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역사서!

[스크랩] 사무엘하6장1~11절(여호와의 궤를 막으시다)

하나님아들 2018. 8. 28. 21:47

본문 : 사무엘하6장1~11절

제목 : 여호와의 궤를 막으시다

왕정 초기를 지나 군사적,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을 즈음,

다윗은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옮겨오기를 원합니다.

언약궤를 다루고 있는 삼상4~6장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블레셋에 빼앗긴 언약궤가 블레셋의 여러도시를 징계하고 기럇여아림으로 돌아왔다는 내용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것에 연이어서 기럇여아림에 머물었던 언약궤를 다윗이 자신의 궁으로 옴기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삼하 6장은 두 장면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습니다.

1~11절 다윗이 언약궤를 옮기려다 실패한 내용이고,

12~23절 다시 언약궤를 옮기는 시도가 성공했다는 내용입니다.

첫 번째 운반 과정에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1. 언약궤 운반 준비와 과정(1~5절)

1)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모읍니다(1절).

“[1]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뽑은 무리 삼만 명을 다시 모으고

뽑은 무리 삼만. - 같은 내용을 기록한 대상 13:1-5에 의하면 '뽑은 무리 삼만'은 틀림없이 이스라엘 온 지파 중에 골고루 뽑은 자들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올려 오기 위해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의 온 이스라엘'(대상 13:5) 백성들을 불러 모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온 이스라엘'이란 곧 이스라엘 전체에서 골고루 뽑은 수행자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그런데 이 '뽑은 무리 삼만'은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다 일어날지 모르는 전쟁에 대비한 일종의 군사들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법궤가 안치되어 있었던 바알레유다(2절)는 블레셋 지경(地境)에서 가까웠으므로 그들의 기습 공격에 대비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작은 법궤 하나를 운반하기 위해서 삼 만이란 대군을 동원하였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이며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한 혹자의 견해는 전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The Interpreter's Bible).

이와 관련 70인역은 본절의 3만이란 수를 7만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편, 이처럼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운반하기 위해 이스라엘 전역에서 골고루 수행자들을 뽑은 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은 목적에서였을 것입니다.

법궤에 대한 온 국민적 관심을 회복시켜 여호와 신앙의 부흥을 꾀하기 위함입니다.

각 지파간의 유대감을 조성하며, 통일 왕국의 결속을 공고히 하기 위함입니다.

다시 모으고. - 이 말은 이번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전체 총회는 지난번 다윗의 즉위식 때 35만명이나 모였던 총회(5:1-3;대상 12:23-40)에 이은 제 2차 총회임을 보여 줍니다.

 

2) 다윗이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려 합니다(2절).

“[2] 다윗이 일어나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바알레유다. - 혹자는 '바알레유다'(Baale of Judah)를 '유다의 방백들',

'유다 백성들'로 해석하였습니다.

한편, 바알레유다'숲의 성읍'이란 뜻의 기럇여아림(Kirjath-jearim)의 옛 명칭입니다.

이곳은 본래 기브온 사람들의 도시였으며 '바알라'(Baalah)로 불리웠습니다(수 15:9;대상 13:5, 6).

그 후 이곳이 유다 지파의 수중에 들어오게 되자 '유다의 바알라'(Baalah of Judah), 곧 바알레유다로 불려 지게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욥바로 가는 길목,

곧 예루살렘 서쪽 15km 지점에 위치했었습니다.

한편, 하나님의 언약궤는 이제 다윗에 의하여 온 이스라엘의 관심이 집중되기 전까지 이곳에 70년 이상 동안(B.C. 1075년-B.C. 1003년, 이 기간은 아벡 전투 때부터 다윗의 예루살렘 정복때까지의 기간이다;Leon Wood) 머물러 있었습니다(삼상 7:1, 2).

*삼상7:1,2 “[1]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와서 여호와의 궤를 옮겨 산에 사는 아비나답의 집에 들여놓고 그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여호와의 궤를 지키게 하였더니[2]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라. - 이 구절은 매우 난해한 구절입니다.

여기에해당하는 히브리 문구, '아론 하엘로힘 아쉐르 니크라 쉠 솽 여호와 체바오트 이쉐브 하케루빔알라우'를 직역하면,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그 이름이 그 위에서 불리워지는 하나님의 언약궤'입니다.

여기에서 해석상 중요한 낱말은 '그 위에서'(알라우)이다(우리말 성경에는 '사이에'로 번역되었음).

본절은 하나님의 언약궤 위에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재, 그분의 능력, 그분의 성품, 그분의 영광이 임재하여 있다는 말이 됩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궤는 영광스런 하나님의 가견적 보좌(寶座)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해석은 하나님의 궤를 '주의 권능의 궤'라고 한 표현과 일치합니다(시 132:8).

따라서 이 해석은 비교적 타당성을 갖는다 하겠습니다.

한편, 다윗이 이와 같이 하나님의 가견적 보좌인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시려 한 것은 그가 하나님을 신정왕국(神政王國)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으로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룹들. - '그룹'(cherub)은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천사의 일단(一團)입니다.

이들의 전체 수효가 얼마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들의 직무에 대해서는 성경에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창세초(創世初)에 아담이 쫓겨난 에덴 동산에서 생명나무를 지켰으며(창 3:22-24) 하나님의 보좌 병거를 끄는 사역을 담당하고 있습니다(겔 1:20).

그러나 이들의 형상에 대해서는 정확히 규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성경 곳곳의 기록들(겔, 1, 10장;계 4:6-8)을 종합해 볼 때,

들은 날개를지녔으며,

사람과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뿐입니다.

출 25:18, 19 주석 참조.

만군의 여호와. - 5:10 주석 참조.

'천군 천사(天軍 天使)의 하나님 여호와'로도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3)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느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몹니다(3,4절)

“[3]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4]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는 궤 앞에서 가고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헌 수레가 아닌 새 수레에 싣고 운반한 것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존중한 행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수레로 운반하려 한 것은 분명히 법궤 운반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행위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에 따르면, 오직 레위인 중 고핫 자손들만이 법궤를 '어깨에 메고' 운반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민 4:15;7:9).

*민4:15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

*민7:9고핫 자손에게는 주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의 성소의 직임은 그 어깨로 메는 일을 하는 까닭이었더라

그런데도 다윗이 법궤를 수레로 운반하려 한 것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1)선지자 사무엘이 죽은 이래(삼상 25:1) 다윗의 통일 왕국이 성립되기까지의 혼란기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가르침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는바 다윗도 율법에 정통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Pulpit Commentary).

(2)당시 블레셋족이나 페니키아인들은 자신들의 신상(神像)을 운반할 때 수레를 사용하였는바 다윗이 이에 영향받았기 때문입니다(Lange).

아무튼 여기에서 우리는 다윗이 하나님을 높이고자 하는 뜨거운 열심은 있었으나 그 방법면에서 그릇됨을 볼 수 있습니다.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 - 블레셋으로부터 돌아온 하나님의 언약궤(삼상 6장)가 다윗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운반되기까지 안치되어있던

기럇여아림 사람아비나답(Abinadab)의 집을 가리킵니다(삼상 7:1, 2).

아비나답의 아들. - 아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니'는 복수형으로 '아들

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 복수 형태 '아들들'은 때로 '손자'(grandson)를 의미하기도 합니다(민 16:1;왕하 25:22;대상 8:40;에 2:5;스 7:1).

이렇게 볼 때 본절의 '아비나답의 아들'은 아비나답의 손자들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비나답의 아들 엘르아살은 이미 70년전부터그 집에서 법궤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삼상 7:1, 2).

그러므로 이제는 엘르아살의 아들, 즉 아비나답의 손자들인 웃사아효가 이 일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더 큰 것입니다.

 

4)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여호와 앞에서 연주합니다(5절)

“[5] 다윗과 이스라엘 온 족속은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이스라엘 온 족속. - 이는 이스라엘 온 지파에서 뽑힌 자들을 의미합니다.

잣나무로 만든 여러 가지 악기와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양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더라. -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관계된 큰 역사들과 관련하여 음악을 연주하곤 하였습니다(수6:4-20;왕상1:39;대하 5:11-14).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운반하며 음악을 연주한 사실은 그들이 이 행사를 지극히 거룩한 의식으로 여겼음을 입증합니다.

한편, 여기서 '연주하더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사하크'는 본래 '뛰놀다', '즐거워하다'는 의미입니다(삼상 18:7;대상 15:29;잠 8:30, 31;렘 30:19).

따라서 이 말은 그들이 단순히 악기를 연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잔치 분위기에 젖어 기뻐하면서 연주한 것을 의미합니다(Lange,Keil).

본절의 평행 구절인 대상13:8에는 '뛰놀며 노래하며...연주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수금('킨노르)은 6줄로 이루어진 현악기입니다.

대개 노래를 부를 때 반주(伴奏)를 넣는 악기로 사용되었습니다.

비파는 하아프의 일종이다.

역사서(삼상 10:5;왕상 10:12;대하9:11)와 시편(시33:2;57:8;92:1-3)등에 자주 언급되는 악기로 그 용도는 수금과 같습니다.

양금(므나아느임)은 탬버린(tambourine)의 일종입니다.

제금('첼츨림' 또는 '므칠타임')(대상 13:8;대하 5:12)이라고도 하는 이 악기는 심벌즈(cymbals)dml 일종입니다.

여호와 앞에서. - 그 당시 언약궤 앞에 있다는 것은 곧 여호와 앞에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습니다(민 10:35;수 6:8).

왜냐하면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출 37:1-5 주석 참조.

 

2. 언약궤 운반 실패(6~8절)

1)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습니다(6절).

“[6]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나곤의 타작마당. - 이에 대해 대상 13:9에서는 '기돈의 타작 마당'(the threshing floor of Chidon)이라고 다르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는데 곧 다음과 같습니다.

(1)이 두 기록의 차이를 원문 파손으로 인한 두 저자의 실수로 보는 견해입니다(The Interpreter's Bible).

(2)'기돈'(Chidon)을 타작 마당의 주인 이름으로 보고,

'나곤'(Nachon)을 타작 마당의 수식어로 보는 해석입니다.

즉, 나곤이란 말의 의미 '예비된'이란 뜻으로 나곤의 타작 마당은 곧 '기돈의 예비된 타작 마당'이라는 해석입니다.

이 해석은 나곤을 '쿤'(예비된, 준비된)의 파생어로 본 데서 나온 견해이다.

(3) '나곤''예비된', 또는 '고정된'이란 수식어로 봄은 물론 '기돈' 역시 타작 마당을 수식하는 말로 보는 견해입니다.

즉, '기돈''파괴', '재앙'이란 뜻을 지닌 단어입니다.

따라서 이 견해는 '예비되었던 타작마당'은 하나님의 재앙이 웃사에게 내린(7절) '재앙의 타작 마당'이었다고 해석합니다(Lange).

(4)세번째 견해와 같이 '기돈'을 사람의 이름으로 보지 않고 '재앙'으로 해석하긴 하나 '나곤''예비된' 또는 '고정된'이란 말로 보지 않고 '나카'(치다)의 분사로서 '충돌하는'이란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입니다(Keil).

따라서 이 견해는 이 타작 마당을 '충돌의 타작 마당이며 재앙의 타작 마당'이라고 해석합니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네 견해 중 어느 것이 가장 정확한 해석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중 (3)번이나 (4)번을 지지하는 것이 비교적 무난할 것이다.

왜냐하면(1)번은 해설이 너무 부실할 뿐만 아니라 성경의 영감성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23:1-7강해, '성경 영감론' 참조.

그리고 (2)번은 본문의 문맥과 자연스럽게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3)번과 (4)번은 하나님이 웃사와 충돌하여(8절) 웃사에게 재앙이 임했다고 한 본문과 잘 어울리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제(諸) 견해에도 불구하고 '기돈'이 '나곤'의 또 다른 이름일 가능성 역시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따라서 그 가능성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소들이 뛰므로. - '뛴다'('솨마트')는 본래 '미끄러지다', '걸려 넘어질 뻔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는 소들이 돌뿌리에 걸리거나 미끄러져 비틀거리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들의 실수는 앞서 블레셋 백성들이 암소 두 마리에 법궤를 실어 벧세메스로 운반했을 때에는 없었던 불길한 흉조(凶兆)였습니다(삼상 6:12).

그러므로 이 일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대로 행하지 아니한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릇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일종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과거에 블레셋인들도 법궤를 수레에 실어 운반하긴 하였습니다.

그러나 블레셋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문외한(門外漢)이었기 때문에 저들의 행위는 묵인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삼상 6:10-16).

 

2) 웃사가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습니다(7절).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웃사의 잘못함. - 웃사가 하나님의 궤에 손을 댄 것을 가리킵니다(6절).

그런데 수레를 끄는 소들이 날뛰므로 흔들리는 법궤를 잡으려했던 웃사의 행위는 인간적으로 또는 상황 윤리적으로 볼 때에는 전혀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행위는 하나님 말씀에 의거할 때 엄연한 신성모독(神聖冒瀆) 행위였습니다. 18:19-33 강해, '기독교 윤리와 상황 윤리' 참조.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성경 여러 군데에서 법궤의 신적 특성을 말씀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를 어겼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레위 자손 중심지어 고핫 자손일지라도 법궤는 만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민 4:15).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물로서 거룩한 것이니,

아무도 들여다 보지도 말라고 명하셨으며(민4:20;삼상 6:19),

법궤를 운반할 때에는 그것을 완전히 싸서 (민4:15),

채(pole)를 궤의 고리에 꿰어(출 25:14) 운반하라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하나님이 매우 엄하게 법궤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웃사가 그것을 만진 것은 그만큼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소홀히 여겼으며, 하나님을 가볍게 여겼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 이처럼 구약 시대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거룩함'을 침해하는 자를 향하여 급속한 진노를 발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은혜를 믿는 성도들에게 있어선 그 모든 진노가 영원히 유보된 것입니다(롬 5:8, 9).

그러니 이 같은 영생의 축복을 얻은 우리들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진정 감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엡 2:8).

 

3)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불렀습니다(8절)

“[8]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 이는 곧 하나님께서 웃사에게 진노하사 저에게 죽음의 형벌을 가하신것(7절)을 가리킵니다.

공동 번역은 본절을 '야훼께서 우짜를 치신 일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분하여. - '분하여'에 해당되는 원어 '하라'의 기본 뜻은 '타오르다', '심히 뜨거워지다', '빨갛게 되다'로서 온 몸과 심장이 타버릴 듯한 극도의 분노를 가리킵니다.

그러면 다윗은 무엇 때문에 아니면 무엇에 대하여 이처럼분노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바 크게 두 견해로 나뉘어집니다.

(1)다윗은 웃사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화를 내었다는 견해입니다.

즉 다윗이나 그의 백성들 그리고 웃사는 무슨 큰 불경죄(不敬罪)를 저지르지도 않았고 기껏해야 경솔한 행동을 한 것 뿐인데 하나님께서 그처럼 준엄한 형벌을 가하시니(7절) 이에 불만을 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견해는 지금껏 하나님을 대해온 다윗의 신실한 태도(2:1;5:12, 23)에 비추어 볼 때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2) 다윗은 자신과 웃사의 불찰로 인하여 빚어진 비극에 대하여 스스로에게 화를 내었다는 견해입니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에 모시는 계획이 자신과 웃사의 잘못으로 인하여 중단되게 되었음을 크게 분해하였다는 주장입니다.

이 같은 견해는 그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크게 두려워하였다는 구절(9절)

에 의거할 때 타당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다윗이 하나님을 대항하여 분을 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곳을 베레스웃사라 칭하니. - 여기서 '베레스'로 번역된 '페레츠'는 두 가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곧 '갑작스런 공격', '뜻아니한 재난'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어떠한 사항에 대한 '위반', '범법'입니다.

따라서 '베레스웃사'(Perez-uzzah)란 말은 '웃사를 치심' 또는 '웃사의 위반'이란 뜻입니다.

아마 다윗은 나곤의 타작 마당에서 웃사가 율법을 어기고선 법궤를 만진 것(6절)과 그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신 일로 인하여(7절) 그곳을 이렇게 명명(命名)하였을 것입니다.

 

3. 언약궤 운반 중지(9~11절)

1) 다윗이 그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의 궤를 다른 곳으로 이송합니다(9절).

“[9]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 아직 미처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이 자신들이 율법에 명한 방법대로 법궤를 운반치 아니한 데 있음을 깨닫지 못한 다윗(3, 4절 주석참조)은 우선 법궤로 인하여 또 다른 하나님의 재앙이 미치지나 않을까 두려워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모시는 역사(役事)를 중단한 채 황급히 법궤

를 변방으로 이송(移送)시켰을 것입니다(10절).

그러나 이는 분명 다윗의 또 하나의 경솔한 행위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법궤를 맡아 관리하던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11절).

다윗은 하나님의 진노를 접하였을 때 무조건 두려워하기 보다는 그 원인을 규명한 후 올바른 방법에 따라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왔어야 마땅했습니다(Matthew Henry).

2)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메어 갑니다(10절).

“[10]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옮겨 다윗 성 자기에게로 메어 가기를 즐겨하지 아니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간지라

다윗 성. - 다윗이 여부스족으로부터 빼앗은 예루살렘의 '시온 산성'에 새로이 명명한 이름입니다. 5:7주석 참조.

가드 사람 오벧에돔. - 대상 26:1-4에 의하면,

오벧에돔(Obededom)은 고핫의 자손이며 후에 예루살렘 성문의 문지기로 활약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본절에서 그를 가리켜 가드 사람(the Gittite)이라고 한 것은 그가 단 지파 지경 내에 있는레위인의 성읍 가드림몬(Gathrimmon)에서 태어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3) 여호와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석달을 있었는데 복을 주셨습니다(11절)

“[11]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그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 아마도 이 말은 그의 가족, 가축, 밭의 소산 등이 풍성해졌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한편, 다윗은 이러한 현상을 보고서 이제 하나님의 진노(7절)가 깨끗이 풀린 줄 깨달았음이 분명합니다.

 

언약궤를 옴기다가 웃사가 죽었습니다.

웃사의 잘 못은 무었입니까?

소가 뛰면 궤가 당연히 움직입니다.

갑작스런 돌발 사태가 버러진 것은 분명하지만 우리가 웃사라도 떨어지려는 법궤를 잡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가 땅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잡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웃사는 오랫동안 하나님의 궤와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떨어지려고 하는 궤를 잡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런데 궤를 보호하려고 했던 당연한 행동 때문에 웃사가 죽었습니다.

거룩함에 손을 대었다고 죽었다고 결론 지어버리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그러나 본문을 그렇게 읽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법궤가 이방인의 손길을 거처 여기까지 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사건만을 가지고 본문을 해석 할 수 없습니다.

웃사의 죽은 후 다윗의 반응에 주목해야 합니다.

8절에 보면 웃사가 죽은 후에 분을 내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웃사를 죽였다고 믿고 있었고 그것에 대하여 전혀 동의 할 수 없었다고 하나님께 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다윗이 힘을 쏟아 준비한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이 행사는 남북지파 모두에게 의미있는 공개적인 행사였습니다.

정치적 의미가 가득 담긴 공개행사의 중단이란 다윗이 법궤 이전 시도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거절을 의미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 행사가 다윗에게는 치명적인 것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윗은 궤를 옮겨서 예루살렘을 여호와의 신앙의 중심지로 만들려는 원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다윗의 모든 계획을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중단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해야 할 이유는 9절 때문입니다.

다윗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다윗의 탄식을 통해 다윗의 의도를 짐작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궤를 자기에게로 가져 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 성을 선택하는 과정를 거치고 그것을 확인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행사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묻지 않고 이 일을 주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궤는 소가 끌어가고 있는 대로 굴려가고 있었을 뿐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생각에 대하여 하나님은 분명하게 거절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다윗과 같은 위대한 왕이라 할지라도 묻지 않고 임의대로 옴기거나 자기가 원하는 곳에 자리를 정하여 모실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훗날 다윗의 성전 건축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계획을 얼마든지 거절 할 수 있는 분입니다.

뿐만아니라 묻지 않고 진행된 일을 당장이라도 중지시킬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원하실 때에 이동 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궤가 보여주는 신학적 의미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계획도 처음부터 잘못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움직인 것이 아니라 자기가 옴겨 오했던 것입니다.

민22:21절 이하에 법궤를 이동시킬때는 동물이 아니라 사람이 질머져야 한다는 최소한의 이동 규정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에 대하여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제사장 웃사가 법궤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나님과 어떤 교제도 없이 이 궤를 옴기려 했던 다윗까지 하나님은 거절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입으로만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말하지 말고 진정 하나님이 우리 삶에 주인도시도록 살아야 합니다.

내가 주인으로 행사하는 인생에 하나님은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라도 거절 하십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앞세우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다윗이 열망하던 언약궤 입성에 제동을 거십니다.

표면적으로는 궤에 손을 댄 웃사가 죽임을 당한 사건이지만,

이것은 언약궤 입성을 진두지휘하던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전쟁에서의 연승, 정치적 안정, 연이은 헌신의 과정에 들어온 하나님의 당황스런 개입은 다윗을 난처하고 ‘분하게’만듭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의외의 개입을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의도를 우리가 깨닫든 그렇지 못하든 하나님의 개입은 언제나 우리에게 최선입니다.

 

2) ‘다윗의 대적’블레셋을 치신(5:20) 하나님이 이번에는 ‘다윗의 백성’을 치십니다(8,9절).

이방인이든 이스라엘인이든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한 이들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선민 이스라엘도 하나님이 정해두신 거룩한 경계(창2:17, 수3:4)를 침범한다면 결코 보호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새겼을 것입니다.

그 경계를 지키고 계명에 순종할 때 두려움(9절)은 축제와 축복(14,18절)으로 바뀔 것입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언약궤의 이동은 레위인 중 고핫 자손이 채를 궤의 양쪽 고리에 꿰어직접메야 가능합니다(3~7절).

또 이동 과정에서 언약궤에 손을 대거나 만지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습니다(민4:15,7:9).

그럼에도 다윗이 추진하는 언약궤의 이동 과정에는 율법을 어기며 ‘급히’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거룩한 명분이 순종을 대신하지 못하고, 목적도 과정을 정당화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목적의 정당성과 함께 과정의 정당성도 물으실 것입니다.

 

2) 언약궤를 실은 수레가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수레를 끌던 소들의 돌출행동 원인에 대해 성경은 침묵하지만, 발람 선지자를 태우고 가던 나귀가 여호와의 사자를 보고 두려움으로 멈추어버린 상황과 닮았습니다(6, 민22:21~34).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둔감해지면 미물이나 짐승보다 더 어리석은 실수와 오류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지나온 이력과 행적이 아무리 걸출해도 지금 주님의 뜻에 민감한지 자문해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사무엘하61~11

다윗은 군사적,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을 즈음,

삼만 명 뽑아 바알례유다(기럇여아림의 옛 명칭)

머물었던 언약궤를 다윗 성으로 옮기려다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궤를 붙들었다가

웃사가 죽게되고

궤를 오벧에돔 집으로 옴겨 갔는데

그의 온 집이 복을 받았다는 것이다.

 

법궤 이송의 실패는 다윗의 잘 못이다.

다윗이 언약궤를 새 수례에 실고,

온 족속이 모든 악기로 여호와 앞에 연주한 것은

언약궤를 존중한 행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다윗이 궤를 수레로 운반하려 한 것은

법궤 운반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행위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에 따르면,

오직 레위인 중 고핫 자손들만이 법궤를

'어깨에 메고' 운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4:15).

또 다윗은 원대한 계획을 하나님께 묻지 않고 행했다.

그러므로 웃사도 죽었다.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법궤를 모시는 역사(役事)

중단한 채 황급히 법궤를 변방으로 이송(移送) 시켰다.

그러나 이는 분명 다윗의 또 하나의 경솔한 행위였다.

왜냐하면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기 때문이다.

다윗은 원인을 규명한 후 올바른 방법에 따라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왔어야 마땅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중대한 일을 할 때에

반듯이 하나님의 뜻을 물어 행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한다.

오늘도 내가 하나님 자리에 앉아

내 맘대로 행하며 실패할 때에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가 생각하며 하루를 살자.

하나님이 뜻을 물어 사는 하루 되기를 바란다.


출처 : 헤브론선교회
글쓴이 : 빛으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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