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요구들과 기독교 세계관의 요구 교회일반 2006. 1. 16. 12:25 |
기독교 세계관 포럼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요구들과 기독교 세계관의 요구:
오늘 우리는 기독교 세계관을 치워버릴 것인가, 수정할 것인가,
아니면 더욱 발전시키고 실천할 것인가?
이승구 (국제신학대학원 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오늘날 이 땅에서는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서 다양한 요구가 주어지고 있다. 먼저 이런 요구가 주어지는 배경을 생각해 보자면 기존의 기독교 세계관 제시가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나타나서 그것은 기독교 세계관과 기독교에 대한 일종의 왜곡을 낳고, 따라서 보다 폭넓고 바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게 하지 못하여 결국은 기독교적 실천을 낳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다. 만일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기독교 세계관이 제시되는 방식을 고쳐야 할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논의에서 종국적으로 중요한 것은 결국 우리들 가운데서 실제로 기독교 세계관이 바르게 외현화 되고 기독교 세계관에 입각한 학문과 실천적 활동이 구체적으로 나올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기독교 세계관을 분명히 하고 그것을 실천하자고 주장한 이들의 목표는, 필자가 판단하기로는,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과 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기독교적으로 생각하고 기독교적으로 살아가는 데" 있었다. 사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기독교 세계관"이다: "이 세상과 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기독교적으로 생각하고, 그런 기독교적 생각에 따라 활동하고, 기독교적으로 살아가는 일". 그런데 그러한 기독교 세계관이 어떤 형식으로 주어져야 한다는 그 어떤 틀에 목을 맬 사람은 그 누구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기독교 세계관의 내면화와 외현화가 이루어지고, 그리고 그에 근거한 실천을 낳는 것이라면 기독교 세계관이 어떤 방식으로 제시되어도 별 문제는 없다고 생각된다.
I. 기독교 세계관에 대하여 주어지는 다양한 요구들
그러나 만일에 이 요구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면 우리는 좀더 깊이 생각하고 그 요구를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1. 기독교 세계관을 없애야(=치워버려야) 한다는 논의라면:
기존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진술과 제시가 문제가 있고, 일정한 사상과 연계되어 있다고 판단한 데서 나온 이야기이지만 기존의 기독교 세계관의 진술 방식을 고치자는 것 정도가 아니라, 기독교 세계관 자체를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은 좀 주의를 요(要)한다. 대개 이런 논의는 "세계관"(Weltanschauung)이라는 말이 빌헬름 딜타이(Wilhelm Dilthey)가 처음 사용한 그런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므로, 그런 생각 배후에 있는 암묵리에 계몽주의적 사고 방식이 같이 들어 있으므로 이를 버려 버려야 한다는 식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즉, 딜타이가 "세계관"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전부터, 그리고 딜타이의 이 용어를 채용해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말을 기독교 철학자들이 사용하기 전부터 이와 비슷한 전이론적(前理論的) 사유 체계와 세상을 보는 방식에 대한 고려는 늘 있어 왔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을 말하는 이들이 강조하는 기독교 세계관의 외현화와 내면화는 그런 일에 대하여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명칭이 붙여지기 전부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왔다. 그렇기에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면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용어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관점에서 세상을 보고 그런 내용을 잘 정리하며 그에 근거한 일을 하여야 한다는 것(그것이 우리가 말하는 기독교 세게관이다!)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그런 것은 포기 할 수 없는 것이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세상 전체를 바라보고 그런 관점에서 살아가는 일은 이 땅에 진정한 기독교가 있는 한 항상 있어 왔고, 또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용어로서의 기독교 세계관을 버리자는 말은 있을 수 있어도, 내용으로서의 기독교 세계관을 없애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겨진다.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용어를 버려 버리라는 것은 그 말의 함의가 설득되고 인정되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내용인 "기독교 신앙에 입각해서 온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에 근거하여 실천하는 일"을 버려버리자는 말은 기독교를 버리자는 말 같이 여겨진다. 그러므로 그런 주장은 전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판단된다. 이 땅에 진정 기독교가 있으려면, 또 있다면 진정한 기독교 신앙에 근거해서 온 세상을 바라보고 그에 근거한 생각과 말을 하며 실천을 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2. 기독교 세계관을 바꾸어야 한다는 논의라면:
용어와 표현이 아니라 내용으로서의 기독교 세계관을 바꾸어야 한다는 논의인 경우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다른 상황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1) 성경에 비추어 판단했을 때 기존의 기독교 세계관으로 제시되던 바가 비성경적인 부분이 있는 것으로 드러난 경우라면, 물론 그런 것은 반드시 보다 더 성경적인 방향으로 바꾸어져야만 한다. 그런데 사실 이는 기존의 기독교 세계관 주장자들이 강조한 것이고, 그런 노력을 늘 해왔던 것이다. 기존의 기독교 세계관이 그에 근거하고 있는 개혁 신학의 큰 모토가 "개혁된 신학은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가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기존의 기독교 세계관이 늘 자신을 개혁하려고 해 온 것이 사실이고, 개혁 신학 내부에서는 항상 그런 작업을 해 왔고, 한국에서도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서 기존의 신학이나 세계관을 고쳐가려고 노력해 온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대표적인 예로 영육 이원론과 성속 이원론을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해서 고쳐 가도록 지적하며 노력해 온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일부 기독교인의 생각 가운데 희랍적 사유나 그로부터 나온 신플라톤주의나 우리의 전통적 사상의 영향으로 인간의 몸은 물질적 기원을 지닌 것이므로 악한 것이며 인간을 죄악에 빠뜨리게 하는 주된 원인이 되지만, 인간의 몸 안에 있는 영은 선하고 귀한 것이므로 우리는 몸을 괴롭게 해서라도 영을 정화하며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영육 이원론이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의 주장자들은 성경과 전통적 개혁 신학에 따라 판단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몸과 영의 전인을 창조하신 것이고, 따라서 그것을 전부 아름답고 귀하게 판단하셨으므로 인간의 몸과 영이 창조의 빛에서는 다 귀하고 선하며 아름다운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강조하였다. 인간의 타락도 인간의 몸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라, 몸과 영 모두에 영향을 미쳐서 인간의 영과 몸, 그 어디도 타락과 죄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부분이 전혀 없다는 것을 강조해 왔다. 또한 구속도 인간의 영만을 구속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육의 전인의 구속을 위해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인성 전체가 수난을 받으셨음을 전통적으로 강조해 왔으며, 이 점에 있어서 기독교 세계관은 영혼-기독교(soul Christianity)로부터 전인-기독교(whole-man Christianity)에로의 전환을 강조해 왔다. 마찬가지로 기존의 일부 기독교인들이 삶의 어떤 한 영역만이 하나님과 관련된 영역이고 다른 영역은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영역이라고 생각할 때에 성경과 개혁 신학의 영향을 받은 기독교 세계관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곳도 그리스도의 주권이 미치지 않는 부분은 없고,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영역에서 주님께 순종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해 왔었다.
예를 들어서, 이전에 어떤 이들은 이 세상의 일 가운데 어떤 특정한 일만이 거룩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데 익숙했다. 그래서 생긴 말이 성직(聖職)이라는 말과 성직자(聖職者)라는 말이다. 그리하여 나타난 것이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구별적인 용어였다. 그러나 성경에 근거한 철저한 사고를 주장하는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그 어떤 일이든지 주께서 그 사람에게 불러 사명을 맡기셨으면 그 모든 일이 다 거룩함을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에 충실하게 말하면 목사나 선교사나 어떤 특별한 일에로 부름 받은 사람들만이 거룩한 직임자들, 즉 성직자(聖職者)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아 어떤 일을 한다는 바른 의식을 가지고 바르게 활동하는 한 모두 거룩한 일을 하는 이들이지, 결코 평신도라고 폄하하는 용어로 지칭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주장한 것이다. (여기서도 우리 사회 속에서 기독교 세계관에 충실하게 사고하고 말하는 일이 아직까지도 얼마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지가 잘 드러난다.) 이와 같이 기독교 세계관이 사라지면 교회와 세상의 나쁜 의미에서의 세속화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일은 거룩하지 않은 일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이런 잘못된 세속화를 역전시켜 진정한 그리스도인에게는 모든 것이 거룩한 것으로 만드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연관된 용어의 하나가 "소명"이라는 용어이다. 과거 천주교회에서는 주로 신부나 수녀, 수도사나 선교사 등 소위 거룩한 일에로 부름 받는 것만을 소명(vocatio)이라고, 더 정확히 말한다면 그런 것들이 세속적인 것과는 구별되는 "더 높은 소명"(the higher calling)이라고 하였었다. 그러나 루터와 칼빈에 의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다양한 일에로 그들의 은사를 따라서 부름 받는다는 성경적인 소명설이 분명히 제시되었다. 그것이 보다 성경적이고, 기독교 세계관적인 관점에서 소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런 기독교 세계관에 충실하지 않을 때에만 어떤 특별한 일에 대해서만 소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타락이 발생하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그런 잘못된 의식과 용어의 사용에 유의하면서 어떻게 우리의 의식과 용어의 사용까지도 성경적인 방식으로 변화되어야 하는지를 주장해 온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독교 세계관은 이 세상뿐만이 아니라 심지어 기독교계 내에도 있는 비성경적이고 비기독교적인 모든 요소들을 변화시키는 추구를 계속해 왔고, 계속 그런 노력을 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심지어 우리의 세계를 보는 관점과 그 결과인 기독교 세계관에도 비성경적인 요소가 있으면 그것을 고쳐 가는 일은 계속되어야만 한다. 개혁된 기독교 세계관은 성경에 비추어서 항상 개혁되는 것이다!
그러나 (2) 이 주장의 함의가 다른 데 있어서, 우리가 기독교라고 생각해 왔던 바를 전반적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신학에서는 오늘날 이런 주장이 "수정주의"(revisionism)라는 이름으로 제시되거나 비판되고 있다. 그런데 그 수정의 내용이 상당히 심각한 것이어서 때로는 삼위일체 개념을 버려 버리는 식으로 수정해야 한다고 하거나, 때로는 부활 개념을 포기하거나 전면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하거나, 재림 개념을 바꾸어야 한다고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제 새로운 시대에는 그렇게 수정된 형식의 신학적 진술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기독교 세계관도 그런 식으로 급진적인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면, 그것은 기독교 세계관의 내용에 대한 근본적 수정을 요구하는 것이 된다. 만일에 기독교 세계관의 수정을 요구하는 것이 이런 것이라면 그것은 결국 기독교 존재 자체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 이는 기독교라는 종교,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이 이 세상에 존재해 나가는 것이 중요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수정으로 인해서 기독교라는 형태는 이 세상에 남아 있게 되지만 진정한 기독교가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런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이루시려고 하는 것이 이 땅에 없어지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은 전혀 그런 영향을 받지 않으시고, 차라리 기독교가 없어지는 것이 바른 것이라고까지 생각하는 수정주의자들이 있다. 이에 편승해서 기독교 세계관이 없어지는 것이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과연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실까?
3. 기독교 세계관의 표현 방식, 제시 방식을 바꾸자는 논의라면:
이는 있을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라고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런 다르게 시도되는 기독교 세계관 제시가 과연 어떤 형태를 지닐 것이라고 생각하는 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온 세상을 바라보고 그런 관점에서 실천하는 기독교 세계관의 그 내용이 담아지기만 한다면 그 어떤 형태의 기독교 세계관 제시라도 있을 수 있다. 기독교 세계관은 처음부터 다양성을 염두에 두고 이 세상에 제시된 것이다.
예를 들어서, 기독교 세계관의 제시 방식을 좀더 기사(narrative)적인 방식으로 하자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 우리는 상당히 긍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 바르고 좋은 기독교 세계관 제시는 성경의 기사적(記事的) 성격에 충실한 것이어야 한다.
(2) 바르고 좋은 기독교 세계관 제시는 성경적 기사(narrative)에 참여한 자로서 우리들의 기독교적인 이야기로 표현되고 드러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 계속되는 이야기 속에 우리의 참으로 기독교적 존재 방식과 실천이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시작된 그 기사(narrative)와 이야기 안에 참여하여 그 이야기를 계속해 살지 않는 이들은 진정 기독교 세계관을 제시하거나 실천하는 이들이 아니다.
(3) 바르고 좋은 기독교 세계관 제시는 성경적 기사(narrrative)에 가장 충실한 명제를 진술하려고 노력하는 데서 나타난다. 가장 좋은 신학과 바른 기독교 세계관 제시는 성경의 기독교 이야기에 가장 충실한 일련의 명제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성경 기사(narrative)에 더 충실한 신학적 명제, 그런 기독교 세계관적인 명제가 보다 더 기독교적인 신학이고, 보다 더 기독교적인 세계관이다.
(4) 그러므로 우리는 바르고 좋은 기사적 접근은 바르고 좋은 명제적 접근과 함께 하며 잘 조화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더하여 그릇된 기사적 접근은 참되고 바른 명제적 접근과 반드시 대립하며, 그릇된 기사적 접근은 그릇된 명제적 접근과 조화될 수도 있고(그른 것끼리의 조화), 그 둘이 대립적일 수도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우리의 말을 우리는 좀더 기사적인 방식으로 제시할 수도 있다. 그것은 앞으로 우리가 기독교적 존재로 기독교적인 공동체 안에 속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우리에게 임하여 온 하나님 나라를 드러내면서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실천의 이야기인 것이다. 우리의 실천과 삶으로 써 내려가는 우리의 이야기는 과연 기독교적인가? 여기서 우리의 기독교 세계관이 참으로 기독교 세계관인지의 여부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지난 70-80년대 이후로 이 땅에서 논의된 기독교 세계관이 어떻게, 또 어떤 방향으로 더 진전되어야 하는지, 그 진전과 발전의 방향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것은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여러 요구들로부터 돌이켜서 이제 우리가 기독교 세계관의 요구에로 우리의 관심을 전환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우리의 관심을 맞출 때 우리는 과연 어떤 일에 힘써야 하는가?
II. 기독교 세계관의 요구: 기독교 세계관이 진전되어야 할 방향
II-1. 기독교 세계관 자체의 발전과 성숙의 문제
1. 기독교 세계관의 철저화:
가장 시급한 문제는 역시 기독교 세계관이 아주 철저하게, 모든 면에서 일관성 있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먼저 외적인 철저화(radicalization)를 의미할 수 있다. 다른 기독교 사상에서도 그렇지만 기독교 세계관에서도 철저하지 않은 모습이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 제시가 여러 면에서 철저하게 제시되는 일이 급선무이다. 지금까지 기독교 세계관이 여러 모양과 여러 형태로 제시되어 오기는 했지만 가장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가장 일관성 있는 세계관으로 철저한 일관성을 지닌 세계관(radical Christian world-view)으로 제시되는 일이 필요하다. 말뿐인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 세계관이 아니다. 성경적이지 않은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 세계관이 아니다. 일관성 없는 기독교 세계관도 기독교 세계관이 아니다. 진정한 기독교, 정상에 이른 기독교에 대한 그리움을 표시하던 20세기초의 칼빈주의자들과 함께 우리는 정상에 이른 기독교 세계관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의 생각과 사상에 대한 정리가 그 누구에 의해서든지 이 세상에서 완벽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제시하는 기독교 세계관은 다 불완전한 것이고, 수정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적어도 그 기준과 방향만은 분명히 제시되어져 있다. 성경의 가르침이 기준(standards)이요, 하나님 나라(하나님의 다스리심)를 드러내는 일이 그 방향(direction)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그 기준과 방향에 따라서 가장 성경에 철저한 세계관과 일관성 있는 세계관을 제시하는 일을 위해 함께 노력해 갈 수 있다.
이와 함께 그렇게 제시되는 세계관을 철저하게 내면화하고 그에 근거한 여러 측면에서의 외현화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다[내적 철저화: 내면화]. 지금까지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대해 던져진 질문의 대부분은 제시된 기독교 세계관을 철저히 내면화하고 있는 사람이 드물고 적다는 데서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철저하게 모든 영역에서 주께 순종하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은데 어떻게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크게 성공적으로 나타날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는가? 진리를 생명 같이 여기며 추구하는 일이 없는 데 무슨 기독교 세계관이 있을 것인가? 진정 사랑하는 마음을 끝까지 가지고 가는 이가 없는 데 어떻게 기독교 세계관적 실천이 나타나겠는가?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개개의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세계관을 철저히 내면화할 때에야 성공할 수 있다. 이것이 개개인의 성화와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한국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성화 수준만큼 한국 사회에서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성장하는 것이다.
2. 기독교 세계관의 신국적, 교회적 토대 강화
여기서 따라 나오는 기독교 세계관의 요구는 기독교 세계관의 하나님 나라적 토대와 신국적 성격이 보다 분명해 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신국적 토대와 신국적 성경이 분명하지 않은 기독교 세계관은 결국 그것이 과연 기독교 세계관인지를 물어야 하겠기 때문이다. 성경에 충실하면 할수록, 철저하게 일관성을 유지하면 할수록 기독교 세계관은 가장 신국적인 세계관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러므로 신국적 기초를 상실한 기독교 세계관은 그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기독교 세계관의 교회적 토대를 보다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형태로 드러내는 기관이 바로 교회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야말로 기독교 세계관에 가장 충실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 속에서 교회가 신국적 성격을 잘 드러내지 않아서 사회의 비판을 받는 일이 많은 것은 기독교와 기독교 세계관의 큰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이럴 때 일차적인 작업은 다른 모든 일을 접고서 일차적으로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를 신약 성경이 말하는 교회답게 하는 일이 된다.
교회 밖에서 교회를 돕는 기관들은 그런 성격을 분명히 하면서 교회와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섬겨가도록 해야한다. 기독교 학문 연구소나 기독교 윤리 실천 운동, 교회 개혁 연대, 여러 선교 기관 등의 교회를 돕는 성격이 분명해지면 분명할수록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하시는 일들을 더욱 더 분명히 되며 기독교 세계관에 일치한 일들을 여러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할 수 있게 된다.
II-2.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한 실천들
1. 기독교 학문적 활동
기독교 세계관의 이런 철저화와 내면화를 통해 신국적 교회적 토대가 분명해지는 것과 함께 우리들 사이에서는 진정한 기독교 세계관적 실천이 나오게 된다. 일차적으로 각 학문 분과 내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기독교 세계관에 철저한 기독교 학문적 활동을 하는 일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기독교 학문이 가능한가를 묻는 이들에게 신학에서의 예를 제시하여 우리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여러 번 언급한 일이 있거니와 신학은 모두 기독교 학문일 것이라는 일반인들의 생각에 반하여, 성경과 기독교적 세계관에 충실한 신학적 사유와 활동이 있을 수 있고,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져 간다고 판단되는 신학적 사유와 활동이 있을 수 있다. 그런 것들을 비교하면서 우리는 어떤 것이 과연 기독교적 신학이냐고 할 때에 최소한의 기준을 설정하여 말한다면, (1) 그 학문을 하는 동기와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일 때, (2) 그 생각과 내용이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것일 때, (3) 그 내용 제시에 내적인 모순(비일관성)이 없을 때 우리는 그런 신학을 기독교적인 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은 동기와 목적의 문제이고, (2)는 내용의 문제이며, (3)은 논리성과 형식의 문제이다.
이 원칙을 다른 모든 학문에도 적용하면 우리는 기독교 학문의 성격을 보다 쉽게 일반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학문을 하는 동기와 목적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하는 것이 가장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다. 그러나 이는 매우 사적(私的)이며 내면적인 것이므로 이를 계량화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그 학문의 내용을 진술하는 과정에서 최소한의 힌트는 제시될 것이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두 번째는 그 학문의 내용과 전제와 방법론이 (1) 일차적으로는 성경의 가르침을 간접적으로라도 잘 반영하고 있는가, 또는 성경의 가르침과 대립하는 것은 없는가 하는 것과 (2) 이렇게 성경적 관점에서 해석된 이 세상의 실재[일반 계시]를 잘 반영하고 있는가를 묻는 것이다. 적어도 그 전제와 방법론, 그리고 내용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과 대립하는 학문적 작업은 기독교 학문적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철저하게 마르크스주의적인 전제를 지닌 학문적 활동을, 그래서 철저히 유물 변증법적인 사유에 가득한 학문적 내용을 기독교 학문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철저히 프로이드적 인간 이해에 기초한 심리학이나 상담학을 기독교 학문이라고 할 수 없고, 철저히 인간 중심적인(humanist) 태도를 가지 학문도 기독교적 학문이라고 할 수는 없다. (3)에 대해서는 그 적용 기준이 다른 방식의 학문에 대해 적용하는 것과 어느 정도는 일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이가 자신이 전제에서 말한 바와는 다른 사유를 진행시킬 때 우리는 그런 학문적 작업을 학문적 일관성이 없다고 하고, 그것이 지나칠 때는 그것은 비학문적인 것이라고 판단한다. 기독교 학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내적 일관성을 유지하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내적 일관성의 요구는 학문적 활동에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모든 점을 다 포함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주장을 할 때 충분한 전거를 가지고 말하는가?, 자연 과학이나 응용 과학의 경우에는 충분히 실험적 검증을 거쳐서 주장하는 것인가 하는 것들도 이 문제에 포함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기준을 가지고 있으면 과연 기독교 경제학과 같은 것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답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그 학문을 하는 기본적 동기와 방향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하는가 하는 동기적 수준에서 상당히 많은 학문 활동은 비기독교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진행되고 제시된 학문적 노력이 내적 일관성을 지니는가 하는 것도 비교적 쉽게 판단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기독교 학문으로 제시된 것이 내적 일관성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도 엄밀한 의미의 기독교 학문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내적 일관성을 지니도록 요구받고, 노력의 결과로서 그렇게 되었을 때 그것은 기독교 학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상당히 많은 우리의 학문적 노력은 기독교 학문이 되어 가는 과정이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동기를 가진 경제학이나 정치학의 전제나 방법이 명확히 비성경적인 것이라면 그것도 비기독교적인 것으로 판단될 수밖에 없다. 이 때 일단 쉬운 작업은 기존의 여러 방법론과 여러 이론들에 대해서 (1) 일관성 기준을 적용하여 그 내적 일관성을 묻는 작업을 하는 소위 내적 비판을 시도하는 것이다. 또한 (2)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사회의 실재를 파악한 것에 부합하는 설명을 하여 나가고 있는지를 묻는 일을 할 수 있다. 물론 이 때 꼭 자신의 사회의 실재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기독교적인지를 제시하면서 논의할 필요는 없다. 그저 이 세상의 실재에 대해 주어진 이론이 얼마나 충실한지를 묻는 논의를 하여 나가면 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한 그 논의를 하여 나가는 우리로서는 그 사회적 실재를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여러 이론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로서의 기독교 학문적 활동은 가능하고 비교적 쉽게 진행시킬 수 있을 것이다. 어려운 부분은 철저히 기독교적 관점에 근거한 대안을 제시하고 방법론을 말하고 하는 보다 적극적인 부분이다.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이런 영역이 어떤 전제를 가지고 학문을 하든지 가장 어렵기 때문이며, 이런 일의 시도에 대해 기존 학계의 강한 반발이 있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전제와 방법을 지닌 이들도 부단히 노력해서 이런 시도를 하는 것을 보면서 기독교인들도 나름으로 이런 노력을 하여 갈 필요가 있다. 그것이 항상 기존 학계의 환영을 받으리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카이퍼가 잘 지적한 것과 같이 이 세상에는 늘 두 종류의 학문이 있고, 그 둘 사이에는 반립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자연 과학이나 공학에 대해서도 같은 기준을 적용하며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학문적 작업을 하는 기본 동기와 목적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그리고 그 학문적 논의와 주장에 내적 일관성이 있는가를 물음으로써 일단 기독교적 공학과 기독교적 자연 과학이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할 수 있다. 내용에 있어서는 기존의 이론들이 명백히 성경의 가르침이나 성경의 관점에서 제대로 해석된 실재에 부합하지 않는 측면들을 잘 드러내는 작업을 하는 것은 기독교적 공학, 기독교 자연 과학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 과학과 공학에서는 이 정도에서 멈추는 경우가 많으므로 그 다음 단계의 질문, 즉, 기독교적 전제를 지닌 포괄적 이론 체계의 형성과 제시의 문제가 그리 크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부 뛰어난 공학자들과 자연 과학자들이 그런 포괄적 이론을 제시하는일이 있음을 볼 때에 이런 작업을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있고, 그 책임을 부인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2. 기독교적 활동: 기독교 기업 활동, 경제 활동
기독교 세계관적 실천의 첫 번째 예로 기독교 학문적 활동을 든 것은 학문하는 것을 더 중요시해서가 아니라, 비교적 명확한 기독교적 활동의 한 예를 대표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그러므로 학문 활동을 하지 않는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삶의 영역에서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활동을 하는 것이 요구된다. 기독교인인 학자가 기독교적 관점에서 학문 활동을 하지 않는 것이 이 세상을 따라 가는 것이라면, 다른 분야에 있는 이들이 그 분야에서의 활동을 하면서 다른 이들과 비슷하게 한다면 그것도 역시 이 세상을 따라 가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명확히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전문 영역에서의 활동하는 것이 요구된다.
여기 어떤 그리스도인인 기업가가 있다고 해 보자. 그가 좋은 그리스도인이고 성공적으로 기업을 운영한다고 해도 그가 그 기업을 운영하는 일에서 기독교적 관점이 작용하지 않는다면, 그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그 기업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며, 기독교 세계관에 충실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기업을 한다고 하는 것은 그가 열심히 기도하면서 기업을 운영하고, 사업체 내에서 예배하는 일을 주도하거나 허용하는 것이나, 주일이면 반드시 쉰다는 것으로나, 수익금의 일정 금액을 선교 사업이나 기독교적인 사업을 위해 내어놓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가 기업을 운영하는 태도, 자세, 방향과 철학, 그리고 그 구체적인 운영 방법이 기독교적 원리와 기독교 세계관에 일치해야 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예를 들어서 말하자면, 그가 기업을 운영하는 궁극적 목적이 실질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중간 단계가 자신들의 기업이 섬기는 고객들과 함께 일하는 직원들과 그 가족들을 진정으로 섬기는 데 있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좋은 제품을 만들어 내려고 하며, 그 제품을 가장 효과적으로 홍보하고 보급하려고 하고, 직원들 간의 관계가 가장 정상적인 인간 관계로 이루어 질 수 있게끔 운영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기독교 기업으로서의 내외적 이미지가 분명하도록 해야 한다. 그런 일이 이루어지기까지는 기독교 기업임을 너무 강조하는 것은 별로 효과적이지 않은 것 같다. 이 세상에서 고객들을 참으로 위하고 그러면서 수익을 창출하여 고객과 직원들과 이 사회와 피조계를 위하는 모습을 잘 드러내어야 한다. 심지어 비기독교 기업들도 적어도 홍보로는 그런 이미지를 강조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닌가? 하물며 기독교적인 정신으로 사업체를 운영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찌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한 활동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와 마찬가지로 그런 기업체나 일반 기업체에 고용되어서 일하는 그리스도인들도 그저 이 세상 사람들과 비슷하게 그들을 따라 가면서 있어서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활동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직장을 선택하는 것이나 직장 생활을 하는 동기도 기독교 세계관에 일치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여러 번 지적한 바와 같이, 그 판단의 우선 순위가 (1) 이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며, (2) 자신과 가족을 부양할 수 있고, (3) 이웃을 섬기며, (4) 자아 실현을 할 수 있고, (5) 피조계를 잘 섬기면서, (6) 여유 등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동기나 목적도 하나님과 이웃을 잘 섬기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또한 같은 일을 하는 여러 사람들도 그렇게 서로 섬기기 위해 일을 하여가는 것이 되어야만 그것이 진정 기독교 세계관적 관점에서 직업에 관여하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홈즈가 잘 지적한 바와 같이, "노동은 다른 사람들을 섬기며, '삶의 질을 풍요한 것으로 하며, 건설적인 사회 관계를 개발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창의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소비 생활에서도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소비 양태가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기독교회 내에서는 검소하게 사는 일, 소박하게 사는 일이 강조되어져서, 절약이 미덕으로 강조되어 왔다. 이것에 대해 일부 기독교인인 경제학자들은 이것이 항상 무시간적으로 진리(眞理)일 수만은 없음을 강조하고 나아가는 일이 있다. 그러나 소비 사회인 현대 사회에서는 소비와 구제를 연관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산업 발전을 위한 적당한 소비와 검소한 삶과 구제의 실천을 다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암묵리에 우리 자신을 위한 소비,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소비는 결국 우리의 이기심을 더 증폭시키는 결과를 내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나아가면 빈익빈 부익부를 더 조장하고, 그런 차이를 더 의식하게 하는 방향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소비 사회 속에서는 그리스도인이 앞장서서 구제를 위한 소비를 주도해 가야 한다. 부의 재분배와 사랑과 구제를 실천할 수 있는 건전한 인격의 형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3. 기독교적 정치 참여와 기독교 시민 운동의 전개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직업을 수행해 가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측면에서도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구실을 해야 한다. 사회의 구성원 역할을 할 때에도 우리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그 일을 해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의 사회적 의미와 적용이 여기서 발생한다. 특히 현대 사회는 정치적인 것이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여 "모든 것이 정치적이다"는 말이 일반화된 시대이므로, 우리는 정치적인 것의 중요성을 잘 의식하면서 "그러나 정치적인 것이 모든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과 함께 이렇게 중요한 것으로 떠오른 정치 문제에 대해서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참여를 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계에서 가장 기독교적인 활동, 즉 기독교 세계관적 참여가 이루어지지 않는 영역이 바로 정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식민 통치와 독재 통치 아래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의식화되고 비정치화 되어진 결과로 정치에 무관심한 그리스도인이 아직도 많이 있고, 혹시 관심을 가지고 참여한다고 해도 우리 사회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들이 가지고 있는 정치 문화적 양상을 그대로 나타내 보이는 이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두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1) 우리 정치 문화의 문제점으로 나타나며 늘 지적되는 지방색 문제가 한국 그리스도인의 정치 의식과 활동에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경험하고 있다. 또한 (2) 미국과의 관계성에 대해서 우리 나라의 일반 국민들이 세대간의 갈등으로 보이는 것을 그리스도인들도 상당히 유사하게 드러내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난 3.1절 때의 상호 대조적인 기독교 집회들의 모습에서도 그런 것이 나타났고, 미국의 대아라크 전쟁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의식에서도 그런 서로 대립되는 양상이 심지어 기독교인들에게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는 어떤 사안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서로 다른 의견이 일체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늘 불완전하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끼리도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한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할 수 있고, 그 둘 사이의 흥미로운 토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두 가지 예들, 즉 지방에 따른 대립과 세대에 따른 대립은 이 세상의 대립 양상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으로 보이기에 문제이다. 그것이 과연 기독교적인 관점에 따른 판단을 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적 영역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참여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신분과 지위와 세대와 출신 지방, 학력 등등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아닌 기독교 세계관에 따라 판단하는 일이 정치 영역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기독교 세계관 실천은 요원한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이와 함께 공적인 문제에 대해서 직접 정치적인 것을 통하지 않은 일반 시민 운동적 운동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기독교적 관점에서 열심히 참여하며 활동해야 한다. 환경 문제나 인권 문제 등에 대해서는 비기독교인과 연합하여 어떤 상대적으로 옳은 것을 주장하는 일을 할 수도 있고, 독특하게 기독교적인 주장을 하는 시민 운동도 필요하다. 단지 그 동기와 방법이 가장 선하며 그러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 그런 방식으로 일을 해야만 한다. 우리의 실천을 바라보는 비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기독교적 세계관의 일부를 볼 수 있도록 하는 그런 활동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단체나 활동이 기독교적 관점을 일관성 있게 드러내는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얼마나 많은 이들이 헌신적으로 시간을 내어 가면서 참여하는가 하는 것이다.
4. 기독교 학교 운동과 기독교 교육 운동
위에 언급한 모든 일이 진정 성공하려면 우리 가운데서 다음 세대에 철저한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하여 활동하는 이들을 기독교적으로 교육하는 기독교 교육 운동이 있어야 한다. 교육 문제 전반에 대해서 진정으로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며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일의 한 방도로 기독교 학교를 세우는 운동, 기독교 대안 교육 기관을 세우는 일들, 진정한 기독교 대학을 세우는 일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 학교는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한 학문 공동체이기에 이는 우리의 기독교 세계관 실천의 매우 주요한 한 방도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 속에서는 우리의 모든 노력이 다 기독교 학교에 경주되어서는 안되고, 일반 학교와 그 제도 속에 들어가서 그것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변화시켜 가는 노력에도 상당한 신경을 써야 한다. 어쩌면 그것도 효과적인 방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방도를 취하든지 진정한 기독교 교사와 기독교인인 교수를 키우는 일에 우리의 우선적인 노력이 부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 이 일을 할 수 있는 기독교학대학원(Gruduate School of Christian Studies)이나 기독교 교육 대학원 등의 설립이 필요할 수도 있다.
5. 현대의 다양한 문제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적 논의
이 모든 것의 효과적으로 작용한다면 결국 우리 사회 속의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 공적인 영역에서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논의하는 일이 증가하여야만 한다. 이런 공적 영역에서의 토론에서의 기독교적 관점의 제시는 일차적으로 기독교회 내에서의 철저한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한 의견의 형성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런 기독교적 입장을 모든 이들 앞에 가장 효과적으로 제시하는 일이 이루어 질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 우리 자신을 드러내려고 한다든지, 그리스도인의 많은 숫자를 과시하거나 그것을 이용해서 무엇을 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기독교 이기주의를 주장하는 것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 앞에서 감동 받고 기독교 세계관의 진정한 힘을 느끼게 될 수 있는 이들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힘에만 의존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공적인 영역에서도 분명히 전달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
생명 존중과 관련된 일, 생명 복제, 배아 복제와 관련된 일, 그리고 환경 문제와 통일 문제 등에서 기독교적 분명한 시각의 제시가 있어야 하고, 그런 관점을 지닌 자들다운 활동이 있어야 한다. 이 시대의 진정한 환경 지킴이, 생명 지킴이는 창조와 구속의 빛에서 온 세상과 생명을 바라 볼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이다.
6. 기독교 세계관적 문화 활동
이 모든 것은 결국 이 사회 속에서 기독교 문화적 활동을 하며, 이 세상의 문화를 변혁시키는 활동에로 나아가는 일을 낳아야만 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결국 기독교 세계관적 문화 활동의 문제에 기여해야만 한다. 기독교 문화적 활동을 낳지 않는 기독교 세계관은 그것이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이름에 과연 부합한 것인지를 자문해야 한다. 좁은 의미의 문화 사역이라는 말은 기독교 문화 운동의 참 뜻을 해칠 수 있다 기독교 세계관에 근거한 폭 넓은 문화 활동의 길이 모색되어야만 한다.
III. 마치는 말
나는 이 글에서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세상 전체를 바라보고, 그에 근거하여 살아 나가는 일"을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규정하고, 이런 의미의 기독교 세계관은 없어지거나 치워져서도 안 되고, 수정되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오히려 나는 가장 성경이 철저한 방식으로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 세상 전체를 바라보고 그런 관점에서 사는 일이 더 철저하고 폭 넓게 나타나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것이 창조의 하나님을 창조주로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전인과 온 세상을 선하고 아름답고 고귀하게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의 죄악과 타락을 성경적으로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다: 타락과 죄는 인간 존재 전체와 그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을 죄의 오염과 부패로 물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는 전인과 온 세상이 다 죄의 부패케 함과 오염 아래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그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 세상을 바르게 이해하며 고쳐 보려고 하는 것은 부분적으로는 옳을 수 있으나 그 전체 구조 아래서는 옳지 않은 시도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구속의 하나님을 바르게 인정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로 받아들이는지의 문제가 나타난다. 인간과 온 세상의 타락상이 이러하기에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인성(human nature)을 당신님에게로 취하셔서 죄에 대한 형벌을 받으셔서 대리 속죄[代贖, vicarious atonement]를 이룩하시고, 그 대속하신 인간들을 회복시키셔서 하나님이 선하다고 보시는 일이 힘쓰는 친 백성이 되게 하신 것이다. 여기 하나님 나라의 출현과 그 나라 백성의 존재가 있게 된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 땅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 백성다운 실천을 하여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학문을 하든지 기업을 하든지, 기업의 일원으로 활동하든지, 시민 사회의 일원으로 있든지, 정치 문제에 대해서든지, 경제 문제에 대해서든지. 문화적 활동에서든지 그리스도인들은 그 모든 일들을 하나님 나라 관점에서 수행해 가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기독교 세계관적 실천이 있는 것이다.
우리 주위의 다양한 문제들이 나타나는 현상과 관련해서 우리가 기독교 세계관적 관점에서 지금 당장 힘써야 하는 몇 가지 문제를 언급함으로써 이 발제를 마치고자 한다.
1. 우리 자신의 의식이 철저하게 성경적이고 하나님 나라적인 의식이 되어야만 한다. 그런 의식이 없이는 이 세상에는 기독교 세계관이 있을 수 없다. 그런 의식을 가진 이는 온 세상을 하나님 나라적 관점에서 보며,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려고 애쓰는 이로 나타난다.
2. 그런 개개인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로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3. 하나님 나라의 개인과 공동체(교회)는 이 세상에 눈앞에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그들의 삶과 존재와 활동으로 드러내어야만 한다.
4. 동시에 하나님 나라 복음[天國福音]을 전하여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를 증시하는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며, 그렇게 교회 공동체 안에 들어온 이들의 온 세상을 보는 관점이 진정한 기독교적 관점이 되고, 그에 근거해서 사는 일을 하게끔 애써야 한다. (전도된 이가 1, 2, 3, 4, 5, 6의 수준에 이르러야 함을 뜻한다).
5. 그렇게 기독교화된 이들이 학문을 하는 일, 기업하는 일, 사는 일의 하나님의 통치하심, 즉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가는 것의 실재를 드러내어야 한다. (이는 1이 구체적인 삶의 영역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1과 5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6. 하나님 나라적 의식에 근거한 문화적 활동을 드러내도록 해야 한다. (이것도 1, 5와 분리된 것이 아니고 그것이 가장 현저하게 외현화된 경우라고 보아야 한다).
[출처]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요구들과 기독교 세계관의 요구|작성자 단비
'가치관! 세계관! 인생관! 신앙관! '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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