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교회와 신앙고백에 대한 고찰
장성우 목사
1. 연구의 필요성과 목적
그리스도의 교회 신앙고백은 환원운동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신앙고백의 인위적 형성은 교파분열을 초래하였으며, 교파마다 다른 신앙고백을 함으로 인하여 진리의 혼선이 왔고 성경의 본래적 의미를 이탈했다. 신앙고백이 성경의 진리를 간추려서 체계 있게 진술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구성되어 교파마다 신학적 견해와 신앙의 형태를 다르게 하고 있다. 모든 교파의 신앙고백은 그 교파의 신앙의 기초로써 각 교파가 공적으로 채택하고 지키고 있다.
개신교의 역사 속에는 신앙고백의 차이로 많은 분열을 겪으면서 성경적 신앙고백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분열을 지양하고 순수한 고백을 하자는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인위적으로 만든 고백이 원만하고 만족스러울 수 없기 때문에 교파마다 각자의 신앙고백을 거듭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불트만(R. Bultmann)은 "초기의 신앙고백들은 짧게 '예수는 그리스도시다' 혹은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다'라는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서에서 베드로가 신앙고백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태 16:16)의 간결하고도 단순한 고백을 신앙고백의 기본적 표현으로 쓰고 있다. 그리고 인위적 고백을 배제하고 성경적 신앙고백을 주장하며 주기도문을 외우는 것도 입으로만 뇌까리는 허식적 기도의 절제를 요구하며, 사도신경 역시 인위성과 비 성서적임을 지적하여 거부하는 전통성을 지니고 있다.
이에 그리스도의 교회 신앙고백과 교파 교회의 신앙고백을 역사적으로 비교하며 내용의 진리성과 형성과정을 연구하여 그리스도인의 고백을 바르게 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2. 연구의 내용
교회의 전통을 고려하며 성경의 진리를 새롭게 파악하고자 하는 시도가 신앙고백이라 할 수 있다. 신앙고백이란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양, 그리스도인의 삶, 예배를 통한 신앙의 모든 표현을 말한다. 문서의 형식을 가진 신앙고백서는 이 모든 신앙 고백의 일부에 불과하나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신앙 고백은 문서의 형식을 가진 신앙고백 곧 신앙고백서를 뜻한다.
교회가 전통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되고 신중한 자세로 성경이 이 시대에 새롭게 예언하는 것을 신앙고백서로 표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신앙고백은 한 단체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하는 각자의 문제이다. 신앙인의 공동체는 공적 효력을 가진 신앙고백서를 통하여 전통을 소화하는 동시에 새로운 상황과 시대를 향한 성경의 진리를 표현하고자 한다.(1
그러나 신앙 고백은 분열을 조장하고 인위적 신앙고백이 교파간에 두꺼운 벽을 가지게 만든다. 신앙 고백은 '규범하는 규범'이 아니라 '규범화된 규범'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인위적 어떤 신앙고백도 절대적 완전성을 가질 수 없다.
캘리(J. N. Kelly) 박사는 "일정하게 고정된 신앙고백은 기독교의 필수적 항목들을 요약하고 있으며 교회의 권위를 재가하고 있다."(2고 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구원에 관한 진리의 언급으로 성서는 신경들과 유사한 용어로 '사도의 가르침'(행 2:42), '생명의 말씀'(빌 2:16), '교훈의 본'(롬 6:17), '바른 교훈'(딤후 4:3) 등으로 언급되어 있다.(3
뉴펠드(Vernon H. Neufeld)는 "신약성서의 모든 신앙고백을 검토한 결과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막 8:29)라고 한 제자들의 고백이다"라고 했다.(4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다'라는 신앙고백은 교회의 예배생활에서 자리잡게 되었는데 그것은 합당한 신앙고백이며, 그것을 통한 새로운 회심자가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증거한다. 빌립보 2장 11절의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다"라는 신앙 고백적 외침은 우주의 피조물이 모두 그의 통치 앞에 굴복 찬양함을 말한다. 스칸디나비아의 젤벨(J. Jervell)은 첫째로, 그리스도의 주되심의 고백은 악한 영의 굴복이며, 그리스도의 승리의 동의이고, 둘째로, 그 '이름'의 언급은 회심자가 세례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관계가 있다고 했다.(5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다’라는 말은 초대 교회의 그리스도인의 삶과 우주의 주인을 예배하는 생활 속에서 자리 잡혔다.
알트하우스는 신앙 고백의 내용은 계시된 성서의 내용과 일치된 통일성을 이루기 위하여 잘 요약되어야 하고, 성서의 진리가 은폐되거나 변절되지 않도록 표현하는 신앙 고백이 필요하다고 했다. 슐링크(E. Schlink)에 의하면 "신앙 고백은 '성서의 종합'과 같다"고 했고, 루터교회는 신앙고백을 죄의 고백, 공적인 중언, 신앙고백서의 세 가지 의미로 본다.
신앙 고백의 목적과 용도의 내용으로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요리 문답으로서 - 신조로서 신앙고백은 입교 지망자를 교육할 목적으로 고안되었다. 세례의식을 거행할 때 세례 지원자는 신앙고백을 외워야 했다. 루피누스에 의하면 로마교회에서는 세례의 은혜를 받으려는 사람들이 공중 앞에서 신조를 낭송해야하는 고대의 풍속이 널리 행하여 졌다고 했는데 즉 세례 지원자들은 그 자신의 신앙심에 관하여 회중이 들을 수 있도록 신조를 낭송했다고 했다.
2)입교의 증거로서 - 신앙고백은 교회 구성원으로서 자격을 가늠하는 시금석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신원을 확증하는 표시로서의 상징이라는 개념과 관련이 있다. 초대 교회에서는 신조의 낭송이 신원을 입증하는 표시로서 인정받았다.
3)교리의 기준으로서 - 신조는 교회의 진리를 표명하는 간명한 진술로서, 또한 오류를 폭로할 수 있기 위한 표준으로서 의도되었다. 사실 신조는 신앙을 표현하는 선언일 뿐 아니라 이단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다. 그릇된 교설이 널리 만연될 때에 이것이 교회의 진리를 표명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빈들리(Bindley)는 "교회의 진리는 처음부터 견지되어 오고 있었지만 이 진리는 말로서 표현되기보다는 오히려 기독교인의 의식 속에 잠재해 있었다. 그러다가 이 진리를 부인하는 이단이 등장하자, 교회가 자신의 신앙을 깊이 생각하게 했고, 그 신앙을 조리 있는 말로서 표현하도록 했다"라고 했다.
4)예전으로서 - 신앙고백은 교회의 예배의식으로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세례의식에 속해 있던 신조가 성찬의식에 포함되게 되었는데, 11세기쯤 로마에서 니케아 신조가 삽입되었는데 니케아 신조는 서방교회에서는 스페인교회에서 처음 소개되고 동방교회에서는 이미 그 관례가 존재해 있었고, 586년에 유스티누스파 사람들이 그것을 합법화했다. 고대 고올(Gaul)교회에서는 세례 수여 예배에서 마지막 순서에 노래로서 불렀고, 로마교회도 통일했다. 사도신경은 영국 국교 수도회에서 처음 인정했으나 서방교회 예배의식 안에 들어온 년도는 불확실하다.
5)신앙 체험으로서 - 신조는 개인적인 신앙고백으로 동시에 기독교인의 체험을 반영하며, 그 경험에 도움을 준다. 쿨만(Cullmann)은 역대 신조들의 선언이 현재 시제로 되어 있어 은혜의 현재성과 관련이 있음을 강조한다. 현재성이 전통적 신조에 실존적 성질을 부여하며, 신앙체험을 요구하거나 불러일으킨다.
3. 연구의 범위
신조를 연구함에 있어서 성서적 범위를 살펴보면, 신약 성경의 신앙고백들은'예수는 주시다'라는 간단한 것부터 상세한 개요인 고전 15:3-5, 롬 1:3-4, 4:24-25, 빌 2:6-11, 딤전 3:16, 벧전 3:18-22에서 찾을 수 있으며 다양하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으로서 그의 인격과 그의 사역과 그의 승리 동을 다양하게 포함하고 있는데, 이것들의 발전은 삼위일체적 신경들의 원자료가 되었다. 이 자료 속에는 막 14:61-62, 15:2에 기록된 재판에서 공회 앞에 선포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신조에서 시작되었는데, 신앙고백의 요청을 마태 10:32-33의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속에 암시되어 있다.
4. 연구의 제한점
본 신앙고백의 연구는 제한되어 있는 교단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그에 따른 그리스도의 교회의 견해를 다양하게 검토한 후, 환원적 적격성을 검토하고 성경적 근거에 접근하여 배경과 전통성에 대한 것을 연구하였다.
1. 신앙 고백의 성서적 근거
신앙고백은 신조보다 그 내용이 세밀하고 조직적이며, 구약 안에서도 신조적 신앙고백의 기원을 찾아 볼 수 있는 데, 시 7:1, 시 63:1 등에 간략하고 자발적인 신앙의 탄성으로 신앙고백을 발견할 수가 있다. 십계명(출 20:1-17, 신 5:6-21)에서도 신조적 표현을 발견할 수 있고, 쉐마(Shema, 신 6:4-9, 11:13-21, 민 15:37-41)에서도 구약성서의 교리적 표현으로 신조적 시도를 가지고 있다. 포오티어스(H. W. Porteous)는 이것을 '신조적 언명'이라고 했고, 로빈슨(H. W. Robinson)은 '유일신 신앙에서 나온 유대인들의 원초적 신앙고백'이라고 말한다. 최근의 학자들은 실제로 신 26:5-9의 후반부에 대하여 비록 하나님의 본질보다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구원의 행위를 더 강조 하지만 '작은 신조'라고 명명했다. 신약에서 구약의 신조로서 원형으로 볼 수 있는 구절을 발견할 수 있다. 켈리(A. N. D. Kelly)는 "신약 성서 속에서 권위적 교리의 전달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고 했다.(6
신약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신약 전체가 한 문장으로 시종하는 기독론적 신앙고백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아들이 중심이 되어 있는 것이 신조의 하나의 특징이라고 할 수가 있다.
쿨만(Cunmann)은“그리스도의 선포가 기독교의 모든 신앙 고백의 출발점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역사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사실이다.
바울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전12:3)고 했고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 10:9)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상황을 정확히 언급하지 않았으나 그러나 예수가 주이심을 입으로 고백한다는 것이 주를 공식적으로 저주하는 행동과 대립된다는 것은 그 때가 박해에 의한 시련의 시기임을 암시한다.
고린도전서 15장 3-7절에서 바울은 사도행전에 나오고 있는 베드로의 찬양 형식의 설교와 같은 방법으로 표현되는 네 가지 내용으로 요약되는 신앙고백을 말하고 있다. 이 신앙 고백의 내용은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15:1)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바울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그가 전해 받았고 또한 전해준 신앙고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고백을 과장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용어의 엄밀한 의미에서 어떠한 신조, 신앙고백의 신앙적 표현도 신약 안에서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만 '퀴리오스 예수스' (예수는 주시다)라는 짧은 표현만은 제외될 수 있다.
2. 신앙 고백의 역사적 형식과 내용
신앙고백으로서 신조의 발달 과정 중에서 기독교가 인정하는 중요한 형식에 대하여 형성과정과 내용에 대하여 살펴본다.
1)종교개혁 이전의 신조
가. 사도신경(使徒信經)
스베테(H. B. Swete)는 "현재 형태의 사도신경은 오랫동안의 복잡한 역사와 복합적인 기원을 가진 문서이다"라고 기술했다. 그러나 여러 갈래의 기원에 대하여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심볼룸 아포스롤로륨(Symbolum Apostolorum)'이라는 제목은 390년 빌라노 종교회의에서 처음으로 제기되었으며, 그때의 사도신경은 암브로시우스(Ambrosius)에 의하여 기초된 것으로 본다.
사도신경의 명칭은 이 신조가 성령이 직접적인 영감 속에서 12사도에 의하여 작성되었다는 유포된 전설에 의하는데, 사도신경을 12부분으로 나누어 12사도가 각각 한 문장씩 만들었다는 억지의 기발한 주장도 있는데, 중세기에도 이러한 견해가 있었다.
이러한 신빙성 없는 설명은 6세기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라고 생각되는 내용에서"사도신경은 12명의 작성자에 의하여 각 부분이 모아진 것이며, 사도적 법령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루피누스도 사도신경의 기원에 대하여 "사도신경은 사도들의 공동작업 결과이며, 사도신경이 만들어진 회합은 오순절이다"라고 주장하고 또 "사도들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이 신앙의 규칙이 신조라고 불려져야 한다고 결정했다"고 했다. 사도신경이 12사도에 의하여 저술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토리노의 막시무스(Maximus of Torino), 죤 카시안(John Cassian), 셰빌랴의 이시도레(Isidore of Sevlla) 등이 있다. 그 반면에 프리미니우스는 사도신경의 각 문장이 각각 다른 자료로부터 기원했다는 견해를 지지했다. 이러한 견해는 16세기까지 계속 되었다.
그러나 동,서 교회의 재결합을 위하여 1438년 소집된 페라라(Ferrara)의 에큐메니칼적 회합에서 최초로 그 진부성이 심각하게 논의되었다.
처음에 라틴교회의 대변자인 율리우스 케사리니(Julius Cesarini) 추기경이 사도신경의 권위를 인정 할 것올 호소했으나 그리스 교회가 이를 거부했다. 그리고 에베소의 대주교인 마르쿠스 에우게니쿠스(Marcus Eugenicus)는 동방교회는 그러한 신조는 본 일도 가진 일도 없다고 반대했다.
그후에 사도신경의 사도적 기원에 대하여 유명한 인본주의자인 로렌쪼 발라(Lorenzo Valla)는 반대했는데, 그는 나포리의 한 교회에서 어린 아이들에게 사도신경의 전승에 대하여 이야기 해주는 프란체스코 수도단의 한 수도사를 저지 시켰다. 로렌쪼 발라의 이러한 행동을 변호하는 학문적 논증이 영국의 레지널드 피코크(Reginald Pecock)에 의하여 제기 되었다.
17세기에 들어와서 게르하르트 포스(Gerhard Vos)와 제임스 어셔(James Ussher)는 이 논쟁을 재개하여 현대적 의미의 신조에 대한 탐구의 기원을 열었다. 그리고 19세기에는 성서에 대한 비판과 함께 신조에 대하여도 비판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신약성서 시대에 교리 집성체가 있었는가? 더구나 사도들에게서 나왔다는 교리 집성체가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이렇게하여 신조의 성서적, 사도적 기원이 파괴되자 신조의 내용에 대하여도 공격이 가하여 지고, 그 결과로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 교리 중 몇 가지를 파기하려는 과격한 시도가 나타났다.
오늘날에는 초대교회가 문서화된 공식적 신앙고백서는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미숙한 신조들이 상당히 일찍부터 등장했다는 견해가 있다. 사도신경을 직접 계승한 것은 약 150년경에 나온 것으로 추측되는 고대 로마신조(The Old Roman Creed)인데, 이 신조의 라틴어 본문에 대한 중요한 자료는 루피누스의 소논문이다. 그는 자기 교회인 아퀼레이아(Aquileia)의 신조와 사도들 자신에 의해 작성된 신앙의 표준이라고 믿는 로마교회의 신조를 비교했다.
이 신조의 헬라어 본문은 약 340년경에 로마의 대주교 율리우스에게 보낸 앙키라의 마르켈루스(Marcellus of Ancyra)의 변증론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헬라어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루피누스는 전능하신 아버지라고 쓰고 있음)을 믿으며 그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 이는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로 나시어 본디오 빌라도 치하에서 십자가에 달리고 묻히셨다가 제3일에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살아나시어 하늘에 올라가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오실 것임이라. 나는 성령과 거룩한 교회와 죄의 사함과 육체의 부활과 영생을 믿노라(루피누스 마지막 구절을 생략하고 있음)
베드코크(F. J. Badcock)는 루피누스와 마루젤루스가 실제로 고대 로마문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제기했으나, 그러나 고대 로마신조는 다른 신조로부터 파생된 것이며, 보다 오래된 신조의 후예라는 사실이 인정되고 있다. 라츠만의 견해는 신조의 최초의 윤곽은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 거룩한 교회와 육체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이었다.
현재 보존되고 있는 고대 문서로는 2개의 단편이 있는데, 역사적으로 그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첫째, 에피스툴라 아포스톨로륨(Epistula Apostolorum)에서 나온 것인데, 이를 편집한 시미트(C. Schmidt)는 이것이 180년경 소아시아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그 책의 한 편이 라틴어로 쓰여진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 책은 콥트어와 이디오피아어로 번역되었는데, 그 사실은 그 기원이 이집트에 기원을 두지 않았을 지라도 그곳에 잘 알려졌음을 시사하고 있다.
둘째, 1907년 플린더즈 페트리(Flinders Petrie)와 크럼(W. E. Crum)에 의해 발견되어, 현재 옥스포드의 보들레이(Bodley)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데르 발리째(Der Balizeh) 파피루스에서 나온 것이다. 분명히 고대 이집트의 성례전 기도문으로 보이는 글의 끝 부분에 다음과 같은 간단한 신조가 기록되어 있다.
나는 전능하신 성부와 그의 독생자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과 육체의 부활과 거룩한 공교회를 믿는다
이 문서의 연대는 2세기 후반으로 추정되고, 2세기말과 3세기초에 3개 항목의 형식으로 되어 있는 신조는 발전된 기독론이 첨가되었다. 이것은 힘폴리투스(Hippolytus)의 사도전승(Apostolic Tradition)에 포함된 세례문답에서 찾을 수 있다. 사도신경의 공인본문(textus receptus)은 맨 처음 라이헤나우(Reichenau)에 있는 수도원의 창시자이며, 수도원 원장 프리미니우스(Priminius, 710-724년경)가 저술한 소논문(De Singulis Libris Canonicis Scarapsus)에 소개되어 있다. 하안(G. L. Hahn)과 번(A. E. Burn)의 주장처럼 로마 기원설을 인정할 수 없고, 에스파니아 - 고올(Hispano-Gallic)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널리 인정되고 있다.
남부 고올(Gaul)기원설도 있으나. 그곳은 부르고뉴(Bourgogne)일 가능성도 있고 고대는 셉티마니아(Septimania)라고 불리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추측은 아룰레스의 케사리우스(Caesarius of Aries)가 6세기에 이와 아주 흡사한 신조를 인용했다는 사실이 뒷받침하고 있다. 이것이 서방교회에서는 유일한 세례문으로 정경화되고, 따라서 로마교회의 성례전 예식문으로 받아 드려지게 되었다. 이것이 꼭 공중예배에서만 사용된 것은 아니다. 주기도문과 함께 신조의 낭송이 아침기도의 시작과 저녁기도의 마무리 역활을 했다. 앙구스티누스는 "그것을 매일 외우라" "아침에 일어날 때, 잠자리에 들 때 너회의 신조를 외우라. 주 앞에서 외우라. 마음속으로 그것을 외우며, 거듭 외우기에 지치지 말라"했다.
루터는 "기독교의 진리는 사도신경보다 더욱 간결하고 분명히 진술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고, 칼빈도 동의 했다. 짠(T. Zahn)은 "사도신경은 그 내용으로 판단해 볼 때, 사도적 신조라고 칭호 받을 권리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 사도신경은 예수의 역사와 가르침, 그리고 사도들의 설명적 해설적 가르침과 설교로부터 끌어낼 수 없는 것은 한문장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했다.
나. 니케아(Nicaea)신조
오늘날 일반적으로 니케아신조라고 부르는 것은 니케아 콘스탄티노플(Niceno-Constantinopolitan)신조, 또는 니케아 칼케돈(Niceno-Chalcedonian) 신조를 말한다. 니케아 종교회의(325년)에서 승인된 원래 신조의 본문(참석 주교 수에 따라 '318명의 신조'라고도 한다)은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가 그 신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본문은 4개의 교정본 안에 수록되어 있는데,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에 의하면 니케아 종교회의를 소집하도록 주선한 코르도바의 옷시우스(Ossius of Cordoba)가 니케아신조의 작성에 큰 역할을 했다. 총 주교회의에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개회 선언을 하고 진행 과정에서 하나의 교리적 표준을 채택하기로 의견을 모아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가 그 지방 교구의 신조를 제시하여 이것이 전통 신조로 받아 들여 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세한 견해는 니케아신조가 예루살렘이나 안디옥 중의 한 곳에서부터 유래된 자료가 혼합되어 형성되었다고 보며, 성서에서 인용한 중요 구절은 잠 8:22, 마 19:17, 막 13:32, 눅 2:52, 요 5:19, 10:30, 14:28, 행 2:36, 고전 15:28, 빌 2:7, 골 1:15, 히 1:3등이 있다.
현재의 니케아신조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채택된 신조를 확대시킨 것으로 451년 칼케돈(Chalcedon) 종교회의에서 공식적인 신조로 인정되었다. 이 신조는 콘스탄티노플에 참석한 381명중 150명의 교부들의 신앙으로 선포되었다. 이 신조가 콘스탄티노플에서 작성되었다는 전통적 견해는 극히 의문시되어 왔으며, 오늘날은 칼케돈에서 승인된 신조는 팔레스타인에서 유래된 어떤 신앙 고백문에 기초를 둔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553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 종교회의는 이 신조의 수정판을 받아 드렸고, 589년 톨레도(Toledo)의 종교회의는 '- 그리고 아들'이라는 단어의 첨가를 승인했다. 후에 교리상의 차이로 1054년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카톨릭교회가 최종적으로 결별하게된 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다.
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신조
이 신조를 첫 어구를 따서 '퀴쿤케 볼트(Quicunque Vult)'라고도 하는데, 가장 오래된 사본에는 '피데스 카톨리카(Fides Catholica)'라고 되어 있다. 이 신조는 아타나시우스가 서방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 손수 작성했다고 하나, 부루스(F. F. Bruce)는 "전통적으로 아타나시우스 신조라고 불려지는 것은 결코 신조가 아니며, 아타나시우스가 작성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송가형식으로 된 일종의 신학적 해설이며, 4세기말경에 서방에서 작성된 것 같다"고 했다.
과거의 신조들은 신앙의 오류에서 보호를 목적으로 하는데 '퀴쿤케 볼트'는 삼위일체적 계시를 그 초점으로 맞추고 있는데, 장엄한 머릿말과 그 다음에 구원이 카톨릭 신앙을 지키는 일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2 )종교 개혁 이후의 신앙고백들
종교개혁과 더불어 신조 발달사는 창조적 새 시대가 시작되었다. 종교개혁과 함께 프로테스탄티즘의 신앙고백이 시작되었는데 중요한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다.
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 고백
최초의 개신교의 신앙고백으로 1530년에 루터가 교리적 일치를 위하여 15개 항목으로 작성하였는데, 당시 루터는 금족령하에 있어서 멜란히톤(Melanchton)이 승인을 얻어 작성했고 일곱 제후들이 서명했다.
이 신앙고백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정통성을 논증하기 위한 것이며.카톨릭교회가 기독교의 정통성에서 벗어 났음을 폭로하는 내용으로 온건하게 작성되었다. 이 신앙고백의 첫째 부분은 신앙에 관한 21개 조항이며, 둘째 부분은 개혁되어야 할 일곱 가지의 중요한 폐단을 열거하고 있다. 이 신앙 고백문서는 좀 장황한 문서로서 강한 인상을 주지는 못하나, 칼빈도 이 문서를 옹호하고 이 신앙고백이 루터교회 교리의 고전적 진술이며, 루터파의 모든 교회를 묶는 결속력을 가진다.
나. 발덴파(Waldenses)의 신앙선서
발덴파는 1532년 시안포란(Cianforan)에서 총회를 소집하고 알프스를 넘어온 3명의 종교개혁자를 받아드렸는데, 그중의 한 사람이 윌리암 파렐(William Farel)이었다. 6일 동안 종교개혁의 원칙이 토의되었으며, 결국은 하나의 신앙고백이 채택되었는데 17개 조항으로 되었고 프로테스탄티즘의 기본 교리를 진술한 것이었다.
다. 헬베티아(Helvetia)의 제일 신앙고백
국가적 권위를 지닌 최초의 개혁교회의 신조는 1536년 바젤에서 작성된 헬베티아 신앙 고백인데 스트라스부르의 신학자부터(Bucer)와 카피토(Capito)사이를 화해시키기위한 교섭에서 산출되었으며 스위스의 신앙고백으로 채택되었다. 이 신앙고백은 27개의 짧은 항목으로 되어 있으며, 처음 5개 조항은 성서의 권위와 충분성을 명백하게 진술하고 있다.
라. 제네바 신앙고백
1549년 개혁교회 신앙고백으로 파벨(Farbel)이 작성했다고 하는데, 존 칼빈이 관여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신앙고백은 기독교 강요에 기초를 둔 21개 조항으로 되어 있는데, 이 신앙고백은 종교회의에서 승인되고 시민들에게 이 신앙고백 교리에 맹세할 것이 요구되었다. 샤프는 "이것은 개혁교회 역사에서 아마도 신조에 맹세하도록 공식적으로 정한 최초의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마. 고올(Gaul)의 신앙고백
프랑스의 개혁교회가 1559년 신앙 고백을 채택했는데, 72개 교회를 대표하는 20여명이 4일간의 회합에서 칼빈이 작성한 35개 조항을 40개로 증가 시켰다. 고올 신앙고백은 1571년 라 로켈레(La Rochelle)에서 열린 제7차 개혁교회 회의에서 비준되었다.
바. 39개 조항
1571년 성직자 회의에 의해 비준된 영국 국교회의 39개 조항에 대하여 피어슨(Pearson) 주교는 "이 조항은 꼭 가르쳐야 할 기독교 교리들에 대한 이해와 설명을 완전하게 하는 의도보다는 종교개혁 당시와 그 이후 몇 사람에 의해 부인된 진리에 대하여 지키려는 것이다"라고 했다. 39개 조항에 대한 올바른 해석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았는데, 그것은 칼빈주의도 아니면서 칼빈 교리와 통하고 있다.
사. 도르트(Dort) 신조
1619년 도르트 종교회의에서 채택된 이 신조는 아르메니아의 항의에 대한 칼빈주의의 대답이다. 대부분의 네덜란드 방문객인 세계적 개신교 평민들 이었다. 이 종교회의에서 재확인된 벨기에의 신앙고백(Belgic Confession)과 하이델베르그의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과 더불어 도르트 신조는 오늘까지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공식 표준으로 남아 있다.
타.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 신앙고백
1647년에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영어 사용권내의 장로교회의 교리적 규범인데 이 신앙고백은 1643년 39개 조항을 개정하기 위하여 소집된 의회인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탄생되었다. 4개의 중요한 원칙이 이 신앙고백의 내용을 지배하고 있는데, 그것은 성서의 권위, 하나님의 주권, 양심의 타당성, 교회의 독립이다.
1. 장로 교회 신앙고백의 인위성과 변천 상황
1536년 {기독교 강요}를 칼빈이 발표하고, 그 내용을 간추린 58개 항목이 제네바 요리문답과 21개 항목의 신앙고백을 같은 해에 만들었다. 그것을 계기로 스위스의 1545년 {취리히 신앙고백}, 1522년 {래티안 신앙고백}, 1676년 {스위스 일치신조(Helvetic Concensus Formular)}, 1848년 {제네바 자유교회 신조(The Consensus of the Church in Geneva)} 등 홍수처럼 쏟아졌다. 16세기의 장로교 신앙고백의 공통적 특정이 되는 교리는 성서론과 예정론과 국가와 교회의 관계, 즉 신교의 자유와 교회 제도에 관한 것이었다.(7
16세기의 장로교회 신앙고백은 칼빈의 예정교리를 신앙고백이나 요리문답에 넣지 않았는데,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워서 잘못하면 폐단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선택과 예정의 교리를 다루었지만, 그는 성서에 있어서 중요한 은혜의 교리인 예정교리를 소개했다. 17세기에 이르러 신학자들은 모든 교파가 문자적으로 성서를 취급하는 경향으로 흘러갔다. 그리하여 교리문제의 규명과 정의를 문자적으로 정확성을 찾는 계기가 되었다. 이 경향은 성서적 문자주의로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도 반영되고 일반 신학계에 지배적 영향을 주었다. 이 문자주의적 스콜라주의는 칼빈이나 쯔빙글리보다 더 엄격하고 보수적이 되어서 칼빈의 성서관이나 예정론을 더 엄격하게 이론화해서 성서 문자주의를 만들게 되었다. 그 결과 성서의 점자영감설과 같은 문자적 무오설과 타락 이전 예정이냐 이후 예정이냐 하는 이론들이었다.
교회 밖에서는 종교전쟁으로 사회는 피폐해 갔고 교회 안에서는 신교 스콜라주의자들, 즉 정통주의자들의 교리논쟁으로 어지럽게 되었다.
2. 침례교회의 신앙고백의 형성과 발전
침례교회의 신앙고백은 신조(Creed)의 수준이 아니고, 단지 널리 보급되어 있는 교리에 대한 성명이고, 결코 신앙을 결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7세기 전반의 영국에서 나타난 초기의 고백은 구라파의 재침례교와 알미니안계통의 일반침례교의 배경이었다. 1660년의 표준 신앙고백의 신학은 온건한 알미니안주의이다. 이 신앙고백은 양심의 자유와 침례 받은 신자를 위한 안수례의식을 인정하는 24개 조항이 포함되어 있다.
필라델피아 카티안 침례교회(Church of Keithian Baptists)는 1677년 신앙고백을 제정하고 그후 총회에서는 1724년에 인준되고, 이 고백을 '필라델피아 신앙고백'이라 불리웠다. 이후에 많은 신앙고백이 채택되었다.(8
1962년 미국 남침례회 총회에서 채택된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는 서문에서
가. 이 신앙고백은 기독교 신앙고백의 집약된 의견이다.
나. 우리는 이 신앙고백이 최종적이며 오류가 전혀 없는 완전한 우리의 고백서로 생각하지 않는다.
다. 침례교인은 어느 단체나 어느 때나 그들의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여 발표할 수 있는 고유 권한을 가진다.
라. 침례교인들의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권위는 신,구약 성경이다. 신앙고백서는 성경의 해석으로서의 지침이 될 뿐이며 결코 신앙 양심을 지배할 권위를 가진 것이 아니다
마. 이 신앙고백은 성경에 근거한 종교적인 확신을 천명한 것이며 다른 생활 영역에서의 사고와 자유를 방해하는데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상기와 같은 서문에서 볼 수 있는 내용과 같이 자신들의 신앙고백은 신앙생활의 유일한 권위를 성경에 자신의 뜻을 계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삼고 있다. 그리고 살아있는 신앙은 진리에 대한 이해가 증대되는 체험을 가져야 하며, 새로운 시대의 필요에 맞도록 계속적으로 해석되고 관련 지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크고 작은 단체들이 발표한 성명서는 완전하고 오류가 없는 신앙에 대한 성명으로 볼 수 없으며, 또한 강제성을 가진 공식적인 신경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1. 개신교에서 신앙고백의 권위문제
개신교에서 신조의 권위는 상대적이며 제한적이고 그것은 기독교 신앙과 행위의 표준인 성경과는 항상 차위적인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신앙의 법칙이요, 신앙고백의 신조는 인위적인 교리의 법칙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거룩하고 절대적이나 신앙고백으로서 신조는 교회적이며 상대적 권위를 가질 뿐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교직자와 신자들 전체의 신앙과 행위를 단속하나, 신조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교사들 즉 학자들을 단속한다.
사실상 신조는 성경의 도리를 요약하고 있고 성경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교리와 행위의 잘못된 것을 가리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소시니안(내챠ㅜㅑ문), 퀘이커(Quakers), 유니테리안(Unitarians)은 신자의 권위와 상징을 반대하고 성경의 절대성을 주장하는데 동참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정통적 주장도 동일한 것이다. 현재의 성경해석과 연구방법의 차이가 극심하고 교파의 다양성 속에서 에큐메니칼적 방법으로 신앙의 원칙과 교리의 원칙을 통일하자는 주장이 강력히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성경적 신앙고백은 인위적 방법을 가지고 연합이나 통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요, 그것은 교파적 방법과 분파만을 만들기 때문에 각자가 주장하는 신조에 대하여 반대한다.
18세기에 신앙고백이 수정됨에 따라 신학의 전통에 대하여 혼란이 오고 과연 생명력을 지녔느냐 하는 비판이 도래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제기되게 되었다.
첫째로, 개신교에 있어서 신앙고백이 성서적인가 하는 문제이다. 말씀의 신학의 특정은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대화를 강조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성서 안에서, 성서를 통하여 인간과 대면하며 대화하는 것이다. 토렌스(Torrance)는 말씀신학을 대변하는 것을 계약신학이라 했는데 하나님의 은혜의 계약을 체계화하는 신학이다. 역사의 과오를 시정하고 본래의 성서주의로 회복코자 하는 것이 바르트 신학 운동이후의 경향이었다.
둘째로, 개신교의 신앙고백이 보편적인가 하는 것이다. 모든 시대에 하나님과 대화한 그리스도인들의 진리의 이해와 응답이 모두 통일한 것이 아니지만 하나님의 계시의 본질적인 진리는 일관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어느 특정 시대를 이상화해서 그것으로 통일화시킨다든지 그 시대로 되돌아가려는 태도는 계약신학의 역사적 관심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이에 성서만이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표본이며, 성서의 권위를 넘어설 수 없고, 그것으로 성서를 보완할 수 없다는 주장과 상충하는 것이다.
셋째로, 개신교의 신앙 고백이 역사적 시야를 가지며 에큐메니칼한 의식을 가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날마다 시대마다 새롭게 이해하고 해석하는 끊임없는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과 신학의 전통이 어느 특정한 교리의 내용에 고정되어 있다기보다는 성서주의를 표방하되 성서 석의의 새로운 운동으로 성서의 계시의 말씀과 진리를 해석자가 처한 그 현실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이해하며, 구약과 신약시대와 그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인 기독교의 진리 이해와 신앙 고백과 함께 폭 넓게 대화하는 에큐메니칼한 신앙생활이 특징임을 주장한다. 그러므로 보편적 역사 시각과 에큐메니칼한 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주장한다.
2. 사도신경의 가치와 권위문제
제4세기에 서방교회에서 2차적 형성을 거쳐 현행의 사도신경이 작성된 것으로, 최초의 문헌 사도신경의 제목은 신조 강해를 쓴 루피누스(410)가 처음으로 사용했다. 17세기까지는 사도신경이 사도들이 한 구절씩 고백한 것을 모아서 작성한 것을 전래했다고 생각했다.
배량서 교수(한양대 영어 교육과)는 "사도신경은 하나님을 향한 고백의 형식이 아니라 일반 사람을 향한 일반적인 선언이다"라고 주장한다.(9
그는 전문에 '하나님'을 찾는 호격이 나오지 않고 있으며, 예수를 지칭하는 '그 외아들'에서 보듯이 하나님을 3인칭 소유격으로 쓰고 있다고 비평했다. 그리고 '믿사오며' '믿사오니' '믿사옵나이다' 등은 '믿으며' '믿으니' '믿는다'와 같이 성명형으로 고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사도신경은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구원에 필요한 기독교 신앙의 모든 기본적인 조항을 포함하고 있으며, 부활과 영생에 대하여도 극히 단순한 성경 용어를 잘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삼위 일체 신론을 기반으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 신앙적 설명을 하는데, 창조주 하나님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세 부분이다. 그 중에 가장 치중해서 설명한 것은 둘째 부분으로 초자연적 탄생과 죽음, 부활, 숭천, 재림이다. 그 다음으로 말을 바꾸어 거룩한 공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의 사유, 몸의 부활과 영원히 사는 생명을 설명하고 있는데, 여기서 '거룩한 공회'란 천주교적 언어의 표현으로 개신교에서 문제가 되는 비성서적 부분의 표출이다.
이와 같이 사도신경의 권위와 가치를 강하게 옹호하는 반작용은 그 형식과 내용에서 비성서적임을 강조하고, 성서적 고백만이 완전한 고백임을 입중한다.
1. 초대교회의 신앙고백
그리스도의 교회 신앙고백은 초대 교회적 환원의 고백을 말한다. 초대 교회는 믿고 선포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출발이었다. 그것은 신약 복음의 진리가 보존되어 있었으며, 교리적 규범이 분명하였고, 그리스도의 법에 순종해야 할 도덕적 규범이 되는 신앙고백이었다(갈 2:14, 갈 6:2, 고전 9:21).
특히 신약교회의 교리적 자료는 하나님께서 주신 신성한 것으로 후대에 교리가 형성됨을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그것은 성서가 말하고 있는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가르침에 유념하라는 훈계로서 그리스도인의 상황이 거짓 사상과 이단적 위협에 처할 것임을 예고 준비토록 한 것이다.
빌립보서 2장 11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다"라고 신앙고백으로 표현했고, 막 14:61-62, 15:2에 기록되어 있는 재판 때에 공회 앞에서 선포한 주님 자신의 신조에서 시작되었다. 주 예수는 재판장 앞에서 심문받을 때 당당히 신앙고백을 하여 굳게 설 수 있었는데, 이러한 요청은 마 10:32, 33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오스카 쿨만(O. Cullmann)은 초기 신경의 형성은 교회가 잔혹한 핍박 앞에서 교회가 변증의 필요성을 느낄 때 형성되었다고 주장하고, 고린도전서 12:3절도 동일한 배경으로 그는 설명하면서 순교자 폴리갑(Polycarp)도 "예수는 주시다"라고 증거했다고 설명한다.
초대교인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들과 투쟁하면서 자신을 그들과 구별 짓는 방법을 신앙고백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그들은 피로서 인쳐진 순교자였으며 고백자였다. 초기의 신앙고백은 "예수는 주시다"라는 간단한 것으로부터 상세하게 고백된 내용인 고전 15:3-5, 롬 1:3-4, 4:24-25, 빌 2:6-11, 딤전 3:16, 벧전 3:18-22에 다양하게 표현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그의 인격과 그의 사역과 그의 승리를 내용으로 후에 발전하여 삼위일체적 신경의 원자료가 되었다.
2. 그리스도의 교회의 고백
교회는 자기 신앙고백의 형식을 재검토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데, 과연 성경과 그리스도 안에서 인류에게 계시된 영원한 진리의 빛 안에서 신앙고백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 진리가 교회의 신앙과 생활에 기초를 이루고 있는가에 대하여 문제를 접하게 된다. 기독교의 진리는 변하지 않으나 그러나 이 진리에 대한 사람의 통찰력은 성령의 조명에 따라서 그에 대한 신앙 내용을 표현하며 전달하는 교회의 능력과 함께 성장할 수 있고 또 성장해야 한다. 더욱 인간의 생활과 상황은 일반적으로 불변하는 면을 가졌고 기독교는 그 구체적 국면들을 상대로 설교하지만 언어는 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교회가 관심을 일으킬 만한 언어로 발언을 해야 할 새로운 문제들이 생기게 되기 때문에 신앙고백에 관심을 가진다고 한다.
가. 오늘과 같은 혼란한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입장 표명을 해야 하며, 신앙고백을 해야 하는가? 오늘을 사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의 기초가 될 신앙고백이 과거에 있었던 신조들의 집대성이 되어서는 안되며 그것이 신조로서 아무리 영광스러운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곧 현재의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며, 현대적인 언어 감각을 가지고 영원한 진리를 제시할 책임이 있어야 하며 의미 있고 활력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분명한 것은 아무리 현대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성서에 의한 신앙 고백이어야 한다. 역사적 고백의 연구는 원초적 신앙고백을 토대로 그리스도인에게 신중히 대처되어야 한다.
나. 그리스도의 교회 신앙고백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고백일 때만 중요성올 가진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습니다"(마 16:16) 이 고백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자,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고백이다. 과연 성경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책이라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성경의 메시지의 핵심이요, 성경의 의미를 푸는 열쇠이다. 문학중 최고의 금자탑인 성경의 모든 기록은 그리스도와 복음의 빛에 의해서만 규명된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성경의 신앙과 특성은 그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규범적인 증거라는 것이다. 성경은 그것 자체가 확연하게 기독교적인 진리를 우리가 지켜야 하도록 마련된 규범 그 자체이다. 성경을 진리의 항구적인 규범으로 보는 것과 진리의 항구적인 근원으로 보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며 거기에 따라서 기독교의 신앙과 생활에 중대한 영향을 가져온다.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경을 항구적인 규범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기독교의 신앙과생활의 규범으로서의 견해를 강조한다.
다. 그리스도의 교회 신앙 고백은 '화해'를 중심으로 하며 성경적 의미를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서 화해의 문제가 제기 되는바, 인간이 속박되어 있는 힘과 그 노예적 신분으로부터 인간을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구출해 내는 '구속'으로 본다. '화해'는 그리스도인이 하나되게 하는 성경의 중요한 주제이며, 그리스도인을 노예적 신분과 속박으로부터 구출하는 방편으로 이러한 '화해'의 주도적 역할을 신앙고백의 성경적 규범이 분파를 예방하게 만들며 하나되게 하는 사명을 감당케 한다. 성경은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으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 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으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나님이 너희를 권면 하시는 사신이 된 것이다"(고후 5:17-20)라는 화해의 말씀을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10
4세기부터 신앙고백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람의 응답으로 사용되어 교회의 중심교리가 되며 동시에 구원을 받기에 필요한 권위 있는
신앙 조항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신조는 기독교회의 교리와 실재의 전 분야를 총괄할 뿐만 아니라 행위와 실천의 기본이 되었다.
많은 교파적 분열 요인도 각각 다른 신조를 중심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사도신경의 기원을 마태 16:16의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기인하며, 후에 세례의식을 위한 삼위 일체를 적은 순서와 내용이 결합되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4세기에 서방교회에서 2차적 형성 과정을 거쳐서 현행의 사도신경이 작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후에 이 신조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님에도 초대교회의 실제적으로 필요한 신앙고백으로 설명되고, 세례를 받을 때는 예문적 역할을 했으며 공중예배에서는 주기도문과 함께 암기되었다.
지금과 같은 완결된 신조로 통용되기는 6세기부터라는 일반적 견해이고 그 후부터는 교회들이 가감없이 기본적인 신조로서 받아들여 자기들의 신앙고백으로서의 신조로 전송되었고, 비판없이 대다수의 교회가 받아들이게 되었다.
신앙고백이 교파에 따라 다른 것은 신학적 견해와 신앙의 형태의 차이에 따라 다르며, 한 교파의 신앙고백은 그 교파의 신앙의 기준으로서 공적으로 채택되어 특정적으로 지켜졌다.
개신교의 역사 속에서 신앙고백의 차이는 교파적 분열을 초래하였고 신앙의 혼선을 가져왔으나 신학의 발달과 함께 그 분열은 지양되고 연합운동의 사조와 함께 교파마다 전통적인 신앙고백을 재검토하고 우선 동계 교파들부터 공동으로 고백할 수 있는 신앙고백을 만들려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서 신앙고백의 권위와 가치에 대한 문제도 재평가 받게 되었다.
사람들이 만들어 채택한 신앙고백은 원만하고 만족스러울 수 없기 때문에 종교개혁이래로 교파마다 각자의 신앙고백을 거듭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신앙고백이 가진 전통적 특성과 장단점은 현대교회에 미친 영향이 지대함으로 교회가 자기의 신앙고백 형식을 재검토하는 의무를 슬기롭게 감당해야 한다.
성서에서 이탈된 신앙고백은 교파의 분열을 만들었고 인위적 신조에 의한 조직의 강화를 초래하여 비성서적 고백이 가져온 악 영향이 전반적인 신학 사조의 흐름에 큰 작용을 했었다. 연합적 방법을 위한 성도들의 신앙고백이 강조되고 있는 현대교회에서 그것은 환원적 방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의식적 방법으로서 예배에서 하나의 형식 논리로서 채택하고 있는 고백을 암송하는 절차도 공동체 안에서 재검토해야 하는 주문적 형식의 모순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인위적 고백의 방법이 공동체 속에서 체계를 이루어 강요되는 형태는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되풀이되는 모순과 기본 신앙의 틀 속에 있어야 할 가치를 감가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성서적 방법의 원초적 형태여야 하고, 교회의 정체성 역시 성서적 기준을 강화하는 방법이어야 한다. 신앙고백은 공적이며 교회적인 성서에 계시된 것을 표준으로 하며 개인적인 것은 간증적으로, 그리고 개인적 신앙고백 역시 성서의 조명 속에 있어야 한다.
신앙고백의 중요성이 강조되면 강조될수록 그것은 계시적이어야 하며 인위성을 지닌 것은 개인적인 고백일 뿐 그 자체가 공적 가치를 강요받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많은 교파의 분열을 초래한 신앙고백의 차이는 현대를 사는 기독인에 의하여 비판되어야 하고 재검토의 과정을 거쳐서 성서적 조명 속에서 고백되어져야 한다.
현대와 같이 성경 석의와 연구의 방법이 다양한 속에서 연합적 방법으로 신앙의 원칙과 교리의 통일을 이루자는 주장이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으나, 우리는 인위적 조직에 의하여 통일을 이루는 방법이 아닌 초대 교회적 신앙고백에 의존할 것을 주장한다. 인위적 고백의 산출은 분파적이고 비성서적 작용을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각자의 신앙 양심에 따라 구속받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통제하지 않으나 각자의 자유로운 신앙고백을 인위적 주문적 고백으로 규제하는 행위를 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1) 김균진,『기독교 조직신학 1}(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l984) p. 175.
2) J. N. D. Kelly. Early Christian Creed(London, 1950), p. 1.
3)랄프 마틴, {초대교회 예배} 오창윤 역(서울: 은성출판사, 1986), p. 83.
4) E. Meuer, Ursprung und Anfange des Christientums 3(Berlin: Christientums, l923), p. 210.
5) J. Jervell, in der Gnosis und in den Paunlinischen Briefen(Berlin: Gotting, l960), pp. 206-209.
6) 성서 백과 대사전(서울: 성서 교재 간행사, 1981) s.v. "신앙고백."
7) 이장식, {기독교 사상사 제2권}(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66), pp. 320-322.
8) 청학봉, {침례 교인의 신앙고백}(서울: 동서남북, 1990), pp. 37-46.
9) 중앙일보, 1988년 8월 6일자, 14면.
10) 존 A. 메카이, "1967년 신앙 고백안 시비" {기독교 사상} 제10권, 제5호. 대한기독교서회(1966), pp. 78-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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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그리스도의 교회와 신앙고백에 대한 고찰|작성자 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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