러한 표제들은 역사적으로 볼 때 정확한데 심지어 히브리 원어 성경에서는 이러한 표제들이 각 시의 첫 구절로 절 번호가 붙어 있다. 이러한 표제를 보면, 57편의 시들이 ‘시(mizmor)’ 즉 현악기로 반주되는 노래로 분류되고 있다. 다른 29편의 시들은 ‘노래(shir)’로 분류되고, 13편의 시들은 ‘명상의 시(maskil)’로 분류된다. 6편의 시들은 믹담(miktam)으로 분류되는데 아마도 이것은 ‘경구 또는 짧은 풍자시’를 의미하거나 또는 ‘비문이나 헌사의 시’를 의미할 것이다. 다섯 편의 시들은 ‘기도(tepillah)’로 분류되고(합3장) 단지 한 편의 시만이 찬양(tehillah)의 시로 불리고 있다(145편).  

   이러한 전문 용어 외에 시편은 주제별로 분류될 수 있다. 창조의 시들(8,19편), 출애굽(구속)의 시들(78편), 참회의 시(6편), 순례의 시들(120~134편), 메시야의 시편들이다. 첫 구절이나 첫 행이 히브리 알파벳의 첫 글자로 시작하며 그 다음은 알파벳의 두 번째 글자로 시작하는 식으로 작시된 알파벳시도 9편이 있다(9,10,25,34,37,111,112,119,145편).  

   역대상 16장 4절은 또 다른 분류방법을 보여준다. 이스라엘 하나님을 칭송하며 감사하며 찬양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탄원, 감사, 찬양의 세 기본유형들로 인도한다. 다음의 분류는 시편을 열 가지의 유형으로 더 자세히 나눈다. 

   (1)개인의 탄원 시: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토로하는 것으로, 이 시들은 어떤 개인을 구하거나 변호해달라고 하나님께 탄원한다. 이 시들은 서문(보통 하나님께 대한 부르짖음), 탄원(탄식),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고백, 청원(간구), 확신의 선언 또는 찬양의 맹세라는 요소를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시들은 이 유형에 속한다.(3~7,12,13,22,25~28,35,38~40,42,43,51,54~57, 

59,61,63,64,69~71,86,88,102,109,120,130,140~143편) 

   (2)공동체의 탄원 시: 유일한 차이는 개인이 아니라 민족(국가)이 탄원을 한다는 점이다(44,60,74,79~80,83,85,90,123편). 

   (3)개인의 감사의 시: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어떤 것으로 인해 감사하거나 또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행하실 것에 대한 신뢰를 표현한다. 이 시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선언, 개관적인 설명, 구원(받은 사실)의 보고, 찬양의 맹세를 갱신함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18,30,32,34,40,41,66,106,116,138편).  

   (4)공동체의 감사 시: 개인이 아니라 민족(국가)에 의해 감사가 공포되었다(124,129편). 

   (5)일반적 찬양 시: ‘찬양하라’라는 말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감사의 시들보다 좀더 일반적이다(8,19,29,103,104,139,148,150편). ‘할렐루야(하나님을 찬양하라)’ 라는 기쁨에 찬 선포는 이러한 몇 몇 시들에서 발견된다. 

   (6)묘사적 찬양 시: 하나님의 속성과 행위를 인해 찬양한다.(33,36,105,111,113,117,135, 

136,146,147편). 

   (7)등극 시(즉위의 시):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야훼의 절대 주권적 통치를 묘사한다(47,93,96~99편). 

   (8)순례의 노래(시온의 노래들):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이라는 세 차례의 연례 종교 축제에 참여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순례자들이 불렀다(43,46,48,76,84,87,120~134편).  

   (9)제왕 시: 지상 왕이나 하늘에 계신 왕의 통치가 묘사되어 진다(2,18,20,21,45,72,89,101, 

110,132,144편). 

   (10)지혜 시와 교훈 시: 의의 길로 행하도록 권면 받고 가르침 받는다(1,37,119편). 

  

  이른바 저주의 시편은 약간의 문제를 일으킨다. 자기의 대적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간청한다(7,35,40,55,58,59,69,79,109,137,139,144편). 비록 이들 중 일부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격하고 심하지만, 몇 가지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1)그 시들은 인간적인 보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다. (2)그 시들은 하나님께 악인을 징벌하셔서 하나님의 의를 입증하실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3)그 시들은 죄악을 정죄한다(히브리 사고  방식으로 볼 때 죄인과 그가 지은 죄 사이에 뚜렷한 구분이 없다). (4)심지어 예수님도 몇 몇 성읍에 저주가 내리도록 간청하는 그런 표현을 하신 적이 있었고 그의 제자들에게 복음을 영접하지 않는 성읍들을 저주하라고 말씀하셨다(마10:14~15). 

   몇 가지 특별한 음악 용어가 시편의 표제에 사용되고 있다. ‘영장에게(음악 사역자에게)’라는 말은 55편의 시들의 표제에 나타나는데 이것은 성전에서의 음악 인도자에 의해 아마도 특별한 경우에 사용된 시편 모음집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셀라’라는 말은 시편에서 71회 사용되고 하박국 3장에서 세 번 사용된다. 이 용어는 노래를 잠시 쉬거나, 음악 반주가 잠시 쉬거나, 또는 노래를 점점 강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320~330) 

 

『 잠     언 』 

 

 

1. 숲 보기  

   잠언은 아마도 구약 성경에서 가장 실제적인 책인데 그 이유는 잠언이 매일의 생활에서 부딪치는 사람의 여러 측면들을 위한 지혜(문자적으로는 “능숙하고 기술적인 삶”)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짧고 간결한 문장들과 금언들과 이야기들 가운데 솔로몬과 다른 기고자들은 대략 900여 개의 잠언을 말하고 있다. 지혜와 어리석음, 교만과 겸손, 공의와 보복, 게으름과 일, 가난과 부, 친구와 이웃, 사랑과 정욕, 분노와 다툼, 주인과 종, 삶과 죽음을 다루는 영감 받은 말씀 등이다. 이 금언들은 이론적이지 않고 실제적인데, 이것들은 쉽게 암기할 수 있으며, 인간관계의 모든 면을 다루는 시간을 초월한 진리들이다. 잠언 하나를 읽는 데에는 겨우 수초 밖에 걸리지 않지만 그것을 적용하는 데에는 일생이 걸릴 수도 있다.   

   잠언의 열쇠가 되는 말은 지혜(기술적으로 솜씨 있게 사는 능력)다. 그러나 불경건한 세상에서 경건한 삶을 산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잠언은 하나님의 백성이 매일의 삶에서 겪는 실제적인 문재들을 성공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하나님의 자세한 교훈(지침)을 제공한다. 하나님, 부모, 자녀, 이웃, 그리고 정부와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문제들에서 말이다.  

   주된 저자인 솔로몬은 삶의 문제들을 다루는데 필요한 상식과 경건한 삶의 시각을 인상적이고 기억하기 쉽게 하기 위해 시, 비유, 간결한 질문, 짧은 이야기, 그리고 지혜로운 격언 등을 잘 배합하여 사용하고 있다. 솔로몬은 지혜를 구했으며(왕상 3:5~9)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지혜를 주셨는데(왕상 4:29~31) 그 지혜는 너무나 놀라워서 먼 이방 나라 사람들이 그의 지혜의 말을 듣기 위해 찾아올 정도였다(왕상4:34, 10:1~13,24). 25~29장의 솔로몬의 두 번째 글 모음집은 히스기야 왕의 서기관들에 의해 수집, 기록되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기 신하들에게 영적인 유익을 끼치려는 히스기야의 관심 때문이었다. 선지자 이사야와 미가는 히스기야 시대에 활동했는데 그들 또한 이 수집활동에 관여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아굴(30장)과 르무엘(31장)에 대해 성경은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는다. 

   잠언서는 역사책이 아니라 주제별 금언집이다. 잠언서는 이스라엘의 지혜학파의 산물이다. 예레미야 18장18절과 에스겔 7장26절에 따르면 세 부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백성에게 말씀을 전했다. 제사장들은 율법을 가르쳤고,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환상을 전달했으며, 현인들 또는 장로들은 백성들에게 지혜를 가르쳤다. 현인들은(sages)은 사람들이 특별한 문제들이나 결정 사항에 직면해서 경건한 지혜를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전도서의 전도자(설교자라고 할 수 있음)는 지혜학파의 대표적인 좋은 예이다(전1:1,12, 7:27, 12:8~10). 코헬렛(Qoheleth) 또는 ‘설교자’란 ‘회중에게 말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는 현인들의 무리를 이끌었고 “백성들에게 지식을 가르쳤다”(전12:9). 잠언과 전도서에 나오는 ‘내 아들’이란 말은 분명 생도를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선지자 생도들을 이끌었던 사무엘의 역할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지혜 문헌은 고대 근동의 다른 나라들에서도 발견된다. 이집트에서는 기원 2700년의 이른 시기에 기록된 지혜 문서가 발견된다. 비록 문체가 이스라엘의 지혜 문헌과 비슷하지만,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들에 관한 특성을 강조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런 나라들의 잠언이나 격언들은 이스라엘의 그것들과 내용 면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솔로몬의 잠언들은 기원전 931년에 기록 되었고 25~29장에 나오는 그의 잠언들은 히스기야에 의해 약 230년  후에 수집되었다(히스기야는 기원전 715년부터 686년까지 통치했음). 솔로몬이 육욕과 물질주의와 우상 숭배에 빠지기 전까지 솔로몬의 통치하에서 이스라엘은 영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잠언은 목적을 분명히 명시한, 성경에서 몇 안 되는 책 중의 하나다. 1장 2~6절에 나오는 진술된 목적은 두 가지다. (1)도덕적 통찰과 분별력을 주기 위해 (2)지적 명철과 지식을 개발하기 위해서이다. ‘지혜와 훈계’는 서로 보완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왜냐하면 지혜(hokhmah)란 ‘기술(skill)’이라는 말이며 훈계(musar)는 ‘훈련(discipline, 징벌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음)’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훈련이 없으면 기술도 완전해 질 수 없으며, 기술을 가지고 있을 때 그는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자유를 소유하게 된다. 

   잠언서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을 말하고 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 앞에서 실제적으로 의로운 삶이 그것이다. 이러한 삶은 지식, 경험, 그리고 하나님을 첫 자리에 놓으려는 결단 등을 필요로 한다(3:5~7). 1~9장은 지혜를 갈구해야 할 필요를 간절히 느끼게 하려는 의도로 썼고 잠언서 전체는 불경건한 삶의 방식을 방지하거나 고치기 위해 쓰여진 것이다. 잠언서의 주제는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1:7a)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 위엄, 그리고 능력을 경탄하며 그분 앞에서는 것이며 겸손히 그분을 의지하며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다. 여기에 서로 상호적인 관계가 있는데 왜냐하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시작)”(9:10)이지만 또한 지혜는 여호와를 알고 경외하도록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2:1~5).  

   핵심 구절은 1:5~7, 3:5~6절이다. 핵심 장은 31장이다. 잠언서의 마지막 장은 여성에 관한 매우 높고 고결한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고대의 문서들 중 매우 독특하다. 여기서 묘사된 여성은 훌륭한 여성이며, 훌륭한 아내이며, 훌륭한 어머니이며 훌륭한 이웃이다. 그녀의 행위와 관심사와 말과 생활은 7장에 그려진 여인과는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다. 

   8장에서는 지혜가 의인화되어 완전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지혜는 신성을 지니고 있으며(8:22~31), 생물학적 생명과 영적 생명의 근원이며, 의롭고 도덕적이며 그것을 받아들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다(8:1~6,32~35). 이 지혜는 “그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골2:3)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된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전1:30, 1:22~24). 

   잠언서는 욥기와 전도서와 함께 구약의 지혜서를 구성한다. 지혜서는 야훼에 대한 경외를 삶의 실제적 거룩함과 기술(skill)을 위한 기초로 삼고 있다. 잠언서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보편적이고 포괄적인 논조를 지니고 있다. 잠언들은 매우 조금씩 천천히 읽어야 한다. 신약에서 잠언은 최소한 14회 정도 인용되었거나 암시되었다.  

   야고보서는 잠언서와 유사한 면이 많다. 혀에 관한 잠언의 말씀들과 야고보서의 말씀들을 비교해보라(잠12:18~19과 약1:26, 잠15:1~2과 약3:5, 잠18:21~21:6과 약3:6, 잠21:23과 약1:19,3:8, 잠25:15과 약3:3, 잠25:23과 약4:1). 또한 야고보서에 나오는 세상적인 지혜와 경건한 지혜의 비교도 잠언서와 비슷하다. 야고보서 3장15~16절의 인간의 지혜는 세상적이고(잠14:2), 육욕적이고(잠7:18), 마귀적이며(잠27:20), 시기심이 가득 차 있고(잠6:34), 이기적(파당)이며(잠28:25), 무질서(요란)하고(잠11:29), 악하다(잠8:13). 야고보서 3장17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지혜는 순결하고(잠15:26), 화평하며(잠3:1~2), 온유하고(잠11:2), 이치에 맞게 온당하며(잠14:15), 긍휼(자비)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잠11:17, 3:18), 편벽됨(편견)이 없으며(잠21:6) 도한 거짓(위선)이 없다(잠28:13).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332~338) 

2. 나무 보기  

   잠언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마샬(mashal)은 ‘비교, 비슷함, 평행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지혜는 영민함이나 지성 이상의 것이다. 지혜는 실제적 의나 도덕적 통찰과 관계있다. 잠언서는 여섯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잠언의 목적(1:1~7): 책의 저자와 주제와 목적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젊은이에게 주는 잠언(1:8~9:18): “내 아들아”라는 말로 시작하는 열 가지의 권면이 있다. 자기 아들로 하여금 인생에서 경건한 성공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지혜의 길을 추구하도록 설득하는 아버지의 권면이라는 형식으로 지혜의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 지혜의 훈련(단련)은 자유와 안전을 제공한다(1~4장). 지혜는 사람을 부정한 육욕이나 그 결과 어리석은 습관과 게으름, 그리고 간통과 음녀(창부)의 유혹으로부터 보호해준다(5~7장). 

   솔로몬의 잠언(10:1~24:34): 이 장들에는 주제별로 배열된 부분이 적다. 일반적인 단위는 한 구절로 이루어진 금언들이다. 이 잠언들은 돈이나 말 등과 같은 구체적인 주제들을 따라 모아 조직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금언 모음집은 솔로몬이 쓴 375개의 금언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주로 여러 가지 대구법의 형식을 사용하고 있다. 

   히스기야의 신하들에 의해 복사 편집된 솔로몬의 잠언(25:1~29:27): 이 두 번째 솔로몬 잠언 모음집은 첫 번째 솔로몬 잠언 모음집에 나오는 주제들을 더 탐구하고 있다. 

   아굴의 잠언(30:1~33): 아굴과 르무엘의 잠언은 일종의 부록이라고 할 수 있다. 아굴의 잠언들의 대부분은 숫자를 사용한 금언들의 모은 형식이다. 

   르무엘 왕의 말들(31:1~31): 마지막 장은 현숙한 여인(아내)을 묘사하는 22구절로 이루어진 알파벳(답관체) 잠언을 포함하고 있다(31:10~31).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339~343) 

 

『 전  도  서 』 

 

 

1. 숲 보기  

   전도서의 핵심 단어는 헛됨, 즉 하나님을 떠난 삶 가운데 행복을 찾고자 하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 시도인가 하는 것이다. 설교자는 ‘해 아래’있는 것들을 보았으며, 인간적인 관점에서 모든 것이 헛되다고 선언한다. 권세, 인기, 특권, 쾌락 등 아무 것도 하나님 자신 외에는 어떠한 것으로도 사람의 삶 속에 있는 하나님께서 만들어두신 빈 공간을 채울 수 없다. 그러나 일단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삶은 의미와 목적을 가지며, 솔로몬으로 하여금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고 선을 행하고 기쁘게 살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을 지키라!”라고 외치게 하는 것이다. 하루하루를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로 생각할 때 회의주의와 절망은 없어질 것이다.  

   히브리 제목인 코헬렛(Qoheleth)은 전도서에서만 발견되는 희귀한 용어다(전도자, 1:1~2, 12, 7:27, 12:8~10). 저자는 솔로몬 왕이다. 코헬렛이 쾌락을 추구했고(2:1~3), 인상적인 업적을 이루었으며(2:4~6), 비교할 바 없는 부(2:7~10)를 소유했다는 묘사를 생각하면 그렇다. 유대인의 전승은 솔로몬이 아가를 젊은 날에 썼고 중년에 잠언을, 그리고 말년에 전도서를 기록했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전도서는 그의 육욕과 우상 숭배 때문에 비롯된 그의 어리석음과 시간 낭비를 후회하는 그의 후회를 표현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왕상11장). 이 책은 코헬렛의 개인적인 면을 말하는 것 외에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다.  

   전도서는 인간의 삶의 목적, 의미, 그리고 만족을 부지런히 추구한 결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설교자(전도자)는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의 권세와 인기와 특권과 쾌락의 허무함과 헛됨을 통렬하게 간파한다. 헛됨(vanity)이란 말은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많은 것을 표현하기 위해 37회 사용되었다. ‘해 아래서의’(29회 사용됨) 삶은 불공평과 불확실성과 운명의 변화와 공의의 훼손 등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도서는 무신론이나 회의주의자라는 답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책 전반에 걸쳐 언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도서는 인간의 최고 선(summum bonum)에 대한 추구는 하나님 안에서 끝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도서는 부정적인 주제들에 대한 분석을 제공하지만, 선하고 정의롭고 절대 주권을 갖고 계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삶의 공허함을 극복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주제를 또한 우리에게 보여준다. 인생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매일의 선물이며 가능한 한 많이 향유되어야 한다(2:24~26, 3:12~13,22, 5:18~20, 8:15, 9:7~10, 11:8~9). 진정 우리의 이해에는 한계가 있지만 그러나 또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이 있다. 코헬렛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심판하시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는 권면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12:13). 

   핵심 구절은 2:24, 12:13~14절이다. 핵심 장은 12장이다. 전도서의 끝부분에서 설교자는 삶을 ‘쌍안경’을 통해 바라본다. 단지 ‘해 아래서’ 삶을 보는 자연인의 관점에서, 결론은 “모든 것이 헛되도다.”이다. 아무리 많은 행위와 소유물도 그의 마음의 갈망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설교자가 그의 삶을 ‘해 위에 있는’ 하나님의 시야로 바라보았을 때에야 비로소 삶은 ‘하나님의 손에서 나는’(2:24) 귀한 선물로 의미를 띠게 되었다. 12장은 다음과 같은 하나의 결론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 이 책의 광범위한 탐구를 해결하고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12:13).  

   각 사람은 그의 마음에 영원을 가지고 있는데(3:11) 단지 그리스도만이 궁극적인 만족과 기쁨과 지혜를 줄 수 있다. 사람의 최고의 선은 풍성한 생명을 제공하시는(요10:9~10) ‘한 목자’(12:11)에게서만 발견될 수 있다. 야훼(주)라는 말 대신 일관성 있게 오로지 엘로힘(하나님, 41회)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을 볼 때 구속주/구속받은 존재라는 관계보다는 창조주/피조물의 관계가 고려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코헬렛의 탐구는 경험주의(1~2장)와 이성주의(3~12장)가 충분하지 않으며 앎을 위한 제3의 길 -계시 -가 있어야 함을 보여준다. 설교자에 의한 일련의 설교들은 해를 만드신 분과의 관계가 없이는 해 아래서의 삶이 헛될 수밖에 없음을 잘 예증해준다.


 

해 아래서의 삶 

(Life Under the sun) 

아들 아래서의 삶 

(Life Under the son) 

1:3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1:9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1:14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고전15:58) 

2:18 

해 아래서 한 

모든 수고를 한함(증오함)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1:10) 

6:12 

해 아래서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8:15 

해 아래서 쾌락은 

일시적이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2:13) 

8:17 

해 아래서 사람은 

하시는 일을 깨달을 수 없다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13:12) 

9:3 

해 아래서 

모든 사람은 죽는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5:11). 

9:11 

해 아래서 

힘센 것과 빠른 것 

하나님께서.......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고전1:27) 

12:2 

해 아래서의 삶은 

멈추게 된다.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일5:13)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346~353)


 

2. 나무 보기  

   전도서는 분석-종합하기 매우 어려운 책이기에 몇 가지 분석 방식이 사용되어 왔다. 본서에서 사용된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모든 것이 헛되다‘”는 명제(논제)(1:1~11), “모든 것이 헛되다.”는 논증(1:12~6:12), 헛됨을 안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조언(7:1~12:14)이다.  

   “모든 것이 헛되다”는 명제(논제): 설교자는 그의 주제를 명시한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 해 아래서의 삶은 헛되고 혼란스러운 것처럼 보인다.  

   “모든 것이 헛되다”는 명제에 대한 논증: 설교자(전도자)는 자기의 광범위한 개인적 자원들을 가지고 시험해 보면서 의미와 만족을 찾는 그의 다방면의 탐구를 묘사한다. 지혜를 가지고 시작하여, 웃음과 쾌락과 술로 옮겨가면서, 다시 일과 여자와 그리고 부를 추구하지만 모든 것은 허무함으로 끝난다. 철학적인 탐구도 죽음의 허무함으로 끝난다. 궁극적인 의미는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헛됨을 알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조언: 사람은 번영할 때는 그것을 즐겨야 하며 역경의 때에는 두 가지 상황 모두 하나님께서 만드셨음을 생각해야 한다. 자기의 의와 부도덕이라는 양극단을 피하라. 지혜는 훈련과 근면을 포함한다. 설교자는 삶을 잘 활용하라고 권면한다. 젊은 날은 너무 짧고 귀하기 때문에 어리석음과 악함으로 낭비할 수 없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잘 살아야 하며 인생의 이른 시기에 하나님을 인정해야 한다. 설교자는 ‘선하고 훌륭한 삶(good life)’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삶이란 모든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의미는 ‘해 아래’를 보지 않고 해를 넘어 ‘한 목자(12:11, one Shepherd, 많은 영어 성경들이 목자를 대문자로 표시함으로 인간 목자가 아닌 하나님을 암시하고 있다)’를 바라봄으로써 발견할 수 있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354~359) 

 

『 아     가 』 

 

 

1. 숲 보기  

   아가서는 솔로몬에 의해 쓰여진 사랑의 노래(1:1)인데 이 노래에는 비유와 동양적인 이미지들이 풍부하다. 역사적으로 고찰한다면, 아가서는 솔로몬 왕이 한 목장의 여자를 사랑하여 구애하고 결혼하게 되는 것을 묘사하며, 또 부부간의 사랑의 기쁨과 아픔을 묘사한다. 풍유적으로 아가서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친애하는 신부로 그리고 있고(호2:19~20), 또한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그리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인간의 삶이 남자와 여자의 사랑 안에서 가장 깊은 만족을 발견하는 것처럼 영적인 생명도 그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지고의 만족을 발견한다. 이 책은 세 명의 주인공들 - 술람미 신부, 솔로몬 왕, 그리고 합창단(예루살렘의 딸들) - 이 출연하는 드라마의 장면처럼 구성되어 있다.  

   솔로몬 왕이 저자라는 증거가 있다. 왕궁의 화려함과 수입된 물품들에 대한 증거들이 있다(3:6~11). 이 당시의 솔로몬 왕은 60명의 왕비와 80명의 비빈이 있었다(6:8). 솔로몬의 후궁실이 가장 컸을 때는 700명의 왕비들과 300명의 비빈들이 있었다(왕상11:3). 열왕기상4장 32~33절은 솔로몬이 1005개의 노래를 지었고 식물과 동물 세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노래는 주로 술람미 여인의 관점에서 쓰여 졌지만 실상은 솔로몬이 그 저자이다. 자기의 후궁으로 140명의 여인들(6:8)을 거느린 남자가 어떻게 술람미 여인이 자기의 유일한 신부인 것처럼 그녀와의 사랑을 칭송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아마도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의 관계가 그가 경험한 유일한 순수한 로맨스였는지 모른다. 대부분 그의 결혼은 정치적인 고려에 의한 것이었다. 술람미 여인은 아무런 정치적 사회적 중요성을 갖지 않는 단지 포도원지기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 책은 또한 솔로몬이 심한 부도덕과 우상 숭배에 빠지기 이전에 쓰여졌다. 술람미 여인은 왕을 ‘내 사랑하는 당신’이라고 부르며 왕은 그의 신부를 ‘내 사랑’이라고 부른다. 예루살렘의 딸들은 아마도 술람미 여인의 시종들이었을 것이다. 술람미 사람이란 용어는 한 번만 나오는데(6:13) 이 용어는 갈릴리 바다 남서쪽 잇사갈 지파의 땅에 있었던 수넴 마을에서 비롯된 것 같다.  

   아가서는 지어낸 이야기인가? 풍유인가? 아니면 역사적인가? 풍유적인 해석은 주관적이며 확실한 증거가 결여되어 있다. 남편과 아내 관계가 상징적으로 쓰인 곳이 몇 군데 있지만(겔16장, 23장, 호1~3장) 이런 것들은 항상 상징적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 두 번째의 견해는 이 책의 내용을 적용하는 하나님의 적용은 될 수 있을지 모르나 이 책의 원천적 의미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아가서는 인간의 사랑에 대한 적절한 관점을 제공하며, 육욕이나 금욕주의 같은 양극단을 피하게 해준다. 성에 관련된 것이 악에 가까운 어떤 잘못된 것으로 간주될 경우에만 이 책을 영해하려는 시도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성은 하나님께서 남편과 아내 사이의 순결한 성적 관계에 대한 지침서 같은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이 이상할 것이 없고 오히려 납득할만하다. 사실, 남성과 여성의 결합은 원래는 하나님의 하나 되심을 예시하기 위해 의도된 것이다(창1:27, 2:24, 고전6:16~20). 그러므로 아가서는 결혼 안에서의 사랑에 대해서, 그 육체적, 감정적 아름다움과 함께 하나님께 담대하게 긍정적으로 승인하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석한다고 해서 이 책이 영적인 해석이나 적용을 전혀 포함하고 있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아가서는 분명 하나님 자신의 언약백성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예시(illustrate)하고 있고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예기(anticipate)하고 있다. 

   핵심 구절은 7:10, 8:7절이다. 핵심 장은 아가서 전체가 한 단위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핵심 장은 따로 없고 대신 여덟 장 모두가 결혼한 부부의 사랑을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은 야훼의 신부로 간주되고 있다(사54:5~6, 렘2:2, 겔16:8~14, 호2:16~20). 신약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나타난다(고후11:2, 엡5:23~25, 계19:7~9, 21:9). 아가서는 전자를 예시하고 후자를 예기한다. 

  

   아가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두 사람의 주인공(때로는 합창단)사이에 나눈 대화를 중심으로 지어진 극적인 시이다. 아가서는 유월절에 읽혔다. 그러나 성경의 정경에 포함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한 번밖에 사용하지 않은 것(8:6), 다른 성경책에서 아가서를 인용하지 않은 것 등으로 인해 논란이 있었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362~368) 

   아가서는 ‘노래 중의 노래’라고 한다. 그런데 사랑의 노래를 취급하고 있는 아가서의 중요한 문제는 그 사랑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 적용할까, 아니면 교회에 적용할까, 아니면 이 책이 인간 결혼의 표준을 보여주는 것일까? 그래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견해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1)여자적 해석: 영적 교훈은 배제하고 단순히 인간적 사랑의 이야기로 해석하는 방법인데, 이는 인간 구원을 위해 주신 성령의 목적과 다른 것이다.  (2)은유적 해석: 하나님과 교회 사랑을 보여준다는 해석인데 본서의 역사성이 무시되는 위험성이 있다. (3)표상적 해석: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면서 영적 교훈을 강조하는 방법이다.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 왕과의 사실적 애정담을 그리스도의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사랑을 보여주는 교훈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종윤, p.100~102) 

 

2. 나무 보기  

 

   전도서와 같이 이 작은 책도 쉽게 그 개요를 파악하기 어려우며 여러 제안들이 있어 왔다. 사랑의 시작(1:1~5:1)이 먼저 나오고 그리고 사랑의 커짐(5:2~8:14)이 뒤따른다.  

 

   사랑의 시작: 1~3장은 구혼기간에 대한 일련의 회상들이다. 솔로몬은 계속되는 최상의 직유와 은유로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자기의 신부를 칭송한다(4:1~5:1).  

   사랑의 커짐: 결혼식이 끝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이 어디 간 사이에 끔찍한 꿈을 꾼다(5:2). 솔로몬은 돌아오자마자 그녀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다시 한번 확신시켜주며 그녀의 아름다움을 찬미한다(6:4~7:10). 술람미 여인은 그녀의 시골 고향을 생각하기 시작하고 그녀의 연인으로 하여금 그녀와 함께 그곳으로 방문하도록 설득한다(7:11~8:4). 여행은 8장 5~7절에 있는데 그리하여 그들의 관계는 점점 더 깊어간다. 그녀의 고향방문에서 어릴 때 오빠들이 그녀를 돌봐주었던 것을 회상한다(8:8~9). 아가서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자의 서로에 대한 사랑의 초청으로 막을 내린다(8:13~14).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368~371) 

 

   문학 분류로 따진다면, 아가서는 분명히 ‘사랑의 시’에 속한다. 문제는 어떻게 이 시를 해석하느냐는 것이다. 방법은 다양하다. 풍유적 해석법, 극적 해석법, 모형적 해석법, 자연적 해석법 또는 문자적 해석법이 있다. 자연적 해석법의 요지는 아가서는 인간 사랑을 극찬한 시라는 것이다. 이 해석법이 가장 옳은 견해라는 가정 위에서 해석을 시도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A. 아가서는 “최고의 노래”라고 불리고 있는데, 그렇게 불리는 것은 당연하다. 이 노래는 하나님께서 그 지혜로우신 섭리의 손길로 하와를 아담에게 아내로 주셨을 때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불렀을 뻔한 노래이다. 아가서는 솔직하고 순수한 언어로 남편과 아내 상호 사랑을 찬양함으로써, 육체적인 아름다움과 결혼한 부부 간의 사랑을 저차원적인 것으로 무시하지 말 것을 가르치고 있다. 육체적인 아름다움이나 부부 간의 사랑은 창조주께서 피조물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약1:17), 그 본래의 위치와 목적으로 사용되기만 한다면 선하고 완전한 것이다. 아가서는 육체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영적인 것보다 저급한 것으로 간주하는 한편, 독신이 결혼보다 훨씬 거룩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비성경적 이원론을 강하게 경고하고 있다.   

   B. 아가서는 A의 내용과는 반대로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숭앙하고 결혼의 생리적 측면을 숭배해서는 안 된다는 점도 가르치고 있다. 육체적 아름다움과 매력이 직선적으로 언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가서에 묘사된 사랑의 관계는 매우 고귀한 성격을 띠고 있다. 아가서에는 외설이나 난잡함으로 볼 수 있는 묘사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다. 결국, 아가서는 우리에게 결혼 생활의 이상적인 사랑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의 성격을 결혼 관계를 사용해서 설명하고 있다(엡5장). 그러나 모든 결혼 관계가 이런 밀접한 사랑의 연대를 보여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아가서에 묘사된 것과 같은 순수한 결혼관계 만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사랑을 보여줄 수가 있는 것이다.  

   C. 아가서는 우리의 마음에 육감적인 악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기는커녕, 자기 형상으로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의 몸을 아름답게 지으시고, 아담의 마음에 자기와 같으면서도 다른 동무를 원하는 열망을 심으시고, 첫 번째 신랑을 첫 번째 신부에게로 인도하신 - 창조 사역의 절정 - 창조주를 찬양케 만든다. 아가서를 읽고 나면, 일반적으로 나와 다른 성을 대하는 잘못된 태도와 특별히 결혼 관계 속에서 저지르는 잘못된 죄를 깨닫게 된다. 성령께서는 아가서를 통해 죄인들을, 거룩한 결혼 관계를 구속하시고 또한 거룩케 하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신다. 이런 지상에서의 사랑의 연대감의 순결성과 거룩성을 보고 체험하게 됨으로써 천상의 영원한 사랑 관계, 즉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 간에 존재하는 흠 없이 순결하며, 그 누구도 깨뜨릴 수 없는 강한 사랑의 관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위클리프 주석 편찬실, p.100~102) 

 

『 대선지서 개론 』 

 

 

   17권의 선지서들은 성경의 약1/4를 차지하면서 신학적 역사적 관점으로 볼 때 아주 중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서의 메시지와 의미는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성경의 다른 부분들보다 더 어렵게 느껴진다, 그 주된 이유는 이 선지서 부분들을 사람들이 소홀히 해왔기 때문이다. 

 

구  분 

   히브리 성경에서 크게 분류되는 두 번째 묶음은 선지서로 불리며 전기 선지서와 후기 선지서로 구성되어 있다. 전기 선지서는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서, 열왕기서 등 실제적으로는 역사서들이다. 이 책들은 여호수아로부터 바벨론 포로기에 이르는 동안 신정 국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연대기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들은 기록 선지자들의 역사적인 배경을 제공해주고 있는 셈이다. 

   후기 선지서는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그리고 12권의 소선지서들이다. ‘후기’라는 용어는 연대기적인 의미라기보다는 성경에서의 이 책들의 위치를 말해준다. 이 선지자들은 자신들의 사역을 기록으로 남겼지만, 구두 선지자들(예를 들면 나단, 아비야, 잇도, 예후, 엘리야, 엘리사, 오뎃, 스마야, 아사랴, 하나니, 야하시엘, 그리고 훌다 등)은 현존하는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기록 선지자들이 쓴 책들은 후에 오늘날 우리가 아는 대로 다시 대선지서들과 소선지서들로 구분되었다. 대선지서는 방대한 분량 때문에 그러한 명칭을 가지게 되었다(예레미야애가는 제외). 

 

특  징 

   보통은 이들을 선지자, 선견자, 파수꾼, 또는 하나님의 사람 등으로 부른다. 가장 빈번하게 사용된 명칭은 nabi(선지자, 300회 이상)이며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고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을 의미하였다. roeh(선견자)라는 단어는 자연적인 시각이나 청각의 영역밖에 있는 것들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할 때 사용된다. prophet(선지자)이라는 영어 단어는 문자적으로 “~을 위하여 말하다”라는 뜻을 가진 두 개의 헬라어에서 유래했다. 이 단어는 구두로 또는 환상이나 기록된 형태로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은, 하나님의 대언자로서 특별하게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사무엘은 진정한 첫 번째 선지자였다(행3:24, 13:20, 히11:32). 그는 처음으로 선지자 집단을 만들었고, 라마에서 그들을 이끌었다(삼상19:20). 참된 선지자들은 하나님에 의해 부르심을 받았고 특별한 능력을 수여받았다. 율법에 근거한 그들의 도덕적, 영적 메시지 때문에 그들의 삶은 그들의 말과 일치해야 했다. 참된 선지자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며 그의 예언은 틀림없어야 한다고 신명기 18장 18~20절은 기록하고 있다.  

 

메 시 지 

   비록 선지자들이 미래를 예견(foretelling)하는 사역을 감당하였지만 그들의 주된 역할은 예언(forthtelling)이었다. (역자주 : forthtelling은 영감 받은 설교의 경우처럼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것을 말하고, foretelling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보통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이란 forthtelling인 경우가 많다). 이를 위해서는 예견의 능력뿐만 아니라 영적인 통찰력이 필요한데, 이는 선지자들이 당대의 어떤 특정한 태도나 관습들이 초래할 결과에 대해 선포해야 했기 때문이다.  

   예언적 메시지는 네 가지 주요 주제들을 가진다.  

   (1)선지자들은 백성들의 사악한 행위들을 드러냈다. 사람들의 귀에 듣기 좋은 말을 하기보다 그들이 마땅히 들어야 할 말을 한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이 하나님의 메신저들은 백성들의 유일한 소망이란 하나님께 겸손히 돌아와 자신들의 죄를 시인하는 것밖에 없음을 알았기에 죄를 죄로 엄격하게 다루는데 있어서 한 치의 타협도 없었다. 마치 백성들에게 다가올 위험을 알려주는 파수꾼처럼 그들의 메시지는 매우 실제적이었다. 

   (2)선지자들은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덕적, 사회적, 의식적인 율법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였다. 하나님의 성품을 백성들에게 상기시켜주면서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신뢰할 것을 권면했다.  

   (3)선지자들은 백성들에게 임박한 심판을 경고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권자이시며 이방 나라들도 하나님의 통치하심에 거역할 때에는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4)선지자들은 장차 올 메시야를 고대했다. 역사는 순환적이지 않고 직선적이다. 역사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며, 하나님께서는 메시야가 다스릴 시대에 주권적으로 역사하셔서 모든 것이 하나의 정점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성호는 존귀케 될 것이며 땅 위의 모든 민족들이 그분의 목소리를 순종하게 될 것이다. 무려 300개가 넘는 구약 성경의 예언들이 메시야의 초림으로 인해 정확하게 성취되었으며 400가지가 넘는 남은 예언들은 그가 다시 오실 때 성취될 것이다.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 하되”(행10:43). 예언의 메시지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인간의 죄로 인한 심판과,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한 위로(편집자주: 구원)이다.  

    

 

해  석 

   선지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시대적 배경과 상황 속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그들의 역사적, 문화적 상황들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연대기적으로 중요한 네 시점을 강조하였는데, 그것은 그들 자신이 속한 시대와 포로기와 귀환, 그리스도의 초림, 그리고 메시야 왕국이다. 그들 마음에는 연대기가 이 사건들 그 자체보다 중요하지는 않았으며, 가끔 이들 네 기간들 간의 구분을 분명하게 하지 않았다. 그들의 메시지에는 상징이나 비유적 표현들이 사용되었지만, 이것들은 실제 사건을 가리킨다. 

   난해한 이사야로부터 시작해 평이한 아모스에 이르기까지 선지자들 간에는 그 다양성과 개성의 차이가 많았다. 그들의 성품이나 배경, 관심사, 그리고 문체 등은 매우 폭넓고 다양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공통적인 확신과 용기, 그리고 헌신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전 9세기에서 5세기까지 기록하였고, 그들의 시대로부터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경륜을 확장하고 있다. 17권의 선지서들 중에서 12권이 포로기 이전에, 2권은 포로기간 동안에, 그리고 3권은 포로기 이후에 기록되었다.


 

   이사야 

   선지서의 정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이사야서는 징계(1~39장)와 위로(40~66장)의 두 가지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이사야는 유다의 죄악을 분석해서 드러내며 그 나라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다. 그는 또한 예언의 범위를 넓혀 주변국들과 더 나아가 모든 세계를 향한 심판과 뒤따르는 축복을 말한다. 히스기야 왕과 관련된 역사적 사건을 중간에 삽입한 다음, 이사야는 장차 임할 구원과 회복의 메시지로 백성들을 위로했다. 야훼는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실 전능한 구세주다.  

   예레미야 

   유다는 도덕적, 영적인 부패가 극에 달했을 때 예레미야는 이러한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확실한 심판을 선포해야 하는 힘들고 어려운 사역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 예레미야는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충실하게 사역을 감당했고 그가 선포했던 공포의 날은 마침내 도래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유다의 반역은 자신의 멸망만 초래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은혜스럽게도 하나님 자신의 백성과 새로운 언약을 맺을 것을 약속하셨다.  

   예레미야 애가 

   아름답게 구성된 다섯 편의 애가시인 본서는 멸망당한 예루살렘 성을 위한 유다의 장송시라고 할 수 있다. 40년에 걸친 예레미야의 경고가 마침내 진짜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예루살렘의 패배와 몰락, 황폐를 생생하게 묘사한 이 책에는 예레미야의 슬픔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에스겔 

   에스겔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전후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에게 사역했다. 예레미야처럼 에스겔은 백성들에게 예루살렘 성이 멸망될 것과 포로 기간이 결코 짧지 않을 것임을 설득해야 했다. 또한 유다의 적국들의 운명을 묘사했고 유다의 미래에 대한 위대한 묵시적인 비전으로 글을 맺고 있다. 

   다니엘 

   이 책은 미래와 관련한 세부적인 예언과 비전으로 가득 차 있는 중요한 책이다. 이 책은 이방민족들을 향한 하나님의 전능하신 계획을 보여주며(2~7장) 더 나아가 이방인들이 통치할 동안의 이스라엘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8~12장). 희망을 잃어가는 유대인들에게 다니엘은 그들의 미래를 위한 하나님의 권능과 계획들을 계시해줌으로써 용기를 북돋아주고 있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375~380) 

 

『 이  사  야 』 

 

 

1. 숲 보기  

   ‘히브리 예언의 에베레스트’와도 같은 이사야는 성경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첫 39장은 구약 성경의 39권에 해당하며 하나님의 공의, 거룩하심, 정의를 강조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로부터 시작하여 그 주변국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온 세상에 대하여 우상을 숭배하는 부도덕한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하심 앞에 숙연해 질 필요가 있다. 하지만 나머지 27장은 신약 성경의 27권에 비교되며 하나님의 영광과 긍휼, 무한한 은총을 묘사하고 있다. 장차 메시야가 십자가를 지실 구세주로서, 그리고 면류관을 쓰실 전능자로서 임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40:1)고 기록하고 있다. 

   유다의 네 명의 왕들의(편집자주 :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1:1) 집권 기간에 걸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 사역은 최소한 40년 동안 지속되었다. 이사야는(편집자 주: 유다 왕국의 귀족인 아모스의 아들, 1:1, 2:1, 왕하19:2, 대하26:22) 적어도 두 명의 아들을 두고 있었다(7:3, 8:3). 그는 대부분 생애를 예루살렘에서 보냈고, 탈무드에 의하면 므낫세 치세 동안 그의 박해자들이 그를 톱으로 처형했다고 한다(히11:37). 이사야는 유다의 왕들이 하나님의 능력보다 다른 나라들과의 연합을 의지하는 것에 대해 경고했다. 호세아, 미가와 동시대인으로서 이사야는 시기적으로는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시기에 예언을 했지만 자매국인 이스라엘의 죄를 따르고 있던 남왕국 유다를 향해서 주로 사역을 했다.  

   본서의 중심주제는 이사야의 이름에서 발견된다.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단어는 이사야에 26번이나 나타나지만 다른 예언서에서는 모두 합쳐 겨우 7번 나타난다. 1장부터 39장까지는 구원에 대한 인간의 절박한 필요를 묘사하며 40장부터 66장에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총을 보여준다. 구원은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으며,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신 통치자, 역사의 주권자, 그리고 유일하신 구세주로 묘사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경건한 남은 자들을 보전하시고 장차 올 메시야를 통한 구원과 해방을 약속하셨으므로 자신의 언약을 충실하게 지키실 것이다. 구세주는 유다 족속으로부터 나타날 것이며 구원과 회복의 이중사역을 성취하실 것이다. 이방인들도 구세주에게로 나아올 것이며 우주적인 축복이 마침내 도래하게 될 것이다. 

   핵심 구절은 9:6~7, 53:6절이다. 핵심 장은 53장이다. 시편 22편과 더불어 이사야 53장은 메시야의 속죄(atonement)에 대한 가장 놀랍고 구체적인 예언들을 열거하고 있다. 그리스도에 관하여 언급하는 측면에 있어서 이사야는 구약 성경의 선지자들보다는 오히려 신약 성경의 기자처럼 보인다. 이사야서는 신약성경에서 다른 어떤 선지서들보다도 많이 인용되었다. 그의 이름은 21번 언급되었고, 53장 한 장에만도 신약 성경에서 85번이나 직간접적으로 인용했다. 그의 어떤 예언들은 이미 성취되었지만 많은 예언들이 아직도 그 성취를 기다리고 있다. 주님께서 누가복음 4장 18~20절에서 이사야(61:1~2)를 인용하셨지만 문장의 중간인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에서 멈추셨다. 이사야서의 계속되는 구절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기록하고 있다. 첫 번째 내용은 그리스도에 의해 분명히 성취되었지만, 두 번째 내용은 주님께서 고난 받는 종으로서가 아니라, 통치하실 왕으로 다시 오실 때에 성취될 것을 기다리고 있다.  

   다음은 기독론적인 예언들과 그에 상응하는 신약성경의 실현의 예들이다. 사7:14=마1:22~23, 사9:1~2=마4:12~16, 사9:6=눅2:11, 엡2:14~18, 사11:1=눅3:23,32, 행13:22~23, 사11:2=눅3:22, 사28:16=벧전2:4~6, 사40:3~5=마3:1~3, 사42:1~4=마12:15~21, 사42:6=눅2:29~32, 사50:6=마26:67, 27:26, 30, 사52:14=빌2:7~11, 사53:3=눅23:18, 요1:11, 7:5, 사53:4~5=롬5:6,8, 사53:7=마27:12~14, 요1:29, 벧전1:18~19, 사53:9=마27:57~60, 사53:12=막15:28, 사61:1=눅4:17~19,21 등이다.  

   위로의 단락(40~60장) 중의 중심부분(52:13~53:12)에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다섯 가지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1)사52:13~15 : 그의 철저한 희생(번제) (2)사53:1~3 : 그의 완전하신 성품(소제) (3)사53:4~6 : 그는 하나님과 화평을 초래하는 속죄를 가져오셨다(화목제). (4)사53:7~9 : 그는 사람들의 범죄한 대가를 치르셨다(속죄제). (5)사53:10~12 : 그는 죄의 결과를 위해 돌아가셨다(속건제).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382~389) 

 

2. 나무 보기  

   뚜렷하고 상세한 메시야 예언들로 인해서 가끔 ‘복음적 선지자’로 불려졌다. ‘이사야에 의한 복음’은 크게 세 단락으로 구분되어진다.  

   심판의 예언들(1~35장): 이사야의 첫 번의 심판메시지는 유다 왕국에 있는 자신의 동족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다. 1장은 본서 전체의 내용을 요약하는 메시지이다. 하지만 심판을 면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이 하나님께만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은혜스럽게도 그들을 회개하고 그분에게로 돌아오도록 초청하셨다. 이사야의 소명이 6장에 나오며 이어서 임마누엘의 내용이 나온다(7~12장). 주변국들을 향한 일련의 심판들을 선포하면서 그 심판의 범위를 넓혀간다(13~23장). 이사야의 묵시는(24~27장) 왕국의 축복에 선행할 우주적인 환난을 묘사하고 있다. 28~33장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구체적인 죄악에 대한 여섯 가지의 화들을 선포하고 있다.  

   역사적인 삽입구(36~39장): 유다왕국은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가는 일은 면했지만, 바벨론의 손에서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앗수르의 산헤립에 의한 멸망에서 유다를 구원하셨다. 그는 자신의 병중에서 하나님께 간구했고 생명을 15년이나 연장을 받았다. 그러나 우매하게도 자신의 모든 보물을 바벨론의 사절들에게 보여주었고 이사야는 바벨론이 그의 보화와 자손들을 모두 가져갈 것이라고 히스기야에게 말했다. 

   위로의 예언들(40~66장): 유다에게 심판을 선포한 후에 이사야는 소망과 회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들로 그들을 위로했다. 이 소망의 기초는 하나님의 주권과 전능하심이다(40~48장). 이 아홉 장에 나타난 216개 구절들 중에서 115개의 구절들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을 말하고 있다. 49~57장은 그들의 구세주요 고난 받는 종이 될 장차 올 메시야에 초점을 두고 있다. 자신들의 죄악을 시인하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58~66장).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389~394) 

 

『 예 레 미 야 』 

 

 

1. 숲 보기  

   예레미야는 유다 왕국의 암흑기 동안에 살던 유다의 위대한 선지자들 중 한 사람이 쓴 자서전이다. 배교, 우상 숭배, 변질된 예배, 도덕적 타락 등이 예레미야가 살면서 활동했던 당시의 상황이었다. 심판이 장차 홍수처럼 밀려올 것인데, 예레미야는 이 메시지를 40년 동안 충실하게 선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설교들에 대한 응답으로 이 하나님의 세심한 선지자는 동족들로부터 핍박, 구타, 격리, 수감 등 극심한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비록 반대와 핍박을 받기는 했지만 예레미야는 그의 많은 예언들이 실현되는 것을 생전에 목격했다. 바벨론 군대가 침략했으며 심판이 도래했다. 이것 때문에 비록 선지자의 마음이 찢어지는 듯 했지만 결국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정의가 확고히 입증되었다. 

   예레미야서는 제사장 도시인 아나돗에서 하나님께 일찍이 부르심을 받은 한 사람의 예언을 기록한 책이다. 가슴 아픈 메시지를 가지 가슴 아픈 예언자로서 예레미야는 목이 굳은 유다 백성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40년이 넘도록 선포하는 노고를 감당했다. 자신의 동족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핍박을 받으면서 예레미야는 그의 신랄한 예언들을 눈물과 동정심을 가지고 증거 했다. 본서는 연대기적으로나 주제별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그의 설교들과 표적들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만이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충실하게 선포했다.  

   예레미야는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이었으며, 유다 왕국에 대한 실물교육의 한 방편으로서 그는 결혼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16:2). 바벨론 침략을 통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그의 극단적인 메시지 때문에 심한 핍박을 겪어야 했다. 자신의 고향인 아나돗에서 위협을 받았고, 예루살렘의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에 의해서 생명을 위협받기도 했으며, 족쇄에 매이기도 했고, 여호야김 왕에게서 위협을 느껴 도피했고, 거짓 선지자 하나냐에 의해서 공적으로 모욕을 받았으며 웅덩이에 던져지기도 했다.  

   예레미야는 스바냐, 하박국, 다니엘, 그리고 에스겔 등과 동시대인 이었다. 유다의 마지막 선한 왕인 요시야는 기원전 622년 율법책이 발견되었을 때 영적인 개혁을 일으켰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치세 동안 순조롭게 활동하다가 그가 애굽의 바로 느고에 의해 기원전 609년에 죽음을 당했을 때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때 즈음에 바벨론은 이미 앗수르(앗시리아)의 수도였던 니느웨를 점령했다(기원전 612년). 여호아하스는 요시야를 대신해 유다의 왕이 되었지만 겨우 3개월 동안 치리했고, 느고에 의해 폐위된 후 애굽으로 끌려갔다. 유다의 다음 왕은 여호야김이었지만 바벨론이 기원전 605년에 갈그미스에서 애굽을 격퇴할 때까지 애굽의 한 봉신으로서만 통치했다. 그후 유다 왕 여호야김은 바벨론의 봉신이었지만 601년 예레미야의 경고를 거부하고 바벨론에 반기를 들었다. 597년에 여호야긴이 유다의 다음 왕이 되었지만 3개월 후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함락했을 때 시드기야에 의해 대체되었고 그는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다. 시드기야는 유다의 마지막 왕이었다. 그가 애굽과 동맹을 맺으려고 시도한 것은 오히려 느부갓네살로 하여금 예루살렘을 기원전 586년에 점령하고 파괴하게 하는 구실을 주고 말았다. 그러므로 예레미야의 사역에는 세 가지 단계들이 있다. (1)기원전 627년부터 605년까지는 유다가 앗수르와 애굽에 의해 위협을 당할 때에 예언했다. (2)기원전 605년부터 586년까지는 유다가 바벨론의 위협과 침략을 받을 동안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다. (3)기원전 586년부터 580년까지는 유다의 몰락 이후에 예루살렘과 애굽에서 활동했다. 

    예레미야에서 하나님께서는 인내가 많으시고 거룩하신 - 심판을 늦추며 너무 늦기 전에 그의 백성들로 회개하도록 촉구하시는 - 분으로 묘사된다. 토기장이 집의 교훈이 보여주듯이 깨어진 그릇이라도 마르기 전에는 수선될 수 있지만(18:1~4), 일단 마르고 나면 손상된 그릇은 오로지 쓰레기일 뿐이다(19:10~11). 하나님의 말씀에 거절했기에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갔으나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언약을 세우실 것이다.  

   핵심 구절은 7:23~24, 8:11~12절이다. 핵심 장은 31장이다. 예레미야의 모든 심판과 징계의 메시지들 한 가운데 31장의 놀라운 약속들이 위치한다. 유다가 비록 그의 위대하신 왕의 언약들을 파기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31:33)고 말씀하심으로써 새로운 언약을 세우실 것이다. 메시야가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써 이 새로운 언약이 효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메시야는 23장 1~8절에 장차 올 목자로서, 그리고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행사하며 세상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얻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거할 것이며 그 이름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23:5~6)고 기록한 의로운 가지로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새 언약을 장차 가져올 것인데(31:31~34), 이 언약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창12:1~3, 17:1~8), 모세와 그 백성들(신28~30장), 그리고 다윗(삼하7:1~17)과 맺으신 언약들을 완성하게 될 것이다. 여호야긴(또는 여고냐, 고니야)에게 임한 저주는 그의 어떤 후손도 왕위에 올라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다(22:28~30). 마태복음 1장1~17절은 그리스도의 족보를 솔로몬과 여고냐를 거쳐 그의 법적 아버지인 요셉에게까지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요셉의 아들들은 어느 누구도 왕위에 오를 수 없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될 때 여호야긴에게 임한 저주를 받게 될 것이다. 누가복음 3장 23~38절은 그리스도의 계보를 마리아로부터 출발하여12)다윗의 다른 아들인 나단을 거쳐(눅3:31) 소개함으로써 그 저주를 피하고 있다.  

   이사야서가 일반적으로 연대적인 순서를 따르는 반면, 예레미야서는 그렇지 않다. 유다의 마지막 왕들의 순서를 따름으로써 그의 예언들을 다음과 같이 배열하는 것이 가능하다. 요시야(1~6장), 여호아하스(22:10~12), 여호야김(7~20장, 25~26장, 35~36장, 45~46:12, 47~49장), 여호야긴(22~23장), 시드기야(21:24, 27~34장, 37~39장), 그달랴(느부갓네살이 꼭두각시로 세운 유다의 통치자, 40~44장). 예레미야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창조주와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의 주님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하며 그의 동정심은 의로우시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서, 그는 우상 숭배와 그로 말미암는 도덕적인 타락을 싫어하신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상실할 때 그들은 도덕적인 타락과 부패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396~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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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벨론은 심판을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것인데, 이 나라의 이름은 본서에 164번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성경의 다른 모든 책에 나타난 것보다도 많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메시지가 극히 신랄했고 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거듭 예언자 직분을 포기하려 했지만 끝까지 잘 감당했다. 그는 거절과 박해를 받았던 외로운 눈물의 선지자였다(9:1). 예레미야서를 비록 연대기적으로나 주제별로 정리하기는 쉽지 않지만 그 중심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심판이 중단될 수는 없지만, 회복의 약속들이 책 전체에 산재해 나타나고 있다. 본서의 구분은 예레미야의 소명(1장), 유다를 향한 예언들(2~45장), 이방인들을 향한 예언들(46~51장), 예루살렘의 몰락(52장). 

   예레미야의 소명: 예레미야는 출생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고 구별되었다.  

   유다를 향한 예언들: 예레미야의 메시지는 비유들과 설교들, 그리고 상징적인 행동을 통한 교훈 등 다양한 방법들을 통해 전달되었다. 12편의 생생한 설교들에서 유다에 임박한 심판들의 원인을 열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하나님 자신에게 붙들어 매셨지만 썩은 허리띠처럼 부패한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임박한 심판의 한 표적으로 그는 결혼하거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금지 당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았기에 그 백성이 포로로 잡혀간 기간 동안에 그 땅이 안식을 얻게 될 것이다. 유다의 회복은 오직 미래의 왕이신 메시야, 새로운 목자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는 백성들에게 새 언약 아래서 누리게 될 회복과 소망을 확신시켜 주었다(30~33장). 남은 자들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며 복을 누리게 될 때가 올 것이다. 조수인 바룩을 보내 자신의 예언의 경고들을 낭독하게 했으나 여호야김에 의해서 불살라지고 예레미야는 수감되었다.  

   이방인들을 향한 예언들: 이방 아홉 개 국가들을 향한 예언적 경고들로 이루어져 있다. 애굽, 블레셋, 모압, 암몬, 에돔, 다메섹, 아라비아, 엘람, 바벨론이다. 이 중에서 오직 애굽, 모압, 암몬, 엘람에 대해서만 회복의 약속이 주어졌다. 

   예루살렘의 몰락: 40년에 걸친 예레미야의 심판의 선포는 마침내 한 사건에 의해 확증되었는데, 이 사건은 너무도 중요한 까닭에 성경에 4차례에 걸쳐 소상하게 기록되었다(왕하25장, 대하36장, 렘39장, 52장). 이 역사 기록들에서 알 수 있듯이 예루살렘은 포위되고 파괴되었으며 약탈을 당했다. 그 지도자들은 죽임을 당했고 포로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402~411) 

 

『 예레미야 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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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레미야 애가는 아마도 구약 성경 중에서 가장 슬픈 책인데, 예루살렘의 몰락 이후에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자신의 애가를 답관체 형식, 즉 알파벳 순서로 기록했다. 마음이 찢어지는 와중에서도 선지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대한 깊은 믿음을 강하게 증거하고 선포했다. 비록 현실은 심판으로 인해서 침울했지만, 미래는 부흥과 회복이라는 확실한 약속으로 인해서 밝게 빛났다. “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3:23). 인생의 모든 희망이 무산되는 죽음과 파괴의 와중에서 예레미야는 그 비극을 믿음의 승리로 승화시켜놓았다.  

   예레미야의 다섯 애가는 세 가지 주제가 전체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가장 현저한 주제는 예루살렘의 대학살에 대한 통곡이다. 두 번째의 주제는 죄의 고백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인정, 그리고 유다를 향한 거룩한 심판이다. 죄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경고)된 심판이 마침내 실현된 것이다. 세 번째 주제는 그렇게 현저하지는 않지만 매우 중요한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해 주신, 미래의 회복에 대한 희망이다.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쏟으셨지만, 자비하심 가운데 그의 언약들을 끝까지 충실하게 이루실 것이다.  

   핵심 구절은 2:5~6, 3:22~23절이다. 핵심 장은 3장이다. 파괴와 황폐, 혹독한 절망을 기록한 이 다섯 개의 장들 한 가운데에서 예레미야는 불끈 일어서서 하나님의 약속들과 성품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붙들었다. 3장 22~25절은 특별히 1,2,4,5장에 나타난 암울한 내용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엄청난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  

   눈물의 선지자는 6세기 후에 같은 성을 보면서 우셨던 선지자, 그리스도의 모습의 한 예표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마23:37~38).   

   히브리 원문에는 1~2장, 4장의 22구절들의 첫 글자들이 히브리알파벳의 22글자를 따르고 있다. 3장은 전체 66구절로 되어 있는데 각각 3구절씩 히브리 글자의 순서를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5장은 22구절이나 답관체 형식은 아니다. 또한 1~2장은 각 절마다 세 줄씩 되어 있는데,4장은 두 줄씩이며, 3장과 5장은 오직 한 줄씩이다. 이처럼 정교한 구성은 다섯 개의 애가에 묘사된 격정적이고 극적인 슬픔의 표현과 대조되어 균형을 이룬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586년과 기원후 70년에 발생한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이 비극적인 책을 공적으로 낭독한다.  

   예레미야서가 주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상하고 있는 책이라면, 예레미야 애가는 이를 과거적으로 회상하고 있다. 

예레미야서 

 

 

 

예레미야 애가서 

(경고) 

 

예루살렘의 패배와 멸망 

 

(애도) 

미래를 예견함 

 

 

 

과거를 돌아봄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414~419) 

   본서의 첫 네 개는 애가이나 마지막 것은 기도 시에 가깝다........ 애가서는 과부와 왕족으로 묘사된 예루살렘의 애통을 묘사한다. 흥미 있는 사실은, 기원후 70년에 로마인이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후, 로마 장군 디도가 그 정복을 기념하여 세운 승전 아치는 유다를 머리가 헝클어진 채 땅에 앉아 통곡하는 여인으로 묘사한다는 점이다. 동시에, 예루살렘의 딸들이 예수님이 사형직전에 통곡했던 모습도 상상해 보라(눅23:27~31). 애가서의 어떤 부분은 그리스도의 수난에 적용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실로 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시를 국민 시로 사용했다는 것은, 그들이 예루살렘의 파멸을 신앙적으로 파악한 해석을 용납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애가서를 오축에 넣어 중요한 기념일에 낭독하였다. 애가서의 낭독일은 성전이 불타버린 사건을 기념하는 아빕월의 제9일이다. 그러나 낭독이 더욱 긍정적으로 끝맺도록 5:21절은 항상 22절의 뒤에 반복된다. 로마교에서 애가서는 성주간(부활절 주일 앞 주간)의 마지막 3일간 낭독된다. 개신교에서는 부끄러운 말이지만, 이 장엄한 시들의 낭독을 흔히 무시해 왔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 혹은 국제적으로 재앙을 만났거나 위기에 처했을 때 본서의 메시지는 우리의 죄를 회개케 하고, 다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에 위탁하도록 도전을 준다. 비록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있긴 해도, 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은 회개치 않는 죄인들을 반드시 심판하셔야 마땅하다. 

(위클리프 주석 편찬실, p.121~124)  

2. 나무 보기  

   40년 동안 예레미야는 임박한 심판에 대한 그의 경고 때문에 핍박과 멸시를 받았다. 기원전 586년에 느부갓네살이 마침내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파괴했을 때 “내가 그렇게 되리라 말하지 않았소!”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비극적인 몰락을 함께 슬퍼했고, 한때 그처럼 웅장했던 도시의 죽음을 애도하는 애가를 작시했다. 슬픔에 가득 찬 예레미야의 다섯 애가들은 다음과 같이 이름 붙여질 수 있다. 

   예루살렘의 멸망(1장): 예레미야에 의한 애곡(1:1~11)과 의인화된 예루살렘에 의한 애곡(1:12~22)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님의 진노(2장): 예루살렘의 황폐로부터 그것의 파괴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로 그 주제를 바꾸었다. 바벨론은 오직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서 그 성을 멸망시킨 것이다.  

   긍휼을 구하는 기도(3장): 첫 18구절에서 백성들의 비탄과 절망을 묘사했고 그 아픔을 함께 나눴다. 하지만 19~39절에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을 숙고하면서 급작스럽게 분위기가 변화한다. 구원해 주실 것과 비참한 형편을 돌아보실 것을 호소했다. 

   예루살렘의 포위(4장): 예루살렘이 포위되는 사건을 재음미하면서 부한 자나 가난한 의 고통과 기근을 회상했다. 예루살렘의 멸망의 원인들을 열거했다. 특별히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의 죄와 인간적인 수단을 의존한 그들의 우매함을 지적했다.  

   회복을 위한 기도(5장): 백성들의 통탄스러운 형편을 애처롭게 묘사한다. 그들에게 대한 형벌은 끝났고 예레미야는 자기 민족의 회복을 간절하게 소망했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420~421) 

 

『 에  스  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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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겔은 유다 왕국이 거의 최후까지 기울어 몰락해가던 시기에 바벨론에 있는 유대인 포로 유배자들 중에서 예언 사역을 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사역은 그보다 앞섰던 동시대인 예레미야의 사역과 유사했다. 하지만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섬뜩한 메시지를 전한 반면, 에스겔은 바벨론에서의 재건이라는 온화한 메시지를 증거 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사람이었고 에스겔은 비전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비전들은 공포로부터 희망에 이르기까지 폭넓었고, 유다의 불성실한 지도자들을 향한 심판으로부터 유다의 미래와 관련된 위로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온 인류는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며,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6:10). 

   선지자이면서 제사장이었던 에스겔은 유다의 역사 중 가장 암흑기였던 70년의 바벨론 포로기 동안 사역했다. 예루살렘에 대한 마지막 공격이 있기 전에 바벨론으로 끌려간 에스겔은 포로 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극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예언들이나 비유, 표적, 그리고 상징 등을 사용했다. 그들은 비록 태양 아래 마른 뼈들과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규합하고 그들에게 다시금 생기를 불어넣으실 것이다. 현재의 심판 뒤에는 미래의 영광이 있게 될 것이며 그로 인해서 “그들이 하나님이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이다.  

   부시의 아들 에스겔(1:3)의 아내는 죽임을 당했는데, 그 죽음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대한 마지막 침략을 시작했을 때 유다에 대한 하나의 표적이었다(24:16~24). 예레미야처럼 그도 주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제사장이었다. 그의 예언 사역은 성전이나 제사장, 직분, 제사, 그리고 쉐키나(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관심 등을 통해 그의 제사장적 특징을 보여준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능력과 계획에 대한 수많은 환상들을 보는 특권을 받았으며 문학적으로 이를 신중하게 기록했다.  

   느부갓네살은 세 단계에 걸쳐 예루살렘을 멸망시켰다. 첫 번째로 주전 605년에 여호야김을 굴복시키고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포함해 유력한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두 번째로 주전597년에 있었던 여호야김과 여호야긴의 반란으로 다시 한번 굴복시키고 여호야김과 에스겔을 포함하여 약 만 명의 포로들을 잡아갔다. 세 번째로 주전 586년 오랜 포위 끝에 멸망시켰다. 1장1절의 ‘제 삼십년’이 에스겔의 나이라면 포로 때의 나이는 25세였고 소명을 받았을 때 30세였을 것이다. 이것은 다니엘이 주전 605년에 포로로 잡혀갈 때 에스겔이 17세였음을 의미하며, 결국 에스겔과 다니엘이 비슷한 나이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당시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던 예레미야보다 약 20년 정도 젊었다. 에스겔의 사역은 예레미야의 사역 말기와 다니엘의 사역 초기와 중복된다. 에스겔이 바벨론에 도착했을 무렵엔 다니엘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다니엘의 이름은 에스겔의 예언에 3번 언급되었다(14:14, 20, 28:3).  

   대부분의 다른 예언서들처럼, 에스겔서의 두 가지 주제는 심판(1~32장)과 위로(33~48장)다. 바벨론에 거주하던 초기 유대 포로민들을 향한 그의 사역은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던 예레미야의 사역과 비슷했다. 유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야기 시킨 죄악들을 열거했고 고국 땅으로 곧 돌아갈 것이라는 그들의 헛된 희망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밝히 드러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주권, 영광, 신실하심 등을 크게 강조하고 있다. 그는 성전의 타락, 파괴, 그리고 회복 등에 초점을 맞추었다. 성전과 관계된 또 하나의 주제는 하늘에서의 하나님 영광(1:28, 3:12, 23)과 떠나가시는 하나님의 영광(9:3, 10:4, 18~19, 11:22~23), 그리고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영광(43:1~5, 44:4)에 대한 에스겔의 환상적인 묘사다. 심판과 축복을 통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은 자신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여호와이신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핵심 구절은 36:24~26, 36:33~35절이다. 핵심 장은 37장이다. 이스라엘 회복에 대한 소망의 핵심부를 이루는 것은 마른 뼈들의 골짜기에 대한 환상이다. 에스겔 37장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뚜렷하게 단계적으로 그리고 있다. 메시야가 이사야서(11:1), 예레미야서(23:5, 33:15), 그리고 스가랴서(3:8, 6:12)에서 의로운 가지로 묘사되고 있는 것과 비슷하게, 에스겔서 17장 22~24절은 메시야를 높고 빼어난 산에 심어진 후에 장중한 백향목이 되는 연한 백향목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메시야는 통치할 권한을 가진 왕이시며(21:26~27), 자기의 양떼를 구원하고 먹일 진정한 목자이시다(34:11~31).  

   에스겔서는 질서 정연한 스타일과 주의 깊은 연대, 그리고 치밀한 구성이 특징인 책이다. 하지만 이런 치밀한 틀 속에는 측량할 수 없는 깊은 비밀과 생동감이 넘치는 이미지와 상징, 비유들, 우화들, 묵시적인 환상이 가득 차 있다. 4~24장에는 9개의 징조들이 발견되며 열 번째 징조는 37장에 나타난다. 에스겔은 6개의 환상들과 6개의 비유들을 기록했다. 묵시문학적인 본문들은 책 전체에 산재해 있다. 그의 이미지들이나 환상들 중의일부는 해석하기가 어려운데, 특히 40~48장의 경우가 그렇다. 성경학자들은 이 본문의 해석에 있어서 영적인 해석과 문자적인 해석으로 크게 나눠진다. 영적해석을 따르는 사람들은 제사 제도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철폐되었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으며(계21:22), 본문의 묘사들은 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성취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문자적인 해석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세부적인 측량과 긴 묘사들이 문자적으로 이해되지 않고서는 아무런 없고, 희생 제사란 그 본질상 기념적인 것이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21장의 새 예루살렘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천년 왕국 기간 동안에 유효할 것이며, 이스라엘을 향한 언약의 약속들을 교회 안에서 성취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424~430) 

   에스겔은 위로자, 구원의 선포자, 내적 종교적 필요성의 역설자, 회복의 선지자, 하나님께서 성전과 예배와 땅을 구속되고 정결케 된 이스라엘에게 회복시킬 것을 선언하는 선지자로서 예언을 하였다. 에스겔은 곡과 마곡이 이끄는 적군들에 심판이 임할 것을 그리고 있으며, 예를 들어 소돔과 사마리아 같은 이방 나라들의 회심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열국이 마치 새들과 같이 좋은 백향목인 메시야 아래 깃들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에스겔은 알레고리, 상징적 행동, 환상 등과 같은 다양한 방법들을 사용해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에스겔서의 기본 가르침은 다음과 같이 열거할 수 있다. (1) 하나님께 대한 사상 - 그의 영광, 그의 이름, 그의 거룩하심 (2)개인 책임 강조 (3)이스라엘 역사 초기 때의 이스라엘의 죄 (4)회복의 약속 - 열국에 대한 심판, 땅을 기름지게 축복하실 것임, 영적 중생, 포로 된 자들의 회복, 메시야적 통치자, 중생한 백성들에게 여호와께서 재림하심 (5)회복된 공동체의 조직. 구 언약 아래의 제사장으로서 에스겔은, 갱신된 성전과 제사장들과 희생 제도를 하나님께 그의 구속된 백성들과 관계를 맺으시는 수단으로 묘사하고 있다.    

(위클리프 주석 편찬실, p.128~130) 

2. 나무 보기  

   에스겔의 심판의 메시지는 예루살렘에 남아서 활동했던 선배 동시대인인 예레미야의 메시지와 유사하다. 유다는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장차 있을 유다의 회복과 축복을 약속하셨다. 이사야와 예레미야처럼, 에스겔은 공포와 소망의 메시지, 심판과 위로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하지만 에스겔은 “그들이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고 말씀하신 이스라엘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광에 주된 초점을 두었다.  

   에스겔의 소명(1~3장):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한 영광에 대한 놀라운 환상을 에스겔에게 주시며 그를 선지자로 세우셨다. 

   유다에 임할 심판(4~24장): 그의 표적들과 설교들은 유다에게 임할 심판의 확실성을 보여준다. 과거 유다의 죄악과 다가오는 운명이 성전 안의 가증스러운 것, 악한 자의 살육 당함, 그리고 성전을 떠나는 하나님의 영광 등의 일련의 환상들을 통해 드러났다. 제사장들과 왕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 감람산으로 이동한 후 동쪽으로 사라짐에 따라 정죄를 받았다. 유다의 선지자들은 거짓말쟁이들이며 그들의 장로들은 우상숭배자들이다. 그들은 열매 없는 포도나무와 간음한 아내같이 되어버렸다. 바벨론이 독수리처럼 그들 위에 내려 그들을 앗아 갈 것이며 그들은 이집트의 도움을 받지 못할 것이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이방인들에게 임할 심판(25~32장): 이방인 또한 바벨론의 포위와 멸망을 겪게 될 것이다. 암몬, 모압, 에돔, 블레셋, 두로, 그리고 시돈 등 시계 방향으로 돌아가면서 그들을 향한 심판들을 전체적으로 보여주었다. 두로에 대해 많이 할애한 것은 ‘두로 왕(28:11~19)’ 이 그 나라 배후의 실제 세력인 사단일 것이라고 믿는다. 애굽을 향한 경고들도 포함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계속해서 생존할 것이기는 하지만 오직 ‘나라들 중의 가장 미천한 나라’로 지속할 뿐이다. 그 이후로 애굽은 결코 이전의 영광이나 영향력을 다시 회복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의 회복(33~48장): 본 장들에 나타난 예언들은 예루살렘이 몰락한 이후에 주어졌다. 이제 약속된 심판이 임했기 때문에, 에스겔의 메시지는 더 이상 심판이 아닌, 회복과 위로라는 긍정적인 주제를 그 중심으로 한다. 심판이 확실하게 이루어진 것처럼 축복 또한 반드시 올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재집결될 것이며 회복될 것이다. 하나님의 파수꾼인 에스겔의 입술은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듣자 열려졌다. 마른 뼈들의 골짜기에 대한 환상은 하나님의 영에 의한 민족이 부활을 잘 그려주고 있다. 예루살렘 멸망 후 14년이 지난 주전 572년에 에스겔은 환상 중에 황폐된 성으로 돌아가 성전과 성, 그리고 그 땅의 재건과 관련된 상세한 사항들을 계시 받았다. 새 성전과 성전의 바깥뜰, 안뜰에 관한 정교한 묘사가 끝난 뒤에 에스겔은 동방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이 성전으로 돌아오는 것을 보게 된다. 장차 있게 될 성전에서의 예배와 관련된 규정들 다음에는 새 땅과 성에 대한 계시들이 뒤따른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430~438) 

 

『 다  니  엘 』 

 

 

1. 숲 보기  

   다니엘서는 때로 ‘구약 성경의 묵시 문학’으로 일컬어지는데 이 책은 예언 역사의 웅대한 흐름을 보여준다.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인들은 역사 속에서 흥망성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영영히 세우실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자기 본국으로부터 바벨론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성장했던 경건한 다니엘의 생애를 통해 가장 명백하게 드러난다. 왕궁과 풀무 불, 사자굴 등에서 겪은 그와 그의 친구들의 경험은 포로기간 중에도 하나님께 그의 택하신 백성들을 잊지 않으셨음을 입증해준다. 그리고 다니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꿈들과 그 꿈들의 해석을 주셨는데 이는 지혜와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음을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확신시키기 위함이었다.  

   다니엘(하나님께서 나의 심판자이시다)의 생애와 사역은 70년의 바벨론 포로기간 전체를 포함한다. 16세 때 바벨론으로 잡혀가 왕궁 봉사를 위해 선택된 다니엘은 이방인과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을 선포하기 위해 하나님의 예언적 대변자가 되었다. 전체 12장중에서 9장들이 꿈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여기에는 나무, 짐승, 이미지들이 나타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환상들이 포함된다. 모험적인 개인의 경험들과 예언의 환상들을 통해 다니엘은 인간사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관여하심, 능력 등을 보여준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분명히 유대 귀족 출신이었으며 “흠이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며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만한 소년”들이었다(1:4). 다니엘은 바벨론 학문의 가장 좋은 교육을 3년 동안 받았다(1:5). 신분을 바꾸는 과정의 일환으로 바벨론 신들 중의 하나를 기리는 새로운 이름이 그에게 주어졌는데 그것은 “벨이여 그의 생명을 보호하소서.”라는 뜻을 가진 벨드사살이었다(1:7, 4:8, 렘51:44). 지혜와 하나님께서 주신 해몽 능력 덕분에 다니엘은 특별히 느부갓네살과 다리오 왕의 궁전에서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는 성경에 나타나는 위인 들 중에서 부정적인 내용이 전혀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 중 하나다. 그의 삶은 믿음, 기도, 용기, 초지일관, 타협하지 않는 태도 등의 특징을 가진다. 이 ‘크게 은총을 입은 자’(9:23, 10:11)는 주전 6세기 그의 동시대인인 에스겔에 의해서 의의 모범으로서 3차례나 언급되었다. 

    다니엘의 예언 사역은 그의 동족 유대인들에게 뿐만 아니라, 바벨론(느부갓네살과 벨사살)과 바사(다리오와 고레스) 궁전의 이방인들에게까지 해당되었다. 그가 예언 했듯이 바사 제국은 헬라 제국을 동쪽으로 멀리 인도까지 확장시킨 알렉산더 대왕(11:2~3) 때까지 지속되었다. 로마인들은 후에 헬라인들을 물리치고 중동 지역의 통치자가 되었다.  

   다니엘서는 이방인들의 통치 기간 중과 그 이후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전능하신 계획을 드러냄으로써 포로 된 유대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이방인들의 때는 바벨론 포로기부터 시작하며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의 세력에게 오랜 기간 동안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기간은 영구적이지 않을 것이며, 영원토록 지속될 메시야 왕국을 하나님께서 세우실 때가 올 것이다. 다니엘은 인간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 아시리이다”(4:25b). 역사의 흐름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의 백성을 보존하고 궁극적으로 회복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들은 장차 올 메시야처럼 확실했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해야 했다. 

   핵심 구절은 2:20~22, 2:44절이다. 핵심 장은 9장이다. 70이레에 대한 다니엘의 예언(9:24~27)은 다니엘 시대부터 지상 왕국의 설립에 이르는 메시야적 예언에 대한 체계적인 연대기를 제공한다. 69이레가 그리스도의 초림시에 성취되었음을 분명하다. 어떤 신학자들은 마지막 이레에 대한 예언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그 시기의 주요 사건들을 자신의 재림과 연관시켰기 때문이다(마24:6,15). 다른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이 말씀을 주후 70년, 로마인들에 의한 성전 파괴에 적용시키기도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의 왕국들을 쳐부술 위대한 돌이시며(2:34~35, 44), 옛적부터 계신 이로부터 통치 주권을 부여받으신 인자이며(7:13~14), 장차 오실 메시야이다. 다니엘이 본 환상(10:5~9)은 아마도 그리스도의 형상일 것이다(계1:12~16).  

   에스겔이 이스라엘 민족의 종교적인 회복을 강조했다면, 다니엘은 정치적인 회복에 치중하고 있다. 다니엘은 틀림없이 선지자였지만 예레미야나 에스겔처럼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대표하여 공적으로 선포하는 선지자의 직분을 가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의 책은 히브리 성경에서 예언서가 아니라, 세 번째 분류인 성문서에 놓여졌다. 본서가 묵시문학에 속하기 때문에 요한계시록과 많은 점에서 유사한데 특히 그의 이미지나 상징에 있어서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본서가 주후 1세기 이전이나 그 즈음에 성취되었다고 믿으며, 어떤 이들은 본서의 일부분이 아직도 성취되지 않았다고 믿는다. 이 두 번째 견해는 69이레의 사건들이 네 왕국들에서 문자적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에 70번째 이레의 사건들은 미래에 문자적으로 성취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440~446) 

   다니엘서를 진정으로 옳게 구분하려면 1:1~2:4a이 히브리어로, 2:4b~7:28이 아람어(수리아어, 갈대아어)로, 8:1~12:13이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같이 두 언어가 함께 사용된 것이 신비스러울지도 모르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의도하신 결과이며, 무엇인가를 의미하고 있다. 다니엘 선지자 당시 이방세계의 대표자들은 느부갓네살, 벨사살, 다리오, 고레스 등이었다. 이런 이방 경향의 단락(2:4b~7:28)에 적합한 언어는 당시의 외교, 상업 용어였던 아람어였다. 또한 다니엘서는 박해를 받고는 있으나, 하나님의 택한 거룩한 백성 히브리인들을 향해서는 희망과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이런 히브리 경향의 단락에서는 히브리어가 적합한 것이다. 이 말은 2~7장에서는 히브리인이 등장하지 않고 8~12장에서는 이방인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단지 기본 관점이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포로 기간동안 성전예배 대신에 회당예배가 일어났으며, 두 번째 언어인 아람어를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위클리프 주석 편찬실, p.140~142) 

   왕국에 대한 환상에 대한 해석은 바벨론(주전 606~538년), 메데 바사(주전 538~333년), 헬라(주전 333~63년), 그리고 로마(주전 63~주후)에 대한 예언으로 받을 수 있다.  

(이종윤, p.104) 

 

 

2. 나무 보기  

   히브리어로 기록된 서론격의 첫 장 다음에 다니엘은 이방인 세력의 미래 경로를 묘사하기 위해서 2~7장에서 아람어로 바꾸었다. 그후 8~12장에서 다니엘은 자신의 모국어로 바꾸어 이방인 통치 아래 놓인 유대민족의 미래를 개관했다. 세계 역사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제라는 주제가 이 책에서 분명히 드러나며 이것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미래의 교회를 위한 위로를 제공한다. 바벨론인들, 바사인들, 헬라인들, 그리고 로마인들은 흥망성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구속받은 백성들을 통해 영원한 하나님 자신의 왕국을 세우실 것이다.  

   다니엘의 개인적 내력(1장): 선지자의 배경과 사역을 위해 준비되는 과정을 설명하면서 도입부 역할을 하고 있다. 자신들이 유대인이라는 그들의 의식을 바꾸기 위해 이름과 식생활이 바뀌었지만 하나님께 끝까지 충성을 다한 다니엘의 결심은 보상을 받게 된다. 그와 그 친구들은 지혜와 지식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 

   이방인들을 위한 예언적 계획(2~7장): 다니엘만이 느부갓네살이 꾼 난해한 큰 신상의 꿈을 해몽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에게 능력을 더하셔서 장차 하나님께서 네 이방 제국들을 주권적으로 흥망 시킬 것을 예언하도록 하셨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이 풀무에 떨어졌지만 안전히 보전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다시 한번 잘 드러내준 사건이었다. 벨사살의 잔치는 바벨론 왕국의 최후를 장식했다. 다리오 왕 때 사자 굴에서 극적으로 구원되었다. 네 짐승에 대한 환상은 2장에 나타난 4중 구조의 신상을 보충하는데 이는 바벨론, 바사(페르시아), 헬라(그리스), 로마 제국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을 위한 예언적 계획(8~12장): 8장의 초점은 메데-바사와 헬라 제국 아래의 이스라엘의 상황을 보여주는 수양과 수염소의 환상으로 모아진다. 알렉산더 대왕은 큰 뿔이며(8:21),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작은 뿔이다(8:23). 백성들의 회개를 위한 다니엘의 기도 뒤에, 메시야의 속죄 죽음을 포함한 70이레의 계시를 받게 되었다(9장).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속죄와 구원을 위한 완전하신 계획표를 보여준다. 11장은 장차 임할 헬라 왕, 에굽의 톨레미와 수리아의 셀류시드 간의 전쟁, 그리고 안티오쿠스에 의한 핍박에 대해 연대순으로 말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환란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이며 부활할 것이다(12장).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446~452) 

 

『 소선지서 개론 』 

 

 

   12권의 책들은 주전 4세기 말엽부터 소선지서로 불려지는데, 덜 중요하거나 덜 영감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5권의 대선지서들과 비교할 때 그 길이가 짧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이전에 이 12권의 책들은 하나의 두루마리로 묶여져 집합적인 의미로 ‘12권’이라고 불려졌다. 그 모든 책들을 합친 길이는(전체 67장) 대략 이사야서의 길이와 일치한다. 영어 성경에 나타난 소선지서들의 연대기적인 배열을 굳이 논한다면 첫 번째 6권의 책들이 나중 6권의 책들보다 먼저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성경 본문의 순서 

연대기적인 순서 

대략적인 기록 시기 

1.호세아 

1.오바댜 

주전 840년 

2.요엘 

2.요엘 

주전 835년 

3.아모스 

3.요나 

주전 760년 

4.오바댜 

4.아모스 

주전 755년 

5.요나 

5.호세아 

주전 740년 

6.미가 

6.미가 

주전 730년 

7.나훔 

7.나훔 

주전 660년 

8.하박국 

8.스바냐 

주전 625년 

9.스바냐 

9.하박국 

주전 607년 

10.학개 

10.학개 

주전 520년 

11.스가랴 

11.스가랴 

주전 515년 

12.말라기 

12.말라기 

주전 430년 

 

 

 

   호세아로부터 시작해 말라기까지 소선지서는 앗수르와 바벨론, 페르시아 제국을 포함하는 약 400년간의 역사를 망라하고 있다. 이중 3권의 선지서들은 북방 왕국을 향한 책들이며(요나, 아모스, 호세아), 6권의 책들은 남방 왕국을 향한 예언들이다(오바댜, 요엘, 미가, 나훔, 스바냐, 하박국). 나머지 3권은 포로 귀환 이후의 선지서들이다(학개, 스가랴, 말라기). 비록 모든 소선지서 저자들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지만 그들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그들의 배경과 개인적인 성격 등은 다양하지만, 그들 모두에게서 네 가지의 기본적인 예언적 주제들을 발견할 수 있다(대선지서 개관을 보라).  

   호세아 

   호세아와 그의 음탕한 아내 고멜의 불행한 이야기는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과 이스라엘의 영적인 간음에 대한 좋은 예이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죄악을 드러내면서 이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대조시켰다. 이스라엘은 그 죄로 인해 심판을 받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 때문에 장차 회복될 것이다.  

   요엘 

   이 책은 최근에 유대 땅을 황폐화시킨 메뚜기 재앙을 회고하면서 이보다 더 공포스러울 주님의 날을 묘사했다. 그들의 땅은 메뚜기 재앙에 비교조차 되지 않는 흉악한 군사들에게 침략을 당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백성들로 하여금 다가올 재난을 피하도록 하기 위해서 회개할 것을 촉구하신다. 백성들이 회개하려 하지 않음으로 인해 심판은 결국 오게 될 것이지만, 그후에는 놀라운 축복이 뒤따를 것이다. 

   아모스 

   아모스가 백성들에게 다가올 운명을 경고했을 때는 북왕국의 전성기였다. 여덟 차례의 심판의 선포들을 통해 아모스는 이스라엘에 앞서 먼저 그 주변국들에게 대해 차례로 경고했다. 그후에 그는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열거하면서 3편의 설교를 선포했으며, 회개를 촉구했다. 백성들은 아모스의 경고를 무시했고, 그들에게 임박한 심판은 다섯 개의 일련의 환상들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아모스는 이 책을 미래의 소망에 대한 짧은 언급으로 끝을 맺는다. 

   오바댜 

   남왕국 출신의 이 무명 선지자는 그의 간략한 경고의 메시지를 유다와 남쪽으로 인접한 나라인 에돔에게 증거 했다. 에돔(에서의 후손)은 유다(야곱의 후손)를 형제로서 보호할 역할을 거부했다. 예루살렘이 침략을 받았을 때 고소해한 이유 때문에, 그들은 완전히 멸망당하는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요나 

   오직 한 줄의 예언 메시지를 가진 요나서는 모든 선지서들 중에서 가장 자서전적인 성격이 강한 책이다. 요나의 간결한 경고의 메시지에 대한 니느웨 백성의 회개의 반응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얻어 그 성의 보전을 가져왔다. 하지만 본서의 주된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완고한 선지자에게 가르쳐야만 했던, 긍휼에 관한 것이다. 요나는 자신의 민족 그 이상을 보는 것(편견을 뛰어넘는 것)과 모든 민족들의 창조자를 신뢰하는 법을 배웠다. 

   미가 

   미가서의 예언은 이스라엘과 유다 사회 각 계층, 즉 통치자들, 선지자들, 제사장들, 사사들, 장사꾼들, 그리고 지주들 내에 만연한 부패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로 시작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들은 미래의 메시야의 왕국에서 성취될 것이다, 심판이 지난 뒤에는 궁극적으로 용서와 회복이 따라 올 것인데 본서는 약속에 대한 강조로 끝맺고 있다. 

   나훔 

   니느웨가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지 125년이 지난 후에 나훔이 이 동일한 성의 임박한 몰락을 예언했다. 앗수르 수도에 살던 이 백성들은 우상 숭배와 강포로 되돌아갔고 또 북왕국 이스라엘을 파괴하고 점령하였다. 하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으로 인해 니느웨는 비록 무적 불패인 것처럼 보였지만 반드시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다. 

   하박국 

   유다 왕국의 거의 마지막 때에 하박국은 왜 그의 민족 사악함을 치리하지 않는지 질문한다. 하나님께서 심판의 막대기로 바벨론인들을 사용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더 사악한 민족을 통해 유다를 심판할 수 있는가?”라고 다시 물었다. 주님이 두 번째로 대답하셨을 때 선지자는 하나님의 능력과 뜻하심(목적)으로 인해서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였다.  

   스바냐 

   스바냐는 분명한 용어를 사용해, 무서운 심판과 뒤따르는 놀라운 축복의 날로서의 여호와의 날이라는 주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스바냐는 유다에 임박한 심판으로부터 시작해 그 범위를 이방인들까지 넓혀갔다. 유다는 하나님을 찾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축복(번영)을 회복하실 때는 남은 자들이 기뻐 뛸 것이다. 

   학개 

   바벨론 포로 유배에서 돌아와 유대인들은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했지만, 자신들의 집을 짓느라 이를 중단하고 말았다. 하나님을 첫 자리에 모시는데 실패한 까닭에 그들은 그 땅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했다. 학개는 성전이 영광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강조하면서 백성들에게 성전 재건을 마치도록 촉구하였다. 백성들의 부패를 꾸짖은 후 학개는 미래의 축복에 대한 약속으로 글을 맺었다. 

   스가랴 

   학개와 동시대인인 스가랴 역시 성전의 재건을 완수하도록 유대인들을 권면했다. 스가랴가 백성들에게 동기를 부여했던 방법은, 성전이 이스라엘의 영적 유산의 가장 중심이고 메시야의 도래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강조하는 것이었다. 스가랴의 일련의 환상들과 메시지들, 그리고 경고들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몇몇 가장 뚜렷한 메시야 예언들을 제공해 준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을 위한 자신의 계획이 다 성취되지 않았고 많은 부분이 아직도 성취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계시하셨다. 

   말라기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에는 백성들의 영적, 도덕적 상태가 냉담해져 있었다. 그들의 예배는 무의미해졌고 엉망이 되었으며,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들의 삶은 종교적, 사회적 타협으로 얼룩져갔다. ‘모든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가 초개같이’ 사라지며,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게 될” 심판의 무서운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455~460) 

   12소선지서의 중심사상은 메시야의 오심과 심판의 날을 선포하는 일이다. 대선지서와 같이 소선지서에도 범죄한 선민의 고난, 남은 자의 회복, 이방의 종국적 패망, 하나님의 정의가 드러나는 최후 심판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종윤, p.116)  

 

『 호  세  아 』 

 

 

1. 숲 보기  

   예레미야가 몰락하는 유다왕국을 향해 예언하도록 얼마 후 부름을 받은 것처럼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마지막 시기에 예언하도록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 호세아의 개인적인 비극은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비극에 대한 극명한 예화가 되었다. 이것은 한 선지자와 그의 부정한 아내(호세아와 고멜) 사이의, 그리고 여호와와 그의 불충실한 백성 사이의 일방적인 사랑과 신실함에 대한 이야기다. 고멜이 호세아의 아내가 된 것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대하여 아내가 되었다. 두 경우 모두에서 신부는 창부같이 행했고, 다른 연인을 따라갔다. 하지만 무조건인 사랑은 배반을 당하여도 계속해 도망간 아내를 찾게 했다. 호세아의 경우에 있어서 이것은 그의 아내를 노예시장에서 다시 돈 주고 사오는 것을 의미했고,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정결케 하는 심판과 뒤이어 다시 약속의 땅으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했다. 

   ‘구원’을 뜻하는 이름을 가진 호세아는13)북왕국 이스라엘(가장 큰 부족의 이름을 좇아 에브라임으로 불리기도 함)을 향하여 사역했다. 그는 유다의 왕들인 웃시야, 요담, 아하스, 그리고 히스기야 등이 치리하던 때에 활동했다. 호세아가 사역을 시작했을 때에는 여로보암 2세가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던 때였다. 이것을 볼 때 같은 북왕국을 향해 활동했던 선지자 아모스보다(편집자 주: 유다 출신으로 북왕국 활동함) 호세아가(편집자 주: 북왕국 출신으로 북왕국 활동함) 더 젊었음을 알 수 있다. 호세아는 또한 남왕국에 예언했던 선지자 이사야, 미가 등과 동시대인이었다. 호세아의 40여 년간의 예언활동은 여로보암 2세 이후에 지속되었고, 스가랴로부터 호세아 왕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여섯 왕들의 통치기간을 망라했다. 이스라엘은 여로보암 2세 아래서 일시적인 정치적, 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나라는 디글랏빌레셀 3세가 앗수르를 강화시킨 이후에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6왕의 통치기간은 짧았다. 그것은 4 왕이 살해당했고, 다섯 번째 왕은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갔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임박한 심판에 관한 호세아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죄악과 우상 숭배로 가득 차 영적으로 무감각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고멜이라는 음란한 여인과 결혼하도록 지시를 받은(1:2, 이것이 호세아와 결혼하기 전에 고멜이 창부였음을 반드시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호세아는 자신의 가정생활이 하나님 백성의 불충실을 정확하게 비극적으로 묘사하는 것임을 알았다. 반세기에 걸쳐 그의 예언 활동 기간 동안, 호세아는 다음의 세 가지 메시지를 반복해서 선포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의 죄악을 혐오하신다. 심판은 반드시 올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충성된 사랑은 확고하게 변함없을 것이다.  

   호세아 1~3장의 주제들은 본서의 나머지 장들에 걸쳐 반향 되고 있다. 고멜의 간음(1장)은 이스라엘의 죄를 묘사해주며(4~7장), 고멜의 타락(2장)은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8~10장)에 대응된다. 그리고 호세아가 고멜을 되사온 것은(3장) 이스라엘의 회복(11~14장)을 그려주고 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죄악들에 관련하여 약 150여 개나 되는 문장들을 말했는데, 우상 숭배를 다루고 있는 것이 절반이 넘는다. 하나님의 공의라는 주제는 이스라엘의 불의에 대조되었다. 이스라엘에는 한 사람의 선한 왕도 없었고, 심판이 너무도 오래 지체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주제는 이스라엘의 완악함과 헛된 의식에 대조되어 나타난다. 하나님의 충성된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다함이 없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네가 불의함을 인하여 엎드러졌느니라.”(14:1)고 호소하셨지만 그들은 돌아오지 않으려 한다. 

   핵심 구절은 4:1, 4:6, 11:7~9절이다. 핵심 장은 4장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진리의 지식을 떠나 그들의 이방 국가들이 행하는 패역한 길을 따라갔다. 마태복음 2장 15절은 호세아서의 11장 1절을 애굽에서의 그리스도에게 적용했다. “이스라엘의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었거늘.” 마태는 이 구절의 후반부를 인용하면서 이스라엘 국가의 출발점이 되는 출애굽사건이, 어릴 때 역시 애굽으로부터 불러냄을 받게 될 이스라엘의 메시야에 대한 한 예언 형태임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곤경에 동일시하시는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 사역은 호세아가 고멜을 노예시장에서 되사오는 행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호세아서는 12편의 소선지서들 중, 아마도 분량 때문에 첫 번째 위치를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신약성경은 본서를 인용, 암시하고 있는데, 호1:10=(롬9:25~27, 고후6:18), 호2:23=(롬9:25~26, 벧전 2:10), 호6:6=(마9:13, 12:7), 호10:8=(눅23:30, 계6:16), 호11:1=(마2:14~15), 호13:14=(고전15:55), 호14:2=(히13:15) 등이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462~467) 

   호세아는 상한 심령으로 그들의 임박한 포로 생활을 예언하였다(3:4). 그러면서도 호세아는 징계 받은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게 될 때, 포로생활에서 다시금 본토로 귀환하게 될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3:5). 사마리아의 함락이 호세아에 의해 이미 성취된 사실로 언급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기원전 722년 이전에 그의 예언사역의 대부분을 보냈을 것으로 보인다. 그가 히스기야 시대까지 살아서 예언을 했다는 사실은 1:1에 의해 확증되고 있다. 기원전 732년에 다메섹이 앗수르에 굴복하였으며, 그후 10년이 지나 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가 함락되고, 그 백성들이 강제 이주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예루살렘의 예레미야가 유다 역사의 마지막 순간에 예언활동을 한 것처럼, 아모스와 호세아도 북 왕국 최후의 순간에 예언 활동을 한 것이다.  

(위클리프 주석 편찬실, p.145~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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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서는 이스라엘 왕국의 몰락을 막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마지막 노력을 보여준다. 호세아의 개인적인 비극은 이스라엘의 민족적 비극에 대한 극명한 예화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 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일방적인 사랑과 신실하심에 대한 이야기다. 고멜이 호세아와 결혼한 것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정혼했다. 이 관계들은 점점 악화되어갔다. 고멜은 다른 남자를 좇아갔고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을 좇아갔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간음은 고멜의 육체적인 간음으로 묘사되었다. 

   음란한 아내와 신실한 남편(1~3장): 호세아는 고멜이라는 여인과 결혼했는데 그녀는 3명의 자녀들을 낳았고 이스라엘에 대한 표적으로서 적합한 이름을 하나님께 부여받았다. 이스르엘, 로루하마, 그리고 로암미는 각각 “하나님께서 흩으시다” “긍휼을 받지 못하다” 그리고 “내 백성이 아니다”라는 뜻을 가진다. 이와 유사하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그 죄로 인해 심판하며 흩으실 것이다. 고멜은 호세아를 버리고 다른 연인들을 따라갔다. 그녀가 범한 죄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호세아는 그녀를 노예시장으로부터 되사와 회복시켰다. 

   음란한 이스라엘과 신실하신 하나님(4~14장): 자신의 쓰라린 경험으로 인해 호세아는 자신의 백성들이 저지른 죄악성에 대한 하나님의 슬픔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고멜을 향한 그의 신실한 사랑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죄의 수렁에 빠져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마지막 호소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굳어져버렸다.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고치며 구속하기를 원하셨지만(7:1, 13) 그들은 교만과 우상 숭배에 빠져 반역했다.  

   9~10장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판의 판결을 기록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파멸을 야기 시켰다. “저희는 바람을 심고”(4~7장) “광풍을 거두었다”(8~10장). 이스라엘은 회개하기를 싫어했고 하나님의 심판은 더 이상 지연될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고(4~7장), 공의로우셨지만(8~10장), 또한 사랑이 많고 은혜로우신 분이시다(11~14장). 하나님께서는 징계하셔야 했지만, 하나님 자신의 끝없는 사랑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방자한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실 것이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너를 놓겠느냐....... 내가 저희의 패역을 고치고 즐거이 저희를 사랑하리니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났음이니라”(11:8, 14:4)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468~470) 

 

『 요     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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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엘은 유다에 있었던 최근의 재앙을 사용하여 그의 독자들에게 예언적 교훈을 가르쳤다. 온 땅을 뒤덮은 메뚜기 재앙은 모든 초목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포도나무 가지는 깨끗하게 벗겨졌고, 곡식밭은 황무해졌으며, 과목들은 시들고 말라버렸다. 그 황폐의 정도가 너무도 심했기 때문에, 심지어 하나님께 드릴 소제조차 불가능했다. 요엘은 메뚜기 재앙을 그의 설교의 출발점으로 사용했다. 메뚜기 재앙이 혹독했지만 장차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내리실 것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북방으로부터 온 어떤 군대가 내려와 그 나라를 공격할 것이며 메뚜기가 남긴 황폐함보다 더 심하게 그 땅을 황폐시킬 것이다. 요엘의 독자들에게 유일한 소망이란, 그 무서운 날이 도래하기 전에 마음을 찢고 회개하는 일 뿐이었다.  

   요아스 왕 치리기간 동안 하나님의 대변자로 활동했던 요엘은 이 메뚜기 재앙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모든 대적들을 멸하실 것이지만 그분께 충성되어 순종하는 자들에게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을 주실 것이다. ‘요엘’은 “야훼는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을 가진다. 이 이름은 역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전능하신 일들을 강조하는 본서의 주제와 잘 들어맞는다. 요엘은 회개의 메시지를 간결하면서도 타협함 없이 선포한 설교자였다. 

   요엘서의 중심주제는 주의 날에 대한 회상과 예상이다. 최근에 유다에서 발생한 흉측한 메뚜기 재앙은 하나님께서 장차 공의를 확립시키기 위해 인간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실 심판의 날을 잘 묘사해준다. 그날은 이스라엘(2:1~11)과 열국들(3:1~17)에 대해 유례없는 심판의 날이 될 것이지만, 주님을 의지하는 모든 자들에 대한 놀라운 축복과 구원이 그 절정을 이룰 것이다(2:18~32, 3:18~21). 요엘서는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하나님께로 돌아옴으로 징계 대신 하나님의 축복을 경고하기 위해 기록되었다(2:12~17). 그들이 만일 하나님의 자비로운 회개에의 요청을 계속 거부한다면 심판은 불가피할 것이다. 요엘은 자연과 열방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을 강조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연 현상을 사용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이끄시는가를 보여주었다.  

   핵심 구절은 2:11, 28~29절이다. 핵심 장은 2장이다. 선지자는 유다의 회개를 촉구했고 만약 그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돌이킨다면 유다를 향해 계획하셨던 심판으로부터 하나님께서 돌이키실 것을 약속했다(2:13~14). 하나님의 계획이 이처럼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는 계속해서 하나님께 반역했고, 이에 심판이 뒤따랐다. 하지만 그 심판 가운데 나중 축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고, 그 약속은 일차적으로 오순절 때 성취되었으며(행2:16 이후), 궁극적으로는 주의 날의 절정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요16:7~15, 행1:8). 이 약속이 오순절 날 성취되었을 때, 베드로는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라고 말했다(욜2:28~32, 행2:16~21). 요엘은 또한 그리스도를 모든 민족을 여호사밧(“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 3:2,12) 골짜기에서 심판하실 분으로 묘사했다.  

   비록 주의 날을 처음으로 언급한 선지자는 오바댜였지만(옵15장), 이 중요한 성경적 주제를 발전시킨 사람은 요엘이 처음이었다. 주의 날을 언급한 다른 구절도 많다(사2:12, 17~20, 3:7~18, 4:1~2, 13:6~9, 렘46:10, 겔13:5, 30:3, 암5:18, 습1:7,14, 말4:5, 고전5:5, 살전5:2, 살후2:2, 벧후3:10).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주의 날은 분명히 미래의 사건이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2장16~21절에서 오순절 날 그의 설교 중에 요엘서(2:28~32)를 인용했는데, 그는 32절 중간에서 인용을 멈추었다. 감람산 강론(마24:29)에서 예수님께서는 요엘서 2장10절, 3절, 3장 15절 등에서 언급된 사건들을 그의 재림의 표적과 연관지으셨다. 사도 바울은 요엘 2장 32절을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주어지는 구원으로 적용했다(롬10:12~13).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472~478) 

   “여호와의 날”이 올 것이라는 주제가 요엘서의 중심 사상이다.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그의 적들을 멸하시고, 그의 친구들을 높이실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이다. 이 날이 오면 땅이 크게 진동할 것이며, 자연계에 이상한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2:30,31). 그 날이 올 때 사람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런지는, 각인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심정과 삶의 자세를 유지하면서 살아왔는가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 날은 죄인들에게는 공포의 날이 될 것이나(1:15,2:11), 성도들에게는 축복의 날이 될 것이다(2:12~14, 19~29). 결국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나, 여호와의 백성들을 학대하던 적들은 진멸될 것이다. 

                                     (위클리프 주석 편찬실,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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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엘서는 분량이 짧지만 ‘다가오는 주의 날’이라는 중요한 주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그날은 하나님께 반역한 백성들과 나라들에 대한 무서운 심판의 날이다. 그러나 그날은 또한 하나님을 신뢰한 자들 위에 장차 축복이 주어지는 날이기도 하다. 재앙이라는 주제는 본서 전체를 통해 나타나지만(메뚜기 재앙, 기근, 화염, 적군의 침략, 천상적인 현상 등), 소망의 약속들 또한 임박한 심판의 선포들 중간 여기저기에 나타난다. 

   주의 날을 회상함(1:1~20): 요엘은 그 땅을 황폐시킨 최근의 메뚜기 재앙을 설명하면서 요엘서를 시작한다. 하늘을 새까맣게 덮은 이 곤충들은 포도나무와 과실나무들을 벗겨버렸고, 곡식 추수를 망쳐버렸다. 경제는 가뭄으로 인해 극심한 정체 상태에 머물렀고, 백성들은 절박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주의 날을 예상함(2:1~3:21): 요엘은 이 자연재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장차 임할 더 극심한 심판을 잘 묘사했다. 그 땅은 떼로 몰려오는 군대의 침략을 받을 것인데, 그 황폐함은 끔찍할 것이다(2:11). 그렇다 할지라도 백성들이 이 재앙으로부터 돌이키기에 너무 늦은 것은 아니었다. 회개하도록 선포되었다(2:12~17). 하지만 하나님의 관대한 호의조차도 거부되고 말았다. 궁극적으로 팟종이, 메뚜기, 늣, 황충(1:4, 2:25)들이 더 흉악한 모양으로 다시 올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심판 이후에 물질적으로(2:18~27), 영적(2:28~32) 축복이 뒤따를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런 놀라운 약속들 뒤에는 마지막 때에 판결의 골짜기에서 있을 모든 나라들을 향한 심판(3:14)이 장엄하게 묘사되었다. 각 나라들은 자신에게 반역한 자들을 심판하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변론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 한 분만이 오로지 역사의 흐름을 통제하실 수 있다. “그런즉 너희가 내 성산 시온에 거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알 것이라 예루살렘이 거룩하리니 다시는 이방 사람이 그 가운데로 통행하지 못하리로다.”(3:17) 요엘은 충성스런 유다의 남은 자들을 위한 왕국의 축복들로 요엘서를 끝맺고 있다. “유다는 영원히 있겠고 예루살렘은 대대로 있으리라.”(3:20)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478~480) 

 

『 아  모  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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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모스(짐을 짊어진 사람)는 이스라엘이 국가적인 낙관주의에 빠져 있던 시기에 예언했다. 아모스는 반역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심판을 선포해야 하는 부담을 짊어짐으로써 자기 이름의 뜻에 합한 삶을 살았다. 그는 이스라엘의 거주지이며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던 벧엘에서 자신의 메시지를 증거 했다. 이스라엘은 사업들이 번창하고 영토가 확장되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탐욕과 불의가 창궐했고 진정한 예배는 위선적인 종교 행위들로 대치되었다. 이것은 거짓된 안전감을 주었고, 하나님의 징계하시는 손길에 대해 점점 더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기근, 가뭄, 재앙, 죽음, 파괴 등 그 어떤 것도 이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로 무릎을 꿇게 하지 못했다. 전직 농부였던 선지자 아모스는 단호하게 죄를 꾸짖었고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생생하게 그려줌으로써 백성들을 회개케 하도록 촉구하고자 했다. 이 나라는 썩은 과일이 담긴 바구니처럼, 그 위선과 영적 무관심으로 인해 심판받기에 가장 적합했다.  

   아모스는 기원전 722년 앗수르의 침략을 예견했고(7:11), 본서를 기록할 당시에 여로보암 2세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천문학적인 계산에 따르면 기원전 763년 6월 15일에 이스라엘에서 일식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아마도 아모스의 메시지를 들었던 사람들의 마음에 신선한 충격이 되었을 것이다(8:9). 아모스는 오바댜, 요엘, 요나의 시기 이후, 그리고 호세아, 미가, 이사야의 시기 이전에 사역했다. 북쪽에서는 유능한 여로보암 2세가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었다. 경제적, 군사적인 상황은 거의 이상적인 수준이었지만, 이러한 번영은 단지 백성들의 물질주의, 부도덕, 그리고 불의만을 증가시켰다(2:6~8,3:10,4:1, 5:10~12,8:4~6). 이 시기에 앗수르, 바벨론, 수리아, 그리고 애굽은 상대적으로 약세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모스가 예언한 재앙들이 다가오리라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하지만 30년이 채 지나기 전에 이스라엘의 멸망은 찾아왔다. 

   아모스서의 기본적인 주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의 언약 백성들의 죄악으로 인해 이스라엘에 임하게 될 심판이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롭고 인내가 많으신 분이지만, 그분의 정의와 공의는 죄가 심판받지 않고 묵인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헛된 의식주의(ritualism), 가난한 자에 대한 착취, 우상 숭배, 사기, 자기 의, 교만, 탐욕, 물질주의, 무감각 등 이스라엘의 죄악은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이 쌓여갔다. 하나님께서는 아모스를 개혁자로 보내셔서 회개하라고 경고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초청을 거절했고, 심판의 계획은 변경될 수 없었다. 

   핵심 구절은 3:1~2, 8:11~12절이다. 핵심 장은 9장이다. 아모서의 준엄한 심판들 가운데에는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위대한 예언들이 위치하고 있다. 메시야의 도래를 통해 아브라함 언약, 다윗 언약, 그리고 팔레스타인 언약들이 그 실현의 절정에 초점이 집중 되면서 겨우 다섯 구절들의 범위 안에서 이스라엘의 미래가 분명하게 드러났다.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분명한 예견은 심판할 모든 권세를 가지셨지만(1:1~9:10), 자신의 백성들을 회복시키실 것이다(9:11~15). 

   소망과 축복의 말씀을 비교해 볼 때 심판이 차지하고 있는 비율은 아모스가 다른 예언서들보다 훨씬 높다. 오직 마지막 다섯 구절만 위로와 약속의 말씀을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아모스는 성경에서 가장 단호하고 직설적인 선지자들 중의 한 명이다. 아모스는 모세오경을 상세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다음의 예들을 비교해보라. 암2:7=신23:17~18, 암2:8=출22:26, 암2:12=민6:1~21, 암4:4=신14:28, 26:12, 암4:5=레위기2:11, 7:13. 또 아모서는 신약성경에서 인용되고 있다. 암4:11=롬9:29, 암5:25~27=행7:42~43, 암8:9=마24:29, 암9:11~12=행15:16~18.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482~487) 

 

   아모스의 글을 보면, 그가 결코 가르침을 받지 않은 일개 농부가 아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오히려 아모스는 역사에 정통해 있었으며, 그 당시의 문제를 깊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한 눈에 알 수가 있다. 수사법과 상징이 풍부한 그의 언어는 구약에서 가장 뛰어난 문체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아모스의 초두에 나오는 대 선언(1:2)이 아모스 전체의 메시지를 잘 대변하고 있다. 사자의 포효와도 같은 여호와의 음성이 시온산으로부터 심판 가운데 들리게 될 것이다. 아모스는 하나님의 백성이 살기 위해서는 마땅히 여호와를 찾고 회개해야 하며, 공의를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외친다(5:14,15). 결국 아모스의 메시지는 크게 보면 “정의 실현의 촉구”라고 할 수 있다. 

(위클리프 주석 편찬실, p.15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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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의 인디안 여름(역자주 : 늦가을의 봄날 같은 화창한 날씨라는 뜻으로 좋아 보이지만 곧 겨울이 옴) 기간동안의 선지자는 가슴 아프지만 분명한 메시지를 증거 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예비하라”(4:12).  

   여덟 가지 예언(1:1~2:16): 1~2장에서 나타난 여덟 가지 예언들은 각각 “~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로 시작하고 있다. 여덟 나라들은 각각 죄악으로 가득 차 있다. 아모스는 이스라엘을 둘러싼 나라들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을 향하여 점차적으로 재앙의 메시지를 증거 했다. 하나님께서는 일곱 차례나 심판의 한 상징으로서 “내가 불을 보내리라”고 선포하셨다. 

   세 가지 설교(3:1~6:14): 각 설교는 “이 말씀을 들으라.”라는 문구로 시작하고 있다. 첫 번째 설교(3장)는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한 심판의 일반적인 선포이며, 두 번째 설교(4장)는 백성들의 잘못들을 드러내 준다. 다섯 번이나 하나님께서는 “그러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세 번째 설교(5~6장)는 이스라엘 민족의 죄악들이 열거되고 있으며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정직과 정의, 긍휼을 싫어했고, 여호와께 돌아오기를 거절한 까닭에 포로로 잡혀가는 결과를 당하게 되었다. 그들이 비록 사치에 빠져 거만하게 지냈지만, 그들의 번영은 갑작스런 종국을 보게 될 것이다. 

   다섯 가지 환상(7:1~9:10): 처음 두 메뚜기와 불의 심판은 아모스의 중보기도 덕분에 발생하지 않았다. 세 번째 다림줄 환상은 유일하게 그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7:10~17). 벧엘의 제사장이었던 아마샤는 아모스가 유다로 되돌아가기를 원했다. 네 번째 환상은 썩어가는 실과 광주리이다. 다섯 번째는 피할 수 없는 심판에 대해 냉혹하게 묘사하고 있다.   

   다섯 가지 약속(9:11~15): 아모스는 경고, 설교, 환상 등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주제를 강력하게 증거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저주가 아니라 위로의 말로 끝맺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계보를 다시 세우며 그 땅을 새롭게 하고 그 백성들을 회복시킬 것을 약속하셨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487~491) 

 

『 오  바  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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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둥이 형제(에서와 야곱, 창27장)간의 다툼과 불화는 그들의 후대 백성들(에돔인과 이스라엘인)간의 민족적인 적대감으로 발전되었다. 처음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랑하던 시기(민20:14~21)와 그후 침략을 당하여 고통 받던 시기에 그들을 돕기를 거절한 완고함 때문에 에돔은 혹독한 저주를 받는다. 이스라엘의 적군들이 예루살렘의 문들을 부수려고 강타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애돔인들은 적군들을 돕는 자들이 되었다. 자신들의 형제국에 대한 보호자로서의 기능을 감당하지 않은 까닭에, 에돔인들은 언젠가 멸망을 당하고 말 것이다. 그 배경을 알 수 없는 선지자 오바댜(야훼를 섬기는 자, 야웨의 종)는 에돔이 어떻게 ‘영원히 멸절될’(10절)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변호되고 , 하나님께서 어떻게 모든 세상의 심판주로 인식될 것인지 묘사하고 있다. 

   오바댜서는 예언서들 중에 연대를 추정하기가 가장 어려운 책이다. 오바댜는 아무런 왕의 이름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10~14절은 본서의 연대와 배경을 파악하는데 유일한 역사적 자료를 제공한다. 학자들은 어떤 침략을 받았는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나 다음의 설이 타당해 보인다. 여호람왕의 치세(기원전 848-841) 동안에 블레셋과 아라비아인들이 유다를 침략하여 왕궁을 약탈했다(대상21:16~17). 에돔은 여호람 왕이 치리하는 동안 반란을 일으켜 적대자가 되었다(왕하8:20~22, 대하21:8~20). 그러므로 오바댜가 기록한 예루살렘의 약탈은 기원전 848년부터 841년 사이에 블레셋인들에 의한 것으로 보여 진다. 그렇다면 오바댜는 엘리사와 동시대인이 되며 요엘보다도 몇 년 더 앞서므로 가장 초기의 기록 선지자가 된다. 

   에돔의 역사는 에서로부터 시작했는데, 에돔은 세일의 산악지역으로 이주했고 그 원주민이었던 호리 족속을 정복했다. 에돔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가려고 자신들의 땅을 통과하는 것을 거절했다. 에돔인들은 사울을 대적했는데 후에 다윗과 솔로몬 왕 때에 정복되었다. 그들은 여호사밧 왕과 전쟁을 벌였고 여호람 왕에 대해 반역했다. 그들은 재차 유다의 아마샤 왕에 의해 정복을 당했지만, 아하스 왕 때 다시 자유를 되찾았다. 에돔은 후에 앗수르와 바벨론의 지배를 받았고 기원전 5세기 경에 나바티안 사람들에 의해 그들의 영토를 떠나야 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 남부지방으로 이주했고 이두매인들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그들은 다시는 역사 속에서 나타나지 않았다. 오바댜가 예언한 것과 같이 그들은 ‘영원히 멸절’되었고(10절), ‘에서 족속에서 남은 자가 없을’것이다(18절). 

   오바댜의 첫 번째 주제는 에돔의 교만과 유다를 향한 포학으로 인해 에돔에게 임할 심판의 선포다(3,3,5,6,9,10,15). 심지어 주로 이스라엘을 다루고 있는 마지막 구절조차도 에서의 멸망을 언급하고 있다(17~21절). 다른 성경에서도 에돔에 대한 심판에 침묵하고 있지 않다(사21장, 34장, 렘9장, 25장, 27장, 49장, 겔25장, 35~36장, 욜3장, 암1장, 말1장). 오바댜의 두 번째 주제는 이스라엘의 미래적 회복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될 것이다. 핵심 구절은 10, 21절이다. 오바댜서에서 그리스도는 열방들의 심판자로서(15~16), 이스라엘의 구세주로서(17~20), 그리고 왕국의 소유자로서(21) 나타난다. 여러 증거를 볼 때 요엘, 아모스, 그리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오바댜서를 인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옵1~4=렘49:14~16, 옵5~6=렘49:9~10, 옵8=렘49:7, 옵9=렘49:22, 옵10=욜3:19, 옵11=욜3:3, 옵15=욜1:15, 옵16=렘49:12, 옵17=욜3:17, 옵18=암1:12, 옵19=암9:12 등이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494~499) 

 

   구약에서 가장 짧은 책인 오바댜서의 첫 아홉 구절들은 비록 배열순서가 다르긴 해도 예레미야 49장의 부분들과 밀접한 병행구를 이루고 있다....... 오바댜서의 예언을 보면 에돔이 이스라엘의 적들과 동맹을 맺고 예루살렘을 약탈할 때의 상황이 언급되어있다(10~14). 예루살렘은 9세기 중반, 즉 여호람시대에 블레셋인과 아라비아인들에게 약탈을 당했다. 또한 에돔이 하나 이상의 국가와 동맹을 맺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7,11). 예루살렘 함락 때에 에돔이 바벨론인들 및 그 밖의 민족과 동맹을 맺은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위클리프 주석 편찬실,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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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돔(에서)은 유다(야곱)에 대해 형제처럼 행동하기를 거부했고, 야곱의 후손들을 향한 극한 적대심을 천년이 넘도록 가져왔다. 이같은 민족차원의 경쟁관계는 이스라엘이 외세에 의해 패배당하고 예루살렘이 약탈당하는 것을 에돔인들이 관망하면서 더욱 악화되었다. 에돔은 자신의 형제국에 대해 보호자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그 약탈에 동참했다. 에돔을 향해서는 회개의 촉구나, 위로, 소망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하나님께서는 에돔을 향해 철저한 파멸을 가져오실 것이며, 그들에게는 남은 자들도 없을 것이다. “시(詩)적인 정의(역자주 : 아주 이상적인 모습으로 악은 징벌 받고 의는 보상받는 것을 일컫는 문학 용어)를 부르짖는 선지자” 오바댜는 세상을 심판하는 분이 어떻게 에돔의 교만을 파하시며 야곱의 집을 회복시키실 것인지를 묘사했다. 

   에돔을 향한 심판(1~18절): 에돔에게 임할 파멸이 조건적이 아닌 확실한 것임을 보여준다. 에돔은 사해 남부의 산악지대인 세일산의 유리한 지형적 위치에 힘입어 교만해졌다(3). 수도 셀라(또는 페트라)는 적군의 침략을 막을 수 있는 좁은 협곡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확실한 하나님의 심판을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0~14절은 예루살렘의 약탈을 방관하는 에돔의 막중한 죄악을 묘사하고 있다. 유다의 협조자가 되어야 할 때에, 오히려 그들은 유다를 대항하는 적대자가 되었던 것이다. 에돔은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이 “불이 되고” 에서 족속은 “초개가 될”(18절) 임박한 주의 날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회복(19~21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들이 자신들의 땅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에돔과 블레셋까지도 차지할 것이라는 소망을 주고 있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499~501) 

 

『 요     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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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느웨는 북동쪽에 위치했고, 다시스는 서쪽에 위치한 도시였다. 하나님께서 요나(비둘기)를 불러 사악한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를 전파하게 하셨을 때, 그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실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 사명을 감당하기를 거절하고 그 대신 다시스로 향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원하는 바를 좌절시키시고(그를 배에서 바다로 던지심으로써), 또한 그를 보호하심으로써(물에서 물고기 속으로 들어가게 하심으로써)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니느웨는 주님의 말씀을 경청해야 했고, 이를 위해 요나는 가야했다. 하지만 그의 설교가 성공적인 적이었던 것에 반해, 그 선지자는 이에 화를 내고 낙담하는데, 그는 먼저 죄악 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을 배워야 했다. 

   열왕기하 14장 25절에서 그가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가 치리할 때의 한 선지자였다는 언급이 없다면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아밋대의 아들’(1:1)뿐이다. 요나는 엘리사 시대 이후와 아모스, 호세아 시대 직전에 활동했다. 여로보암 2세 때 이스라엘은 부흥과 번영의 기간을 누리고 있었다. 이때는 아마도 민족주의의 열기가 뜨거웠을 것이다. 앗수르의 잔혹성이 극에 달했던 시기다. 니느웨 백성의 회개는 아마도 아수르단 3세(기원전 773~755년)의 치리 기간에 일어났을 것이다. 두 차례의 재난(기원 765, 759년)과 일식 현상(기원전 763년)은 니느웨 백성들로 하여금 요나의 심판의 메시지를 경청하도록 했을 것이다. 

   요나는 자연계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1~2, 4장)과 인간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3~4장)를 보여준다. 선지자는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2:9) 사실과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초청은 그에게로 회개하고 돌이키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 유대적 국수주의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로 하여금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하나님께서 그의 계획에 이방인들을 포함시켰다는 신학은 다른 성경에서도 발견된다. 창9:27, 12:3, 레위기19:33~34, 삼상2:10, 사2:2, 욜2:28~32 등이 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 사람들에게 어떤 긍휼도 베푸시기를 원치 않았지만 후에 자신의 입장이 얼마나 이기적이며 무자비한 것이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핵심 구절은 2:8~9절, 4:2절이다. 핵심 장은 3장이다. 온 니느웨 성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며” 하나님께 부르짖는, 아마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각성을 기록하고 있다. 요나는 예수님께서 자신과 비교하신 유일한 선지자다(마12:39~41).  

   이 자서전적인 책의 48구절들은 뚜렷한 임물 설정과 인간 감정에 대한 예리한 묘사를 제공해준다. 요나는 이방인들에게 직접 보냄을 받은 유일한 선지자였으며, 자신의 메시지를 감추려고 한 유일한 선지자였다. 요나는 다음과 같은 원칙들을 배웠다. (1)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하나님께서 사람의 관심을 사로잡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에는 제한이 없다. (3)사람이 실패했어도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4)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은 성도의 삶에 혼란을 야기 시킨다. (5)애국심이 결코 성도와 하나님의 계획 사이에 방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구약 성경의 다른 어떤 책들보다 요나서는 모든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보편적인 관심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자신들의 선지자들에게 보인 반응보다, 니느웨가 요나의 설교에 더욱 잘 응답했다는 사실은 특기할만하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504~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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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서에서 언급된 모든 사람들과 사물들 - 폭풍, 제비뽑기, 사공들, 물고기, 니느웨 사람들, 식물, 벌레, 동풍 등 - 가운데에서 오직 요나만이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서 실패했다. 이 모든 것들은 요나에게 긍휼과 순종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요나에게 주어진 첫 번째 사명 위임(1~2장): 1장은 요나의 소명과 불순종, 그리고 요나를 향한 심판을 기록하고 있다. 요나는 하나님께서 극악무도한 앗수르인들을 살려두시는 것을 보기를 원치 않았다. 그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것은 마치 적군을 돕는 것과도 같았다. 북동쪽으로 800㎞ 떨어진 니느웨로 가는 대신 서쪽으로 3200㎞ 떨어진 다시스(스페인)로 가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시는 결과를 성취하시기 위해 기발한 대응책들을 사용하셨다. 물에 빠진 자신을 물고기를 통해 극적으로 삼키게 하신 절묘한 사건은 요나에게 모든 환경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분명하게 깨닫게 했다.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시편들을 암시해주는 선언적인 찬양시를 하나님께 드렸다(시3:8, 31:22, 42:7, 69:1). 그의 ‘기도의 골방’에서 요나는 물에서 구원받은 것에 대해 감사드렸다. 그가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2:9)라고 시인했을 때, 마침내 그는 하나님을 순종하고 그분의 것이 되어 사용되기를 자원했다.   

   요나에게 주어진 두 번째 사명 위임(3~4장): 요나는 니느웨로 가라는 두 번째 소명에 순종했다. 그가 성을 지나면서 선포한 한 문장의 설교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그것은 역사상 가장 좋은 반응을 가져온 복음 증거였다. 임박한 심판에 대한 요나의 선포가 있은 후에 금식하고 회개하라는 그 나라의 왕의 조서가 내려졌다.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3:10)하셨다. 그러나 요나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멸하지 않으실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메시지가 가져온 좋은 결과에 만족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넝쿨 하나와 벌레 한 마리, 그리고 동풍을 사용하셔서 요나에게 긍휼에 대해 교훈하셨다. 요나의 감정은 들끓는 분노(4:1)에서 무력감(4:3)으로 그리고는 큰 기쁨(4:6)에 마침내 절망감(자포자기)으로(4:8) 뒤바뀌었다. 이 사건을 통해 요나는 자신이 수십만 명의 사람들(어린이가 12만 명이었다면 전체 인구수는 60만 정도 되었을 것이다)보다도 하나의 넝쿨에 더 관심을 가졌음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요나의 이해 부족 때문에 요나의 회개는 니느웨의 회개보다 더 큰 문제를 드러냈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510~512) 

 

『 미     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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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가(하나님 같은 자가 누구인가?)는 유다에 사회적 불의가 팽배했던 기간 동안 예언했다. 7장18절에서 미가는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라는 표현을 통해 자기 자신의 이름을 암시했다. 거짓 선지자들은 정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부귀를 위해 설교했다. 왕들은 잔혹함, 폭력, 그리고 부패에 물들어 있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탐욕을 위해 봉사했다. 지주들은 가난하고 소외당한 과부들로부터 착취했고 재판관들은 뇌물에 눈이 어두웠다. 장사꾼들은 저울과 추를 속여 사용했다. 사회 각 분야마다 죄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필연적으로 선포되어져야 했다. 미가는 민족의 죄악들, 궁극적으로 파멸과 포로 생활을 초래할 죄악들을 열거했다. 하지만 이 암울한 메시지 속에는 희망이 담겨 있었다. 한 전능한 구원자가 장차 나타날 것이고 정의가 땅에 편만해질 것이다. 비록 지금은 정의가 발에 짓밟히고 있지만, 언젠가는 승리할 것이다. 

   미가의 가족과 직업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아모스처럼 시골출신이었다. 자기의 시골 고향에서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미가는 친숙한 환경을 떠나 예루살렘의 왕들과 백성들에게 준엄한 심판의 메시지를 증거 했다. 가난한 자들이 부자와 권력자들에게 착취당하는 것에 분노를 느낀 그 선지자는 사적인 이득을 위해 자신이 가진 사회적, 정치적 세력을 남용하는 모든 자에게 책망을 돌렸다. 미가서의 1/3정도가 동족의 죄악을 폭로하는 내용이다. 다른 1/3은 하나님께 집행하실 심판을 묘사하며, 마지막 1/3은 징계가 끝난 후에 있을 위로의 소망을 기록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그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요구가 분명하게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6:8)이었다.   

   미가는 유다 왕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의 시대에 예언했다(1:1).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에게 선포했으며 사마리아의 멸망에 대해서도 예언했다. 그러므로 그의 사역이 기원전 722년 앗수르의 포로가 되기 이전에 이루어졌다. 북왕국 호세아와 예루살렘 왕궁의 이사야와 동시대인이었다. 유다 왕 웃시야의 아들인 요담이 왕위에 올라 우상을 숭배하는 산당들을 제거하는데 실패했지만 선한 왕이었다. 사악한 왕 아하스 때 유다는 앗수르(앗시리아)와 아람(수리아)의 세력의 위협을 받았다.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인들에 맞섰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앗수르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그는 유다 백성들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돌이키도록 인도한 아주 선한 왕이었다. 미가의 사역 기간동안, 이스라엘 왕국은 몰락하기까지 계속 내외적으로 붕괴되고 있었다. 디글랏빌레셀 3세(기원전 745~727년), 살만에셀 5세(기원전 727~722년), 사르곤 2세(기원전 722~705년), 그리고 산헤립(기원전 705~681년) 등의 치하에서 앗수르 제국은 그 세력의 절정에 다다랐고 유다에게는 늘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바벨론은 아직 앗수르의 지배 하에 있었으므로, 장차 바벨론의 유다 정복에 대한 미가의 예언(4:10)은 아마도 억지처럼 들렸을 것이다. 

   미가는 유다의 불의와 하나님의 정의를 드러내었다. 하나님의 정의는 승리할 것이며 하나님의 구원자는 장차 나타나실 것이다. 진정한 평화와 정의는 오직 메시야가 통치하실 때에만 이 땅에 충만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롬11:22)는 하나님의 심판과 용서에 대한 미가의 묘사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본서는 진정한 영성과 사회적인 윤리 사이의 통합적인 관계를 강조하고 있다. 6장 8절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 가운데서 무엇을 보기 원하셨는지 요약해 주고 있다.  

   핵심 구절은 6:8, 7:18절이다. 핵심 장은 6~7장이다. 미가서의 마지막 장면은 법정의 장면을 묘사한다.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제사 행위를 원하시는 줄로 잘못 생각하여 진정한 예배를 공허한 의식으로 전락시켜버렸다. 오직 하나의 판결만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유죄판결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망에 관한 언급으로 끝을 맺는다. 5장 2절은 구약 성경의 예언들 중에서 가장 분명하고 중요한 예언들 중 하나다. 메시야의 출생지와 그의영원하심에 관한 이 예언은 그의 출생 700년 이전에 선포되었다(마2:5~6). 미가는 온 세상에 대한 그리스도의 정의로운 통치에 대한 구약 성경의 가장 훌륭한 몇 가지 묘사를 제공하고 있다(2:12~13, 4:1~8, 5:4~5).  

   어떤 면에서 미가서는 이사야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양 예언서들은 동일한 백성들에게 동일한 문제들을 언급하고 있다(미1:2=사1:2, 미1:9~16=사10:28~32, 미2:8~9=사10:2, 미2:12=사10:10~23, 미2:13=사52:12, 미3:5~7=사29:9~12, 미4:1~사2:2, 미5:2=사7:14, 미5:4=사40:11, 미6:6~7=사58:6~7, 미7:7=사8:17, 미7:12=사11:11 등). 하지만 이사야가 세계사와 정치적인 측면에 주된 강조점을 둔 반면, 미가는 도덕적 사회적 문제들에 초점을 두고 있다. 예루살렘의 임박한 멸망에 관련해서, 한 세기 후에 예레미야 26장 18절에서 미가 3장 12절을 인용한 것은 예레미야를 죽음에서 구출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미가서는 또한 신약 성경에서도 인용되고 있다(미5:2=마2:5~6, 요7:42, 미7:6=마10:34~36, 막13:12, 눅12:53).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514~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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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가는 유대 사회의 억눌리고 착취당한 사람들의 선지자였다. 죄의 오염은 유다와 이스라엘 땅의 모든 것들이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고발의 증인으로 부름을 받았고(1:2, 6:1~2), 유죄판결은 파괴와 포로 형벌의 선고로 연결되었다. 그러나 세 주요 단락들이 심판의 말로 시작되는 것에 반해(1:2~2:11, 4:6~5:1, 6:1~7:6), 이 심판 다음에는 위로의 내용이 뒤따르고 있다(2:12~13, 5:2~15, 7:7~20).  

   심판에 대한 예언(1~3장): 이스라엘(사마리아)과 유다(예루살렘)에 대한 포괄적인 예언을 선포함으로써 시작하고 있다. 그 다음에는 심판의 특별한 원인들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 중에서 남은 자들을 불러 모을 것이다(2:12~13). 그후에 선지자는 왕들과 선지자들을(3:1~8) 체계적으로 책망했고 임박한 심판을 경고하였다. 

   회복에 대한 예언(4~5장): 심판에서 소망에 관한 메시지로 주제를 바꾸었는데, 여기에서 왕국의 재건(4:1~5)과 왕국의 포로 된 자들의 귀환(4:6~5:1)과 왕국에 도래할 왕에 대해 말하였다(5:2~15). 예언의 초점은 나라들에서 남은 자들로, 그리고 메시야 왕에게로 점차 좁혀졌다.  

   회개에의 촉구(6~7장): 백성들에 대한 두 가지 반박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법정으로 부르시고 그들이 답할 수 없는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였다. 반역한 백성들의 죄악들을 약속대로 용서하리라는 약속을 열거하였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520~522) 

 

『 나     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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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느웨는 영원히 존재하도록 지어진 성이었다. 높은 성벽들로 둘러쌓였고, 2백 개의 성루들로 요새화되었으며, 깊은 해자로 둘러쌓여져 있는 이 성은 진실로 무너질 수 없는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적어도 니느웨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선지자 나훔에 의하면 이처럼 거만한 성과 그 주민들조차도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서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요나 때의 놀랄만한 부흥이후 100년이 지나자, 니느웨 백성들은 그들의 불경스럽고 부도덕한 태도로 되돌아갔다. 나훔의 설교는 회개에의 요청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내심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 정도로 사악한 백성들에 대한 멸망의 선포였다. 그 결과 바벨론은 이 도시를 파괴하여 흔적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만들어 버렸다.   

   나훔(위로, 위안)의 예언, 즉 앗수르 수도의 멸망은 앗수르의 잔혹성을 두려워하며 살던 유다와 모든 주변국들에게 위로와 위안의 메시지였다. 요나의 심판의 메시지에 대한 응답으로서 니느웨가 회개한 사건은 기원전 약 760년경에 일어났다. 앗수르인들이 곧 그들의 방탕한 행실로 돌아간 것을 볼 때, 이 부흥은 오래가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기원전 722년에 앗수르의 사르곤 2세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파괴했고, 그 열 지파를 뿔뿔이 흩어버렸다. 또한 산헤립이 이끈 앗수르 군대는 기원전 701년 히스기야 왕 치세 때에 예루살렘을 거의 함락할 뻔했다.  

   나훔이 활동했던 시기를 즈음해서는(약 기원전 660년경), 앗수르가 앗술바니팔 왕의 치하에서 가장 큰 번영과 힘을 자랑하게 되었다. 이 왕은 이전의 어떤 왕들보다 앗수르의 영향을 넓게 확장시켰다. 니느웨는 30미터의 높이와 마차 세 대가 나란히 달릴 수 있을 정도 넓이의 성벽을 가진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성이었다. 성벽 주변으로 거대한 성루들이 수 없이 많았는데, 이 성루들은 성벽 위로 또 30미터 위까지 미쳤다. 게다가 이 성벽은 45m 넓이와 18m 깊이의 해자로 둘러쌓여 있었다. 니느웨는 난공불락의 성처럼 보여 졌고, 20년 동안의 포위에도 견딜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니느웨 멸망에 관한 나훔의 예언은 정말 일어날 것처럼 믿겨지지 않았다. 나훔은 니느웨가 ‘범람한 물로’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했고(1:8), 이 예언은 그대로 실현되었다. 티그리스 강물이 둑을 넘쳐흘렀고 그 홍수가 니느웨 성벽의 일부를 파괴했던 것이다. 바벨론인들은 이 성벽의 무너진 틈으로 침략했고, 그 성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나훔은 또한 니느웨가 ‘숨으리라’고 예언했다(3:11). 기원전 612년 이 성의 멸망 이후부터 이 지역은 기원후 1842년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나훔서 1장 9절부터 시작해 나타난 나훔 예언의 핵심은 니느웨의 사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앗수르의 교만과 타민족에 대한 잔인성은 급작스런 최후를 맞이했다. 1장 2~8절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내, 능력, 거룩, 정의 등을 묘사한다. 본서는 앗수르의 멸망에 주된 관심을 두고 있지만, 남아 있는 유다 왕국(이스라엘 왕국은 이미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했다)을 위한 목적으로도 기록되었다. 하나님을 신뢰한 유다 백성들은 교만하고 잔인한 앗수르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 메시지를 듣고 위안을 얻을 것이다(1:15, 2:2).  

   핵심 구절은 1:7~8, 3:5~7절이다. 핵심 장은 1장이다. 1장은 심판의 선언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그 결과는 니느웨의 멸망과 유다의 구원과 기쁨이 될 것이었다. 나훔서에는 직접적인 메시야 예언들이 없는 반면, 하나님의 성품들(1:2~8)이 재림 때에 만국들의 심판주로 오실 그리스도의 사역과 일치하고 있다. 나훔은 유다의 적국들을 향한 심판에 주된 초점을 둔 3명의 선지자들 중의 하나다. 다른 두 선지자는 오바댜(에돔)와 하박국(바벨론)이다. 나훔 당시의 유다의 사악함에도 불구하고 본서는 유다에 대해 한마디 심판의 말도 포함하지 않고 있으며 회개나 개혁의 촉구는 전혀 없다. 그것은 나훔보다 이전 선지자들인, 스바냐, 예레미야, 그리고 하박국의 임무였다.  

   나훔서에 나오는 매우 구체적인 예언들은 다음을 포함한다. (1)니느웨는 홍수(1:8, 2:6)와 불(1:10, 2:13, 3:13, 15)에 의해 멸망당할 것임 (2)니느웨의 성전과 신상들의 파괴(1:14) (3)그 성은 결코 재건되지 못할 것임(1:14, 2:11,13) (4)그 지도자들이 도망할 것임(2:9, 3:17) (5)성 주변 산성들의 쉬운 공략(3:12) (6)성문들의 파괴(3:13) (7)오랜 포위와 이를 방어하기 위한 몸부림(3:14) 등 이상의 모든 사건들은 고고학적인 발견들과 역사적인 기록에 의해 입증되었다. 본서는 오직 47구절로 구성되어 있지만, 자연에 대한 언급이 거의 50여개나 포함되어 있다. 신약성경은 나훔서를 인용하지 않고 있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524~530) 

 

2. 나무 보기  

   하나님께서 마침내 그의 선지자 요나를 설득하셔서 니느웨 백성들에게 메시지를 전파하게 하셨을 때 그 성 전체가 회개하며 응답함으로써 니느웨는 멸망을 피할 수 있었다. 그 백성들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을 낮추었지만 앗수르가 세상에서 최고의 강대국으로서 절정에 달하자 그들의 겸손은 교만으로 변질되었다. 요나의 설교 이루 약 한 세기가 지난 뒤에 하나님께서는 나훔을 부르셔서 니느웨의 임박한 심판을 선포하게 하셨다. 그들의 사악함의 정도가 너무 심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심판을 피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요나와는 달리, 나훔은 그 성으로 직접 가지 않고 멀리서 그의 경고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이번에는 회개의 소망이 전혀 없었다.  

   니느웨를 향한 심판이 선포됨(1장): 나훔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매우 분명한 묘사로 그이 책을 시작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정의로우시기 때문에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다(1:2). 하나님께서는 또한 인내(1:3)와 능력(1:3~6)의 하나님이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에게 응답하는 모든 자들에게는 자비로우시지만, 그를 거역하는 자들은 멸망을 당할 것이다(1:7~8).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며 니느웨는 그들의 죄악들로 인해 심판받게 될 것이다(1:9~14). 아무것도 이 심판을 저지할 수 없으며 이것이 유다 백성들에게는 위로의 메시지인 것이다(1:15).  

   니느웨를 향한 심판이 묘사됨(2장): 앗수르는 정복될 것이지만 유다는 회복될 것이다(2:1~2). 니느웨의 함락(2:3~7)과 약탈(2:8~13)에 대한 나훔의 묘사는 성경에 나오는 전쟁에 관한 가장 생생한 묘사들 중의 하나다. 성벽의 무너진 틈으로 실제로 군사들과 마차들이 물밀듯이 쳐들어오는 것이 보일 정도로 생생했다. 니느웨는 불에 소화되어 영원히 멸절되고 말았다. 

   니느웨를 향한 심판이 마땅했음(3장): 나훔은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장차 멸망시키시는 이유를 다루면서 그의 짧은 심판의 글을 맺고 있다. 그 도시는 잔인함과 부패로 특징지을 수 있다(3:1~7). 앗수르가 애굽(이집트)의 수도 데베(노아몬)를 짓밟은 것처럼 앗수르의 수도 또한 멸망을 당할 것이다(3:8~10). 니느웨는 철벽처럼 요새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무너질 수 없을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도시의 멸망이 불가피하다고 하셨다(3:11~19). 그 어떤 방어책도 하나님의 심판을 제지할 수 없었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530~532) 

 

『 하  박  국 』 

 

 

1. 숲 보기  

   모든 유다를 돌아보았을 때 하박국은, 백성들의 손마다 가득한 폭력과 불의를 목도했고, 그로인해 하나님께 어찌하여 악인들이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서 번영하며, 어찌하여 의인들이 짓밟힘을 당하고, 또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이런 사악한 시대에 가만히 계시며 무관심하신지 물으며 호소했다. 하나님의 대답은 유다의 상태보다 더욱 놀랄 만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무언가를 하고 계신다는 것을 선지자에게 확신시켜주셨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보다 더욱 부패한 민족인 갈대아인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막대기로서 곧 유대를 침략할 것이라는 말이었다. 하박국이 이에 대해 놀라고 실망하자 하나님께서는 인내하심으로 그 선지자를 가르쳤고, 마침내 그 선지자는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3:18)라는 찬양시로 응답한다. 

   하박국(품에 품는 자 또는 들러붙다)은 유다민족의 ‘(죽기 직전의) 단말마의 통증’에 해당하는 기간 동안에 사역했다. 후자의 의미가 본서에 더 적합한데 그 이유는 하박국이 자기 나라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자신은 하나님을 확고하게 의지할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다 민족은 비록 반복해서 회개에의 요청을 들었지만 그 민족은 완고하게도 자신들의 죄악 된 행실을 바꾸기를 거절했다. 하박국은 동족의 완악함을 알고 하나님께 이런 묵과할 수 없는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될는지 질문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민족에 대한 징계의 막대기로 바벨론이 사용될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이 선포에 선지자는 무릎을 꿇었다. 그는 어느 세대이건 의인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게 될 것임을 고백했다(2:4). 하박국은 비록 자기가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온전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하면서 결론을 맺었다. 

   하박국서에서 연대를 언급한 유일한 기록은 바벨론 침략이 하나의 임박한 사건이었다는 것이다(1:6, 2:1, 3:16). 갈대아인에 대한 묘사는 바벨론이 이미 세계 강대국이 되었음을 나타낸다. 본서의 기록연대로 신빙성이 있는 것은 여호야김 왕의 통치 초기다(기원전 609~597년). 바벨론인들은 나보폴라살 왕의 통치 기간동안에(기원전 626~605년) 강국으로 부상했고, 기원전 612년에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파괴했다. 여호야김 왕 때를 즈음해서는 바벨론은 천하무적의 강국이 되었다. 나보폴라살의 계승자인 느부갓네살은 기원전 605년에 왕위에 올랐고 팔레스타인과 애굽으로 진군하면서 군사적인 정복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유다에 대한 느부갓네살에 대한 첫 번째 침략은 그의 치리 원년에 있었는데, 그는 이때 일만 명의 예루살렘 지도자들을 포로로 잡아갔다. 하박국이 바벨론 침략에 앞서서 예언했기에 본서가 기록된 시기는 대략 기원전 607년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계획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와 삶의 상황들이 간혹 서로 모순 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하박국은 사람들이 공공연하게 하나님의 법을 파괴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매사에 정의를 왜곡하는 것을 보고 믿음의 갈등을 겪었다. 그는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점증하는 불의를 심판하시지 않는지 알고자 했다.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의도를 계시 받았을 때, 하박국은 그 나라가 유다보다 더욱 악했기에 의문을 더 품게 되었다. 하나님의 답변은(2:2~20)은 하박국을 만족시켜주었고 그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비할 데 없는 지혜와 선하심, 그리고 능력으로 인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계획은 완전하며 그것이 온전히 성취되는 데에는 그 어떤 것의 방해도 있을 수 없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무관하게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요, 열방들의 통치자로서 여전히 보좌에 앉아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노하기를 더디하시지만, 모든 불의는 궁극적으로 심판받게 될 것이다. 그분은 믿음의 최고 대상이며, 의로운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을 것이다. 

   핵심 구절은 2:4, 3:17~19절이다. 핵심 장은 3장이다. 하박국은 마지막 세 구절(3:17~19)에 나타나는 승리의 절정을 향해 점차 그 주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본서의 시작과 마지막은 불확실과 확실, 질문과 답변, 그리고 불평과 확신 등으로 현저한 대조를 보이고 있다. 3장은 모든 성경 중에서 가장 장엄한 한 장 중에 하나이며 과거 역사와 미래 역사(예언)에서의 하나님의 영광을 기록하고 있다. ‘구원’이라는 단어가 세 번 등장하며(3:13, 18), 이 어원으로부터 ‘예수’라는 이름이 파생되었다(마1:21). 그분이 다시 오실 때에는 “대저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하게 될 것이다(2:14). 

   하박국은 공개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의심을 표현했던 대범한 사색가였다. 그는 하나님의 성품과 계획에 관심을 품은 정직한 사람이었다. 하나님과 나눈 긴 대화(본서의 약2/3)는 그 선지자에 의해 시작되었다. 보통은 예언의 경로가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 상례였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후에 하박국은 이를 유다 백성들에게 전달했다. 요나와 하박국 모두는 그들의 믿음에 대한 격렬한 시험에 직면했다. 하지만 그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자신들의 문제에 접근했다.


 

요나 

하박국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심 

하박국이 하나님을 부름 

요나가 하나님으로부터 피함 

하박국이 하나님께 피함 

역경 중의 기도(2장) 

역경 뒤의 기도(3장) 

우매함으로 종결 

믿음으로 종결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 

물고기 속에서 

성루 위에서(2:1) 

 

 

 

   하박국은 경고에서 축복으로, 방황에서 경배로, 불안에서 안식으로, 문제로부터 하나님의 성품으로, 그리고 불평에서부터 위안으로 옮겨간다. 가장 잘 알려진 성구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이다. 이 개념은 하박국의 중심 주제이며 세 권의 신약 성경책들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롬1:17, 갈3:11, 히10:38).  

   본서는 또한 루터나 웨슬리의 삶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본서를 종결짓는 3장의 찬양시는 구약 성경 중에서 가장 위대한 시편들 중의 하나다. 하나님의 성품과 섭리하심에 대한 이 위대한 믿음의 선언은 시편 18편, 68편과 여러 면에서 공통점이 많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534~539) 

 

2. 나무 보기  

   하박국은 공개적으로 진솔하게 자신의 문제들을 하나님께 가져갔고 그의 질문들에 대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시는가를 보기 위해 기다렸다. 하나님과의 두 차례 대화가 있은 후에, 하나님의 성품, 능력, 계획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달은 하박국은 무조건적인 찬양시로서 글을 맺는다. 계획하시는 분에 대해 많은 것을 알면 알수록, 그는 하나님의 계획들에 대해 더욱 신뢰할 수가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든 간에 “의인은 믿음으로 살”것이다. 본서의 두 단락은 다음과 같다. 

   하박국의 질문들(1~2장): 하나님과 하박국이 나눈 첫 대화는 1장 1~11절에 나타난다. 선지자는 하나님께 도대체 얼마 동안 유다의 사악함을 내버려두실 것인지 질문했다(1:1~4). 유다 백성들은 벌 받지 않고 계속 범죄 했고, 정의는 왜곡되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의 놀라운 답변이 주어졌다(1:5~11). 그분은 난폭한 바벨론인들을 일으켜 죄 많은 유다를 향한 심판의 막대기로 사용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갈대아인들은 신속하고 난폭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유다를 침략할 것이다. 동방으로부터 다가오는 폭풍은 유다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답변이 될 것이다.  

   이 답변은 하박국과 하나님간의 두 번째 대화를 야기 시켰다(1:12~2:20). 선지자는 이전보다 더욱 당황하여 어떻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더욱 사악한 민족을 사용하여 유다를 심판하실 수 있는지 질문했다(1:12~2:1). 그 눈이 너무나 정결하여 악을 인정하실 수 없는 하나님께서 과연 바벨론을 그들의 잔학함과 우상 숭배에도 불구하고 포상하실 것인가? 하박국은 망대의 성루 위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렸다. 주님은 ‘다섯 개의 화’를 언급하시면서 대답하셨다. 그 화들은 탐욕과 강포에 대한 화(2:5~8), 약탈과 보복에 대한 화(2:9~11), 폭력에 대한 화(2:12~14), 부도덕에 대한 화(2:15~17), 그리고 우상 숭배에 대한 화(2:18~20)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죄악상을 알고 계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으로부터 결코 피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다도 동일한 잘못들을 범했고 동일한 심판을 받아야 했다. 여호와께서는 주권적인 능력에 대한 선포로 대답을 마치셨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2:20). 

   하박국의 찬양(3장): 하박국은 하나님께 질문함으로 시작했지만, 하나님의 성품(3:1~3), 능력(3:4~12), 그리고 계획(3:13~19)에 대한 찬양시로 자신의 글을 마무리했다. 그는 이제 유다에게 임박한 침략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를 인정했고, 비록 그것이 그를 전율하게 했지만, 그는 하나님을 의뢰할 것이다. 과거 하나님의 창조적 구속의 역사는 그 선지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목적에 대해 확신을 갖도록 했고,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중에서도 소망을 품게 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3:18).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540~542)


 

『 스  바  냐 』 

 

 

1. 숲 보기  

   유다의 복잡한 정치적, 종교적 역사 중에도 때때로 개혁이 있었다. 스바냐(여호와께서 숨으셨다)의 강력한 예언은 요시야 왕의 치세 동안에 있었던 종교 개혁의 한 주요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이 ‘부흥’은 외형적인 변화를 가져왔지만, 그 나라의 지도층을 특징지었던 내부의 부패한 마음은 제거하지는 못했다. 스바냐는 죄가 철저하게 다루어지게 될 주의 날, 곧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자신의 메시지를 반복해서 그들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전파했다. 이스라엘과 이웃 이방 나라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무서운 손길을 곧 경험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징계의 과정이 끝난 이후에는, 찬양과 찬미의 원인이 되실 메시야를 통해 축복이 나타날 것이다. 

   만약 스바냐가 첫 구절에서 말한 선왕 히스기야의 4대 후손이라면, 그는 선지자 중에서 유일하게 왕족의 후손인 셈이다. 그 선지자는 자신이 활동하던 시기의 왕이었던 요시야의 궁궐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을 것이다. 스바냐가 예루살렘을 언급할 때 ‘그곳’(1:4)이란 문구를 사용했고, 또한 그 특징들에 익숙한 것을 볼 때(1:9~10, 3:1~7), 그는 아마도 유다의 왕족들이 살던 그 도시의 주민이었을 것이다. 

   스바냐는 자신의 예언을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기원전 640~609년)의 시대’(1:1)로 국한하였다. 2장 13절에서는 니느웨의 멸망(기원전 612년)이 아직 미래의 사건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기원전 640년에서 612년 사이에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열거된 죄악들(1:3~3:1~7)은 므낫세 왕과 아몬 왕 치세 때의 죄악들이 아직 팽배할 때, 즉 요시야의 종교개혁 이전의 시대를 암시한다. 그러므로 스바냐의 사역은 유다로 하여금 그 마지막 선한 왕의 통치 때에 일어나게 될 개혁을 준비하는 일에 막중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요시야는 8세의 나이에 유다 왕이 되었고, 16세가 되었을 때에는 그 마음은 이미 하나님께로 향했다. 그의 첫 번째 종교개혁은 그의 통치 12년 되던 해에 일어났는데(기원전 628년, 대하34:3~7), 그때 그는 바알의 모든 제단을 헐어버렸고, 이방 신의 분향단을 파괴했으며, 거짓 선지자들의 뼈를 그들의 제단 위에서 불사르고, 아세림(새겨 만든 우상들)과 부어 만든 우상들을 깨뜨렸다. 6년 후에(기원전 622년), 제사장 힐기야가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했을 때, 요시야의 두 번째 종교개혁이 일어났다(대하34:8~35:19). 그러므로 스바냐의 예언은 기원전 630년에서 625년 사이로 그 연대를 더욱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다. 므낫세 왕과 아몬 왕의 사악한 통치(모두 55년간)는 치유될 수 없을 정도로 유다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거기에 비해 요시야의 종교개혁들은 너무 약하고 너무 늦었으며 요시야가 죽자, 백성들은 곧 예전의 우상 숭배와 거짓 가르침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예레미야와 하박국과동시대인으로서 스바냐는 유다에 대한 마지막 선지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스바냐서에서 많은 부분(1:1~3:8)이 유다와 이방인들에 임박한 심판을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열방을 자신 앞에 불러 세우고 자신의 의를 입증하셔야 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친 백성들뿐만 아니라, 모든 세상까지도 심판하실 것이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권위와 통치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주님의 날은 전 우주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 3장 9~20절은 주님의 날의  또 다른 측면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날은, 심판이 지난 후에는 축복의 날이 될 것이다. 의로운 자들이 살아남게 될 것이고,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든 자들은 복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다시 모으시고 회복시키실 것이며, 그때에는 온 세계적으로 기쁨이 충만할 것이다.  

   스바냐서는 또한 유다에 대한 하나의 경고로, 그리고 회개에 대한 하나의 요청으로서 기록되었다(2:1~3).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지만 그들은 마침내 하나님을 저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의 심판은 극심할 것이지만, 언약에 대한 신실하심으로 인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소망과 기쁨의 미래를 약속하셨다. 진노와 자비, 단호함과 관대함은 하나님의 성품과 분리될 수 없었다. 

   핵심 구절은 1:14~15, 2:3절이다. 핵심 장은 3장이다. 스바냐서의 마지막 장은 심판과 회복이라는 주의 날의 서로 다른 두 부분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그 민족의 회개가 있은 후에, 이스라엘은 마침내 완전하게 회복된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통치 아래 이스라엘은 성경의 언약들에 포함된 축복들을 온전히 유산으로 얻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두 번에 걸쳐 스바냐서를 암시해서 말씀하셨다(습1:3=마13:41, 습1:15=마24:29). 메시야가 비록 스바냐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그분이 바로 위대한 언약들을 성취하실 분이라는 점은 분명하다(3:9~20). 그분은 자신의 백성들을 모으시고 승리 가운데서 통치하실 것이다(3:15). 

   요엘과 스바냐 둘 다 임박한 주의 날이라는 개념을 주로 다루고 있다. 스바냐는 여러 다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전체 3장에 걸쳐 이를 23회나 언급했다. 본서는 이 중요한 주제를 발전시켜나가며, 다음의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주의 날은 모든 피조물 위에 임할 것이다(1:2~3). 주의 날은 임박했다(1:14). 이날은 환난의 날이며 죄에 대한 심판의 날이다(1:15, 17). 여기에는 세상의 열방들이 포함될 것이다(2:4~15, 3:8). 남은 자들이 그날에 돌아올 것이다(3:9~13).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날은 놀라운 축복을 가져올 것이다(3:14~20). 연대별로는 스바냐, 하박국, 그리고 예레미야 애가의 순서로 나열되었다.


 

스바냐 

하박국 

예레미야 애가 

예루살렘 멸망보다  

수십 년 이전(약 630년) 

예루살렘 멸망 직전 

(약607년) 

예루살렘 멸망직후 

(586년) 

주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다 

주님, 언제 심판하실 것입니까? 

주님께서 심판하셨다 

환난을 예견 

환난을 약속 

환난의 실제 

선포 

대화 

애가 

주님의 날 

주님의 통치 

주님의 손에 의한 멸망 

하나님께서 너희  

가운데 계심(3:15,17) 

너희 하나님께서 

힘이 되심(3:19) 

너희 하나님께서  

기업이 되심(3:24)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544~549)


 

2. 나무 보기  

   전반적으로 스바냐서는 임박한 주의 날에 대한 통렬하고 냉엄한 경고의 책이다.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때문에, 황폐와 어두움, 그리고 파멸이 유다와 열방들에게 임할 것이다. 하지만 스바냐는 심판 이후, 하나님께서 열방들을 깨끗케 하시며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장래를 회복시키실 때 누리게 될 기쁨을 내다보고 있다. 본서는 “내가 지면에서 모든 것을 진멸하리라”(1:2)는 하나님의 선포로 시작하지만, “내가 그때에 너희를 이끌고 그때에 너희를 모을지라.”(3:20)는 약속으로 끝맺고 있다.  

   스바냐는 세 차례에 걸쳐서 보편적인 주제에서 구체적인 주제로 옮겨가고 있다. (1)보편적인 심판(1:1~3)에서 유다를 향한 심판(1:4~2:3)으로, (2)주변의 나라들에 대한 심판(2:4~15)에서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3:1~7)으로, 그리고 (3)모든 열방들에 대한 심판과 용서(3:8~10)에서 이스라엘의 회복(3:11~20)으로 옮기고 있다. 본서의 두 단락은 다음과 같다. 

   주의 날에 임할 심판(1:1~3:8): 사람들의 죄로 인해 모든 땅위에 임하게 될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에 대한 무서운 선포로 본서의 예언은 시작된다(1:2~3). 그 다음에 스바냐는 이 심판을 야기 시킨 몇몇 죄악들을 열거하면서 유다에 대한 심판에 집중하고 있다(1:4~18). 유다는 바알이나 자연에 대한 숭배를 장려하는 사악한 제사장들로 인해 타락했고, 그 집권자들과 관리들은 극히 부패했다. 그러므로 주의 날은 가까웠고 그날은 공포와 황폐, 그리고 환난의 날이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비하시기 때문에 너무 늦기 전에 이 임박한 재앙을 피할 수 있도록 그 백성들이 회개하고 겸비케 되기를 호소하셨다(2:1~3). 스바냐는 유다를 둘러싼 나라들을 향한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선포했다(2:4~15). 그는 블레셋(서쪽), 모압과 암몬(동쪽), 이디오피아(남쪽), 그리고 앗수르(북쪽), 등 동서남북으로 이를 조망했다. 그 다음 그는 하나님의 징계의 중심 대상인 예루살렘에 초점을 맞추었다(3:1~7). 예루살렘은 영적인 반역과 도덕적인 타락으로 물들어 있었다(3:2).   

   주의 날에 임할 구원(3:9~20): 모든 열방에 대한 광범위한 심판의 선포가 있은 후에(3:8), 스바냐는 본서의 나머지 내용을 축복의 분위기로 바꾸었다. 이것 또한 주의 날이 가진 속성의 한 측면이다. 그 나라는 깨끗케 될 것이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될 것이다(3:9~10).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다시 모이게 되며, 구속을 받고 회복될 것이다(3:11~20). 그들은 자신들의 구원자로 인해 기뻐할 것이며 그는 그들 가운데 거하시게 될 것이다(3:15,17). 스바냐는 우상숭배와 진노와 심판으로 시작했지만, 진정한 예배와 기쁨과 축복으로 글을 끝맺고 있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550~552)


 

『 학     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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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벨론 포로기를 이제 옛 과거의 일로 하고 본국으로 귀환한 유대인들은 성전을 재건하는 과업에 착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역을 시작하여 16년이 지난 후에도 백성들은 자신들의 사적인 사정들로 인해, 그 일을 아직도 끝내지 못하고 있었다. 학개는 그 백성들로 하여금 성전을 완공하도록 촉구하려는 목적으로 일련의 짧지만 통렬한 설교들을 선포했다. 그는 재건자들에게 새롭게 주님을 의지하며, 거룩한 생활을 갱신하고, 미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새롭게 할 것을 촉구했다.  

   학개(축제)의 이름은 아마도, 그가 장막절(학개의 두 번째 메시지는 바로 이 축제 때 선포되었다, 2:1) 같은 주요 축제일에 출생했기 때문일 것이다. 학개는 성전 재건을 위해 백성들을 격려하는 사역을 그보다 젊은 선지자인 스가랴와 함께 했다. 학개는 스룹바벨의 인도 아래 바벨론으로부터 남은 자들과 함께 귀환했으며, 예루살렘에 거주했다.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이 칙령을 내려 유대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 성전을 재건하는 것을 허락했다. 첫 번째 귀환은 스룹바벨의 양도 아래 이루어졌으며, 기원전 536년에는 성전 건축이 시작되었다. 에스라 4~6장은 학개서의 배경을 알려주며, 사마리아인들이 어떻게 성전 건축을 방해하고 페르시아 왕에게 편지를 썼는지에 대한 경위를 묘사하고 있다. 이 반대로 유대의 남은 자들은 점점 사기를 잃게 되었다. 고국으로 귀환할 때 품었던 낙관적인 태도는 땅의 황폐함과 농작의 실패, 고된 노역, 적들의 적대감, 그리고 다른 역경들로 인해 약화되었다.  

   적대적인 이웃과 싸우는 것보다 차라리 공사를 중단하는 것이 낫다고 여긴 그들은 기원전 534년에 성전 건축을 중단해 버렸다. 백성들의 비관적인 태도는 영적인 무력감으로 번졌고, 그들은 자신들의 집을 짓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주의 전에 대한 무관심에 대해 그들은 성전이 이 다음에 지어져야 한다는 논리와 정치적인 압박을 핑계로 삼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학개와 스가랴를 부르셔서 성전을 완공하도록 백성들을 촉구하는 동일한 과제를 부여하셨다. 스가랴의 예언은 학개의 두 번째와 세 번째 메시지 중간에 시작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16년 동안 방치되었던 성전은 기원전 520년에 공사가 재개 되었고, 기원전 516년에 필역되었다(에스라6:15).     

   학개서의 중심 주제는 분명하다. 그것은 남은 자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기 이전에 우선순위를 바로잡고 성전을 완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적인 무관심으로 인해 그들은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촉구에 응답하지 못했다. 절망 가운데서 그들은 자신들이 겪는 역경이 자신들의 영적 부패로 인해 나타나는 증상임을 깨닫지 못했다. 학개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관심사보다 자신들의 이기적인 관심사를 우선시할 때 상황이 더 어렵게 된다는 것을 이해하도록 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우선으로 하고 그분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에게 기쁨과 번영을 가져다주실 것이다. 

   핵심 구절은 1:7~8절, 2:7~9절이다. 핵심 장은 2장이다. 학개서 2장 6~9절은 메시야의 강림과 관련한 성경의 가장 놀라운 몇 가지 예언들을 기록하고 있다. 2장 9절의 약속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있어서 두 번째 성전이 맡게 될 중요한 역할을 미리 지적하고 있다. 후에 헤롯 대왕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성전을 확장하고 장식했으며,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오실 때마다 성육하신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 성전은 채워졌다. 메시야는 또한 스룹바벨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묘사되었다(2:23). 스룹바벨은 메시야의 계보의 주요 인물이 되었고 양쪽 계보를 함께 묶는 인장과 같았다.  


 

      ������----------- 솔로몬 ------------������       ↙   요  셉        (마 1:12)  

    다윗                                스룹바벨  

      ������----------- 나  단 ------------������       ↖   마리아        (눅 3:27)


 

   학개는 자신이 전한 메시지가 즉각 구체적인 결과를 가져온 몇몇 선지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의 첫 예언이 있은 후 23일 만에 그 백성들은 16년 만에 처음으로 성전 공사를 시작했다. 두 번째 성전의 기초를 놓은 일은 언약 백성을 하나님께서 다루시는 데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 “그러나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2:19). 이것은 모세 율법에 나타난 모든 종교 생활에 있어서 성소가 그 중심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성전은 희생 제물, 제사, 제사장, 그리고 예배라는 모든 제도의 중심일 뿐 아니라, 이스라엘의 영적 정체성의 상징이며 하나님의 성품, 능력, 그리고 임재 등을 가시적으로 상기시켜주는 것이었다. 이제 다윗의 위가 무너졌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하나님의 계속적인 언약 백성으로서 결집하기 위해, 성전이 건축되는 것은 특별히 중요했다. 학개서는 이사야서나 나훔서와 같은 다른 예언서에 나오는 생생한 이미지나 시적 표현들이 적다. 하지만 그의 간결하면서도 준엄한 메시지는 성공적이었다. 그의 말씀은 하나님의 권위로 선포되었다(“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와 같은 유사한 표현이 학개서의 38구절들 안에 26번 나타나고 있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554~560) 

   학개는 성전 재건의 문제에서부터 시작했다. 그러나 학개는 그것을 넘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의 영광과, 장차 있을 하나님의 지상 왕국과, 세속적인 세상 권력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께 돌아올 열방에 대한 축복까지도 언급을 하고 있다.  

                                              (위클리프 주석 편찬실,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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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개서는 구약 성경의 책들 중에 오바댜서 다음으로 그 분량이 짧지만, 그의 강렬하고 진솔한 4편의 설교들은 그것이 의도한 결과를 성취했다. 그의 4편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제2 성전의 완공(1:1~15): 스룹바벨의 영도 아래 남은 자들이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왔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일을 중단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이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성전을 건축할 때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1:2) 한편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집을 호화롭게(판벽한 집, 1:4) 건축했다. 하나님께서는 축복을 거두어 들였고 그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무관심과 자신만을 위한 이기심 때문에, 도대체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학개를 통해 그 남은 자들에게 직접 말씀하셨다.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 그리고 모든 백성들이 이에 응답했고, 23일 후에 성전 건축 사역을 재개하였던 것이다(1:12~15).  

   제2 성전의 영광(2:1~9): 짧은 몇 주 이내에 백성들의 열정은 절망으로 변해 버렸다. 장로들은 이전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기억하고 지금 성전의 초라함을 한탄했다(에스라 3:8~13). 학개의 위로의 예언은 백성들에게 과거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들(2:4~5)과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확실한 계획들(2:6~9)을 상기 시켜 주었다. “이 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2:9).  

   순종에 대한 현재적 축복(2:10~19): 제사장들에 대한 학개의 메시지는 부정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주며(2:11~13), 이를 그 나라에 적용시킨다(2:14~19). 주님께서는 거룩과 순종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죄로 인한 오염은 하나님의 축복을 가로막는다. 백성들이 성전을 재건함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해기 때문에, 그들은 그날로부터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약속을 통한 미래의 축복(2:20~23): 학개가 제사장들에게 선포한 같은 날에, 그는 스룹바벨에게 두 번째 메시지를 전했다.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시기 위해 일하며, 능력 가운데 땅의 열방들을 엎으실 것이다(2:21~22). 그때에 스룹바벨은 장차 임하실 메시야에 대한 상징의 하나로서 존귀함을 받게 될 것이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560~562)


 

『 스  가  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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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전을 재건하는 일은 중간 정도만 진행된 채 수십 년 이상이나 그냥 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스가랴는 하나님에 의해 위임받아 백성들로 하여금 완수되지 못한 책임을 완수하라고 격려한다. 강한 책망의 말로 그들을 권면하기보다 스가랴는 그들에게 미래에 성전이 가질 중요성을 상기시킴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성전은 건축되어져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메시야의 영광이 성전에 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래의 축복은 현재의 순종에 달려있었다. 백성은 단지 건축물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건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동기로 삼고 그들은 전심을 다하는 태도로 재건 역사에 임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메시야가 곧 오시기 때문이다. 

   스가랴는 “하나님께서 기억하신다.” 또는 “하나님께서 기억하셨다.”라는 뜻이다. 이 주제는 책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야훼께서 열조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축복을 받을 것이다. 마태복음 23장 35절은 그가 그보다 전에 살았던 같은 이름(스가랴)의 한 선지자가 순교한 것(대하 24:20~21)과 똑같이 ‘성전과 제단 사이에 죽임을’ 당했다고 암시한다. 스가랴는 선지자 학개, 총독 스룹바벨, 그리고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같은 시대를 풍미한 사람이었지만 그들보다 나이가 좀 어렸다. 1~8장(기원전 520~518년)의 역사적 배경은 학개의 배경과 같다.  

   처음의 여덟 장은 성전을 자주 언급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새 성전을 건축하는 그들의 위대한 사역을 완수하라고 격려한다. 그들이 성전을 건축할 때 그들은 미래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바로 그 건축물은 메시야가 구원을 가져오기 위해 강림하실 때, 오실 메시야에 의해 사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스가랴는 메시야의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을 향한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야훼의 신실하심에 대해 웅변적으로 증거하고 있는데, 특별히 9~14장에서 그렇다. 이 책은 메시야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시고 땅에서 통치하시기까지 이방인의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어떤 것인지를 개관하고 있다. 이 영광의 소망은 상황이 고되고 어려울 때 유대의 신실한 남은 자들에게 재확신의 근원이 되는 것이었다. 스가랴서는 또한 영적 부흥을 촉진시켜서 백성이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고 그들의 길을 야훼께 헌신하도록 하기 위해 쓰여졌다. 

   핵심 구절은 8:3절, 9:9절이다. 핵심 장은 14장이다. 스가랴서는 14장의 놀라운 절정을 향해서 나아가는데, 마지막장인 14장에는 예루살렘이 마지막으로 사로잡히는 사건, 이스라엘의 대적의 초기 승리, 감람산의 갈라짐, 감람산에 주께서 나타나시면서 예루살렘을 지키시는 것, 이스라엘 땅의 지형적 변화, 천년왕국 때의 장막절, 그리고 예루살렘과 그 백성의 궁극적 거룩함 등의 사건들이 나온다. 매우 분명한 메시야 구절들이 이 책에는 많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두 강림 사건에서 종으로서와 동시에 왕으로서, 그리고 사람이자 하나님으로서 묘사되어 있다. 다음은 그리스도를 명백하게 예견하는 스가랴서의 몇몇 구절들이다. 여호와의 사자(3:1~2), 의로운 가지(3:8, 6:12~13), 일곱 눈을 가진 돌(3:9), 왕, 제사장(6:13), 겸손한 왕(9:9~10), 모퉁이돌, 말뚝, 그리고 싸우는 활(10:4), 거부당함, 종의 삯에 해당하는 은 삼십 세겔에 팔린 선한 목자(11:4~13), 찔린 자(12:10), 정결케 하는 샘(13:1), 버림 받고 죽임 당한 목자(13:7), 그리고 오실 재판장이시요 왕(14장). 스가랴는 ‘큰 소 예언서’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소 예언서 중에서 가장 길고, 메시야를 말하는 구절들의 양적인 측면에서 이사야서 외에 가장 많은 분량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책은 다니엘서와 짝이 된다고 할 수 있는데, 다니엘서가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예언적 계획을 전개하고 있다면, 스가랴서는 이방인의 시대 동안의 이스라엘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학개와 스가랴는 남은 신실한 자들로 하여금 두 번째 성전을 건축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사역에 있어 함께 일했지만 그들의 접근방식은 달랐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564~569) 

2. 나무 보기  

   스가랴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위한 미래 계획을 묘사하기 위해 여덟 환상과 네 메시지, 그리고 두 후렴 부분들을 연속으로 전개한다. 처음 여덟 장은 신실한 남은 자들이 성전을 재건하도록 격려하기 위해 쓰여 졌고, 마지막 여섯 장은 성전 완성 뒤에 이스라엘의 오실 메시야를 예기하면서 기록되었다. 스가랴서는 이방인의 통치에서 메시야의 통치로, 핍박에서 평화로, 부정함에서 거룩함이라는 주제로 옮겨지고 있다.  

   여덟 환상들(1~6장):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호소하는 것으로 시작한다(1:1~6). 몇 달 후 분명 어느 고뇌의 밤에(기원전 519년 2월15일, 1:7) 스가랴는 시리즈로 여덟 가지의 환상을 본다. 그와 얘기했던 천사는 그 환상들을 해석해주지만 어떤 상징들은 설명되지 않는다. 환상들은 두 번의 강림 때의 메시야의 사역에 대한 내용을 혼합하고 있는데, 다른 예언서 경우처럼 스가랴는 사이에 끼여 있는 골짜기는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계획의 봉우리들(역자주: 메시야의 두 번의 강림, 즉 초림과 재림을 말한다)만을 본다. 처음의 다섯 가지 환상들은 위로의 환상들이고 나머지 세 가지의 환상들은 심판의 환상들이다. 

   (1)화석류 나무 사이의 말 탄 자들 - 하나님께서는 시온과 그 백성을 회복하실 것이다(1:7~17). (2)네 뿔과 공장들 - 이스라엘을 압제한 자들은 심판받을 것이다(1:18~21). (3)척량 줄을 가진 사람 -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보호하시고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2:1~13). (4)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정결케 됨 - 이스라엘이 장차 오실 순에 의해 정결케 되고 회복될 것이다(3:1~10). (5)순금 등대 - 하나님의 영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에게 능력을 주실 것이다(4:1~14). (6)날아가는 두루마리 - 개인의 죄가 심판받을 것이다(5:1~4). (7)뒤주 속의 여인 - 민족적 죄악이 제거될 것이다(5:5~11). (8)네 병거 - 하나님의 심판이 열방에 임할 것이다(6:1~8). 여호수아에게 면류관을 씌우는 사건(6:9~15)은 왕이시고 제사장이 되실 순(가지, 역자주: 메시야를 상징)의 오심을 예기하는 것이다. 

   네 메시지(7~8장): 금식에 대한 질문(7:1~3)에 대한 답으로, 하나님께서는 스가랴에게 네 가지 메시지를 주신다. (1)공허한 형식주의에 대한 책망(7:4~7) (2)과거의 불순종을 상기시킴(7:8~14) (3)이스라엘의 회복과 위로(8:1~17) (4)왕국에서의 기쁨의 회복(8:18~23) 

   두 후렴(9~14장): 첫 번째 후렴(9~11장)은 메시야의 초림에 대해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오시는 그가 거절 받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은 이스라엘의 주변 국가들을 정복할 것이지만, 진정한 왕(메시야, 9:9~10)을 위해 보존되어야 할 예루살렘은 손상 시키지 않고 남겨둘 것이다(9:1~8). 이스라엘은 헬라 제국을 대항해 성공적인 업적을 남길 것이다(마카비의 난, 9:11~17). 그리고 비록 그들이 후에 흩어지겠지만 메시야는 그들을 축복하고 다시 그들을 돌아오게 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기의 목자요 왕이신 이를 거부하고 거짓 목자들에 의해 곁길로 갈 것이다(11:4~17).  

   두 번째 후렴(12~14장)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그가 영접 받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열방들이 예루살렘을 공격할 것이지만 메시야가 오셔서 그 백성을 구원할 것이다(12장). 그들은 부정과 잘못된 것들로부터 깨끗케 함을 받을 것이고(13장) 메시야가 권능 중에 오셔서 열방을 심판하고 예루살렘에서 온 땅을 다스리실 것이다(14장).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569~572)


 

『 말  라  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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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라기는 구약 성경 예언의 마감과,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 사이에 있었던 400년간의 침묵 기간의 시작이 된다. 포로 생활을 경험하고도 거의 배운 것이 없는 듯, 얼마 후에 사람들은 그들의 포로생활의 이유가 되었던 탐욕, 우상 숭배, 이방인들과의 결혼, 가난한 자들에 대한 학대, 무감각한 마음 등과 같은 죄들을 범하게 되었다. 질문과 대답의 형태로 말라기 선지자는 유다의 완악한 마음을 지적하고 그러한 죄를 짓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선포하신다.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는 희망 찬 메시지를 전파하는 것은, 엘리야의 권능과 심령으로 나타날 약속된 선구자인 세례 요한을 위해 남겨진 것이었다. 

   느헤미야 시대의 선지자인 말라기는, 타락한 선지자들과 사악한 풍습과, 하나님과의 특권적인 관계에서 비롯된다고 가정된 잘못된 안전감 등으로 물든 백성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 질문과 대답 형식을 빌려서 말라기 선지자는 위선과 불신실과 통혼, 이혼, 잘못된 예배, 오만함 등의 죄를 깊이 있게 지적한다. 이스라엘 민족이 점점 죄에 가득 차게 됨에 따라,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은 더 이상 효력을 나타내지 못했다. 말라기 선지자가 귀에 쟁쟁하게 전파한 정죄의 메시지 이후 400년 동안 하나님께서는 침묵을 지키셨다. 오직 세례 요한의 출현과 더불어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선지자의 음성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과 대화하기 시작했다. 

   말라기라는 이름 뜻은 아마도 ‘하나님의 사자’라는 형태를 줄인 것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다가올 ‘언약의 사자’에 대해 언급한 이 책의 내용과 잘 어울린다(2:7,3:1). 기원전 516년에 재건된 성전에서 희생 제사가 드려지고 있었다. 분명 제사가 다시 시작된 지는 오랜 시간이 지났다. 왜냐하면 제사장들은 그들의 직무에 싫증을 느끼고 있었고 부패가 점점 그 체제 속으로 번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선지자의 예언은 느헤미야가 당면했던 문제들, 즉 부패한 제사장들(1:6~2:9, 느13:1~9), 십일조와 헌물의 의무에 대한 무관심(3:7~12, 느13:10~13),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2:10~16, 느13:23~28) 등과 같은 문제들로 인해 초래되었던 것이다. 느헤미야는 기원전 444년에 예루살렘 성벽을 건설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왔는데 이는 에스라의 귀환과 개혁(기원전 457년)이후 14년 후의 일이다. 느헤미야는 기원전 432년에 페르시아로 돌아갔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기원전 425년에 팔레스타인으로 다시 돌아왔으며 말라기에 쓰여진 죄들을 다루었다. 그러므로 말라기는 느헤미야가 부재중이었던 기원전 432년부터 425년 사이에 메시지를 선포했던 것 같다. 이것은 학개와 스가랴가 예언한지(기원전 520년) 거의 10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말라기에 나오는 하나님과의 대화는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실망, 낙심이라는 장벽들을 깨부수기 위한 호소로 의도되었다. 약속된 번영의 시기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고, 야훼를 섬기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 아니라는 태도가 널리 퍼져 있었는데 이는 그들의 도덕적, 종교적 타락으로 증명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무감각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계속적인 사랑을 나타내셨다. 말라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호소는, 백성들과 제사장들이 그들에게 축복이 없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언약의 율법에 대한 불순종과 타협 때문이라는 사실을 정신을 차리고 깨달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죄를 회개하고 근실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하나님의 축복을 막는 장애물들이 제거될 것이다. 또한 말라기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의인과 악인을 판단하실 결산의 날이 반드시 올 것임을 일깨워주고 있다. 

   핵심 구절은 2:17~3:1절, 4:5~6절이다. 핵심 장은 3장이다.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는 주님의 강림과 세례 요한의 출현에 대한 극적인 예언으로 종결되고 있다(3:1). 예언적 계시의 긴 침묵을 깨고 400년이 지난 후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마3:3)는 소리가 나타났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 강가에 모였다. 말라기 3~4장은 오실 메시야와 그보다 앞서올 자(3:1, 사40:3)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세례 요한이 후에 이 예언을 성취하지만, 다음 몇 구절은(3:2~5)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주제로 급변한다. 이것은 ‘선지자 엘리야’의 출현에 관한 예언(4:5)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세례 요한이 이 엘리야였지만(마3:3, 11:10~14, 17:9~13, 막1:3, 9:10~11, 눅1:17, 3:4, 요1:23) 엘리야는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도 나타난다. 

   말라기의 구조는 고발(“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 있다!)과 질문(”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했나이까?)과 논박(‘십일조와 헌물’)이 반복되는 패턴에 기초하고 있다. 반복적으로 백성들의 잘못된 결론과 합리화(그러나 너희는 말하기를, 이것과 비슷한 표현이 12번 이상 나온다)는 반박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아주 강력한 논쟁에 의해 압도당하게 된다. 말라기서의 55구절 중 47구절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인데 이 비율은 모든 예언서 중 가장 높은 비율이다. 또한 말라기는 책의 마지막을 심판으로 끝낸 유일한 선지자다. 비록 요엘과 스바냐가 말라기(3:2,17, 4:1,3,5)보다 훨씬 더 강도 높게 주님의 날에 대한 주제를 제시했지만, 이 두 책들은 희망과 축복이라는 주제로 끝난다. 그러나 말라기서는, 죄 많은 인간들의 상태를 강조하며 오실 메시야의 사역 안에서 하나님의 해결책을 예견한다는 점에서, 구약성경의 적합한 마무리(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574~579) 

   말라기 선지자가 말하는 메시지의 내용은, 거듭해서 하나님의 주권에 그 근거를 둔 것들이다. 하나님은 아버지시요(1:6), 주인이시며(1:6), 위대한 왕이시다(1:14). 그는 하늘의 통치자이시며(1:7,8), 언약과 계명들을 주시는 분이시다(2:4,5,10, 4:4).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이 주의를 게을리 하고, 무관심하며, 죄악을 많이 범하였기 때문에, 즉 성전을 더럽히고, 제사의 의무를 다 이행하지 못하고,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과 통혼하는 등의 죄악을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베풀지 않을 수가 없었다(2:2,3,12, 3:1~5, 4:1).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무한한 은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의 백성들이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들이 사악한 길에서 돌이키기만 한다면, 인자와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3:7, 10~12). 두려운 여호와의 날이 임할 것이나(3:2, 4:1,5), 의인들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보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말라기 선지자는 간접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언약의 머리이신 하나님께 반역한 백성들을 향해 계속해서 간청한다. 그는 심판 날에 멸망 받지 않기 위해 그들이 저버린 하나님께로 돌아와야만 한다고 사랑의 어조로 촉구하고 있다. 

(위클리프 주석 편찬실, p.184)     

2. 나무 보기  

   학개와 스가랴의 위대한 예언들은 아직 성취되지 않았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점 환멸을 느끼게 되었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조금씩 냉소적으로 타락함에 따라 하나님의 섭리를 의심했다. 내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국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인지 의심했으며, 이러한 태도는 외적으로 기계적인 의식의 준수와 공허한 의식과 십일조와 헌물에 대한 불이행과 하나님의 도덕률과 혹은 의식법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타났다. 제사장들은 부패했으며 그들의 행실은 악했다. 그러나 영적으로 너무 무감각해져서 그들이 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지 못하는지 의아해 했다.  

   질문과 답변이라는 형태의 탐구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돌같이 단단한 그들의 마음을 뚫기를 원하셨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고소는 부정된다.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나이까?(1:2~5), 우리(제사장)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했나이까?(1:6~2:9), 어떻게 우리(백성)가 언약을 욕되게 했나이까?(2:10~16),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로우시게 했나이까?(2:17~3:6),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했나이까?(3:7~12), 우리가 무슨 말로 주를 대적했나이까?(3:13~15) 등등을 보라.  

   실제적으로 백성들은 “자, 봐라, 이건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야!”라고 빈정거린 셈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반역은 노골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된 것이었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개념이 점점 흐릿해져감에 따라 결과적으로 물질주의 와(후에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라는 종교적인 단체들을 사로잡았던) 형식주의는 고착화된 특성이 되었다. 이러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자신의 백성들을 사랑하셨으며 하나님께로 겸손히 돌아오려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더 하나님 자신의 은혜를 펼치신다.  

   민족의 특권(1:1~5):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눈이 먼 상태에 있었다. 현재의 문제에 빠져서 그들은 과거에 있었던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를 잊어버렸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에돔)와 야곱(이스라엘)의 운명을 대조하심으로써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상기시켰다. 

   민족의 타락(1:6~3:15):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모든 존경을 잃어버렸으며, 그들의 탐욕을 위해 병들거나 흠 있는 짐승들을 제단에 바쳤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보다는 페르시아 통치자들을 더 중요시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축복을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그들의 불순종과 성실치 못한 그들의 가르침 때문에 보류하고 계셨다. 백성들은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기 위해서 젊어서 취한 아내와 이혼하는 배신행위로 인해 기소된다(2:10~16).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그들의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속에서, 그들은 메시야의 오심에 대한 약속을 받게 되지만, 또한 메시야가 가져오실 심판에 대한 경고도 받았다(2:17~3:6). 백성들은 하나님께 속한 십일조와 헌물을 도적질했으나 만약 그들이 하나님을 첫 자리에 모신다면 하나님께서는 풍족하게 축복하실 준비가 되어 있었다(3:7~12). 마지막 문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오만한 도전이었는데(3:13~15) 이러한 도전에 대한 해답은 이 책의 나머지 부분에 나타난다.   

 

   민족을 향한 약속(3:16~4:6): 주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악인들이 심판받고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들은 축복받을 때가 오고 있다고 확신시키신다. 주님의 날이 오면 “하나님을 섬긴 것이 허사가 아니었음”이 드러날 것이다(3:14). 말라기서는 ‘저주’라는 쓰디쓴 단어와 함께 끝난다. 비록 종국적으로 백성들은 우상 숭배라는 병에서 고침을 받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영적인 진보는 거의 없었다. 죄는 만연했으며, 오실 메시야에 대한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컸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579~582) 

 


 


1) 이종윤, p.15~16. <성경 상식들> 구약 39권, 신약 27권 신구약66권. 구약 929장, 신약 260장 신구약 1,189장.  가장 긴장 - 시119편, 가장 짧은 장 - 시117편(성경 중간 위치).  가장 긴 절 - 에8:9절, 가장 짧은 절 - 요11:35절    

2) 브루스 윌킨슨․ 케네스 보아, p.22~23.   

3) 상게서, p.25~28. 

4) 위클리프 주석 편찬실, p.8. 창세기뿐만 아니라 모든 성경들이 보여주는 바는, 하나님께서 그의 선택된 백성들을 통해서 세상에 대한 자신의 본성과 방법들을 계시하시며, 세상에서 자신의 거룩하신 의지를 설립하시며,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구속의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애쓰신다는 사실이다. 성경에 언급되고 기록된 모든 나라들과 인물들은, 단지 주님의 탁월하신 계획과 목적을 드러내는데 적합했기 때문에 그리 된 것이다. 

5) 위클리프 주석 편찬실, p.10. 이 책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피조물들이 생존하고, 성장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도록, 적합한 환경을 예비하고 계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그려 보이고 있다. 
    p.10~11. <내용분해> 세상의 시작(1:1~11:32), 족장들(12:1~50:26) -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6) 이종윤, p.35. 출애굽기는 성경의 두 개의 큰 주제인 구원과 하나님 예배에 대한 역사적 기초를 놓은 책이다. 

7) 이종윤, p.41. 출애굽기를 ‘구원서’라고 한다면, 레위기는 ‘구원받은 백성들의 결례, 예배, 그리고 봉사를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레위기는 성도를 위한 헌법으로 예배 모범과 성결 생활을 위한 지침서라고도 할 수 있다. 책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과 성막을 주셨다. 전자는 일반생활의 규범이요, 후자는 신앙생활의 규범이다. 

8) 상게서, p.36.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정국가 형성을 위한 준비를 했다. 그 나라를 위한 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만 했다. 이 율법은 세 부분으로 형성된다. 시내산에서 주어진 율법(출애굽기, 레위기), 광야에서 방황하는 중에 주어진 율법(민수기), 모압 평지에서 구원을 받음(신명기)으로 형성된다.  

9) 위클리프 주석 편찬실, p.37.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그것을 소유하는 구속 역사는,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하늘의 영역에서 투쟁하고 승리하고 축복받는 영적 체험을 예증해 주고 있다. 히브리서 4장에서는, 광야의 헛된 노력으로부터 나와 가나안에 들어가 안식하는 사건이 오늘날 우리들의 영적 안식의 모형으로 설정되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과, 우리를 자신과 사단에게서 이기도록 하는 그리스도의 계속적 중보 안에서 안식하는 것이다. 

10) 위클리프 주석 편찬실, p.46. 구약의 하나님 나라 발전 과정에서, 사무엘이 선지자와 사사로 소명을 받은 사건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사무엘의 임무는 이스라엘을 사사시대와 왕정시대를 연결하는 것이었다. 

11) 이가봇 => 법궤 빼앗긴 후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하면서 아이 이름을 지음. 에벤에셀 =>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우고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라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고 함.   

12) 헬리는 요셉의 양부이거나 장인이다. 후자에 따르면 23절 이후의 족보는 마리아 쪽의 계보이다. (기독지혜사(주), 큰 글자 라이프 성경, p.92.)  

13) 호세아, 여호수아 그리고 예수 등의 이름들은 같은 히브리 어원에서 유래하고 있다. ‘호세아’는 구원을 의미하지만 ‘여호수아’와 ‘예수’는 ‘야훼는 구원이시다’라는 부가적인 의미를 포함한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인 호세아는 영어 성경에서 다른 글자이지만 본 선지자와 역시 동일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브루스 윌킨슨․케네스 보아, p.463).  (편집자 주: 마1:21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그 이름대로 성취하셨다. 갈1:4~5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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