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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義의 십자가

하나님아들 2019. 1. 11. 19:55

義의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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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義意) 십자가(十字架)

눅8:15

인 내

눅21:19

고전9:25

절 제

약3:2

단2:21

지 식

벧후3:18

딤전4:7-8경 건

약1:26-27

삼상18:1

형 우

삼상20:17

고전12:31사 랑

벧후1:4

『도표 6』


의의(義意)에 십자가(十字架)는 마16장24절의 말씀에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罪)문제(問題)를 해결(解決)하기 위해서 죄(罪)의십자가(十字架)를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는 이 말씀에서 죄(罪)의 십자가(十字架)는 예수님께서 지셨으므로 이제 주님을 따르는 길에 우리가 함께 고난(苦難)에 참여할 십자가(十字架)를 지고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 하시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使道)에게 주신 천국(天國)열쇠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셨다?

또한 우리가 행해야할 믿음의 덕목(德目)에 대하여서는 베드로후서 1장5절-7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덕목(德目)을 살펴보면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의의(義意)에 십자가(十字架)요 구원(救援)받은 성도(聖徒)들의 삶에 표상(表象)인 것이다.

1. 덕〔Virtue, 아레테 : ajrethvn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벧후1:4)

베드로는 성령(聖靈)의 열매(熱媒)를 ‘신의(qeiva") 성품(fuvsew")’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는 신의 성품(qeiva" fuvsew")에 대한 언급(言及)을 하면서 덕(德, ajrethvn)을 두 번째로 말하고 있다.

일반적(一般的)으로는 사람에게 요구(要求)되는 도덕(道德)을 말하고, 그리스도교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예비(豫備)해 주시는 탁월(卓越)한 성질(性質)을 말한다.

 

첫째, 좋은(Good) 것이 덕(德, ajrethvn)이다.

덕(德, ajrethvn)은 모든 매사(每事)를 좋게 하는 것이 특징(特徵)이다.

‘좋은생각’, ‘좋은 말’, ‘좋은행실’, ‘좋은인상’등으로 하나님께서도 천지(天地)의 만물(萬物)을 창조(創造)하실 때마다 좋았다는 말을 하셨다.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4)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칭(稱)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칭(稱)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10)

“땅이 풀과 각기(各其) 종류(種類)대로 씨 맺는 채소(菜蔬)와 각기(各其) 종류(種類)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12)

“주야(晝夜)를 주관(主管)하게 하시며 빛과 어두움을 나뉘게 하시니라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18)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蕃盛)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生物)을 그종류(種類)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種類)대로 창조(創造)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21)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種類)대로 육축(六畜)을 그 종류(種類)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種類)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25)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甚)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이처럼 하나님께서 만드신 대 우주는 좋은 것뿐이었다.

“우상(偶像)의 제물(祭物)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知識)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知識)은 교만(驕慢)하게 하며 사랑은 덕(德)을 세우나니

둘째, 밝은 것이 덕(德, ajrethvn)이다.

덕(德, ajrethvn)은 밝은 것으로 덕인(德人)은 밝은 마음의 소유자(所有者)이다. 국어사전에 덕(德)이라는 글자를 찾아보면 제일 먼저 나오는 단어(單語)가 바로 밝음이다.

셋째, 옳은 마음이 덕(德, ajrethvn)이다.

덕은 ‘이랬다 저랬다’하는 마음이나 유익(有益)된 쪽으로 쉽게 움직이는 변덕(變德)스러운 마음이 아니라 한결같은 마음이요, 바른 마음이요, 곧은 마음이다.

넷째, 복종(服從)하는 마음이 덕(德, ajrethvn)이다.

다섯째, 비우는 마음, 가난(家難)한 마음, 청빈(淸貧)한 마음이 덕(德, ajrethvn)이다.

이 마음은 끝없이 자신(自身)을 비우는 마음이요, 자신(自身)을 끝없이 포기(抛棄)하고, 버리는 마음이다.

여섯째, 굴복(屈服)하는 마음, 하나님께 항복(降伏)하는 마음이 덕(德, ajrethvn)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덕(德)은 고집(固執)과 아집(我執)을 버리고 하나님께 항복(降伏)하는 마음이다.

일곱째, 남의 유익(有益)을 위해 사는 마음이 덕(德, ajrethvn)이다.

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24.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33.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대(古代)의 희랍인은 지혜(智慧), 절제(節制), 용기(勇氣), 정의(正義)를 인생(人生)의 4대 덕이라 하였고 중국인은 지(智), 인(仁), 용(勇)을 3달덕(達德)이라 불렀으며 바울은 기독교의 3대 덕을 ‘믿음’, ‘소망’, ‘사랑’이라 하였다.

이처럼 무릇 덕(德, ajrethvn)은 천개(天個)의 방패(防牌)를 이기는 것인데, B. 프랭클린은 “만일 그대가 덕(德, ajrethvn)이 있는 사람이 된다면 귀공자(貴公子)보다 더 행복(幸福)하게 될 것이다.” “참으로 위대(偉大)한 사람치고 동시에 덕(德)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다” “덕(德)과 행복(幸福)은 어머니와 딸이다”고 하였다.

또한 헤라클레이토스는 “덕(德)은 영광(榮光)으로 가는 지름길이다”하였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幸福)한 생활(生活)은 덕(德)에 의한 생활(生活)이다하였으며, 에메슨은 “미(美)는 육체(肉體)의 덕(德, ajrethvn)이요, 덕(德, ajrethvn)은 영혼(靈魂)의 미(美)이다”하였고, 옛말에 이르기를 용장(勇將), 지장(智將), 덕장(德將)중에 가장 으뜸이 덕장(德將)이라고 했다.

 

2. 지식(知識)〔Knowledge, 그노시스 : gnw'sin,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德)을, (德)에 지식(知識, Knowledge, gnw'sin,)을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성령(聖靈)의 열매(熱媒)에 대해 신(神)의 성품(聖品)이라고 말하면서 믿음, 덕 다음으로 지식(知識, Knowledge, gnw'sin)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식(知識)은 ‘알 지’(知)‘알 식’(識)으로 ‘사물을 아는 마음의 작용;underst- anding’ 혹은 ‘인식(認識)으로 얻어진 성과(成果)로 알고 있는 내용;knowled- ge’을 의미(意味)한다.

구약(舊約)의 영어 역본(譯本)에서의 지식(knowledge)이라는 명사는 히브리어 ‘다아트’, ‘마다’, ‘데아;deja’(지식, Knowledge, gnw'sin)와 같은 동족어를 번역(飜譯)한 것인데 이 단어(單語)들은 모두 동사“야다”(yada)에서 파생한 것이다.

사전(辭典)에서 종종 동사 ‘야다’가 ‘경험(經驗)으로 알다’로 나오는데 이것은 적절(適切)한 표현(表現)이다.

1) 재앙(災殃, plague, [g"n<)을 깨닫다(왕상8:38)

한 사람이나 혹(或) 주(主)의 온 백성(百姓) 이스라엘이 다 각각(各各) 자기(自己)의 마음에 재앙(災殃)을 깨닫고 이 전(殿)을 향(向)하여 손을 펴고 무슨 기도(祈禱)나 무슨 간구(懇求)를 하거든

2) 자녀(子女, children, l/kv])를 잃어버림을 알지 못하다 (사47:8)

그러므로 사치(奢侈)하고 평안(平安)히 지내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外)에 다른 이가 없도다 나는 과부(寡婦)로 지내지도 아니하며 자녀(子女)를 잃어버리는 일도 모르리라 하는 자(者)여 너는 이제 들을지어다

3) 슬픔을 알다 (사53:3)

그는 멸시(蔑視)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艱苦)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疾苦)를 아는 자(者)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者) 같아서 멸시(蔑視)를 당(當)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貴)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4) 하나님의 복수를 알다 (겔25:14)

내가 내 백성(百姓) 이스라엘의 손을 빙자(憑藉)하여 내 원수(怨讐)를 에돔에게 갚으리니 그들이 내 노와 분을 따라 에돔에 행(行)한즉 내가 원수(怨讐)를 갚음인 줄을 에돔이 알리라 나 주(主) 여호와의 말이니라 .히브리 사람들은 ‘야다’를 성관계(姓關係)로 표현할 때도 사용하는데 이 말은 ‘내가 누구를 안다’ ‘내가 그 남자(男子)를 안다’ ‘내가 그 여자(女子)를 안다’ ‘내가 그 남자(男子)의 아주 깊은 것까지도 안다’는 말이다.

고로 지식(知識)에는 개인(個人)과 객체(客體)의 각별한 관계(關係)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가 의사(意思)나 행위(行爲)의 상대물(相對物)인 객체(客體)에 대해서 가지는 의미(意味)에 대한(大限) 앎도 포함(包含)된다.

꽁트(comte)는 인류(人類) 지식(知識)의 발전(發展)에는 3단계가 있다?는 지식(知識)의 3단계설(theory of three stages of knowledge)을 주장(主張)하였다.

첫째 단계(段階) : 신학적(神學的), 가공적(架空的) 단계(段階)로 준비(準備)적인 단계(段階)

둘째 단계(段階) :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추상적(抽象的) 단계(段階)로서 과도(過渡)적인 단계(段階)

셋째 단계(段階) : 과학적(科學的), 실증적(實證的) 단계(段階)로 결정적(決定的)인 단계(段階)

실증주의자(實證主義者)인 꽁트는 증명(證明)이 되는 것이 가장 높은 지식(知識)이고 증명(證明)이 안되는 것은 가장 초보적(初步的)인 단계(段階)로 말하면서, 지식(知識)에도 일반적(一般的)이고도 자연적(自然的)인 지식(知識)과 학문적(學問的), 신학적(神學的), 교리적(敎理적)인 단계(段階)와 영적(靈的)인 지식(知識)이 있다고 보았다.

(1) 일반적(一般的)인 지식(知識) : 어린아이가 젖 먹는 것, 우는 것, 손짓 발짓을 하여 얻는

          경험(經驗)에   의한 지식(知識)이다.

(2) 학문적(學問的)인 지식(知識) : 사람의 이성(理性)에 의해서 만들어 놓은 학문(學問)

          즉 사물(私物)에   의해서 자기주장(自己主張)을 펴 놓은 지식(知識)으로 바울은 이러한

           지식(知識)을 배설물(排泄物)로 여겼다.

(3) 영적(靈的)인 지식(知識) : 하나님을 아는 진리(眞理)나 영적(靈的)인 비밀(秘密) 사람들은

           지식(知識)의 차이를 혼돈(混沌)하고 착각(錯覺)한다.

           세상(世上)의 학문(學問)도 필요(必要)하나 세상(世上)의 학문(學問)은 영적지식(靈的知識)을

           얻게 하는 도구(道具)일 뿐이지 영적학문(靈的學問)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은 지식(知識)의 하나님이다.

이사야서11장2절을 보면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라는 말씀이 있고,

사무엘상2장3절을 보면 “심(甚)히 교만(驕慢)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知識)의 하나님이시라 행동(行動)을 달아 보시느니라 고 하였다.

 

다윗왕은 시편139:1-6절에 전지(全知) 전능(全能)하시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고백하길 했다.

1. 여호와여 주(主)께서 나를 감찰(鑑察)하시고 아셨나이다.

2. 주(主)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 하시 오며

3.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鑑察)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行爲)를 익히 아시오니

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5. 주(主)께서 나의 전후(前後)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按手)하셨나이다

6. 이 지식(知識)이 내게 너무 기이(奇異)하니 높아서 내가 능(能)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고 말한 고백(告白)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일들과 생각들을 미리 아시며 인간의 역사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다 주관(主觀)하시고 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으로부터 이상(異像)을 받은 다니엘도 말하길 “…영원(永遠) 무궁(無窮)히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讚頌)할 것은 지혜(智慧)와 권능(權能)이 그에게 있음이로다그는 때와 기한(期限)을 변(變)하시며 왕(王)들을 폐(廢)하시고 왕(王)들을 세우시며 지혜(智慧)자에게 지혜(智慧)를 주시고 지식(知識)자에게 총명(聰明)을 주시는도다 )그는 깊고 은밀(隱密)한 일을 나타내시고 어두운데 있는 것을 아시며 또 빛이 그와 함께 있도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주권과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심에 대해 찬송을 하였다.

 

첫째, 지식(智識, Knowledge, gnw'sin)의 열매(熱媒)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智識, Knowledge, gnw'sin)을 말합니다.

“나의 거룩한 산(山) 모든 곳에서 해(害)됨도 없고 상(傷)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知識, Knowledge, gnw'sin)이 세상(世上)에 충만(充滿)할 것임이니라

이처럼 참된 지식(知識, Knowledge, gnw'sin), 근본(根本)된 지식(知識, Know- ledge, gnw'sin)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意味)에서 영적(靈的)인 부모(父母)도 모르는 지식(知識)을 어찌 지식(知識, Knowledge, gnw'sin)이라 할 수 있겠는가?

잠언기자는 “여호와를 경외(敬畏)하는 것이 지식(知識, Knowledge, gnw'sin)의 근본(根本)이어늘 미련한 자(者)는 지혜(智慧)와 훈계(訓戒)를 멸시(蔑視)하느니라(잠1:7)고 하였다.

 

둘째, 지식(知識, Knowledge, gnw'sin)의 열매(熱媒)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知識, Knowledge, gnw'sin)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地方)에 이르러 제자(弟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人子)를 누구라 하느냐 고 묻자(마16:13)“…더러는 세례(洗禮)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先知者) 중(中)의 하나라 하나이다 ”고 제자들이 대답을 했다.

이에 예수님은 다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마16:15)고 또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신앙고백을 하자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福)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血肉)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마16:17)하고 축복(祝福)을 하신다.

 

셋째, 지식(知識, Knowledge, gnw'sin)의 열매(熱媒)는 성령(聖靈)을 아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3차전도여행시, 안디옥과 갈라디아와 브루기아를 거쳐 에베소에 오게 된다. 그때 그는 그곳에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聖靈)을 받았느냐 아니라 우리는 성령(聖靈)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대답을 하자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 (행19:2-4)이라고 설명을 해 준다. 이에 바울의 설명을 들은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주 예수의 세례를 받고 또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이 임하여 그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는데 12명쯤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넷째, 지식(知識, Knowledge, gnw'sin)의 열매(熱媒)는 말씀의 은사(恩賜)를 받는 것을 말한다.

“어떤 이에게는 성령(聖靈)으로 말미암아 지혜(智慧)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聖靈)을 따라 지식(知識, Knowledge, gnw'sin)의 말씀을

“너희가 은(銀)을 받지 말고 나의 훈계(訓戒)를 받으며 정금(精金)보다 지식(知識)을 얻으라

“오직 우리 주(主) 곧 구주(救主)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恩惠)와 저를 아는 지식(知識)에서 자라가라 영광(榮光)이 이제와 영원(永遠)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내가기도(祈禱)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知識)과 모든 총명(聰明)으로 점점(漸漸) 더 풍성(豊盛)하게 하사

 

지식(知識, Knowledge, gnw'sin)에 대하여 정리(整理)해 보면, 지식(知識, Knowl- edge, gnw'sin)은 복음(福音)을 취급(取扱)하는 것이지만 그것의 역사적(歷史的) 방면(方面) 자료(資料)들을 다루는데 활동(活動)하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福音)을 변증(辨證) 해설(解說)하는데 있어서 얻지 못할 귀한(貴翰) 요소(要所)이다. 특히 지혜(智慧)는 사물(私物)의 진가(眞價)를 달관(達觀)하는 것이고 지식(知識, Knowledge, gnw'sin)은 복음(福音)의 요의(要意)를 파악(把握)하는 것이요 지혜(智慧)는 내적(內的)이고 근본적(根本的)이고 영원적(永遠的)인 것이나 지식(知識, Knowledge, gnw'sin)은 외적(外的)이고 구체적(具體的)이고 임시적(臨時的)인 것이다. 이는 인위적(人爲的)으로 공부(公簿)하고 연구(硏究)하여 축전(祝典)하는 지식(知識, Knowledge, gnw'sin)이 아니라 성령(聖靈)의 영감(靈感)으로 위로부터 하나님의 특별(特別)하신 뜻에 의하여 복음(福音)을 깨닫도록 주시는 것으로써 여호와를 경외(敬畏)하는 것이 지식(知識)의 근본(根本)으로 하나님을 바로 알고 경외(敬畏)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아울러 지식(知識, Knowledge, gnw'sin)이란 이미 알려진 진리(眞理)의 말씀을 그것 그대로 새로운 상황(常況)에서 다시 알려 주는 것을 말한다.

 

3, 절제〔節制, temperance, 엥크라테이아 : ejgkrateiva/

“지식(知識)에 절제(節制, ejgkrateiva/)를, 절제(節制)에 인내(忍耐)를, 인내(忍耐)에 경건(敬虔)을

자제력(自制力)에 의한 생활(生活) 조절(調節)의 하나. 이것은 성령(聖靈)의 아홉가지 열매(熱媒)의 하나로 되어 있다(갈5:23). 성령(聖靈)의 지배(地排)가 있는 생활(生活)에는 이 절제(節制, ejgkrateiva)의 덕(德)이 따른다.

바울사도는 갈5:19-21에 육(肉)이 지배(地排)하는 생활(生活), 즉 악덕(惡德)을 열거 한다.

19. 육체(肉體)의 일은 현저(顯著)하니 곧 음행(淫行)과 더러운 것과 호색(好色)과

20.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이렇게 열거한 후 22-23에서는 성령(聖靈)이 지배(地排)하는 생활(生活)이 있는 곳에 보여지는 덕(德)을 말하고 있는데, 절제(節制, ejgkrateiva)도 그 하나이다.

 

사도(使道) 베드로는 올바른 지식(知識)이라면 행위(行爲)의 절제(節制)를 식별(識別)하여 분수(分數)에 알맞게 하고, 악()을 피하여 선()으로 옮길 것을 말하고 있다(벧후1:6). 절제(節制, ejgkrateiva)는 한문으로 ‘마디 절’(節) ‘억제할 제’(制)를 사용하고, 영어로는 Moderation or Temperance 라는 단어(單語)를 사용(使用)한다.

“오직 성령(聖靈)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喜樂)과 화평(和平)과 오래 참음과 자비(慈悲)와 양선(良善)과 충성(忠誠)과 () 온유(溫柔)와 절제(節制, ejgkrateiva)니 이같은 것을 금지(禁止)할 법(法)이 없느니라

잠25:28절에서는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고 말한 바 있듯이 절제(節制)는 파괴적인 악의 세력들에 대항(對抗)하여 그 주변에 방어벽(防禦壁)을 건설(建設)하는 내적(內的)인 인간(人間)의 요새(要塞)화다.

 

첫째, 절제(節制)란 헬라어 ‘엥크라테이아, ejgkrateiva’로 ‘자제’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자제(自制)란 ‘스스로 자’(自), ‘억제할 제’(制)로 자기감정을 스스로 억누르는 것을 말한다.

수학자(數學者) 피타고라스(Pythagoras)는‘자기(自己)를 제어(制御)할 줄 모르는 자는 자유(自由)의 사람이라 할 수 없다’고 하였고, 클라우디우스는‘자기(自己) 자신(自身)을 제어(制御)할 수 없는 자에게는 자유(自由)도 없다’하였으며, S.Smiles 는 ‘자기(自己)를 억제(抑制)하지 못하는 인간(人間)은 무슨 일에 있어서나 결코 상당(相當)한 일을 실행(實行)할 수 없을 것이다’고 말한 바 있듯이 자기감정(自己感情)과 자기(自己) 생활(生活)과 자기 계획(計劃)에 절제(節制, ejgkrateiva)를 할 줄 아는 자는 그것만으로도 이미 성공(成功)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敎會)에 편지(片志)하면서 인간(人間)에게 있는 성욕(性慾)의 위험(危險)을 예리(銳利)하게 인식(認識)하면서 음란(淫亂)에 대한 방어책(防禦策)으로 결혼(結婚)을 제시(提?)한다. 그리고 그는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고전7:5) 라고 말하면서 이를 촉구(促求)하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敎會)에 편지(片志)하기 전에도 의(義)와 절제(節制, ejgkrateiva)와 장차(將次) 오는 심판(審判)에 대해서 강론(講論)한 적이 있는데 그 때에도 이를 듣고 있던 벨릭스는 “바울이 의와 절제(節制, ejgkrateiva)와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對答)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행24:25)고 하며, “지식(知識)에 절제(節制, ejgkrateiva)를, 절제(節制, ejgkrateiva)에 인내(忍耐)를, 인내(忍耐)에 경건(敬虔)을 경건(敬虔)에 형제(兄弟) 우애(友愛)를, 형제(兄弟) 우애(友愛)에 사랑을 공급(供給)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洽足)한즉 너희로 우리 주(主)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者)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者)는 소경이라 원시(遠視)치 못하고 그의 옛 죄(罪)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 (벧후1:6-9)고 했다.

둘째, 절제(節制, ejgkrateiva)란 ‘자기(自己) 몸을 쳐서 복종(服從)시키는 것’을 말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服從)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傳播)한 후(後)에 자기(自己)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셋째, 절제(節制, ejgkrateiva)란 ‘지나치지 않는 것’ 혹은 ‘과(過)를 피하는 것’을 말한다.

“지나치게 의인(義人)이 되지 말며 지나치게 지혜(智慧)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스스로 패망(敗亡)케 하겠느냐

넷째, 절제(節制, ejgkrateiva)란 ‘믿음의 분량(分量)대로 지혜(智慧)롭게 생각(生角)하는 것’을 말한다.

“내게 주신 은혜(恩惠)로 말미암아 너희 중(中) 각(各)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異相)의 생각(生角)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各)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分量)대로 지혜(智慧)롭게 생각(生角)하라

다섯째, 절제(節制, ejgkrateiva)란 ‘정절(貞節)’즉, ‘굳은 마음’'변화지 않는 마음’을 말한다.

“또 이와 같이 여자(女子)들도 아담(雅淡)한 옷을 입으며 염치(廉恥)와 정절(貞節)로 자기(自己)를 단장(丹粧)하고 땋은 머리와 금(金)이나 진주(眞珠)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善行)으로 하기를 원(願)하라그러나 여자(女子)들이 만일(萬一) 정절(貞節)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居)하면 그 해산(解産)함으로 구원(救援)을 얻으리라

여섯째, 절제(節制, ejgkrateiva)란 ‘자신을 조절하는 것’을 말한다.

사도 베드로는 기록하길“사랑하는 자(者)들아 나그네와 행인(行人)같은 너희를 권(勸)하노니 영혼(靈魂)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肉體)의 정욕(情欲)을 제어(制馭)하라 고 하였다.

일곱째, 절제(節制, ejgkrateiva)란 ‘근신(謹身)하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6절 이하에서 말하길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謹愼)할지라 자는 자(者)들은 밤에 자고 취(醉)하는 자(者)들은 밤에 취(醉)하되 우리는 낮에 속(屬)하였으니 근신(謹愼)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胸背)를 붙이고 구원(救援)의 소망(所望)의 투구(投球)를 쓰자 고 권면(勸勉)하고 있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謹身)하여 고난(苦難)을 받으며 전도인(傳道人)의 일을 하며 네 직무(職務)를 다하라

절제(節制, ejgkrateiva)란 알맞게 조절(調節)하고 방종(放縱)하지 않는것 즉 사악(邪惡)한 욕망(慾望)에 대한 조절(調節)과 조화(造花)를 의미(意味)한다. 그러므로 절제(節制, ejgkrateiva)는 자기파악(自己把握), 자기조절(自己調節), 자기훈련(自己訓練), 자기조화(自己造花)의 덕성(德性)이라고 정의(正義) 할수 있다. 참된 절제(節制, ejgkrateiva)란 먹는것 이나 마시는것 뿐만 아니라 말과 생각(生角)과 욕망(慾望)과 감정(感情)등 생(生)의 모든 것들을 조절(調節)하는 것이다.

성령(聖靈)의 사람은 바로 절제(節制, ejgkrateiva)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성령(聖靈)의 도움으로 자기조절(自己訓練)을 할 수 있다. 자기(自己) 자신(自身)을 늘 견제(牽制) 할수 있으며 지나치게 극단적(極端的)인 행동(行動)과 생활(生活)을 피하고 조절(訓練)된 상태(常態)를 유지(有志)해 나간다는 것은 믿는자 가 가진 특권(特權)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성서(聖書)는 다른 사람을 다스리기 전에 자신(自身)을 다스릴것 을 말하고 있다.

 

4. 인내(忍耐)〔Patience, 휘포모네 : uJpomonh'/

“지식(知識)에 절제(節制, ejgkrateiva)를, 절제(節制)에 인내(忍耐)를, 인내(忍耐)에 경건(敬虔)을 (And)

“오직 성령(聖靈)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喜樂)과 화평(和平)과 오래 참음과 자비(慈悲)와 양선(良善)과 충성(忠誠)과  온유(溫柔)와 절제(節制, ejgkrateiva)니 이같은 것을 금지(禁止)할 법(法)이 없느니라

 (갈5:22-23)

인내(忍耐)란 영적생활(靈的生活)에서나 인간(人間)의 생활에서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른다. 이 인내(忍耐) 즉, 오래참음은 헬라어 ‘마크로 튀미아 ; makroqumiva’로 ‘견딤’ ‘확고부동(確固不動)’이라는 뜻으로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야기(惹起)된 고난(苦難)을 감내(堪耐)하는 것을 의미(意味)한다.

또한 이 인내(忍耐)와 똑같은 말로서 ‘휘포메노; uJpomevnw’는 ‘밑에 머무르다’ ‘견디다’ ‘참다’라는 뜻이 있으며, ‘휘포모네; uJpomonh’는 ‘인내(忍耐)’ ‘지속’ ‘견딤’이라는 의미(意味)가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오랜 시간 기다려야 하지만 흔들림없이 참고 견디는 것으로 어려움 가운데서도 굳게 서 있는 것을 의미(意味)한다.

 

1)인내(忍耐)〔Patience, 휘포모네 : uJpomonh'/〕는 고통(苦痛)을 기쁨으로 이겨내는 것이다.

“믿음의 주(主)요 또 온전(穩全)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爲)하여 십자가(十字架)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介意)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寶座) 우편(右便)에 앉으셨느니라

2) 인내(忍耐)〔Patience, uJpomonh'/〕는 자기(自己) 스스로 자제(自制)하는 것이다.

“너희가 참음은 징계(懲戒)를 받기 위(爲)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懲戒)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우리가 환난(患難)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慰勞)와 구원(救援)을 위(爲)함이요 혹(或) 위로(慰勞)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慰勞)를 위(爲)함이니 이 위로(慰勞)가 너희 속에 역사(役事)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苦難)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3) 인내(忍耐)〔Patience, uJpomonh'/〕는 기다리는 능력(能力)이다.

이슬람교의 경전(經典)인 코란에 “참을성이 적은 사람은 그만큼 인생(人生)에 있어서 약한 사람이다. 한 줄기의 샘이 굳은 땅을 헤치고 솟아 나오듯 참고 견디는 힘이 광명(光明)을 쉽게 얻는다. 오늘 하나의 어려운 일을 참고 극복(克服)했다면 그 순간(瞬間)부터 그 사람은 강한 힘의 소유자인 것이다. 곤란(困難)과 장애물(障碍物)은 언제나 새로운 힘의 근원(根源)인 것이다. 신은 인내(忍耐)심이 강한 자와 함께 계신다”는 말이 있다.

그런가 하면 나폴레옹도 ‘최후의 오분 간’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듯이 무슨 일을 하든지 마지막까지 오래참는 사람이 승리(勝利)하게 되어 있다.“그 영광(榮光)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能力)으로 능(能)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

 

4) 인내(忍耐)〔Patience, uJpomonh'/〕는 소망(所望)의 바램이다.

“무엇이든지 전(前)에 기록(記錄)한 바는 우리의 교훈(敎訓)을 위(爲)하여 기록(記錄)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忍耐)로 또는 성경(聖經)의 안위(安慰)로 소망(所望)을 가지게 함이니라

만일(萬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나 요한은 너희 형제(兄弟)요 예수의 환난(患難)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同參)하는 자(者)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證據)를 인(因)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5) 인내(忍耐)〔Patience, uJpomonh'/〕는 남아 주는 것이다.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父母)는 이를 알지 못하고

“형제(兄弟)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6) 인내(忍耐)〔Patience, uJpomonh'/〕는 길이 참아 주는 것이다.

길이 참지 못하면 승리(勝利)는 없다. 무슨 일이든지 길이 참아야만 열매(熱媒)도 있고 좋은 결실(結實)도 맺을 수 있다.그러나 길이 참지 못하고 원망(신음하다, 탄식하다, 수근거리다)하면 하나님도 싫어하시지만 사람도 싫어하게 된다.야고보는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主)의 강림(降臨)이 가까우니라  형제(兄弟)들아 서로 원망(怨望)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審判)을 면(免)하리라 보라 심판(審判)자가 문(門) 밖에 서 계시니라고 했다.E. 프롬은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어린 아이는 쓰러지고, 또 쓰러지고, 또 쓰러지면 쓰러지지 않으려고 걸을 수 있는 그날까지 노력(勞力)하여 나쁜 점을 계속하여 고친다. 만일 성장(成長)한 인간(人間)일지라도 자신(自身)에게 있어 중요(重要)한 것을 추구(追求)하려 할 때, 어린 아이의 인내(忍耐)와 정신집중(情神集中)을 자기(自己)의 것으로 삼는다면 무슨 일이든지 성공(成功)할 수 있을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주(主)께서 너희 마음을 인도(引導)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忍耐)에 들어가게 하시기를 원(願)하노라

“혹(或) 네가 하나님의 인자(仁慈)하심이 너를 인도(引導)하여 회개(悔改)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仁慈)하심과 용납(容納)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豊盛)함을 멸시(蔑視)하느뇨

“주(主)의 약속(約束)은 어떤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對)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滅亡)치 않고 다 회개(悔改)하기에 이르기를 원(願)하시느니라

7) 귀한 열매(熱媒)를 얻기 위해 인내(忍耐)〔Patience, uJpomonh'/〕해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兄弟)들아 주(主)의 강림(降臨) 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農夫)가 땅에서 나는 귀(貴)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보라 인내(忍耐, uJpomonh)하는 자(者)를 우리가 복(福)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忍耐, uJpomonh)를 들었고 주(主)께서 주신 결말(結末)을 보았거니와 주(主)는 가장 자비(慈悲)하시고 긍휼(矜恤)히 여기는 자(者)시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患難) 중(中)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患難)은 인내(忍耐, uJpomonh)를 는 연단(鍊鍛)을 연단(鍊鍛)은 소망(所望)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試鍊)이 인내(忍耐, uJpomonh)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진실(眞實)로 성숙(成熟)된 믿음의 성도(聖徒)라면 그 연단(演壇)의 때를 인내(忍耐, uJpomonh)할 줄 알아야 밝은 빛을 소유(所有)하게 된다.

 

경행록(景行錄)에 보면 ‘조그만 병(病)을 괴롭다고 하며 못 참고 조금 분한 일을 원통(寃痛)하다고 못 참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사람은 앞으로 어떠한 큰일에 부딪칠지 모르는 것인데, 그 큰일을 당(當)해서 어떻게 감당(堪當)하려는가? 라는 말이 있듯이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살기로 작정(作定)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환난(患難)의 때에 소망(所望)을 가지고 인내(忍耐)해야 할 것이다.

“소망(所望) 중(中)에 즐거워하며 환난(患難) 중(中)에 참으며 기도(祈禱)에 항상(恒常) 힘쓰며 인생(人生)살이는 신앙생활(信仰生活)이나 장거리 경주(競走)로 좋은 열매(熱媒)나 좋은 결과(結果)를 보기 원하신다면 인내(忍耐, uJpomonh)가 반드시 필요(必要)하다.

 

5. 경건(敬虔)〔Piety, 유세베이아 : eujsevbeia 히브리어‘하시드; dysij;

“지식(知識)에 절제(節制)를, 절제(節制)에 인내(忍耐)를, 인내(忍耐)에 경건(敬虔, eujsevbeia)을 )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至極)히 큰 약속(約束)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約束)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情慾)을 인(因)하여 세상(世上)에서 썩어질 것을 피(避)하여 신(神)의 성품(性品)에 참예(參與)하는 자(者)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德)을, 덕(德)에 지식(知識)을, 지식(知識)에 절제(節制)를, 절제(節制)에 인내(忍耐)를, 인내(忍耐)에 경건(敬虔, 헬:eujsevbeia 히:dysij;)을, 경건(敬虔)에 형제우애를, 형제(兄弟)우애(友愛)에 사랑을 공급(供給)하라

경건(敬虔, 헬:eujsevbeia 히:dysij;)은 ‘공경 경;敬’ ‘정성 건;虔’으로 ‘공경(恭敬)하는 마음으로 삼가 조심함’, ‘조심성있는 마음’, ‘선한 행위’, ‘자족한 마음’,(딤전6:6) ‘바르게 사는 것’(시12:1)을 말하는데, 영어로는 Piety or Godlikeness 를 사용(使用)하며, 라틴어로는 Pietas, devotio 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어 공경(恭敬)하고 봉사하는 것’을 말한다.

경건(敬虔, 헬:eujsevbeia 히:dysij;)은 하나님께 자기를 맡기는 마음, 그리고 그 태도(態度). 따라서 여기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생활(요9:31, 딤전4:7-8), 율법(말씀)에 충실(忠實)하려는 심정, 그 생활(生活)까지도 포함된다(행22:12). 이 사악(邪惡)한 세대(世代)에 있어서 경건(敬虔, eujsevbeia)하게 산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딤후3:12). 그만큼 그 가치(價値)는 세상(世上)의 척도(尺度)로 계량(計量)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경건(敬虔, 헬:eujsevbeia 히:dysij;)하게 산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일체(一體)의 가치(價値)를 초월한 은사이다.

경건(敬虔, 헬:eujsevbeia 히:dysij;)은 신약(新約)의 사도행전 및 바울서신에 주로 보여지는데, [의], [정결], [사랑], [온유] 등의 다른 덕목(德目)과 함께 말해져 있다

 

첫째, 경건(敬虔, eujsevbeia)은 히브리어 ‘하시드 : dysij;’로 ‘하나님을 향해 존경심(尊敬心)을 갖는 마음’을 말한다.

경건(敬虔, 헬:eujsevbeia 히:dysij;)은 하나님을 공경(恭敬)하고, 존경(尊敬)하고, 받들어 공경(恭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중심(中心)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하나님을 높이는 마음이다.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萬一)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榮華)롭게 하리라

인간(人間)은 티끌과 같은 존재(存在)요(창18:27) 수아사람 빌닷의 말처럼 벌레요, 구더기 인생(人生)이다. 그런가 하면 세네카가 ‘약하고 타락(墮落)한 존재(存在)’라 하였듯이 인간(人間)은 안개같고 아침 이슬처럼 쉬이 사라지는 존재(存在)인 것이다.

“여호와께서 자기(自己)를 위(爲)하여 경건(敬虔)한 자(者)를 택(擇)하신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이로 인(因)하여 무릇 경건(敬虔, eujsevbeia)한 자(者)는 주(主)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主)께 기도(祈禱)할지라 진실(眞實)로 홍수(洪水)가 범람(汎濫)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이 시대(時代)는 노아의 시대(時代)처럼 경건(敬虔)이 위협(威脅)받는 시대(時代)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하길 “경건(敬虔, eujsevbeia)의 모양(貌樣)은 있으나 경건(敬虔)의 능력(能力)은 부인(否認)하는 자(者)니 이 같은 자(者)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고 가르치고 있다.

 

경건(敬虔, 헬:eujsevbeia 히:dysij;)하게 사는 방법(方法)에 대하여?

1)하나님의 말씀을 늘 상고(詳考)하면 된다.

   (딤후3:14-17)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 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2) 기도(祈禱)를 하면 된다.

     (딤전2:1-2)

      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3) 연습(練習)함으로 된다

      (딤전4:7-8)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4) 경건(敬虔, 헬:eujsevbeia 히:dysij;)을 쫓으면 된다.

      (딤전6: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5) 법(法)을 지키려고 힘씀으로 된다.

      (딤전1:9)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6) 경건(敬虔, 헬:eujsevbeia 히:dysij;)에 관한(寬限) 교훈(敎訓)에 착념하므로 된다.

      (딤전6: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7) 언어(言語)를 바로 함으로 된다.

      (딤후2: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약1:26-27)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참된 경건(敬虔, 헬:eujsevbeia 히:dysij;)이란?

① 바른 인격(人格)에서 나오는 절제(節制)된 언행(言行)이요

② 소외(所外)된 이웃들에 대한(對限) 보살핌 이며

③ 자신(自身)을 지켜 세속(世俗)에 물들지 않는 삶이다.

(유1:15)

이는 뭇사람을 심판(審判)하사 모든 경건(敬虔)치 않은 자(者)의 경건(敬虔)치 않게 행(行)한 모든 경건(敬虔)치 않은 일과 또 경건(敬虔)치 않은 죄인(罪人)의 주(主)께 거스려한 모든 강퍅(剛愎)한 말을 인(因)하여 저희를 정죄(定罪)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

 

둘째, 경건(敬虔, 헬:eujsevbeia 히:dysij;)이란 헬라어 ‘유세베이아 ; eujsevbeia’로‘전심(全心)으로 하나님을 찾아 예배(禮拜)드리는’것을 말한다.

경건(敬虔, 헬:eujsevbeia 히:dysij)이란 세상(世上)의 어떠한 환경(環境)과 여건(與件)에도 굴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라는 마음으로 사는 삶을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살아야만 거룩한 무리들이 되는 것이다 .운동선수(運動先手)가 목표(目標)한 지점(支點)에 이르기까지는 철저(徹底)한 자기 훈련(訓練)과 피나는 연습(練習)의 결과(結果)이듯이, 영적인(靈的仁) 싸움을 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영적(靈的)인 연습(練習)과 훈련(訓練)을 많이 해야 하는 것이다.

A.맥클라렌은“경건(敬虔, 헬:eujsevbeia 히:dysij)한 사람의 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닮은 것이다. 인간(人間)의 영혼(靈魂)의 본향(本鄕)으로서 ‘무엇에든지 정결(貞潔)하고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한 것’이 가득차 있는 하나님의 성품(聖品)과 완전(完全)히 조화(調和)를 이루고 우리의 생명(生命)의 근원(根源)인 하나님의 절대적(絶對的)인 뜻에 완전(完全)히 일치(一致)하는 것은 바로 완전(完全)한 종교(宗敎)의 핵심(核心)으로서, 우리는 이 점에 있어서 하나님과 조화(調和)를 이룸에 비례(比例)하여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도 있고 되지 못할 수도 있다. 두 개의 줄들의 음률을 동일(同一)하게 맞춤으로써 그 중 하나의 줄을 퉁길 때 다른 하나의 줄이 그 소리에 공명(公明)을 일으켜서 어느 것이 처음 퉁긴 줄의 소리인지 분간을 할 수 없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우리의 마음과 뜻과 동일(同一)하게 될 때 우리의 영혼(靈魂)은 하나님의 아름답고도 강한 천상(天上)의 음악(音樂)에 맞추어 비록 낮고 연약(軟弱)하기는 하지만, 아름다운 공명(公明)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고 말하고 있다.

 

셋째, 경건(敬虔, 헬:eujsevbeia 히:dysij)이란 헬라어 ?유라베스?로 ‘좋은 것을 붙잡다’로

         매사(每事)에 신중(愼重)하고 조심성있는 행위(行爲)를 말한다.

 

넷째, 경건(敬虔)이란 헬라어 ‘트레스케이아’로 ‘주를 위해서 열심히 하는 것’을 말한다.

     아라비아의 말에 ‘경건(敬虔)한 삶은 귀걸이와 뺨 사이에 있는 것이지 높은 산봉우리에 있는 것은

     아니다’는 말이 있듯이 참으로 경건(敬虔)한 사람은 고행자가 아니라 삶 속에서 신앙(信仰)의

      빛을  발하는 사람이다.

다섯째, 경건(敬虔)이란 어려움 가운데 있는 자들을 돌보아 주는 행위(行爲)를 말한다.

     성경(聖經)을 보면고 이방인 고넬료는 경건(敬虔)한 사람으로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때를 가리지 않고 구제(救濟)를 한 사람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感動)시켰다. 그는 그로인해 그 자신뿐 아니라 그의 가정(家庭)까지 구원(救援)의 복음(福音)을 맛본 장본인이다.

욥바에 사는 다비다라는 여제자는 살아생전 구제(救濟)를 많이하고 어려운 이웃을 보살폈다. 그로인해 그녀가 죽었지만 베드로의 기도(祈禱)를 통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의 주인공(主人公)이 되었던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경건(敬虔)에 대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敬虔)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란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도 마가복음 12장28절이하를 보면 서기관(書記官)중(中) 한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모든 계명(誡命) 중(中)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하고 묻자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主)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主)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主)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에서 더 큰 계명(誡命)이 없느니라”고 말했다.

 

여섯째, 경건(敬虔, 헬:eujsevbeia 히:dysij)이란 세속(世俗)이 물들지 않는 삶을 말한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淨潔)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敬虔)은 곧 고아(孤兒)와 과부(寡婦)를 그 환난(患難) 중(中)에 돌아보고 또 자기(自己)를 지켜 세속(世俗)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1:27)

“다니엘은 뜻을 정(定)하여 왕(王)의 진미(珍味)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葡萄酒)로 자기(自己)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하고 자기(自己)를 더럽히지 않게 하기를 환관장(宦官長)에게 구(求)하니

 

일곱째, 경건(敬虔, 헬:eujsevbeia 히:dysij)이란 언어사용(言語史用)을 조심하는 것을 말한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敬虔)하다 생각하며 자기(自己)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自己)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敬虔)은 헛것이라”

야고보는 사람의 혀에 쉬지않는 악이 있는데 몸의 지체중에 가장 큰 악이 혀라고 하면서 말에 허물이 없으면 완전(完全)한 사람이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無益)한 말을 하든지 심판(審判) 날에 이에 대(對)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定罪)함을 받으리라”고 하셨다.

혀는 뼈도 없고, 큰 지체도 아니지만 혀를 잘 사용하느냐? 잘못사용(使用)하느냐? 에 따라 한 사람의 일생(一生)이 좌우(左右)되기도 하고, 한 나라의 존폐(存廢)여부를 결정(決定)하기도 한다.

경건(敬虔)하게 사는 자가 참으로 위대(偉大)한 사람이 아니겠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떨어지지 않고 더욱 굳건해 진다면 그러한 사람이 정말로 경건(敬虔)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결론적(結論的)으로 참된 경건(敬虔)이란?

  첫째 : 바른 인격(人格)에서 나오는 절제(節制)된 언행(言行)이요

  둘째 :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보살핌 이며

  셋째 : 자신(自身)을 지켜 세속(世俗)에 물들지 않는 삶이다.라고 다시한번 더 강조(强調)하고 싶다.

 

6. 형제우애(友愛)〔Brotherly, 휠라델프히아 : filadelfiva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至極)히 큰 약속(約束)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約束)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情慾)을 인(因)하여 세상(世上)에서 썩어질 것을 피(避)하여 신(神)의 성품(性品)에 참예(參與)하는 자(者)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德)을, 덕(德)에 지식(知識)을, 지식(知識)에 절제(節制)를, 절제(節制)에 인내(忍耐)를, 인내(忍耐)에 경건(敬虔)을, 경건(敬虔)에 형제우애(兄弟友愛)를, 형제우애(兄弟友愛)에 사랑을 공급(供給)하라”

베드로 사도는 계속해서 성도들이 은혜(恩惠)안에서 성장시킬 덕목(德目)으로 경건(敬虔)에 이어 형제우애(兄弟友愛, filadelfiva)에 대해 말하고 있다.

형제우애(兄弟友愛, filadelfiva)란 헬라어로 우정적인 사랑의 ‘필리아 fivlia,’와 형제라는 ‘아델포스 : ajdelfo"’가 결합된 말로 ‘휠라델프히아 : filadelfiva’라 하며, 형제우애를 영어로는 brotherly-friendship 이라고 한다.

 

첫째, 가난(家難)한 형제(兄弟)를 압제(壓制)하지 말아야 한다.

이 말은 가난(家難)한 형제(兄弟)들을 무시하지 말라는 말이다. 교회(敎會)에서 많은 사람들을 접해보면 가지가지의 생각(生角)을 가진 무리들이 가지가지의 다른 모양(模樣)을 하고 오는 경우(境遇)를 많이 본다. 그런데 정말로 안타까운 현실(現實)은 많은 사람들이 없는 자를 멸시하고 육신(肉身)의 눈으로 보아 조금 낮은 자리에 있다하여 아예 무시하는 무리들을 많이 본다.

성경(聖經)이 가난(家難)한 이웃에 대해 많은 지면(地面)을 할애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정말로 중요(重要)하기 때문이다.

출애굽기22장25절 이하를 보면 “네가 만일(萬一) 너와 함께한 나의백성(百姓) 중(中) 가난한 자(者)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債主)같이 하지말며 변리(邊利)를 받지 말 것이며  네가 만일(萬一) 이웃의 옷을 전당(典當)잡거든 해가 지기 전(前)에 그에게 돌려보내라  그 몸을 가릴 것이 이뿐이라 이는 그 살의 옷인즉 그가 무엇을 입고 자겠느냐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慈悲)한 자(者)임이니라

하나님께서는 과부와 고아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공의로 보호를 해 주신다.

“너는 네 이웃을 압제(壓制)하지 말며 늑탈(勒奪)하지 말며 품군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

레위기 25장은 희년(禧年)과 안식년(安息年)에 대한(大限) 규례(規例)인데 하나님은 여기서도 부자(富者)가 계속(繼續)해서 부자(富者)가 되고, 가난(家難)한 자가 계속(繼續)해서 가난(家難)하게 사는 빈곤(貧困)의 악순환(惡循環)을 막았다.

  13. 이 희년(禧年)에는 너희가 각기(各其) 기업(基業)으로 돌아갈지라)

  14. 네 이웃에게 팔든지 네 이웃의 손에서 사거든 너희는 서로 속이지 말라

  15. 희년(禧年) 후(後)의 년수(年數)를 따라서 너는 이웃에게 살 것이요 그도 그 열매를 얻을

        년수(年數)를 따라서 네게 팔 것인즉

  16. 년수(年數)가 많으면 너는 그 값을 많게 하고 년수(年數)가 적으면 너는 그 값을 적게 할지니

         곧 그가 그 열매의 다소를 따라서 네게 팔 것이라

  17. 너희는 서로 속이지 말고 너희의 하나님을 경외(敬畏)하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14. 곤궁(困窮)하고 빈한(貧寒)한 품군은 너의 형제(兄弟) 든지 네 땅 성문(城門)안에 우거(寓居)하는 객(客)이든지 그를 학대(虐待)하지 말며

  15. 그 품삯을 당일(當日)에 주고 해진 후(後)까지 끌지 말라 이는 그가 빈궁(貧窮)하므로 마음에 품삯을 사모(思慕)함이라 두렵건대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呼訴)하면 죄(罪)가 네게로 돌아갈까 하노라

   17. 너는 객(客)이나 고아(孤兒)의 송사(訟事)를 억울하게 말며 과부(寡婦)의 옷을 전집(典執)하지말라 (

  18. 너는 애굽에서 종이 되었던 일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거기서 속량(贖良)하신 것을 기억(記憶)하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이 일을 행(行)하라 명(命)하노라

“…오직 의(義)롭게 행(行)하는 자(者), 정직(正直)히 말하는자, 토색(討索)한 재물(財物)을 가증(可憎)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賂物)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者), 눈을 감아 악(惡)을 보지 아니하는 자(者) 그는 높은 곳에 거(居)하리니 견고(堅固)한 바위가 그 보장(保障)이 되며 그 양식(糧食)은 공급(供給)되고 그 물은 끊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6. 사람이 학대(虐待)하지 아니하며 빚진 자(者)의 전당물(典當物)을 도로 주며 억탈(抑奪)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者)에게 식물(食物)을 주며 벗은 자(者)에게 옷을 입히며

7. 변(邊)을 위(爲)하여 꾸이지 아니하며 이식(利息)을 받지 아니하며 스스로 손을 금(禁)하여 죄악(罪惡)을 짓지 아니하며 사람 사이에 진실(眞實)히 판단(判斷)하며)

8. 내 율례(律例)를 좇으며 내 규례(規例)를 지켜 진실(眞實)히 행(行)할진대 그는 의인(義人)이니 정녕(丁寧)살리라 나 주(主) 여호와의 말이니라

“궁핍(窮乏)한 자(者)를 삼키며 땅의 가난한 자(者)를 망(亡)케 하려는 자(者)들아 이 말을 들으라

5.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여 세겔을 크게 하며 거짓 저울로 속이며

6. 은(銀)으로 가난한 자를 사며 신 한켤레로 궁핍(窮乏)한 자를 사며 잿밀을 팔자 하는도다

7.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榮光)을 가리켜 맹세(盟誓)하시되 내가 저희의 모든 소위(所爲)를 영영(永永) 잊지 아니하리라 하셨나니

8. 이로 인(因)하여 땅이 떨지 않겠으며 그 가운데 모든 거민(居民)이 애통(哀痛)하지 않겠느냐 온 땅이 하수(河水)의 넘침 같이 솟아 오르며 애굽강 같이 뛰놀다가 낮아지리라

 

둘째, 고아(孤兒)와 과부(寡婦)를 돌보아 주어야 한다.

“그들은 때가 이르기 전(前)에 끊어 버리웠고 그 터는 하수(河水)로 인(因)하여 함몰되었느니라 그들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하며 또 말하기를 전능자(全能者)가 우리를 위(爲)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으랴 하였으나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그 집에 채우셨느니라 악인(惡人)의 계획(計劃)은 나와 판이(判異)하니라 의인(義人)은 보고 기뻐하고 무죄자(無罪者)는 그들을 비웃기를 우리의 대적(對敵)이 끊어졌고 그 남은 것이 불사른바 되었다 하느니라 너는 하나님과 화목(和睦)하고 평안(平安)하라 그리하면 복(福)이 네게 임(臨)하리라 청(請)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敎訓)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고아(孤兒)와 과부(寡婦)를 위(爲)하여 신원(伸寃)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食物)과 의복(衣服)을 주시나니

“이는 내가 부르짖는 빈민(貧民)과 도와줄 자(者)없는 고아(孤兒)를 건졌음이라 망(亡)하게 된자(者)도 나를 위(爲)하여 복(福)을 빌었으며 과부(寡婦)의 마음이 나로 인(因)하여 기뻐 노래하였었느니라”

“너는 객(客)이나 고아(孤兒)의 송사(訟事)를 억울하게 말며 과부(寡婦)의 옷을 전집(典執)하지 말라

 

셋째, 원수(怨讐)같은 형제(兄弟)도 사랑해야 한다.

“원수(怨讐)를 갚지 말며 동포(同胞)를 원망(怨望)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예수님께서는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라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넷째, 가난(家難)한 형제(兄弟)를 도와야 한다.

“…너희는 곡식(穀食)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들의 주림을 구(求)하고…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代身)하리이까 당신(當身)들은 나를 해(害)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萬民)의 생명(生命)을 구원(救援)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當身)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當身)들과 당신(當身)들의 자녀(子女)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慰勞)하였더라”

“…이는 내가 부르짖는 빈민(貧民)과 도와줄 자 없는 고아(孤兒)를 건졌음이라 망(亡)하게 된 자도 나를 위하여 복(福)을 빌었으며 과부(寡婦)의 마음이 나로 인(因)하여 기뻐 노래하였었느니라 내가 의(義)로 옷을 삼아 입었으며 나의 공의(公義)는 도포(道袍)와 면류관(冕旒冠) 같았었느니라 나는 소경의 눈도 되고 절뚝발이의 발도 되고 빈궁(貧窮)한 자의 아비도 되며 생소(生疎)한 자(者)의 일을 사실(査實)하여 주었으며”

“나의 기뻐하는 금식(禁食)은 흉악(凶惡)의 결박(結縛)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壓制) 당(當)하는 자(者)를 자유(自由)케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者)에게 네 식물(食物)을 나눠 주며 유리(流離)하는 빈민을 네 집에 들이며 벗은 자(者)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骨肉)을 피(避)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만일(萬一)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虛妄)한 말을 제(除)하여 버리고”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穩全)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所有)를 팔아 가난한 자(者)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무릇 네게 구(求)하는 자(者)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者)에게 다시 달라하지 말며

“삭개오가 서서 주(主)께 여짜오되 주(主)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所有)의 절반을 가난한 자(者)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萬一) 뉘 것을 토색(討索)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내 형제(兄弟)들아 만일(萬一)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行)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利益)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能)히 자기(自己)를 구원(救援)하겠느냐) 15. 만일(萬一) 형제(兄弟)나 자매(姉妹)가 헐벗고 일용(日用)할 양식(糧食)이 없는데 (16. 너희 중(中)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平安)히 가라, 더웁게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利益)이 있으리요 이와같이 행(行)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다섯째, 형제(兄弟)를 용서(容恕)해 주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罪) 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3. 우리를 시험(試驗)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權勢)와 영광(榮光)이 아버지께 영원(永遠)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4. 너희가 사람의 과실(過失)을 용서(容恕)하면 너희 천부(天父)께서도 너희 과실(過失)을 용서(容恕)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過失)을 용서(容恕)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過失)을 용서(容恕)하지 아니하시리라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主)여 형제(兄弟) 가 내게 죄(罪)를 범(犯)하면 몇번이나 용서(容恕)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 …빚을 탕감(蕩減)하여 주었더니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同官)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그 동관(同官)이 엎드리어 간구(懇求)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許諾)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獄)에 가두거늘 그 동관(同官)들이 그것을 보고 심(甚)히 민망하여 주인(主人)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告)하니 이에 주인(主人)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惡)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蕩減)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同官)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주인(主人)이 노(怒)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獄卒)들에게 붙이니라 너희가 각각(各各) 중심(中心)으로 형제(兄弟)를 용서(容恕)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天父)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원어(原語)에서 말하는 용서(容恕)라는 단어(單語) 해석(解釋)

이제 성경에 수없이 나오는 “용서”에 대한 설교를 어원을 밝히는 설교패턴으로 조직해 보기로 하겠다. 물론 그간 제가 말한 대로 제목은 “용서”요, 부제는 “용서의 어원적 의미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제안은 “용서의 성서적 의미를 바로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서로 용서하며 살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용서라는 단어를 찾되 각기 다른 뜻을 가진 용서를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대개4개의 다른 뜻으로 사용된 용서라는 단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 “용서”는 히브리말 “코팔 ”( 시78:38 )이라는 말로서 이 말의 뜻은 “덮는다”(to cover)는 뜻이다. 그러니까 용서란 우리의 허물, 더럽고 추한 것들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마치 온갖 더러워진 세상에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하얀 색으로 깨끗한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피로써 우리 죄를 용서하시되그리스도의 의로 덮어서 깨끗케해 주셨다.

2. “용서”는 히브리말 “나사 ”( 시 25:18)라는 말로서 이 말의 뜻은 “들어버린다”(to lift up or away)는 뜻이다. 이 말의 뜻대로 용서란 악하고 추한 것들을 들어서 없애버린다는 의미인 것이다. 마치 냄새나는 대변을 치워버리는 것과 같다. 더 나아가서는 기억조차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그 자취도 없게 하시고생각나지 않게 하신다는 것이다.

3. "용서"는 그리스말 "카리조마이 "라는 말로써 "빚을 탕감하다"(to cancel a debt눅 7:43)라는 뜻이다. 죄란 일종의 빚이다. 반드시 갚아야만 한다. 그런데 용서란그 빚을 갚지 않아도 되도록아예 없애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일만 달란트 빚진 자들이다.3. "용서"는 그리스말 "카리조마이 "라는 말로써 "빚을 탕감하다"(to cancel a debt눅 7:43)라는 뜻이다. 죄란 일종의 빚이다. 반드시 갚아야만 한다. 그런데 용서란그 빚을 갚지 않아도 되도록아예 없애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일만 달란트 빚진 자들이다.

4. "용서"는 히브리말 "살라크 "라는 말로써 "보낸다"(send away레위 16:10)라는 뜻으로 아사셀양에게 죄를 지워먼 광야로 보냄과 같이 멀리 우리 죄를 보내버리는 것이다.

(인용 : 주연도 목사, 광주 동성교회)

 

성경(聖經)에서 형제(兄弟)를 우애(友愛)한 대표적(代表的)인 인물(人物)들은 누구, 누구인가?

첫째, 아브람이 그의 조카 롯을 우애(友愛)했다.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所有)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所有)며 롯도 함께하여 남방(南方)으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육축(六畜)과 은금(銀金)이 풍부(豊富)하였더라 …아브람의 일행(一行) 롯도 양(羊)과 소와 장막(帳幕)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의 동거(同居)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家畜)의 목자(牧者)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居)하였는지라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骨肉)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牧者)나 네 목자(牧者)나 서로 다투게 말자”

둘째, 르우벤이 동생 요셉을 우애(友愛)했다.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救援)하려하여 가로되 우리가 그 생명(生命)은 상(傷)하지 말자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曠野)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救援)하여 그 아비에게로 돌리려 함이었더라”

셋째, 요셉이 그의 형제들을 우애(友愛)했다.

“요셉이 시종(侍從)하는 자(者)들 앞에서 그 정(情)을 억제(抑制)하지 못하여 소리질러 모든 사람을 자기에게서 물러가라 하고 그 형제(兄弟)에게 자기를 알리니 때에 그와 함께 한 자가 없었더라…요셉이 형(兄)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가로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恨嘆)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生命)을 구원(救援)하시려고 나를 당신(當身)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代身)하리이까 당신(當身)들은 나를 해(害)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萬民)의 생명(生命)을 구원(救援)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요셉이 그 형제(兄弟)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眷顧)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引導)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盟誓)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子孫)에게 맹세(盟誓)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丁寧) 너희를 권고(眷顧)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骸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넷째, 요나단이 다윗을 우애(友愛)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연락(聯絡)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自己) 생명(生命)같이 사랑하니라  2.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 아비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지 아니하였고

다섯째, 바울은 우애(友愛)를 하였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의 형제(兄弟) 곧 골육(骨肉)의 친척을 위(爲)하여 내 자신(自身)이 저주(詛呪)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願)하는 바로라”

“형제(兄弟)들아 내 마음에 원(願)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求)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爲)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救援)을 얻게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者)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律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律法) 아래 있는 자(者)나 율법(律法) 없는 자(者)와 같이 된 것은 율법(律法) 없는 자(者)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弱)한 자(者)들에게는 내가 약(弱)한 자(者)와 같이 된 것은 약(弱)한 자(者)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貌樣)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救援)코자 함이니 내가 복음(福音)을 위(爲)하여 모든 것을 행(行)함은 복음(福音)에 참예(參與)하고자 함이라”

여섯째,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 우애(友愛)하고 살았다.

“또 내게 주신 은혜(恩惠)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交際)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割禮者)에게로 가게

일곱째, 에바브로디도도 우애(友愛)하고 살았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7. 사랑(Love, 아가페 : ajgavph, 아하바 : hb;h}a)

?경건(敬虔)에 형제우애(兄弟友愛)를, 형제우애(兄弟友愛)에 사랑을 공급(供給)하라?

사랑(愛) : Love

[영] Love최고 극한(極限)의 희생을 나타내는 성서의 가장 중요한 용어. 사랑은 또한 성서의 독특한 말이기도 하다. 이것이 구약에 있어서는 유명한 예레미야의 말,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고 있다(아-하브). 그러므로 인자함(헤세드)으로 너를 인도하였다](렘 31:3)중에, 사랑에 대한 구약의 용어의 가장 중요한 두가지 말이 씌어지고, 또한 양자의 의미의 관계가 보여져 있다. 신약에 있어서는 그리스도교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그리스어로 보통 씌어지는 네 가지의 사랑이라는 말, 에로스(e[rw", 성적인 사랑), 스트로게(stroghv, 가족혈족에 대한 자연적인사랑), 필리아(fivlia, 친구에 대한 우정의 사랑), 아가페(ajgavph, 아가페의 사랑)중에 있어서, 아가페를 쓰고 있다. 특히 에로스가 자연적 내지 가치 추구적 인데 대하여, 아가페는 자기 부정적이고, 기꺼이 자기를 남에게 주는 사랑이다(I 요 3:16). 구약서의 그리스어역(칠십인역)에 있어서도 히브리어의 사랑에 해당되는 [아하바-]의 역어에는, 아가페만이 씌어져 있다. 이것은 모두 사랑을 다른 유사한 사랑과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셋으로 나눌 수가 있다. 그 삼자의 관계를 잘 나타낸 것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 즉 우리도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I 요 4:10-11)라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 있다. 구약에 있어서는 먼저 출애굽의 사건에 의한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에 표명되어 있는데(신 7:6-8), 다음에도 발견되는 대로, 백성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들에게 진실을 다하신 하나님의 긍휼하신 사랑이다(호 2:16,20). 신약에 있어서, 이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외아들 그리스도를 세상에 주신 일에 의해(요 3:16), 또는 죄인인 인간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써(롬5:8), 하나님의 사랑이 분명해진 것이다.

2.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이러한 사죄의 사랑에 대한 응답이다. 많이 사함받은 자일수록, 많이 사랑할 수가 있는 것이다(눅 7:36-50).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서, 신자는 전신전령으로써, 이것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신 6:5,마 22:34-40,롬 12:1).

3. 인간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전적으로, 위에 말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에의 사랑에 기초하여 성립된다(레 19:18,I요 4:11,21).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서로가 자기 이웃을 사랑해야 할 것이 명해졌다. 신약에서는, 교회가 이웃 사랑을 실현하는 터로서, 특별한 의미가 주어져 있다(갈 5:13). 사랑은 교회에 주어진 「새 계명」이고(요 15:12), 성령의 최고의 은사이기 때문이다(고전 12:31-13:13). 이 이웃 사랑은 예수에 의해 「원수」(적대자)에까지 확대되었다. 예수의 원수 사랑의 가르치심에는 성서에 있어서의 사랑의 정점이 보여져 있다(눅 6:27).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자기의 형제, 즉 한가지로 그리스도에 속한 자를 사랑한다(I요 4:21, 요 15:12-17,갈 5:13,살전 4:9). 이 이웃 사랑에는 적까지도 포함되는 것이다(눅 6:27)

성경 요한일서 4장7절을 보면 “사랑하는 자(者)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자(者)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라는 말이 있듯이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創造)하셨기에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 속해 있지만 특히 권능(權能), 생명(生命), 능력(能力), 은혜(恩惠), 복(福), 믿음, 창조(創造)는 하나님께 해당(解黨)되는 말이다.

이 세상(世上)에 참 사랑은 하나님 한 분뿐으로 세상(世上)의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약간 흉내만 낼 뿐이다.

 

심리학자(心理學者)인 프로이드는 사람이 일생(一生)을 살아가는 중에 어디엔가 사랑의 대상(對象)을 갖고 사는데 그 집착(執着)하는 정신적(精神的) 사랑의 대상(對象)을 리비도(Libido)로 규정(規整)하고 있다.

“어린 아이는 어머니에게서 리비도(Libido)를 찾고

일곱살 때에는 친구에게서 리비도(Libido)를 찾고

사춘기 때에는 이성에게서 리비도(Libido)를 찾고

결혼하면 부부에게서 리비도(Libido)를 찾고

부부가 권태기가 되면 자녀에게서 리비도(Libido)를 찾고

자녀가 장성하게 되면 손자에게서 리비도(Libido)를 찾고

늙어서 손자가 커지면 할 수 없이 망태사랑에 빠져

늙은 부부지간에 리비도(Libido)를 찾는다.”

 

이 세상(世上) 전 우주(宇宙)는 보이지 않는 사랑의 줄로 얽혀져 있어 사랑에 따라 움직이고,

사랑을 위해, 사랑을 따라 운행(運行)되고 있다.

사랑의 근본(根本)은 하나님이시다.

사랑의 원천(源泉)은 하나님이시다.

사랑의 시작(始作)도 하나님이시다.

인간(人間)에게 있어서 영육간(靈肉間)의 진짜 사랑은 하나님 한 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참 사랑되시는 하나님을 모르고 가짜 사랑을 찾아 오늘도 헤매고 있다.

종교(宗敎)도 엄밀(嚴密)하게 따져보면 내 영혼(靈魂)이 사랑을 받기 위한 행위(行爲)다. 사람들은 밥만 먹고 사는 동물(動物)이 아니라 사랑을 먹고 사는 인격체(人格體)이다. 그런데 서로 사랑하지 못한 사랑의 결핍(缺乏)에서 싸우게 되고, 미워하게 되고, 살인(殺人)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면 모든 것이 소화(消和)되고, 이해(理解)되고, 덮어지고, 걸러지고, 정제(庭際)되는데 사랑이 떨어지면 모든 것이 문제(問題)가 된다.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 행(行)하는 것, 웃는 것, 먹는 것, 잠자는 것, 노는 것등 모든 것이 좋지 않게 보인다.

이 세상(世上)에서 발생(發生)하는 모든 문제(問題)는 사랑의 결핍(缺乏)으로부터 기인(其人)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늘 사랑이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랑은 주려고 하면 할수록 풍성(豊盛)해지는데 비해 받으려고만 하면 늘 부족함이 있고, 궁핍(窮乏)함이 있다. 사랑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先物)이고 은혜(恩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하나님과 가까운 삶을 살아야 한다.

성경(聖經)에서 바울도 말한 바 있듯이 말세(末世)가 되면 사람들은 “… 자기(自己)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自矜)하며 교만(驕慢)하며 훼방(毁謗)하며 부모(父母)를 거역(拒逆)하며 감사(感謝)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無情)하며 원통(寃痛)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讖訴)하며 절제(節制)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善)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背叛)하여 팔며 조급(躁急)하며 자고(自高)하며 쾌락(快樂)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 보다 더 한다고 하면서 경건의 능력은 없고 경건의 모양은 있는 자들에게서 돌아서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이어 경건(敬虔)의 모양(貌樣)은 있으나 경건(敬虔)의 능력(能力)은 부인(否認)하는 자(者)니 이 같은 자(者)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한다.

예수님의 생애(生涯)를 보면 그분은 예수님 자신(自身)을 위해서나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가난하고, 병(病)들고, 소외(疎外)되고, 힘없고, 연약(軟弱)하고, 낙심(落心)되고, 절망(絶望)에 빠진 자(者)들을 품어주고, 어루만져 주고, 고쳐주고, 도와주고, 기쁨을 주고, 소망(所望)을 주셨을 뿐만아니라 온 몸을 주신 사랑의 화신(化身) 그 자체(自體)이시다.

사도 요한이“사랑하자”고 간절히 외쳤듯이, 이 말은 우리가 해야 할 말이고 전 세계(世界)를 향(向)하여 외치고 실천(實踐)해야 할 말이다.

 

1) 하나님이 사랑(아가파오 : ajgavph) 이시다.

“죄(罪)를 짓는자(者)는 마귀(魔鬼)에게 속(屬)하나니 마귀(魔鬼)는 처음부터 죄(罪)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魔鬼)의 일을 멸(滅)하려 하심이니라 ”

 

2) 은혜(카리스 : cavri"(charis)) 가 사랑이다.

“젊은 자(者)들아 이와같이 장로(長老)들에게 순복(順服)하고 다 서로 겸손(謙遜)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驕慢)한 자(者)를 대적(對敵)하시되 겸손(謙 遜)한 자(者)들에게는 은혜(恩惠)를 주시느니라”

 

3) 진리(알레데이아 : ajlhvqeia)가 사랑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眞理)요 생명(生命)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者)가 없느니라”

“율법(律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것이요 은혜(恩惠)와 진리(眞理)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것이라”

 

4) 믿음(피스티스 : pivsti")이 사랑이다.

“믿음의 주(主)요 또 온전(穩全)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爲)하여 십자가(十字架)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介意)치 아니하시 더니 하나님 보좌(寶座) 우편(右便)에 앉으셨느니라”

5) 생명(조에 : zwhv)이 사랑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復活)이요 생명(生命)이니 나를 믿는자(者)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자(者)는 영원(永遠)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6) 긍휼(오이크틸몬 : oijktivrmwn )이 자비의 사랑이다.

“보라 인내(忍耐)하는 자(者)를 우리가 복(福)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忍耐)를 들었고 주(主)께서 주신 결말(結末)을 보았거니와 주(主)는 가장 자비(慈悲)하시고 긍휼(矜恤)히 여기는자(者)시니라”

7) 선(아가토스 : ajgaqov")이 사랑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善)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善)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生命)에 들어가려면 계명(誡命)들을 지키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善)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외(外)에는 선(善)한 이가 없느니라”

8) 영생( 아이오니오스 조에 : aijwvnio" zwhv)이 사랑이다.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知 覺)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者)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者)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永生)이시라”

9) 소망(엘피스 : ejlpiv")이 사랑이다.

“소망(所望)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平康)을 믿음안에서 너희에게 충만(充滿)케하사 성령(聖靈)의 능력(能力)으로 소망(所望)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願)하노라”

11) 천국(바실레이아 : basileiva)이 사랑이다.

“회개(悔改)하라 천국(天國)이 가까왔느니라 하였으니”

필레오(phileo)혹은 필리아(philia)의 사랑이다. 이 단어(單語)는 ‘우애’ ‘우정’의 뜻으로 친구간의 사랑을 의미(意味)한다. 그리고 이 단어(單語)는 헬라어 성경(聖經)에 무려 25 번이나 나오며 이 단어(單語)에서 파생(派生)된 단어(單語)도 여러 가지가 있다.

철학(哲學)(philosophy)은 지혜(智慧)를 사랑함을 뜻하고

언어학(言語學)(philology)은 언어(言語)를 사랑함을 뜻하고

인류학(人類學)(philanthropy)은 인류(人類)를 사랑함을 뜻하고

필 하모니(philharmonic)는 하모니(화음)을 사랑함을 뜻하고

필라델피아(philadelphia)는 형제(兄弟)사랑을 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聖靈)의 사랑은 아가페적 사랑이다. 이 단어(單語)는 헬라어 신약성경(新約聖經)만 해도 무려 116회나 나오는데 이 사랑은 보상(報償)을 요구하지 않는 사랑이요, 자기희생적(自己犧牲的)인 사랑이요,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스스로 주는 사랑이요, 섬기는 사랑이요, 십자가(十字架)사랑이요, 영원(永遠)한 사랑이다.

“하나님이 세상(世上)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獨生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者)마다 멸망(滅亡)치 않고 영생(永生)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2)기독교(基督敎)는 사랑의 종교(宗敎)다.

(1)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4:8-16)

(2) 예수님은 사랑의 화신(化身)이다.(요3:16, 롬5:6-8, 엡5:1-2)

(3) 성령(聖靈)님도 사랑의 영(靈)이시다.(롬5:5, 15:30)

(4) 계명(誡命)의 대지도 사랑이다.(딤전1:5, 요13:34)

(5) 신앙의 중심(中心)도 사랑이다.(고전13:13)

(6) 교인(敎人)의 본분(本分)도 사랑이다.(요일3:23, 마18:35)

(7) 심판(審判)의 표준(標準)도 사랑이다.(마25:34-46, 약2:13)

성(聖) 제롬은“사랑은 홍역(紅疫)과 같다. 우리는 모두 그것을 거처가야 한다”, A.벤은 “사랑에는 공포(恐怖)가 없다. 최상(最上)의 도덕(道德)이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의혹도 없다. 최대(最大)의 진리(眞理)이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속박(束縛)이 없다. 참다운 자유(自由)이기 때문이다”, J.만은 “죽음보다 강한 것은 이성(理性)이 아니라 사랑이다”, J.셰필드는 “사랑은 인생(人生)의 소금(素琴)이다”고 그의 사랑의 시에서 언급(言及)하고 있다.

13)사랑은 그 어떤 것보다 우월(優越)하다.(고전13:1-13)

(1) 방언(方言)의 은사(恩賜)보다 우월(優越)하다.

(2) 예언(豫言)의 은사(恩賜)보다 우월(優越)하다.

(3) 믿음의 은사(恩賜)보다 우월(優越)하다.

(4) 구제(救濟)의 은사(恩賜)보다 우월(優越)하다.

(5) 순교(殉敎)의 은사(恩賜)보다 우월(優越)하다.

(6) 살찐고기를 먹으며 미워하는 것보다 우월(優越)하다.

“여간(如干) 채소(菜蔬)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7) 사랑은 율법(律法)보다 우월(優越)하다.

“피차(彼此) 사랑의 빚 외(外)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者)는 율법(律法)을 다 이루었느니라”

(8) 믿음, 소망(所望)보다 우월(優越)하다.

“그런즉 믿음, 소망(所望),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恒常)있을 것인데 그 중(中)에 제일(第一)은 사랑이라” (고전 13:13)

14)사랑하는 방법

(1) 변함없이 사랑해야 한다.

“우리 주(主) 예수 그리스도를 변(變)함없이 사랑하는 모든자(者)에게 은혜(恩惠)가 있을지어다”

(2) 넘치게 사랑해야 한다.

“내가 큰 환난(患難)과 애통(哀痛)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向)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3) 풍성(豊盛)하게 사랑해야 한다.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知識)과 모든 간절(懇切)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豊盛)한 것 같이 이 은혜(恩惠)에도 풍성(豊盛)하게 할지니라”

(4) 지극히 사랑해야 한다.

“내 심령(心靈)이 주(主)의 증거(證據)를 지켰사오며 내가 이를 지극(至極)히 사랑하나이다”

(5) 진실(眞實)하게 사랑해야 한다.

“자녀(子女)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行)함과 진실(眞實)함으로 하자”

(6) 거짓없이 사랑해야 한다.

“깨끗함과 지식(知識)과 오래 참음과 자비(慈悲)함과 성령(聖靈)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뜨겁게 사랑해야 한다.

“너희가 진리(眞理)를 순종(順從)함으로 너희 영혼(靈魂)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兄弟)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彼此) 사랑하라”

(8) 오래참음으로 사랑해야 한다.

“모든 겸손(謙遜)과 온유(溫柔)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容納)하고”

(9) 서로 종(從)노릇하므로 사랑해야 한다.

“형제(兄弟)들아 너희가 자유(自由)를 위(爲)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自由)로 육체(肉體)의 기회(機會)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從)노릇하라”

(10) 자기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11) 계속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형제(兄弟)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12)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主)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13) 주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같이 사랑해야 한다.

“내 계명(誡命)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14) 크게 사랑해야 한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앞에 모셔 서매 사울이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자기(自己)의 병기(兵器) 든 자(者)를 삼고”

(15) 병(病)나기까지 사랑해야 한다.

“너희는 건포도(葡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病)이 났음이니라”

(16) 덮어주므로 사랑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열심(熱心)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許多)한 죄(罪)를 덮느니라”

(17) 행(行)함과 진실(眞實)함으로 사랑해야 한다.

“자녀(子女)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行)함과 진실(眞實)함으로 하자”

(18) 마음을 같이하므로 사랑해야 한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合)하며 한 마음을 품어”

(19) 수고(受苦)해 주므로 사랑해야 한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役事)와 사랑의 수고(受苦)와 우리 주(主)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所望)의 인내(忍耐)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記憶)함이니

(20) 죽음같이 사랑해야 한다.

“너는 나를 인(印)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圖章)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强)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殘酷)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氣勢)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인생은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랑의 실존(實存)이요’ ‘사랑의 프리즘(prism.)’이라 한다.

인생(人生)은 하나님의 피조물(被造物)로 속성(屬性)도 사랑이고, 본질(本質)도 사랑이고, 덕(德)도 사랑이고, DNA(염색체)도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없으면 인생(人生)도 없고, 사랑이 있어야만 인생(人生)도 있는 것으로 인생(人生)이 살았다는 말은 곧‘사랑이 있다’는 말과도 일맥상통(一脈相通)한다.

한자에 ‘실존(實存) 무애(無愛)는 무(無)인생(人生)이요 비애(非愛)는 비인생(非人生)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사랑이 없으면 인생(人生)이 없고, 사랑이 아닌 것은 인생(人生)이 아닌 것이다.

때때로 우리의 감정(感情)을 휩쓰는 증오(憎惡)가 지옥(地獄)이라면 사랑은 천국(天國)으로, 사실 사랑이 있으면 장소(場所)를 가리지 않고 작은 천국(天國)에서 사는 것이고, 사랑이 없는 곳은 궁전(宮殿)같은 집도 지옥(地獄)이다. 이와같이 증오(憎惡)가 파토스(pathos)와 카오스(khaos)라면 사랑은 로고스(logos)나 코스모스(cosmos)같은 것이다.

그대는 외로운가요? 그대의 이웃을 사랑하라. 그리하면 살맛이 날 것이다.

그대는 버림받은 상처로 몸부림치는가? 성령의 사랑을 마음껏 받아 드리시오! 그리하면 살맛이 날 것이다.

사랑은 참이고 진실(眞實)이다. 사랑은 억세고 강직(强直)한 것이고 죽음보다 강한 것이다. 사랑은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고 지진(地震)이 나도 쪼개지지 않는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兄弟)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誡命)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兄弟)를 사랑할찌니라

이제 의의(義意) 십자가(十字架)에 대(對)하여 정리(整理) 해보려고 한다.

 

 

죄(罪)의 십자가(十字架) 의(義)에 십자가(十字架)

 

교만

포학

음란

아집

질투

태만

거짓

인내

절제

지식

경건

형제

우애

사랑


위에 있는 십자가는 서로 대칭(對稱)이며 따라서 서로 아주 중요(重要)한 관계(關係)를 가지고 있다.

덕(德)이 있으면 교만(驕慢)하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知識)이 있으면 아집(我執)이 나올 수가 없으며, 절제(節制)하므로 음란(淫亂)한 것들을 물리칠 수가 있다. 또한 포학(暴虐)이 나올 수 있는 환경(環境)에서 인내(忍耐)하면 되고 경건(敬虔)하면 질투(嫉妬)를 지배(地排)할 수 있다. 형제(兄弟)의 사랑이 있으면 태만(怠慢)은 물러가고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다시 간단(間斷)하게 설명(說明)하면』을 덮으면 모든 죄()에서 해방(解放)되는 것이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十字架)의 원리(原理)중 일부분(一部分)인 것이다.

참고(參考)로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의의(義意) 십자가(十字架)는 칭의(稱義)에서 득의(得意)까지를 완성(完成)하는 방법(方法)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따라서 우리의 죄(罪)를 의의(義意) 십자가(十字架)로 덮어서 인간(人間)의 허물을 덮어주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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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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