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는 엄청난 도덕적 질병의 근원과 원천이다. / 존 라일
“죄는 불법이라”(요일3:4).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기독교의 뿌리는 죄에 대한 바른 인식이다. 오늘날의 대부분의 오류와 이단, 거짓 교리는 죄에 대한 모호하고 불분명한 이해에서 비롯되었다. 자기 영혼의 질병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거짓되고 불완전한 치료책만으로 만족한다.
1. 죄에 대한 정의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
죄는 계층과 지위, 이름과 나라, 백성과 방언을 막론하고 온 인류에게 드리워진 엄청난 도덕적 질병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법에 완벽히 합치하지 않는 모든 상상과 생각과 말과 행동이 “죄”이다.
죄는 “불법”이다. ‘항상 웃으면서도 악한일 수 있다’.
신약 성경을 연구하면, 죄에는 행함으로 짓는 죄와 행하지 않음으로 짓는 죄가 있다.
우리는 ‘해서는 안될 일을 함’으로 죄를 지을 뿐 아니라, 실제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간과함’으로 죄를 짓는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배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마25:41-42). 어셔 대주교는 숨을 거두며 기도했다. “주여,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되, 특별히 내가 하지 않음으로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하소서”.
2. “죄”는 엄청난 도덕적 질병의 근원과 원천이다.
인간의 죄악됨은 밖으로부터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 비롯되었다.
어렸을 때 교육을 잘못 받아서가 아니다. 나쁜 친구들이나 그릇된 본보기에서 기인한 것도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죄는 우리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로부터 물려받은 유전병과도 같다. 우리 모두는 이 병을 가지고 태어난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져 죄가 없고 의로웠던 우리의 첫 조상이 원래의 의에서 떨어져 죄로 가득하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남자와 여자는 타락한 아담과 하와의 형상을 따라 태어나고, 악을 향해 치닫는 본성과 마음을 물려 받는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롬5:12),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요3:6),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3),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롬8:7),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이다(막7:21).
갓 태어난 천진난만한 아기도 “천사” 같다고 하지만, 어린 “죄인”에 지나지 않는다.
그 키와 생각이 자라감에 따라, 그 속에 속임과 악한 성향, 이기심, 방자함, 완고함, 탐욕, 시기, 질투, 정욕의 싹과 조짐을 보게 될 것이다. 모든 죄의 첫 번째 원인은 그 아이의 타락한 본성 때문이지 결코 학교나 친구 때문이 아니다.
3. “죄”의 정도에 대해 오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인간에게 있는 이 엄청난 도덕적 질병인 “죄”의 정도에 대해 오해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성경만이 죄의 정도에 대한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본성적으로 “항상 악할 뿐”이다(창6:5).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다(렘17:9).
죄는 우리의 모든 도덕적 성향과 지적 기능에 창궐한 질병이다. 사고와 정서, 추론의 능력과 의지가 어떤 식으로든 죄로 오염되었다. 양심조차도 확실한 안내자로 의지하기에는 너무나 어두워져 있다. 성령의 조명을 받지 않는다면 양심 역시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뿐이다. 요컨대,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다”(사1:6).
공손함과 예의 바름, 점잖은 매너, 단정한 몸가짐, 교양 등과 같은 얄팍한 덮게로 죄라는 질병을 가릴 수는 있지만, 죄는 이미 성향과 체질에까지 깊이 전이되어 있다.
물론 인간에게는 많은 위대하고 고상한 기능들이 여전히 남아 있어서, 예술과 과학과 문학 등에서 엄청난 능력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하지만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죽어서”,
그에게 하나님을 향한 본성적 지식과 사랑과 경외함이 없다.
인간은 훼파된 성전과도 같아서, 한때 하나님께서 거하셨던 장엄함을 흔적으로만 갖고 있을 뿐이다. 원죄와 타락의 끔직한 결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만이 인간이 처한 복잡한 문제를 설명할 수 있다. 인간 타락의 균일성과 보편성으로 인해 도무지 풀리지 않는 엄청난 “불신앙의 어려움”이 초래된 것이다.
회심하여 성령의 주권 아래 있는 사람도 여전히 그 속에 완고함이 있는 것을 보면, 죄의 정도와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성공회 신앙고백 제9조,
“오염된 본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심지어 중생한 자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육신 장막이 무너질 때까지는 결코 그것을 완전히 없앨 수 없다. 물론 죄는 더 이상 신자의 마음을 지배하지 못한다. 새로운 은혜의 원리에서 비롯된 넘치는 능력이 죄를 억제하고 다스리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다. 신자의 삶은 실패의 삶이 아니라 승리의 삶이다.
하지만 신자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계속되는 몸부림, 매일의 사투, 속사람을 지키기 위한 빈틈없는 경계, 영과 육의 싸움, 자신만이 아는 내면의 ‘탄식’ 같은 모든 것들이, 바로 죄가 얼마나 거대한 능력과 끈질긴 생명력을 가졌는지를 보여준다.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여전히 살아서 역사하는 저 원수는 과연 힘이 세고 강한 놈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사람은 복이 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뻐하지만 육체를 신뢰하지는 않는다.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서도,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기를 결코 잊지 않는다.
4. 죄책과 죄의 악독함과 무례함이 하나님의 목전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실감할 수 없다.
본질상 유한한 인간은 자신이 맞닥뜨려야 할 거룩하고 온전하신 분의 목전에서 죄의 악독함이 어떻게 드러나는지 실감할 길이 없다. 하나님은 “그의 천사라도 미련하다”고 하시며(욥4:18), “하늘이라도 그가 보기에 부정하며”(욥15:15), 행실뿐 아니라 중심의 생각과 동기를 감찰하시고,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는” 분이다(시51:6).
반면에, 죄 가운데 태어나 끊임없는 불완전과 우둔함으로 죄인들과 더불어 살다가 이내 사라질 피조물인 우리가 죄악의 무시무시함에 대해 이해해 본들 그것은 너무나 불완전할 뿐이다. 우리는 죄를 헤아릴 수도, 측량할 수도 없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그리고 그분의 대속과 속죄에 대한 성경의 모든 가르침이야말로, 인간의 죄악됨에 대한 결정적이고도 분명한 증거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보혈로만 온전히 값을 치룰 수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의 죄책은 끔찍하리만큼 사악한 것임에 틀림없다.
5. 우리는 죄의 기만성을 간과하기 쉽다.
죄를 대할 때, 우리는 실제 하나님의 목전에 드러난 죄의 모습보다 한사코 덜 심각하고 덜 위험한 것으로 보려고 한다. 죄를 과소평가하여 변명하고, 죄책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죄는 가롯 유다처럼 부드러운 입맞춤으로 찾아온다. 요압과 같이 두 팔을 벌리며 아첨하는 말로 다가온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실과는 하와의 눈에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까지 했지만, 이 실과 때문에 그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야 했다. 궁전 지붕에서 한가롭게 거니는 것이 다윗에게는 그리 위험해 보이지 않았지만, 그 뒤로 간음과 살인이 따라 들어왔다.
처음부터 죄가 죄로 드러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깨어 기도하자. 사악함에 세련된 이름을 붙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목전에 드러나는 그 본질과 성향까지 바꿀 수는 없다. 사도 바울의 말을 기억하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의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3:13). “선하신 주님, 세상과 육체와 마귀의 속임수로부터 우리를 구하소서.” 우리는 이 지혜로운 기도를 항상 되뇌어야 한다.
빛에 이를수록 더 많은 죄악을 보게 되고, 천국에 가까울수록 더욱 겸손해지기 마련이다.
교회사의 위인들을 연구해 보면, 브래드퍼드나 러더퍼드, 맥체인 같은 탁월한 성도들은 항상 가장 겸손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은혜의 복음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감사해야 하는지요.
아무리 죄가 넘쳐 난다 해도, 은혜는 더욱더 넘쳐 난다. 그렇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참여하신 영원한 구속의 언약을 통해서 은혜가 넘쳐 난다. 의롭고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언약의 중보자를 통해서 넘쳐 난다.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신 그분의 공로를 통해서 넘쳐 난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의 대표자로서 드리는 끊임없는 중보기도를 통해서 넘쳐 난다.
자기 백성의 마음에 보내셔서 그들을 새롭게 하시고, 성결하게 하시고, 옛것은 다 지나가게 하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넘쳐 난다.
죄를 죄대로 보면 참으로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볼 수만 있다면 누구도 낙망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다.
저 옛날 청교도인 존 플라벨이 그의 탁월한 저서 ‘생명의 샘’에서 많은 장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송축합니다”라는 감동적인 송영으로 마무리한 것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이 죄의 주제를 좀더 분명하고 철저히 다룬 책을 보기 원하는 사람은, 존 오웬, 엔서니 버제스, 스테판 차녹, 맨턴, 그리고 다른 청교도 거성들이 쓴 체험 신학의 걸작들을 보시기 바란다. 이런 주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 그 누구도 청교도에 비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죄 교리에서 오늘날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는 몇 가지 실천적 지침들을 제시한다.
1) 죄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우리 시대에 만연하는 모호하고 흐릿하고 막연하고 몽롱한 신학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고, 은혜에 대해 가르치고, 믿음과 회개와 거룩에 대해 가르치기는 하지만, 성경에 있는 “그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그 가르침은 성경에 부합하지도 않고, 합당하지도 않다. 휴라티머의 말대로 “뒤범벅”의 일종으로 선한 것이 없다.
이런 그릇된 신앙을 고치고 회복할 수 있는 가장 합당한 길은, 죄의 죄악됨에 대한 성경의 옛 가르침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지옥의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까지는, 결코 천국을 향해 결연히 돌아서지 않을 것이며, 순례자로 이 땅을 살아가지도 않을 것이다.
유치원에서든, 중고등학교에서든, 대학교에서든, 죄에 대한 성경의 옛 가르침을 힘써 회복해야 한다. “사람이 율법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이며(딤전1:8),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롬3:20,
율법의 요구들을 앞세워 사람이 귀 기울이게 해야 한다. 십계명의 뜻을 자세히 풀고 분명히 밝혀서 그 계명들이 요구하는 바, 그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나타내야 한다.
산상수훈에서 우리 주님이 취하셨던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죄에 대한 철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잠시 예수께로 나아와 그분을 따르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내 그 자리를 떠나 세상으로 돌아가고 만다.
2) 죄에 대한 성경적 이해는 요즘 유행하는 터무니 없이 관용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신학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교리와 신조를 거부하고 신앙의 모든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현대 사조의 경향이다. 한마디로 모든 것이 진리이고, 틀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두가 옳고, 잘못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멸망 받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고, 모두가 구원에 이를 것 같다!
그리스도의 대속과 속죄, 마귀의 인격성, 성경의 기적, 미래에 있을 심판의 영원성과 실재성 같이 중요한 신앙의 주춧돌이, 현대 과학과 보조를 같이 하기에는 너무나 거추장스러운 것처럼 여겨져, 기독교라는 배 밖으로 내던져지고 있다. 이 위대한 진리를 편들기라도 하면, 여러분은 이내 편협하고, 교양 없고, 시대에 뒤떨어진 신학적 골동품 정도로 취급받을 것이다! 성경을 한 구절이라도 인용해 보라. 유대인의 책 한 군에 모든 진리가 다 들어 있는 것은 아니며, 성경이 완성된 이후로도 많은 새로운 발견들이 계속되어 왔다고 반박할 것이다!
죄의 본질, 죄의 실재성, 죄의 악독함, 죄의 권세, 그리고 죄책에 대해 쉬지 않고 언급하는 것만이, 현대의 이런 역병에 대한 처방이다.
3) 영국 전역을 홍수처럼 휩쓸며 많은 것들을 쓸어가 버린 감각적이고 의식적이고 형식적인 기독교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책 또한 죄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
양심이 온전히 일깨워지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와 같은 신앙 체계가 다소 매력적일 수 있다.
하지만 일단 우리의 양심에 각성이 일어나면, 우리는 오감에 호소하는 의식적인 기독교만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된다.
자연적 상태에 있는 사람은 음악, 꽃, 촛불, 향, 종교적 기치, 행진, 아름다운 예복, 신앙고백문, 그리고 인위적인 반(半)가톨릭적 의식만으로도 충분히 의미를 찾지만, 일단 “죽은 자들 가운데서 깨어 살아난” 사람은 그런 것들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허망한 종교적 행위로 시간을 허비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사람들이 죄의 본질과 악독함과 죄악됨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완전하고 분명히 알았다면, 지난 사반세기 동안에 생겨난 반(半)가톨릭적 교회들의 5분의 4는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4) 요즘 회자되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지나치게 주장하는 이론들에 대한 해결책도 죄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서 가능하다.
우리가 몸을 입고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완전에 이를 수 있음을 암시하는 구절은 성경에 단 한 구절도 없다. 성공회 종교강령 19조는 말한다.
“그리스도만이 죄가 없으시고, 우리 모두는 비록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고 거듭났다 할지라도 많을 일에서 죄를 범한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 죄가 없다고 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자요 진리가 우리 속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가장 탁월한 행위조차도 불완전하다. 우리는 마땅히 사랑해야 할 만큼 우리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마땅히 경외해야 할 만큼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않는다. 기도할 때조차도 불완전한 것 투성이이다. 나누고, 용서하고, 믿고, 희망하고,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도 그렇다. 생각이나 말이나 행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마귀와 세상과 육체에 대해도 싸워야 할 만큼 싸우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불완전한 상태를 솔직히 고백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한다.
5) 오늘날 교회에 만연한 개인의 거룩에 대한 저급한 견해에 대한 좋은 해결책은 죄에 대한 성경적 이해이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의 수준이 점점 무너져 내리고 있다.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비와 양선, 이타성과 온유함, 친절함, 자기부인, 선량함,
선을 위한 열심, 세상과의 분리 등은 마땅히 환영받아야 할 만큼 환영받지 못하고 있고, 우리 조상들의 시대에 비해 평가절하되고 있는 현실이다.
좁고 깊었던 길이 넓고 얕은 길이 되어 버렸다. 겉으로는 많은 사람을 얻었지만, 질적으로는 많은 것을 잃은 것이다. 지난 사반세기 동안 엄청난 부의 증가로 세속성과 방종, 안락함에 대한 추구가 만연하게 되었다. 한때 사치로 여겨지던 것이 지금은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없어서는 안될 것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자기부인과 “고난 받는” 것은 낯선 것이 되어 버렸다(딤후2:3).
우리의 관심이 분산되고 영적인 삶은 점점 힘을 잃어 가고 있다. 정통 교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주하여 매일의 경건생활을 소홀히 했다. 지난 수년 동안 신자들의 개인적 거룩의 표준은 우리 조상들의 때보다 더 낮아졌고, 이로 인해 성령께서 근심하신다!
이런 모든 상황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겸손과 성찰이다.
이 상황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은 죄의 본질과 죄악됨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적인 삶을 회복하기 위해 이집트로 다시 돌아갈 필요도 없고, 로마 가톨릭적인 의식을 빌려 오지 않아도 된다. 참회 제도를 다시 회복시킬 필요도 없고, 수도원주의나 금욕주의로 돌아갈 필요도 없다. 그런 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는 순수하게 회개하고 가장 우선적으로 할 일을 해야 한다. 첫 번째 원리인 “옛길”로 돌이켜야 한다(렘6:16). 하나님 앞에 겸손히 자리하고, 하나님 목전에서 죄가 무엇인지 봐야 한다. 주님께서 무엇을 죄라고 하시는지, 무엇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시는지 잘 살펴보아야 한다(요7:17). 그러고 나서 부주의하고 안이하게 세상적인 삶을 영위하면서도, 동시에 복음주의 교인이라 자처하며 복음주의 원리들을 주장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일단 죄가 우리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악하고, 훨씬 더 우리에게 가까이 있고, 우리에게 착 달라붙어 있음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로 더 가까이 나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법을 더 온전히 배우게 될 것이다(갈2:20). 우리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많이 용서받은 만큼 더 많이 사랑하게 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을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3:18).
우리가 높이 지여져 가려면 반드시 먼저 낮아져야 한다.
더 높은 표준의 거룩에 이르는 첫 걸음은, 죄의 엄청난 죄악됨을 더 철저하게 깨닫는 것이다.
- 존 라일, 『거룩』, 1장 죄. pp 41-66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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