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2018/5/20)-성령강림주일(1)
다른 보혜사(성령)
요16:5-8
18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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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성령강림절입니다. 요한계시록 설교를 몇 주 멈추고, 성령강림절에 맞추어 성령에 대한 설교를 몇 주 동안 하겠습니다. 오늘은 성령에 대한 서론부분으로 보혜사 성령님에 대해서 설교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신 후에 예수님이 계셨던 그 모든 공간, 그 모든 존재를 채우기 위한 그 대안으로 다른 보혜사를 소개 했습니다. 이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하시던 일을 그냥 두시고, 대책 없이 가신 것이 아니고, 그 대안으로 다른 보혜사인 성령님께 인수인계를 하시고 가셨습니다. 이 다른 보혜사는 새로운 다른 일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하셨던 그 연장선상에서 계속하여 이어서 해 나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보혜사의 위력은 대단한 것입니다.
문제는 여러분과 제가 이 다른 보혜사의 존재에 대하여서 우리가 깊이 잘 모를 뿐 아니라, 활용도 제대로 못하고, 그리고 성령님으로부터 자문을 받는 것이 너무 희미합니다.
이 세상에서도 자기를 자문하는 유능한 변호사가 있으면, 그 사람은 사는 수준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이 보혜사라는 말은 (paravklhto" 파라클레토스-보혜사,중재자, 돕는 자, 변호사) 우리 나라말로 하면 원래는 보혜사라고 하지 않고, 변호사라는 말입니다. 이 말(파라클레토스)은 그 당시 법정에서 쓰는 용어입니다.
법정에 가면 누가 있습니까? 재판하는 재판관이 있고, 이 사람의 모든 죄를 다 파헤쳐서 판사에게 공정한 판결을 내리라고 하는 검사가 있습니다. 그 죄인을 변호해 주는 변호사가 있습니다.
변호사는 죄인이라 할지라도 법의 모든 내용을 유리하게 적용할려고 하는 사람이 변호사입니다. 그래서 유능한 변호사만 있으면 사형감도 무기징역으로 됩니다. 무기징역도 10년으로 됩니다. 10년 받을 사람이 무죄도 됩니다. 이것이 변호사의 위력입니다.
그런데 변호사 중에도 전관예우 변호사가 있어요. 이 전관예우 변호사가 우리나라에만 있는게 아니고, 전 세계에 다 있어요. 우리나라는 이것을 범죄시 하지만, 외국에서는 이것을 다 받아 들이고 있어요.
전관예우 변호사는 왜 위력이 있느냐? 학교를 졸업하여 판사와 검사가 되면, 이분들은 30년을 일을 합니다. 퇴직 말년에 지금까지 자기가 맡아온 사건들이 있습니다. 형사소송, 민사소송 등등, 자기가 옷을 벗고 변호사가 되었습니다. 몇 일 전에 자기가 하던 일입니다. 그 사건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변호사의 자리에 서니 자기가 지위했던 일인데 얼마나 잘 알겠어요? 이제는 자리를 바꾸어서 변호사의 자리에 서니까 이 사건에 대하여 제일 좋은 법을 적용시켜서 판사에게 촉구를 합니다.
“이 사람을 절대로 무거운 벌을 주면 안 됩니다. 왜 어제 그저께 나도 당신자리에 있었소” 그리고 판사 자신도 언젠가는 옷을 벗고 변호사 자리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에 전관예우 변호사가 맡은 사건은 형량을 무겁게 줄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전관예우가 위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 기간이 3년입니다. 이 사람은 부르는 것이 값입니다. 이것이 전관예우 변호사의 위력입니다.
그런데 전관예우 변호사보다 훨씬 위력이 있는 분이 보혜사입니다. 이 보혜사는 하나님의 법정을 다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재판을 다루어 가실 지를 다 아시는 분이 보혜사입니다.
오늘 우리는 보혜사 성령님의 보호를 받아야 합니다.
보혜사는 첫째, 보, 보호하시고, 둘째, 혜, 은혜주시고, 셋째, 사, 가르쳐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를 성공시킬려고 우리 속에 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면서 우리 속에 보내 주신 분이 보혜사 성령님인데, 기독교 2,000년의 역사는 이 보혜사 성령님의 시대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순간, 이 보혜사 성령님이 내 속에 와 거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기만 하면, 보혜사 성령님이 내 속에 오셔서 거하시는 것입니다.
(요14:16-17)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여기서 “또 다른 보혜사”가 성령님이십니다. 그 분은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분은 진리의 영이기 때문에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너희는 그를 아나니..” 예수 믿는 우리는 보혜사 성령님을 알기 때문에 내 속에 와 거하시고, 영원히 함께 계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보혜사를 배척하면 안 되지요? 보혜사를 배척하는 것을 다른 말로 성령을 소멸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살전5: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반갑게 맞이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성도들은 이 시대에 가장 최고의 변호사를 알기를 우습게 알뿐 아니라, 무시하고, 소외시키는 큰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이러니 여러분과 저의 인생이 잘 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거의 모든 실수와 죄는 벗어버리고, 오늘부터 다른 보혜사를 붙잡고 삽시다. 이 분은 여러분과 저를 성공시키시려고 오신 하나님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 한분입니다.
우리가 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가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생의 색깔이 정해진다고 보면 됩니다.
대부분 목사님들은 이 보혜사의 자문을 받습니다. 보혜사의 자문을 받지 않고, 자기의 지식과 지혜로 설교하고, 목회를 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기도하면서 보혜사 성령님의 자문을 받습니다.
이 우주의 지식의 총량 중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게 몇 퍼센트나 되겠습니까? 하루에 책으로 출판되거나, 신문, 방송, 인터넷상에, 그리고 각종 세미나 등등, 하루에 쏟아내는 지식의 총량을 책으로 만들어 우리가 그것을 다 배워 알려면 아무것도 안 하고 꼬박 그것만 연구해도, 7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그러면 1년 365일 동안 쏟아내는 지식의 총량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사는 동안 평생 동안 쏟아내는 지식의 총량은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니면 이 우주가 생성되기 시작한 후부터 쏟아낸 지식의 총량은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이 우주의 지식의 총량 중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조금 배워서 안다고 교만한 것은 아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은 지식을 배워도 선택적 지식으로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배우고, 경험하고, 습득해서 알고 있는 전문적인 지식은 있지만, 그 외에 다른 것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는 것을 다른 사람이 모른다고 무시하거나 멸시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을 자기는 모르고 있는 게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전공이 아닌 것을 교만하게 아는 체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지식을 시시하게 여기고 무시하면 안 되는 겁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언제부터인지 장로님들이 목사님의 설교에 간섭하기 시작합니다. 예배 마치고 와서 ‘왜 그런 설교하냐?’ ‘설교는 이렇게 하세요. 이런 설교하세요. 다음 주일 설교 제목과 본문은 뭡니까? 한 달 치, 6개월 치, 설교제목과 본문을 당회에 내 놓고 허락을 받으라’ 고 하고, 성령 설교하면 그런 설교 하지 말라고 하고, 천국 지옥 설교하면 그런 설교하지 못하게 하고, 헌금, 은사 설교 못하게 하고,
이게 한국교회가 망하는 징조예요. 교인들 입맛에 맞는 설교만 하면, 목사님도 편하고, 듣는 사람들도 기분은 좋겠지만, 영은 다 죽어 버리고, 성경, 복음과는 먼 신앙생활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설교는 성령의 인도하심, 성령의 감동하심 따라 해야 합니다. 그래서 보혜사의 자문을 받은 설교가 복음적이고, 성령의 밀어주는 설교예요. 제가 요한계시록을 설교하기 전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설교하게 되면,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재미도 없을뿐더러, 교인들이 지겨워하고 싫어할 텐데, 그리고 요즘 교인들이 세상의 풍요를 누리는 것, 성공하는 것, 즐기며 사는 것, 기쁨을 누리는 것, 쇼맨십에 가까운 재미있고, 즐겁게 하는 설교를 좋아하지 이런 답답한 요한계시록에 담겨 있는 내용을 좋아하지 않을 텐데...’
그렇지만, 이 마지막 때에 우리가 한 번은 요한계시록을 알아야 되고, 이 마지막 때에 이 요한계시록을 통해 세상을 바로 볼 수 있고, 이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복음에 더 접근하고, 신앙을 빼앗기지 않고, 정신을 차려 믿음을 굳건하게 지키자는 것입니다.
교회만 다닌다고 예수 믿는 게 아니고, 신앙을 지키는 게 아니고, 세상에 빼앗기지 말고, 변질되지 말고, 세상을,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 말자 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설교하기를 주저하고 있으니까, 계속 성령님이 밀어붙이시는 겁니다. 은퇴하기 전에 교인들에게 요한계시록을 알게 하고, 깨닫게 하라는 것입니다. 너가 깨달았는 것을 다 쏟아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요한계시록을 설교를 하고 있으니, 요한계시록을 설교할 때 잘 들으시고 우리의 신앙에 변질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늘부터 여러분과 저는 보혜사의 자문을 깊이 받읍시다. 구약시대에는 이 보혜사는 하나님 쪽에서 사람에게 역사 하였습니다. 그런데 같은 성령님인데 예수님이 하시던 일을 이어받아서 하시는 성령은 인성의 성령입니다. 사람 편에 서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놓치면 안 됩니다. 모든 면에서 성령님과 상의를 하십시오, 그런데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너무 자기 자신의 실력을 믿고 자기가 너무 똑똑해 가지고 사람을 돕기 위하여 오신 보혜사를 무시해도, 무시해도 보통 무시하는 게 아니고 너무 무시합니다.
왜 사람들은 보혜사를 무시하느냐?
이 성령님의 아이큐는 무한대입니다. 아이큐를 측량 할 수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니까? 그러나 사람의 아이큐는 제일 좋아 받자 150입니다. 150과 95의 아이큐를 가진 자의 대화가 될까 안 될까? 이것은 대화가 안 됩니다. 무한대의 아이큐를 가진 성령님이 말하는 것을 인간이 이해가 될까? 안될까? 안 되니 사람은 성령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난 성령님의 제안을 받아들 일수가 없다. 왜, 나는 이해가 안 되니까’ 성령님은 시작부터 끝까지 전체를 다 보시는 분이십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렇게, 저 사람에게 저렇게 자문하는 것이 대박이다.’ 라면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것이 이해가 안 되는 겁니다. 왜요? 아이큐가 짧아서, 그래서 도움을 받아야 할 인간이 성령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데, 자기 생각대로 합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인간은 보혜사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인간이 성령님의 자문을 인정하지를 않고 자기 맘대로 해석을 해서 행동하니 거기에는 좋은 일이 일어나지를 않는 것입니다.
지나간 모든 삶은 오늘부로 다 초기화합시다. 오늘 이 시간에 거룩한 결단을 합시다. 이 시간 이후로 100% 성령님의 도우심을, 자문을 꼭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찬양 : “은혜 구한 내게 은혜의 주님”(441장)
보혜사 성령님의 자문을 받읍시다. 할렐루야!
자, 이분이 자문하는 영역은 전체입니다. 전체,
지금 여러분과 제가 인간으로 존재하는 모든 부분입니다. 성령님의 자문에 하나도 벗어나는 것은 없습니다. 죄, 사건, 우리의 삶의 모든 공간에 최고의 자문위원이 보혜사입니다.
(시146:3,5) “(3)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5)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지니 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도움을 받는 자는 복이 있다 라는 것입니다.
나는 성령님의 자문을 받으리라 할 때 도움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쓰임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교인들은 너무 똑똑해서 성령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 무시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생은 망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초기화하고 새로운 결단을 하자는 것입니다. 모든 분야에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보혜사 성령님의 도움을 받는 비결이 뭔가?
구약시대에 쓰임 받는 시작이 번제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모든 것을 내어놓고 하나님 앞에 번제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엘리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밭을 갈다가 쟁기를 다 불태우고, 소를 삶아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난 후부터 시작을 합니다(왕상19:19-21).
신약에 베드로이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와 그물을 다 버리고 부모도 버리고 따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같으면 따르겠습니까? 못 따르지요. 우리에게는 그렇게 할 수 없기에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지능지수와 우리의 지능지수에는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성령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베드로는 받아 들였습니다. 3년 반을 따랐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습니다. 이 성령이 성도들을 격동하니 모든 제산을 다 팔아서 사도 베드로 앞에 다 갔다 놓았습니다.
성령이 베드로에게 임하니 베드로가 걸어가는데 그림자만 비추어도 병든 자가 다 나았다고 성경은 이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에게 신세를 지지를 않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의 부인에게 남편을 3년 반을 빼앗은 것을 다 보상해 주었습니다. 후에 베드로는 전도여행하면서 아내를 꼭 데리고 다니지요(고전9:5).
그러므로 우리도 보혜사 성령이 하자는 대로 하는 것이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성도들이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서 사도들 앞에 갔다가 놓았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 로마의 장군, 티투스가 왔습니다. 예루살렘 박멸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어차피 예루살렘 뿐 아니고, 이스라엘 땅 전체 재산은 내 것이 아닙니다. 다 로마군대가 빼앗아 갔습니다. 모든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 앞에 던졌지요? 그러면 자기들이 손해 본 것 같지요?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바친다 하다가 거짓말했지요? 저주 받아 죽었지요? 그리고 로마의 티투스가 왔지요?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은 다 죽고, 이스라엘 땅에 사는 유대인들은 다 붙잡혀, 죽든지 아니면 포로로 잡혀가 각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기독교인들에게 어떻게 갚아주는 지를 잘봐요. 성령이 저 이방인 티투스를 대적하지 말라고 자문을 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티투스와 싸우다가 100%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 기독교인들은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이 티투스가 유대인들에게 정책을 두 가지를 썼습니다 . 오순절 방언을 하는 사람과 안하는 사람,. 같은 유대인들이지만 예수를 안 믿는 유대인과 구별해서 다스렸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대적을 안 하고 오실이가 오셨습니까? 당신까지도 하나님이 보냈습니다. 아니 이 티투스는 유대인들을 죽이려 갔는데, 당신까지 하나님이 보냈다니?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했더니 성경다니엘서에 쓰였습니다. 당신이 올 것을 성경에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복음서에서 다 예언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티투스가 기독교인들에게 선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후에 이 티투스 장군이 로마의 황제가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을 로마로 데리고 가서 다 풀어주고 로마에서 합법적으로 살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로마서를 읽어보면, 바울이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 전에 이미 로마에는 유대인 기독교 공동체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유럽 전체가 기독교 국가가 되는 데 기초 공사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보혜사의 자문을 받아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열심히 운동하면서 살면 조금 더 건강하게 5년 더 살겠지요. 건강식품 좋은 것 먹으면 조금 더 살겠지요. 몇 년 더 사는 게 뭐 그렇게 중요합니까? 오히려 보혜사 성령님의 자문을 받으며 조금 덜 사는 게 더 낫습니다.
그러나 오늘까지 살았던 것은 다 초기화 하세요, 그리고 성령의 자문을 받으세요.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에 자문을 못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적인 문제, 외적인 문제, 가정, 사업, 자녀, 모든 전체적인 삶에 대하여 이 성령님은 우리에게 개입하실려고 합니다. 문제는 나의 자세입니다.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내가 어떻게 하면 천국 갈 것인가, 그런 것을 자문 하실 것이지, 직장문제 살림살이 이런 것 까지 개입을 할까? 그것 까지도 개입을 하십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모든 부분에 성령이 붙으려고 하십니다. 거기에 참견을 할려고 그럽니다.
신약시대는 성령과의 자문의 관계입니다. 그 사람의 어떠함은 보혜사와 자문의 관계에 따라 달라집니다.
제발 우리의 얄팍한 지식과 경험과 지혜를 가지고 성령님의 속을 썩이지 말기를 바랍니다. 150도 안 되는 아이큐를 가지고 성령님과 견주어 이겨 볼려 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성령님 뿐입니다. 나는 성령님을 의지하고, 성령님의 도움을 받으며 살겠습니다.
성경에 보면 성령님이 탄식하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롬8:23,26)
가만히 있는데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무시하니까, 탄식하는 것입니다.
또 성령님이 근심한다 했습니다.
(엡4: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사63:1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성령이 가만히 있는데 근심합니까? 왜 근심하느냐? 성령의 충고를, 제안을 안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시키고, 성령을 무시하니까, 성령이 탄식하고, 근심하는 것입니다.
이단인 신○지에서는 이○희가 보혜사라고 합니다. 교주가 보혜사입니다. 절대로 이 보혜사는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보혜사는 성령이 보혜사입니다. 사람은 보혜사가 될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 한분 외에는 보혜사가 없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성령님의 자문을 받을 수 있도록 우리의 심령을 거룩하게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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