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을 살펴보아라
갈라디아서 6 : 1 - 5
인도인으로부터 존경 받는 간디에게 단것을 너무 좋아하는 아이를 그 부모가 데리고 와서 단것을 끊도록 충고를 좀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간디는 아이에게 ‘단것을 먹지 말라’고 말해 주고 한 주간 후에 오라고 했습니다. ‘단 것을 먹으면 해로우니까 먹으면 안된다’ 이런 말을 해 줄줄 알았는데 그런 말은 하지 않고 ‘단것을 먹지 말라’는 한 마디만 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여전히 단것을 좋아하고 한 주간이 지나도 전혀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한 주간 후에 아이를 데리고 간디에게 왔습니다. 간디는 다시 그 아이에게 ‘단것을 먹지 말라’ 하고 다시 한 주간 후에 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주간을 지내도 아이는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한 주간 후에 아이를 데리고 간디에게 왔습니다. 간디는 이번에도 아이에게 ‘단것을 먹지 말라’는 말 외에 더 이상 말이 없었습니다. 부모는 의아해서 ‘지난번에도, 이번에도 그렇게 말했지만 아이는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간디는 ‘그렇지만 오늘은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단것을 좋아하면서 아이에게 말해봐도 변화가 없었지만 내가 단것을 먼저 끊었으니 이제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답니다. 단것을 좋아하는 아이를 타이기 전에 간디는 자신을 돌아본 것입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남을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을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모 앞에서 형이나 동생을 봅니다. 동생을 보면서 나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성숙한 성도는 하나님 앞에서 남을 보고 그리고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남을 보면서 자신을 잃어버립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 너 자신을 살펴보아라”(1)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실수하고 범죄 한 일을 보면 먼저 자신부터 살펴보라는 말씀입니다. 남이 실수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도 저와 같이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나도 저 사람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저 사람처럼 실수를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만 나에게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저 사람처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실수한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자신은 올바른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사건을 보았을 때 나도 저와 같은 사건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하고 신나게 달리다 사고 난 차를 보았습니다. 차가 뒤집어 길밖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어떻게 운전을 했기에 저렇게 되나’, 자기는 운전을 잘해서 사고를 내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3)고 말씀하였습니다. 사고 난 차를 보았을 때 무엇보다도 자신을 살펴보고 나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속도를 낮추고 운전을 조심스럽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병원에 입원한 사람을 보면 나도 저 사람처럼 언젠가는 입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강에 좀더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웃에 일어난 일이 전혀 나와는 관계없는 일처럼 비판하고 정죄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상대방과 나를 이질성에서 보지 말고 동질성으로 생각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나에게도 저와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성도와 성도가 아닌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1절에 “형제들아 사람이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성도와 비성도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가르쳐줍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 신령한 너희”(1)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신령한 자’입니다. ‘신령한 자’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5:24)이며, ‘성령을 좇아 사는 사람’입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이 말씀에서 ‘형제들’과 ‘사람’으로 구분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와 비성도로 구분한 것입니다. 성도는 신령한 자로서 일반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이 높은 영적인 사람들입니다. 그러하므로 성도는 어떤 일을 보았을 때 비판하거나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실수로 범죄한 사람을 보았을 때 성도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성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가르쳐 줍니다. 범죄한 사람을 보았을 때 성도는 온유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낮추고 나도 저와 같이 범죄 할 수 있다는 것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범죄한 사람을 비난하고 책망하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은 교만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두드러지게 들어난 자세가 범죄한 자를 보았을 때 곧 바로 비판하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도인 신령한 자는 먼저 자신을 살펴보는 겸손한 심령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장례식에 가면 죽은 자를 앞에 두고 많은 말들을 합니다. 안죽을 수도 있었는데 죽었다는 둥, 의사가 진료를 잘못했다는 둥, 일찍 서둘렀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둥, 마치 죽지 않을 사람이 누구 때문에 죽은 것처럼 말들을 합니다. 이러한 말들은 서로 간에 덕이 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 죽었든지 죽을 때가 되어서 죽었구나, 나도 언젠가는 저와 같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죽은 사람은 잘못해서 죽었고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살았을 때 떵떵거리던 사람이 죽어 관에 누워있고 불 속에 들어가고 구덩이에 묻혀지는 것을 보면서 나도 별 수 없는 저와 같이 될 것을 생각하면 뭔가 숙연해지고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나보다 먼저 죽었고, 나도 언젠가는 죽어 저렇게 될 것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끝이 이와 같이 됨이라”(전7:2)는 말씀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당하는 것이라면 나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살펴보고 그래서 교만한 자세를 취하지 말고 온유한 심령으로 대하라고 하였습니다.
소크라데스는 ‘네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철학자의 아버지라고 하는 탈레스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과 가장 쉬운 일을 말했습니다. 가장 어렵고 가장 힘든 일은 간교한 폭군이 조용히 죽기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살아서는 안될 사람이 늙어 조용히 죽는 것을 기다리는 것은 가장 참기 어려운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아는 것이 가장 어렵고, 남을 충고하는 것은 가장 쉬운 일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남의 말은 쉽게 합니다. 나와 상관없는 것처럼 말합니다. 세상을 보면서 비판을 잘 합니다. 정치인들을 두고 모두 자신이라면 저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비판을 잘들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 자리에 있다면 그보다 더 못할 것은 알지 못합니다. 성도는 비판 이전에 자신부터 살펴야 하고 비방하기 전에 먼저 자신부터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식이 잘못되었을 때 자식을 책망하기 전에 자신이 어렸을 때를 돌아보면 책망을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딸 아이가 성적이 나쁘다고 엄마가 나무라니까 인터넷으로 엄마의 학생때 성적부를 떼서 엄마에게 보이니까 더 이상 타이르지를 못하더랍니다. 아이가 성적이 나쁜 것은 아이의 탓이기 전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DNA라는 것입니다. 가끔 자녀들의 행동에서 내가 어릴 때의 모습을 보는 것을 느낍니다. 아들이 여자 친구를 줄줄이 데리고 다니는 것이나 딸이 남자 친구를 자주 바꾸는 것은 그 부모가 어떠했는가를 말 안해도 알 수 있습니다. 옛날 부모는 자식이 잘못하면 자식을 책망하지 않고 자식에게 채찍을 주어 아버지 종아리를 치라고 했습니다. 자식의 잘못은 부모가 잘못 가르쳤기 때문에 부모가 매를 맞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탕자가 집을 나갔을 때 아버지는 탕자가 잘못된 줄 알면서도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내가 좀 더 사랑해 주었더라면 나가지 않았을 것인데, 내가 잘못했구나’라고 아버지는 탕자를 나무라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잘못을 나무랐습니다. 집에 있을 때 내가 잘 해 주었더라면, 제발 돌아와 만 다오 죽지만 말고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아버지였습니다. 탕자가 돌아오지 않고 죽으면 아버지는 자식을 죽인 죄인이 되기 때문에 아들이 돌아오기를 더 간절히 기다린 것입니다. 제발 돌아와야 하는데, 그러다 아들이 거지가 되어 돌아왔을 때 반가워 달려가 반긴 것입니다.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했습니다. 자식이 돌아오므로 면죄부를 받은 것처럼 아버지는 좋아했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잘난 아들이였습니다. 백성들에게 인기를 독차지 할 정도로 훌륭한 아들이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반항하고 죽이려고 했지만 아버지 다윗은 아들을 대항하지 않고 피하였습니다. 아버지가 힘이 없어서 피한 것이 아닙니다. 아들과 싸웠다는 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 피한 것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아들과 전쟁을 해서 아들이 죽게 되면 다윗은 뭐가 됩니까? 아들을 죽인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아들을 죽인 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 부하들에게 압살롬을 제발 죽이지 말고 너그럽게 대하라고 당부를 했습니다.
압살롬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 대신 죽었더면’하고 울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돌아보았고 자신의 잘못을 알고 울었습니다. 아버지를 대적하는 아들 압살롬을 한 마디도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에게 인기를 독차지 할 정도의 훌륭한 아들에게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사랑해 주지 못한 자신의 잘못을 돌아본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이 죽는 것보다 자신이 죽어야 할 사람이라고 울며 고백한 것입니다.
성도는 범죄한 사람을 보았을 때 먼저 온유한 심령으로 자신부터 돌아보고 나도 시험 받을까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범죄한 사람의 짐을 서로 지라고 가르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2). 범죄한 사람의 무거운 짐을 ‘아울러 지라’는 뜻으로 범죄함으로 당하는 고통을 서로 같이 나누는데 계속해서 힘쓰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는 말씀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11:28)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나게 해 줍니다.
우리가 죄인으로 무거운 죄짐을 지고 있는 것을 주께서 대신 져 주시므로 우리는 쉼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범죄한 사람의 죄를 져 주므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범죄한 사람을 용서하고 권면하며, 아울러 그들이 당하는 어려움을 같이 나누는 생활을 하라고 했습니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3) 이 말씀은 스스로 자기가 대단한 존재라고 착각하는 사람, 자기가 높은 위치에 올라 있다고 여기는 교만한 사람들에 대한 교훈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아무 것도 되지 못한 사람이 스스로 된 줄로 착각에 빠져 있는 사람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바로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 비판하고 책망하면서 자신은 잘못한 일이 없는 사람처럼 행세를 부리는 사람을 스스로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스스로 선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자기를 반성하며 성령의 능력을 힘입을 기회를 상실하게 되어 멸망을 자초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속임’은 자신의 마음을 타락시킨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자신을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스스로 자신을 속임으로 마음을 타락으로 빠져들게 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다시 말씀합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4). 1절에 남의 잘못된 것을 보았을 때 ‘네 자신을 살펴보라’는 말씀을 하시고 이제는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고 했습니다. 범죄한 사람을 보고 자신을 살피고 이제 자기 일을 살피면 자신이 범죄하지 않음을 깨닫게 될 때 자신을 자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랑도 자기에게만 스스로 할 뿐이지 남에게까지는 자랑할 것이 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남에게 자랑할 것이 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범죄에 빠지지 않은 것은 내가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은혜 받은 자신은 자랑스럽고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나도 별수 없는 범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때 남에게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돌아볼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 것도 되지 못하면서 된 줄로 생각하여 스스로 속이는 자가 되지 말고, 성도가 아닌 사람과 차원이 높은 신령한 사람답게 스스로 자신을 살피며 온유한 마음으로 죄에 빠진 자의 짐을 서로 지므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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